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 구석구석에 그림을 그리던 미켈란젤로에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까지 정성을 들여 그릴 필요가 있나? 그렇게 완벽하게 그려 봤자 누가 알아주겠나?”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안다네.”
저 역시 ‘눈 가리고 아웅’식의 행동을 했을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귀찮다는 이유로 행하지 않은 경우도 또 얼마나 많은가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다르지요.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부족한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스스로를 속이는 행동들. 생각해보니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갖은 핑계와 이유를 붙여가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자의 행동임을…….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이러한 위선자의 길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우리 각자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속과 겉. 나는 과연 어디를 더 깨끗이 하려고 했을까요? 남의 시선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은 겉만을 깨끗하게 했을 것이고, 자기 자신에게 언제나 솔직한 사람은 속을 더 깨끗이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솔직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가 있으며, 그 결과 앞선 이야기의 미켈란젤로처럼 오랜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처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모습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변화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는 말씀을 내 마음 안에 새기고 더욱 더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빠다킹신부
섬기는 이
-임문철 신부-
개신교 목사님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는 경우, 우리 신부들은 그저 “어느 본당
아무개 신부입니다” 하고 소개를 하는데, 목사님들은 꼭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는 아무개 목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분들의 자기소개 방식을 보면서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해석학의 경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인사를 하다 보면 우리 사목자들의 의식 전환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그분들의 인사법이 부럽기도 합니다.
며칠 전 본당 사목회장님, 총무님과 함께 어느 모임에 가려고 사제관을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당연히 타고갈 차가 준비되어 있겠거니 했는데, 사목회장님이
“신부님 차로 가시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의식하고 나니 제가 오히려
민망했습니다. 총무님이 눈치를 채고, 그냥 제 차로 가자는 저를 극구 만류하면서 멀리 주차되어 있던 당신 차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러면서 어떻게
“나는 어느 본당을 섬기는 아무개 신부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권위를 내세우는 사제가 아니라 섬기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내 잔을 닦아준 청년
-한명수 시인(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포장마차에서 동료들과 소주 몇 잔을 마시면서 집으로 돌아갈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라면을 먹던 청년이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라고 했다. 나는 그 청년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물었다. “안면도 없고 취기조차 있는 나를 왜 태워다 주려는 거요?” “네. 평소 좋은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목사님 같은 성직자에게 선을 베풀면 좀 만회를 할 것 같아서요. 목사님은 어느 교회에 계시나요?” “에구, 사람 잘못 보셨네요. 저는 목사가 아닌데요. 왜 그렇게 생각했죠?” 그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만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이 성직자 같았거든요!”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큰 돌에 머리를 맞은 듯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맑고 깨끗한 웃음을 띠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자신을 정화하려는 마음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친절을 베푼 그는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겉모습만 거룩한 척하면?실상 내면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는’ 나에 비하면 작은 선행이라도 베풀면서 살아가면 평소 좋은 일을 못한 것에 대한 갚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참으로 깨끗한 잔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자신의 내면을 먼저 깨끗하게 만들려는 청년은 겉만 번지러한 내 잔을 조용히 닦아주고 갔다.
생각할수록 불쌍한 사람들
-양승국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생각할수록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 주변을 정탐합니다.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 그들의 본업처럼 여겨집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밥 먹듯이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질타를 당합니다. 때로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독설도 듣습니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웁니다. 생각할수록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열두제자 못지않게 복음서 안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 못지않게 자주 예수님을 만났었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도중 때로 깊이 서로를 공감했는가 하면 때로 의견이나 논리가 평행선을 달려 적대감에 치를 떨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 주변에서 지내면서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만났었고 주의 깊게 예수님을 관찰하면서 예수님과 삶을 나누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너무나도 크신 분, 너무나도 새로우신 분, 너무나도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기에 마음깊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그들의 마음은 너무도 완고했기에 예수님께서 파고드실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목전에 두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의 삶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예수님은 제발 좀 정신들 차리라고 신랄하게, 아주 강도 높게, 아주 구체적인 예까지 하나하나 들어가며 자존심 상하는 말을 그들에게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릇된 삶을 반드시 개선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독설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그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절대로 열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왜 예수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장황한 질책을 낱낱이 빠트리지 않고 소개하고 있고, 그들을 고발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층 인사들, 가르치는 사람들을 향해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또 형제 안에서, 스승 안에서, 선배들 안에서, 교회 안에서, 또 우리 자신들 안에서 많은 것들을 봅니다. 좋은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보고, 적당한 것도 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은 보고 배우고 따라가되, 어떤 모습은 보아도 보지 않은 척 해야 할 것이며, 절대로 따라가서는 안 될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식별력입니다.
