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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22강
언약의 피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기 전날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향유 부음을 받으시고 그 이튿날에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향유 부은 여인의 진심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유월절 성만찬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면서 장자 재앙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에 대해서만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게 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날’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기 위해 유월절 다음날부터 1주일간 이 빵을 먹었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 지배하에서 억압과 착취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로마로부터 해방해 주실 제2의 유월절을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교권을 위해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법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인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시몬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시몬은 과거 나병으로 고통당하다 예수님을 통해 나음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해 예수님을 초대했을 것입니다. 다함께 풍성하고 맛 좋은 음식들을 나누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 깨뜨려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중동지역에는 날씨가 덥고 땀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에 향유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당시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바르는 것은 그분에 대한 특별한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향유를 손과 얼굴에 찍어 바르면 음식 냄새가 가시고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향유를 한두 방울도 아니고 아예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손바닥도 아니고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숟가락을 들고 계신 채로 온몸이 향유로 범벅이 되셨습니다.
이런 향유는 ‘알라바스터’라는 반투명체의 옥으로 만든 옥합에 보관했습니다. 여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귀한 향유를 가지고 와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 향유는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었습니다. 나드는 주로 히말라야나 인도지역에서만 사는 ‘나드초’의 뿌리에서 추출하는 향유입니다. 그 희귀성과 함께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당시 향유 중 최상급에 속했습니다.
당시 향유는 결혼을 앞둔 여인들이 옷과 함께 준비하는 혼수품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마련하기 위해 고생을 참 많이 하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여인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한순간 값비싼 향유가 다 날라갔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조금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과 존경과 헌신과 사랑을 다 담아 표현했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인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자신이 향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여인은 이를 표현할 길을 찾다 자신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했던 향유를 진정 귀하고 소중한 분에게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여인의 행동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들은 자기 것도 아니면서 화를 내며 여자를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은 것을 허비로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이 말을 했는데, 이웃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탐심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진심과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세상의 물질주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면 낭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하고 캠퍼스에 나가 시간을 드려 전도하는 것을 보면 허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들을 섬기며 이래저래 마음 아파할 때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정열과 모든 진심을 드리고자 노력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 쓸 만한 청년 하나 교회 땜에 버렸다 등 여러 가지로 비난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모든 진심을 계산적으로 허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고귀한 분이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헌신은 결코 세상 사람들이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헌신과 수고를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여인의 헌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여인의 헌신을 ‘허비’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좋은 일,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여인의 진심을 무시했지만,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칭찬받을 일로 보시고 그 진심을 다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지금까지 내가 뭐했나, 헛수고했다는 손해 심정이 들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드린 헌신을 다 아시고 아름다운 일을 했다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의 행동이 어떤 면에서 칭찬받을 일이 될까요? 7,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존재합니다. 이들은 언제든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얼마 있지 않아 하나님 나라로 가시게 됩니다. 그때는 예수님께 직접 무엇을 해드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는 내 할 일을 하고 늙어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귀한 세월 세상 욕심으로 다 허비해 버립니다. 나에게 기회와 정열이 있을 때 먼저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길 수 있을 때,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틀 후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마음이 힘든 이 시점에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께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해주셨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정점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복음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역사화 시키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잠깐 향기를 풍기다 사라졌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은 복음이 전파되는 온 천하에 지금도 아름다운 향기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깨뜨려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향유 옥합은 무엇이 있을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이 애써 간직해온 옥합이 있습니다. 그 옥합은 자신이 갈고 닦아온 실력과 숨은 재능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간직해온 아름답고 순수한 꿈일 수도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아끼고 아껴 모은 소중한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과 피 끓는 정열이 향유 옥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향유 옥합들은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진심과 사랑과 꿈과 미래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향기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향유 옥합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드리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왜냐면 이는 예수님이 천지 만물과 우리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요,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요,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있는 향유 옥합, 주님께 진심을 드려 부어드릴 수 있는 향유 옥합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드려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교절 첫날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유월절 양 잡는 날로 흠 없고 점 없는 1년 된 어린 양을 잡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유월절 식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유월절 식사만큼은 아무에게 방해받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면 유월절 식사를 통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시작하셨습니다. 먹는 것은 즐겁습니다. 식사 시간에 여유를 갖고 이야기도 하며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포만감에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배반자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갑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의 인생 종말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의 삶은 비참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나간 후, 나머지 제자들과 계속해서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찢기실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몸을 부수어 그 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살이 부서지는 고통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의 참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맛집을 찾아다니고 먹방을 찍고 보고 즐깁니다. 인생의 여유로움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삶도 필요합니다. 이런 삶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마지막엔 어느 누구나 죽습니다. 세상을 즐기는 삶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않습니다. 세상 맛집은 영원 속에서 생각해 보면, 일시적이고 잠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부수어 우리에게 주신 살은 우리에게 영원한 참생명을 줍니다.
또 예수님은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돌리며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장 28절에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은 바로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 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일평생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죄는 깊은 산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수도를 하거나, 자기 학대를 하며 강하게 결심을 해도 정결하게 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점 없고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속죄 제물로 드려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짓기에 그것만으로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점 없고 흠 없는 어린 양과 같으신 예수님의 순전한 피를 통해 죄 사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해도 예수님의 피를 믿기만 하면, 그 피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하며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해 줍니다. 예수님의 이 피는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진정으로 자유함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성찬의 의미도, 단순한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언약의 피가 됩니다. 구약시대, 모세는 시내 산에서 짐승을 잡고 그 피를 뿌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옛 언약의 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행하면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맺은 옛 언약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통해 그들을 말씀을 준행하는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새 언약의 매개체가 되셨습니다. 새 언약은 주님의 십자가 살과 피를 믿는 자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새 언약은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옛 언약의 사람들은 죄의 세력에 굴복했지만, 새 언약의 백성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지하는 자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성찬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성찬 예식은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며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찬 예식의 참여는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하나가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은 말씀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우리가 성찬 예식을 행할 때뿐만 아니라 삶의 매 순간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린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잔치를 하면서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될 때를 제자들에게 소망하게 도우십니다. 우리는 부활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유월절 잔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이후로는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참 생명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를 소망하면서 이 땅의 삶 동안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목요일 오후 3시부터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았습니다. 이때 레위인들이 시편 113~118편을 찬양했습니다. 양을 잡을 때 찬양이 시작되면, 집으로 가져와 양을 구울 때도 찬양하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성전에 가서 밤새도록 찬양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식사 후, 기도의 동산인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으로 가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양을 불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18:1).”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찬양하면서, 그 험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깨어있어 좋은 일, 아름다운 일들을 분별하고, 찬양하며 주님께 인정받는 아름다운 일들을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살과 피의 의미가 심령에 다가오십니까? 코카콜라 회장은 자신의 혈관에는 콜라가 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귀한 십자가 보혈이 우리 혈관 속에 흐르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십자가 그 사랑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쏟아부어 주신 것처럼, 또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향유 옥합을 부어드린 여인처럼, 우리도 우리의 진심과 헌신을 드려 주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