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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
금당실 마을
'정감록' 자체에서 내린 십승지의 정의는 "세상에서 피신하기 가장 좋은 땅" 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신' 이란 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내우외환(內憂外患), 즉 외적의 침입은 물론 국내의 쿠데타 등 정변으로부터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십승지라고 하여 모두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단서조항이 붙기도 한다. 예컨대 예천 (醴泉) 금당실 (金塘室) 의 경우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고 했다. 예천 금당실은 오늘날 경북 예천군 용문면(龍門面) 상금곡리(上金谷里)를 가리킨다.
먼저 예천군을 살펴보면 이곳은 소백산 줄기가 북쪽을 막고 낙동강이 남쪽을 경계하는 천연의 요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낙동강 주변의 구릉을 따라 점촌에서 안동을 잇는 4차선의 34번 국도가 예천군을 동서로 횡단하고 영주와 군위를 잇는 28번 국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게 됐다. 여기에다 공항이 생기고 충북 단양을 잇는 저수령이 개통되면서 군청 소재지인 예천은 교통의 요지로 바뀌었다. 비결서가 말하는 '임금의 수레' 란 이같은 교통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예천읍의 배후에 자리한 용문면 금당실은 결코 피란지가 아니다. 예천읍에서 용문면은 승용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지형을 보면 분명 옛 사람들이 무엇을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먼저 금당실을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예천읍에서 두어 고개 넘자마자 눈앞에 전개되는 광활한 대지에 깜작 놀라게 마련이다. “예천군은 물론 경북 전체에서도 면 단위로 우리 동네만큼 넓은 곳은 없을 것이다. 상수원 보호구역이 되다 보니 공기도 맑아 사람살기는 최적의 상태"라고 이곳 토박이들은 자랑한다. 이곳 금당과 이웃한 맛질(대저. 하학. 능천리)이란 동네를 합하면 서울의 반은 된다는 것이 이 지방에 전해오는 말. 다만 서울과 비교해 부족한 것이 한강 같은 큰물이 가까이 없다는 점이다.
용문면 인구는 2천여 명. 이 중 반 가까운 인구 (5백戶)가 금당실에 모여 산다.
소백산이 저수령을 넘어 월악산으로 가는 중에 한 가지가 남으로 내려와 매봉이 되고 여기서 다시 네 개의 봉우리를 만들고 다섯 번 째 봉이 금당실의 주산이 됐다. 오미봉(五美峰)이 그것이다. 오미봉은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 금당 (金塘) 은 바로 이 연꽃이 피는 연못 자리다. 그래서 이곳 지형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 물 위에 뜬 연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장군이 이곳 지세를 보고 인물이 난다고 하여 오미봉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그 이후 인물이 별로 안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판. 검사는
다른 면에 비해 많이 배출 한다" 고 주민들은 말한다. 용문은 쌀이 남아돈다. 또 '예천마늘' 의 주산지다. 이처럼 '가난'을 모르는데다 인물까지 배출하는 곳이다. 뜻있는 사람은 후손을 위해 아직도 둥지를 틀 만한 곳이다
이 땅에 풍수로 유명한 촌락은 많다. 한국 풍수의 비조(鼻祖)인 도선국사가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입적한 광양의 도선국사마을(양산마을)을 비롯하여, 영남 4대 길지(하회·양동·내앞·닭실)와 호남 3대 명촌(구림·금안·무성), 그리고 쌍둥이마을, 박사마을, 장수마을, 십승지(十勝地)마을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 제일의 풍수촌(風水村)'으로 금당실(金塘室: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을 꼽는다. 금당실은 우리 고유 전통지리학의 『정감록』 '십승지' 모델과 『택리지』 '가거지(可居地)' 모델이 합쳐져 있는 예스럽고 소박한 멋을 지닌 촌락이다. 산·수·방위·인간을 풍수의 4대 요소라 할 때, 그들 요소 간의 음양 상배(相配)와 오행 상생(相生)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마을이다. 필자는 금당실의 살아 숨 쉬는 생기와 그 이면에 배어 있는 각별한 장소혼(魂)을 특히 높이 산다.
