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와 찰랑대는 작은 너울. 겨울 안에 따뜻함이, 여름 안에 시원함이 살듯 노천탕에는 따뜻함과 시원함 이중의 감각이 산다. 비가 오고 사람도 없으니 나에게는 행운이 모조리 온 셈이다. 어스름 땅거미까지.
탕에 빗방울이 내리면 비는 압정 하나 누운 것처럼 뾰족 입을 내밀다가 형체를 거두고 온천탕 물이 된다. 불순물이 되었는지 한 몸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압정처럼 날카롭게 마주쳤다가 사라져버리는 그 모양새가 봐도 봐도 귀엽다. 이내 사라진 물방울을 보며, 빗물이란 떨어진 자리에서 스며들거나 흐르거나 무언가와 하나가 되는 것이란 생각에 우리도 낳아진 자리에서 자라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이지 싶다.
노천탕가의 머윗대는 꼿꼿하다. 큰 잎사귀는 숙이고 있거나 반으로 접고 주억댄다. 풀들은 체면도 없이 흔들리고 비자나무, 자작나무, 편백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자랑하듯 움직인다. '흔들릴 때 성질이 다 드러날 거다'라며 바람이 지나가도 비자나무는 어슬렁어슬렁 의연하다. 편백나무는 그 정도 바람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태연하다. 그래도 태풍이지 않느냐는 바람의 말에 내가 그걸 이겨내어 살아왔다는 식이다. 자작나무 다리가 시려 보이고 앞뒤로 뒤집히며 파닥거리는 잎이 안쓰러워 보이긴 해도 맘은 단단한가 보다. 태생이 강하니라 하며 버틴다. 잔가지 너울너울 춤출 때 잎사귀는 제 친구들 둘러보며 언제 엎치락뒤치락 해보겠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이 시간에 다들 뭘 할까. 나는 노천탕에서 바람의 이야기와 나무의 성질머리와 빗방울에 대해 소곤거리는데… 나 외의 사람들의 시간이 궁금하다. 미안하기도 하다.
삶은 종종 지쳐있지 않은가. 지친 채 흘러가고 그래서 나는 시간을 따로 잘라내고 또 그것마저 잘게 쪼개서 여행이란 바구니를 타고 공중을 떠다닌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은 그 사람 안에 있다. 사람이 시간이다. 내 몸에 저장된 고농축 과거는 지금 이 순간 조금씩 번져 나와 무언가를 느끼는 일에 끼어드는 것일 게다. 목욕의 추억으로도 어쩌면 어루만질 것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온천을 즐기는 과정이 그냥 온 것 같지는 않다. 나름의 성장과정과 치열함과 권태기와 안정기를 거치고 이제 위안기(내 나름 지어본다면)까지 왔고 그것이 지금 이곳, 온천물에 흘러들어온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엔 버스를 멀리 타고 가다 신작로에 내리면 유성온천이 있었다. 엄마가 데리고 가는 이 목욕은 가히 전쟁터였다. 생존경쟁에서 대처하는 나의 성향이 영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했던 시기다. 입장부터 정신이 없었다. 한 사람이 여럿을 데리고 가는 집은 우리뿐이 아니었으니까, 계산이 끝나고 "따라와"라는 엄마의 등을 따라가 락카 앞에 서서 모두 함께 옷을 벗었다. 벗은 옷 더미는 수북했다. 어쩌면 이가 이 솔기에서 저 솔기로 옮겨갈지도 모르는데 한데 넣어버리는 옷장이었다.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우성 소리처럼 물소리 사람소리가 엉겨 귀가 멍멍했고 시야까지 뿌연해서 눈도 정신을 못 차렸다. 더듬더듬 안개 속으로 사람들 다리 사이로 위험을 넘어서 갔다. 엉덩이 하나 붙일만한 자리가 있어 들이밀면 옆 사람은 본인이 불편해서 조금씩 엉덩이를 움직여주는 방식으로 자리가 나곤했다.
