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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
가곡의 왕 ,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가 , 작곡가 .
모차르트 - 베토벤 - 슈베르트로 이어지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천재음악가 3명 중 마지막 인물 .
그의 생애는 가난하고 매우 고달펐다 .
음식을 살 때 밤에 떨이로 파는 음식(소금을 뿌려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사서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전해진다 .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는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
어머니는 장인의 딸로 요리사였다 .
오스트리아 , 빈에 위치한 슈베르트 생가
무려 16명이나 되는 자식들에서 13번째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즐겨하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
6살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큰 형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
하지만 ...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취미나 여가 활동 , 향후 학교 교사로서의
교육 수업 차원에서 음악을 가르친 것이었지 ... 슈베르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
오히려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고 학교 선생을 시키려고 했었으나 ,
슈베르트는 전문적인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탁월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다 .
11살때(1808년)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빈 궁정예배당의 아동 합창단에 뽑혔다 .
슈베르트는 그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는데 ,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
학창 시절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루치카와 궁정 악장 살리에리(Antonio Salieri)로부터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 ,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제1 바이올린 주자(콘서트 마스터)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탁월한 미성으로 독창회에 나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 13세(1810년)에 변성기가 도래하여
특유의 미성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합창단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결국 학교를 나와야 했다 .
당시 오스트리아 법은 징병제였기 때문에 일정연령이 된 남성은 군대를 가야 했다 .
당시 슈베르트의 입장에서 군대를 안 가는 유일한 방법은 학교 선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
음악 쪽으로 진로를 삼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학교 선생’ 이라는 직업이 내키지 않았으나 ,
군대를 가고 싶지 않었던 슈베르트는 결국 1814년 17세때부터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하면서 저학년의 수업을 담당했다 .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수의 가곡들을 작곡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한
유명한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 , '마왕' 등이 작곡되었다 .
특히 ... 마왕을 작곡할 때 집중력이 아주 대단했는데 ,
친구들이 와서 슈베르트에게 인사할 때 그들이
자기 바로 옆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
갑자기 , 영감을 받아 악보에 작곡을 하고 이 선율을 본 친구들이 아주 좋다고 외친 후에야
슈베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고 ...
이 곡의 초연 당시 지인 연주자는 진짜 마왕을 소환한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고 ...
이듬해인 1815년에는 무려 145개의 가곡과 2개의 교향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소수의 친구들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
그나마 친구들과 연주 모임 '슈베르티아데 (Schubertiade)'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
얼마 되지 않던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그와 친했고 서로를 아꼈으며 도움을 주고 받았다 .
쇼버와 슈빈트를 비롯하여 법률가 요제프 폰 슈파운(1788~1865) ,
법률을 전공한 시인 요한 마일호퍼(1787~1836) ,
화가 레오폴트 쿠펠비저(1796~1862) , 극작가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펠트(1802~1890) ,
작곡가 안젤름 휘텐브렌너(1794~1868) , 그리고 친구가 아닌 아버지 또래이지만 그를 후원하던
성악가 미하엘 포글(1768~1840)같이 죄다 살아 생전 인정받던 예술가들이 많았다 .
19살이던 1816년 ,
초등학교 교사 일에 신물이 난 슈베르트는 마침 라이바흐의 초등교원양성 학교에
음악 교사 자리가 비자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
친구 슈파운이 몇 개의 가곡을 출판할 것을 제안하고
그 중에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 몇 개를 추려서 괴테에게 보낼 것을 제안하자
슈베르트는 고심 끝에 승낙했다 .
하지만 괴테는 슈베르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악보를 되돌려보내자 슈베르트는 실망했다 .
그러는 와중에도 작곡은 계속되어서 가곡 '방랑자' , '자장가' 등이 작곡되었다 .
결국 ... 슈베르트는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빈으로 나와서
친구 프란츠 폰 쇼버(1798~1882)와 함께 살면서 작곡에 열중했다가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
1818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여름동안 음악 가정교사를 구했는데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음악 가정 교사를 하게 되었다 .
그 일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고향집을 완전히 떠나 개인 레슨을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
1823년 ,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 를
작곡했고 ... 가곡 '방랑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피아노용으로 작곡한 '방랑자 환상곡' 을
내놓기도 했다 .
1827년 , 슈베르트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를 작곡했다 .
이 해에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 짧은 만남을 가졌다 .
