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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풍수 특집ㅣ비보풍수와 비보명당] 한국풍수의 특징… 삶터 보완해서 만든 명당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72 15.03.27 10: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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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특집ㅣ비보풍수와 비보명당]

한국풍수의 특징… 삶터 보완해서 만든 명당

 

글·사진 최원석 경상대 교수

 

풍수해 막기 위해 제방이나 숲 조성 등으로 비보 원리 활용

 

비보풍수는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풍수의 사조이다. 신라 말 도선(道詵)의 비보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한국풍수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같은 동아시아의 풍수문화권이라도 중국이나 일본에는 비보풍수가 그리 주목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현지에서 풍수적 지형 조건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수단 정도로 활용될 뿐이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비보풍수라는 일반적인 용어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비보는 단지 풍수적 조건을 보완하는 수단이 아니라 거시적 국토계획의 사상이나 이념의 지위까지 갔었다. 고려시대에 도선의 비보사탑설 원리에 따라 서울과 지방 곳곳에 비보소를 설치했고, 무신정권 때에는 산천비보도감이라는 비보 전담 관청까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웬만한 고을이나 마을이라면 숲이나 돌탑 등의 비보물이 없는 곳이 없었다. 마을에 화재가 잦으면 입구에 못을 파서 불기운을 막기도 했다. 수도인 한양에서도 남지(南池), 해태 등 풍수적 입지 조건을 보완하는 여러 비보 장치가 조성되어 있었다.

 

 

▲ 비보숲의 전형인 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에 있는 마을 전경. 마을 북쪽이 트여 있어, 숲을 조성해 겨울의 찬바람을 막는다.

 

 

다른 나라에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비보를 왜 우리나라에서는 중시했을까?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풍수를 쓰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형성되어 발달된 풍수 이론을 우리 땅과 삶터에 적용하다 보니 당연히 명당을 새로 찾아서 옮겨야 하는 수고보다는 기존의 조건을 보완하는 쪽으로 나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주로 도읍이나 마을 등에 비보가 발달하는 실질적인 요인이 되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비보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경관보완 혹은 환경관리라는 합리적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근대시대에 풍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이나 숲의 조성 등으로 비보 원리가 활용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을숲을 조성하면 마을의 수재도 방비하고 겨울의 찬바람도 막아 미기후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 입증됐다. 그래서 명당풍수가 어디가 최적지인지에 대한 입지론이라면, 비보풍수는 장소의 환경조건을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관리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돌탑비보도 있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은 마을 공동체에서 매년 돌탑제를 지낸다.

 

 

자연 상태 완벽한 명당 없어

 

지난해(2014년)의 일이다. 전남 광양의 시립도서관에서 비보풍수에 대한 강의와 답사를 요청해 주민들과 함께 하루 종일 현장을 누빈 적이 있다. 광양은 한국 비보설의 시조인 도선이 주석한 옥룡사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참여한 시민들은 도선의 비보풍수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무척 많았다. 나는 거기서 칠순이 넘은 한 어르신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다. ‘비보명당’ 이라는 말이었다. 풍수를 20년 넘게 공부하고 있지만 비보명당이라는 말은 난생 처음 들었다.

 

중국의 풍수이론에서 말하는 세상의 명당은 모두 자연명당이다. 자연 상태에서 완벽한 풍수적 조건을 찾아야 하는 땅이다. 그런데 나는 비보명당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 풍수의 실제적 명당 개념은 바로 비보명당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조건으로 가꾸고 만들어나가는 환경이자 공간이었고, 실제 전통마을에서 지속가능한 경관보완의 이념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는 오래된 풍수의 미래나 다름이 없었다.

 

비보명당은 삶터의 풍수다. 삶의 지리이자 산 자(生者)의 풍수다. 존재론적으로 자연 상태에서 완벽한 명당은 없다. 신체 조건을 완벽하게 타고난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장소도 빈 구석이 있고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것이 있고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불가(佛家) 식의 통찰이라면,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풍수의 명당이란 이데아와도 같고 허상과도 같다. 자연에서는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인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 명당을 찾아서 돈과 시간을 허비한다. 예전만 해도 더 좋은 명당으로 옮기고 또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두고 또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행태와 마찬가지다.

 

비보명당은 풍수윤리이기도 하다. 자연과 땅에 대한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미스코리아를 찾고 꿈꾸기보다는 자기와 맞는 적당한 상대와 만나 서로 돕고 사는 이치를 비보풍수는 가르친다.

적당한 공간에서 내가 더 이상적 장소를 가꾸는 것이다. 그것이 비보명당의 인문주의적 사상성이다.

