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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특전 U보트 ]
영화 <사선에서>, <아웃브레이크>, <에어 포스 원>,<트로이>의 볼프강 페터센 감독이 1982년에 연출한 전쟁영화로 반전 메시지와 휴머니즘을 짙게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특수효과를 사용하였으며 경이로운 흥행성적을 기록한 전쟁영화로서 독일 영화로는 드물게 1982년 아카데미 최우수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1941년 독일군 잠수함 유보트에 승선했었던 43명 선원들의 긴장감과 밀폐된 공간에서의 공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람보>식의 과장 없이 전쟁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있는 독일산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잠수함 관련 영화 중에서 최고봉으로 평가 받을 뿐 아니라 전쟁 영화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잠수함 영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푱! 푱!(영어로는 Ping! Ping!)" 하는 소나(청음기) 소리의 원조가 바로 이 영화입니다.
사실 현대 잠수함의 소나 소리는 더 이상 저렇게 들리지 않는데도 이미 이 분야에서 굳어져 버렸습니다. 원래 6부작 TV 미니시리즈(5시간 53분)로 제작되어 방영된 후에 호평을 받자 2시간 30분짜리로 편집하여 만든 것이 이 영화의 버전입니다.
요즘 구할 수 있는 DVD는 영화 버전에 일부 편집된 장면을 되살린 3시간 30분짜리 감독판이 나와 있습니다. 제작 당시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들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였다고 합니다. 물론 개봉 이후 본전은 뽑고도 남았습니다.1982년, 독일에 관한 국제적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안 좋았을 때, 독일이 만드는 독일군 영화라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켜버렸습니다.
진짜 전쟁의 참상이란 게 무엇인가,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출항 전날부터 임무를 수행하다 귀항한 직후까지의 유보트의 여정을 냉정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축축하고 비좁은 실내, 소나의 탐지음과 둔중한 폭뢰 소리, 해저에 갇혀 산소 부족과 악취 속에서 공포와 싸우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승조원들의 사투,등등
그리고 마침내 수면으로 떠올라 수평선을 향하는 배의 모습까지, 별다른 내러티브나 플롯을 드러내지 않고 잠수함 내부 공간에서의 일상과 전투 묘사에만 집착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함께 담아내어 사실주의 전쟁 영화의 백미로 꼽힙니다.
퉁명스러울이 만치 갑작스러운 강렬한 라스트씬은 사실적이면서도 한 편으로 극히 상징적인 장면으로, 이 영화의 메시지인 반전주의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작자인 로타-귄터 부흐하임이 실제로 이 잠수함의 배경이 된 U-96(함장: 하인리히 레만 빌렌브로크,유보트 에이스 중 한사람)을 타고 나간 경험을 쓴 소설이 원작입니다.
작중에서 나오는 종군기자 베르너 소위가 바로 로타-귄터 부흐하임인거죠.이 영화의 제작에 실제 U-96의 함장이었던 하인리히 레만-빌렌브로크가 감수로서 직접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레만-빌렌브로크는 "우리 유보트 승조원들은 영화 속에서처럼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며 격렬히 항의한 바 있고, 이 문제로 원작자와 대판 싸운 적도 있습니다.
또한 상당수 생존 유보트 에이스들 역시 빌렌브로크의 견해에 동조했는데, 또 다른 유보트 에이스는 전적으로 원작자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견해를 밝혀, 유보트 에이스들끼리 대판 싸우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는 독일이 1980년대 중반까지도 아직 완전한 반성을 이루지 못한 채 모든 것은 나치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히틀러와 나치에게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데 바빴다는, 특히 전쟁영웅인 생존자들 사이에서 그런 경향이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로도 일컬어집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병 중심의 육군과는 달리, 해군의 경우, 그중에서도 특히 전원 자원자만으로 구성된 잠수함 승무원들의 경우 그 사기나 동료의식이 특히 남다르다는 점도 항의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는 시종 철두철미한 극사실주의를 보여주는데, 감독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밸브 하나, 나사 하나"까지도 실제 유보트를 재현하도록 강박적일 만큼 정성을 쏟았다고 합니다. 영화의 촬영은 거의 1년 가까이 독일인들답게 시나리오 상의 순서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동안 승조원 역을 맡은 배우들은 이발과 면도를 못 하고 실내에서만 생활을 했는데, 그 결과 영화에서 임무가 진행되면서 승조원들이 점점 햇빛을 못 봐 낯빛이 나빠지고 머리털과 수염이 덥수룩해져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트 촬영을 위해 잠수함 세트의 벽 일부를 제거하고 찍은 장면도 있지만 대부분의 장면은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직접 몸에 장치하고 부상을 막기 위해 보호장구까지 두른 채로 잠수함 세트 안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촬영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폐소 공포증을 유발하는 잠수함 실내의 압박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 볼프강 페터센은 이 영화로 실력을 헐리우드에 인정받아 미국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이후 <에어포스 원>, <네버엔딩 스토리>, <퍼팩트 스톰>, <트로이> 등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전문 감독중 하나로 우뚝서게 됩니다.