이 때 자신이 작곡한 작품 중 몇 곡의 악보를 베토벤에게 소개하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
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 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슈베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
슈베르트 ,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 ”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 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했고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는 음악가들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
한편 베토벤 사후 슈베르트의 음악가를 반대하며 학교 교사를 강제로 시키려던
슈베르트 아버지와 슈베르트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
집안의 형제들과 슈베르트의 주변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칠 무렵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설득하자 , 아들이 작곡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용서하면서 마침내 두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
그러나 아버지와의 화해도 잠시 ,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형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요양 치료를 했다 .
병명은 티푸스 , 매독 , 식중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 .
그 뒤 슈베르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
말년에 슈베르트는 헨델의 '메시아' 의 악보를 구해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
1828년 11월 19일 ... 혼수상태에 빠진 슈베르트는 공무원이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31살이라는 너무나도 한창의 나이에 위대한 작곡가의 삶을 마감했다 .
혼수상태였을 때 ...
" 묻혀지는 ... 건 ... 싫어 ... 홀로 있는 건 싫어 ... " 라고 중얼거리자
페르디난트가 프란츠 , 모두 걱정하여 모였다면서 걱정마라고 하자 갑자기 그는
" 하지만 , 여긴 베토벤이 없어 ! "
라고 말했다 .
마지막까지 존경하던 이의 이름을 외친 모양 .
그리고 그렇게 숨을 거두면서 저게 유언이 되고 말았다 .
임종을 지켜본 친구 슈빈트는 형 페르디난트가 갓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만지며 한참을 울었으며
" 너무 일찍 갔구나 , 프란츠 . 너무나도 일찍 갔어 ! " 라며 슬퍼했다고 회고했다 .
슈베르트의 바람대로 친구들은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이 묻힌 빈 벨링크 공동묘지
(일명 음악가들의 공동묘지 ... 비엔나를 무대로 활약했던 음악가의 거장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 에
그의 곁에 안장했다 .
슈베르트 및 여러 유명 음악가들의 묘비석 처음에는 웬 듣보잡을 감히 베토벤 곁에 묻느냐며
반대도 있었으나 ... 후원자 존라이트너 백작이 20년 아니 ,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베토벤 못지않게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적극 옹호하고 베토벤 씨도 잠깐 만났음에도
그를 인정했던 만큼 , 곁에 묻혀지면 베토벤 씨도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주장한 끝에 묻힐 수 있었다고 한다 .
쇼버에게 생을 마감하기 1주일 전 1828년 11월 12일에 보낸 편지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
여길 봐도 그의 마지막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
잘 있었어 ? 나는 너무나도 아프다네 . 고열과 어지러움이 계속되고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드네 . 먹을 것을 먹는 즉시 토해버리고 열하루째 물만 마시고 있어 . 그나마 페르디난트 형과 린나(누이동생)가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있어줘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 간혹 좀 낫기도 하고 그러면 책을 읽고 있다네 , 지금 '마지막 모히칸' 이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네 . 이거 작가인 쿠퍼가 쓴 다른 책이 있으면 좀 빌려줄 수 있겠나 ? - 자네의 친한 친구인 프란츠가 ... 1828년 11월 12일 |
자네의 친한 친구인 프란츠가
1828년 11월 12일 ... 이 편지는 빈에 있는 슈베르트 생가 박물관에 벽에 걸려
액자로 전시되어 있다 .
돈을 벌어도 다른 가난한 예술가 후배나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같이 나누기도 하고
생활비를 도왔다고 한다 .
그와 친구였고 같이 가난한 시절을 겪었다가 나중에 화가 및 조각가로서 꽤 성공한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t , 1804~1871)가 남긴 회고록에
그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야기가 나와 있다 .
하루는 좀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된 다른 친구가 슈베르트와 슈빈트의 사정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모처럼 밥 좀 산다고 했다 .
이 자리에 나온 슈베르트는 그 자리에서 10분도 안 가서 큼직한 빵을 6개나 단번에 먹어버리고
차(茶)도 여러 잔을 얼른 비워버렸다 .
그리고 좀 늦게 자리에 나타난 슈빈트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먹어버렸단다 .
다른 이들이 이 둘을 보고 " 그리도 배가 고팠나 ? " 하자 두 사람은
" 이틀 동안 물 빼고 아무 것도 못 먹었다네 . "
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
슈빈트는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은 그래도 나중에 꽤 성공해서 이제 굶주리는 일은 없지만
그렇게 배고픈 상태로 죽어간 슈베르트를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
슈베르트는 상당히 독특한 작곡가였는데 , 그의 머리속에서는 쉴새없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슈베르트는 단숨에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가지고서 작곡을 했다 .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
그런 탓에 ... 슈베르트는 겨우 31살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
무려 998개의 작품들을 작곡했다 .