식별의 영원한 기준은 복음적 기준입니다.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의식을 지닌다면 복음적 식별력을 지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일상 안에서, 또 형제들 안에서, 내 안에서 반드시 반 복음적 요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을 수시로 식별해나가려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23장 같은 경우, 장 전체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경한 경고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3장 전체에 걸쳐 신랄하게 지적하고 고발하고 호통을 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그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야단만 맞고 있을 것입니까?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의 질타 이면에 깃들어있는 예수님의 의도, 마음을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행실,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 참 신앙인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입니다.
십일조 정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유재훈 신부-
개신교회는 한 마을에서 50가구만 신자가 되면 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적어도 150가구 이상이 되어야 겨우 운영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개신교 신자들은 십일조 헌금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십일조 정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금전적인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모든 일상생활에 대한 십일조 정신을 되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일조 정신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받은 은혜를 되돌리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의 십일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루 24시간의 십분의 일인 2시간 30분 정도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은 시간의 십일조를 실천하며 삽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꼭 성서를 읽으며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러다 보니 1년에 한 번씩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독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 말씀을 깨달고 그대로 실천하다 보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시간·재물·재능·건강―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감사하며 사는 이에게 더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전동기 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열을 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토록 인정있게 대하시면서도, 왜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보면은,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길래 그토록 심한 독설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노기등등해 하시는가 말입니다.
사실 당시, 간음하다가 발각된 여인에게는, 단 한 마디 꾸중도 않으시고 "나도 니 죄를 묻지 않겠다"면서 자비로움을 보이신 분인데, 그리고 아버지 말씀도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가출해서는, 온갖 나쁜 짓거리를 다 하다가 돌아온 아들을 어여삐 받아 들이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도 드신 분인데, 심지어는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고 그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까지 기도하신 분인데, 왜 유독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만은 그토록 흥분하셨을까요? 당시에 그래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스스로 거룩하게 성별된 자들이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고, 남보기에 신심도 깊은 것 같고, 별 뚜렷한 잘못도 없고, 율법도 잘 지키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네, 우리가 죄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어떤 행동이나 생각이 분명히 나쁘다는 것을 알고도, 의지를 가지고서 행하는 것을 죄라고 그럽니다. 모르고서 행하거나 실수로 행한 것은, 물론 책임은 져야 하겠지만, 죄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율법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율법은 알아도 그 짐이 너무 벅차서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과 죄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계속해서 부추겨 온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전문가들은 성서를 잘 알고 있고, 날마다 기도하고 성서를 읽고, 연구하고 그랬습니다. 그들은 전문가들 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무엇이 껍데기고 무엇이 알맹이고 하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악세사리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해서는,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많은 율법조항들을 만든 것이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이 법망을 잘 빠져나오듯이, 이들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속을 깨끗이 닦아라는 것이다. 정의와 자비로움과 신의를 실천하고 전하라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일전에(2001년) 가톨릭신문에, 서울교구 시노드에서 수도자들이 제안한 것으로 '성직자부터 변해야 교회쇄신'이 이루어진다는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쇄신의 출발점이 성직자부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 인격적 성숙, 권위주의의 탈피, 성화, 정체성 확립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누가 '왜 하필이면 성직자부터이냐' 라고 따진다면, 말이 길어지겠지만, 하여튼 성직자들이 쇄신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쇄신되어야 하느냐? 저는 복음의 방향으로, 예수님의 방향으로, 사랑의 방향으로, 자비와 용서의 방향으로, 겸손의 방향으로 쇄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가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그리고 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 그리고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저의 가식적인 면과, 권위주의적인 면?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로만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정작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는 나태한 면과 교만한 면 등등을 볼 때, '영락없는 바리새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저를 포함한 성직자들의 쇄신과 회개가 요청되는 요즈음입니다. 회개란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더욱 인간다워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가 고양이처럼 굴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개처럼 굴어도 징그러울 것입니다. 인간도 인간다워질려고 할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다우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서 도처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답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열받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치 하느님인 양, 아주 고고한 양, 똥도 안 싸고 실수도 안하는 사람인 양, 가식과 위선으로 얼굴을 떡칠하려 할 때,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눈꼽만한 자존심때문에 끝까지 시치미를 떼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경고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바로 인간성 회복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는 회개라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그가 참인간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나에게는 회개가 필요없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
