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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의 어머니가 우상을 만듬
삿 17:1-6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1-6 / [미가의 개인 성소]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2) 하루는 그가 어머니한테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전에 잃어버린 은화 1100개를 기억하시지요? 그걸 잃어버리시고 훔쳐 간 도둑에게 저주를 퍼부으신 걸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 사실은 제가 그 돈을 훔쳤어요. 여기 이렇게 돈이 있잖아요?' 그러자 그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아이구, 이 자식아!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주시길 바란다' 3) 미가가 은화 1100개를 어머니한테 돌려드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내려 주시도록 내가 이 돈을 주께 바치겠다. 이 돈으로 신상을 새기고 금속을 덧입혀 모셔 놓자. 나는 이 돈을 너를 위해 쓰겠다.' 4) 미가의 어머니는 그 은화 가운데서 200개를 은장이에게 주었다. 은장이는 그 돈으로 신상을 새겨 금속을 덧입혔다. 미가는 그 신상을 가져다 자기 집에 모셔 놓았다. 5) 다시 말해 미가의 집에 성소가 생긴 셈이다. 또 미가는 제사장 의복의 일종인 에봇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쓰이는 드라빔을 만들었으며, 아들 가운데서 하나를 뽑아 이 성소에서 제사장 일을 보게 하였다. 6) 이때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어서 사람들 모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였다.
무늬만 신앙인인 미가가 자기 집에 신당을 차리는 장면입니다.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1) 미가는 미카야후(Mikayahu)의 축약형으로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는 뜻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가가 보여주는 행동에서 우리는 여호와에 대한 경외를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미가는 오늘날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현대판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마 7:21).
미가와 그의 어머니(2-3) 미가의 어머니가 은 천백(블레셋의 다섯 방백이 각각 들릴라에게 주었던 막대한 액수; 삿 16:5)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불행을 저주하면서 이 사실을 미가에게도 말하자 미가는 저주를 받을 것이 두려워서 자신이 그 돈을 훔쳤다고 실토합니다. 먼저 미가는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5계명과 8계명을 범하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대응도 율법적으로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레 6:1-6), 미가는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실로의 성소에 가서 여호와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으며(삿 18:31), 훔친 원금에다 5분의 1을 더하여 어머니에게 갚아야 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도 율례를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들을 축복하면서 그 은을 다시 돌려주었으며, 그 은의 일부로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기로 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무지한 이 어머니는 그것이 헌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없는 종교생활은 무의미합니다. 말씀을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신당(4-6) 미가의 어머니가 은 이백을 투자하여 신상을 만들어 미가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미가는 아예 자신의 집을 신당으로 꾸몄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의복인 에봇(레 8:7)과 작은 신상들인 드라빔을 만드는 등 우상숭배에 필요한 용품들을 구비하였습니다. 이는 십계명 중 제 1계명과 2계명을 범한 명백한 죄이며(출 20:4, 23; 34:17; 레 19:4) 저주받을 행동입니다(신 27:15). 게다가 미가는 자신의 아들들 중에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는데, 이는 레위인만을 제사장으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실로 성소가 에브라임 지역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가는 자신의 집에 신당을 세웠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거역이었습니다. “그 때에는...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는 말씀은 미가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적 용 : ‘오직 말씀으로!’ 이는 종교 개혁가들의 구호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자주 묵상하십니까?
사사기의 저자는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압제와 고통, 종교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 같은 많은 고난의 원인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음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왕의 부재현상에 대해 사사기의 저자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신권정치의 부재현상을 고발합니다. 이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에게는 왕이 필요합니다. 왕이 없음으로 인해 우상숭배와 죄악이 만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를 이끄시는 왕의 부재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난과 고통의 이유가 됩니다. 나의 오늘은 왕께 보고 드리고 있으며, 왕께서 친히 이끄시는 삶이 되고 있는지 매순간 돌아보아야 합니다.
