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다.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굳이 세상일에 불만을 가질 일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본분이니 분노를 적으로 알라. 이길 줄만 알고 질 줄을 모르면 해(害)가 그 몸에 이르느니라. 자신을 책망할지언정 남을 책망하지 말라. 미치지 못함은 지나침보다 나으리라. 풀잎 위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일본 전국시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260여 년의 평화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의 무덤에 걸린 유훈이다. 바늘 없는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린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과 비길 만하다. 카카오톡,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것에 반사신경처럼 반응하고 행동하는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도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한국인으로서는 오래 걸린다는 것은 때론 실패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도쿠가와는 일본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교토 중심 시대를 마감하고 에도(지금의 도쿄) 시대를 열어 현재 일본 문화의 뿌리가 시작됐다고 하는 분석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거리인 시즈오카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조선을 침략했다 패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제압하고 일본 통일을 이룩했다. 도쿠가와는 <대망>이라는 소설로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했다. 도쿠가와는 8~14세의 어린 나이에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시)에서 12년간 인질로 보냈으며 29~45세에는 시즈오카의 하마마쓰성에서 시련의 시대를 맞았다.
66세에는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준 후 75세까지 시즈오카오고쇼에서 보냈다. 그의 일생의 상당부분을 시즈오카현에서 보냈다. 그의 무덤까지 이곳에 있다.
통일 후 1607년 조선과 국교 정상화를 위해 467명의 조선 사절단 방문을 성사시켰다. 당시 조선 사절단의 숙소가 시즈오카 시에 있는 세이켄지라는 절이다. 이후 200여 년간 12차례의 조선통신사들이 도쿄로 가는 길에 세이켄지에서 숙박했다. 절 입구에는 1711년 여덟 번째 조선통신사 현덕윤이 쓴 ‘동해명구(東海名區)’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들의 글, 그림 등이 지금도 보존돼 있다.
무인 출신인 도쿠가와는 문인을 중용했고 외국과의 교역에도 힘썼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약 260여년에 걸친 평화 시대를 맞게 된다. 일본의 힘은 도쿠가와 시대에 축적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시즈오카시 구노잔 도쇼구라는 신사 내에 묻혀 있다. 시즈오카현관광협회 니시 유미 씨는 “도쿠가와가 생전에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에도(도쿄)를 등 뒤로 하고 정적들의 주무대였던 교토를 바라보며 그의 육신이 묻혀 있다”고 했다. 죽어서까지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이 신사는 에도시대 초기 최고의 기술과 예술을 기반으로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으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첫댓글 메이지유신과ᆢ조선의 마지막의 명암을 말해주는군요ㆍ
우리의 조급함과 ᆢ돌이킬수없는 과거로의 여행 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잎 위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