-박승원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근본적인 결점인 위선은, 오늘 본문 27절의 겉과 속이 다른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어서 반듯하게 보이지만, 실상 그 속은 죽음의 악취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28절의 겉으로는 율법을 가르치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不法이 가득하다는 표현은 아주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책망하시는 ‘위선’이란 단순히 겉과 속이 다른 ‘表裏不同’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남의 눈에 띄게 보여,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려는 自己誇示의 상태도 포함한다는 것을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본문에 앞서 23,5-7에서 “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성구갑을 넓게 하고, 옷단의 술을 크게 한다. 잔치에서는 上席을, 회당에서는 주례자석을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의 僞善적 行動으로 지적되고 있는 성구갑과 옷 술이 지닌 그 의미입니다. 聖句갑은 성구를 쓴 종이를 담은 작은 상자로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이마와 왼팔에 착용하도록 만든 물건입니다. 그리고 옷 술은 유대 인들이 기도할 때 반드시 몸에 두르도록 규정되어 있는 탈릿이 라는 기도용 천 끝에 다는 장식실입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꼭 이 탈릿으로 머리로부터 온몸을 덮는데. 그것은 기도자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일체의 것을 차단함으로써, 기도 자가 하느님께 온전히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옷 술을 탈릿의 아랫부분 네 모서리에다 다는 것은 이 옷 술을 보고, 야훼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지켜서,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민 15,37-41)
이러한 精神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옷 술을 될 수 있는 한 本人이 직접 만들어 달도록 권합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실을 감는 횟수와 방식 등을 까다로이 규정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옷 술을 만들 때 처음에 실을 일곱 번과 여덟 번을 감아 주는 단계가 있는데, 여기에서 일곱과 여덟의 합인 열다섯은 하느님을 뜻하는 히브리어를 상징하고. 또 다음단계로 실을 열한 번 감게 되어 있는데, 이 열하나라는 수자도 하느님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계의 열세 번 감는 동작에서 십삼이란 수자는 하나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연결됩니다. 이처럼 옷 술을 만드는 과정에 등장하는 전체 수자를 히브리어 자음체계 가운데 대입하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쉐마 구절이 조합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탈릿에 달린 옷 술은 하느님을 향한 유대 인들의 신앙적 고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옷 술을 탈릿뿐 아니라 평상복에 다는 것은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하느님을 잊지 않고, 언제나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이러한 성구갑과 옷 술을 타인에게 보여 지기 위한 도구로 이용함으로써(23,5), 위선의 도구가 되자. 저들의 이러한 행위가 예수께로부터 통렬한 질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고 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성구갑과 옷 술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묵상하고 그 의미를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
-최종수 신부 -
교회에만 갇히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벗어나
이웃을 볼 줄 알아야 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넓게 보라는 뜻인 줄 압니다.
아침저녁으로 세상의 언론과 방송은 20대 80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은 부유한 사람을 칭하고 80은 가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를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가난보다 더 힘겨운,
빈곤이라는 단어입니다. 얼마 전 최저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증언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파트 미화원을 하고 있는 한 아주머니는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한 달에 64만 원 받습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등을 빼면
실수령액은 61만 원인데 빚을 조금씩 갚고 혈압으로 인한 병원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인 남편도 최저임금을 받는데 식구들
의식주 해결도 어렵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정말 최저임금 64만 원으로 한 달 동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미화원 아주머니는 누구에게 묻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미화원 아주머니는 바로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정말 최저임금 64만 원으로
한 달 동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강영구신부-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때문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나타남입니다.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저 느티나무가 푸르고 늠름한 것은 하늘로 치솟은 가지만한 뿌리들이 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느티나무의 푸름과 늠름함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들입니다.
뿌리가 살아있으면 가지들을 잘라도 다시 살아납니다.
반대로 아무리 무성한 가지들을 가진 나무라도 뿌리를 자르면 곧 말라죽고 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드러나 보이는 줄기나 가지보다 더 소중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아름답게 말하고 처신합니다.
그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가슴을 지닌 사람은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어줍니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따뜻하고 밝습니다.
그러나 탐욕(貪)과 증오(嗔)와 어리석음(痴)으로 가득 찬 가슴을 지닌 사람은
훔치고 빼앗고 싸우고 다투고 죽이며 삽니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살벌하고 어둡습니다.
예수께서는 지엽(枝葉)에 매달려 근본(根本)을 놓치고 사는 율법하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꾸짖습니다.
언제나 근본(根本)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하면 인생이 무너집니다.(一明)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경규봉-
데살로니카에는 바울로를 비방하며 모략하는 적대자들(거짓 사도들, 유대주의자들, 영지주의자들 등)이 있었다. 바울로는 이들의 비방과 모략에 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을 선포했으며, 자신이 데살로니카 교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전한다.