< 설 교 >
변질된 신앙
사사기 17:1-13
과거 주님의 교회에서 시무하셨고 지금은 개인 복음전도자로 사역하시는 이재철 목사님이 쓰신 <참으로 신실하게>라는 책에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Alponse Daudet)의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꽁트가 실려 있는데, 먼저 그 꽁트를 소개합니다.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도원의 뾰쪽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어져 나갔지만, 그런 것들을 손 볼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깨어져 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 딱따기를 쳐서 기도 시간을 알리곤 했습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수도원의 재정상태를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고셰수도사는, 수도원 원장의 허가아래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 전문가였기 때문에, 그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수도사는 불로장생주를 빚는데 성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고셰수도사가 빚은 불로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가난에 찌들었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돈 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뾰쪽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습니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도사 덕분이었습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도사는 신부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그 술을 시음해 하다가, 그만 알콜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을 술주정을 하는 고셰 수도사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도사에게 앞으로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면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수도사는 수도원 원장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조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 원장이 주조장을 찾아왔을 때, 고셰 수도사는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도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요. 그러니까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 장생주만 빚으시오.”라고 도리어 격려해 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셰수도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수도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했습니다만, 바로 그 시간 고셰수도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꽁트에서 수도원 원장과 신부들이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까? 아니면 진리의 말씀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였습니까? 아니면 영혼 사랑의 마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도 아니고, 진리의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도 아니고, 영혼 사랑하는 마음도 아니고, 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은 단지 명분이었을 뿐, 그들이 집착한 것은 오로지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수도원 원장과 신부로서의 역할이 변질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수도원으로서의 역할이 변질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꽁트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빗대어 묘사한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나 영혼을 섬기는 사역자들까지도, 돈을 최고의 것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돈을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다보니,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사사기 17장 본문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변질된 <프레몽트르 수도원>과 같은 변질된 신앙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 미가라는 사람입니다. 이 ‘미가’라는 이름은 ‘미가예후’라는 말의 줄임말로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대단히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을 요즘 말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짱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입니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아들이 하나님을 최고로 모시며 살아가기를 원한 것을 보면, 미가의 가정이 종교성이 강한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미가나 미가의 부모님이나 온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돈을 너무 사랑하고, 물질만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1. 물질만을 추구한 사람들
미가의 어머니는 돈이 아주 많았습니다. 옛날에 부자들은 일반적으로 양이나 소 등과 같은 가축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미가의 어머니는 현찰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은행 같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돈을 보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머리를 짜내어 거액의 돈을 나름대로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숨겨놓은 돈 중, 은 1,100냥을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0절에 의하면 제사장 1년 연봉이 은 10냥과 옷 한 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은 1,100냥은 제사장의 110년분의 연봉입니다. 1년에 5만 불 연봉을 받는다고 가정해도 5만 불 곱하기 110년 하면 무려 550만 불이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귀중한 돈을 훔쳐간 도둑을 향해 “어느 놈이 내 돈 가지고 갔어! 그래, 어떤 놈이 내 돈 가지고 갔는지 모르지만, 내 돈 가지고 잘 살 것 같으냐?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날 거야. 내 돈에 손 댄 놈들은 다 저주나 받으라!”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마구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훔쳐간 사람이 바로 자기 아들 미가였습니다.
미가는 돈이 탐이 나서 어머니 돈을 훔치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저주의 말을 옆에서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저주대로 정말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면 어떻게 하지? 저주 받으면 어떻게 하지?”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훔친 돈을 어머니에게 도로 내놓고 사실대로 고백했습니다.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2절상).” 아들 미가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 때 미가의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야단을 쳤습니까? 아닙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는 것보다, 잃었던 은을 찾는 데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영영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도둑을 맞아 완전히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찾게 되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아들을 책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2절하).” 도둑질한 아들을 징계하고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하며, 아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은으로 신상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미가의 어머니는 자기 돈을 도둑질한 사람을 향해 있는 말, 없는 말 다 동원해서 무서운 저주를 퍼부어 버렸는데, 자기가 내뱉은 그 저주가 자기 아들에게 임할 것으로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자기가 아들에게 퍼부은 저주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게 된 그 은을 하나님께 거룩히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얼마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습니까? 1,100냥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실제로 얼마를 썼습니까? 200냥입니다. 