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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5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사도 18,9-18
복 음 : 요한 16,20-23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권 순호 알베르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이 말씀을 해산의 고통으로 설명하십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16,21).
해산의 고통은 정말 큽니다.
그러나 새 생명의 기쁨이 고통보다 크기에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겪는 고통도
우리가 얻을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는 “No Pain No Gain.”,
곧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라는 좌우명을 두고 날마다 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완벽한 경기를 위하여 수천 번의 점프 연습을 되풀이하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세상의 금메달이나 우승 트로피를 얻는 데도
이렇게 많은 고통이 따르는데, 하늘의 썩지 않는 화관을(1코린 9,25 참조) 얻는 데
어찌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얻으려 성당에 왔는데 마음속에 번뇌만 더 생긴다며
성당을 떠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앉아 있는다고 저절로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수천 번 점프 연습을 하였듯이,
우리도 수천 번 다시 사랑하고, 실패하며, 용서하는 고통스러운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우리의 고난 끝에는 부활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니먼 박사의 인상 깊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가슴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결정은 원래 머리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카너먼 박사는 머리는 가슴이 이미 내린 결정을 뒤따라가며,
“그래, 이건 이래서 좋은 선택이었어.”라고
합리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이런 상황에서는 슬퍼야 해, 이런 상황에서는 웃어야 해.’라면서 머리로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어느 순간 공감하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감동을 계속 머리로 떠올릴 수 있도록 합니다.
즉, 머리가 분석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가 먼저인 것처럼 판단합니다.
생각을 곰곰이 하면 늦게 됩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과 행적을 머리로 계속 떠올리면서 스스로 판단합니다.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계산하면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우리 역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세상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스승을 잃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깊은 애통에 빠지게 됩니다.
모두 마음이 아닌 머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심 대신 기쁨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슬픔과 기쁨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기쁨의 원천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모의 해산 고통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고 하지 않고,
주어를 바꿔서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보다 더 큰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흔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원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함께 아파하셨던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1항)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 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새로 탄생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선사된 기쁨’, ‘주어진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죽음이 생명임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말해줍니다.
그 ‘기쁨’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도 주님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함께 하시는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고, 빼앗아갈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 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조 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는 순간 어머니는 큰 고통을 겪지만,
새 생명을 품에 안을 때 그 고통은 잊고 기쁨만 남게 된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스승을 잃는 슬픔은 깊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그 슬픔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기쁨은 그 누구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101, 요한 16,20-22 의역)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쁨이 단순히 감정적 즐거움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의 친교에서 오는 영원한 기쁨이라고 강조한다.
세상의 기쁨은 변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고통이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는 ‘고통이 지나간 뒤에 기쁨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고통 자체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Homiliae in Ioannem 79, 요한 16,20 의역)
즉, 십자가의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 안에서 부활의 기쁨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진리를 성인들의 삶에서 확인한다.
성인들의 축일은 ‘죽음의 날’이 아니라 ‘천상 탄일(誕日)’로 불린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은 ‘탄일’이라 불리는데, 이는 우리가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Epistulae 58 의역)
우리가 겪는 고통과 희생은 단순히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생명, 곧 하느님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산통(産痛)과도 같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은 그분의 구원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는 새 생명을 낳는 은총의 통로가 된다.”(1521항 요약)
우리 삶에도 수많은 고통이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는 통로가 된다.
십자가의 어둠 속에서 부활의 빛을 기다린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분께서 약속하신 기쁨을 희망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저희의 고통을 부활의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그 기쁨을 영원히 지켜주소서.”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같은 사랑이라는 말 안에도 서로 다른 깊이와 방향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입니다.
부족함에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채워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여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끌리는 마음, 그것이 에로스입니다.
두 번째는 ‘필로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 사이의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함께 선을 추구하는 관계입니다.
친구는 또 다른 나 자신이라는 말처럼, 서로를 통해 더 나아지는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족함에서 시작되는 사랑,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전혀 다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위에서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사랑입니다.
부족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감정의 확인이 아닙니다.
“너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느냐?”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완벽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사랑 안으로 이끄십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희망찬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의 잘못을,
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완벽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이 아가페의 사랑을 자주 만납니다.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굳어가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말도 어렵고,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교우들이 그 형제님을 위해서 작은 갈비탕을 만들어 옵니다.
정성스럽게 끓여서, 드시기 좋게 준비해서 가져옵니다.
또 어떤 분은 마사지해 줍니다. 이것은 한 번쯤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누구나 한 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은 매일 찾아갑니다.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말없이 곁에 있어 줍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하모니카를 연주해 줍니다.
