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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초의선사탄생지〕
1.일시:'22.4.16.토
2.장소: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로 30
Tel : 061-285-0300
茶文化에 대한 이야기는 생소하지는 않다.
고즈넉히 스미는 은은한 색과 마음을 사로 잡는 다향.
차는 단순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수양을 쌓는 예의 문화다.
草衣禪師(1786~1866) 탄생지는 우리 茶문화를 꽃피운 곳으로 무안 봉수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있다.
이곳에서 나름의 신선한 충격의 시간을 갖는다.
따스한 봄날 草衣禪師와 7시간 시간 가는줄 모른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조선 후기의 일이니 오래되지는 않는다.
茶를 통하여 교류하며 쌓은 선조들의 우정은 한편의 드라마가되어 후세에 유익하고 소중하게 전해지고 있다.
향긋한 한약 맛이 좋아서 오랜기간 십전대보차를 즐겨 마셨기 때문에서 일까.
따스한 봄날 남도에서의 차문화를 접하니 더 없이 흐뭇하고 가치있는 시간이다.
이곳에 다양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생가와 추모각과 추모비와 유물전시관과 다도관 등을 둘러보며 느낀 소감과 함께 당시의 자료들을 찾아서 차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해 두련다.
大覺門이라는 현판을 초의선사 유적지 경내에 들어오는 입구에서 마주한다.
大覺門은 사찰의 일주문과 같은 것이다.
대각문 좌우로 小門이 있으며 들어갈 때는 오른쪽 門으로 나올때는 왼쪽 門을 이용하라고 되어있는 것도 특이하다.
大覺이란 크게 깨닫는다는 뜻이니 이곳에 온 사람들 모두 큰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조선 헌종 임금에게 받은 사호인 '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에서 따왔다고 되어 있다.
경내에 들어서니 녹차 밭 정원지나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인자한 초의선사 동상과 추사 김정희가 초의에게 쓴 휘호 茗禪과 詩 비석들이 있다.
茗禪이란‘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차를 만드는 禪僧’이라는 뜻이라 하며 詩는 초의선사에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
‘靜坐處茶半香初
고요한 곳에 앉아서 차를 반이나 마셨는데도 향은 그대로고
妙用時水流花開
오묘하게 움직일 땐 흐르는 물처럼 꽃이 벙그네
草衣池는 주위 어디서 보더라도 한 곳은 보이지 않게 하여 깊은 맛을 내었다.
草衣池의 용호백로정은 서울 용산에 있었다는 김정희의 정자를 이곳에 복원했다고 하며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두 해나 머물면서 동갑내기 김정희와 함께 시를 짓고 청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정자 두 기둥을 초의지에 담기게 하였으며 마루 한 칸을 더 내어서 연못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범상치 않은 정자다.
정자 주위에는 영산홍, 자미화, 난초, 대나무, 매화, 차나무를 심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물소리, 솔바람 소리, 대나무 소리를 들으며 차를 달여 마시며 시를 지었다고 하니 그의 유유자적했던 삶을 상상 해본다.
연못에는 푸른 수양 버드나무가 고즈넉하다.
푸른 버드나무야
너 어이 그 머리를 들 줄 모르느냐
뭇나무 날 보라고 머리를 곧추들 적에
너는야 다소곳이 고개만 수그리네
............
바람결 스치여도 스적이는 나무야
어쩌면 네 아지 그리도 부드러워
하지만 모진 바람 네 손목 비틀적에
한 번도 네 마음 꺽지를 못하였네
4년 전(2018년) 동평양극장 봄이온다 공연에서 사회자 서현이 불러서 알게 된 북한의 인기 가요다.
가사에서 순수함과 따뜻함이 묻어난다는 멘트를 날렸었는데 오늘 초의지 버드나무가 그런 운치를 보여준다.
一枝庵 한 칸 초가집이 소박하다.
초의선사가 평생 수행하다 열반한 해남 대흥사 一枝庵을 복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당대에 많은 선비들이 일지암을 찾아왔고 선사는 차를 달여 대접하고 淸交의 시간을 가졌다고…….
해남 두륜산을 작년(‘21.1.24)에 갔었으니 1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일지암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였던 일과 사나운 개에게 놀랐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기성이 비보를 접했던 날이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다.
草衣禪師記念館에서는 다성 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과 활동상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朝鮮茶歷史搏物館은 2층으로 큰 건물이다.