그런데 거기서 성격이 나왔다. 무조건 들어가 앉고 봐야 자리가 나는데 나는 우두커니 서 있거나 아니면 한 바퀴를 다 돌아도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했다. 엄마가 불렀다. 이제 통을 하나 얻는 일이 남았다. 한 사람당 하나씩 가질 형편도 안 되는데 가끔 여러 개를 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쭈뼛거리며 집어 들다가 놀라버린 내 어린 마음, 어느 것 하나 함부로 가져올 수가 없어서 하나로 여럿이 쓸 수밖에 없었다. 적극성이 나에겐 안 맞았다. 용기가 부족했고 무안한 상태를 안 만들고 싶었다. 차라리 뭔가가 부족한 게 나았다.
수증기 사이로 앞이 보이기 시작할 때면 얼굴은 벌겋게 익고 검은 때는 지우개 가루처럼 굵직하게 떨어졌다. 엄마는 우리의 나이도 잊은 채 뜨거운 물을 휙 등에 부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앗, 뜨거워~!" 하면 "뭐가 뜨거워."가 대답이었다. 유성온천에서의 목욕은 아우성 그 자체였고 지옥탕 같은 것이었다. 목욕이 끝나면 어질 머리가 날 정도여서 간신히 버스를 타고 집에 오자마자 설탕물을 한 컵씩 타먹곤 했다.
그런 목욕이 지나자 즐기는 목욕의 시대가 왔다. 주말에 시간이 나거나 중요한 만남이나 데이트가 있으면 동네 목욕탕에 다녀왔다. 피부는 윤기가 나도록 반질거렸고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때는 비록 탕 안에 뜬 허연 부유물을 주인아주머니가 뜰채로 건져내는 시기였어도 그런대로 자리도 찾고 통도 얻어 알뜰한 목욕을 했다.
결혼 후 목욕은 나에겐 매듭을 짓는, 기쁘거나 화가 나거나 극히 피곤한 일을 매듭짓는 일이었다. 맘을 다스리기 위할 때 효과가 있었다. 화가 날 때마다 미용실에 간다면 남아날 머리칼이 없을 것이고 백화점에 간다면 '집 장만은 어쩌고' 하는 결의에 찬 시대였다. 친구를 불러내 만나러 가는 사이 내 우울상태가 변형돼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이상했고 전화를 걸어 누군가에게 나와 다른 감정의 시간을 뺏어 이쪽으로 끌어당길 일도 미안했고 알량한 자존심도 머뭇거리게 했다. 이 성격은 어른들이 곧잘 말하는 '어딜 가도 밥은 안 굶은 성격'이 아니고 '어딜 가도 밥 굶을 성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목욕탕이 좋았다. 혼자 물을 끼얹고 때를 밀며 박자에 맞춰 호흡을 하면 굴곡진 생각들이 평평해졌다. 누구의 감정도 건드리지 않고 나만 문질러 나를 힘들게 한 일들을 밀어내고 나를 밀어내는 일, 목욕이 맞았다.
이젠 큰 것을 터득하고 살아가는 셈이다. '밑져야 본전인데 물어나 볼까' 하는 지혜를 얻었다. 공손하다면 누가 화를 낼까. 게다가 다행히 세상의 목욕탕은 많아졌고, 넓어졌고, 생존의 법칙을 세우지 않아도 될 만큼 휴양시설로 변했으니 긴장 없이도 흡족한 시대가 왔다.
이렇게 따끈한 노천탕에 앉아 빗방울과 찬바람을 조우하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맘도 뜨거워졌다. 센 바람에 견디는 나무들의 기억처럼 당당하게, 성향이 달라도 다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지금 이곳에 앉아있을 수 있는 것은 기억의 어떤 순간들이 지금 이 순간을 잘 데워줘서일 것이다.
시간 속에서 훑어낸 온천의 기억을 즐겁게 바라보니 센 비바람은 따스함과 시원함을 섞어 온몸을 마사지해 주고 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압정처럼 뾰족이 부딪치며 사라지는 빗방울이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