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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밀묘지명(李密墓誌銘)에서 보는 고구려,
漢고조 유방의 건국을 돕다.
동부여는 한나라의 상국!
漢 書 高 帝 紀 ; (중략) 北 貉 、 燕 人 來 致 梟 騎 助 漢 。
〔 四〕 漢 王 下 令 : 〔 五 〕 軍 士 不 幸 死 者 , 吏 為 衣 衾 棺 斂 , 〔六 〕 轉 送 其 家 。
〔 七 〕 四 方 歸 心 焉 。 〔 八 〕
◈ “北 貉 、 燕 人 來 致 梟 騎 助 漢” 이란 무슨 의미인가 ?
【致 : 보낼 치. 전하다. 梟 : 올빼미 효. 용맹스럽고 사납다(勇 : 날쌜 용 同). 狢 : 오소리 학】
즉 북학【北狢 (북학 : 북쪽의 오랑캐 즉 예맥濊貊 또는 맥貊으로 동호東胡이며, 조선이다】과
연(燕)나라에서 (즉 예맥과 연나라에서) 용맹스럽고 사나운 기마병을 보내어 한을 도왔다(구원했다)는
본기의 기록이다.
북학은 북쪽에 있던 예맥을 말한다.
이들이 날래고 용감한 기마대를 한 고조 유방에게 보내 구원했다(도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서의 기록은 우리의 선대국들인 옛 조선과 그 후대의 삼한 및 삼국의 건국지가 반도나 그
북쪽쯤에 있다하는 통설을 부정하고 대륙에서의 조선의 강역에 대한 확고한 기록으로써 앞으로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사료된다.
물론 <안사고>는 해설에서 학(狢)은 동북방에 있다고 해설하였으나
한서 본기의 아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동북방이란 어불성설이다.
만약 이 <동북>지역이
㉮ 장안을 기준으로 동북지역인가
㉯ 감숙성의 천수 또는 장액. 주천지방을 중심으로 동북지역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왜냐하면 한고조 유방의 어머니에 대한 아래 기록을 보면 학(狢) 또는 예(濊)의 거점지는 북방지역이
었기 때문이다.
; 한서를 해설한 “안사고”는 학(狢=貈)은 삼한(三韓)에 속한 학<狢=貈=貊(맥)>의 일족이라 했다.
그렇다면 삼한은 당시에 요녕성이나 반도 북부 또는 반도에 없었다는 말과 같다.
≪안사고의 말대로 “동북”지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산서성을 포함한 하북성지역에 있었다는 말이 되며,
이는 삼한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 지역 모두가 삼한의 강역이었다는 말이 된다.
문제는 같은 한서 해설을 한 “문예”의 아래 해설 기록을 보면, 유주지방은 결코 하북성이나 동북삼성
지역이 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狢학>에 대해 알아보자.
사기 지명고에는 <동호조선지명>편에 기록되어 있다.
; “狢”≪학 : 오소리(담비) 학 : 오랑캐≫은 “貈(학 : 담비 학)”이며, 狢=貈이다.
또 狢=貈은 濊(예)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북적(北狄)으로써 戎狄(융적)의 땅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여기서 穢狢(예학)으로서 예맥(濊貊)을 가리킨다고 한다.
또 한(漢)의 동쪽에 있다고 했으며, 이들은 바로 “현토(玄兎)와 낙랑(樂浪) 2 군이다”(흉노전) 라 했다.
이러한 현토와 낙랑이 요녕성이나 반도 평양주위에 있었다고 한다면 희극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조선의 역사 강역은 해설자들의 입맛에 따라 제멋대로인 것이다.
; 또한 당시에 漢(한)이란 국가가 대륙의 동방지방 즉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 호북성, 산동성등지 까지
를 영토로 했다는 것 역시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볼만한 것은 <유방>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다.
한서 본기 한 고조 편을 보면 ; “母 媼” 이라 기록하고, 역사학자인 <문 예>는 해설하기를 ;
< 文 穎 曰 : 「 幽 州 及 漢 中 皆 謂 老 嫗 為 “媼” 。 」 孟 康 曰 : 「 媼 , 母 別 名 , 音 烏 老 反 。 」 師 古 曰 : 「 媼 , 女 老 稱 也 , 孟 音 是 矣 。 史 家 不 詳 著 高 祖 母 之 姓 氏 , 無 得 記 之 , 故 取 當 時 相 呼 稱 號 而 言 也 。 其 下 王 媼 之 屬 , 意 義 皆 同 。 至 如 皇 甫 謐 等 妄 引 讖 記 , 好 奇 騁 博, 強 為 高 祖 父 母 名 字 , 皆 非 正 史 所 說 , 蓋 無 取 焉 。 寧 有 劉 媼 本 姓 實 存 , 史 遷 肯 不 詳 載 ? 即 理 而 言 , 斷 可 知 矣 。他 皆 類 此 。 」
위의 기록을 보면 <“媼”할미 오>이다.
유주지방이나 한중지방에서 모두 나이든 노인들에게는 위의 “媼‘자를 썼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위의 유주 또는 한중만을 언급, 기록한 것은 다른 지방에서는 나이든 노인에게 <할미 오(媼>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중지방이나 유주지방은 같은 권역 내에 있어 글자와 말이 같았다는 이야기이며,
그 밖의 다른 지방은 달랐다는 의미다.
같은 글자와 말을 사용했다는 위의 기록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한중지방이 어디를 말함인가.