우리 차의 역사와 초의선사의 일대기를 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차 도구를 조선 이전과 조선 전, 중, 후기의 순서로 전시하고 중국의 차 도구와 조선시대 차 문화를 기록한 도서를 볼 수 있다.
각 진열관에는 차 문화를 시대별로 한 눈에 알 수 있는 연대표가 전시되어 있고 우리나라 차 산지와 시대별 차 문화,
초의선사가 차를 만들던 제다법 및 차를 다리거나 마시던 행다법을 동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淸心齎는 맑은 마음을 기린다는 뜻으로 지은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저리도 멋스럽게 지어 놓다니ᆢᆢ.
艸衣禪院은 특별히 참선과 다도 수련을 위해 지은 목조건물인데 운영하고 있지 않아 아쉽다.
안내글은 초의선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있다.
초의선사의 철학은 명선(茗禪)이다.
다도(茶道)와 참선을 수행한다는 뜻으로 차로서는 몸가짐을 다스리고 선으로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다.
茶聖祠는 다성 초의선사의 동상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매년 선사가 태어난 4월 5일(음) 열반한 8월 초이틀(음)에 헌다제를 봉행한다고ᆢᆢ.
追遠碑는 탄생지에 다성사를 건립하고 선사의 생애와 행적을 간략히 기록해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사는 무안 삼향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에 나주 운흥사로 출가하여 벽봉 민성의 제자가 되었다.
19세에 해남 대흥사로 가던 중에 월출산 천황봉 위로 떠오르는 밝은 달을 보고 크게 깨달았으며, 대흥사에서 완호대사의 법을 이었다. 24세에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을 만나 유학과 시를 배웠으며, 30세에 한양으로 올라와 추사 김정희를 만나 평생 40년 지음이 되었다.
이후 많은 선비와 시와 차로 교유하며 크게 명성을 얻었다. 55세에 헌종 임금으로부터 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사호를 받았다. 두륜산 중턱에 지은 일지암에서 여생을 마치니 승려가 된 햇수인 법랍 65세, 세상 나이로 81세였다
金鰲草堂 초가집이 뜻밖이다.
조선초기의 뛰어난 시인이자 문장가 매월당 김시습의 다실을 고증을 거쳐 복원해 놓았다.
조선차역사박물관옆 봉수대 오르는 입구에 은둔해 두었다.
조선초에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글을 쓴 역사를 후세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지어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일지암도 그렇고 금오초당 황토색 초가집은 소박하기 그지없어 한참동안 발길을 잡는다.
普濟樓는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의 '보제'도 '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에서 따왔다.
초의차나 초의병차를 만들고, 초의선사의 행다법을 배울 수 있있으며 우리 전통 예절과 다양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경내에 기념관들은 층수와 면적 등 모두 하나하나에 초의선사와 관련된 의미를 부여해서 지어졌으며 건물들의 웅장함이 대궐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 茶의 역사]
우리 차(茶)는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동점되어 1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신라 흥덕왕 때 대렴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심은 이후 차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
신라의 茶문화가 귀족과 승려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면 고려시대의 음다풍은 귀족 및 일반 백성들까지 차를 즐겼다. 고려 때에는 차를 다루는 관청인 다방(茶房)과 차를 재배하는 다소촌(茶所村), 백성을 위한 다점(茶店)이 성행했었다.
고려시대에는 차문화의 르네상스시대였다면 조선에서는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茶문화를 다시 일으킨이가 草衣禪師다.
그는 다신전과 동다송이라는 두 권의 다서를 통해
다신전은 찻잎 따기, 물 끓이기, 차 만들기, 차 보관하기와 다구들에 이르기까지 제다에서부터 차 생활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담았으며
동다송을 통해서는 중국차의 제다법 대신 덖고 건조시키는 우리만의 다법을 이용해 만든 차의 색향미가 훨씬 뛰어남을 노래했다.
우리 차문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 茶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되었다.
