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관
경기도의 중앙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포천군,서쪽은 파주시와 고양시, 쪽은 서울특별시와 의정부시, 북쪽은 연천군, 북동쪽은 동두천시와 연천군에 접하고 있다. 2003년 10월 19일 시로 승격되었며 면적은 310.24㎢, 인구는 15만 2,673명(2005년 3월 기준)이다. 행정구역은 1읍 4면 6동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양주시 남방동 1-1번지에 있다.
자연환경
서울과 원산을 잇는 추가령지구대의 남부에 위치하여 시의 대부분이 산지를 이루며 그 사이에 좁은 저지대가 길게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발달하였다. 천보산이 그 주축을 이루며 포천시과의 경계를 이룬다. 서쪽은 두 줄기의 산지로 이루어지는데 안쪽은 마차산, 도락산, 불국산 등의 해발 400m 내외의 산지이고, 그 바깥쪽으로는 감악산, 노고산 등 높은 산들이 있다. 이 동서산지 사이에 있는 좁은 저지대를 청담천과 신천이 흐르면서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모아 북류하다가 한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과 노고산 줄기에서 시작하는 곡릉천이 장흥면을 관통하면서 자연발생유원지가 생성되어 많은 도심인구가 몰려들고 있다.
역 사
[고대] - 고구려 장수왕 때 매성군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16) 내소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 태조 때 내소군을 견주로 개칭하고 한양군을 양주로 개칭하였다. 문종은 양주를 남경이라 하고 새로운 궁을 지었으며 1308년(충렬왕34)에는 양주를 한양부로 개칭했다.
[조선] - 1395년(태조4)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7년(태조6) 다시 부치가 견주로 이전되고 그 뒤 계속 양주라 하다가, 1413년(태종13)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66년(세조12)에 목으로 승격되었고 성종2년에는 지방의 12개 주요 거점도시를 의미하는 12목의 하나로 대단휘 행정 구역인 양주목이 되었다.
[근대] - 1895년에는 한성부 소속 양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22년 양주면이라 개칭했다.
[현대] - 1946년 파주군 남면을 편입하였으며 1973년 구리면이 읍으로, 1979년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양주군 중에서 구리읍, 미금읍, 별내면, 진접면, 진건면, 수동면, 화도면, 와부면을 분리하여 남양주군을 신설했다. 1981년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3년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백석면 영장리와 기산리가 파주군 광탄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87년 파주군 광단면 기산리 일부가 백석면에 편입되었다.
문 화
민속 -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양주 별산대 놀이'는 주내면 유양리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 중의 하나로, 경기도지방에서 널리 연희되던 대표적인 서민 오락의 하나였다. 4월 초파일, 5월 단오 같은 대소 명절 때 마을에서 연희되었는데 8과장으로 구성되어 보통 밤 10시에 시작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애오개산대, 노량진산대, 퇴계원산대, 송파산대 등 원래의 산대놀이와는 다른 것이라 하여 별산대로 불려왔다는 '양주별산대놀이'는 거드름춤과 깨끼춤의 몸짓으로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고, 덕담과 재담으로 서민의 애환을 풍자해 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된 양주소놀이굿은 일명 소놀음굿, 소굿, 쇠굿, 마부타령굿 등으로 불리는데, 우마 숭배와 농경 의례인 소멕이 놀이에 기원을 두고 무속의 제석거리와 마마배송굿에서 일부 자극을 받아 형성된 굿의 일종이다. 양주시 백석면 방성리에서 경사굿인 제석거리에 이어 행해지며, 단순한 농경 의례의 무속에서 벗어나 무당과 원마부, 곁마부의 대화 와 타령으로 진행된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21호인 양주상여, 회다지 소리는 예로부터 소리마을로 유명한 배석면 고능말에서 이어져 오던 소리로서, 사라져가는 민속문화를 보존함으로써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되었다. 상여소리는 상두꾼의 발을 맞추는 기능을 하며, 회다지 소리는 입관 후 땅을 다지는 힘든 노동의 호흡을 고르고 흥을 돋우는 노동요 성격을 가지며 죽은이의 혼백이 좋은 곳으로 가서 편히 쉬기를 기원하는 내용과 헤어짐을 안타까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음식
원골 순대마을이라 불리는 유양리 마을의 전통순대는 그 맛이 유명하여 미삭가에게 소주를 곁들여 먹는 순대국은 별미로 통하여 마을주변에는 양주목사가 정무를 보던 동헌과 어사대비, 양주향교, 양주 별산대놀이, 양주산성 등 문화재가 모여 있다.
특 산 물
예로부터 양주 밤이 임금께 진상할 정도로 유명하고, 백석의 솔잎 부추와 남면의 머루주 등이 있다.
교 통
경원선 철도가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고 남부에는 서울 교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이들 철도와 병행하여 3번 국도인 평화로 등 국도와 지방도가 잘 연결되어 있다.
봉선사(奉先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운악산(雲岳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다. 운악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5대 명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산이다. 동쪽은 금강산, 서쪽은 구월산, 남쪽은 지리산, 북쪽은 묘향산, 그리고 국토의 한가운데가 바로 운악산이다. 또한 중국의 5악(중국 역사상의 5대 명산인 오악은 태산(泰山), 화산(華山), 숭산(嵩山), 형산(衡山), 항산(恒山))을 본떠 경기 지방에서도 5악을 설정하였는데, 개성의 송악, 과천의 관악, 연천의 감악, 가평의 화악, 양주의 운악이 그것이다. 이처럼 유명한 운악산의 기슭에 자리한 봉선사는 또한 그 주변 경관이 빼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봉선사에 이웃한 곳에 세조와 왕비의 무덤인 광릉이 있고, 이곳을 뒤덮는 우거진 수목과 크낙새 등의 휘귀조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 심에서 불과 4km 남짓한 거리에 울창한 수림과 천년고찰 봉선사가 있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봉선사는 고려시대인 969년 법인국사 탄문(坦文) 스님이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는 그다지 큰 규모의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커다랗게 중창하면서 봉선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세조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절 이름의 뜻은 ‘선왕(先王)을 모시는 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尹)씨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고 개칭했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지며, 이 해에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는 범종도 주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부터 역대 왕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발전하였고, 1551년에는 교종수사찰(敎宗首寺刹), 곧 교종의 으뜸 사찰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교종수사찰이 되면서 교종의 승과고시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등 전국의 스님들이 모여 교학을 익히는 장소가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 거의 모든 전각이 불타 없어졌지만, 그 뒤 곧 중건을 이루고 예전의 사세를 상당히 회복하였다. 이렇게 근대에 이르기까지 법등을 밝혀왔다가,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전란 후 봉선사를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가꾸는 데는 운허 용하 스님과 월운 스님의 노력이 컸다. 운허 스님은 큰법당과 정중탑을 지었고, 한국불교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경전의 국역 사업을 선도하였다. 또 월운 스님은 운허 스님의 뜻을 받들어 봉선사가 경전 번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하여 봉선사의 사격을 높였던 것이다.
