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도루묵
요 21:1~3
<도루묵의 진실>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대자보 한 장이 나붙었습니다.
거기에는 95개 조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붙인 대자보였습니다.
내용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자보를 신호탄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쳤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입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구교’ ‘신교’로 나뉘었습니다.
이 무렵 동남아시아에 있는 조선 땅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될 때 조선 임금은 12대 인종입니다.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인명선~ 인종, 명종, 선조~ 바로 그 시대입니다.
이 무렵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시인 이름이 이식(李植 1584 ~1647)입니다.
널리 알려진 시인은 아닙니다마는, 오늘 설교에서 왜 이 분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이식이라는 시인의 시 한편 때문입니다.
그가 남긴 시 중에서 제목이 「환목어(還目魚)」라는 시가 있습니다.
목어는 눈 ‘목’자에 고기 ‘어’자를 쓴 물고기 이름입니다.
환목어는 우리나라 강원도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입니다.
솔직히 맛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 이식이 「환목어」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라에 변고가 생겨 임금이 동해안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임금이 동해안에서 수라상을 받았는데 반찬으로 ‘목어’라는 물고기 요리가 올라왔어요!
임금이 목어 요리를 먹어보니,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왕이 “이 고기 이름이 뭔고?” 하고 물었습니다. 신하가 대답합니다. “목어라고 하옵니다!”
“이렇게 맛좋은 생선 이름이 목어라니, 앞으로는 목어라 하지 말고 은어라 불러라!”
목어가 그 자리에서 은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난리가 평정되고 왕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은 피난 시절 먹었던 은어가 생각 났습니다. 궁궐 안에서 다시 먹어봅니다.
배고플 때 먹었던 목어, 그때 그 맛이 아닙니다. 이미 배가 불렀거든요!
그래서 왕이 뭐라고 합니까? “도로 목어라 해라!” 그래서 ‘도로목’입니다.
“도로목”이 한글의 변천에 따라 “도루묵”이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할렐루야~
<말짱 도루묵>
도루묵 세 글자 앞에는 ‘말짱’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기껏, 애쓰고 정성들여서 잘 가꾸어 놓았는데, 헛수고가 되었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많습니다.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
“흰 개 꼬리 삼 년에 도로 흰 개 꼬리다!”
몸통은 검은데 꼬리끄트머리가 히끗히끗합니다. 보기가 싫었나봅니다.
주인이 개 꼬리를 매일 굴뚝에서 나오는 끄으름으로 검게 칠을 했습니다.
삼년 간 공을 들였지만, 비를 맞으면 도로 흰 색입니다.
“말짱 도루묵이다!”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 “흰 개 꼬리 삼년에 도로 흰 개 꼬리다!”
요한복음 21장 3절을 읽을 때마다 저는 이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지 한번 읽어볼까요?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우르르 따라나섭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3년 전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물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고기를 잡는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말씀합니다.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고기잡는 어부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에 감동을 받은 청년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병고침, 귀신 축사,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도 현장에서 체험했습니다.
더구나 요 며칠 사이에는 어떤 경험을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었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이 부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못자국 창자국을 고스란히 지닌채 제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가기 전까지 부활하신 예수님과 3번이나 만났습니다.
그랬으면, 열한 제자는 그야말로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변했어야 맞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미 고백까지 했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도마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1:28)
이렇게 고백했고, 부활하신 주님도 직접 만났습니다.
이쯤 되면, 열한 제자는 ‘사람 낚는 어부’로 거듭났어야 맞지 않습니까?
여기서 한국 속담이 또 하나 생각납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사람의 인성은 태어난지 3년 안에 결정이 난다고 합니다.
그때 결정된 인격이 평생을 갑니다.
☞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은 부모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랍비가 되묻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부모가 대답합니다. “석 달 되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데리고 가십시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진리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고 있는 청년들을 고쳐 쓰려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도 사람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못자국 창자국을 보여주었지만,
제자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깃배 타고 그물 던지던 3년,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 말짱 도루묵이 되었습니다.
☞ 예수님은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까지 보면 그렇습니다.
<부부간에 고쳐 쓰기>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고기 이름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피난지에서 먹어본 도루묵,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어라 하라!” 고쳤습니다.
궁궐로 돌아와 다시 먹어보니, 광어 도다리 회에 비하면 못 먹어요!