사실 바울로 일행은 필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모진 고난과 인격적 능욕을 당했으면서도(사도 16,19-34) 곧바로 데살로니카로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필립보는 데살로니카처럼 마케도니아에 있는 도시이고 바울로는 필립보에서 데살로니카로 곧바로 갔기 때문에 바울로가 겪은 고난에 대한 소식은 데살로니카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은 바울로 일행을 반대했다. 그러나 바울로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용기와 확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힘이었다. 바울로가 필립보나 데살로니카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하게 복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로마 1,1; 2고린 11,7).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결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거나 그러한 행위를 조장하지도 않았다. 거짓 종교의 대부분은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많은 이득을 취하지만, 그는 결코 거짓이나 부정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의 복음만을 전파하였다. 그는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 적이 없고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인기와 명예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의식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그들을 위해 희생하며 사랑을 쏟았다. 데살로니카 교우들을 향한 바울로의 애정은 복음을 전할 당시뿐만 아니라 편지를 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바울로 일행은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의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느님의 복음이지 인간의 복음이 아니며, 복음을 전하는 특권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전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가 쉽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나 명예, 또는 물질적 이익을 얻고자 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들어 높이려고 하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올바르게 전하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방하며 모략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로도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중상모략을 당했다. 그렇지만 바울로는 그들의 모략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늘 간직하였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복음이 가득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온전히 주님을 따랐던 것이다.
참다운 신앙인은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살며, 복음이 충만하다. 때문에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는 하느님만이 자신의 모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에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살아가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한다. 오늘 그러한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하자.
† 불행선언 4,5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3번의 불행선언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불행선언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의 사물에 시선을 너무 오래 고정시키면 주위의 다른 사물은 보이지 않게 마련이며, 설사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다 하더라도 첫 사물에 대한 잔상(殘像)이 제법 오래 남게 된다. 이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자구적(字句的) 의미를 연구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고, 율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도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안중에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율법시행의 "정확함과 명료함"이 덕행(德行)이었다.
네 번째의 불행선언은 십일조 규정에 관한 것이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십일조의 규정은 실로 복잡하다. 유다교에서 십일조의 규정은 일년의 모든 수확 중 십분의 일을 레위인들에게 바치고, 레위인들 또한 십일조 전체에서 야훼의 몫을 떼어 아론 사제에게 바치는 것이다.(민수 18,25-32) 처음에는 십일조의 품목이 올리브기름, 포도주, 곡식에 한정되었으나(민수 18,12), 나무의 열매와 가축까지(레위 27,30-34; 신명 14,22-23) 그 징세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십일조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켜 음식의 양념향신료로 쓰이는 박하, 회향, 근채에까지 적용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율사들이 얼마나 법의 자구(字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징수하느냐는 것보다 왜 십일조를 바쳐야하는 것이다. 모세는 십일조로 거두어들인 모든 것을 삼 년마다 한번씩 다 내어놓고 성안에 사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도록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명 14,28-29; 26,12-13)
그러나 율사들은 십일조의 목적보다 시행과정을 더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율법의 가치를 전도하고 말았다. 그러니 십일조의 계율보다 더 상위에 자리한 정의, 자비, 신의의 계명이 홀대를 받은 셈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하루살이와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제일 큰 동물로 간주되던 낙타에 비유하신 것이다.(24절)
다섯 번째 불행선언은 유다교의 정결례에 관한 것이다. 유다교의 정결례에 관한 규정도 다른 율법 못지 않게 복잡하다. 모세오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를 규정하고 있다.(레위 11-18장; 민수 5,1-4; 19,1-22) 그러나 모든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정의 근본정신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는 것이다.
즉 율법의 목적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가치를 전도하고 말았다. 즉 겉과 속을 바꾸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물의 겉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속이 시커멓게 더러우면 겉의 깨끗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들어앉은 착취와 탐욕을 질타하신다.(25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되돌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모든 것에는 비단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시간, 사랑, 능력 등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바치는 것보다 왜 바쳐야 하는 것인지를 늘 묵상하여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에 있어서도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그 마음이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I)> : † 율법 지키는 사람
사람들은 신앙으로 하느님께 접근한다. 사소한 것들을 보면서 더 중요한 일들을 알게 되며 더 중요한 것들을 보면서 만물의 원리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이해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방향이다. 회개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신앙의 방향, 즉 향심의 방향이 바뀐다는 말이다. 세상으로 향하고 자기 자신에게 향하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과 며칠을 있은 뒤 그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만 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점점 하느님처럼 되어간다. 말도 행동도 마음도 점점 더 하느님처럼 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썩지 않는 몸으로 죽지 않는 상태로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빛나게 된다. 이것이 신자의 가는 길이다.