현재까지의 역사 해설은, 한중(漢中)은 한중군 또는 한중부 또는 한중도 지역으로써 섬서성 남부지역의
남정현에서 다스렸으며, 호북일부 및 사천일부까지 포함되는 섬서성 남부지역과 서남부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한중지방이 위의 지방이 확실한가에 대한 것은 미지수이다. (알 수 없다)
여기서 유주지방은 전회에도 설명한 바와 같이 장안 즉 신주(황성=황도=경조)의 북방지역을 말하기
때문에 남쪽지방 북쪽지역을 말하며, 한중과 유주지방 사이에 경조 즉 신주(황성=황도)가 있게 되는 것
이다.
아무리 무식한 역사학자라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주장처럼 하북성 동쪽의 유주지방과 한중 즉 섬서성
남부지역 또는 그 서쪽지역에서 사용되는 문자가 같을 수는 없다.
만약 같다면 대륙의 대부분 지역이 같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현재에도 대륙측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하물며 이천 이백여년전의 대륙 사정은 상상키 어렵다.
이 기록으로 볼 때는 말 그대로 중원(中原)은 중조(中朝)지방이요, 중조(中朝)지방은 중국(中國)이며,
중국(中國)지방은 한중(漢中) 및 경조(京兆) 및 유주(幽州)지방을 총칭하는 말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경조 및 경조지방을 찿아 보았더니 경조지방 속에 “유주”지방이 포함되고 있다.
(경조는 황성이 있는 황도 주위를 말함이고, 경조지방은 황도를 에워싸고 있는 옛 관내도 또는 경기도를
말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만 하다)
후대의 당서 본기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사군(四郡)은 고구려이며, 본시 중국의 땅(中國之地)이다 ” 라고 했다.
이는 본시 사군(四郡)은 고구려의 땅이었으며, 이 고구려 땅은 본시 중국에 포함되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中國)은 현재의 중국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중국이란 말 그대로 옛 관내도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결국 한 고조 유방의 어머니는 한중사람 또는 유주사람이라는 얘기다.
다른 말로 대신하면 한 고조 유방의 어머니는 관내도 사람이며, 유주가 고구려 속에 포함되는 땅이었
으니 조선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기록으로 보았을 때 본인은 여기서 한고조 유방의 어머니는 바로 <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위의 기록대로 유주지방에서는 <“媼”할미 오>이다.
유주지방에서 모두 나이든 노인들에게는 위의 “媼”(오)자를 썼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는 말
이다.
이러한 인식에는 한(漢)이 고구려였는가 하는 문제는 차후에 논하기로 해야 될 것이다.
여기서 예(濊) 및 연(燕)에서 날랜 기마병들을 보내 한을 구원했다는 기록에서 “연(燕)”애 대한 사기의
연세 가를 보십시다.
≪사기 본문 ; 召 公 奭 與 周 同 姓 , 姓 姬 氏 。 周 武 王 之 滅 紂 ,封 召 公 於 北 燕≫
위의 본문은 사기 연세가 서두에 나오는 기록이다.
연(燕)의 제후로 봉해진 <소공석>은 본시 주와 같은 성으로 【“희씨”이다】주(周)의 무왕이 주(紂)를
멸하고 소공석을 북연(北燕)의 제후로 봉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록을 보면 북연(北燕)으로 되어 있으니 당시 주(周) 무왕 “발”은 섬서성 서쪽 “호경(鎬京)에
도읍지를 정했다고 한다.
이에 북쪽의 연나라는 어느 지방을 지칭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당연히 호경(鎬京)지방을 중심으로 했을
것이며, 이 호경지방의 북쪽에 있던 지역에 소공석을 제후로 봉했는데 그 나라의 이름이 “북연(北燕)”
이라는 것이다.
해설자들의 해설을 본다면 ; 소공석은 주의 동족으로써 식읍지역이 召(소)였기 때문에 “소공”이라 했
다는 것이다.
문왕의 명으로 기(岐)지역을 취하고 이곳에 거했으며, 이곳은 기산(岐山 : 섬서성 서북)의 남쪽에 있었다.
후에 무왕(武王)은 소공석을 북연(北燕)의 제후로 봉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유주 계현의 옛 성이다≫라 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곳은 “기산(岐山)”이 어디에 있는 산의 이름인가가 될 것이다.
“기산”은 <섬서 기산현 동북에 있는 산으로써, 한지를 보면 ; 기산은 부풍 미양현 서북에 있다>하였다.
따라서 주 무왕이 “소공석”을 “북연”이라는 나라의 제후로 봉했는데, 소공석이 있던 곳이 바로 섬서성
서북 부풍의 기산현이었다는 말이다. 이곳이 본시의 북연의 터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세가의 본기 기록을 보자
≪其 在 成 王 時 , 召 王 為 三 公 : 自 陝 以 西 , 召 公 主 之; 自 陝 以 東 , 周 公 主 之≫
성왕시에 소왕은 삼공으로 하여금 통치케 하였는데 섬(陝)지역의 서쪽은 소공(召公)이, 섬(陝)지역의
동쪽지방은 주공(周公)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소공”이 다스리던 영역은 “陝”의 서쪽지역이 했으므로 “섬(陝)”지역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아보면 : 해설자들은 섬(陝)지방은 홍농의 섬현이라고 했다.
이곳은 황하의 남쪽에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쯤에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지역의 서쪽지역을 주 무왕으로부터 소공석이 제후로 봉 받았다는 말이다.
≪召 公 之 治 西 方 , 甚 得 兆 民 和 。 召 公 巡 行 鄉 邑≫
소공(소공석)이 서방(서쪽의 땅)을 다스렸으며,(중략), 소공은 시골과 도시를 순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을 보면 본시 “燕연” 즉 “북연”의 땅은 산서성, 하북성지역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섬서성 장안서북에 있던 부풍의 미양현 서북에 있던 기산주위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면 것이 옳다는 말
이다.
왜냐하면 북연의 제후로 봉해진 “소공석”이 이곳을 취하고 이곳에 있었던 까닭이다.