그의 작품 성향은 헐리우드의 입맛을 맞추어 미국을 찬양하는 듯 하면서도 가만히 곱씹어보면 은근히 미국을 까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장 역을 했던 배우 위르겐 프로흐노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에어포스 원>의 라덱 장군이 바로 위르겐 프로흐노입니다.
[ 간략한 줄거리 ]
U-96의 출항 전날, 잠수함의 승무원들은 모두 함께 모여 파티를 벌입니다. 사병들은 함장의 자동차에 오줌을 싸고, 함장은 히틀러를 비웃는 독설을 내 뱉으며, 장교들은 프랑스 여자 가수의 드레스에 샴페인을 퍼붓습니다.
U-96의 항해에 동승하여 취재를 맡게 된 베르너 소위는 이런 풍경이 그저 어떨떨할 따름이지만 십자훈장을 수여받은 U-96의 함장 레만 대위는 그저 웃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염원의 환성 소리와 함께 U-96은 출항합니다.
그러나 잠수함의 웅장한 외관과는 달리 내부의 생활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음식을 넣어 둘 공간이 부족하여 어뢰실이나 심지어 화장실에까지 음식을 보관하고 함장과 종군기자를 제외하고 침대도 돌아가면서 써야 합니다.
함장은 비상 잠수 훈련 명령을 내리고, 비번 승무원들은 잠수함의 무게중심을 기울게 하려고 선수로 달려갑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U보트는 160m까지 잠수합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나치당의 선전 방송이 나오고, 열정적인 나치주의자인 신임 장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헛소리는 집어치워라”하는 반응입니다.
대신에 함장의 지시로 영국 노래 “테페레리”를 틀자 모두 즐겁게 따라 부릅니다. 공격하는 구축함을 따돌리고 곰팡이가 핀 음식을 먹으며 거친 북대서양의 파도를 헤쳐가던 중, U-96은 연합군의 대선단을 만납니다. 이윽고 수송선을 향해 어뢰를 발사, 대부분 명중시키지만 이어서 적 구축함의 치열한 폭뢰 공격이 이어집니다.
폭뢰를 피하고자 U-96은 200m 이상 잠수하자, 수압으로 인하여 잠수함의 볼트가 총알처럼 튕겨져 나와 승무원들의 몸에 박히기까지 합니다. 폭뢰의 폭발 압력이 잠수함을 막 흔들고, 깊은 수심에서 6시간 동안의 침묵 잠항 끝에 U-96은 겨우 다시 부상합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 불타고 있는 적함을 침몰시키려고 어뢰를 발사하는 데 그 순간 눈앞에는 불타는 함선에서 탈출하여 U보트로 헤엄쳐 오는 승무원들을 함장은 못 본체하고 지나쳐 버립니다.
그들은 곧 바로 라로셀(프랑스에 있는 U보트 기지)로 복귀하려고 했지만 사령부에서는 지중해로 들어가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으로 가서 재보급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적함이 우굴거리는 지중해로 들어갔다가 다시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승무원들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함장은 비전투요원인 베르너 소위와 참모를 스페인에 내려주고 육로를 통해 독일로 보내려고 노력해 보지만 거부되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재보급을 받은 후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대서양으로 나가려는데 적의 공습을 받게 됩니다. 영국군의 조명탄이 난무하는 해전에서 적을 피해 하는 수 없이 위험한 심도까지 잠항하던 중 설상가상으로 엔진까지 멎어버립니다.
잠수함은 28m 해저에 착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다시 부상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승무원들은 필사적으로 배를 수리해 보려고 하지만...베르너 소위는 참모와 함께 술만 마셔댑니다. 조국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같이 희생되는 동료가 아니라 단지 곁에 있어줄 사람만이 필요하다며...