우리나라 '풍수답사 일번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금당실에는 풍수적 길기(吉氣)가 충만해 있다. 금당실(상금곡리)의 주산은 오미봉(五美峯)이다. 해발 205m 정상에 오미정(五美亭)이 있다. 그곳에 올라서면 다섯 가지의 아름다운 풍경(五景)을 맛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앞쪽 남쪽으로 둘, 뒤쪽 북쪽으로 둘, 옆 서쪽으로 하나 해서 도합 다섯 가지다. 그 첫째는 남쪽 아미산에 걸린 반달, 蛾眉半月이요, 둘째는 해 질 무렵 버들밭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柳田暮煙이며, 셋째는 뒤쪽 북쪽 선동으로 떠가는 아름다운 구름 ,仙洞歸雲이고, 넷째는 용문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 龍寺曉鐘이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서쪽 대수마을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 竹林淸風이다.
금당실의 용세는 무척 빼어나다. 태백산(太祖山)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소백산 도솔봉(中祖山)을 지나 저수령을 넘어 월악산으로 가는 중에 한 가지가 남으로 내려와 매봉(少祖山)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낙맥한 세 갈래 지맥 중 가운데 지맥(中出脈)이 금당실의 현무정(玄武頂)이자 주산인 오미봉까지 이어졌다. 특히 매봉에서 금곡분지를 향해 남쪽으로 내리뻗은 마지막 지맥은 네 개의 봉우리를 연이어 솟구쳐 놓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오미봉이라는 옹골찬 봉우리를 금곡평야와 접맥해 놓았다.
오미봉은 정말 알토란같은 봉우리다. 똘똘 뭉쳐진 기(氣) 덩어리다. 마을 안에 지석묘가 있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고는 하지만, 이 오미봉을 눈여겨 본 것은 15세기 초에 감천문(文)씨 집안이 이곳을 세거지로 삼았을 때가 처음이었을 듯싶다. 오미봉의 내맥(來脈)과 기의 응결 상태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풍수를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 양반이라야 그 진면목을 발견하고 그 터를 차지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금당실의 국세 역시 용세에 못지않게 빼어나다. 국세란, 혈장의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명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보여주는 세력의 변화와 조화를 말한다.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사(四神砂)와 그 주변에 솟은 낙산·탁산 같은 연분사(緣分砂)들이 얼마만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명당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금당실의 경우, 오미봉을 주산으로, 마을 동쪽,좌측의 망월봉에서 육녀봉으로 이어지는 지맥이 좌청룡이 되고, 서쪽, 우측의 국사봉 지맥이 우백호가 되며, 남쪽의 백마산 줄기는 안산(案山)이 되어 길격의 사신사 판국을 이룬다. 주산인 오미봉을 중심으로 좌우의 산맥들이 금당실(龍門面基)에 기운을 모아주는 형세다.
금당실 마을의 뒤를 지켜주고 있는 겹겹의 소백산 능선들과 오미봉의 아름다움은 그 터에 배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혼(魂)으로 인해 더욱 빛난다. 마을 북쪽을 횡축, 동서축으로 겹겹이 두른 소백산 골짝들은 국난기 때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해준 십승지 중의 하나였으며, 오미봉은 구한말 러시아가 전국적으로 '쇠 금(金)'자 땅이름을 가진 곳을 금광 채굴지로 집중 개발할 때도 주민들의 보살핌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지금까지 금당실 터의 지킴이로서, 또한 금당실을 상징하는 영물(靈物)로서 절대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오미봉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저 작고 아담하게 생긴 단순한 산봉우리가 아니다. 금당실 조상들의 혼이 스며있는 성소다. 예나 지금이나 삼백(백두·태백·소백)의 무량한 기운은 마을 북쪽 매봉 중심 용맥 흐름을 타고 일단 오미봉에 저장되었다가 마을 터 안으로 흘러든다. 금당실 선조들의 삶터 사랑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전통문화마을 조성사업으로 이어져 금당실을 더욱 명기(名基)답게 만들고 있다. '되는 집안' 따로 있듯이, '되는 마을'도 역시 금당실 같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금당실처럼 하천 상류에서 골짜기를 빠져 나온 물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은 터를 '계간취회(溪澗聚會)' 명당 또는 '이수합금(二水合襟)' 명당이라고 한다. 산이 아닌 하천줄기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진 형국 이름들이다. 보통 산줄기가 좌우로 옷깃처럼 놓이고 그 앞으로 물줄기가 허리띠처럼 두른 모습을 '산하금대(山河襟帶)'라고 일컫지만, 금당실은 두 가닥 물이 옷깃처럼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수합금'의 터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줄기,水勢의 합류는 금당실 터를 연화부수형이나 행주형과 같은 다양한 형국명으로 불리게 만든 바탕이 되기도 했다. '지기는 물을 만나야 더 이상 흐르지 않고[氣界水則止] 그 안쪽 명당에 축적된다'는 것은 불변의 풍수 논리다. 그래서 풍수 고전에서도 '풍수의 술법(風水之法)은 물을 얻는 것이 으뜸이요(得水爲上), 바람을 갈무리하는 것이 그 다음(藏風次之)이라'고 했다. 『택리지』에 나오는 '바닷가의 삶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海居不如江居), 강가의 삶은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江居不如溪居)'는 말이 있다.