◈ 따라서 예맥이나 고구려는 본시부터 중원의 북방에서 시원했다는 것이다.
예(濊 또는 貊) 즉 학(狢 또는 貈)은 맥(貊)이요, 고구려(高句驪)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이니 한 고조 유방의 모(母:어머니)를 “온”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중지방과 유주지방에서≫
나이든 노인에게 호칭했던 말이다.
따라서 유주(幽州)지방은 한중과 직접 맞닿아 있는 지역이며, 이는 한중의 북쪽의 땅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漢(한)나라와 고구려(高句驪)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출발했으며, 고구려의 건국 시기 또는 건국 후
초기 정도에 한의 유방을 도와 서한(西漢)을 건국하는데 도왔다는 말인 것이다.
또 우리는 통상 하북성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북연>이란 나라의 위치가 결코 하북성에 있을 수 없는
중원의 서쪽, 서북쪽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후대의 이야기지만 <연산이나 연경, 계주, 어양등> 연(燕)과 관계되는 지명은 모두 중원을 중심
으로 보면 서북방 또는 북방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위와 같은 사례는 결국 한(漢)과 조선은 하나의 혈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즉 고조 본기의 ⋘祠 黃 帝 , 祭 蚩 尤 於 沛 廷 ........황제에게 제를 올리고,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냈다.
패연(沛延)은 패현(沛縣)을 말한다⋙ 기록과 아래 사기 오제본기를 해설한 “응소(옛 역사학자)”의
주(注)를 보면 ;
≪應 劭 曰 : 「 秦 襄 公 自 以 居 西, 主 少 昊 之 神 , 作 西 畤 , 祠 白 帝 。 至 獻 公 時 櫟 陽 雨 金 ,以 為 瑞 , 又 作 畦 畤 , 祠 白 帝 。 少 昊 , 金 德 也 。 赤 帝 堯 後, 謂 漢 也 。 殺 之 者 , 明 漢 當 滅 秦 也 」≫
✤ 秦진의 양공(襄公)은 서쪽에 거했으며, 주主는 소호(少 昊)지신之神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 중에 신라의 성씨에 대한 것을 보면 <신라 성 “金”은 소 호 금 천 씨(少 昊 金 天 氏)의 후손이라서 성을 “金”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다면 상기의 한서 고조 본기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또한 소호(少昊)는 “金德금덕” 으로써 또 帝堯後제요의 후로써 바로 “漢한”이란 말이다.
결국 국가의 명칭만 다를 뿐이지 한 고조 유방의 서한(西漢)이나 신라 역시 같은 혈통으로 내려왔다는 말
이다.
여기서 소호 금천씨의 손자가 제곡 고신씨이므로 이 제곡은 바로 고구려의 직계선조라 했으니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 한(漢)은 같은 혙통으로 이어져 왔다는 말이다.
고구려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37년이다.
하지만 옛 문헌과 자료를 근거로 유추해볼 때 그보다 172년 전인 기원전 20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한(漢)나라의 건국 시기보다 3년 앞선 것이다.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가 중국을 통치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조작했다.
한국 고대사 중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정설로
삼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은 기원전 37년 갑신(甲申)년이다.
이것은 기원전 57년 갑자(甲子)년에 박혁거세가 건국한 신라보다 21년이 뒤진다.
백제의 건국 연도는 이보다 더 늦은 기원전 18년 계묘(癸卯)년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남쪽 학자들이 문제삼는 것은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건국됐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북쪽 학자들은 고구려 건국 시기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적어도 100여 년은 앞선다고 본다.
남북학계 모두 고구려 건국 시기에 관한 한 ‘삼국사기’ 기록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그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한(漢)이 건국된 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고구려가 건국된 것은 유방이 한을 세우기 3년 전인 기원전 209년 임진
(壬辰)년이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가 한나라보다 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을 조작해 마치 중국 왕조의 번병(藩屛)으로 봉건(封建)을
받은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결론이 앞서지만, 고구려 건국은 유방이 한을 세운 것보다 3년이 앞선다.
그리고 중국 황제는 고구려의 봉건을 받았다.
고구려는 황제를 봉(封)하면서 이를 ‘장(장)’이라 했다. 지금부터 이러한 사실을 하나하나 고증해본다.
“유방이 漢 세울 때 이미 부여왕”
고구려 건국에 관한 가장 확실한 단서는 ‘역림’(‘초씨역림(焦氏易林)’의 약자, 전한(前漢)시대에 씌어진
역술서)에 있다.
“사슴을 쫓다 얻지는 못했지만(逐鹿不得), 바닷가로 가서(去之海隅), 바람을 맞으며 술을 뿌리면서(臨風
洒酒), 스스로 부여왕이 되다(自王扶餘)”라는 대목이다.
진(秦)나라가 사슴을 잃은 것(秦失其鹿)은 진시황이 죽고 나서다.
따라서 추모(鄒牟·고구려 시조 주몽)가 부여왕이 된 것은 진시황 재위 37년인 기원전 210년 신묘년 이후
라야 맞다.
또 하나의 단서는 ‘이밀묘지명(李密墓誌銘·고구려 시조의 직계후손으로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이밀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묘지명을 풀어보면, “처음에는 항우가 패권을 잡았다고 들었으나(始聞楚覇), 마지막에는 유방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終基漢皇)”고 했다.
‘역림’과 ‘이밀묘지명’ 기록대로라면 초한(楚漢)이 쟁패할 때 추모는 이미 부여왕이었다.
항우가 서초(西楚)의 패왕이 되고 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것은 기원전 206년 을미년이다.
학계에서는 이 해를 한고조(漢高祖) 원년으로 잡는다.
또 유방이 황제에 오르는 것은 고조 5년, 즉 기원전 202년 기해년이다.