마지막 남은 압축공기를 사용해 밸러스트를 배출하자 잠수함은 기적적으로 다시 부상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라로셀 군항으로 복귀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국군 폭격기들... 입항을 하자마자 베르너 소위를 제외한 U보트의 승무원들은 적의 폭격에 모두 전사하고, 함장 역시 침몰하는 U-96을 바라보며 숨을 거둡니다.
[ 대서양 전투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잠수함대(U보트)와 영국 해군(로얄 네이비)이 대서양에서 벌인 전투를 말합니다. 사실 전투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을 보면 사냥꾼과 사냥감이 손바닥 뒤집듯이 서로가 뒤집고 뒤집는 전투였습니다.
초반에는 U보트들이 영국과 미국 호송선단을 보이는 족족 고기밥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전황이 미국의 전시생산체제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어마어마하게 찍어낸 대잠초계기, 호위항공모함 등이 대서양에 집중되면서 독일 잠수함대의 멸망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 대서양 전투 개황도
* 개전 초기, 1939년
2차대전 개전 후 지상전에서 일방적으로 발린 끝에 유럽 본토를 독일이 석권하자 영국은 1차대전의 악몽, 즉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재판되리라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석유를 위시한 전략 물자와 식량의 절반을 해상 보급에 의존하는 영국에게는 사실상 나라의 운명이 썩은 동아줄에 매달린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일로서도 해군의 나라 영국의 대함대를 물리치고 해상봉쇄를 추진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당장 1차대전 패전 후에 잠수함은 아예 보유가 금지되었고, 나머지 해군전력은 무늬만 남을 정도로 제한받았으며, 재무장을 시작할 때도 전함 등 우선 수상함 전력부터 확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개전시 U보트 전력은 고작 56척, 게다가 그 중 일부는 실제 전투에 써먹기 어려운 실험용 잠수함이나, 항속거리가 절망적으로 짧은 연안용 잠수함뿐이었습니다.게다가 그나마 건조한 몇 안되는 수상함을 투입한 통상파괴전은 영국 해군의 봉쇄 등으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물론 상선으로 위장한 몇몇 보조순양함이나 포켓전함들이 먼 대양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개전시 각지에 개미같이 깔려있는 영국해군의 정찰망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몇 척 안되는 금싸라기같은 수상함으로 감당하기에는 위험성이 컸습니다.
결국 독일 해군은 기존의 수상함 주류에서 잠수함 주류로 전략을 수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억지로 정규해전에 투입해서 잃어버린 U보트 숫자도 20여척에 육박했기 때문에 U보트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 1940년~1941년
하지만 막상 전투가 개시되자 그 때까지 긴 급히 건조한 것을 합쳐도 겨우 40척에 불과한 U보트들이 당시 잠수함 전대 사령관이던 칼 되니츠가 도입한 이리 떼 전술을 통해 수십배의 연합군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이리떼 전술’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칼 되니츠 제독, 독일의 잠수함 전투를 지휘하다 전쟁 말기에는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총통이 됩니다. 전후 옥살이를 하고 석방
됩니다.
기존의 잠수함 전술 : 잠수함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정 수역에서 매복했다가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면 단독으로 습격하는 것. 홀로 다니는 배를 습격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어쩌다가 호송선단을 발견한 잠수함도 고작 1-2척의 손해를 가하거나 역으로 호송선단 호위함에게 격침당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리떼 전술 : 육상에 있는 지휘소가 미리 잠수함들을 호송선단이 지나갈 것으로 예측되는 수역에 분산해서 배치한 후, 배치된 잠수함 중 하나가 호송선단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무선으로 지휘소에 알리면, 지휘소는 제한시간 내에 해당수역에 갈 수 있는 모든 잠수함을 소집해서 호송선단을 잠수함떼가 습격하는 방식입니다. 이러면 호송선단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으며, 호송선단의 호위함 숫자가 적으면 호위함까지 잠수함에게 발리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리떼 전술이 먹힘에 따라 영국은 물자 부족으로 심각한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당시 상황이 심각했는지 처칠이 전쟁 중 가장 두려운 적은 U보트였다라고 회고했던 시점이 바로 이 때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40년 6월, 프랑스의 항복과 더불어 라로셀, 로리앙, 브레스트 등 대서양 연안의 항구를 얻으면서 기존의 유보트중 상당수가 항속거리가 짧은 관계로 북해 연근해에서 작전을 펼치던 수준에서 벗어나서 모든 유보트가 북대서양 항로를 직접 타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영국은 소나(청음기)의 전신인 ASDIC의 성능을 믿고 구축함 등 대잠전력 확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수면 위로 부상한 후 수상공격을 해오는 유보트를 상대로 ASDIC만으로는 잠수함 탐지와 추격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대잠수함용 폭뢰
이 시기를 가리켜 유보트 승조원들은 "Happy time", 소위말해 잘나가던 시절이라 불렀습니다. U보트 에이스 오토 크레치머와 요하임 셰프케가 국가 영웅이 된 시간이 이 시점입니다.