금당실을 둘러싸고 있는 충적평야는 산간 계곡에 놓인 들판치고는 무척 넓은 편이다. 그러나 소백산 줄기 여러 골짝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여들어 가뭄이 들어도 여간해서는 하천이 마르지 않아 용문분지, 금곡분지 넓은 들판은 늘 안정된 생활을 견인할 수 있었다. 특히 야산의 계곡에 보와 저수지를 만든 후에는 '1년 농사를 지어 3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을은 풍요를 누렸다.
연화부수형 명당이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듯한 지세를 말한다. . 연화부수형은 금당실 마을 안에서 사방을 조망해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형국이다. 어느 방향으로 보든 모든 집들이 금곡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산들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정좌해 있는데, 그 배경이 되어 주는 반달형의 둥근 산들이 모두 연잎들이다. 비록 하천이 둥글게 마을을 환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가운데 사방의 산들이 마을 터를 둥글게 감싸고 있기 때문에 연화부수형 명당이라 일컫는다. 이 경우, 매봉에서 오미봉까지 이어지는 금당실 터의 주맥(主脈)을 연꽃의 '꽃대'로 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인다.
오미봉, 북 쪽이 용의 머리가 되고 하금곡리, 남 쪽이 용의 꼬리가 되는데, 그것은 한 마리의 생동감 넘치는 거대한 수룡(樹龍)이 금곡천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띤다. 청룡함주형(靑龍含珠形) 명당이다. 그 굽이치는 솔숲이 푸른 소나무로 이루어지고 또 용머리 쪽에는 둥근 오미봉이 여의주 역할을 해주니, 청룡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이른바 '청룡함주형'이라는 최가경(最佳景)의 풍수 물형이 완성된다. 용문사가 있다고 해서 용문(龍門)의 땅인 것은 아니다.
평시에는 앞의 너른 들에서 농사를 짓고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는 마을 뒤 계곡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쉽게 피난하기에 딱 알맞은 지형이다. 금당실 북쪽을 겹겹이 두른 높은 소백산 줄기에는 피난하기에 좋은 선리의 절골, 원류리의 허릿골, 내지리의 둔지방, 사부리의 지도실과 불당골 등 수많은 골짝들이 포진해 있다. 조선중기 풍수 관료였던 남사고는 이곳 지세를, '예천에 있는 금당동 북쪽은 비록 지세가 깊지 못하여 밖으로 드러나 있으나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편안함을 누릴 것이다'라고 적었다. 실제로 임진란과 병자호란, 동학란 등이 일어났을 때 소백산 골짜기 십승지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듬으며 후일을 기약하도록 해줬다.
유장한 산의 흐름과 찌르듯이 달려들지 않는 물길로 둘러싸인 금곡분지의 빼어난 국세는 용문인들을 조화로운 심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금당실만큼 산과 물과 사람이 하나로 잘 어우러진 아름다우면서도 평온한 최가지지(最佳之地)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회룡포는 내성천이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극무늬 형태로 흐르면서 모래사장을 만들어 놓은 곳이며,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내성천 및 낙동강 상류 일대에 분포하는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 중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어서 명승 제16호로 지정되었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가는 것을 용의 형상에 비유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회룡포의 물돌이 지형은 S자형으로 흘러가는 감입곡류하천의 지형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곳은 맑고 푸른 강물, 은모래가 쌓인 백사장과 그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급경사의 지형, 울창한 식생, 농경지와 마을이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