파주시 탄현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있다. 과거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에 전쟁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오고 그 바탕 위에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
히 기도하는 성당이다. 성당의 이름은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지었다고 한다.
성당 안에는 북한의 성당들을 종이에 먹펜으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그림들을
사진 찍었기에 안내문(요약)과 함께 소개한다.
11. 북청본당(1935년 함흥교구) - 조명혜, 종이에 먹펜, 34×52cm, 2014
북청본당은 1935년에 설립되었다. 덕원수도원 목공 수사들이 만든 목조 종탑이 매우 독특하
다. 이는 남부 독일 오버바이에른 농촌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탑 형태로, 덕원수도원 수
사들이 독일 목조건축의 전통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성당은 오틸리아 성녀에게 봉헌되었는데 제대에 성녀의 유해가 안치되었다. 성녀의 유해
는 1934년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가 독일에서 덕원수도원으로 파견될 때 가지고 온 것이다.
성당 왼쪽 건물은 1936년에 설립된 북천 해성학교다.
12.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1928년 함경남도 덕원)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1928년에 완공된 덕원수도원은 오딜리아 연합회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으로 손꼽혔
다. 중세 독일의 히르사우 수도원을 모델로 삼아 지어진 덕원수도원은 동아시아의 서양 근대
건축분야에서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13. 고산성당(1937년 덕원 자치구 수도원구) - 조명혜,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1914년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안변군 고산에 기차역이 설치되었다. 역 주변은 신고산이
라 불리면서 교통의 요지로 급격하게 발전했고 역에서 6km 떨어진 기존 마을은 구고산이 되
었다. 1930년 내평본당이 인근으로 이전하였고 고산본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그림은 1
937년 완공된 고산본당의 모습이다.
당시 고산 주민 6,000명 가운데 신자는 600명이었다. 성당 옆으로 사제관과 룻찡 포교 베네
딕도 수도원 원산수녀원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운영한 해성유치원 건물이 보인다.
14. 성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수도원(1911년 서울)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1909년 독일 샹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파견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세운 서울 백동수도
원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공동체이다. 수도공동체는 1913년에 아빠스좌 수도원
으로 승격되었다. 이 그림은 북쪽에서 바라본 서울 백동수도원 전경이다. 왼쪽이 동소문(혜
화동)이고, 성벽과 이어진 오른쪽 언덕에 수도원 본관이 보인다.
동소문 안 낙산 기슭에 자리 잡은 베네딕도 회원들은 숭신학교와 승공학교를 세워 교육사업
을 시작하였다. 1927년 수도공동체는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하였고, 서울 백동수도원 자리
에는 백동본당(현 혜화동본당)과 서울 대목구 대신학교가 들어섰다.
15. 옛 비현성당(1911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신의주시 남단 용천군과 맞붙어 있는 평북 의주군 비현면에 평양교구 비현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림을 보면 긴 전통 한옥이 보이고 그 앞에 종탑이 세워져 있다. 종탑이 한옥 지붕
에 올려 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 한옥 성당은 규모가 작아 마당에 따로 가설 구조물을 쌓
아 종탑을 세웠다.
1935년 무렵 본당 신자 3,000여 명에 남녀 전교사 10여 명, 공소 공동체 20곳이나 될 정도
로 큰 본당 공동체가 된다. 1936년 인근에 운향시본당을 분가하면서 공동체는 1,500여 명으
로 줄어들었지만 비현본당은 해가 갈수록 그 열성과 전교가 깊이를 더해갔다.
16. 성 베네딕도회 연길수도원(1933년 연길 대목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4
1927년 연길 지목구가 원산 대목구에서 분리 설정되면서 북간도에 파견된 베네딕도 회원들
은 덕원수도원과 별도로 독자적인 선교활동을 벌여나갔다. 연길수도원은 1934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1937년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된 직후에 주교성 성식을 위하
여 새 수도원 성당이 지어졌다. 이 그림은 연길수도원 본관 건물이다.
