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만난 것은 친구 테니스 동호회 모임 뒷풀이때 였다. 군대 동기인 영훈의 간곡한 애원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소매를 붙잡고 애원 하다시피 하는 영훈의
신규 인원 보충에 어쩔수 없이 끌려가
막걸리 잔을 돌리다 보면 어색함이나
불편함이 감소 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 갔다.
영훈은 퇴근시간 약 1시간 전이면
불쑥 전화를 걸어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영훈은 전화를 걸면 늘 첫 마디가 친구야 막걸리 마시자 였다.
내가 시금털털한 막걸리를 딱히 좋아해서 라기 보다는
나와 영훈 둘 다 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었던 탔에
포장 마차에 앉아
막걸리와 파전으로 저녁을 해결 했다.
당시 내 직장은 충무로에 있었고 증권사 특정상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영훈은 충무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제기동에 살았다. 영훈의 형과 누나는 결혼 해서 분가를 했고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버스를 타면 10분 내 도착 하는 영훈을 만나기 위해 자주 제기동에 갔었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동네가 많이 변했지만 영훈의 집은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들어가야 하는 허름한 주택이었다.
당시 주말이면 자취방에 혼자 지내기 무료 해 영훈의 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직장 내 산악회 활동을 주저 하고 있던 터라 영훈의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방대를 졸업한 나는 서울에는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어 외롭기도 했었다.
테니스 정기 모임 후 신입 회원
입단식과 소통의 시간을 가지는 자리에
주로 30대와 40대의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을 가진 땀을 닦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자
키가 늘씬 하게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성이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경기가 끝난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을때
그녀의 하얀 목덜미 사이로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것을 바라 보고
있자
아 오늘 새로 오신 신입이세요?
하고 낭랑하게 내게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했다.
아내의 첫인상 눈매가 시원시원 하면서
맑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부터 아내는 나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테니스에 대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이어갔다.
그렇게 첫 만남은 얼굴이 불콰하게 붉어진체로 끝이 났다.
그날 이후 영훈은 나에게 정식으로 동호회 가입을 종용했고 직장에서 전체 회식이나
부서 모임이 없는 날은 퇴근후 나는
옷을 갈아 입고 테니스 코트에 앉아 있었다. 신입 테니스 동호회 회원이 되었지만 소심한 나는 회원들과 뒤풀이 시간을 가지는 것 보다 집으로 돌아와
일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후 테니스 코트에서 간간이 얼굴을 마주친
아내는 첫 만남이 있은후 무심하게 나를 대했다.
그녀는 동호회 여성 회원들과는 친근하게 자주 귓엣말을 나누는등 친분이 두터워 보였다.
반면 나의 경우에는 두 달이 되도록 친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영훈 옆에서만 머물렀다.
그렇게 삼개월이 흘렀다.
계절은 아침저녁 스산한 바람과 함께
낙엽이 바닥에 떨어져 행인의 발걸음에
노란 은행잎은 본래의 색을 잊은채
가을비에 젖어 하수구 구명에 가로 막혔다.
그날은 주말이었고 영훈과 나는 땀도 식힐겸 간단한 요기를 위해 발걸음은 자연스레 근처 포장마차로 향했다.
영훈이 뚜벅 뚜벅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말했다.
저 아가씨 우리 회원 같은데 영훈이 ㅈ고개를 갸웃 하며 말했다.
어디 누구를 말하는 거야?
너는 저쪽에서 걸어가는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거냐? 하고 핀잔을 주었다.
영훈이 가르킨 곳에 과연 테니스 동호회 회원인 여성이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발랄 하고 세련된 여성들이었다.
영훈과 나는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이
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바짝 다가 섰다.
우리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일행중 한 명이 우리 두사람이 걷는 짝으로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갑자기 시선을 느낀 나와 영훈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마주 섰다.
그때 아내도 무슨 바람이 분것처럼
어머 이곳에서 마주 쳤네요.
