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고대 로마의 쟁기부터 한반도의 쟁기에 몰돌하는가? 그것은 일찌기 선친께서 일제 강점기시대에 만주벌로 가셔서 중국인에게 쇳물(선철; 이모노) 주물기술을 배워서 해방 후에 귀국하신 이후, 내 나이 8살 때까지 현재의 광주송정역(KTX) 앞에 "호남주물 합자회사"를 설립하시고, 인류 생존의 필수품인 쟁기 '날'(부습)과 가마솥을 제작하셨다. 땅을 갈고(경작) 소출(곡식)로 밥을 지어먹어야 하는 인류 생존의 틀, 즉 '가마솥'을 만드셨다. 선친께서 이루신 업적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준비 중이다. 쟁기는 기원전 3,000년 부터 인류의 농경문화의 유산이었다. - dhleepaul
- 이하에서 한반도 쟁기문화의 역사에 대한 글을 올린다. 과거의 쟁기와 가마솥은 이후 양은(백철)솥으로 그리고 전기밥솥으로 발전하여 쟁기는 트랙터와 콤바인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우리의 유물을 대신하였다. 우리의
보습은 쟁기의 일부분으로 쇠로 된 삽 모양의 연장이다. 이선(犁先)이라고도 하는데 철로 되어 있는 이선이라고 하여 철리(鐵犁), 철제이선(鐵製犁先)이라고도 한다. 쇠보습은 출토된 유물을 기준으로 할 때 고구려 4세기, 신라 6세기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국립청주박물관에는 충주에서 출토된 원삼국시대의 철제 보습이 소장되어 있다. 농업사에서 쇠보습의 발명은 가히 혁명적인 농업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또한, 30~40여년 전까지도 대장장이들이 보습을 만들며 마을을 돌던 풍속이 있었다.
쟁기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진 보습의 발달 과정
<그림 1> 쟁기(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보습은 쟁기의 일부분으로 쇠로 된 삽 모양의 연장이다. 이선(犁先)이라고도 하는데 철로 되어 있는 이선이라고 하여 철리(鐵犁), 철제이선(鐵製犁先)이라고도 한다. 보습은 그 자체로는 사용할 수가 없고 쟁기나 극젱이 등에 끼어서 사용한다. 따라서 보습의 발달 과정은 쟁기의 발달 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쟁기는 원시적인 형태의 ‘뒤지개’에서 비롯되어 따비, 극젱이를 거쳐 완성된 연장이다.
<그림 1>과 같이 쟁기는 ‘성에’라는 기다란 나무 기둥과 끝에 보습을 끼울 수 있게 만든 나무 기둥인 ‘술’,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한마루’가 마치 옆으로 누운 A자처럼 짜인 농기구다. 이 쟁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보습이다. 지금 보습은 쇠로 되어 있지만 철제가 나오기 전에는 나무를 깎거나 돌을 갈아서 썼다. 한국에서 가장 오랜 돌보습은 기원전 3000년경의 유적이라고 한다. 주로 돌보습이 출토된 지역은 봉산 지탑리, 경흥 서포항, 공주 석장리, 부안 구지리, 서울 암사동, 영변 세죽리, 여주 흔암리 등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쇠보습이 사용되었을까? 쇠보습은 출토된 유물을 기준으로 할 때 고구려 4세기, 신라 6세기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국립청주박물관에는 <그림 2>와 같이 충주에서 출토된 원삼국시대의 철제 보습이 소장되어 있다. 이 보습은 극쟁이의 술 끝에 맞추어 경작에 쓰였던 보습으로, 서로 대칭되게 반원형에 가깝게 휘어져 있는 형태이다. 휘어진 양끝 부분의 안쪽에는 홈이 파여 있다. 이 홈은 보습을 쟁기에 고정시키는 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3>의 경기도 이천에서 출토된 백제의 쇠보습을 보더라도 지금의 보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보습이 발달하면서 볏을 추가로 달게 되었다. 볏은 보습 위쪽에 고정시키는 넓쩍한 쇠판인데 왼쪽으로 약간 뒤틀려 있어서 흙이 왼쪽으로 넘어 떨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볏은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져서 최근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며 사용되고 있다.