문화재로는 범종(보물 제397호), 삼성각, 운하당, 벽경 등이 있으며, 봉선사 입구에 운허 스님과 친분이 있던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운허 스님은 상해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을 펼치던 분인데, 봉선사에는 운허 스님의 불교 대중화 의지가 담긴 '큰법당'이라는 한글로 큼지막하게 쓰여진 현판이 붙어있다.
가수 조용필의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한 봉선사에서는 봉선사 대종이라고도 불리는 범종도 눈여겨볼 만하다. 신라나 고려의 범종 양식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범종양식을 개척한데다 그 빛깔이 오묘하고, 횡대 안에 조선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파도문을 사실적으로 새겨 놓아 그 역사적인 가치가 인정된다. 또 큰법당 뒤에 있는 삼성각과 개건당 건물도 눈에 띄고, 일반 절과는 달리 들어가는 문이 어느 이름 있는 양반집 대문 같은 점도 매우 이채롭다.한편 봉선사는 광릉, 혹은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에서부터 걸어가는 것이 좋다. 수백 년 전 광릉이 조성될 당시, 능으로 가는 우마차 길을 알리기 위해 오대산에서 가져와 심은 나무들의 2, 3대 후손이라는 전나무들이 양쪽으로 빽빽이 시립해 있는데, 그 느낌이 매우 좋다. 특히 새벽녘 안개 스민 때나 비 오는 날 소중한 사람과 걷는 느낌이 매우 좋은데, 인도가 따로 확보되어 있지 않은데다 차도가 좁고, 달리는 차들 이 적지 않아 트레킹에 주의해야 한다.
봉선사 역사의 부침
한글 현판의 효시로 유명한 봉선사 들머리. 광릉숲이 지척이라 코 끝에 걸리는 내음도 벌써 다른데, 비석거리의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먼저 반긴다. 왜 춘원의 비석이 이곳에 있는 걸까. 해방 후 봉선사에 은거하던 춘원은 일제 때의 친일행적 때문에 1949년 반민법에 의하여 구속되었지만 병보석으로 바로 풀려났다. 다시 봉선사로 돌아와 ‘다경향실’에 머물면서 틈틈이 글을 쓰는 생활을 하던 춘원은 이듬해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다. 봉선사는 대문호 춘원의 굴절 많은 삶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인연을 맺은 절집인 것이다. 1979년 복원하면서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에 ‘큰 법당’이라는 현판을 달아 우리나라 한글 현판의 효시가 된 봉선사는 1469년(예종 원년)에 세조의 능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사찰이다. 이 부근은, 고질이던 피부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나라 안의 물 좋다는 데는 거의 다 돌아다닌 세조가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물맛을 자랑하던 곳이다. 게다가 광릉이 정해지면서 주변 숲을 능림으로 지정해놓아 숲은 더욱 울창했으니 물맛도 한층 좋아졌으리라. 광릉내 샘물 중에서도, 춘원도 즐겨 찾던 봉선사 ‘큰 법당’ 뒤쪽 언덕 너머에 있는 옹달샘물이 최고라 한다. 1백여간의 대가람으로서 한때 서울 이북에서는 대웅전이 가장 컸다는 봉선사. 그러나 부근은 한양의 외곽으로서 경기도 다른 지역과 강원도를 잇는 길목이라 절도 매번 수난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머물다가 퇴각하면서 전부 불태워 버렸고, 병자호란 때도 무사히 넘기지 못했으며, 한국전쟁 때는 중공군이 진주하자 미군기의 집중 포화를 받아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력 덕인지, 세조의 보살핌 때문인지 무게가 2만5천근이라는 봉선사 대종(보물 제397호)은 절이 철저히 유린당하는 수난에도 온전히 남아있다. 이 종은 봉선사를 세울 때 주조한 것으로, 신라나 고려시대의 범종양식을 따르지 않고 조선시대 범종양식의 선례가 되는 작품으로 주목된다고 한다. 이 범종도 역시 지금의 대웅전 현판만큼이나 당시에는 파격이었을 것이다.
양주 회암사(주지 각원)가 회암사지 출토 유물과 지상 유물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에서 승소해 권리를 인정받게 됐다.의정부지법 민사12부는 회암사가 사적 제128호 회암사지에 있는 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2004년 12월 29일 문화재청(청장 유홍준 )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2월 1일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회암사가 소유권을 주장한 유물은 회암사 소유 부지 전체의 출토유물과 지상유물 전체로 약 5천여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회암사측은 소를 제기할 당시 맷돌, 괘불대, 돌계단 및 석축 등 지상 유물 4건과 '檜巖(회암)'이라 새겨진 청동발우, 각종 칠기류, 백자 등 출토유물 23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유물 전체로 대상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이번 승소는 사찰이 출토문화재에 대한 권리를 소송을 통해 인정받은 첫 사례로서, 이를 계기로 불교계가 추진하고 있는 출토문화재에 대한 소유권 반환 움직임이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소송을 주도한 봉선사 혜문 스님은 “불교 탄압책에 의해 불타버린 회암사를 지켜온 불교계의 법맥을 인정받았다는데 의의가 있다”며 “봉선사가 2004년부터 추진해온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이 결실을 맺었다”며 기뻐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월초대화상
월초화상 (1858~1934) 은 속명이 거연 ( 巨淵 ) 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5 세 때 경기도 양주의 봉인사 부도암에서 환옹 환진스님에게 출가하였다. 1892 년 남한총섭 ( 南漢摠攝 ) 이 되고 , 이듬해에는 북한총섭이 되어 전국 승군을 총괄하였다.1894 년 갑오경장 때 승군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스님이 마지막 총섭이 되는 셈이다.
1900 년에는 은평구의 수국사(守國寺) 를 대규모로 중창하였고, 이후 화계사에 머물면서 개화사상과 신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싹텄다. 재래의 불교를 탈피하고 일본의 발달된 포교방식을 받아들여 한국불교를 혁신시켜 근대화하기 위해 스님은 이보담 및 이동인 등과 뜻을 같이하였다
스님은 이들과 함께 1902 년 동대문밖에 원흥사를 창건하여 전국 사찰의 관리서를 두었다. 1904 년 원흥사가 문을 닫게 되자 이곳의 전각 일부와 불상 불화 등 불구 일체를 봉선사로 옮겼다. 지금도 봉선사에 남아있는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등은 본래 원흥사에서 조성된 것들이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대적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5 년 원흥사 자리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봉선사의 교종판사가 된 후 줄곧 봉선사에 머물며 1926 년까지 꾸준히 가람을 중수하고 제자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4 년에 집적하니 나이 77 세, 법랍 63 년이었다.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선각자였고 당대 제일의 강백 ( 講伯 ) 으로서, 운허 용하 (1892~1980) 스님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운허스님
속명은 학수(學洙) 법호는 운허(耘虛)이며 법명은 용하(龍夏)이다.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어린 시절 고향의 회헌재(會軒齋)에서 사서(四書)를 비롯한 한문고전을 배우고, 1909년 10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평양대성학교에서 2학년까지 수학하였다. 1912년 1월 만주로 건너가 봉천(奉天)에 있는 한인교포학교 동창학교 교원으로 재직했고, 이해 6월부터 배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배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14년 3월부터는 봉천성 홍유자 흥동학교를 설립해서 교포아동교육에 전념하였고, 1917년 4월부터는 배달(倍達)학교를 설립하여 1919년까지 교포아동의 교육을 실시했다.
