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이 영월에 없는 동안 형식의 집터는 허물어진 건물을 깨끗이 제거하고 빈터로 관리되고 있으며 형식의 앞으로 되어있는 논밭도 얼마 되지는 않지만, 형식이 주었던 소작인들을 잘 관리하여 형식이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또 수해 복구비 보조로 나온 보상금도 찾아서 농협에 형식의 명의로 넣어 두었다.
이는 모두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하는 형을 위해서 동생인 용식이가 취한 조치였다.
형식은 동생이 고마웠다.
전에도 형인 자기보다 옹골찬 동생이지만 자기가 없는 동안 자기를 위해 취한 동생의 조치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맙기 때문이다.
고마워하는 형을 보고 용식은 계면쩍게 웃으며
“형님! 이제 고향에 정착하시어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하셔야 하지요. 그래야, 지하에 계신 아버지도 걱정을 안 하시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 동생도 형님이 고향에 계셔야 마음이 든든하고요” 한다.
“알았어. 노력해 보지.”
하지만 형식의 말은 허공에 맴돈다.
있을 곳이 마땅치 않은 형식은 당분간 동생의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처음에 형식이 방이라도 얻어 따로 살려고 했는데 동생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데 남의 집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며 아버지가 쓰시던 사랑방 비어있으니 거기 있으면 된다고 하며 용식이 반대해서 동생네 집에 머물기로 했다.
동생의 집으로 들어가 동생네와 같이 생활하고 있어 겉으로는 평범한 생활이 시작되었으나 형식은 마음을 잡지 못한다.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순영을 잊을 수가 없다.
영애의 얼굴이 밤마다 어른거린다.
아버지의 환영이 형식을 향해 손짓한다.
서울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은 줄 알았는데 고향에 돌아오니 옛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순영과 영애와 함께 행복했던 그때가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훨씬 덜 할 텐데
아버지까지 돌아가고 안 계시니 마음 둘 곳이 없다.
그리고 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하여도 여간 죄송스러운 것이 아니다.
형식이 영월에 있을 때도 아버지는 동생네 집에 계셨다.
면사무소에 다니는 형식은 농사를 짓고 사는 동생 용식보다 형편이 났다며 용식에게 더 많은 농토를 물려주신 아버지는 그것을 이유로 동생네 집에 계시겠다며 용식이네 집에 계셨다.
그래서 형식이 아버지 생전에 변변히 모셔 보지도 못했는데 돌아가실 때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큰아들로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이 가슴 가득하다.
자연 영돈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영돈이 아니면 자기가 지금에 이런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면사무소에 다니며 순영, 영애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영애는 초등학생이 되고 어쩜 동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버님의 임종도 지켰을 것이다.
아니 어쩜 형식이 영월이 있었으면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형식을 못 견디게 한다.
자연히 틈만 나면 술을 마신다.
술기운이라도 있어야 괴로움을 잊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러나 술을 먹어도 허전한 마음, 쓸쓸한 마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고 그래서 취하도록 술을 먹으면 뒤틀리는 심사 때문에 자연 주위 사람들과 시비를 하게 되고 그러다 고주망태가 되어 사람들에게 이끌려 집에 들어가면 동생보다도 제수씨 보기가 민망하다.
제수씨는 그런 형식을 이해하고 정성으로 대한다.
아침에는 술국을 끓이고 사람들과 시비로 옷이 더러워지면 지체없이 다른 옷으로 갈아주고 방을 아침저녁으로 돌보고 형식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한다.
그런 제수를 보면 순영의 생각이 더 난다.
순영과 제수씨는 자매처럼 다정히 지냈었는데
제수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인 형식이 마음을 잡아보려고 마을에 있는 교회를 찾았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마을 사람들에 얼굴에 나타나는 동정하는 표정이나 위로하는 인사들이 더욱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고 실제로는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형식을 대하지는 않겠지만 형식의 자격지심이 마을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형식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도 두서너 번 가고는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일고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아픈 마음도 달래보려고 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절을 찾았다.
절의 스님들은 형식의 형편을 모르니 형식을 그냥 한 사람의 시주로 대하여주어 마음이 편하고 절의 조용함도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무언으로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형식의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이렇게 절에 오니 지난번 삼 오 제때 자기를 위로해 주고 울적할 때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던 동려스님이 생각났다.
예불을 마치고 동려스님을 찾았지만, 탁발을 나가 내일 저녁에나 돌아온단다.
다음 날 저녁때 다시 절을 찾았다.
동려스님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아 두서너 번 만나며 안면이 있는 스님들과 잡담하면 기다렸다.
그러면서 왜 내가 등려스님을 기다리느냐 하고 스스로에게 반문해보지만 뚜렷한 대답이 없다.
다만 마을에 내려가야 술이나 먹고 사람들과 말씨름하다가 심하면 싸움이나 하게 되는데, 늘 그러던 행동이 이제는 그것도 좀 싫고 귀찮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면 말이 되려는지.
