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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군축의 또 다른 방식.
혁신파들이 정권을 반쯤 장악하는데 성공한 지금, 모스크바는 매우 평범한 일상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밀려난 중핵파 또한 그랬을까요? 당연히 아니었을겁니다. 그들은, 당연할법한 군부의 불만을 감지하고,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혁신파가 억지로 밀어붙인 군축은 중핵파에게 불만을 심어 주었지만, 당연히 군부에도 불만을 심었고, 이 드라이브가 계속 되는건 매국 행위나 다름 없다고 생각 했죠. 소련은, 살아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한 중핵파의 행동을 막을수 없었습니다.
결국, 혁신파는 쿠데타 발발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 하게될 상황 앞에, 그 대처를 위해 발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리더인, 야코블레프는 온건파를 설득하기 위해 움직였고, 2인자인 고르바초프는, 쿠데타에 참여할것이 불 보듯 뻔한 장성들과 장교를 설득 하기 위해 달렸습니다. 지난 독일건에서 움직여. 그로미코의 후임으로 물망에 오른 메스너는, 외방으로 돌며, 쿠데타 음모에 대비하기 위해, 공산 국가들의 지지를 모으고 다녔습니다. 물론 이 또한, 물밑에서 이뤄지는 행동이었죠. 소련 내부에서 서로 물 먹이는 정치 공작이 참으로 볼 만 했습니다.
아무튼, 그리고 한달이 지나,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료되었던 영광스러운 그 날, 중핵파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소비에트의 중심인 모스크바와 그 권역, 레닌그라드, 키예프, 민스크, 볼고그라드등의 주요 도시들은 중핵파의 손 아귀에 들어갔고, 크렘린에서 구국 정부의 수립이 선언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약속된 군 부대의 호응은 없었습니다. 극동 국경 수비대와 사단은 군축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로 인해 국가를 붕괴 시킬순 없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중앙 아시아와 캅카스의 사단 또한, 중동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섣불리 군을 뺄수 없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발트와 벨라루스는 폴란드와 독일의 정세를 이유로 빠졌죠.
문제가 있다면, 코시긴이 혁신파의 도움을 받아, 카잔으로 대피한 것과 더불어, 인민들의 저항이었습니다. 중핵파는, 신 세대는 몰라도, 구 세대의 지지는 충분히 받으리라 예상 했습니다만, 이 쿠데타의 시작이 무엇인지 아는 인민들이 지지 하지는 않았겠지요. 자유를 체감한 인민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물론, 입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포섭 되었다고 생각한 온건파는 이탈했습니다. 중핵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려는데 오죽할까요. 그로미코, 리즈코프를 위시한 중도-온건파는 정통 정부에 합류했으며, KGB의 안드로포프 또한, 중립을 명령했습니다. 또한, 메스너가 포섭한 국가들이 움직였습니다. 승리한다면 묻힐 위기에 처한 체코 슬로바키아의 3개 사단을 위시로, "독일을 제외한" 대다수 유럽의 공산권 국가 또한 정통 정부를 지지 했습니다. 서방은 이 사태에 대해, 의도적으로 논평을 피했습니다. 물론, 남일본과, 남한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주목할 사안이 하나 더 있다면, 'OB의 복귀' 입니다. 과거 트로츠키의 전위대를 맡았던, 표트르의 아들, 표트르 주니어는, 중립국을 경유해 복귀, 정통 정부를 지원했고, 마르텔의 아들인 피에르 또한, 사보타주와 요인 암살으로 정통 정부를 지원했으며, 중국에 망명했던 한 노인 또한, 40년만에 귀국해, 후방 보급을 맡아 주었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한 지원으로, 카잔에 달러가 실린 트럭 한대가 운송 되었습니다. 운송 기사의 전언으로 '내 몸은 외국에 있지만 정신은 러시아에 있습니다. V. A. L.'라는 말을 전한채.
인민과 동맹국의 지지, 그리고, 숙청 당했던 인사와 그 자식의 도움을 받아, 구국 정부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쿠데타를 이끌던, 보수파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내분으로 암살되며, 구국 정부는 3일천하로 끝났습니다.
개혁파는, 이 사건으로 다시금 본인들의 행보를 생각 해 볼 것입니다. 구국 정부에 가담한 병력들의 처리와, 보수파들의 처우, 그리고 이러 저러한 사건들을 해결 해야만 하지만, 일단 군축이 불고온 파란은 여기서 조용해 질 것입니다...
D1. 예견된 음모. 그리고...
소련 쿠데타와 동시에, 독일에서도 일이 터졌습니다. 수가 적은 신 세대와 혁신파를 억지로 밀어준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기성세대와 보수파는 다시금 일어서려 하고 있습니다.
합의 되지 않은 사과, 큰 변화 없는 통제, 나아지지 않는 착취, 소외된 실향민.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료하기도 전에, 기성 세대를 모두 버리고, 신 세대들의 말에만 치중 하는것이 과연 옳았을까요?
결국, 보수파와 군부는, 소련의 상황을 보고 들고 일어나, 독일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소련과의 차이가 있다면, 구국 정부가 인민들의 비토를 받았던것과는 달리, 오히려 여기선 보수파가 더 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 입니다. 소련군 또한, 군축과 쿠데타로 인한 내분에 빠져 있으며, 주변국의 경우는 우려를 표하고 있지만, 소련 진압군을 지원하고 있기에 발을 뺄수 없었고, 서구권 또한, 내분을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보수파와 군부는, 슈미트와 신 세대를 축출하고, 개혁 사회주의를 폐기하며, 반 수정주의-반소 사상을 기치로 한 인사를 기용했습니다. 이들은, 68세대를 끼인 세대로 만들기 위해, 교육에도 힘 쓸것입니다. 독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S2. 변화의 바람.