슈베르트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
외모도 당대 사람들이 보기엔 못생긴 외모였고 고수머리에 숏다리에다가 단신(약 152cm)이라
여자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
사실 어렸을 때에는 꽤나 미남형이였으나 젊었을 때 너무 고생을 해서
얼굴이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
실제로 슈베르트의 청소년기 얼굴 스케치로 알려진 작품을 보면 곱상한 미남형 얼굴이다 .
맨 위에 나온 그림보면 얼굴이 왜 이리 퉁퉁 부었지 ?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 돈없어서 팔다 오래되어 소금 뿌리고 떨이로 파는 것들이나 사 먹다보니
신장(콩팥)에 이상이 있어 몸이 퉁퉁 부었다는 것 ...
그럼에도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함과 밝은 성격에 친한 친구가 많았으며
대부분의 친구들은 슈베르트를 위해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주었다 .
테레제 그로브 Therese Grob 1798년 11월 16일 ~ 1875년 5월 17일 이 해에 ... 슈베르트 최초로 발표된 큰 작품인 F장조의 장례 미사곡을 작곡했는데 , 이때 독창을 맡았던 1살 아래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와 사랑에 빠졌다 . 하지만 ... 두 사람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 슈베르트가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 그리고 테레제는 '베르그만' 이란 부유한 빵집 주인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 후일 ... 슈베르트는 그의 일기에서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나의 마음은 극도로 상했다 .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 아직도 나는 그녀를 사랑해 ... 그 후 , 테레제와 같이 나를 기쁘게 해주는 여자는 만날 수 없었다' 라고 적어 실연으로 인한 상심을 나타냈다 . 슈베르트에게 가족끼리 서로 친한 사이였던 여음악가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 , 1798 ~ 1875)라는 첫사랑이 있었다 . 그가 작곡한 미사곡 Mass No. 1 in F major , D 10을 그녀가 소프라노 독창한 적도 있으며 그녀의 남동생 하인리히에게 곡 모음집을 준 적도 있다고 한다 . 슈베르트는 테레제 그로브와 결혼하고 싶었다 . 그러나 1815년에 결혼법이 바뀌어서 신랑은 결혼하고 나서 부인과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 슈베르트는 안정된 직장을 구해서 가족을 부양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슈베르트는 라이바흐(오늘날 슬로베니아의 류블리아나)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정이 바뀌어서 구하지 못했다 . 결국 테레제 그로브와의 결혼은 사라지고 만다 . 물론 슈베르트는 계속적으로 그로브와 연락을 하며 다시 기회를 얻고자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 슈베르트가 버는 봉급이 적어 결국 결혼하지 못했고 , 그녀는 제빵사 요한 베르그만(Johann Bergmann , 1797 ~ 1875)과 결혼해 1남 3녀를 두었다 . 소프라노로 활동하긴 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못한 테레제 그로브는 1875년 남편과 그리고 아들 요한(1822년생)과 같은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슈베르트는 여러 곡의 노래를 작곡해서 악보를 테레제 그로브의 오빠인 하인리히에게 보내어서 아직도 테레제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을 보였으나 그 집에서는 슈베르트의 악보를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었고 몇 십년이 지나서야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공개해서 그나마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 돌이켜보건대 슈베르트가 가장 활발한 작곡 활동을 했던 때는 그가 16세 때인 1815년이었다 . 주로 오케스트라 곡이었고 교회를 위한 작품도 9곡이나 작곡했다 . 그리고 교향곡을 하나 작곡했고 가곡은 140여곡이나 만들었다 . 슈베르트는 불가지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종교음악은 계속 작곡했다 . 불가지론이란 것은 인간의 경험만 가지고는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 슈베르트는 그 해에 또한 안젤름 휘텐브렌너(Anselm Hüttenbrenner)와 프란츠 폰 쇼버(Franz von Schober)를 만나게 되어 친교를 나누기 시작했다 . 이 두 사람은 슈베르트와 평생 친구로서 지냈다 . 또한 슈타트 콘빅트부터의 친구인 요한 폰 슈파운이 슈베르트에게 요한 마이르호퍼(Johannn Mayrhofer)를 소개하여 그 역시 평생 친구로서 지냈다 . |
이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나중에 슈베르트 동아리 클럽 '슈베르티아데 (Schubertiade)' 를
추진한 동력이었다 .