 

비보풍수는 고려시대를 지배했던 풍수였다. 도읍과 같은 주거지에 집중한 풍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상대적으로 묘터에 집중한 명당풍수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효 관념이 풍수와 결합했고, 묘지를 잘 잡아 부모를 편안히 모시고자 했던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 부모에 대한 효는 임금이나 나라에 대한 충성과 매 한 가지였다. 효 담론은 조선조 권력집단에 있어 국가의 통치와 사회 질서 유지에 매우 효과적인 정치윤리이기도 했다. 묘지 풍수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회를 유지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정은 달랐다. 지방 곳곳에 사족 집단들이 생겨나고, 풍수로 인해 묘지의 쟁송도 빈발했고 사회적 비용이 커졌으며 폐해가 극에 달했다. 실학자들은 이런 묘지풍수의 사회적 역기능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풍수 무용론(無用論)을 들고 나왔다. 조선시대적인 배경 하에서 발달해 온 묘지풍수의 명당론과 그 사회적 효용성이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국가적으로 화장을 권장하고 있고, 웬만한 시골에서도 화장이 대세다. 이제는 굳이 묘지풍수와 자연명당을 찾아다닐 아무런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산청의 비보조산.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해동지도’에 그려져 있는 고을 입구(지도 아랫부분)에 조산 3개가 뚜렷이 그려져 있다. 풍수비보를 목적으로 조성됐다. 최근 산청군은 조산이 있었던 위치에 조산공원을 만들었다.

 

 

공동체가 자연환경 적응하는 생활의 지혜

 

비보풍수를 오늘날의 학문으로 해석하면 무엇이 가장 가까울까? 아마도 전통적인 경관보완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비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돕는다’, ‘보완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비보란 삶터 경관의 지형 혹은 환경 조건을 인위적으로 보완함으로써 주거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동아시아의 풍수적인 경관보완 사상이자 개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비보풍수는 경관생태학의 연구 범주와 관련이 깊다. 경관생태학은 기존의 생태학과는 달리 인공 생태계의 보완을 통한 자연적 환경과의 조화 및 항상성 유지의 증가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활동을 환경의 주요소로 보고 경관 관리와 경관 요소의 인위적 보완을 추구하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한국은 이미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거지의 곳곳에 풍수적 경관 보완을 했고, 그 자취는 지금도 전통 마을에 남아 있다. 주민 공동체가 자연 환경에 합리적으로 적응하는 생활의 지혜였던 것이다.

 

특히 숲을 조성해 풍수문화 경관을 보완하는 방식은 한·중·일 세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것을 조산(造山) 혹은 조산숲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숲이 사람들의 눈에는 산처럼 보였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보산(補山)이라 하여 주로 나무를 심어서 주거지의 뒷산을 비보했다. 지금도 양자강 이남의 강서성이나 복건성의 마을에 다수가 남아 있다. 홍콩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오키나와(유구)에서도 마을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서 둘레로 숲을 조성했다. 이것을 ‘포호림(抱護林)’이라 했다. 특히 유구 왕조는 그 직할지에 ‘풍수소(風水所)’와 ‘풍수산(風水山)’을 정해 수목과 토석을 관리하고 훼손하지 못하게 했다. 오키나와의 사례는 한국(조선)의 경우와 비슷하다. 특히 ‘풍수소’는 우리의 경우 ‘비보소’라 했고, ‘풍수산’은 ‘금산(禁山)’이라 하여 조선조에 도성 주위의 산림을 보전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관리한 바 있다.

 

비보풍수의 현대적인 효용성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최근 국토 및 도시계획, 조경 및 건축분야, 그리고 환경관리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공간 및 경관인식 방법으로 풍수지리의 가치와 적용 가능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비보풍수는 생태적 조경의 우리식 모델로 환경 설계의 사상 및 양식으로 응용될 수 있다.

현대 도시의 생태적 환경 조성 및 설계에 있어서 생태축 및 생태 네트워크, 생태 통로의 구성에 있어서 필요한 숲, 생태길 등의 조영 원리와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보풍수는 공간과 장소에서 벌어지는 자연과 사람의 만남의 미학이다. 개인 주택에서 마당의 정원에 나무 한 그루 심거나, 베란다에 화분 하나를 놓는 것도 풍수적 비보일 수 있다. 지금도 비보풍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 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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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락의 풍수로 본 명당]

선덕여왕릉 터의 비보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덕분이며, 경주 진산인 낭산에 선덕여왕릉이 자리한다. 선덕여왕릉 터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대의정치를 보여주었던 여왕이기에 얻을 수 있는 천장지비(天藏之秘)의 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명당형국은 일제 강점기 울산과 영천 신작로를 따라 놓인 계획철도가 경주로 진입하면서부터는 그것이 많은 왕기맥을 끊으면서 관통하고 있다. 특히 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지와 연결된 지맥을 확연이 끊고 빠져나갔으며, 황룡사지와 안압지, 옛 도읍지인 반월성 지맥을 자르며 경주 중심부를 지나 안강으로 빠져나간다. 이에 낭산에 자리한 선덕여왕릉 터의 명당공간을 살펴보고, 훼손된 왕릉 터에 대한 풍수비보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낙동정맥이 백운산(892m)에서 분맥하여 호미지맥을 이루고 치술령(603m)에서 좌선지맥은 남산(495m)을 세우고 우선지맥은 토함산(745m)을 세웠다. 토함산의 내룡맥은 다시 망호봉-대덕산-형제봉(290m)을 행룡한 후, 산진처인 낭산(101m)에 입수맥을 뻗어내려 선덕여왕릉 터에 혈처를 이루고 있다.