저녁이 늦어서야 돌아온 동려스님은 형식이 어제도 와서 찾았고 오늘도 저녁때 와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미안해했다.
동려스님은 형식이 아직도 마음을 못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사바세계의 은원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큰 근심도 작은 것이 되고 작은 기쁨도 큰 것이 될 수 있으며 효성이 지극하신 시주께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리워하시는 것은 인정이긴 하지만 그렇게 너무 집착하시는 것도 아버님을 위해 또 시주님을 위해 좋은 일이 못 되니 이제 마음을 잡으셔야지요.”하고 위로한다.
동려스님은 아직 형식이 사정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또 동려의 성의가 형식은 고맙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말로 위로해 주며 형식이 마음에 안정을 찾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하며 말동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오란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려는 형식을 늦었다며 동려가 붙잡아 절에서 보내고 다음 날 마을로 내려왔다.
그 후로 동려스님을 몇 번 더 만나면서 형식은 동려스님이 때로는 형 같고 때로는 동생 같은 생각이 들고 동려를 만나면 그의 위로 때문인지 이상하게 마음에 평정을 찾았다.
그때부터 마음이 물결칠 때마다 형식은 보덕사로 동려스님을 찾아갔고 그에 따라 동려스님과의 친분도 두터워져 자연 동려가 형식의 모든 사정을 알게 되어 더욱 형식에게 마음을 써주어 점점 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것이 십여 일씩 되더니 나중에는 아예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절에 주저앉아 불목하니처럼 절의 일을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완전히 절 사람이 된 것이다.
마을에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동정하는 빛인지 비웃는 빛인지 모른 표정들이 형식을 못 견디게 했는데 절에서는 동려스님 외에는 형식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어 평범하게 대하여주니 마음이 편했고 동려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여간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도 부족하면 아버지의 영전에서 마음껏 울 수가 있어 좋았다.
그리고 전에는 몰랐는데 조용한 절 주위 환경도 좋았다.
그렇게 보덕사에서 2년여를 지내고 난 후
얼음골에 보덕사에서 관리하는 절이 있는데 너무 낡고 퇴락하여 스님들이 가려고 하지 않아 종단에서 팔든지 폐사를 하든지 한다는 말을 들었다.
동려스님에게 내용을 물어보았다.
동려스님에게서 같은 내용의 말을 들은 형식은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위치를 물어보고 백덕산 북쪽 얼음골에 있는 산사를 찾아가 보았다.
절이 있는 곳이 외지고 얼음골의 기후환경이 사람의 왕래를 드물게 만들어 한적하고 고요하여 자기와 같이 심사가 복잡한 사람이 지내기에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음골을 다녀와서 동려스님에게 자기가 얼음골 산사를 관리하고 싶다고 청했다.
스님도 아닌 사람이 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종단에서 반대하고 동려스님도 중이면 몰라도 일반인이 얼음골같이 외진 산사에서 지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며 반대한다.
그 반대가 오히려 형식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했다.
형식은 당장 출가하여 중이 되고 얼음골 산사도 자기가 사비를 들여 보수하겠다고 제의를 했다.
보수는 그렇더라도 중이 되는 것은 출가한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곤란하다는 절 측의 대답이다.
산사를 보수하고 주위를 정리하려면 앞으로 일 년은 족히 걸릴 터이니 그동안에 승려가 되면 되지 않겠냐며 형식이 동려스님에게 부탁을 했다.
“그렇게까지 하며 얼음골 산사로 가고 싶으십니까?”
“네! 그곳은 저의 복잡한 심사를 달래는 데 좋은 곳이고 또 이제 사바세계를 떠나 불교에 귀의 하여 불행하게 죽은 처자와 아버님의 왕생 복락을 빌며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스님의 생활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얼음골 산사에서는 어려움이 더 할 텐데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무려면 노숙자보다 어렵겠습니까?”
이런 대화를 하며
굳은 형식의 결심을 본 동려스님이 그렇게 난색을 표하던 종단을 설득했다.
형식이 보덕사에서 불목하니로 2년여를 보냈으니 어느 정도 불심은 가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자기가 책임지고 일 년 안에 승려로 만들고 필요하면 형식이 얼음골에 부임하고 난 후에도 왕래하여 교육 시키겠다고
이렇게 하여 종단에 허락을 받은 형식은 집터와 논밭을 팔고, 그리고 농협에 있던 돈과 박두식 목사가 준 돈 모두를 얼음골 산사 보수하는데 썼다.
처음에는 절에 좀 계시다가 나와서 다시 일가를 이루고 사셔야지 무슨 출가냐며 형님의 출가를 반대하던 용식도 형식의 결심이 굳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한편으로 얼음골 산사를 보수하며 한편으로는 동려스님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여 얼음골 산사의 보수가 끝나갈 무렵 형식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어 나흘이라는 법호를 받고 보덕사에 있던 불목하니 한 사람을 데리고 얼음골 산사로 들어왔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