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주님 성탄 대축일 강론>
(2023. 12. 25. 월)(요한 1,1-18)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로 시작해서(창세 3,23),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입니다(묵시 22,3).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창세 3,17), 묵시록 22장을 보면,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묵시 22,3).
이것은 ‘죄’로 시작해서 ‘해방’으로 끝나는
구원 사업의 처음과 끝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그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증언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요약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한처음에’ 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입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의 영원함을,
즉 창조 이전의 영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첫 등장을 나타내는 말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인데(창세 1,3),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과 ‘하느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한처음부터 함께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서 저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즉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에게로 오신 날”이고, 종말과 재림의 날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죄’ 라는 것은 한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예수님은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죄가 생기기 전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이고,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 때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루카 7,16).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셨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메시아 강생은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수련과 수행을 통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원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도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죄를 짓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라고 고백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을 감사드리는
날이고, ‘참 해방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뒤를 더욱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