특히 오토 크레치머는 빈약한 호송선단의 외곽을 뚫고 중앙에서 부상하여 공격하는 대담한 전술과 함께 ‘어뢰 한발 당 배 한척’이라는 구호로 더 유명했습니다. 영국은 전쟁 이전부터 영연방을 포함한 대규모 상선대를 조직했지만 효과적인 대처법을 마련할 수 없었고, 월평균 30만 톤 이상의 물자가 대서양에 가라앉았습니다.이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은 금쪽같은 카리브해 군항들을 미국에 넘기고 1차대전 때 만든 구식 구축함을 받아오는 등 대잠전력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또한 효율적인 수송선단 편성, 독일 해군 암호체제의 해독 성공으로 1941년이 말이 되면 영국과 독일의 입장은 서서히 역전, 영국의 구축함, 프리깃, 슬루프 함 등의 대잠함선에게 격침당하는 U보트가 늘어나는 반면 독일군의 영국 수송선단 격침 전과는 갈수록 줄어들게 됩니다.이 사태는 이미 예견된 상태였습니다. 개전 전에 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군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최소한 300척의 U보트가 있어야 대서양 전투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상태였습니다.
왜 300척인가 하면 통상적인 함대운용으로는 현장배치 100척, 이동 중 100척, 수리보급 100척이 되기 때문에 항시 100척이 북대서양에 출격하는 상태가 되며, 이렇게 되면 진짜로 대서양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용 잠수함이 40척인데다가, 운이 좋아도 출격한 잠수함이 10척이면 대박이고, 어떤 경우에는 1척도 출격하지 못한 날이 많았는데도 엄청난 성과가 났는데, 그것보다 10여배 이상 많은 잠수함이 출격했다면? 영국을 말려죽이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초기에 이미 우루과이 앞바다에서 포켓전함 그라프 쉬페를 잃고 노르웨이에서 대부분의 구축함이 격침되거나 반파된 데다가 차례로 비스마르크, 샤른호르스트 등의 대형함들을 영국군과의 교전으로 잃어가면서 독일 해군 수상 전력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나중에 그나이제나우와 티르피츠마저 영국공군에 의해 각기 대파와 격침이라는 최후를 맞이하면서 사실상 독일 해군의 대형함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 해군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밀리기 시작했지만 유보트를 이용한 통상파괴전밖에 없었습니다.
* 폭뢰에 의해...
* 1942년
1942년에 이르러 전황이 다시 독일로 기울게 되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연합국, 미국의 참전이었습니다. ‘북치기 작전’으로 명명된 미국 동부해안 타격작전은 불과 5척의 잠수함이 17만 톤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이 해역은 유보트의 풍요로운 사냥터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독일 해군은 작전지역을 영국 근처인 북해와 북대서양 동부지역에서 미국 근처의 북대서양 서부로 옮기고, 아직 호송선단의 개념도 없었던 미국은 초기에 본토 항구 코 앞에서 무수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 당시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전쟁이 터진 뒤에도 전쟁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던 미국 시민들이 해안에서 유보트에게 공격받아 불타는 상선들을 구경하려 모일 지경이었습니다.
6월 초 미국이 연안방어를 서서히 강화하자, 되니츠는 신형 보급잠수함인 14형 U보트를 이용하여 해상보급을 이용하도록 명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존의 U보트 작전시간이 약 2주정도 늘어나면서 이제는 7형 U보트로도 카리브해까지 충분히 왕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 독일 잠수함 승무원
되니츠의 작전구상은 이런 항속거리 연장을 통해 미국 연안과 같이 아직 대잠방어가 미약한 연합군의 연약한 부분을 직접 강타한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U보트들은 카리브해와 멕시코만, 남아프리카, 그리고 캐나다 연안에서 기존보다 몇곱절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U보트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두번째 이유는 독일 해군이 기존 에니그마의 로터를 네 개로 바꾼 신형 에니그마, 이른바 트리톤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연합국의 암호 해독률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존 3개 회전자에 바탕을 둔 방식으로 암호를 해독하던 연합국은 이로 인해 1년여 간 암호 해독 공백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1942년 한해에만 1160척 600만 톤의 선박이 대서양에 가라 앉았습니다.