‘역림’에는 또 이런 표현이 있다.
“성공한 사람은 물러나고, 덕을 품은 사람은 흥한다(成功者退, 懷德者興).
유계가 발분해 자영을 잡아 멸했다(劉季發憤, 擒滅子嬰).”
여기서 유계는 유방을 말하고, 자영은 진(秦)의 3세를 말한다.
자영이 죽은 것은 진 2세인 호해 3년, 즉 기원전 207년 갑오년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추하면 추모는
같이 사슴을 쫓다가 갑오년 이전에 이미 건국에 성공, 즉 부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건국한 해는 진 2세 원년인 기원전 209년 임진년이거나 이듬해인 208년 계사년 둘 중
하나다.
‘한서’ 예악지에서 천마가의 두 번째 부분과 관련해 ‘집서(執徐·秦의 해)’라는 태세(太歲·그 해의 간지
(干支))를 명기한 이상 그 시기는 기원전 209년 임진(壬辰)년이다.
이 해는 추모가 서정(西征·서쪽을 정벌)을 하고 돌아와 해본(忽口)에 건국, 건도한 해가 된다.
그렇다면 진나라의 사슴을 얻지 못했으면서 성공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역림’에는 “용과 뱀이 땅에서 일어나니, 천지가 반복한다(龍蛇起陸, 天地反復).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으니, 천하가 함께 쫓는다(秦失其鹿, 天下共逐)”라 씌어 있다.
진의 후사가 미정이라 천하의 호걸들이 투쟁에 나섰다는 뜻이다
“사슴을 쫓다 얻지는 못했지만…”
같은 내용이 ‘이밀묘지명’에는 “용의 무리가 원 사슴을 쫓아 달리니, 주나라의 구정(九鼎)을 노리면서
다투어 진족을 멸망시킨다.
때에 (추무는) 몸을 움츠리지만, 운명으로 배필을 만난다(口龍馳走原鹿, 競窺周鼎, 爭亡秦族. 時遭口屈,
運偶鳳翔)”라고 기록돼 있다.
영웅들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것은 주(周)의 정통을 이어받기 위해서였다.
진이 주를 멸망시킨 것은 주의 제사를 하나하나 뺏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진시황이 죽고 주의 대통을 잇는다는 것은 그 사슴을 차지하는 것과 사시(四時)의 제사를 주재
하는 권리를 차지하는 것 두 가지를 뜻한다.
즉 추무가 사슴을 얻지는 못했지만 성공했다 함은 시황이 죽은 뒤 주정(周鼎)을 확보했다는 뜻으로 이해
된다.
진의 사슴을 얻은 유방은 진시황이 만든 남전옥새를 주정을 가진 자에게서 전수함으로써 황제위를
확보한 것이다. 그 후 한(漢)은 국가적인 주요 제사의식을 감천궁(甘泉宮)에서 행했다.
‘역림’에 언급된 부여 건국에 관한 표현, 즉 “바람에 임해 술을 뿌렸다(臨風洒酒)”는 것은 나라를 세우
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제사를 지낸 것이라는 뜻이다.
‘역림’에는 또 “해본이 감천궁에 미치다(木底及泉)”라는 표현도 있다.
이 대목으로 미루어 감천궁의 제례의식을 해본이 주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방이 받은 옥새는 연면히 이어져 수양제가 양주에서 잃어버릴 때까지 황제위를 승계하는 상징으로
사용됐다.
해본의 제주는 신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들은 ‘천손(天孫)’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황(황, 況)’하는 자들이다.
‘한서’에 따르면 황(況)은 공(貢)이다.
또 황(황)과 같은 자로 아주 높으신 분이 아랫사람에게 사(賜)하는 것을 뜻한다.
조공(朝貢)의 공이란 것이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관해 ‘한서’에는 몇 개의 구가 부연돼 있다.
한무제도 “두 손으로 공손히 황을 받았다(拜況)”고 기록되어 있다
천마는 말이 아니라 사람
‘사기’ 악서의 ‘태일지가’와 ‘한서’ 예악지의 ‘천마가’의 앞부분은 악와수중(渥洼水中)에서 신마(神馬)
또는 천마(天馬)를 얻어서 지은 노래다.
그러나 이밀을 ‘악와용종(渥洼龍種)’이라 한 것을 보면 신마 혹은 천마는 분명 사람이다.
태일신(太一神)이 내려 보낸 천마와 대완(大宛·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지방에
존재했던 이란계 민족의 국가)에서 데려왔다는 천마는 둘 다 분명 사람이다.
‘사기’는 그냥 “앞서(嘗), 신마를 악와수중에서 얻었기로” 태일지가를 지었다고 언급할 뿐 언제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사기’는 이어 “후에 대완을 정벌하고 천리마를 얻었는데 말 이름을 포초(蒲梢)라 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역시 가시(歌詩·노래와 시)를 지었다. 따로 제목은 없다.
이 둘을 합해 ‘한서’는 ‘천마가’에 포함시켰다.
포초란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 유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구당서’에는 ‘고려 역대 포주(逋誅)’란 표현이 더러 보인다.
포초는 포주와 관련 있는 단어인 것 같다. 당나라에서 악의적으로 쓴 표현이었을 것이다.
모돈을 묵도(墨毒) 또는 보도(朴達)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설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밝혀지길 기대한다.
‘사기’의 ‘태일지가’는 신마를 노래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태일신이 천마를 받들어 내리셨네.
붉은 땀에 젖어 땅도 그 땀에 붉게 젖었네. 달리는 모습은 만리를 내닫네.
이제 배필을 안돈하니 용이 친구일세
(太一貢兮天馬下, 霑赤汗兮沫流再赭, 騁容與兮口萬里, 今安匹兮龍爲友).”
