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하지 않는다는 다른 과와는 달리 산모들이 끊임없이 입원하는
산부인과의 특성상(산모들은 무조건 응급이니까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의
공백을 메꾸느라 저는 어제와 그저께 정말로 긴 이틀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의대교수로서 오늘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여 착잡한 심정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를 보았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저는 제 직업을 사랑하고 환자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동료 타과 의사들이나 친구들이 뭐하러 그렇게 힘든 산부인과를 하냐고 할때도,
밤낮으로 산모들이 몰려와 피곤할 때도,제 도움으로 출혈로 금방 죽을 것만 같던
산모들이 건강하게 퇴원하고 정말로 제 손바닥한 크기로 태어난 500그람짜리
조산아가 지금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제 직업을 택한데 뼈져린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의대입학후 17년, 그동안의 고생과 환자들에 대한 제 사랑이 모두 헛것이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우리나라의 그 잘난 언론 때문에 말이죠.
어제와 오늘자 문화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를 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어떤 산모가 "분만할 병원을 찾지 못하고 33시간이나 헤매다 겨우 분만..."하는
기사말 입니다. 바로 제 환자였습니다. 그 산모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일산
백병원으로 전원시켜준 사람이 바로 저와 제 동료들이었습니다.
이런 배신감과 씁쓸함...
네티즌 여러분, 여기서 진상을 밝혀드리겠습니다.
그 산모는 19일 저녁 임신 28주에 진통도 없이 자궁입구가 4센티나 열려 분당의
모 개인산부인과를 먼저 갔었습니다(자궁경관무력증이라는 병입니다).
상식이있는 분은 아실것입니다.
임신 28주에 태어나는 아기를 일반 개인산부인과에서 볼 수 있나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 태아는 인큐베이터와 인공호흡기 치료가 가능한 대학병원에서 분만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산부인과에서는 우리 병원으로 산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희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기들이 꽉 차서 인큐베이터와 인공호흡기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 산부인과가 미리 알아보고 보내주었으면 좋았을것을..).
이런 상황은 의료계 폐업과는 상관없이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신생아 중환자실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조산아와 고위험신생아의 치료는 손도 많이가고 여러 최첨단 장비들이 필요합니다. 요즘 이슈중의 하나인 그놈의 의료보험수가 때문에 병원은 이런 신생아 중환자실을 많이 만들어 운영할 수 없습니다.
아뭏든 이건 다른 얘기고) 게다가 우리 신생아중환자실은 공사중이었거든요.
하지만 태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을 아기를 치료할 준비도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언제 분만할 지 모르는 무조건 산모를 잡아놓고 있는 것은 이 또한 의사로서의
직무유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는 다른 병원을 알아보았습니다.
저녁내내 이병원 저병원 알아보았으나 인큐베이터가 있다는 병원이 없었고 어쩔수 없이 국립 모병원에 보냈는데 거기도 전공의인력이 없어서 산모을 받지 못하겠다고 하고 산모가
돌아 왔더군요.
다음날까지 저희가 병원을 알아보고 있는 사이 산모는 혹시 진통이 걸릴지 몰라 분만억제제를 예방적으로 맞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일산백병원에서 환자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저희는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129구급대를 불러 일산까지 환자를 호송하는 과정까지 해 주었습니다.
환자 보호자는 일산까지 너무 멀어서 걱정이라고 그러더군요.
제는 지금 당장 엠불런스안에서 분만할 정도로 급한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 아기가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환자를 보냈습니다. 제가 직접 환자를 침대에서
구급침대까지 옮겨주면서요. 환자와 보호자는 감사하다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문화일보에는 마치 병원에서 분만을 거부해서 산모가
33시간동안이나 이병원 저병원 헤맨 것으로 나와 있더군요.
언제 우리가 분만을 거부했습니까?
그 산모는 임신28주란 말입니다.
이 아기는 인큐베이터가 필요했던 것일 뿐 의약분업이나 의사폐업이니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의사들의 단체행동을 보시면서 여러가지 말들이 많으시겠지요.
저도 짧은 인생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간접적이나마 욕을 많이 먹어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욕을 먹어도 정정당당하게 먹을 욕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언론은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의사들 을 싸잡아 집단이기주의자로 몰고
성심성의껏 정당한 진료행위를 한 것도 모두 의료폐업과 연관시켜 마녀사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된것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집단행동을 할지언정 환자의 생명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금도 한편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응급진료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주시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주시기 바라며
대다수의 의사가 저처럼 하루 빨리 직업에 복귀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