그녀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은을 다 바치겠다고 해 놓고서 1,100냥 중 겨우 200냥만 드린 것입니다. 결국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훔친 것처럼, 어머니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셈이 된 것입니다. 만약 가정이지만, 미가의 어머니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 중에 200냥만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했다면 아무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찾은 것을 다 드리겠다고 해놓고, 겨우 200냥만 드리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가 가정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 가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도적질하고, 돈 때문에 저주하고, 돈 때문에 축복하고, 돈 때문에 거짓말하고, 돈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돈을 인생의 최고의 목적과 기준으로 삼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맘모니즘(Mammonism)‘이라고 합니다. 맘모니즘은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목숨 걸고 돈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앉아야 할 자리에 돈이 앉게 됩니다. 돈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믿고, 돈이 나를 어려움으로부터 구해준다고 믿고,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돈벌이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1998년 12월19일자 신문에, ‘슈퍼주인 발목절단은 자작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정신 나간 구멍가게 주인이 증권투자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많이 져,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평소에 알고 지내온 택시운전사와 짜고 자신의 발목을 절단했다는 것입니다. 또 1999년 6월13일자 신문에는 ’손가락 보험사기...빚더미 40대 4개 잘라‘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업 부도로 진 빚 2억여 원을 갚기 위해 11개 보험회사에 거액의 보험에 가입한 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왼손 엄지를 제외한 4개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것입니다. 정말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2000년 6월13일자 신문에는 ’30대 남자, 보험금 노려 딸·조카 살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30대 남자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두 딸과 두 조카, 그리고 채권자를 승용차에 태우고 운전하다가 고의로 저수지에 추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탈출하고, 자기 자녀와 조카를 함께 익사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함께 동행 했던 채권자가 저수지에 빠진 자동차 안에서 탈출하려고 하자,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돌로 때려 숨지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2000년 10월26일자 신문에는 ’배은망덕한 제자가, 스승 신기술 훔쳐 벤처차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대학과 대학원 등록금까지 대주면서 은혜를 베풀어준 교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배반하고 교수님이 개발한 신기술까지 훔쳐서 벤처기업을 세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2000년 11월28일자 신문에는 학생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는 충북 도교육감이 아무도 모르게 무려 10년 동안 매춘 여인숙을 운영해오다 발각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지난 5월9일자 신문에는 구토와 안면마비 뿐 아니라 암까지 유발할 수 있는 구두광택제를 고춧가루에 섞은 후, 서울과 경기도 일대 재래시장과 수 십 여개의 음식점에 판매하던 김모 씨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최대 10만여 명에 이를 만큼 엄청난 사람들이 그 독이 든 고춧가루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세상이 악해질 대로 악해졌습니다. 이 시대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맘모니즘'이 팽배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생명이란 말은 헬라어로 ‘조에’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일 찬양팀이 ‘조에 찬양팀‘인데, 이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 찬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행복한 인생은 단순히 많이 소유했느냐, 적게 소유했느냐 하는 ’소유‘에 있지 않고,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의미‘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행복은 물질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에게 있어 결코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돈이 필요한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돈이 필요하고 목사에게도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우리 자녀들을 잘 교육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비전센터도 걸립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선교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그 자체를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돈을 인생의 최고의 목적으로 두고 물질만을 추구한다면, 그 순간부터 미가의 가정처럼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변질될 것입니다. 따라서 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인생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을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2. 편리만을 추구한 사람들
미가의 가정은 편리만을 추구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1,100냥 중 200냥을 가지고 한 신상을 새겨 만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4절을 보겠습니다.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200냥을 들여 만든 신상을 어디에 놓아두었습니까? 자기 집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1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공식적으로 제사할 곳을 오직 한 군데만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만약 미가의 가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실로에 가면 됩니다. 그렇다고 실로가 그들이 살고 있는 에브라임 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닙니다.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가 살고 있는 지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집으로부터 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놓아두고 자기 집안에 산당을 세웠습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온 김 집사가 Avonhead에 집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는 집에서 교회까지 가려면 1~2시간 걸려서 힘들게 가곤 했는데,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Woolston에 있는 교회까지 겨우 15분이면 갈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자동차가 밀리지 않아서 좋고, 도로가 반듯반듯해서 잠시 운전하다보면 교회에 도착하기 때문에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김 집사 마음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Woolston까지 나오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새벽기도회는 커녕, 금요일 저녁뿐 아니라, 주일 오전에 교회에 나오는 조차 싫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15분이나 떨어져 있는 Woolston까지 갈게 아니라, 집에서 기독교 TV로 예배드리고, 영어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인터넷으로 한국에 있는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되지 않겠어! 요즈음 뉴질랜드 달러가 올라 한국에서 남편이 붙여주는 돈도 가뜩이나 줄었는데, 기름값 절약할 겸, 집에서 예배드리고 집에서 기도하지 뭐!”