그러나 회개의 반대되는 결과는 오래 믿을수록 세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 점점 인상이 그리스도와는 멀어지게 된다. 성격도 냉정하고 잔인해진다. 가슴의 뜨거움은 없고 비판력은 무섭도록 강화된다.그런 눈으로 보면 남의 잘못을 너무도 잘 잡아낸다. 그렇게 똑똑하지만 삶의 질은 형편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저주를 퍼붙는 율법사와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부류들이다.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완전한 십일조를 위해서 음식의 양념향신료로 쓰이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드렸다. 과연 십일조의 중요성이 바치는 물건 분량의 정확성에 있었던가? 그래서 그것이 자랑이 되고 올바른 신자의 기준이던가? 아니다.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가? 수치의 정확성이 아니라 재물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신앙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다시 돌리는 상징으로서 십일조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십일조보다 더 근본적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한다. 십일조를 드릴 때 믿음으로 해야 한다. 십일조라는 행동은 믿음에서 나와야한다. 즉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돌보신다는 믿음,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그의 영이 하느님의 의를 제공하고 사랑과 자비를 공급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 재물 더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라기에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면 하느님이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는다고 했다(3,10).여기서 과연 온전한 십일조가 파뿌리까지 세어서 정확하게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외형적인 의미인가?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차서 순전히 복 더 받으려는 보상심리로 정확한 계산으로 드리는게 온전한 십일조인가? 그들은 율법을 이렇게 외형적으로만 해석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가 내게 너무도 큰 복을 한량없이 쏟아주시기에 드린다. 모두다 드려도 원이 없겠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에, 그리고 내 가족과 일군들을 먹여야 하기에 십분의 일만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되려면 분명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그의 의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해야한다.
내가 가진 재산 전부가 그의 것이다. 만약 필요한 때가 되면 모두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때 모든 재산을 다 바쳤다. 그들은 성전을 짓기 위해서 바빌론에서 돌아 왔다. 청교도들도 맨처음 미국 땅에 도착해서 성전부터 건축했다. 이들은 신앙을 위해서 조국을 떠난 이들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불붙는 사랑이 그렇게 바치게 했다.
하느님의 교회가 확고히 세워짐으로부터 삶과 가정의 질서가 잡혔다. 그렇게 그들은 일어나 모든 역경을 이기고 큰 나라가 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한없는 축복을 부어주셨다. 이들의 한 일은 율법사들이 앉아서 파뿌리나 세고 앉아있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신앙이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좀스런 율법사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들은 하루살이가 포도주에 빠졌다면 건져내고 마신다. 하지만 낙타는 포도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냥 삼켜 버리는 것이다. 말이 안되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인가? 작은 것에는 십일조를 드리지만 큰 것에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말로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그냥 더러운 것을 담아두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먹을만한 좋은 음식처럼 해 놓지만 실제로는 악한 것이다. 사람 전체가 이런 식이라면 얼마나 악한 것이랴. 이런 사람들을 율법사라고 존경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들이 더욱 한심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눈 먼자(소경)에게 인도되는 꼴이라고 하였다.
얼마전에 죽은 불교의 고승이 한 말이 소개되었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그의 앞에 나온 말이 "물은 산이고 산은 물이다"였다. 이제 그는 이 말이 얼마나 덧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을 부처처럼 대하는 신도들을 바라보면서 "당신들이나 나나 다 같은 상황입니다. 내 겉은 어쩐지 몰라도 속은 하나도 다른게 없습니다"고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율법의 목적은 사람의 내면을 위한 것이다. 외형적인 행동은 있는데 속은 다르다면 소용이 없다. 그냥 세상적인 차원의 질서 유지에나 도움이 될뿐이다. 그러나 속이 변화된 다면 외형도 따라서 변하게된다. 그러려면 영혼부터 변해야 한다.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들어와야지 겉으로만 보이도록 애써서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더 그와 교제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다한다. 하느님이 안에 계심을 믿고 돌보심을 믿는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늘 기도해 받아낸다. 그는 하느님의 힘으로 산다. 그래서 하느님의 공의와 인자하심과 믿음이 항상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그는 하느님의 일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자기 할일을 늘 생각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은 점점 그리스도처럼 되어갈 것이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