삼일천하로 끝났다지만 쿠데타는 쿠데타. 소련은 이 위기를 넘기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제24차 당대회가 1년 앞당겨진 1970년 1월 13일에 열렀습니다. 이 자리에서 알렉세이 코시긴 서기장은 '나는 지난 4년 동안 인민들을 위해 여러 노력들을 하였으나 한순간의 부주의로 인해 인민들에게 이러한 혼란을 겪게 한 것에 대해서 깊은 사과의 뜻을 전한다.'는 연설을 하여 연임을 하지 않고 여기서 서기장 임기를 마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비록 최근의 쿠데타가 있었지만 개혁사회주의와 신-신경제정책 등으로 인민들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과 (밀주 파동 등 몇몇 불미스런 일이 있긴 했지만) 인민들의 삶이 이전에 비해서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대의원들과 인민들은 코시긴에게 열렬한 박수를 치며 그의 퇴임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서기장을 선출해야만 합니다. 중핵파(보수-강경)는 지난 쿠데타로 인해 박살나 공산당 내에서 전멸한 것이나 다름 없었고, 온건파(중도-온건개혁)와 혁신파(강경개혁-자유)의 세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허나 혁신파 역시 그리 좋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쿠데타 진압에서의 공이 있었다지만. '무리한 개혁을 밀어붙여 혼란을 만들었다는' 비난 또한 같이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세가 불어났다지만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고, 자연스레 온건파가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그렇게 공산당대회에선 온건파의 리더인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이 신임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온건파의 2인자인 그로미코는 장관회의 주석에, 리즈코프는 고스플란 주석에 임명되었습니다. 물론 혁신파도 리더 야코블레프가 장관회의 제1부주석에, 2인자 고르바초프가 내무장관에, 메스너가 주미대사에 임명되는 등 일부 요직들을 배분받긴 했습니다.
안드로포프는 개혁사회주의와 신신경제정책 등 코시긴 지도부의 개혁노선을 계속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군축의 경우에는 '최근의 국제정세 변동'으로 인해 취소되고 군비증강이 행해졌습니다.(다만 대양해군으로의 재편이나 군 복지 강화 등은 그대로 유지) 그리고 소련이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독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반수정주의-반소 노선을 선언한 극좌 빨갱이 꼴통(소련이 이런 말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문제입니다.
슈미트 서기장과 볼프강 쇼이블레,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슈카 피셔 등 개혁파 인사들은 프라하나 빈 등으로 피난해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극동에선 국경문제를 해결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소련은 다시 한번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S-D1.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다.
쿠데타의 핵심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목만 남아 돌아오고, 주범들이 재판장에 서서 줄줄히 감옥에 들어가며, 쿠데타 가담 병력들이 예편의 칼날을 맞고 있었으며, 군 정예화 또한 빠르게 진행 중이었습니다. 즉, 이제 당장 남은 문제는, 독일입니다. 68혁명을 잠재우고, 새로운 체제를 세워둔 독일에서, 반 수정주의가 득세해버릴줄이야. 소련의 수뇌부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코시긴 독트린이 앞길을 막고 있는 꼴이었으니까요.
그런 고민이 지속 되던 중, 독일 정부는, 제 3의 길(Sonderweg)을 내세우며,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의 탈퇴 의사를 밝혀, 이에 따라, 동구권은 단교를 선언하고, 독일에 있던 외교 공관및 시민의 철수를 명령 했습니다.
단수를 치고 단수를 맞은 독일은, 서방에 다시금 접촉을 시작 했습니다. 주변국 모두는 한대씩 맞은 트라우마가 있기에, 꺼려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이 사태를 상당히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말레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한 카드로써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죠. 만일 미국이 개입할 경우 프랑스는 몰라도 영국은 반드시 입장을 선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급히 프로파간다를 시작했습니다. 자국의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행보를 보인 슈미트의 실각을 꾀한 독일 수뇌부가 공산주의의 탈을 쓴 슈트라서주의-민족 볼셰비즘 성향의 좌익 파시스트이며, 이들은 군비증강을 시작해 다시 한번 세계대전을 벌이려 한다는 내용과 함께, 68세대의 실각을 담은 내용이었죠. 그 프로파간다는 언론에 쓰임이 있었고, 서방의 여론은 독일과 소련중 누가 옳은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CNN, BBC, RTF, NHK 등 서방의 주요 언론사들은 이 문제 때문에 전문가 페널들을 모셨습니다.
서방의 여론이 독일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음에 따라, 독일 군사 정부는 위기에 봉착했고, 그 기회를 KGB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사 정부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며, 거짓 정보를 뿌려대 내분을 획책했습니다.