철제보습(사진출처:국립청주박물관)
쇠 보습(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쇠보습의 등장으로 농업 생산량 증가
농업사에서는 쇠보습의 발명은 가히 혁명적인 농업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즉, 나무나 돌로 된 보습은 날카로운 날이 있을 수 없기에 땅을 얕게 갈 수밖에 없고 땅을 갈기가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쇠로 된 보습이 발명되자 쇠보습의 날카로운 날로 인해 땅을 깊게 갈 수 있게 되었고 힘도 덜 들게 되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개선은 대폭적인 생산량의 증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쇠보습이 달린 쟁기를 사용하면서 논의 형태도 작고 네모난 논에서 폭이 좁고 긴 계단식 논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쟁기로 논을 갈기에는 길게 배치된 논이 효율성이 좋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쇠보습의 발달은 농경지의 변화를 수반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농업의 갈이농사 방식을 좌우한 주요한 요소였다.
보습을 만들고 다녔던 대장장이 순례 풍속
보습은 쇠로 되어 있지만 강도가 약한 편이어서 매년 또는 한 해에 한두 번 정도는 교체해 주어야 한다. 대장간이 가까운 지역은 당연히 대장간에서 구입을 하면 되겠지만 교통이 불편하던 과거에는 마을마다 다니면서 보습을 만들어 주었던 대장장이들이 있었다.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죽천에서는 190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대장장이들이 마을을 다니면서 보습을 만들어 주는 풍속이 있었다. 이들은 도가니에 무쇠를 깨 넣은 뒤 숯을 사이사이에 끼워 달군다. 숯을 계속 집어넣으며 쇠를 달구다 보면 쇠가 벌겋게 달궈지다 물렁물렁하게 된다. 그러면 숯을 살살 걷어내고 흙으로 만든 보습 틀에 쇠물을 붓는다. 보습 틀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채우면서 만든다.
이렇게 주물을 하는 사람들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쇠나 주물거리를 일일이 모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이 보습을 여러 개 모아놓고 ‘볼쟁이’(대장장이)를 초빙을 하면 골풀무(발풀무)와 도가니만 매고 찾아 온다. 그러면 밭이든 논바닥이든 평평한 곳에 차려 놓고 흙으로 ‘보습디’(주물틀)를 만든다. 보습 1개당 값을 받았다. 이처럼 30여년 전까지도 대장장이들이 보습을 만들며 마을을 돌던 풍속이 있었다. 이처럼 보습을 새로 마련하는 일은 본격적인 농사철을 대비하기 위해 무척 중요한 과정이었다.
참고자료
정기간행물
김태우. "동제당 철마 봉안 사례 연구: 대장장이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34, 한국민속학회 (2001)
웹페이지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emuseum.go.kr
단행본
조선의 재래농구. 심우성 감수, 경주한국무속박물관, 1995.
웹페이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보습", https://folkency.nfm.go.kr
웹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습", http://encykorea.aks.ac.kr
웹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쟁기", http://encykorea.aks.ac.kr
쟁기는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의 하나이다. 토양(土壤)의 상층(上層)을 갈아엎어 잡초를 제거하거나 앞에 재배한 작물의 남은 부분을 토양과 섞고, 땅을 다공성(多孔性)으로 만들어 파종(播種)이나 작물 재배를 쉽게 한다. 땅을 파거나 뒤집는 데 사용했던 ‘뒤지개(digging stick)’나 ‘따비(weederplow)’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사람이 끌었으나 점차 소나 말 등을 이용했다.
쟁기는 땅을 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흙을 일구어 뒤집는 보습과 볏을 지탱하는 술과 연장을 부리는 자부지, 술을 견인력과 연결하는 성에, 그리고 술과 성에를 고정하면서 갈이깊이를 조절하는 한마루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의 쟁기는 이미 5~6세기 고구려시대의 쟁기보습이 출토된 바가 있고, 고려시대의 보습과 볏은 크기나 모양이 재래의 것과 꼭 같아 이미 오래 전부터 발달된 쟁기가 쓰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쟁기는 술의 모양에 따라 선쟁기·눕쟁기·굽쟁기로 구분된다.