‘사기’의 두 번째 ‘천마가’의 내용은 이러하다.
“천마가 오네. 서쪽 끝에서부터, 만리를 지났네. 덕을 갖고 돌아오네.
영령의 위엄에 힘입어 외국을 항복시켰네.
사막을 섭렵해 사이를 복종케 했네
(天馬徠兮從西極, 經萬里兮歸有德, 承靈威兮降外國, 涉流沙兮四夷服).”
이 시가가 대완에서 데리고 왔다는 포초마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 ‘한서’에는 가시의 본문 중에 “천마가 오네.
집서시에(天馬徠, 執徐時)”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집서란 앞서 말했듯 진의 해를 말한다.
또 보태진 내용에는 “천리를 질러오고 동도를 순행하네(徑千里, 循東道)”라던가 “나의 몸을 세워 곤륜을
갔다 오네(竦予身, 逝昆侖)”라는 표현이 있다.
여(予)와 모(矛)는 혼동하기 쉬운 자다. 서(逝)는 ‘갔다가 거기서 출발했다(往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두 번째 천마가를 ‘이밀묘지명’에서 추무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힘써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사방을 통치하고, 육합을 떨쳐 흔들며, 팔황을 수중에 거두었다(勞百戰,
經營四方, 振蕩六合, 牢籠八荒).”
육합이란 천지와 사방을 합한 것으로 세계 혹은 우주란 뜻이다.
팔황 역시 팔방(八方)의 끝이란 뜻으로 전세계를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이런 표현도 있다.
“이곳 동하에서부터 떠나더니 돌아와서는 서방의 진리를 설파한다(爰自東夏, 言遵西路).”
여기서 동하는 동중국이며 준로는 참된 길, 즉 진리라는 뜻이다.
동쪽에서 출발해 불교 탄생지, 즉 계림(鷄林)을 다녀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두 번째 천마가는 추모(鄒牟)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마구지(高句驪)나 구려(句驪)나 모두 마(馬)부 변이 붙은 자를 쓴다.
주몽의 후예는 악와(渥洼) 천마(天馬) 종들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천마가는 추무의 어머니인 ‘고구려(高句驪)’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서’에 따르면 첫 번째 신마가는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악와수중에서 말이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그해는 신유(辛酉)년이다.
두 번째 신마가는 태초 4년(서기 101년)에 대완국 왕을 죽이고 얻어온 대완마를 대상으로 해서 지어진
것이다. 경진(庚辰)년이니 태세 집서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시의 끝에 부연한 연도에 구애할 필요는 없다.
당(唐) 태종의 이념에 충실했던 학자 안사고(顔師古)가 고구려 건국 시기를 한나라 이후로 만들기 위해
‘한서’를 해설하면서 가필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앞의 논증처럼 그것이 말(馬)이 아니라 사람을 노래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무의 고구려 건국은 앞에서 고증한 것처럼 진시황 사후이면서 한고조 유방이 제위에 오르기
전이다.
이 시기의 집서를 찾으면 진의 2세인 호해 원년인 임진(壬辰)년이다.
태세가 진(辰)의 해니 집서의 해며 진나라가 사슴을 잃은 것과도 합당하다.
따라서 해본(忽口)에 추모(鄒牟)가 고구려(高句驪)를 건국하고 건도한 것은 정확하게 기원전 209년
임진년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를 서기 668년으로 잡으니 고구려의 존속 연한은 877년이라 하겠다.
‘당서’ 고려전에는 668년 당 장수 이적이 고구려를 치러 떠나는 것과 관련해 가언충의 말을 빌려 고구
려는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근거로는 고려 비기(秘記)에 ‘고려가 900년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80세의 대장이 멸할 것’이라 했
는데, 고씨(高氏)가 나라를 세운 것이 한나라 때이고 지금까지의 존속기간이 900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여든이니 비기의 예언처럼 고구려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얘기하고 있다.
고구려 존속기간은 900년이 채 안 된다는 것과 고구려 건국은 한나라 때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다루는 기본 방향이다.
“한나라 황제 기반 마련”
우리가 고찰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존속기간은 900년이 못 된다.
그러나 중국의 뭇 왕조는 그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명멸했다.
여기서 고구려가 900년을 버텼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중요하느냐는 의문이 든다.
사실 장수한 것으로 치면 신라가 고구려에 앞선다.
1690년대까지 존속한 중국 푸젠(福建)성의 신라가 아니라 ‘당서’에 기술된 것처럼 서기 935년에 망한
반도의 신라라 하더라도 고구려보다 더 오래 존속했건만 이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고구려의 건국시점과 존속기간이 중요한 것은 중국의 옛 왕조가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가들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한나라 때에 고구려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앞의 두 가지 내용은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국가로 존재했다(高氏自漢有國)”는 기록이 거짓
임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당나라 초 위징(魏徵)이 편찬한 ‘이밀묘지명’에는 분명히 고구려 시조 추무가 “마지막에는 한나라 황제
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終基漢皇)”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당 고조에게 애걸한 사람은 80세의 장군으로
뒷날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적이었다.
이적은 고구려의 이밀이 거느린 고구려 한 부(部)의 옛 관리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황제를 통치한 내용은 앞으로 차차 밝혀질 것이다.
추모가 해본에 수도를 창건한 해인 기원전 209년은 추무의 어머니 모두(旄頭)가 흉노, 즉 고구려(高句驪)
를 건국한 지 38년째에 해당한다.
진시황이 죽은 다음해다.
그러나 고구려는 물론 이후의 구려, 즉 고려에서도 부여신인 추무의 어머니는 절대적으로 신격화된 존재
였으므로 그녀가 탄생한 해를 특히 중요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첫 번째 천마가는 악와수중에서 천마가 태어난 것을 기려서 만든 것이라 했다
(元狩三年. 馬生渥洼水中. 作).