독일 구국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은 국경에서 대규모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물론 폴란드도 덤으로 끼었지요... 이 사건은 독일내 여론을 동요하게 만드는데는 아직 모자랐지만... 네, 민생 경제가 첨가 된다면 충분할것입니다. 자립을 완전히 검토하지 않은채, 독자적 생태계를 구축한다고 깝치면, 어떤 결과를 얻을수 있는지를, 독일은 지금 경험했습니다. 물가는 대 폭등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시위대가 들고 일어났죠. 제일 처음은 68세대였습니다. 그리고, 구국 정부는 이 사건을 아주 시원하게 해결 했습니다. 시위대를 감금하고, 고문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시민들을 조용히 시킬수 있을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68세대가 주도권을 쥐었던 그 시위와는 달랐습니다. 개혁 사회주의를 밀었던, 정치적 시위와는 달리, 이 시위는 삶을 위한 시위였습니다. 그리고, 68세대가 개새끼라도... 자기 개새끼지요. 자기 자식이 쳐 맞고 돌아오는데 참을 부모가 있을리 있겠습니까? 결국, 구국정부는 4.19 혁명을 맞이한 이승만 정부처럼, 하야를 선언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금 개혁파 지도부는 독일로 복귀 할 것입니다. 또한, 모스크바는 이들의 복귀 제안을 받아 들일것이고, 이 지도부는 더 이상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않을것입니다.
U1. F**k the Draft!
말레이 전역의 빠르고 성공적인 종결은 궁지에 몰려있던 미 정책결정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존슨 대통령 이하 각료들 및 의원들은 드디어 부글부글 끓는 민심을 좀 잠재울 수 있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그러나 커티스 르메이 국방장관이 아태조약기구 국방각료회의에서 돌아와 “말레이 전역 안정화를 위해서는 연인원 50만명을 10년간 배치해야 한다”는 발언을 꺼내자 이들의 표정은 바로 흙빛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대통령 각하.” 한때 자신감있게 손수 폭격기에 탑승해 도쿄 대공습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 때 전면 핵전쟁을 주장하던 다혈질의 주전론자는 온데간데없고, 늙고 피로에 찌든 전직 장군의 모습만이 자리했습니다. 결국 대통령의 강력한 주장으로 군 배치규모는 축소되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습니다. 백악관 출입기자 회견에서 대변인이 징병제 이야기를 꺼낸 것이 화근이었죠.
그 다음 날,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관저에서 나오면서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와 마주쳤습니다. “부통령님, 말레이 반도의 정국불안으로 인해 징병제 부활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험프리는 대답을 피했으나, 우드워드 기자는 마치 날파리처럼 집요하게 추궁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겁니까, 만다는 겁니까? 청년들이 징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험프리는 훈련된 정치인이었으나, 순간 통제를 잃고 벌컥 화를 냈습니다.
“내가 그걸 대관절 어떻게 장담하겠소!”
(How the hell would I ensure that?)
애석하게도 이 답변은 우드워드 기자 외에도 다른 TV 및 신문기자들에게까지 들려왔고,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특보를 내보냈습니다. “험프리 부통령, ‘징병제 부활’ 감행하다!” “징병제 부활 임박! 대학생 차별징집 문제는 어떻게?”
민심은 다시 한번 폭발했습니다. 압도적 불안감 속에서,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마치 사실처럼 군중 사이를 떠돌았습니다. 일부 황색언론들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으며 불안을 부추겼죠. 가장 크게 뒤집어진 것은 다름아닌 학생 계층이었습니다. 1970년 4월은 동맹휴학, 대학 건물 점거농성, 가두시위, 폭동, 그리고 “F**k the draft!”라는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구호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급히 “징병제 부활은 검토하고 있지 않으며, 설사 검토하더라도 기존 예비역 위주의 제한적 방안만을 생각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는 예비역 군인들의 분노만을 불러올 뿐이었습니다. 험프리는 부통령직을 사퇴했고, 그 자리는 국가자유당의 진 커크패트릭이 맡게 되었죠. 공화민주당은 사실상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존슨 행정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웩 더 독.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이 파장이 어디로 이어질 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NYT/WP/WT: <언론합동보도자료: ‘70 중간선거 결과>
11월 4일 중간선거에서 진보당 압승! 공화민주당의 참패 두드러져…
진보당 총 438석 중 221석으로 하원 과반! 상원은 38석! 공화민주당 상원의석 22석으로, 40석을 지켜낸 자유당에 크게 밀리다!
공화민주당 닉슨 전 부통령, 국가의 안정을 위해 책임있는 세력의 단결을 요구! 공화민주당-자유당 연합하나?
K1. 종이로 만든 집
1970년 3월 31일, 대한민국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남일본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KAL333기가 남조선노동당 소속 테러리스트에 의해 피랍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은 기체를 북일본 하코다테로 돌릴 것을 요구했죠. 기장은 기지를 발휘해 “이 비행기는 하코다테까지 갈 연료가 없다”며 설득, 일단 기체를 부산공항에 임시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4월 1일, 정부는 진압 작전 실시를 의결하고 제1공수특전여단과 헌병대를 투입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현장 책임자 자리는 갓 준장으로 진급한, 육군 내 ‘신진 장교’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던 1공수여단장 김복동이었죠. 그는 육사 11기의 리더이자 군 내 비공식 사조직 하나회의 사실상 리더였습니다. 재급유가 끝나고 이륙을 준비중이던 KAL333기 뒷편에서, 진압부대가 서서히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대테러부대나 경찰특공대가 창설되지도 않은 한국군의 구조작전 역량은 심히 부족했습니다. 인질범들은 기장을 협박해 즉시 이륙하도록 했고, 갑작스런 이동에 당황한 공수부대원들은 기체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짚차를 몰고와 활주로를 막으려 했습니다.
그 결과 KAL333기가 짚차와 추돌해 랜딩기어가 파손되었고, 차량에 탑승하고 있던 장교 1인과 부사관 3인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간신히 이륙한 비행기는 결국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는데, 랜딩기어가 망가져 동체착륙 끝에 승객 3명이 사망하고 2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태가 일어났죠. 3명의 사망자 중 2명은 한국인, 1명은 일본인이었습니다.