* 1943년 5월 이후
U보트 함대의 우위는 1943년 3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사이 연합군은 1942년 11월,호송선단 호위임무를 맥스 호튼 경의 서부접근해역사령부로 통합하고, 핼리팩스(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위치한 항구)와 아이슬란드에서 출격 가능한 B-24 리버레이터 항공기를 증강하여 대서양 중앙의 항공 암흑구역, 이른바 Air gap을 메꾸고자 했습니다.
이런 조치로 인해 대서양 전투의 연합군 전력은 체계화되었는데, 총지휘관인 맥스 호튼부터 잠수함 함장 출신이었으므로 유보트의 강·약점을 간파하여 호송선단에 소형 경계진함을 배치하고 소형항모가 중심이 된 지원단대를 구성하였으며, 장거리 공격항공기를 활용한‘Hunter-Killer’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영국을 유보트 위협에서 구출하였기 때문입니다.
* 리버레이터 기
그래서 맥스 호튼 제독은 양차대전에서 그의 조국과 영국 해군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을 정도니 유보트 입장에서는 진짜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 상대가 된 셈입니다.하지만 이런 연합군의 조치에 불구하고 U보트의 마지막 대활약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두 달 동안 연합군은 172척 83만톤의 상선을 손실하여 위기감이 부쩍 고조되었습니다.
물론 되니츠와 독일 잠수함 사령부는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손에 거머쥐었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세는 거짓말같이 5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연합군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사실 1943년에는 독일 잠수함 세력도 전쟁 초에 비해 확장되었지만, 이미 영국 해군이나 미해군은 소나 뿐 아니라 항공기용 레이더를 장비한 초계기를 활용하여 원거리에서 공기와 축전지 충전을 위해 물위로 떠오른 독일 잠수함을 탐지, 회피하거나 격침 시키게 되었습니다.
* 영국 선단
독일 또한 Metox, Naxos 등의 레이더 역탐지기를 개발하여 장착하였지만 연합국의 레이더기술은 독일에 비해 한걸음씩 빨랐으며, 그전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야간 수상 항해 중에도 격침되는 사례가 빈번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위협인 비행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출격시부터 잠수항해를 해야 하므로 속도가 느려지고 연료소모량이 많아지는 등 유보트의 항속거리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되며, 앞서 말했듯이 잠항한 상태에서는 소나에 잘 걸리므로 위험성까지 높아집니다.
또한 미국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공업능력으로 피해를 초과하는 톤수의 함선과 물자를 찍어냄으로써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함선이 늘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더해서 영국 해군의 작전을 본받아 호송 선단을 구성하는 한편 초계기와 호위 항모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일 해군을 압박했습니다.
* 선단을 찾아...독일 잠수함 승무원들
연합군은 U보트 한척을 격침시키기 위해 15척의 구축함과 100대의 대잠기를 동원했고, 본격적인 호위항공모함이 대서양에서 작전을 개시하자, 이후 수상에서 공격위치를 점거하려는 유보트의 활동을 크게 제한을 받아 호송선단에 대한 공격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재래식 전력의 역전과 함께 가장 뚫기 어려웠던 독일 해군의 에니그마도 해독하여 5월에만 40척의 U보트가 손실을 입었습니다. 당시 대서양에서 가용한 U보트가 200척 남짓한 시점에서 이러한 대손실은 더 이상 기존의 U보트로는 대서양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되니츠는 북대서양에서 U보트를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4년이 되면 사실상 독일 잠수함 전대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소수의 잠수함들이 출격하기도 하지만, 연합군에게 별다른 손실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 영화에서...
