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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동방예의지국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일본이 가장 예절바른 나라로 불린다. 둘째는 장인정신이다. 장인을 귀하게 존중하는 분위기와 한 가지 직업을 대를 이어 세습하는 그들의 전통이 그것이다. 셋째는 도자기 문화이다. 넷째는 기록문화이다. 그중 기록문화는 세계제일이다. 일본여행 때 보면 관광버스 기사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공책에 뭔가를 꼭 적는다. 출발시간과 도착시간, 주행거리, 특이사항 등을 기록한다. 운행일지이다. 사찰에서도 종무일지와 지객일지를 비치해두고 방문객들의 신상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심지어는 법당 재 지내는 영가단에 사진 위패 곁에 볼펜과 메모지 시계가 함께 놓여있다. 재 주가 몇시에 나를 찾아와서 무슨 경전을 읽어주는지 영가들도 기록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평가받는 금강조를 보면 일본의 기록문화를 볼 수 있다. 금강조 초대 ‘금강중광’이 성덕태자와 약속한 문서로부터 시작하여 39대를 이어오는 금강가문의 족보와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천왕사의 기록이다. 투입된 인원, 재정, 보수기간이 그림과 사진을 덧붙여 자세히 전해진다. 서기 586년 오사카 사천왕사에서 창업했으니 금년 1428년째를 맞이하는 셈이다. 지난 95년 고베 대지진으로 도시가 무너졌을 때에도 금강조에서 건축한 사찰 계광원은 대지진을 견뎌냈다. 금강조의 39대 사장 ‘금강이융’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 그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욕먹으면 안되죠. 그래서 사찰 건립과 보수작업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의 대답이다. 그들은 39대 1400년을 내려오면서도 장인정신과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다. 1400년을 이어온 금강조에도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사찰건축이 중단되어 종업원 월급을 줄 수 없게 되었다. 37대 ‘금강치일’은 소복을 입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사천왕사에 있는 조상묘를 찾았다. “지금까지 36대 1300년간 조상님들이 성덕태자와의 약속을 잘 지켜 회사를 이끌어 왔으나 저희 대에 와서 회사는 망했습니다. 가업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조상님 앞에 죽음으로써 참회하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에 아내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복자살 하였다. 남편의 49재를 마친 ‘금강치일’의 부인 ‘금강요시에’는 소복을 입고 사천왕사 주지를 찾아갔다. 그녀는 주지스님께 애원하였다. 지난 1300년간 금강조가 사천왕사를 위해 일해 왔으나 전쟁으로 망하게 되었으니 일감을 달라고 하였다. 애원의 결과로 얻은 일감이 태풍으로 무너진 오층탑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요시에 부인은 소복을 입은 채 11년간 공사를 진두지휘 하였다. 사천왕사 오층탑은 1945년 3월 23일 완공되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요시에 부인의 사진이 오사카의 일간지에 '장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사천왕사 오층탑은 37대 '금가치일'이 목숨을 내좋고 얻어낸 귀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금강조의 1400년을 이어온 기업정신은 기본에 충실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더욱 신경을 쓴다. 수입이 천억을 넘지않게 회사를 키우지 않는다. 사장은 현장이 어디든 반드시 가서 직접 확인한다. 백제의 후손 금강은 일본으로 흘러가서 세계적인 장인정신과 아름다운 기업문화를 만들었다.
보성 대원사 현장스님 카카오스토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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