3.1운동 직후 4월부터 12월까지는 독립군정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간행하고, 1920년 2월에는 독립운동기관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그 뒤 국내단체와의 연계를 위해 비밀리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봉일사(鳳逸寺)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득도(得度)했으며,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초등과를 이수하고 서기를 맡아보았다.
1924년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서 개최하여 학인연맹을 조직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했다. 1936년 경기도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되었고, 46년 4월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1953년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편찬하는 일에도 참가했다.
운허스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춘원 이광수와의 인연이다. 운허스님과 춘원은 6촌간으로 어린시절 같이 공부하면서 자라났다.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 등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해주었다.
불경을 번역하는 것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되었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했고, 1962년 종교인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을 받았고, 1978년 동국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18일 봉선사에서 속랍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했다.
주요저서로는 <불교사전>, <불교의 자비>, <불교의 깨묵>, <한글금강경>, <정토삼부경>, <대교지문> 등과 다수의 경전 번역물이 있다.
태허스님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 1898 -1969)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입하기 위하여 만주에 가려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 경기도 용문사 스님인 풍곡신원(楓谷信元)선사를 만나서 용문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 성숙(星淑)이다.
용문사에서 2년쯤 생활하다가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 교리를 공부했다.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와 불교계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친분이 있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같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또한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했고,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하였다.
단재 신채호, 유우근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였다.
1926년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되어 광동으로 갔으며, 거기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뮨에도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문화 총동맹과 작가연맹에도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한편 주은래의 중매로 중국의 여성공산당원인 두영초와 혼인했다.
1936년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 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그 후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6.25때 서울에 남았다가 공산당 부역혐의로 옥고를 치루었고, 1955년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했다. 5.16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운암의 일생은 젊어서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했고, 해방후에는 반이승만 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다. 만년에는 가난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크게 고통받았는데, 친지들의 주선으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는 '피우정(避雨亭)'이라 이름했다.(봉선사의 피우정은 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서해 최학송
남북한 문학사를 통털어 '조선의 고리끼'라고 격찬받는 최서해(본명 최학송)는 1901년 함북 성진군에서 태어나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극한적인 궁핍과 간도 유랑 등으로 얻어진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하여 서해는 1920년대 문학사에 한 획을 장식했다. 식민지시대 일제의 통치기에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을 그림으로써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던 것이다.
그 당시 문단을 이끌어 나가던 사람들은 주로 고등교육을 받고 외국유학까지 다녀왔던 지식인 작가 위주였는데, 이들은 <개벽>과 <폐허> 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의 낭만적 애상이나 비관적 허무로 가득찬 인물들을 작품속에 투영했다.
서해는 이런 경향의 작가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생생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궁핍의 현실을 고발하고 사회모순을 폭로했기 때문에 항일의식과 사회변혁 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는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성과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탈출기>에서는 민중의 가난이 단지 본인의 무능과 나태함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기인함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상이 움트는 단체에 가입함으로써 변혁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1924년 10월 춘원 이광수에 권유로 봉선사에 와서 머리를 깎았고 행자수업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 시기에 쓰여 졌던 것이다. 그는 봉선사에 와서 불도에 정진하면서 문학을 새롭게 다지고 일신하는 계기를 가졌으며, <탈출기>를 비롯한 초기작품들인 <고국(故國)>, <매월(梅月)>, <십삼원(十三圓)>, <매월(梅月)>, <박돌의 죽음> 등이 봉선사에서 집필되거나 구상되었다. 봉선사는 서해문학의 주요한 작품들이 되었던 산실(産室)이었던 것이다.
춘원 이광수
이광수(李光洙)는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로, <무정> <유정> <꿈> 등의 역작을 남겼다. 특히 <무정>은 '한국최초의 근대소설'로서 '초창기의 신문학을 결산해 놓은 시대적인 거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광수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그와 육촌간이었던 운허스님이다. 운허스님은 이광수의 젊은 시절의 경쟁자이자 노년기의 정신적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친척집에 얻혀 살면서 가난과 설움을 깊숙이 체험했다. 이광수는 친척들 중에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재당숙집에서 생활했는데, 이 재당숙집안의 외아들이 바로 이학수였다.(훗날의 운허스님)
이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춘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조그마한 이야기책을 지어서 큰누나에게 보였으나 칭찬은 듣지 못하였고, 또 내 삼종제(운허스님)와 함께 노래와 고풍한시를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백이는 무엇에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내가 백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꾸며짐없이 쭉 펴진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
1921년 이광수는 상해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사임하고 귀국한 뒤, 본격적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민족개조론>을 일으켜 민족진영에서 소외되고 변절자라는 비난에 직면하던 시점, 이광수는 참으로 우연히 이학수와 재회한다. 1923년 8월 금강산 여행중이었던 춘원은 유점사에서 뜻밖에 승려가 되어있는 자신의 육촌 운허스님을 상봉한다. 운허스님은 변절자의 낙인과 차남 봉근의 죽음 등으로 번민하는 춘원에게 몸소 <법화경> 한 질을 져다주어 법화경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그 뒤로 춘원은 불교의 세계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법화행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1945년 경기도 사능에 칩거해 있던 춘원에게 그의 말대로 청천벽력처럼 다가온 해방의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도 운허스님이었다. 친일변절자로 낙인이 찍힌 춘원에게 해방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이광수 타도'라는 구호가 나붙고 이광수는 어디론가 피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춘원은 운허스님이 계시는 봉선사(奉先寺)로 입산하게 된다. 운허스님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므로 해방이후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춘원의 입산을 위해 운허스님은 봉선사 절 담 옆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방 앞에는 추사체로 '다경향(茶經香)'이라고 액자가 걸려 있었으므로, 운허스님은 그 방을 다경향실이라 이름해 주었다.(이 집은 현재 헐리고 신축한 다경향실이 있다. 현재 조실스님채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춘원은 법화경을 탐독하며 죄인의 심경으로 돌베게를 베고 살았다. 그 때문에 입이 삐뚤어져 물리치료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이 돌베게의 이미지는 진지한 내면의 고백을 쏟아내어 <돌베게>라는 수필집으로 엮어진다.
그리고 춘원은 그 해 겨울 봉선사를 떠나 다시 사능으로 되돌아간다. 1946년 운허스님의 주선으로 광동학교에 교편을 잡기도 하였는데, 그 때 그가 지은 교가(校歌)는 현재까지 애용되고 있다.