그러나 정작 ‘한서’ 무제기에는 원수 3년(기원전 120년)이 아니라 원정 4년(기원전 113년) “6월에 후토사
옆에서 보정(寶鼎)을 얻었다.
가을에는 악와수중에서 말이 태어났(馬生渥洼水中)기로 보정과 천마지가를 지었다(作寶鼎, 天馬之歌)”고
언급돼 있다.
주(注)에는 이배의 해설이 인용돼 있다. 남양 신야현에 사는 폭리장이란 사람이 무제 때 형을 받아 지금의
둔황 일대에서 둔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야생마들 가운데 기이한 말이 있었다.
이를 잡아 길을 들여 조정에 바쳤다.
악와수는 지금의 간쑤(甘肅)성 안시(安西)현 당허의 지류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한서’와 ‘일본서기’의 오류
‘사기’ 악서는 사시가의 다음에 “또 전에 악와수중에서 신마를 얻었기로(又嘗得神馬渥洼水中) 다시 다음
으로 태일지가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표현은 신마를 얻은 것이 꼭 무제 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기’ 효무제본기에는 악와수와 신마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한서’에 기록된 ‘마생(馬生)’과 ‘사기’에 기록된 ‘득신마(得神馬)’는 그 의미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존(至尊)한 태일신이 내리신(況) 신마 또는 천마가 어찌 야생마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든다.
한무제도 효사(效祀·제사)에서는 “황을 받들어 받았다(拜況).”
또한 생(生)했다는 것과 득(得)했다는 것도 크게 다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보면 ‘한서’의 ‘악와 천마’ 관련 부분은 당나라 때 손을 본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고구려’란 이름의 여인을 칭송한 노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주갑(周甲)을 단위로 연대를 조작해 놓은 ‘일본서기’가 초대 천황의 즉위 연대를 잘못 기술한 것은 확실
하다.
정확한 기록을 ‘서기’ 편찬자도 갖고 있지 못했거나 ‘한서’를 근거로 계산하느라 착오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가마우지(高句驪)를 그들의 신화 속에서 일신(日神)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마우지의 건국 연도를
추무왕이 건국한 시기나 즉위한 해로 잘못 이해했거나 아예 그렇게 만들기로 방침을 세워 착오가 생겼을
수 있다.
그러나 신유(辛酉)라는 연도 자체가 ‘한서’ 효무제본기와 서로 어긋나는 것으로 보아 애초 조작된 ‘한서’를
참조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가 씌어진 것은 8세기 초엽이고 안사고가 ‘한서’를 손본 것은 7세기 초엽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전한서 권1상 고제기 제1상 4년(BC 203)조를 보면,
"北?燕人來致梟騎助漢"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
?在北方三韓之屬皆?類也" 라는 안사고의 주(주석)가 달려있다.
(기원전 203년에 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 맥은 동북방에 있는 삼한의
지속으로 모두 맥류이라는 뜻)
*중국 사람들은 주변의 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맥은 동호, 숙신과 함께
고대 중국의 동북부지역(오늘날 하북성 북쪽과 내몽골 동쪽, 요동반도, 만주를 포함한 지역)에 거주한
민족이다.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를 맥 또는 예맥이라 불렀는데, 기원전 203년경의 북맥이란 고구려의 조상인
북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03년은 진나라 말기로서 매우 혼란하던 시기였다.
특히 항우가 기원전 206년에 서초의 왕위에 올라 팽성에 도읍하고 초나라의 의제로부터 제위를 찬탈
하게 되어 중원의 주인이 되는 듯 했으나 기원전 203년에 북맥과 연나라가 용감한 기병을 보내 유방을
도와주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유방은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북부여 해모수가 한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공짜란 없는 법이고, 이는 국가간에도 똑같은 룰이 적용된다.
거란이 석경당에게 군사를 지원해주어 후진을 건국하게 해 준 대가로 옛날 고조선 때 연나라 진개의
침공을 받고 빼앗겼던 연5군 지역을 포함하는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대제국 요나라로 발전했듯이,
군사를 지원하여 나라를 세우게 해주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북부여는 군사를 지원하는 대가로 유방에게 요동군 땅을 요구했던 듯하고, 실제 한나라가 서자
북부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국경을 진나라 때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으로부터 요수로 후퇴시켜
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서에는 땅을 할양하여 주었다는 기록은 차마 남길 수 없었던지 사마천은 사기 조선전에
"한나라가 흥기하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가 어렵다 하여 요동(요수의 동쪽)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요수(원문에는 패수로 되어 있으나 요수의 오기라고 한다) 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라고 기록했다.
멀어서 지키기가 어려워서 그를 포기하고 국경을 후퇴시켜 정했다?
이는 말이 안 되는 옹색한 변명이지만 군사지원의 대가로 요동군 땅을 북부여에게 할양하여 주었던
것을 사실대로 기록할 수가 없자 이렇게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 후 한 고조 유방이 죽자 기원전 195년에 이르러 연왕 노관이 한나라에 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위만은 조선(고조선)의 준왕에게로 망명해오게 되고 준왕은 위만을 만번한 부근의 상하운장에
살게 해주었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조선의 준왕이 베풀어준 은혜를 저버리고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준왕을 쫓아
내고 왕검성을 차지한 후 조선(위만조선)의 왕위에 오르게 되고, 준왕은 좌우궁인들과 측근들을 이끌고
급히 남쪽으로 도망쳐 마한 진한을 합하여 금마에 도읍하고 다시 한(韓)을 건국하고 한왕에 오르는 것
이다.
