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35년) - 고려 인종의 개혁정치
-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정
치를 추진하였다.
-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짐
- 그 결과 정치개혁과 대외관계에 대한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사상과 시대적 유교사상 그리
고 신라,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의견 대립이 문벌귀족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간의 갈등으로까지 확
대되었던 것이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의견대립
서경파(중심인물 - 묘청) : 풍수지리설을 내새워 서경(오늘날의 서울)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귀족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서경에 대화궁이라
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개경파(중심인물 - 김부식) : 유교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 민생안정을 내세
워 금과의 사대관계를 맺었다.
결과
서경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은 국호는 대위국, 연호는 천개라 하며 을 일으켰으나
-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됨
핵심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문벌귀족(대표적인 문벌가문 경원 이씨 - 대표인물 이자겸, 해주 최씨 대표인물
최충, 경주 김씨 - 대표인물 김부식, 파평 윤씨 -대표인물 윤관, 그외에 유명한 인물로는 서희와 강감찬
이 이에 해당..)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왕권 강화와 북벌정책등을 의도하였던 묘청, 정지상을
몰아내려고 함 (참고로 문신의 최고 합좌기구인 도병마사가 무신들의 합좌기구인 중방보다 우위였고,
아울러 문신들은 고위 무관직을 겸직하고, 군대의 최고 지휘 통솔권은 문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들은 모두 문신이었다. - 즉, 김부식이 직접 군사를 몰아 묘청을 쳤음)
이후 금과 사대 관계를 맺고, 북벌정책은 사실상 중단 되었으며, 고려 문화는 고구려 계승 의식에서 신
라계승 의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는 김부식외 11명이 집필한 (역시 개경파 보수파들이 중심이 된)
"삼국사기" 에서 나타난다.
삼국사기의 사관은 다음과 같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 를 기본으로 "유교적인" 문신귀족의
입장에서 유교적 도덕사관 및 합리주의 사관을 토대로 고대의 우리 역사를 기전체로 정리하였다.
우리의 토풍(土風)을 그대로 인정하여, 신라 고유왕명(거서간, 차차웅)과 관명(이벌찬) 등을 직서하였
꼬, 삼국을 본기라는 명칭과 즉위년칭년법을 사용하였다.
- 그. 러. 나
신라계승의식이 강조되어 고조선, 삼한 등이 존재한 것을 알면서도 이를 삭제하였고, 본기는 삼국에 공
평히 안배하였지만, 지와 열전에서 신라사 중심이다.
부족설화, 불교 설화와 같은 전통적 생활 체험이 담긴 기층공동체의 체험을 유교적 사관에 맞게 고치거
나 탈락시켜 고대문화 전체의 내용을 빈약하게 만들었다.
즉,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신라 계승의식으로 바꾼 계기가 된것이다!
이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1925년 동아일보에 "조선 역사상 일천래 제일 대사건" 이란 글을 게제합니
다. 이 부분은 자세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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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일천래 제일 대사건" 중 일부 발췌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나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은 무슨 사건에 원인하는
것인가 ......
나는 한마디 말로 화답하여 말하기를 고려 인종 13년 서경천도운동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
인으로 생각한다. ------
묘청의 천도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왕의 스승, 주로 스님)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말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郎家-진취적 기상을 가진 나라 또는 집단)와 불교 양가" 대 "유교" 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운동에서 묘청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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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묘청이 일으킨 서경천도운동의 이면에는 낭, 불, 유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묘청의 실패는
낭, 불 양가는 패배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가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이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함으로써 후대엔 일본에 지배당하고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사대적, 유
교적인 사관과 일제 식민지 사관이 혼합된 국사책으로 교육 받았고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알고 지나가
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가 배웠던 국사
책에 제대로된 진실이 몇%나 들어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들더군요..
운영자님들....
한민족 10대 위인 방에...
저 개경파였던... 서희를 무슨 대장군인냥 미화한 글이 버젓히 올라와 있더군요. 현재의 교과서를 보세
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과 서희의 강동 6주 탈환중 무엇이 더 비중있게 쓰여 있는지...
게다가 묘청의 "난" 으로 비하하고 있습니다..
서희같은 보수, 개경파, 유교주의자가 "발해를 멸망시킨" (926년 거란에게 멸망 - 이 후 만주벌판을 호령
했던 한민족은 영영 ....)
거란족과 타협한 결과물인 강동 6주...
즉, 윗 글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개경파가 묘청등을 제거 함으로써 더욱더 세력을 공고히 다져
북진정책이 중단되게 됩니다. 즉, 이 시기 국내외 정세를 보면
북진정책을 중단하는 댓가로 강동 6주를 받았다는 사실이 거의 확실한데...
어떻게 이 까페에서 한민족 10대 위인방에 서희같은 인물이 미화되어 올라와 있는지....
빠른 시일내에 이에 대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서희에 관련해서 그가 한민족 10대 위인방에 들어갈
인물인지...)
몇 달동안 눈팅만 하다 처음 글을 올렸습니다.. ^^; 앞으로 꾸준히 활동 하겠습니다..
첫댓글 님! 연사에의하면 김부식이 지은책은 해동사입니다. 우리카페 운영진은 삼국사기는 이조태종이방원이가 조작해서 김부식명의로 가필한 조작사로 판단합니다. 김부식은 고려중기인물이고 고려중기에 유교는 없었어요. 김부식이나 서희등은 문무를 겸한장수들이지 문인이 아닙니다. 한단계 넘어서시면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우리카페에서는 조선은 원래조선인 단조선만 조선이라하고 그외에는 기씨,위씨,이씨조선이라고하니 바른역사용어를 사용해주세요. 왜곡용어사용하시면 안됩니다. 우리한민족참역사는 정통역사 사이트라는점을 인식하시고, 규정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아! 짜증나...
서경은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 평양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