6.25사변이 나자 서울 자택에 잠시 갔다가 북한군에게 납치된 뒤로 소식을 모르는 터에 1975년 주요한(朱때耀翰)선생을 비롯한 동지들이 그와 연고가 깊은 봉선사에 기념비를 세우면 좋겠다고 제의하였는데, 운허스님께서 허락하여서 그의 기념비가 당사 어귀에 서게 되었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끈다. 그 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집에서 산적이 있는데 그때 한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비석에는 그가 남긴 글중 일부를 빼곡히 새겨놓았는데 글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써서 1975년 가을에 세웠다.
큰 법 당
초창(初創)은 조선 예종 1년(1469)으로, 89칸의 절 규모와 함께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졌으며, 재창(再創)은 1637년 계민(戒敏)선사에 의한 일괄 중수(重修)때이다. 삼창(三創)은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된 현 전각으로,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이름하였다.
관 음 전
원래는 노전 스님이 머무는 노전채였던 것이, 6.25때 전소되었다가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1999년 복원되어 지금은 관음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 장 전
원래는 어실각(御室閣)으로서 세조대왕과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이다. 이 또한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1999년에 복원하여 지금은 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 신 각
초(月初)화상에 의해 1926년에 건립되어 6.25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다. 산신과 칠성 및 독성 등 세 분의 성인을 모신 전각이다.
조 사 전
1977년 7월, 대시주 정보현행의 도움으로 삼성각과 동일한 규모로 지어서 원래는 '개건당'으로 사용하던 당우이다. 근래에 들어 그 아래쪽에 새로이 전각을 지어 개건당에 모셔졌던 봉선사의 개산(開山)과 중건(重建)의 공덕주들을 모시고는, 이곳은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계민선사와 월초(月初)스님을 비롯한 근대의 봉선사 조사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청 풍 루
6.25로 전소되기 전에는 천왕문과 해탈문 및 소설루(小雪樓)가 있던 자리에 모든 신도들이 '조약돌 모으기 운동'이라는 불사를 전개하여 1985년에 낙성을 보았다.
방 적 당
스님들이 어느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더 낳은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당우이다.
운 하 당
스님들이 어느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더 낳은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당우이다.
개 건 당
개건당(開建堂)이란, 봉선사를 창건하여 개산(開山)한 개산대공덕주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인 계민선사와 정문수행을 모시기 위한 당우로서, 개산과 중건의 머릿글을 따서 이름한 것이다. 현재의 조사전 전각이 원래는 개건당이었는데, 이 당우를 신축하여 개건당으로 사용하고 원래의 개건당은 조사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건당만 있을 때는 스님(계민선사)과 속인(정희왕후 외)을 같은 당우에 모셨으나, 조사전을 지음으로써 스님은 조사전으로 모시고 속인은 개건당에 모시게 되었다.
다 경 실
차를 마시며 경을 읽는다는 뜻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다경실은, 1978년 원래 애월재(愛月齋)가 있던 자리에 운허스님의 퇴로지처(退老之處)로 지은 것으로서, 당사의 역대 조실스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다.
판사관무헌
어실각(御室閣)으로 인해 봉선사 주지는 조선왕실로부터 봉향판사(奉香判事)의 작위를 수여받았는데, 따라서 봉향판사가 머물던 이곳은 곧 당사의 주지실이기도 하였다. 이 또한 6.25로 소실되었던 것을 1998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현재 주지실로 사용되고 있다.
동 별 당
서기 1966년 목조 스레트용 2동을 각 10평으로 지어 간이건물로 쓰던 것인데, 1990년 1월에 일부가 화재에 타고 남은 것 역시 퇴락하여 그 해 9월에 지하 20평지상 20평의 단일 건물로 개축한 것이다. 원로스님들의 퇴로지실과 봉선사 불교전문통신강원으로 사용되었고 지하층을 통신강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 별 실
판사관무헌을 복원하며 같이 복원한 당우이다. 현재는 능엄학림 학인스님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다.
선 열 당
반지하의 후원(식당)을 신축하며, 그 위에 지은 당우이다. 애초에는 객실의 용도로 신축하였으나 객실로는 지속적인 관리가 어려워 수좌스님들의 해제철 해랑방사(解囊房舍) 등 다각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봉선사, 친일파 후손 땅찾기 소송 취하 거부 -사찰 “판결 받아보자” 동의 거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봉선사의 말사인 내원암에 “조상땅을 내놓으라”며 소송을 제기했던 친일파 이해창 후손들이 9월27일 봉선사를 찾아 “절을 상대로 재산권 소송을 낸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공식 사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봉선사는 이들의 사과와 소송 철회의사에도 불구하고 소유권 확인소송과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찾기가 위헌이라는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봉선사 총무과장인 혜문스님은 27일 저녁 <한겨레>와 통화에서 “지난해말 내원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이해창의 후손 가운데 대표 소송인인 이아무개씨 부부가 찾아와 봉선사에 사과의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씨 부부는 이날 오후 3시30분께 봉선사 교종 판사관(주지실)을 찾아 1시간 정도 머물렀으며, 스님들에 사과한 뒤 참회의 뜻으로 봉선사 법당에서 예불을 올렸다. 이씨는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라고 자신들을 밝혔다. 봉선사 쪽에서는 주지스님인 철안 스님과 연수원장 수월 스님, 재무국장 혜만 스님, 총무과장 혜문 스님 등이 이씨 부부를 맞았다.
이에 앞서 이씨 부부 등 이해창의 후손 21명은 지난해 12월 내원암을 상대로 “조상 땅을 돌려달라”며 ‘소유권 확인소송’을 냈다. 이씨 등은 소장에서 “선조(이해창)가 일정 때인 1917년 10월1일 (내원암 일대의 땅을) 사정(하사)받아 소유했다”며 “6·25 전쟁으로 등기부 원부가 불에 타버려 등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가 소유했으나 관련 증거를 확인했으니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씨 등은 봉선사와 불교계의 조직적 반발과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찾기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지면서 지난 8월 갑자기 소송을 취하했다. 그러나, 내원암 쪽이 “친일파 후손과 타협하지 않겠다”며, ‘소취하 동의서’를 거부해 현재 재판은 10월께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씨 부부는 스님들에게 “절을 상대로 이런 소송을 내 물의를 일으킨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자신들은 소송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아 절과 소송을 벌인 것을 뒤늦게 알고 뉘우치게 된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 부부는 소송을 취하한 배경을 거듭 밝히며, “재판이 진행돼 언론에 자신들이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을 더이상 원치 않으니 절에서도 소 취하에 동의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혜문 스님은 “이씨 부부가 ‘자신들의 욕심에 대해 참회하겠다’며 ‘소송에 이기더라도 땅을 절에 돌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선조인 이해창의 친일과 관련해 이씨 부부는 “송병준, 이완용과 같은 악질적, 적극적 친일파가 아니고, 왕실 종친이라는 대표성 때문에 작위를 받은 것일 뿐”이라며 “후손들이 직접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과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고 혜문스님은 전했다. <한겨레>은 이씨 부부와 27일 밤부터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아 이들의 입장을 직접 인용하지 못했다.