노발대발한 박 대통령은 크게 화를 내었고, 박종규와 김형욱, 이후락의 몰락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올라선 차지철 경호실장은 윤필용 장군에게 김복동을 잘라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김복동 준장은 동해경비사령부로 좌천된 뒤 적당히 예편, 하나회의 리더 자리는 손영길이나 전두환 대령에게 돌아가야 했죠.
그러나 김복동은 조용히 죽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별다른 지원도 없이 급하게 진압작전을 지시해 놓고, 애초부터 무리한 작전을 반대했던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말도 안 됐습니다. 김복동은 경호실 요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윤필용과 독대, “각하의 눈을 가리는 간신 모리배들을 척결하고 진정한 애국자가 될 것”을 읍소했습니다.
한바탕 대숙청을 겪고 유약한 성정의 김계원이 수장직을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사실상 권력투쟁에서 아웃. 그렇다면 경호실장 차지철, 그리고 보안사령관이자 사실상 군부 친위세력의 수장 윤필용만이 남았습니다.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자신의 측근들이 차지철에게 붙어 권력을 탐하는 상황을 윤필용은 매우 큰 위기로 느꼈습니다. 김복동의 의견을 받아들인 윤필용은 즉각 김재규 수경사령관에게 연락해 거사를 알림과 동시에 미국에 있던 장도영 예비역 장군에게 연락했습니다. 김재규는 주중대사로 가있던 이종찬 장군에게 연락을 돌렸죠.
남은 것은 미국의 뜻이었습니다. 그 새 시간이 흘러 때는 5월, 미국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남한 정세가 안정화된다면, 어쩌면 동북아에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죠. 주한 미국대사, CIA 한국지부장, 미8군 사령관은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 쿠데타를 돕기로 했습니다.
운명의 날인 5월 14일, 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을 포섭하고 국기 하기식 현장을 급습, 차지철과 그에게 아부하던 내각 각료들의 신변을 확보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1공수, 제4공수, 수경사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이 육군본부와 정부청사(중앙청)를 장악하고 청와대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습니다. 광범위한 감청을 통해 CIA와 주한미군이 사실상 오퍼레이터 역할을 해준 덕에, 쿠데타군은 적의 이동경로와 대응방식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죠.
5월 14일 저녁부터 15일 이른 새벽까지, 윤필용과 김재규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5일 오전에는 이종찬과 장도영이 입국했고, 구중궁궐이던 청와대는 모든 통신과 왕래로부터 차단되어 산중 감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성을 잃은 박정희는 존재하지도 않는 부대에 듣지도 못하는 명령을 내리며 빠르게 폐인이 되고 말았죠. 군사혁명위원회는 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되어 사실상의 유고사태가 발생했다”고 발표, 전국에 비상계엄을 발령했습니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장 이종찬은 “북괴의 전쟁도발에 맞서 전국민적 단결이 필요하다”며,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점진적인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했습니다. 박정희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대통령이었으나, 조만간 그마저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K-K1. brush war, korea
서울호 사건과, 그에 이어진 5.14 군사 정변은, 한반도 정세에 큰 바람을 불고 왔습니다. 북한 주석 정상진의 기동 훈련은 그저 단순한 무력 시위가 아니었지요. 5월 16일, 이종찬 위원장이 국민의 단결을 주문 할때, 군사 정변의 과정을 목도하던 북한은, 5월 17일 일요일, 탐색전 삼아, 옹진반도와, 개성, 연백, 임진강, 남대천, 소양호등 각 지방에서 국지전을 시작 했습니다.
옹진반도는 탐색전 시작 몇시간만에, 퇴각 명령이 내려져 후퇴했고, 연백과, 개성에서도 긴급 후퇴했으나, 강 방어선을 낀 지역에서는 방어가 이뤄지고 있었고, 국군과, 주한미군, 남 일본 원정군은 긴급히 출격해 반격 작전을 시작 했습니다.
아태 연합사는, 훌륭히 반격 작전을 수행해, 양양을 수호하고, 속초, 인제, 화천과, 포천으로 진격해 점령했고, 철의 삼각지대를 점거하기 위해 진군하기 시작했을 무렵, 소련에서 참전 압박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아태 연합은 철의 삼각지대 진공을 포기하고, 현 점령지를 유지한 상태에서, 북한과, 남한을 핵심 당사자로 하는, 강화 협상이 시작 되었습니다.
K-K2. 협상은 없다. 그러나, 확대도 없다
소련의 압박으로, 남, 북한, 미국, 소련이 제 당사자로 강화 회담이 열렸습니다. 네 국가의 입장이 모두 달랐고, 요구하는 조건 또한 모두 달랐죠.
북한은, 서울 탈환이 최소의 목표, 남한또한, 군사 정변 이후 정통성 확보와 함께, 큰 성과가 필요 했으며, 소련은 북 중국을 상실한 이래, 북한을 상실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미국은 말레이 사변이 일어나고, 징병제 파동이 일어나 증병이 불가능한 현 상황에 타협을 원했죠.
그에 따라, 양측은 서로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조건을 제시 했습니다. 북한은 옹진 반도의 양도와, 도발의 중단, 무력 통일 노선 포기, 포로는 원 국가로 환송을 요구했고, 남한은 현 전선으로 종결하고, 포로에게 송환국 선택권을 부여하자고 주장했죠.