[추사ㆍ초의ㆍ다산 통해 차문화 부활]
초의가 살았던 19세기는 혼란기였다. 조선의 음차(飮茶) 풍습 또한 자연 쇠퇴했으나 서산문도를 중심으로 차문화는 꺼지지 않았다. 그 시기 다신으로 불리는 초의 스님과 당대 금석학의 최고봉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ㆍ1786~1856),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ㆍ1762~1836)이 만나면서 조선시대 차문화의 틀이 형성되어 갔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만덕산 백련사(白蓮寺) 혜장(惠藏) 스님을 만나면서 차에 눈을 뜬다. 혜장은 다산에게 주역(周易)의 원리를 배웠고, 다산은 혜장에게서 다도(茶道)를 터득한다. 그 무렵 다산은 혜장 스님으로부터 대흥사에 기거하던 초의 스님을 소개받는다.
초의대종사탑비(艸衣大宗師塔碑)에는 이렇게 전한다. 다산승지(茶山承旨)로부터 유서(儒書)를 받고 시도(詩道)를 배워 교리에 정통하였고 크게 선경을 얻어 마침내 운유의 멋을 지었다.
초의는 다산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다. 초의는 제주도에 귀양 간 추사에게 해마다 차를 선물했는데 추사는 그 답례로 명선(茗禪)이라는 휘호를 선물한다. 원오극근이 쓴 茶禪一味에 견주어 추사는 茗禪을 쓴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이 조선에 널리 퍼졌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초의와 교류했던 다산 정약용은 음차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이라 했다.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다도문화를 정립한 초의의 다풍은 일본 다도문화를 앞지르고 있다. 일본다도를 완성한 센노리큐(千利休)는 다도정신을 화경청적(和敬淸寂)으로 정립했는데 초의 선사는 중정청경(中正淸境)으로 정리하여 중국이나 일본다도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초의 선사의 다도관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사위인 홍현주(洪顯周ㆍ1793~1865)이다. 초의가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 『동다행(東茶行)』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다행』은 전해 오지 않고 필사본인 『동다송(東茶頌)』만 전해 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교의 차 역사와 전개
[草衣禪師]
초의선사는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이다.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1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 행각하다가 대둔사 10대 강사 완호 윤우(玩虎 尹佑) 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는다.
초의선사는 늘 “모든 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諸法不二), “평상심이 곧 도”(平尙心是道)라는 것을 기본 자세로 삼았다.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으며 장 담그고 화초 기르는 것까지 허술히 대하지 않았다. 즉, 그에게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 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김정희와는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했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섯 번이나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사귀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茗禪)이 대둔사에 전해 온다.
일지암에서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소치 허련(허유)과의 인연도 있다.
[초의선사의 東茶頌은]
초의선사의 東茶頌은 한국 차문화에 있어 불후의 고전으로 불린다.
중국에 다경이 있고 일본에 남방록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동다송이 있다.
‘녹색의 싹과 자줏빛 잎이 뿌리를 뚫고 나와, 호인(만주사람)의 신발과 들소의 가슴 물결처럼 주름졌네(綠芽紫筍穿雲根 胡靴臆皺水紋) 맑은 밤이슬 흠뻑 받아 삼매의 손안에 기이한 향기 스미네(吸盡淸夜露 三昧手中上寄芬)’
‘다경에 이르기를 차는 난석(자갈돌) 사이에서 자른 것이 최고요,
화개동의 차밭은 모두 골짜기에 자갈돌을 겸하고 있다.
다서에서 또 이르기를 차는 자색이 최고이며 주름진 것이 그 다음이고 녹색이 그 다음이며, 처음 솟는 순이 상품이고 싹이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 모습이 호인의 가죽신 같다는 것은 주름이 졌다는 것이고 들소의 가슴 같다는 것은 반듯하다는 것이고 바람이 가볍게 스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담박하게 젖어있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차의 요지이다.’
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체이니, 좋은 물이 아니면 차의 신령함을 나타낼 수 없고 좋은 차가 아니면 물의 본체를 드러낼 수 없다.’
“차를 딸 때 그 묘를 다하고, 차를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참으로 좋은 물을 얻어서, 중정(中正)을 잃지 않게 차를 달여야 체(體)와 신(神)이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화합하면 차도(茶道)가 이루어진다고....
[네이버 지식백과] 동다송 [東茶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초의선사와 추사김정희]
초의는 추사 유배기간 동안 정성껏 마련한 차를 자주 보내 외로운 친구를 위로했으며 추사는 ‘一爐香室(일로향실)’이라는 편액과 ‘茗禪(명선)’을 보내는 우의(友誼)를 엿볼 수 있다.