봉선사 주지인 철안 스님은 “후손들이 절에 찾아와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라며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의 친일에 대해 민족 앞에 사죄하면 모두가 그들을 용서할 것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민족과 화해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봉선사는 후손들이 낸 ‘소취하 동의서’에 응하지 않을 것과 친일파 후손 재산찾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도 철회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혜문 스님은 “절이 후손들과 화해하는 것과 친일 청산은 다른 문제”라며 “우리 사회의 헌법정신과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소유권 확인소송에서 피고의 자격을 계속 유지하면서 위헌법률 심판의 추이를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혜문 스님은 “친일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은 독립운동을 했던 운허스님 등 선인들의 유지”라며 “우리 사회의 친일 청산을 위해 사법부는 즉각 친일후손 재산찾기에 대한 위헌법률제청신청을 받아들이고, 국회의원들은 계류중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발의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한편, 봉선사·내원암 스님들과 조계종 중앙신도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다음달 6일 서울 종로 조계사 앞마당에서 ‘친일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촛불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 촛불집회는 애초 지난 13일 열기로 했으나 법장 총무원장의 입적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2005-09-28 /한겨레 신문 박종찬 기자)
친일파 이해창후손 땅찾기 패소 (중앙일보 2005-12-31)
[중앙일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강민구 부장판사)는 30일 친일파 이해창의 후손 21명이 "경기 남양주 봉선사 내원암 절터 4만8000여 평을 반환하라"며 대한불교 조계종 내원암과 국가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해창이 1917년 절터를 취득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피고 측이 62년 소유권보존등기를 했고, 수 십년간 이 토지를 점유해 온 점 등을 감안할 때 피고 측에 소유권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해창은 한일합병에 협조한 공로로 후작 작위와 함께 은사금을 받은 친일 인사다.
봉선사대종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富坪里)의 봉선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동종.
보물 제397호이다. 높이 238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 무게 2만 5000근. 정상에는 쌍룡(雙龍)으로 된 꼭지가 있고, 어깨에는 복판(複瓣)의 연꽃무늬가 돌려져 있다. 종신은 중간에 세 줄기의 굵은 융기횡선(隆起橫線)을 쳐 상하로 구분하였으며, 윗부분에는 당초문 장식이 있고 안에 9유(九乳)를 갖춘 4각 유곽(乳廓) 4구(區)와 그 사이에 장신의 보살상 4구를 교대로 배치하였고, 상하에 범자(梵字)를 양주(陽鑄)하였다. 아랫부분에는 종구(鐘口)에서 훨씬 올려서 수파문대(水波文帶)를 돌리고 그 위의 공간에는 명문(銘文)이 꽉 차 있다. 일부에 고식(古式)을 남기고 있으나 한국종 형식을 떠난 새로운 양식이다. 종명(鐘銘) 끝에 ‘成化五年七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469년(예종 1)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광릉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榛接邑) 부평리(富坪里) 에 있는 조선 세조(世祖) 및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능.
사적 제197호. 1468년(세조 14)과 1483년(성종 14)에 축조되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국방의 강화, 서적의 찬간, 토지제도 및 관제의 개혁 등 치적이 많았다. 만년에는 왕위 찬탈의 번뇌로 불도에 귀의하였고, 1468년 9월에 예종(睿宗)에게 전위하고 52세에 죽었다. 왕비 정희왕후는 세조가 즉위하자 왕후로 책봉받았고, 예종과 성종의 섭정(攝政)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1483년(성종 14) 온양행궁에서 죽었다.
광릉은 조선 왕릉제도에서 중요한 왕릉경영을 시사해 준다. 즉, 왕이 ‘원릉(園陵)의 돌방[石室]은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사대석(沙臺石:屛石)을 쓰지 말라’고 유언으로 명하였다 하여 병석을 없애고 돌방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검약의 미덕을 몸소 보였다. 또 광릉에서 처음으로 두 언덕을 한 정자각(丁字閣)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양식을 수립하여 후세의 왕릉제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英陵)을 국초의 왕릉제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그 왕릉제에 일대 개혁을 이룬 것으로, 조선 왕릉제도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회암사지
회암사는 고려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 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특히 명종 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 집이 되어 버렸다. 이 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또한, 모셔진 불상도 15척짜리가 7구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 (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운허요하가 쓴 "천보산 회암사 대웅전 창건기"에 의하면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으며,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대사가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
후설에 의하면 회암사의 폐사는 빈대가 많아 불을 태워서 없어진 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소실됐다는 설도 있고 또한 절의 크기에 대해서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만큼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하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커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며, 전국을 다니다가 만나는 승려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회암사에서 왔다고 할 만큼 승려 수가 많았다"고 한다.
옛 회암사는 문헌상 동방의 첫째였고 우리나라의 국찰이었으나 폐허가 된 후 사지에 석벽과 기단, 계체 등 일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 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적지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원형 그대로 발굴한 후 문화와 역사적 가치창출로 지역의 전통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있다.
문 화 재 :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
회암사지 부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멧돌 (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0호)
무학대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
회암사지 당간지주 (향토유적 제13호)
양주회암사지-허시명의 풍수기행
양주 회암사지에 갔다. 혼자 간 게 아니라 풍수 전문가와 동호인들과 함께 갔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불상 그들과 함께 간 덕에 새로운 것을 많이 봤다. 회암사지는 조선 중기에 불탄 뒤로 버려진 공간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 명종 4년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고 하여 고려중기 이전에도 회암사가 존재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작은 규모였을 것이고, 인도승려 지공대사와 그의 제자 나옹선사(1320-1376)에 의해 대사찰로 중창되었다.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 쓴<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보면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흩어진 돌무더기와 주춧돌뿐이고 발굴조사작업이 한창이다.