(중략)
(중원의 왕조들이)고구려의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를 보면 대개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있
는데, 이는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이 요동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고, 백제 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는
대개 '대방군공 백제왕'인데, 이는 백제가 대방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신라왕들에게 주어진 작위는 대개 '낙랑군공 신라왕'인데, 이는 신라가 낙랑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중략)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부여도 원래는 요동군 땅에 접해 있는 그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은 뻔한 일이고,
동부여와 졸본부여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다.
세 부여는 지금 한반도의 북쪽 압록강 너머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북쪽, 내몽골에
존재했던 나라였던 것이고, 고구려의 건국지 역시 그 부근인 것이다.
*요사를 읽어보면 부여에 관한 희한한 기록이 나옵니다. 발해(대진국)의 부여부도 그렇고,
요사에 따르면 부여의 땅은 지금의 베이징과 그 일대로 나옵니다.
밑에 추가 자료들이 있는데 단지 참고삼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
/L/menu/256?brdType=R&thisPage=1&
bbIdx=2295&searchField=&searchTex
(주몽은 한나라를 알고 있었을까?)
http://www.ohmynews.com/nws_we
b/view/at_pg.aspx?CNTN_CD=A0000388308
오마이뉴스-주몽은 한나라를 몰랐을 수도 있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532/1 신동아-고구려 시조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항우와 유방이 중원 땅을 두고 다투었을 때 당시의 부여(북맥)를 다스린 통치자가 누구였을까
북부여의 단군(북방유목민족들은 '탱그리 칸'이라고 부름, 당태종 이세민은 돌궐족을 멸하고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칭호을 받았음)이었던 해모수였을까 아니면 졸본부여로 와서 소서노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다음 고구려로 국명을 바꾼 주몽(해모수의 고손자?)이었을까.
고조선 말기에 대부여가 나오고 이후에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 등 부여가 분열한 건지 그틈을 타서
고구려도 독립한 모양..
혹자는 고구려가 나라 이름이 아니라 한나라의 군현에 포함된 곳으로 본래 해모수(주몽이 아니라)가
태어난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편에 나오는 당고종과 가언충의 대화 내용처럼 고구려 비기의 예언대로
이적(당나라의 명장)의 나이가 팔십이고 고구려는 구백년에 조금 미치지 못하여 멸망한다는 당나라
측의 주장대로로 정말 고구려 역사는 칠백년이 아니라 구백년이었을까.
진시황 사후에 주몽이 유방보다 3년 앞서 고구려를 세웠다면 BC209년이 되니 멸망한 AD668년까지
877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나오는 고구려 왕조 계보에 관한 연대기록이 서로 다르니..앞으로
부여와 고구려의 발상지(만주 혹은 내몽골?)에서 새로운 사료들이 나오는대로 학자들이 연구해서
밝혀야겠지만..
*여담으로 정사 삼국지에서 漢時,夫余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郡,王死則迎取以葬(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나라 때 부여의 왕이 죽으면 장례용으로 옥갑(옥으로 된 수의)를 만들어 준비했다는 기록입니다.
혹자는 부여가 단순한 북방기마민족이 아니라 옥을 사용한 조각품 등 세공술도 뛰어났다며 한나라가
옥갑을 만든 게 아니라 부여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부여가 초한 전쟁 때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한왕 유방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게 기병들을 보내
주었을까.
당시 진나라 이후 석궁병과 전차병이 대세가 된 것 같은데..과연 초원에 익숙한 북방민족들의 군사력이
중원에서도 통할 수 있었을까.
항우가 훈련시킨 막강한 초나라 군대가 북맥과 연나라에서 파견한 기병을 못 당했을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나라)이 후진의 고조 석경당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연운16주를 받아냈다는
대목에서 중공의 모택동이 궁지에 몰린 김일성을 구하기 위해 인민해방군(?)를 보내주었던 역사적
사실이 생각나네요.
그 대가로 겨우 백두산 반쪽만 얻었다고 하는데..정말 그뿐일까 다른 이권은 없었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아마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유지해 완충지역을 만들어 놓은 것만으로 만족했을 겁니다.
압록강 근처까지 북진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우리로선 아주 원통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지만..
http://www.histopia.net/zbxe/index.php?&mid=
neo&category=3303&search_keyword=
_target=title_content&document_srl=7613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이 건국자로 나온 까닭)
*위에 링크된 새한국고대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조약돌님이 올린 흥미로운 견해가 있습니다.
주몽이 천손天孫이 아니라 한漢의 군현 설치를 피해 달아난 나라의 군주(외부세력이 되는 망명정부의
지도자?)임을 솔직하게 밝혔다면 피지배민에게 권위가 서지 않을 것을 우려해 주몽 이전의 역사를
애매모호하게 기술하거나 아예 누락시켰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고구려 왕력을 그대로 기술했다가는 한때 고구려보다 부강했던 부여(졸본부여)의 기득권층이 반발
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고구려 왕력을 무시하고 피지배민이 된 부여의 왕력을 강조하는 것도 불가능
하니..주몽과 소서노의 이야기만 살려서 부여와 고구려 두 세력간의 경계심을 누그려 뜨려서 통합을
유도했다는 이야기..
반면 중국측은 고구려의 기원과 이동방향을 숨길 필요도 없고 고구려인이 동쪽으로 달아나 다시 나라를
세운 사실을 알고 있어서 주몽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를 합쳐 구백년이라는 존속기간을 그대로 남겨두
었다고 합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고려와 조선시대의 사가들이 부여에 대한 기록들을 중시하지 않고 잘
남겨 놓지 않는 이유가 부여의 선주민은 대다수가 원래 고구려 일족이었고 부여의 지배층은 처음부터
외부에서 온 정복세력이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이건 해씨(부여씨)와 고씨의 주도권 다툼을 말하는 듯..고구려 태조왕이 유리명왕 이후의 해씨 세력을
누르고 고씨의 천하를 다시 일으켰다는 설인데..