결국, 협상은 1차적으로 결렬 되었습니다. 다만, 이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 될 경우의 여파를 생각한, 중국, 미국, 소련 모두, 사태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았고, 결국 대리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세 국가 모두, 한국군이 피를 대신 흘려주길 바라며, 물자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의 흐름은, 아직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UK1. 우리는 전사의 노래를 부르리라.
3년전, 아일랜드의 전사들은 분투에도 불구하고 패배했습니다.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그 보복으로 매우 강한 통제와 억압을 선물해 주고 있었지요. 아일랜드에 군정청을 설치하고, 불법 무기등의 소지를 막기 위해 주마다 한번씩 가택 수색을 겪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꿈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아일랜드인들은 그러한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마피아와 IRA가 결탁해, 무기를 밀수해서 아일랜드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걸리는 법이죠. 영국 정부는 밀수 사실을 내부자의 밀고로 알아내었으며, 결국 무기는 압류되고, 마피아와 IRA또한 체포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본국은 더욱 강경한 대응을 내렸습니다. 상선의 아일랜드 지역 입항 금지와 함께, 배급제의 실시였죠.
아일랜드 시민들은 영국이 대기근때처럼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한다며 다시 일어서려 했으나, 총칼로 억눌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언제 행복을 누릴수 있을까요?
M1. 아, 이건 또 뭐야?!
아태조약기구 연합군은 강했습니다. 약 70,000명 규모의 연합군은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개전 한달여만에 쿠알라룸푸르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전역 거점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산과 정글로 숨어든 공산 게릴라들 역시 토벌될 것이 분명해 보였죠. 싱가포르에 주둔 중이던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CV-60 “새러토가” 갑판 위에서 존슨 대통령이 승전 기념연설을 펼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연방은 이미 존속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북보르네오(동말레이)의 사라왁 주와 사바 주는 독립(사라왁-사바 공화국)해버렸고, 영국령(혹은 호주령) 브루나이 왕실의 강력한 탄압을 받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A.M.아자하리를 대통령으로 옹립했습니다. 또한 말레이 본토에는 마하티르의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정권이 복귀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매우 싸늘했습니다. 화교계는 민주행동당(DAP)을, 말레이계는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이었죠. 당연히 각지에서 테러, 폭동, 봉기가 난립했습니다.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별로 없던 미국 측 인사들은 호주 및 싱가포르 측 인사들과 큰 갈등을 빚었습니다. 호주 측에서 제시하기를, 말레이시아를 안정화시키고 다시금 정상국가로 기능하게 하려면 최소 7년간 연인원 500,000명 주둔이 필요하다고 하니, 전쟁을 빨리 끝내고 어서 국민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미국은 미칠 노릇이었죠. 타협 끝에 약 25,000명의 병력을 순환배치하여 3년간 주둔시키도록 했지만, 이는 이도저도 아닌 엉터리 절충안에 불과했습니다.
싱가포르의 야망은 여기에 또 다시 불을 붙였습니다.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정권의 낮은 인기 탓에 중국계 우선주의 정당인 민주행동당은 큰 반사이익을 누렸고, 리콴유 총리는 공공연하게 이들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최종목표는 당연히 양국을 연방으로 묶어 자신이 총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고요. 심지어 마하티르 총리를 극히 불신했던 호주 역시 이 움직임에 찬동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 7월 4일, 미군과 미 대사관 인원들이 독립기념일 행사를 즐기던 때, 마하티르 총리는 쿠데타로 축출당하고 말았습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민주행동당은 명목상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화교우월주의 극우정당이었습니다. 당수 첸만힌(증민흥)은 의회를 해산한 뒤 국가재건평의회를 새로 만들어 신헌법을 제정, 대통령제로 개헌해 본인이 그 자리에 앉아버렸습니다. 미국은 상당히 불쾌해했지만… 어차피 이런 경우는 한두번이 아니었죠.
호주의 존 맥이언 총리, 싱가포르의 리콴유, 미국의 존슨은 말레이시아의 정치적 혼란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질까요?
K2.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필 수 있을까?
전쟁이 벌어졌어도, 군사혁명위원회는 민정 이양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권력을 사유화한다면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복사본이 될 뿐이요, 그로 인한 대중의 저항을 또 다시 총칼로 억누른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전선이 철원 언저리에서 고착되어 있던 8월 3일, 민정이양 및 헌정재건 위원회, 이른바 9인 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공화당 측 3인(김종필, 윤치영, 백남억), 야당 측 3인(유진산, 윤보선, 백낙준), 그리고 혁명위 측 3인(이종찬, 장도영, 김재규)으로 구성되었죠.
인적 구성에서 알 수 있듯, 이는 보수주의의 우위를 상징했습니다. 공화당 측은 제3공화국 체제로의 복귀를, 신민당 측은 박정희 집권 이전 제2공화국 체제로의 복구를, 그리고 혁명위는 그들의 입장을 절충하는 입장이었죠. 그 누구도 미래를 지향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혁명위는 김종필을 비롯한 여당의 부패 정치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중론은 야당 쪽으로 모아졌습니다.
한 달여에 걸친 토론 끝에 제5공화국 헌법 초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2공 헌법의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헌법재판소, 감사원, 선관위 등의 권한을 강화해 견제장치를 달아놓는 형태였죠. 또한 중화민국 헌법의 고시원을 모티브로 하여 중앙인사원을 독립기관으로 설치했다는 특징점이 있었습니다.