내가 혼자 갔더라면 폐사지 맨 앞쪽에 있는 사각기둥 당간 지주를 쓸어보다가 폐사지 가장 안쪽에 있는 우람한 부도탑을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무학대사(1327-1405)의 부도가 있는 산중턱을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풍수답사팀을 뒤따르다보니 먼저 천보산 산자락을 살펴보고 폐사지를 멀리서 맴돌게 되었다. 폐사지 좌우로 팔걸이 같은 언덕이 길게 뻗어내려 있다. 소위 좌청룡 우백호다. 좌청룡에 끝자락에는 무덤 한 기가 얹혀 있다. 무덤의 후손들은 그곳이 명당이라고 본 것이다. 회암사는 천보산을 주산으로 삼고 야트막한 안산너머로 불곡산과 삼각산을 조산으로 삼고 있다. 안산 아래로 골재공장과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몰풍정하지만, 맨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산천은 변함이 없다. 아늑하고 편안하면서도 기상이 넘친다. 회암사지에서 천보산 정상 쪽으로 700m쯤 올라가면 또 하나의 회암사가 나온다. 1828년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신축한 것이다. 이 절 옆에는 회암사를 중창했던 지공과 나옹의 부도가 있고,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를 262칸의 대찰로 중창했을 때, 전국 각지 신자들이 회암사로 몰려들었다. 고려 왕실은 나옹선사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나옹선사를 경상도의 외진 절로 옮겨가도록 했다. 나옹선사는 남한강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가다가 병을 얻어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그래서 신륵사에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이색이 쓴 부도비가 있다. 회암사의 제자들은 나옹선사를 기리기 위해 회암사에 또 하나의 부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느 절에 가보면 부도밭이 있어서 부도들이 한 군데에 모여 있다. 나옹과 지공과 무학의 부도도 함께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약간만 신경 써서 관찰하면 그 터가 비범한 명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보산 자락이 흘러내린 혈처(혈이 맺히는 곳)에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다.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명당수가 바로 앞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학대사의 부도 뒤쪽으로 지공과 나옹의 부도가 있다. 지공대사의 부도 자리는 특별해 보이지는 않지만 나옹선사의 부도자리는 또 다른 명당처로 보여 진다. 나옹화상의 부도 뒤쪽으로는 천보산의 바윗덩어리들이 보이는데 부도에 접근하면서 흙산으로 박환(剝換,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기운을 벗고 유연하고 순화된 기운으로 바뀌는 과정) 고 있다. 어떻게 해서 무학, 지공, 나옹 순으로 부도비가 놓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공의 제자가 나옹이고, 나옹의 제자가 무학이기 때문이다.
즉, 손자 위에 할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 위에 아들 부도가 있는 격이다. 다만 부도가 명당에 자리잡고 있어서 수난을 당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달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조선 순조때 광주 유생 이응준이라는 사람이 이 부도를 무너뜨리고 자기 조상묘를 쓴 적이 있다. 7년 뒤에 이 사실을 나라에서 알게 되어 이응준은 처형되고 부도들이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산천경계를 보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고, 국토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산경표(山經表)>를만들고 지도를 그리던 옛 사람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풍수는 반드시 익혀야 할 상식인 것 같다.
회암사는 나옹이 일으켜 세우고 무학에 의해 조선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고, 보우(1515-1565)에 의해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로 무학이 있던 이 절에 머물면서 한동안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대사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고 만다. 그 뒤로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키고
말았다. 명종실록에 보면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지르려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선조실록에 보면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 보아 명종과 선조 사이에 회암사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와 불교의 극명한 대결 현장이 회암사인 셈이다.
회암사지와 무학대사 부도비
회암사(檜巖寺)터에 이르렀을 때이다. 명지대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한다는 여학생 하나가 안내를 자청하면서, 꽤 많은 얘기를 전해주었다. 여기서는 그 설명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을 간추렸다.
넓이가 일만 평이나 되는 회암사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최대 국찰(國刹)이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보통은 고려 충숙왕 15(서기 1328)년에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 화상(和尙) 창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란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이보다 앞서 1174년에 회암사에서 금(金)나라 사신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 사찰의 건립은 최소한 고종(高宗: 서기 1213∼1259) 이전으로 소급이 된다. 그 후 1376년 우왕(禑王) 때에 크게 중창을 하였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는 회암사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여 나옹(懶翁) 화상(和尙)의 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무학(無學) 대사(大師)를 머무르게 하였으며, 큰 불사(佛事)가 있을 때마다 대신(大臣)들을 보내 참례토록 하였다. 노년에는 스스로 이곳에 머물러 수도를 하였으며, 손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이곳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암사는 성종 조에 이르러 다시 중창이 되었다. 이 때에는 건물의 배치는 그대로 놔두고 목재와 석재 등의 부재(副材)만을 교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심(佛心)이 깊어 이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중흥정책을 폈다. 보우(普雨)를 등용시켜 이곳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기도 하였다. 그러자 전국적으로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고,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명종 21년에는 유생들이 회암사에 몰려들어 불을 지르려 하자, 명종이 이를 고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는 회암사와 연관된 기록이 보이질 않다가, 선조 28년에 이르러 회암사의 종이 불에 탔으니, 이걸 녹여 무기를 만들자는 상소가 나타난다.
회암사의 폐사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명종 21년과 선조 28년 사이에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확인이 된다. 서기 환산하면 각각 1566년과 1595년에 해당하니, 대략 이 30년 사이에 회암사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발굴 결과, 폐사를 목적으로 한 의도적인 방화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먼저 위쪽으로 난 담장 부근에서 부처의 머리가 잘린 채 발굴되었으며, 동쪽 한 곳에서는 수많은 사기 조각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방화의 손길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발굴 단지를 훑어보니, 이곳은 여느 사찰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먼저 기울기를 따라 7개의 단으로 석축을 싸서 8구역으로 구분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대동강변의 만월대(滿月臺)와 같은 축조 기법이라고 한다. 이 8구역은 매우 밀집된 건물 배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건물과 건물 간격을 뚝뚝 떼어 시원스럽게 배치한 일반 사찰의 모습이 아니다. 중앙의 보광전(寶光殿)을 중심으로 둘러 선 건물들이 대부분 요사채의 용도라는 것이다. 그만큼 많은 신도와 손님이 드는 사찰이라는 증거이다. 아래의 다음 증거로 보면, 아마도 그 신도나 손들은 왕실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발굴품을 보면, 대부분 궁궐과 관련 깊은 물건들이라는 것이다. 궁에서만 쓰는 태극 문양이 계단석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궁궐에서 주로 쓰던 청기와 조각과 잡상(雜像)이 발굴된 것이다. 잡상은 지붕의 용마루를 따라서 붙이는 동물 모양의 장식품을 지칭한다. 또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둥근 몸통에서 나팔 모양으로 목을 빼낸 분청향원(粉靑香源)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점이다. 이런 물품들로 보아 회암사가 고려나 조선 조정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 쉬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구들시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는데, 무척이나 과학적이고 치밀한 계산에서 놓인 구들이란다.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의 아자방(亞字房)처럼 전혀 색다른 구조인데, 아마도 열효율이 퍽 높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구들은 양쪽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T자 모양으로 감돌다가 중앙의 굴뚝으로 빠져나가도록 독특하게 설계가 되었다고 한다.
발굴 구역 안에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은 동쪽의 부도탑 1기이다. 일설에는 허응당(虛應堂) 보우의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보우가 배소에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처형되었던 점이나 당시 유생들의 반발로 미루어보면, 보우의 사리탑이 이곳에 안치될 가능성은 실로 희박하다고 한다. 오히려 성종 때 불사를 담당했던 처안(處安) 스님의 부도로 여겨진단다. 아무튼 우리나라 부도탑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시선을 끈다.
회암사지 당간지주
천보산 서남 기슭에 자리잡은 회암사지의 서편 석단(石壇) 평지위에 위치한 3개의 당간지주이다. 조성 연대와 원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위치에서 좌측 15m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었던 것을 1981년 9월에 발굴 복원한 것이다.