추모왕(고주몽)이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왔던 그 해에 죽었다는 사실(정확하게 유리가 졸본부여에
도착한 5개월 후에 주몽이 서거했다)이 의심스러운데 주몽의 친구 협보도 유리왕에게 좌천당했죠.
협보는 분개해 남쪽의 한韓으로 이주했지만..
후에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걸 봐도 훗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처럼
기존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수도를 이전한 모양..
지난 2006년과 2007년에 국민적 인기를 독점한 MBC 드라마 <주몽>. 드라마 속의 주몽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중국 한나라에 맞서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주몽은 과연 한나라라는 국가를 알고 있었을까? 물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당연히 한나라를 알았을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때는 기원전 37년
이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때는 기원전 202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는 <삼국
사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여타 부분과 충돌할 뿐만 아니라 중국측 사료의 내용과도 충돌한다.
이 점을 증명하는 사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중국 <한서>의 기록.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 한서 > ‘지리지’에서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
시키고 한사군을 설립할 당시에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 안에 고구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했다.
“(기원전 107년에) 현토군은 호(戶)가 4만 5천 6개이고, 장정이 22만 1845명이었다.
(그 아래에) 현이 3개 있었으니, 고구려현·상은대현·서개마현이었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전부터 고구려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기존의 고조선과 사대관계에 있었던 고구려가 고조선의 멸망을 계기로 한나라와의 사대관계 속에 편입
되었기 때문에, 한나라가 고구려 지역에 형식적이나마 현(縣)이라는 행정단위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한나라가 이민족 영역에 세운 군(郡)이나 현은 실질적으로는 토착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다시 말해, 한나라가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는 자국의 패권을 따르는 이민족의 영역에 자국의 행정단위를 설치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
민족들은 한나라로부터 경제지원을 챙겼다.
그러므로 한나라가 고구려 땅에 설치한 현이라는 행정기구는 그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신라가 삼국의 원조’라는 김부식의 기록이 허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서>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107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둘째,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 비문.
광개토태왕이 시조 주몽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이 비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몽의) 이 기업을 이어받았으며, □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上廣開土境平
安好太王, 광개토태왕)이 二九(18세)에 등극하여 영락태왕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는 글자를 식별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주목해야 할 것은, 광개토태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김부식의 주장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주몽의 12세손이다.
< 삼국사기 > ‘고구려 본기’에 있는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김부식의
기록을 종합하면, 광개토태왕은 주몽의 12세손이 된다.
광개토태왕이 주몽의 몇 대 후손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아니라 광개토
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다.
장수왕 본인이 “우리 아버지는 주몽의 17세손”이라 했으니, 우리는 김부식보다는 장수왕의 말을
보다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광개토태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니라 실은 17세손일 경우에는 광개토태왕과 주몽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그만큼 더 멀어지게 된다.
5세대가 더 멀어진다는 것은 적어도 150년은 더 멀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주몽의 건국 시점은 <삼국사기> 기록보다 최소 150년 이전으로 더 올라가게 된다.
기원전 37년에서 최소 150년을 더 앞당기면, 적어도 기원전 187년 이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잠정적 결론이 나온다.
<삼국지 부여 원문>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 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 >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 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略》曰: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以]也.{《魏略》曰: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有氣如 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 中, 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마여'가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가 여섯 살로 왕위에 올랐다. '한'때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공손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늙은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위략에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장의 글자에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스스로 '망인'이라 하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위략에서 말하길 예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어,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자 시녀가 말하길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기운으로 덥히고,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들도 이와 같아, 죽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하늘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 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은 궁술에 능하자,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네 흩어지자, 쫓던 병사들은 건널수가 없었다. '동명'은 이로 인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다. |
천년제국 부여
중국의 조공을 받던 잃어버린 천년 제국 부여.
부여는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재한 국가.
부여는 해모수왕이 건 국한 북부여.
동명왕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쪽 길림성 동부 연해주로 이동하여 건국한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제공한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에 국호를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
해부루왕의 조상이 해모수왕이니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가 가장 오래된 부여.
북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부터 존속해온 국가임이 분명.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고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었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 까지 미쳤을 것.
중국 전한(BC 206~AD8)에 황제와 제후왕들을 매장할때 옥을 캐어 2498편의 옥 편을 가공하고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약 1100g의 금실로 꿰맨 옥의, 옥침, 신 등으로 만들어진 수의 옥갑(玉匣)을
사용.
그러나 옥갑의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후한(25~220) 때 황제의 장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옥갑을 사용하지 못하게 위(220~264)나라의 문제(:220~227)가 박장령을 내려 옥의 사용을
아예 금지시.
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후한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옥갑을 후한의 황제가 미리 만들어서 부여와
가까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부여의 왕이 서거하였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부여왕의 장례
식에 늦지 않도록 즉각 이 옥갑을 선물로 보내야 했다고 중국 위, 촉, 오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에
기록.
부여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국이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 옥갑의 조공문화로 미루어 볼 때 한나라
에서는 해마다 막대한 량의 곡식,금,은,보화,옷감 등부여에 선물(상납)하지 않았을리 없다.
그 이유는 한나라를 침입하지 말라는 것
고구려, 선비 등을 견제해 달라는 이유였겠지만
중국의 조공을 받던 이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북부여 부여를 역사가 동부여의 역사로 왜곡되어 왔기 때문.
북부여 부여의 1,000년 역사를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명망당하는 동부여로 조작 당함.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 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면서 중국의 조공을
받던 북부여ㆍ부여의 1,000년 역사는 말살 당하였다
(문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