이후 독일 해군은 대서양 전투의 우위를 다시 되찾기 위해 수중속력 17노트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잠수함 21형 U보트를 건조됐지만 정작 첫 실전 투입은 1945년 4월 30일에 이루어져 전황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실전투입되지 못하고 항복시에 남아있던 21형 U보트가 118척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종전 직전까지 U보트 부대의 활동은 계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U보트가 활동을 정지할 경우, U보트를 잡기 위해 깔아놓은 엄청난 양의 연합군 해군전력과 공군전력이 지상전을 지원하기 위해 전환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대서양 연안 기지를 연합군에게 잃고 노르웨이로 후퇴한 후에도 U보트 부대는 수중에서 축전지 충전이 가능한 '스노클'을 이용해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처칠은 항복 직전까지 해상에 나가있는 U보트가 40척이 넘는다는 사실을 매우 놀라워했으며 이들로부터 불굴의 의지를 보았다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5월 4일, 전 해군총사령관이자 2대 독일 대통령 칼 되니츠는 U보트 부대의 항복을 지시하고, 해상에 나가있는 U보트들은 각자 가까운 임의의 항구에 입항하도록 함으로써 처절한 6년 여간 해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 뒷 이야기
2차대전 기간 중 보이지 않은 주역인 수송작전에 대한 무용담은 수없이 많습니다. 레닌그라드 승리의 원동력이 된 라도가 호수의 얼음길, 노르망디의 레드불 익스프레스, 악명 높은 버마통로 등.. 그러나 그 전투 규모나 치열함, 결정적인 면에서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서양 전투가 가장 먼저 꼽히고 있습니다.
육상전에 비하자면 화려함은 덜한 전장이었으나 잔혹함만큼은 독소전쟁 못지않았습니다. 피격당한 상선이 폭발물이나 유류를 싣고 있는 경우 탈출이고 뭐고 없이 승무원 모두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했으며 설령 구명보트로 탈출한다고 해도 혼자 움직이는 독항선이라면 구조신호를 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침몰 좌표를 무선 연락한 뒤 탈출하도록 되어 있었다만 배 가라앉는 와중에 그럴 겨를이 있을 리가 없었죠. 지금처럼 라디오 비콘이나 GPS가 도입된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거친 북대서양의 파도에 보트와 함께 삼켜지거나 보트에 탄 채로 고사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 영화에서...
기록에 따르면 17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 겨우 구조된 사람도 있을 정도니... 게다가 북극 항로와 같은 일부 항로는 바닷물의 온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 배가 침몰했다 하면 물에 빠지면 30분 내에 동태가 되고, 구명보트를 탔다고 해도 추운 날씨로 인해 3일 뒤면 얼음덩이로 변하므로 침몰은 곧 죽음이라는 말이 통용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일랜드와 영국 서해안에는 해안에 떠내려 온 수많은 상선 선원들의 시신을 장사지낸 묘지나 위령비가 곳곳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단이라고 나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U-보트 이리떼들에게 습격받은 상선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호위로 붙은 구축함도 피격을 무서워해 침몰선을 내버려두고 달아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주간이라면 나중에라도 발견될 확률이 높았지만 야간에 기습을 받았다면 동튼 이후 침몰 좌표로 가봤자 생존자들은 파도에 떠내려가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U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망률'은 타 병과의 수치를 아득히 초월합니다. 대전기간 U보트 783척이 격침되었으며 그와 함께 28,000명의 승조원들도 명운을 같이했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해군전력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비록 대서양 전투의 향방이 연합국 승리의 궁극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대가는 비쌌습니다. 치열했던 6년간 175척의 연합국 군함이 손실되었는데, 태평양 전쟁을 제외한다면 HMS 후드나 항공모함 HMS 글로리어스 같은 몇몇 사례를 뺀 나머지 연합군 군함의 손실은 유보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장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손실한 항공모함이 총 8척(정규항모 5척, 호위항모 3척)이었는데, 그 중 5척(정규항모 3척, 호위항모 2척)]이 유보트에 의해 격침당했습니다. 게다가 군함뿐 아니라 1,400만톤에 이르는 2,700여척 상선이 격침되었으며 이와 함께 35,000명의 수병들도 수중고혼이 되었습니다.
< 바다의 혈투 >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해상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피가 튀기는 지상전이나 장렬한 공중전에 비해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양국가(영국과 독일)의 운명을 짊어진 진정한 영웅들의 싸움터였습니다.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물자가 없이는 영국은 싸움을 계속할 수 없고, 독일은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개전 초기 독일의 잠수함(유보트)의 총 숫자는 31척에 불과했고 이 잠수함대를 이끄는 칼 되니츠 제독은 참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 무사귀환을 환영하며...