“다시 목어라고 해라!” 도루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교훈입니다.
남녀가 결혼하고 부부가 되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어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전도하려고 교회에 나오라고 권했습니다.
그 분과 한 시간 가까이 진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자기 누님이 아주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답니다. 결혼을 했는데 매형은 골수 불교신자였대요!
이들 부부가 결혼 생활 30년 내내 종교 문제로 치열하게 싸웠답니다.
서로 양보를 안 했답니다. 그런 중에도 자녀들은 의사로 키웠다고 해요!
누님과 매형이 30년 동안 기독교 불교,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 뭘까요?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의 화목이다.”
그 부부는 30년 싸우다가 서로 포기하기로 했답니다.
누님은 교회 끊고, 매형은 절 끊었답니다. 그 이후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누님과 매형 얘기를 왜 할까요?
“나 예수 믿을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에게 교회 얘기는 하지 마세요!”
이런 이웃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것이 맞을까요?
그리고 ‘이미 믿은 우리나 잘 믿고 살자!’ 이것이 옳습니까?
☞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 예수님이 만일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멈추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없습니다!
☞ 요한복음 21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맞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이 말이 틀립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고쳐서 쓰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고쳐 쓰시는 증거는 무엇입니다.
멀리 보면 열한 제자들이고, 가까이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고쳐졌는가?>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고쳐진 사람인가?” 무엇보다도,
“내가 예수 믿고 고침을 받았는가?” 이것을 점검하면 됩니다.
“나는 예수 믿음으로써 고쳐진 사람인가?”
예수 믿고 고쳐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할렐루야~
내가 예수 믿었는데, 나는 예수 믿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면 어찌됩니까?
☞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로 고치겠다” 해서 따라나섰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병자를 고치실 때, 죽은 자를 살리실 때,
그리고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실 때,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때,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 달려 죽으심도 바라봤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주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심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3번이나 만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람 고치기 힘이 듭니다.
목사로서 전도하다가 절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예수 믿을까?’
그때마다 저는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목사인 나는 고쳐진 사람인가?”
☞ 하나님은 사람을 고쳐서 쓰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고칠까요?
다음 주로 이어지는 요한복음 21장 설교에서 계속 될 것입니다. 기대하십시오!
오늘은 “텐션을 유지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텐션을 유지하라!>
‘텐션 tention’은 우리 말로 번역하면 긴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텐션이란 이런 겁니다.
어린 시절 활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대나무를 가다듬어 활을 만들어 쏘면서 놀기도 했습니다.
활을 만들려면 3가지가 필요합니다. 대나무, 시위, 화살,
대나무를 휘어서 시위를 팽팽하게 맵니다. 여기에 화살을 매겨 쏩니다.
활은 시위로 묶여 휘어져 있습니다. ‘탠션’이란 활을 잡아 당겨 묶어놓은 끈의 상태입니다.
만일 끈을 가위로 툭 자르면 휘어져 있던 활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대나무는 활로서 기능을 못합니다.
활이 제 기능을 하려면, 끈(시위)이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를 ‘텐션’이라고 합니다.
활과 시위 뿐 아니라 바이올린을 비롯한 현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이올린에는 현이 있습니다. 네 개의 줄입니다.
연주하지 않을 때는 현을 느슨하게 풀어놓습니다. 연주할 때는 팽팽하게 조율해야 합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는 느슨하게 보관했다가 연주할 때는 팽팽하게 조율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텐션이라고 합니다.
텐션상태가 되어야 아름다운 음악이 흐릅니다.
텐션 상태가 되어야 활 시위에 활을 매겨 과녁을 향해 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쓰실 때, 우리는 텐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느슨하게 축 늘어져 있으면, 음악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화살을 날려보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텐션 상태로 만드십니다.
우리가 고침을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서 쓰신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활시위처럼, 현악기의 줄과 활처럼, 텐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시려고 우리를 텐션 상태로 만드십니다.
3년만에 도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그들을 주님은 어떻게 조율하시는지,
주님은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말짱 도루묵’이 된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들을 ‘텐션 상태’로 조율하십니다. 요한복음 21절에서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의 조율을 받아서, 아름다운 화음을 내야 합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 과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야 합니다.
☞ 우리는 주님이 고쳐놓은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