분문에 나오는 미가의 어머니가 바로 김 집사와 같은 마음으로 자기 집에 산당을 세운 것입니다. 멀리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제단을 가까운 곳에 두고 편하게 예배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제단을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개인 제단을 만든 것입니다. 이제 미가의 가정에 제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단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제사를 집전할 제사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궁리 끝에 자기 아들 중에 한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미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8장 1절에 의하면 원래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제도로서, 레위 지파 중 아론의 후손들이 그 직분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 사람 미가는 독단적으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만들어 입히고, 드라빔이라는 우상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드디어 그렇게 ”돈, 돈, 돈“하며 돈에 집착하고 편리만을 추구하던 미가의 가정은,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들 멋대로 개인제단, 즉 이단종교를 창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는 이단종파의 교주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미가의 가정처럼 편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는 희생의 자리보다, 박수 받고 인정받는 자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지보다 양지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데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사도 바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데마가 사도 바울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데마가 바울을 떠나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데마가 바울을 떠난 시기와 동기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습니다. 로마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데마는 바로 이것이 싫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고생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바울 곁에서 로마에 머물러 있으면 극심한 로마의 박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데마는 편안한 삶을 위해 데살로니가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바울 곁 로마에는 제자 누가만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데마는 편안함을 위해 데살로니가로 간 반면, 고난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로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도 기꺼이 감수했던 누가의 길과 육신의 편안함과 안일을 위한 데마의 길이 있습니다.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로마로 가는 길이 있고,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는 길은 어느 길입니까? 로마로 가는 길입니까? 아니면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고난도 기꺼이 감수했던 누가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육신의 편안함과 안일을 위한 데마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길로 가셨습니까? 편안한 비단길로 가셨습니까? 아니면 고난의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택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비단길이 아닌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아닌 로마로 가는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데마의 길이 아닌 누가의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데마의 길이 아닌 누가의 길을,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이 아닌 로마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3. 형식만을 추구한 사람들
미가와 그의 가정은 형식을 갖추는 데는 신경을 썼지만, 정작 필요한 믿음은 소홀히 했습니다. 신당을 짓고 아름다운 신상을 세우고 제사장을 두는 것에는 관심을 쏟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미가는 자기 집에 산당을 만들어놓고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했지만, 어딘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레위출신 소년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7절에 의하면 그는 베들레헴 출신이었습니다. 원래 베들레헴은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에게 할당된 성읍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이 부모 몰래 가출하여 집을 나왔는지, 다른 지파들이 공급해 주는 십일조가 적어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하여 베들레헴으로 흘러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그가 베들레헴에 살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또 다시 살길을 찾아 베들레헴을 떠나 떠돌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미가는 가짜 제사장으로 세워진 자기 아들 대신에 진짜 제사장 한 명을 고용하려던 참에, 그 레위인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같이 됨이라.” 미가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하던 레위인에게 해마다 은 10냥, 오늘날로 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5만 불의 연봉과 옷 한 벌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먹여주겠다고 하며 “우리 집에 와서 제사장이 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 동안 먹고 살 길이 막막하던 차에 드디어 안정된 직장을 잡은 것입니다. 그 레위인은 그 날부터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고용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미가 가정을 위한 미가의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만약 그가 진짜 제사장이었다면 거액의 연봉을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거부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연봉 필요 없다. 내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이단 종파의 꼭두각시는 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미가의 신당을 박살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먹고 사는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덜컥 미가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여 사설 제사장으로 취직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치 교회의 목사가 어떤 부자 교인의 집에 눌러앉아서 그 집을 축복하는 <축도목사>로 취직한 것입니다. 한편 그 동안 어머니의 돈을 훔치고 나서 받을 저주와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웠던 미가는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겠습니다. “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미가는 외적인 신당을 만들어 놓고, 아름다운 신상을 세우고, 사이비 제사장을 고용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가정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 할까요? 하나님이 눈먼 장님입니까? 형식만을 추구하는 미가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모르실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행동을 다 아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식만을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하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형식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건축하고, 훌륭한 악기들과 시설들을 구비하고 시원한 에어컨을 켜놓고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으면서도 겉으로만 아무리 믿는 척 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다 아십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가지도 않고 물질로 후원도 하지 않고, 기도로 중보도 하지 않으면서 이를 악물고 “세계선교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라고 소리치는 외침을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입만 열면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위해서는 1주일에 한 시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이웃과는 담쌓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하는지 아니면 립서비스만 하는지 다 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미가 가정처럼 알맹이 없이 형식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혀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만 앞세우지 않습니까? 형식이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식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 각자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물질을 최우선인 가치를 두게 된 미가처럼 신앙이 변질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가정은 미가 가정처럼 세속화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의 논리에 빠진 것은 아닙니까? 성령의 능력보다는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비단 길과 같은 편안한 길보다는 힘이 들어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 가시기를 바랍니다. 알맹이 없이 형식만을 추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