“100척의 유보트가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 수상함대가 거둔 것보다 더 큰 손해를 적에게 안겨 줄 수 있다. 200척이 있다면 영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보급선을 완벽하게 차단 할 수 있으며, 300척이 있다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총통의 관심은 여전히 육군과 공군에 머물러 있고 해군은 여전히 제3제국의 ‘서자’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되니츠 제독의 간청에 따라 총통은 유보트를 100척까지 늘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아무리 빨라도 1941년 말이 돼서야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 선단을 쫓는 바다의 이리떼들
이 어쩔 수 없는 문제를 놓고 되니츠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잠수함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획기적인 전술은 없을까? 해답은 ‘이리떼 전술’이었습니다. 탑재 어뢰가 고작 십수발에 불과한 유보트가 단독으로 일정 해역을 수색하고, 역시 단독으로 선단을 공격하는 종전의 방식으로는 설사 대선단을 발견하더라도 효과적인 공격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수척의 잠수함이 팀웍을 맞추는 집단공격체제로 바꾸면 어떨까? 즉 적의 수송선단을 발견한 최초의 잠수함이 그 사실을 무전으로 타전하면 근처에 있던 모든 잠수함들이 그곳으로 집결합니다.
* 영국 잠수함 초계기
그리고 최소한 10척 이상의 잠수함이 긴밀하게 협동하여 공격을 시작하면 선단은 흡사 여러마리의 이리들로부터 동시에 내몰린 양떼의 신세가 됩니다. 적의 호위 구축함이 한 척의 잠수함을 공격하는 사이에 다른 잠수함은 수송선 격침을 계속할 수 있고, 이런 방식으로 적의 호위함 자체를 격침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유보트를 비롯한 모든 잠수함들은 '물 속으로 가는 배'가 아니라 '필요하면 물 속으로 갈 수도 있는 배'라고 정의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선체를 밖으로 드러낸 수상 항해 상태에서는 디젤 엔진을 사용하여 시속 18 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잠수상태에서는 전동식 모터를 사용하게 되므로 그 속도가 6~7 노트 정도로 뚝 떨어집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수상선박보다 훨씬 더 느린 속도이므로 설사 수송선단을 발견하더라도 이 상태로는 도저히 그것을 추격하여 격침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유보트는 '운터 제 부트(Unter See Boot)' 즉 '바다 밑으로 가는 배'라는 그 이름과는 달리 물위에 부상한 채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적 수송선단의 발견도 이처럼 수상 항해 중에 육안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 잠수함 내부
그리고 잠수함의 사령탑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사방의 수평선을 살피며 수송선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나 불빛을 찾는 이 수색작업이야말로 유보트 작전의 핵심인 동시에 가장 고된 임무이기도 합니다.
북대서양 일대는 전 세계에서 가장 파도가 거친 곳이고 선체길이가 67m에 불과한 '조각배'에 불과한 유보트는 그 파도에 휩쓸려 쉴사이 없이 요동을 칩니다. 함교에 서 있는 당직 장교들에게 북대서양의 파도는 쉴 사이없이 함교 위로 덮쳐 옵니다.
시속 60 노트의 강한 바람이 4주 이상 계속되고 집채만한 파도가 덮쳐오지만 몸을 숨길 곳은 가슴까지 오는 강철 칸막이 한 장 뿐입니다. 부서지는 파도의 힘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납니다. 그들은 가죽 안전벨트를 함교의 쇠난간에 연결해 놓고 있지만 그래도 승무원들이 파도에 휩쓸려 가 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온다!'하고 고함을 지르면 일제히 자세를 낮춥니다. 다음 순간 수톤의 바닷물이 함교를 때리고 콧구멍과 귓구멍, 입속으로 바닷물이 가득 흘러 들어오면 익사 직전의 아득한 기분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파도와 싸우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악천후일수록 적의 수송선단도 경계를 늦추므로 그런 경황 중에도 망원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파도의 물마루 사이를 응시합니다.
* 1940년 10월 16일 자정 무렵
하인리히 블라이히로토 소령은 잠수함 U-48의 함교에서 나직하게 탄성을 올렸습니다. 함교 당직병이 건네 준 쌍안경에는 밝은 달빛을 배경으로 선박의 검은 실루엣들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대충 30척은 충분히 넘을 것 같은데요?”
“본부에 연락해! 아주 먹음직한 양떼를 발견했다고 말이야. 적어도 10척(잠수함) 정도는 모여주면 좋겠는데...”
프랑스 서부 로리앙에 있는 잠수함 전대 사령부는 U-48의 보고를 접한 즉시 근처에 있는 U보트들에게 선단이 출몰한 해역으로 향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6척의 U보트가 현장에 나타났고 본격적으로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1940년 10월 17일 밤은 영국 해군에게는 악몽이었고 U보트들에게는 환희로 가득찬 밤이었습니다.