슈베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인물로 알려졌는가 ?
물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로 알려졌지만 곱상하게 생긴 모습 , 수줍고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이지적인 자세로
사람들의 동정심을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는 평가였다 .
슈베르트는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같은 남자들로부터도 성적으로 매력을 느낄수 있는 남자였다는 주장도 있었다 .
친구 ‘젤름 휘텐브렌너’ 와 함께
그러는 중에 1816년 , 슈베르트가 17세의 청년일 때에 슈베르트는
친구 요제프 폰 쇼버의 집에 가서 기거하게 되었다 .
마침 그때 슈베르트는 라이바흐 교회의 카펠마이스터에 응모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
슈베르트는 그렇다고 아버지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답답한 교사 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
슈베르트는 친구 쇼버의 집에 방값도 내지 않고 지내는 것이 미안해서
피아노 레슨을 해서 돈이라도 벌어서 인사 치레를 하였으나 ... 얼마후 그마저도 그만두고
오직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
그때 슈베르트는
‘ 나는 매일 아침마다 작곡을 합니다 ... 그리고 작곡을 마치면 또 새로운 작곡을 합니다 . ’
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작곡에 전념하였는지를 알수 있다 .
슈베르트는 친구 쇼버의 집에 기거하면서 주로 오케스트라곡과 합창곡을 작곡했다 .
물론 리더(가곡)도 계속 작곡하였다 .
이 때에 작곡한 작품들은 당장 악보가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슈베르트의 친구들을 악보를 서로 돌려보며 즐거워했고 슈베르트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1817년 말에 쇼버는 슈베르트에게 바리톤 요한 미하엘 포글(Johann Michael Vogl)을 소개해 주었다 .
포글은 슈베르트보다 20년이나 위였지만 두 사람은 깊은 친분을 갖게 되었다 .
슈베르트는 포글을 위해 여러 가곡들과 성악곡들을 작곡했다 .
포글은 포글대로 슈베르트 작품을 비엔나에 전파하는 일을 맡아했다 .
그래서 슈베르트는 비록 20세에 불과한 약관이었지만 , 비엔나 사회에서 서서히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
이 시기에 슈베르트는 또한 요제프 휘텐브렌너를 만났다 .
안젤름 휘텐브렌너의 남동생이었다 .
이들 형제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다행하게도 어려운 형편의 슈베르트에게는 따뜻한 친구들이 많았다 .
이들 친구들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널리 알리고 수집하며 무엇보다 ,
슈베르트의 사후 그의 음악들을 보전하는 일에 열중한 사람들이었다 .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 친근성과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에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
교향곡 8번 '미완성' , 피아노 5중주곡 '송어' , 가곡 '자장가' ,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
'겨울 나그네' , '마왕' ,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등이 대중들에게 친근하다 .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
69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
제9번 《대 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
피아노곡에서는 《방랑자 환상곡》 , 《스케르초》 , 《악흥(樂興)의 한 때》 등이 알려져 있고 ,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 가곡 약 650곡을 비롯하여 ,
교향곡·실내악·피아노 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도이치 번호로 정리되어 있으며 ,
쾨헬 번호처럼 연대기 순으로 정렬되어 있다 .
모차르트의 1.8배에 달하는 작품 수 덕분에 매우 복잡하지만 , 음반 찾을 땐 매우 유용하다 .
급한 성격 탓인지 유난히 스케치(Sketch) , 단편(Fragment) , 미완성(Unfinished)이 많다 .
가곡을 다른 작품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
피아노 5중주 송어 , 시든 꽃 주제에 의한 변주곡 , 방랑자 환상곡 ,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
슈베르트는 21개의 피아노 소나타와 즉흥곡을 비롯한 많은 피아노곡을 남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피아노 협주곡은 단 한곡도 작곡하지 않았다 .