전시상황이 마무리되는 대로 총선거를 치르기로 확약하며 새 시대가 왔음을 홍보했지만, 국민들은 약간 갸우뚱한 모양입니다. 일단 새 시대가 왔다니 기대 정도는 하겠지만, 구시대의 노인네들끼리 모여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영구인지 땡삼인지 하는 젊은 신민당 원내총무가 뭐라뭐라 떠들어대긴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전선에서는 피로 피를 씻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CN1. 이정도면 선녀같군요...
자유 퀘벡 사건이 일어난지 어언 3년. 퀘벡 해방 전선은 세를 불리고 있었고, 10월 10일. 퀘벡 해방 전선의 전환점을 맞이할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퀘벡 해방전선의 지도자인 폴 로즈와, 피에르폴 조프루아가, 퀘벡의 장관, 피에르 라포르트와,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 미국 외교관 아돌프 슈미트를 납치해 감금하고, 퀘벡의 자주와 독립을 요구 했습니다.
트뤼도 총리는, 즉각 임시 계엄령을 내리고, 이들의 수색을 시작 했습니다. 참극이 벌어지기 전에... 그리고, 초동 수색은 자국 외교관이 납치된 미국의 열성적인 지원 (그리고 항의) 로 매우 성공적으로 종료 되었습니다. 퀘벡 해방 전선의 회원들은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라포르트, 크로스, 슈미트는 모두 안전히 해방 되었습니다.
퀘벡 해방 전선은 노선을 바꿔 잡을것입니다. 무장 투쟁 대신, 자치를 얻고, 정치적 지지를 얻을 방식으로. 캐나다 정부가 용인한다면, 이곳은 아일랜드와 다르게, 평화로운 방식으로 변화해 나갈것입니다.
R1. 검은 9월,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지역강국 레반트 연방은 실상 하심 왕가 후세인 1세 개인의 카리스마와 통치력으로 굴러가는 국가였습니다. 그는 친소 사회주의자들과 왕당파, 이슬람주의자, 동방 기독교도, 유대인 그룹들을 적절히 요직에 분배하며 적절한 통합을 이룩해내고 있었죠. 그러나 리비아가 이집트와 국가연합을 형성하고 전략적 입지가 약화되자 이 균형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아랍사회주의당(일명 ‘바트당’)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진 것이었습니다.
1970년 8월 17일, 후세인 1세는 베이루트에서 가두연설 중 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청년의 총탄에 맞아 1주일간 사경을 헤맸습니다. 술탄이 일시적인 유고상태에 빠지자 바트당 당수 겸 국방장관 하페즈 알아사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이슬람주의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약 한달동안 벌어진 이 대숙청으로 인해 연방은 안정을 크게 잃었고, 간신히 부상에서 회복한 후세인 1세는 크게 노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군축과 고강도 개혁을 추진하느라 개입여력이 부족한 현상황에서 군권과 정계 주도권을 장악한 바트당 없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알아사드는 가뿐히 연방수상직에 앉았죠.
이 혼란에 크게 고무된 이집트의 나세르는 바트당의 반대파들(즉 자유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우익 국가주의자 등)을 포섭, 팔레스타인 남단의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 기습적인 대공습을 가해 남단 수운을 봉쇄해버렸습니다. 이란과 사우디 역시 반대파를 지원하는 한편 군부대들을 증강배치해 전쟁을 준비했죠.
그리고, “60일 전쟁”이 그 막을 올렸습니다...
모든 이들이 레반트 연방의 패배를 예상했으며, 어떤 이들은 레반트 연방 해체를 논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죠. 이집트군은 초전부터 대패를 거듭하며 오히려 레반트군의 기동전에 맥을 못 추었습니다. 나세르가 자랑하던 주력사단들은 시나이 반도 여기저기에서 식수와 식량을 바닥내며 맥없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이란군과 사우디군이 병력배치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쯤, 이집트는 이미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을 뺏긴 상태였죠.
이집트를 반신불수로 만든 레반트는 곧장 병력을 동남쪽으로 돌려 사우디군을 격파하고 쿠웨이트를 점거, 공습으로 사우디군의 주요 보급루트를 마비시키는 한편 동쪽에서 이란군에 맞선 대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초전에서 패한 이란군은 아바즈, 데즈풀 등 서부 유전지대를 상실하고 패주, 공세역량을 거세당했죠. 누가 봐도 삼국동맹이 전쟁을 지속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1970년 12월 12일, 역사적인 베이루트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레반트 연방은 시나이 반도와 쿠웨이트를 합병하며, 사우디의 담맘과 젯다에 조약항을 두어 군사를 주둔할 수 있었고, 수에즈 운하의 관리권을 얻어냈으며, 이란의 서부 유전지대에도 역시 군사를 주둔해 일대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삼국이 배상금을 납부할 때까지 - 즉 최소 10년의 기한동안이었죠. 중동의 패자가 누군지는 명백했습니다.
레반트 연방은 대승의 영광 속에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바트당은 모든 권력을 장악해 술탄을 허울뿐인 입헌 군주로 만들었습니다. 사우디와 이란, 이집트의 권력자들은 굴욕적인 협상을 맺은 대가로 엄청난 민중봉기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K3. Road to Victory
신헌법이 임시의회의 인준 끝에 통과될 무렵인 10월 초, 국군은 동맹국들의 열화와 같은 공중지원 속에 파죽지세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국군은 같은 규모와 조건의 인민군에 비해서도 그리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질을 자랑했으나, 애초에 같은 조건이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전술적으로는 인민군이 승리,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국군이 대승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습니다.