* 영화 <U571>에서...
35척의 수송선 중에서 18척이 격침되었지만 잠수함의 피해는 단 한척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적 발견 보고를 발신한 후 영국 구축함에 쫓겨 실종된 줄만 알았던 U-48도 멀쩡히 살아서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거둔 대승리는 되니츠 제독이 총통에게 좀 더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해주었음이 틀림없고, 그동안 해군을 ‘버린 자식’ 취급을 해 오던 총통이 U 보트 전대를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1940-41년 사이에 북대서양의 겨울 날씨는 이전 수십년간을 통털어 최악이었고, 그 바람에 연합군 수송선단과 U보트의 활동은 다 함께 위축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야말로 독일 U보트 승무원들에게는 영광의 정점에 서있는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최고의 전과를 올릴 수 있는 전술이 이미 실전을 통해 입증되었고, 이제 봄이 되면 더 많은 바다의 사자들이 대서양으로 몰려나갈 것입니다.
* 영화에서...
* 종말의 서막
독일 해군의 U보트는 꾸준히 증산을 계속하여 1941년 가을 무렵에는 그 보유량이 200척 이상으로 늘어났고 그중 80척 이상이 상시 취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리떼 전술도 더욱 정교해져 연합군 수송선단의 피해도 엄청나게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영국도 이러한 피해를 당하면서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함정에 장착하는 레이더의 출현과 함께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호위함대의 대잠수함 전술이 더욱 정교해진데다 얼마 전부터 이 바다의 늑대들을 위협하는 또 다른 신무기 몇가지가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영국 해군이 ‘하프디프’라는 별명으로 부른 그 첫 번째 신무기는 일종의 전파 탐지기로, 호위함에 탑재된 이 기계는 U보트와 U보트간, 혹은 U보트가 잠수함 사령부와 교신하는 전파를 포착하여 그 발신 위치를 추적하는 장치입니다.
이것은 ‘이리떼 전술’을 운용해야 하는 U보트들에게 있어서 거의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리떼 전술은 무선교신에 의한 원활한 협조체제가 필수적이고, 하프디프에 의해 위치가 드러나는 것은 곧 이리떼 전술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신무기란 바로 항공기로, 이것은 새로 발명된 비밀병기라기 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던 잠재적인 가치가 새삼스럽게 입증되었다는 뜻입니다. 일찍이 되니츠 제독은 항공기와 잠수함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까마귀와 두더지의 관계다. 아무리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지만 땅속의 두더지는 잡을 수 없듯이 항공기는 절대로 잠수함을 잡는 무기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도 속도가 느리고 체공시간이 짧을 뿐 아니라, 적당한 공격무기조차 탑재하지 못했던 1차 대전 당시의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수함의 천재도 항공기의 발달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공에 항공기가 나타나면 대부분의 경우 잠수함은 급속히 잠수하게 마련이고, 이것은 곧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다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잠수함의 느려터진 수중항해 속도로는 도저히 선단을 따라 잡을 수 없고 또 물속의 잠수함은 호위함정에 장비된 소나에 의해 아주 쉽게 걸려들기 때문에 그때부터 공격은 커녕 도망다니기에도 바쁜 신세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 영화에서...
미국이 영국에 제공한 카타리나 수상기는 한번 날아오르면 25 시간이나 계속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 장거리 체공성능으로 인해 이런 잠수함 초계 임무에 더없이 적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는 승무원들도 거듭된 훈련과 경험으로 인해 물 밖으로 튀어나온 잠수함의 가느다란 마스트 하나도 놓치지 않을만큼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U보트의 작전행동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941년 말부터는 이런 대잠초계기에 레이더와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부착되면서 항공기는 더욱 강력한 U보트 킬러로 발전해 갔습니다.
* 영화에서...
멀리서 레이더로 물위에 떠있는 잠수함을 포착한 항공기는 그때부터 엔진을 끄고 양력과 관성에 의해 마치 글라이더처럼 자유 활강 상태로 잠수함에 접근해 갑니다. U보트의 함교 당직병이 소리조차 없이 자신의 머리위로 덮쳐드는 항공기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갑자기 고성능 써치라이트가 대낮처럼 수면을 밝히면서 잠수함의 형체를 역력히 드러내고 U보트가 허둥지둥 잠수를 시도할 때쯤이면 그 주변에 폭뢰가 마구 떨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대서양에서의 U보트의 활약은 몰락해 가면서 연합군의 역경은 서서히 물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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