“茶 땄소? 몹시 기다리고 있소, 글씨 보내니 빨리 보내주오…”
평생의 지음(知音)이 되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초의선사를 노래한 게송(偈頌)을 보면 선사의 가풍(家風)을 알수가 있다,
두륜산 마루턱에서 주먹을 불끈 세우고
푸른바다 비탈에서 코를 비비네,
홀로 무외(無畏)의 광명을 크게 베풀며
달을 가리켜 모든 어둠을 깨뜨리누나
복(福)의 땅이건 고통(苦痛)의 바다이건 가리지 않고
한 부처님의 마음을 죄다 가졌네
정명(正明) 보살의 말없는 게송이여
허공을 때리는 법계(法界)의 소리여
부처에 들고 또 다시 마군(魔軍)에 드니
다만 자기만 아는 웃음소리
살,고양이, 쥐잡는 지혜처럼
기(機) 용(用)이 서로 어우러져
봄 바람 한소식에 온갖 꽃이 피어
밝고 밝음이 오늘에 이르렀구려
이 게송은 '추사 선생이 초의선사에게 드린다'라는 글이다,
서간첩은 초의차에 대한 추사의 애정과 욕심, 질투에 이르기까지 추사의 내면을 보여주는 흥미롭고 귀한 편지다.
다른 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추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지금까지 50여 통이 확인됐다.
‘차 시절은 아직 이른가요. 아니면 이미 따기 시작하였소.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일로향실(一爐香室)의 편액은 마땅히 적절한 인편을 찾아서 보내겠소. 금년에는 차를 만들면 무더울 때 보내지 말고 반드시 가을을 기다려 서늘해지면 보내주는 것이 좋겠소. 항아리에 넣을 때는 단단히 싸서 보내도록 하시구려.’
‘차 봉지는 절대로 습기가 많을 때 갑작스레 부치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
‘늘 볶는 법이 살짝 도를 넘어 정기가 녹아날 것 같은 생각이 되니 만약 다시 만들 경우에는 곧 화후(火候)를 경계하는 것이 어떻겠소.’
‘다만 스님과 함께 죽로의 옛 인연을 다시 잇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소. 포장을 문득 꺼내니 병든 위장이 감동하고 감동하였소.‘
추사의 글 가운데 사사로운 감정과 내면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한 글은 없다.
그의 편지는 사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늘 엄숙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매우 이례적이다. 추사의 내면과 심경, 인간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다.
[우리차의 상식]
24절기 중 5번째 절기인 청명, 4월 5일과 곡우 4월 20일 전후로 찻잎을 따서 덮거나 찌거나 하는 과정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나오는차를 우전차라 한다.
곡우의 우자를 따서 우전차라 하고 차에 맛은 어린잎에 풋풋함과 달콤하고 부드럽고 차 속에 들어있는 카페인의 쓴맛과 타닌의 떫은맛을 가장 적게 들었기 때문에 차 중에서는 가장 상품 차라고 쳐준다.
그리고 그 후에 보통 5월 25일 이후부터 입하 전후로 두 번째 따는 차를 두물차라 한다. 그러니까 이제 곡우 전후로 따는 차를 첫물차, 그리고 그 이후 입하 지나고 나서 따는게 두물, 세물 이렇게 나간다.
보성이 대표적이고 함평에 부루다원도 있고 장흥에는 주로 청태전 해남에도 가장 우리의 차 역사를 꼽을수 있는 일지암이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해남 대흥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서는 전남도선차문화국제교류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수백명의 세계차인들은 한목소리로 ‘동다송’을 독송하며 다성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경내 돌아 보는데 4시간이 걸렸다.
무안의 승달산이 뻣어내려 왕산을 이루고 저 위에 보이는 봉수산의 봉수대를 만들었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은 왕 춘백의 꽃 길로 왕복 1시간이 걸린다.
봉수대에서 유달산이 보이고 그 옆으로 목포대교도 시야에 들어 온다.
회산백련지 위치도 나름 점찍어 본다.
황토땅 마을은 정겹고 바다에 유유히 떠 있는 배들은 한가롭다.
봉수대에서 내려다보는 초의선사 유적지는 생각보다 넓게 자리하고 있다.
차문화의 체험이 남은 인생에 자양분이 되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체험을 통해 나를 성찰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좋다는 생각을 한다.
선조들의 제다법과 행다법을 흉내라도 내면서 다도를 행하리라 생각한다.
2022.4.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