Piano Quintet in A major , D.667 , Die Forelle 〈송어(Die Forelle)〉는 낭만주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가 20세가 되던 해 1817년에 작곡한 가곡이다 .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다니엘 슈바르트의 시를 가사로 했다 . 이 곡은 2년뒤 송어 오중주 4악장의 변주곡 주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 변주곡 〈피아노 5중주곡 송어〉는 슈베르트 작곡한 것으로 , 조성은 가장조이며 , 작품번호는 114이다 . 제4악장에 슈베르트 작곡의 가곡 〈송어〉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을 지니므로 이렇게 불린다 . 이 곡은 슈베르트가 북 오스트리아 산지의 작은 도시 슈타이아를 여행중 , 광산업자로 음악애호가 파움가르트너의 의뢰로 1819년 작곡된 것이다 . 보통 피아노 5중주라고 하면 현악 4중주에 피아노가 추가되는 것이 상례이나 , 이 곡에서는 제 2 바이올린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사용하고 있다 . 거울같이 맑은 강물에 화살처럼 빠르게 달리는 송어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그네 , 그리고 매정하게 낚아 올리는 낚시꾼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 바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 1797~1828)의 가곡 〈송어〉이다 . 발랄한 송어의 움직임을 나타낸 이 가곡은 슈베르트의 많은 선율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 1817년 슈베르트는 친구의 소개로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성악가 미하엘 포글(Michael Vogl , 1768~1840)을 만나게 된다 . 포글은 손에 잡히는 대로 그의 악보를 들고 흥얼거리며 “ 나쁘지 않군 ! ” 이라고 말하면서 점차 슈베르트의 가곡에 대한 열정과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결국 그의 가곡을 소개하는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힘을 쓰게 된다 . 몇년후 여름 , 두 사람은 연주 여행과 피서를 겸해서 포글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북부의 슈타이아(Steyr)에서 머물게 됐다 . 이곳은 특별히 음악애호가들이 많았으며 , 포글이 노래하고 슈베르트가 반주하는 그의 가곡은 그 곳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갈채를 받게 되었다 .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었던 가곡은 〈송어〉였다 . 이렇게 행복한 여름을 보내던 중 마침 그곳의 아마추어음악가들을 위해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는데 , 슈베르트는 곧 피아노를 중심으로 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 〈피아노 5중주곡〉을 작곡했다 . 그리고는 모두 5개의 악장으로 된 이 곡의 4악장에 가곡 〈송어〉의 선율을 변주곡 형태로 가미해 가곡과 똑같은 인기를 얻게 됐고 , 이 작품 또한 ‘송어’ 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 가곡처럼 신선하고 발랄하면서도 전원적인 낭만이 넘쳐흐르는 이 곡 또한 슈베르트의 실내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지게 된다 . 우리나라에선 번역의 오류로 오랫동안 숭어(Flathead mullet)인지 송어(Masou salmon)인지 이슈가 되다가 결국은 민물고기 〈송어〉로 판명이 되어 음악 교과서도 전면수정을 하게 되었다 . 강과 시냇물을 활기차게 누비는 송어와 자연의 낭만을 음악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 |
SCHUBERT : Trout Quintet / Adagio and Rondo Concertante
2007년 9월 1일 발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가 1819년에 작곡한 피아노 5중주 .
일반적인 피아노 5중주 구성인 피아노 + 현악 4중주와는 달리 , 바이올린 하나를 빼고
더블베이스를 추가하여 , 피아노+바이올린 , 비올라 , 첼로 , 더블베이스라는 이색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다 .
4악장이 그가 2년 앞서 발표한 가곡 송어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
국내에서도 원래 유명하지만 크라운베이커리 광고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대중적으로도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
삼성 세탁기 작동 완료 시에 나오는 멜로디 음이 이걸 차용한 거라고 한다 .
음만 살짝 변조시키면 어디서 들어본 멜로디가 된다 .
서양에서는 한국 세탁기들의 세탁 종료음 중에서도 삼성 세탁기의 이 선율을
재미있게 여기는 듯하다 .
〈셜록 홈즈 : 그림자 게임〉에서 독일 제국의 무기 공장에서 제임스 모리어티가 홈즈를
고문하는 때에 트는 음악이다 .
홈즈와 왓슨은 송어처럼 자신의 낚시 바늘에 걸릴 예정이라고 하고 ,
홈즈는 정말로 정육점에 걸린 돼지처럼 갈고리에 어깨가 꿰여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
고통에 몸부림치는 홈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울을 보며 ‘숭어’ 를 부르는
모리어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클래시컬로이드에서 슈베르트가 무지크를 발동할 때 사용하고 다른 곡들과 달리 편곡이 아닌
원곡을 사용했는데 애니플러스에서는 ‘숭어’ 로 번역했다 .
1악장 Allegro vivace
2악장 Andante
3악장 Scherzo : Presto
4악장 Thema with Variations : Andante
5악장 Finale : Allegro giu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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