17. 성 베네딕도회 덕원신학교(1928년 함경남도 덕원)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1921년 서울 백동수도원 안에 설립된 원산 대목구 소신학교는 수도공동체와 함께 1927년에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했다. 이전 당시 신학교 건물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고 건축공
사는 1928년 여름에 마무리되었다. 신학교는 수도원에서 200m가량 떨어져 있었다. 2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중앙 본관과 양 날개로 이루어진 H자 형이었다.
네덜란드의 성 베드로 사업기금에서 원조를 받아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 빌리브로드를 신학교의 주보성인으로 삼았다. 원산, 연길, 평양 대목구 사
제성소의 요람이었던 덕원신학교는 1938년에 발생한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다시 복구되
는 불운을 겪었다. 이 그림은 화재 이전의 신학교 모습이다.
18. 영유성당(1926년 평양교구) - 조명혜,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현 평원면) 이화리에 성당이 세워진 건 1925년의 일이다. 성 파트
리치오를 수호성인으로 한 영유성당은 성당뿐 아니라 사제관, 영청학교 등이 두루 갖춰져 미
국에서 선교사들이 파견되면 우리말과 풍습, 문화를 익히는 도량이 되었다. 영유성당에는 또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로 썼던 수녀원이 지어져 1926년에 7, 8명의 회원들이 상주하며 전
교활동과 함께 고아원, 이약소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빈민구제에도 힘썼다.
1895년 ‘영유의 사도’ 조상순(로베르토)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어 1902년 본당으로 설
정되고 1937년이 되면 신자 수만 1,500여 명에 이르는 큰 공동체로 성장하며 아름다운 복음
화의 꽃을 피웠다. 하지만 1945년 공산화 이후 박해 속에서 쇠락하다 1949년 12월 11일
15대 주임 홍도근 신부가 북측 내무서원에 연행되어 수난의 길을 걷게 되면서 침묵의 교회
가 되었다.
19. 서포 메리놀센터(1931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평양 외곽 서포(西浦)는 화전에서 비롯된 가난한 농촌이었다. 그러나 1927년 3월 평양지목
구가 설정되면서 상황이 초대 지목구장으로 부임한 번주교는 교구 본부를 설치하고자 대지
를 물색하던 중 서포에 주목하고 넓은 토지를 사들여 공사를 시작해 1931년 3월 교구 본부
가 완공된다.
지금도 평양교구민들의 고향 같은 평양교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서포 메리놀센터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 미국 선교사제들이 추방되면서 영원한 도움
의 성모 수도회에 넘어가 수도원 본원이 된다. 메리놀센터 부지에는 현재 라틴어가 쓰인 초
석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0. 중화성당(1934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중화에 성당이 세워진 건 1934년 11월이었다. 본당 설립과 함께 1,000여 평의 성당 부지를
확보한 공동체는 1932년 2대 주임 발터 콜만 신부가 성당 신축에 들어가 2년 뒤 500여 명이
한꺼번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당을 신축한다. 성당 전면부 왼쪽에 종탑을 세운 점도 특
이하다.
중화본당 공동체는 교구내 가톨릭운동연맹 지회를 조직해 문맹 퇴치와 주일학교 교육에 힘
을 쏟았으며, 성심유치원을 세워 유아교육에도 헌신하였다. 이 공동체 역시 평양교구 주교관
에서 요양을 하던 장두봉 신부가 일시 사목을 맡았다가 1949년 12월 12일 체포된 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21. 참회와속죄의성당
파주 탄현에 세워진 참회와속죄의성당은 신의주 ‘진사동성당’의 외형적인 모습을 복원하였
고,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 대성전 실내 형태를 기본구조로 삼아 건축되었
다. 성당 내부 모자이크 작품은 남쪽 작가들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북한의 공훈작가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함으로써 남북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의 성전이라는 의미를 더해주고 있
다.
22. 신의주 진사동 성당
23. 지금의 ‘참회와속죄의성당’ 모습(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