김밥을 싸서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한 번이 아닙니다. 매주, 반복해서, 꾸준히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의무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계산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한 자매님은 뇌졸중으로 10년째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극 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며, 매년 유람선 여행을 함께 갑니다.
이 또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또한 계산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도 1년에 두 번 병원의 예배실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느낍니다.
아, 여기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있구나.
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에로스입니까?
필로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가 “나는 부족하다”라고 말하는 사랑이라면,
필로스가 “우리는 함께 좋다”고 말하는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그래서 너에게 준다.”
이 사랑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활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받기 위해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받았기 때문에 주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대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고통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고통이 있습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네 인생의 대 주제인 고통과 기쁨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정확한 해결책을 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성모 성월을 맞아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기쁨을 생각하니
예수님 말씀이 크게 수긍이 됩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기적 같은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고, 동정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베틀레헴에 큰 별이 뜨고, 그 먼 곳에서 온 동방박사들이 방문하고,
요셉이 피하라는 꿈을 꾸고,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갑니다.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의 생애는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파혼당할 위기를 겨우 넘기고, 출산 때 방 한 칸 못 구하고,
헤로데 학살을 피해 난민이 되고, 다양한 예수님의 돌출 행동이나 발언으로 상처 입고,
마침내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을 직접 목격합니다.
성모님 고통의 절정이라면 아무래도 성 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아래 서 계셨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서 교부들과 역대 교황님들께서 동일한 강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마리아께서도 십자가 아래서 영적 고통을 겪고 죽으심으로써,
둘째 아들, 곧 당신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인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 출산하셨다.
마리아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유다교 학자 데이비드 플루서의 가르침이 큰 감동을 줍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상징이자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한 가지 있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는 구름 위에 떠 있던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지상의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는 신학적 개념이나 산물이 아니라,
온 몸으로 고통을 겪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혹독한 고통에 꺾이지 않았던 한 실제 인물이다.”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충만한 기쁨에 고무되어!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숱한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고 좌절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다면 그까짓 고통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그것을 당신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잘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니 고통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 속에 고통이 있습니다.
기쁜 고통의 배경에는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 작업이 있습니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이 말씀은, ‘죽음의 슬픔’과 ‘부활의 기쁨’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 기쁨은 십자가 수난 때의 참혹했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 ‘큰 기쁨’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기쁨을 얻으려면 슬퍼하여라.”가 아니라,
“기쁨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라.”입니다.
신앙생활은 ‘큰 기쁨’을 얻으려고 일부러 슬퍼하는 생활이 아니고,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그것을 희망하기 때문에
슬픔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슬픔’을 ‘고통’으로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마태 10,22)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23)
일부러 고생하는 것은 ‘인내’와는 완전히 다른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2)
‘나인’ 고을의 과부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2-15)
여기서 “울지 마라.”는,
우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퍼서 우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라자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도 울고 문상객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슬픈 일을 당해서 슬퍼하는 것이 잘못은 아닌데,
슬픔에만 사로잡혀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도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부활 신앙으로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3)
21절의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는,
“고통을 잊어버려라.”, 또는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가 아니라,
“고통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쁨이 크다.”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기쁨은 대단히 큰 기쁨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 안에서 살고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고통과 슬픔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리면, 왜 기뻐하는지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기쁨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해마다 반복해서 사순시기와 성주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은,
부활의 기쁨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4)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희미해지는 기쁨도 아니고,
어떤 일 때문에 잃어버리게 되는 기쁨도 아닙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ㄹ-4)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부활한 뒤에 너희가 나를 만나게 되면
너희는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 후에도 인간의 처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생로병사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희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믿음과 희망은
온갖 슬픔을 극복하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반대로, 그 믿음과 희망이 없으면?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에 별 지장은 없겠지만,
인생 자체가 허무를 향해서 가는 허망한 것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스승들
“영원한 스승이고 주님이자 친구이신 예수님”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없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없다 하는데
오늘은 선생조차 사라진 시대 같습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이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참된 스승은 제자를 통해 다시 배운다. 고전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와 함께 자란다.”<다산>
비단 스승이 아니라도 평생 겸손한 배움의 자세로 살아가는 평생학인의 삶은 참 아름답습니다.
“옛 것을 익혀 새것을 알게 되니 스승은 할만하다.”<논어>
삶의 스승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도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자 성군이라 일컫는
위대한 스승 세종대왕 제629돌 탄신일로 법정 국가기념일입니다.
세종대왕 평전 표지의 소개 글만 봐도
그가 얼마나 시공을 초월한 지혜로운 스승인지 잘 드러납니다.
“세종은 비굴한 사대주의자도 아니고 배타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배합시킨 그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다시 말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제사회와 개방적인 자세로 교류하여 공동번영을 꿈꾼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 바로 그 자리에 그는 우뚝 서있다.”