10월 말에는 이미 대동강에 일부 선발대가 도달, 곧 평양-원산 라인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곧바로 최후통첩을 보내왔죠. 못이기는척 재협상에 나선 한-미 측은 요구사항을 마구 던져댔습니다. 협상은 12월까지 이어졌죠.
협상이 진전을 보인 것은 엉뚱하게도 중동에서 레반트가 3국동맹을 압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였습니다. 미국은 협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1) 사리원-원산 선을 새 국경으로 인정, 2) 한반도에서 미소 양군 동시 철수 및 미 육해공군의 제주도 주둔 인정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안이 마련되었습니다.
아마 금번 세기 안에 북한 정권은 빠르게 무너질 것이라는 보도가 줄을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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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의 사건과 플롯 소개.
- 레반트와 중국의 국가 통합. 그리고 그 이후. : 레반트와, 중국은 70년에 국가 통합을 확약 했고, 그 약속은 이뤄 졌습니다. 레반트는, 전승 이후, 국가 통합과 개선식, 인프라 개선등을 해 나가며 통합 국가의 서막을 화려하게 열고 있었고, 중국 또한 그 못지 않게 화려한 기념식을 준비 했습니다. 그러나, 레반트는 그로 인한 자금 문제, 중국의 경우, 참정권과 계엄령에 대한 문제가 해결 되지 못했죠. 어떻게 해결 할것인지. 귀추가 주목 되고 있습니다.
- 한국 총선. : 한국은 승전 이후, 군사 혁명 위원회를 해체하고 총선을 열어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신 세대를 열겠다는 자들이, 모두 구태를 기반으로 한다는걸까요? 대통령제, 내각제. 무얼 하건 큰 관심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혁신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 해방 지구의 복구도 중요한 과제로군요.
- 북한의 현 정세는? : 북한은 이번 전쟁에서 패전해, 곡창 지대를 왕창 상실해, 식량 주권을 잃었습니다. 소련은 그걸 구실로 북한의 공업화를 지원하려 하고 있군요. 북한이 나설 행동은 무엇일까요?
- 오일 쇼크 :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 사우디, 이집트, 이란 3국과, 의외로 돈을 많이 써 자금원을 늘려야 할 상황에 처한 레반트. 이들은 분명 적국이지만... 상황이, 함께 하게 해주는군요. 감산과 가격 인상을 요구하며, 석유 무기화에 나섰고... 국제 사회는 여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추가 사건 : 북해 유전)
- 휴민트 사건 : 남한은 총선에서 ***를 선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직을 일신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사실 누가 당선 되든 그랬을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요? 북한에 존재하는 휴민트의 목록을 넘겨주다니요... 북한에 내분을 획책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요원들의 목숨이 중요하지도 않습니까? 아무튼... 이 사건의 파장이 궁금하군요...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 오래도 갔군요. 파키스탄이 패전 이후, 동 파키스탄이 인구가 더 많지만, 서 파키스탄은 이들을 수탈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굴레를 벗게 하기 위해, 인도가 지원에 나섰습니다...
-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 사건 : (선택 사건) 한국의 신 정부는, 정권 장악을 위해 온갖 수를 쓰는건 양측 어디가 되든 같은것 같군요. 신 정부는 보안사를 동원해 공안 사건을 조작해 냈습니다. 재일 동포 51명을 체포했다고 보도했지만... 일본에 이미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될텐데요...
-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 (선택 사건) 오일 쇼크 이후, 달러를 석유로 지불하던 관행과 함께, 달러화의 가치는 이상하게 금과 맞지 않는듯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식을 선언, 변동 환율제로 나아가기 시작하는데...
- 천주교 교단의 복구및 시국 선언 : (선택 사건) 한국의 박정희 정권의 종료와 함께, 천주교 성직자들은 한국에 복귀하여, 교회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 정세문제를 규탄하는것은 성직자의 의무였지요. 부정부패, 빈부격차등을 시정하기 위한 교서를 반포했는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 마약과의 전쟁 : (선택 사건) 미 정부는 전쟁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엔 마약과의 전쟁이군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마리화나를 히피와, 헤로인을 흑인과 엮어서 그들을 탄압하고 혼란을 겪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정의로운" 대통령께서 그러실리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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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투고에 감사 드립니다.
@E.E.샤츠슈나이더 미국이 산자비가 아닌 팔라비를 지원한다는 것만 빼면 그러네요. ㅋㅋㅋㅋㅋㅋ
@돈이 곧 진리 게임에서는 그래도 민주파를 하나는 넣어주지만.. 여기선 이슬람 극단주의 vs 파시스트 vs 공산당 중 택1을 해야하니… 난죽택…
바닐라로 치면 파시/공산/비동맹 3파전 내전 나는 느낌 ㅋㅋ
@dear0904 보통 위키피디아 많이 긁어오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
물론 취미에 진심인 사람들은 학술논문이나 심지어 의회 발언록(…)까지 뒤지는 것 같지만….
@E.E.샤츠슈나이더 위키피디아-나무위키-인터넷입니다 전.19세기가 배경이면 관련 웹툰까지 동원.
@E.E.샤츠슈나이더 공화국이 망했으니 어쩔수 없긴 한데...그나마 왕당파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나머지 둘은 싹다 독재니.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제가 가끔 그랬습니다. 어케든 퀄리티랑 고증좀 살려보려고? 근데 둘 다 접근성이 영 좋지 않다는게 있죠 ㅎㅎ.