본래는 2쌍씩 모두 4개였던 듯하나 현재까지는 1개는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지주는 좌측의2기, 우측의 1기가 동서로 상대해 있다. 지주는 모두 전면에 별다른 조식이 없고 다만 양쪽 모서리를 약간 죽였을 뿐이며 주두의 바깥쪽 모서리는 약간의 호형을 그리면서 깍았다. 지주의 성단 1면은 37cm ,하단 1면은 한편, 동편으로 15m 지점에는 화갈석의 통형 당간주석(괘불지주)1개가 있다. 주석은 전면 폭 133cm 측면, 두께 121cm, 하단 45 cm의 상통의 홈울 팠고, 측면에는 각각 2개씩의 원공을 뚫어 놓았다. 당간지주의 조성연대는 대체로 조선중기의 작품으로 추정 된다.
회암사지 부도탑
조선 전기.
회암사지의 가장 북쪽에 세워져 있는 높이 6m의 팔각원당형 부도로 주인공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높이에 비해 안정감이 있고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난 점을 볼 때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도는 지대석 위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가 놓여있다. 팔각형의 하대석 옆면에는 구름 사이를 날아가는 말이 조각되어 있으며, 위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상·하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래쪽 중대석에는 직사각형 안에 초화문이 새겨져 있고 중대갑석의 옆면에는 당초문(唐草文)이, 중대석 위쪽의 옆면에는 팔부중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의 옆면에도 당초문(唐草文)이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에는 3단의 받침을 놓고 원형의 탑신을 올렸다. 옥개석은 경사가 급하고 낙수면의 길이가 짧아 매우 높은 느낌을 주며, 상륜부에는 복발(覆鉢), 2개의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로 구성되어 있다.
회암사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고려말의 승려 선각왕사 나옹(懶翁, 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하여 왕의 명령으로 세운 비이다. 회암사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에 나옹(懶翁)이 깨달음을 얻어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던 곳이며 공민왕 19년 이후 주지로 머무른 곳이다.
비는 어떤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 내용을 돌 등에 새겨 세운 것으로, 불교에서는 선종(禪宗)이 유행하면서 승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부도와 함께 건립되었다. 비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귀부 - 비신 - 이수로 구성된다. 귀부는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부분이고, 비신은 건립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부분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이수는 비신석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신 위에 올려지는 부분이다. 귀부와 이수에 나타나는 거북과 용은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의 주인공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12세기 후반 이후에는 비의 모습에서 귀부와 이수 부분이 생략된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비는 절터 북서쪽 능선에 위치하는데 귀부·비신·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형태가 섬세하지 못하지만 이수의 용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목은 이색(李穡)이 짓고, 글씨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권중화(權仲和)가 썼는데 우리 나라 금석문 가운데에서는 드문 예서체이다.
*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 고려·조선시대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작성하던 예문관의 한 벼슬
1997.3.30 대형산불이 발생하여 파손된 비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접착처리를 마치고 경기도 박물관에 이전 보관중이며 1997.8.26 이곳에 모조비를 건립하였다.
무학대사 부도(보물 제388호)
조선 태종(7년1407) 건립.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부도로 조선 태종7년(1407)에 유골을 탑에 봉안하였다.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여 높고 큰 8각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은 8장씩의 긴 돌로 2단을 쌓았고, 또한 8각으로 난간을 설치하였다. 난간의 모서리에는 윗쪽에 보주(寶珠)가 있는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부도의 지대석은 8각의 각 면에 구름무늬를 조각하였으며 하대석의 윗면에는 연꽃잎을 새겼고, 각 모서리 끝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중대석은 배가 불룩 나온 모양으로 각 면에 꽃문양이 있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은 하단에는 연꽃잎이 조각되었고, 각 면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장식하였다. 탑신석은 원형으로 구름과 용의 조각이 가득하다. 옥개석에는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어 놓았다.
* 복발(覆鉢)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의 노반석 위에 얹는 엎어진 주발 모양의 장식.
* 보주(寶珠) :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구슬(여의주)로 탑의 꼭대기에 장식한다.
* 안상(眼象) : 인도에서 코끼리 눈의 형상을 본떠 만든 장식문양으로 원형이나 장방형의 곡선을 새겨서 우묵하게 파낸 조각의 일종이다.
* 당초문(唐草文) : 중국 전래의 덩굴 무늬를 통틀어서 일컫는 것으로, 덩굴인 당초는 오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이 무늬는 '쉬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암사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
조선 전기 석등. 무학대사(1327∼1405) 부도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평면이 사각형의 형태로 간주석(竿柱石)에 두 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어 쌍사자 석등이라 불리고 있다.
회암사의 쌍사자 석등은 사각형의 하대석에 연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여의두문이 새겨져 있다. 간주석(竿柱石)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마주 보며 하대석을 딛고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상대석의 아래 면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등불을 올려놓는 화사석(火舍石)을 두 장의 돌로 세워 만들었으며 두 면에만 화창(火窓)(火窓)을 두었다. 옥개석은 사모지붕 형태로 각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두툼하게 표현되었고, 정상에는 보륜(寶輪)과 보주(寶珠)를 놓았다. 이러한 모양은 조선초기 석조물의 옥개 양식을 대표한다.
*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것으로 주로 불전 앞에 세웠다. 불교에서는 죽은 이를 위하여 탑묘 앞에 등불을 밝히면 다시 태어나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공양도구로 제작되었다. 일반적인 석등의 형태는 하대석·중대석·상대석·화사석(火舍石)·옥개석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옥개 위에는 보주(寶珠)를 얹는다. 등불을 안치하는 화사석(火舍石)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부분 4각·6각·8각이다.
무학대사 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조선 순조 28년(1828).
조선 초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自超, 1327∼1405)의 비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3대 화상으로 유명한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의 부도가 있는 회암사 터에 세워져 있는 이 비석은, 조선 태종10년(1410) 왕명에 따라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글씨를 써서 세워졌으나 순조 21(1821)에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후에 다시 세워졌다.
자초는 18세에 승려가 되어 용문산의 혜명에게 불법을 배운 후 묘향산 금강굴 등을 찾아 수도하였다. 고려가 멸망한 후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자초를 왕의 스승인 왕사로 책봉했고,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자초는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태조는 그를 경기 양주군 천보산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면서 자주 만났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할 정도로 무학대사 자초와 이 절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무학대사 자초의 부도 바로 앞에 있는 이 비는, 자초의 부도와 석등이 매우 화려하고 공을 들인데 반해 특별한 문양이 없어 단조롭고 소박하다. 평이한 4각 하대 위에 비의 몸체를 얹고 그 위에 네모난 지붕돌을 얹었다. 비문에는 자초의 일생이 적혀있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고려 후기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 나옹(懶翁)의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우리 나라에서는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禪宗)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신앙의 한 형태로 크게 유행하였다. 부도의 구조는 탑신을 받치는 기단부와 탑신 위에 있는 옥개석·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나옹(懶翁)선사의 부도는 높이 4.6m 가로와 세로 각각 1.15m로 팔각의 지대석과 하대석 위에 배가 불룩 나온 모양의 중대석을 놓았다. 탑신부는 원구형이며 아무런 조각이 없다. 팔각의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두툼하며 처마는 전각에서 조금 반전되었다. 상륜부에는 4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珠)를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다.