즉, 토함산은 주산이 되고 낭산은 현무봉을 이룬 곳으로, 내룡맥이 단맥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듯이 행룡입수하여 터를 이룬 것을 말한다.

 ‘A’지역은 예전의 사천왕사지로, 낭산의 앞쪽 입술에 해당되는 전순(氈脣)부분이다. 전순은 혈처의 여기맥(餘氣脈)이 더 이상 분출되지 않도록 땅이 뭉쳐진 형태를 띠게 된다. 풍수적으로 전순이 없는 터는 생기가 앞쪽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곳 왕릉 터는 전순을 갖춘 명당을 의미한다.

명당혈처는 생기가 오래도록 머물 수 있도록 좌우의 산세가 감싸듯이 호위하고 있는 공간에 자리하여야만 한다. 풍수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선덕여왕릉(27대)을 중심으로 뒤쪽은 부왕인 진평왕릉(26대)이 든든히 자리하고 있으며, 앞쪽 가까이는 신문왕릉(31대)과 효공왕릉(52대)이 있고, 초입에는 신무왕릉(45대)이 자리를 지키는 형국이다. 이러한 지세를 보면 지금까지도 후대의 왕들이 머물고 있는 지맥에 의해 낭산의 혈처가 보호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득수는 ‘남천’을 얻고 있다. 남천의 수계를 살펴보면 토함산에서 발원한 계류수는 불국사가 입지한 중심룡맥의 좌우에서 1차 지당을 이룬 후 산진처의 ‘불국동’에서 합수한다. 다시 물길은 구곡수로 흐르다 남산에서 발원한 계류수와 2차 합수하여 낭산으로 흘러 들어오는 수세이다.

득수형태는 선덕여왕릉 터로 진입하기 전에 신문왕릉 터에서 반궁수를 이룬 뒤, 곧바로 궁수를 이루어 서쪽의 넓은 들을 거쳐 옛 도성인 반월성을 따라 빠져나가 형산강과 합수하고 있다. 이것은 신문왕릉의 터가 남천의 물길을 걷어주어 역수형태로 완화시킨 후 다시 궁수형태를 이룬 것이며, 낭산의 지맥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경계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형국은 산(음)과 물(양)이 서로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생기가 생성되는 곳이 되며, 빠져나가는 물길이 보이지 않는 입지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선덕여왕릉의 터는 장풍과 득수가 이루어져 혈처를 이루고 있는 명당이다.

 

셋째, 왕기맥이 끊어진 신성공간이 흉당으로 변하고 있다.

먼저 울산에서 경주의 초입에 있는 원성왕릉(38대), 효소왕릉(34대), 성덕왕릉(33대), 신무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선덕여왕릉 입지는 토함산의 왕기맥을 받고 있는 곳이다. 토함산은 예로부터 우리 선현들의 산악사상에 따른 동악(東嶽)의 신성공간으로, 맑은 정기가 머물고 있는 영산(靈山)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가 이어진 왕릉 터의 왕기맥을 무참히 자르면서 지나는 철로가 놓여 있는 형국이다.

특히 선덕여왕릉 터는 전순을 자르면서 지나고 있으므로, 지금 사천왕사지의 조성은 생기가 없는 땅에 모양만 만드는 형국이다. 또, 서쪽으로 진입하는 철도와 4호선 국도가 선도산(381m) 목자락을 가로질러 조성되어 있으며, 철로는 태종무열왕릉(29대)을 관통하였고 다시 송화산(276m) 자락의 김유신장군(흥무대왕으로 추증)묘를 관통하고 있다. 이곳 역시 흉당으로 바뀌고 있다.

 

현 정권은 문화융성을 유독 강조하고 있지만 선현들이 머물고 있는 명당공간들이 훼손된 채 방치된 사실은 정작 모른다. 경주는 천년의 역사가 숨 쉬는 공간이다. 지금도 늦지 않다. 철로가 지척에 놓여 왕기맥을 자르면서 지나고 있는 입지는 서서히 흉당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도시재생 차원에서 효소왕릉·선덕여왕릉·신문왕릉 터·경주 안압지 북편·태종무열왕릉 터·김유신장군묘역 공간은 방음벽이나 비보림을 조성하여 명당지기를 받을 수 있도록 풍수비보를 해야 한다.

 

국풍환경설계연구소장

/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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