@931117 전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한중일 세계사 등 역사 만화들, 블로그, 집에 약간 있는 역사책들 총동원해서. 그 외로 뜨노나 카라 같은 모드들. 슈나이더님 RPG나 931117님, 디어님 연대기에서 사람들이 쓴 댓글 등도 찾아서 사용하고...
@dear0904 아제리 멘트는 조로아스터 관련인가요?
@E.E.샤츠슈나이더 네 ㅋㅋ. 그쪽 관련입니다. 아제르인 치니까 그게 거의 맨 위에 써있더라구요.
다음 환 언제 올라오나요?
원래 계획대로면 어제 올라오긴 했어야 하는데, 조금 꼬였습니다. 오늘 편집 하려다가 잡혀가서 못했고... 일단, 자유 연재니까요. 그래도 내일? 은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담을 지면 지금도 할순 있는데...
@dear0904 저도 그런적 있으니까.재작년에 저도 집안일로 부득이하게 휴재했으니까.
+ 올스타전 재밌었는데.이긴팀이 야유받는건 처음 본.ㅋㅋㅋㅋㅋ
@931117 전 디스 워 오브 마인에서 민간인이랑 적을 가리지 않고 걍 다 죽이고 약탈하는 플래이중...
@돈이 곧 진리 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캉 해방전때 첫 미션에서 일부러 시간 끌어서 포격으로 성당을 마구잡이로 파괴한 적도 있는.
@931117 전 시립 병원 의사, 병원 환자, 성당 신부님, 성당 아래에 거주하는 아이들, 항구의 밀수업자 다 가리지 않고 문답무용! 너에게 줄 것은 죽음뿐이다! 를 외치며 닥치는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너무 죽였는지, 이젠 사람이 없음...
브루노 아주 쓸만해! 그런데 이젠 식량이랑 거래할 약품이 부족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신부님은 죽이지 말고 빈사상태로만 만들어 마르지 않는 우물로 써먹을걸.
@돈이 곧 진리 그렇게 죽이면 무조건 카르마 엔딩 나오지 않나요? ㅋㅋ... 디스 워 오브 마인이 그런 게임이었던가?
@931117 그런데... ㅋㅋ... 지금 다 썼군요. 이거 참... 잠깐. 3시간 걸린건가? 중간 스지 빼도 2시간정도...
+ ㅋㅋㅋ 그렇군요. 저는 이번엔 안봐서. 승부치기라 욕 먹은건가요?
@dear0904 커스텀으로 브루노/마르코/카티아/즐라타 조합 만들어 플래이하고 있는데 많이 죽여서 무감각해졌는지 카티아가 적자생존 운운하며 살인을 옹호하고 즐라타가 우울해하지 않고 있어요. 마르코는 배고파서 그런지 늘 슬픔이지만.
@dear0904 아뇨.드림에서 야수 김민식을 투수로 내서(오승환 상태가 안좋았다는 말이 있긴 한데) 2아웃까지 갔다가 정은원한테 역전 쓰리런을 맞고 가까스로 이닝을 바꿨는데 나눔에서 마무리 고우석을 내서...ㅋㅋㅋㅋ
+ 뭐 다들 장난으로 그런거겠죠.ㅋㅋㅋㅋ아무튼 결국 그렇게 나눔이 이겨서 고우석과 나눔팀 감독이 상받을때 또 야유가.ㅋㅋㅋㅋ
@dear0904 https://tv.kakao.com/v/430461757
당시 영상중 일부.ㅋㅋㅋㅋ
PLAY
@931117 아. 오승환 상태가 영 안좋긴 합니다. 근데 나이랑 부상 감안하면... 지금 시즌 아웃 하고 치료 해야 내년 볼텐데... 근데, 야수내고 역전 처맞으면 그건 뭐 ㅋㅋㅋ...
+ 그나마 우리나라 올스타는 이긴다고 뭐 포상 없던거로 ㅋㅋㅋ 미국은 월시 홈 결정인가? 그거에 연관 있다니, 엄청 욕 먹었을겁니다.
@dear0904 뭐 설마 진지하게 진짜로 화나서 야유했겠습니까.그냥 상대방에서 야수 냈더니 진짜 마무리를 내서 깔끔하게 끝내버리니까 장난으로 그런거겠죠.ㅋㅋㅋㅋㅋ
+ 아무튼 진짜 재밌었던.그리고 이대호는 올해 은퇴라고 은퇴투어 행사 하더군요.한때 롯데 응원한적이 있어서 감정이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
+ 아니 근데 진짜 홈런이 오늘 진짜 제때 터져주고 몇몇 선수들이 퍼포먼스해서 재밌었던.ㅋㅋㅋㅋ
@931117 ㅋㅋㅋ 하긴 보통 야수를 내면 야수를 내야 하는데.. 올스타전에 ㅋㅋ... 아, 물론 등판 보장은 해줘야 하지만 ㅋㅋ
+ 올해 은퇴죠. 성적 진짜 좋긴 한데... 그래도 깔끔하게 하는게.
+ 올스타전은 그런 맛이죠 ㅋㅋ. 이정후 홈런 까줘 패러디 있나 궁금하네요.
@dear0904 마침 이대호 마지막 타석도 있었는데 삼진으로 끝나자 고우석에게 따봉까지.ㅎㅎ
+ 이승엽도 은퇴경기날 연타석 홈런 때린걸 생각하면 성적이 나빠야만 은퇴하는건 아니긴 한데 뭔가 기분이 묘한.
+ KBS에선 박용택,유희관이 일부러 편파중계까지 하고.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