선쟁기는 형태상으로 가장 고식적(古式的)이지만, 쟁기술이 땅에 닿지 않아 사실상 술이 없는 쟁기다 그래서 부리기는 어렵지만 삼각형 구조라 보습이 흙 속으로 잘 파고들기 때문에 땅이 척박하고 돌이 많은 강원도 등의 산골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반대로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사용돼 온 눕쟁기는 술이 길게 땅바닥에 닿기 때문에 쟁기가 안정되어 부리기가 쉬우나 쟁기가 크고 무거운 단점이 있어 땅이 부드러운 평야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눕쟁기는 술이 곧은 것과 둥근 것이 있는데 곧은술 눕쟁기는 눕쟁기의 전형적인 형태로 술-자부지-성에-한마루가 4각을 이루는 중국쟁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둥근술 눕쟁기는 자부지를 밀어 술을 세우면 선쟁기처럼 쓸 수 있고 눕히면 곧은술 쟁기처럼 사용하는 특징을 가졌다.
굽쟁기는 기본적으로 자부지-술-성에가 삼각형을 이루는 선쟁기의 형태지만 짧은 술이 있어 눕쟁기의 안정성도 가진다. 그래서 굽쟁기는 작고 가벼운데다 경기력(耕起力)이 좋고 안정성이 뛰어나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굽쟁기는 일본으로 소개되어 경심(耕深) 조절방식과 볏이 개량되어 일정기(日政期)에 다시 수입되었다.
쟁기
그 후 까막머리의 견인점(牽引點)을 바꾸어 경폭(耕幅)을 조절하는 방식과 쟁깃밥의 반전방향을 바꿀 수 있는 빗살형 볏쟁기가 등장하였고, 결국 이러한 유형의 쟁기가 지금의 경운기와 트랙터에 사용되는 쟁기의 모체가 되었다.
서양쟁기와 같이 철제 성에(beam)와 두 개의 자부지를 가진 개량 쟁기도 보급되었으나 널리 이용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쟁기는 소 한 마리에 쓰는 호리와 두 마리에 쓰는 겨리가 있다. 호리는 소백산맥 이남지방에서, 겨리는 중부 이북의 산골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겨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회전할 때, 바깥에 바깥 소와 안 소의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안소와 바깥소가 자리를 바꾸면 쟁기질을 못한다. 이러한 불편 때문에 소백산맥 이남에서는 산간지역이라 하더라도 겨리를 쓰지 않았다. 쟁기로 하루 1,000∼1,500평의 논을 갈 수 있었다.
쟁기를 예전에는 ‘잠기’(『물보』) · ‘장기’(『해동농서』 · 『임원경제지』) · ‘보’ (『사성통해』) · ‘보장기’(『농가월령가』)라고 했고, 한문으로는 대부분의 농서에서 여(犁)라고 썼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연장’ · ‘보연장’ · ‘보쟁기’ · ‘가대기’ · ‘가닥보’ · ‘귀보’ · ‘무리’ · ‘평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에 쟁기를 지워서 논밭을 갈 때 농부들은 아무렇게나 갈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농사에 더 좋은가를 생각한다. 대체적으로 논밭의 모양에 따라 긴 방향과 평행하게 갈아 나간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쟁기밥을 어느 쪽으로 넘길 것인가를 고려한다. 흙을 갈아 넘기는 방향은 논밭의 높낮이가 중요한 변수가 된다. 가급적 낮으 쪽으로 흙이 가도록 한다. 쟁기질을 통해 논밭의 높낮이를 가능한 한 조절하면서 땅을 가는 것이다.
느릿하면서도 묵직한 소의 걸음과 쟁기를 힘있게 잡고 뒤를 쫓는 농부의 모습을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쟁기를 보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1970년대 기계화농업의 대중화에 따라서 경운기와 트렉터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시대의 쟁기에 관한 글은 이덕휴의 신학포럼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덕휴목사의 만나교회/기도원 | BC 3천년 전의 쟁기- 그 역설의 생존 수단; 소에게 멍애를 단단히 매라- 굶어 죽지 않겠거든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