그대로 오늘날에 통하는 위대한 스승의 모습입니다.
성군 세종대왕의 평전을 보면 그가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또 다방면에 걸친 불가사의의 천재인지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 역시 믿은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불세출의 스승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제자 바오로를 사랑했는지
선교 방향을 환시 중에 제시하고 격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새삼 영원한 참 스승인 파스카 예수님의 면모를 봅니다.
믿는 이들의 생명은 하느님 손안에 있으니 말 그대로 인명은 재천입니다.
새벽에 본 멋진 노년의 삶의 세 조건,
“active-interest-enjoy, 활동-관심-즐김” 역시 배움의 여정에 좋은 참고가 됩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공주수도생활의 아버지라 일컫는
성 파코미오 아빠스 기념미사를 봉헌하며,
제 사랑하는 후배이자 전임 원장이었던 파코미오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어제 축일 선물로 강론을 보냈고 각오를 새로이 하는 아름다운 답신도 받았습니다.
“축일 축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아름다운 강론의 향기로 북돋아 주시고 격려해 주시니 큰 힘이 됩니다.
신부님의 기도와 강복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안식년 동안 빨간 앵두처럼 기쁘게 익어 돌아오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왕의 독수리”란 이름 뜻대로 성 파코미오 아빠스 역시
수도승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은수적인 수덕생활이 보장되면서도 상부상조하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 기반한 ‘코이노니아’ 공동체적 이상적 수도생활을 실현시킨
그의 전성기 때 수도원에 속한 수도자들은 무려 약 5000명에 달했다니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파코미오 수도생활은 수세기 동안 이집트에서 확산되어 1000년까지 지속되며
그의 규칙과 영성은 서방 수도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수도생활을 이끄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서로 성서를 강조했으며,
교회내의 어떠한 카리스마나 수도생활도 성서와 성전에 기초한
교회의 보편정신 안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수도생활은 교회의 정통성을 옹호했고,
영성적인 요소와 더불어 성사적 생활과 전례에 충실한 수도영성이었습니다.
한 결 같이 수도생활의 위대한 스승들은
성서의 사람들이자 교회의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사람들임을 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레오14세 교황 역시 종파를 초월한 훌륭한 스승입니다.
어제 로마의 사피엔자 대학교를 방문해 주신
“참 평화의 장인들이 되십시오”라는 제하의 내용도 참 풍부하고 유익했습니다.
시대의 스승다운 레오 14세 교황의 처방이었습니다.
1. 젊은이들과 진리의 탐구
2. 성 아우구스티노는 큰 과오를 범했으나, 결코 지혜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3. 우리는 ‘알고리즘(an algorithm)’이 아니다.
4. 우리 자신이 되기(Becoming ourselves).
5. 우리는 어떤 세상을 남길 것인가?
6. 군사적 소모와 재무장에 대한 경고
7. ‘전멸의 소용돌이’(a spiral of annihilation)에 대한 경고
8. 피조물 보호
9. 믿는 이들의 통찰
10. 애덕의 형태로서의 가르침
11. 새로운 교육적 동맹
저 또한 훌륭한 스승을 꿈꾸다 수도원에 들어왔기에
지금도 환갑이 넘은 초등학교 제자들의 방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10년 전 제자가 정성껏 써서 액자에 넣어준 <스승의 은혜>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매해 5월이면 방문해 불러주는 노래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생님 은혜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신우초등학교 1회 6-1반 임혜정, 2016년 5월씀>
바로 여기 해당되는 유일한 스승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주 불러보는 노래입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요 도반이자 친구인 예수님입니다.
참 스승인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믿는 이들의 신분증인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세상 어떤 스승도 이런 기쁨을 선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은 기쁨입니다.
바로 성인들은 고통 중에도 언제나 주님이 주신 이런 내적 충만한 기쁨 중에 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 너희는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기쁨은 진통의 고통 후에 이은 출산의 기쁨 같은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이 기쁨으로 수확하듯 결코 값싼 기쁨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통해 실현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향기로운 빛을 발하는 이런 참기쁨입니다.
바로 스승이자 친구이자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참 기쁨이요,
찬미와 감사로 겸손히 응답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그 기쁨을 아무도 너에게서 빼앗기 못할 것이다.
이 승화 시몬 신부
적절한 고통은 성장의 기반이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는 아픔과
안정적인 환경을 넘어서야 하는 아픔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적절한 고통은 어디까지인가입니다.
더 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은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워할 때 세상은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심이 기쁨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희망을 믿음으로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큰 고통이 찾아와도 버티어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힘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고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성장하는 발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희망을 키워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https://frsimon.tistory.com/1878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티스토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