이런 우연도 있구나 하고 싱긋 웃더니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나와 영훈에게 내밀었다.
내가 그것을 열어 보려 하자 아내는
집에가서 보세요
부끄러우니까
근데 바쁘지 않으면 두분 꼭 오셔야 해요.
그날 저녁 아내가 내민 초대장을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초대장에는 음악과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각각의 악 기 이름이 예쁘게 인쇄 되어 있었다.
아내는 기타리스트이면서 밴드를 이끌어가는 리더 였다.
처음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얼굴과 오늘은 그동 안 내가 나는 아내의 얼굴 과 사뭇 달랐다.
음악에는 문외한인 나에게
묘한 파문을 일으킨 아내를 조금씩 이해 하는 시간이 되었다. 퇴근후 동숭동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섰을때는 이미 공연이 시작 되었는지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이어졌고 연인으로 발전 했다.
그때 부터 아내의 나에 대한 호칭은
이름 대신 오빠로 불리게 되었다.
아내는 회계사로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매사에 빈틈이 없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처음 교제 후 서로 의견도 많았지만 가끔 털털하게 구는 매력도
약 1년 후 가족과친지 친구들 앞에서 혼인서약후 방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공항까지 따라와 우리 두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던 영훈은 끝까지 유머로
웃겨 주었다.
행복할것만 같았던 우리의 결혼 생활은 어느날 갑작스레 찾아 왔다.
아내와 나는 직장인으로 아침 식사는
간단한 시리얼로 해결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는 청결과 아늑함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며칠에 한번 토스트를 굽는 날은 향긋한 버터 내음과 베이컨의 맛있는 향이 집안을 머물때면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아침을 시작 했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그날은 아내도 조간 회의 참석이 있는 날이라 여느날처럼 시리얼을 그릇에 채운후 수저질을 하고 있을때였다.
아내는 느닷없이 오빠? 내 손가락에 힘이 없어 며칠전부터 손가락이 감각이 없는것 같아. 아내의 말에 나는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보는게 좋겠다. 요즘 회사 일로 무리한거 아닐까? 나의 말에 아내는 직업상 느끼는 일인데 뭘
그리고 그날 오후 한의원을 다녀왔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안심 했다. 아내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대학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정밀 검사를 위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하지만 아내의 몸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근육이 조금씩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내는 건강을 위해 그토록 좋아하던 테니스와 기타 치는 것을 중단 했다. 처음 손가락에서 발가락으로 근육이 굳어 가더니 급기야 다리에 힘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해도 물건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아내는 매일 울면서 자꾸만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의 근육이 남아 있을때 하고 싶어 했다.
급기야 두다리로 서 있지 못할 지경에 나온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나라의 병원을 다 돌아 다녔지만, 그동안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희비병인 루게릭이라는 진단을 내 놓았다. 아내는 자신의 힘으로는 잠시도 혼자 서 있을 수 없게 되자 직장에 사표를 냈다. 사표를 던지고 집에 온 날 저녁 방문을 잠그고 밤새 도록 울었다. 아내를 지켜 보는 나는 남편으로서 아무 것도 해 줄수 없어 한숨만 나왔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것은
나와 아내 결혼 1주년 기념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일어났다. 아내의 손가락 근육은 점점 굳어 가는데 컵을 잡을 힘도 없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장모님께 알리자 장모님은 내 손을 꼭 잡고 간곡하게 애원을 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딸의 손과 발이 되어 주게
돈은 내가 벌테니 장모님은 내 손을 붙잡고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슴이 먹먹했다.
아내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나는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썼다.
동료들은 나의 뒤에서 부러워 하는 눈치였지만 그만 눈을 감았다.
당시 장모님은 장인 어른이 운영 하던 회사를 물려 받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장모님은 이재에 밝은 분이라
이미 서울과 경기도에 빌딩과 아파트를 여러채 소유하고 있었다.
자네는 그저 내 딸이 살아 있을때까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여한이 없게 살게 하고 싶어.
장모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생각 조차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