* 나옹(懶翁, 1329∼1376) : 고려 말의 고승으로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1344년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서 대오(大悟)하였다. 충목왕 3년(1347) 원나라에 가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으며 지내다가 중국 각지를 편력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특히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 선(禪)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나라 순제는 그를 연경의 관제선사 주지로 임명하고 금란가사를 내리는 등 극진히 예우했으나, 공민왕 7년(1358) 귀국하였다. 그후 1371년 왕사(王師)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는 회암사에 있다가 우왕 2년(1376) 조정의 명으로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 또한 나옹(懶翁)의 부도이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고려 후기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선종(禪宗)의 맥을 형성했던 승려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이 머물며 포교했던 곳으로 유명한 절이다. 절의 동쪽 능선에 세 승려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이 지공(指空)의 부도와 석등으로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건립되었다.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의 양식으로 팔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기단의 각 부분은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고 중대석은 배가 불룩 나온 모양이다. 탑신은 둥근 공 모양으로 표면에 아무런 조각이 없고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다. 상륜부에 5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珠)가 있다.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죽은 이를 위하여 탑이나 부도 앞에 등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다섯 가지의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석등은 평면이 사각형으로 기단부의 상대석은 아래 윗부분은 경사지게 표현하였다. 등불을 올려두는 화사석(火舍石)은 사모 지붕의 형태로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이다. 정상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있다.
부도의 높이는 3.3365m, 가로세로 각각 2m이다.
*지공화상(指空和尙)(?∼1363) :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博陀), 선현(禪賢)이라 번역하고 호는 지공(指空)이다. 8세에 인도의 나란다에서 승려가 되어 19세 때 남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1328년 우리 나라에 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樑)에 예배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법원사를 짓고 주석하다가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 공민왕은 그의 유골을 받아 양주에 회암사를 짓고 부도를 세웠다.
필룩스 조명박물관
조명을 단지 어둠을 밝히는 도구로만 보지 않고 환경과 생명을 생각하는 조명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는 곳이 있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자리한 필룩스 조명박물관(관장 노시청). 이곳은 2004년 9월 개관한, 조명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국내 유일한 박물관이다.
빛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신체와 마음까지 건강하게 해주는 감성조명을 개발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음식의 맛을 더하게 할뿐만 아니라 음악등과 어우러져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빛의 다양한 기능을 새롭게 발견한 ㈜필룩스의 산물인 곳이다.
이곳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원시 등화구에서 토기등잔, 유기촛대 등 다양하고 특이한 세계 이국등화구가 전시된 ‘조명역사관’, 젊은 작가들이 조명과 빛을 이용해 만든 독창적인 예술작품들이 설치된 ‘조명예술관’, 전기조명의 시작이 보이는 ‘근대조명관’, 빛변화에 따른 미술작품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조명미술관’, 빛공해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우리 일상에서 노출된 빛공해의 심각성을 알 수 있는 ‘빛공해관’이 있다.
특히, 지하에 있는 ‘미래조명관’은 감성조명 체험을 화려한 조명 아래 다양한 공간 안에서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어 꼭 한번 둘러볼 만하다.
또한 신종 환경공해로 떠오른 ‘빛공해’를 조명하고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빛 공해 사진전’도 10월20일까지 열리고 있다. 밤 늦은 시각 전등 불빛 아래 울고 있는 매미를 찍은 김서경씨의 ‘빛으로 미쳐가는 매미’(최우수작), 빛 공해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표현한 박영진씨의 ‘도시인’(우수작) 등 수상작 39편이 전시돼 있다. 이곳 학예연구사 안상경씨는 “빛은 우리네 일상에 매우 유용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많은 피해를 준다”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빛의 심각성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빛이 아름답고 고마운 존재이긴 하나 공해가 되고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결코 환영받진 못할 것이다. 대낮처럼 환한 가로등, 아파트 불빛 아래 밤에도 쉴새 없이 울어대는 불쌍한 매미, 그로 인해 파괴되는 생태계가 끔찍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무료관람. 일요일은 쉰다. ☎031)820-8001
필룩스는 이 전시관을 만드는데 약 100억 원을 투입했다. 2001년 9월에 착공, 3년에 걸쳐 완공된 이곳은 3,300평 규모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150석 규모의 멀티미디어실과 등잔박물관, 조명체험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지하 1층에 마련된 감성조명체험관에서는 병실, 교실, 거실, 회의실, 미술관 등 조명기기가 들어가는 각종 공간을 주제별로 꾸며 놓았다. 주변상황에 따라 어떤 색감의 조명기기를 써야 가장 훌륭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지 비교 체험할 수 있다.
태양이 떠오를 때부터 대낮의 환한 분위기, 일몰 당시의 느낌까지 단추 하나로 조절할 수 있는 필룩스의 ‘SIH(Sun In House) 시스템’을 이곳에서 체험할 수 있다. 필룩스의 세계적인 특허상품인 SIH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은 물론 예술작품을 빛에 따라 다르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도 보여줌으로써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빛이 단순히 어둠을 밝혀주는 역할이 아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약이 되고 병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1층 전시실에는 조명역사관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에디슨 조명스쿨을 비롯해 세계 조명기구와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등잔과 주마등, 촛대, 등경, 등가 등 동·서양 조명의 역사가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100평의 영상체험관은 무대 조명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다. 조명과 예술작품의 만남을 표현한 조명예술관에서는 박물관, 도심, 공원 등에 따라 어떤 조명이 효과적인지를 시각적으로 잘 표현해 놓고 있다.
화이트, 레드, 그린, 블루, 블랙 등 5가지의 빛 색깔로 표현한 젊은 작가들의 독창적인 예술 작품도 설치돼 있다.
조명박물관의 안상경 학예연구사는 “빛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관람객들이 실감하고 있다”면서 “조명을 소재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문화상품으로 포장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의 조명을 만들어간다
지금 이곳에서는 한지로 만든 우리 전통등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영일 공방의 작가 5명이 호랑이등 어룡등 사슴등 수박등 봉황등 등 29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등잔, 초와 같은 직접조명에 한지로 전통등을 제작하여 불빛을 줄임으로써 난반사와 빛공해를 막았다고 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문헌에 나오는 전통등의 모양과 색채를 그대로 복원하고 전구도 촛불 조도에 맞춰 은은한 우리 고유의 전통등 맛을 충실히 재현했다. 물론 작품에 이용된 조명기구는 필룩스 제품들이다. 우리 전통등의 은근하고 편안한 빛을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전시회는 전통등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조명박물관은 지난해 6월 5일 환경의 날에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과 함께 신종환경공해 ‘빛 공해’를 주제로 ‘빛 공해 사진 공모전’을 열었으며 앞으로도 빛과 조명을 소재로 전시회를 기획해 나갈 예정이다.
기업과 문화가 만나는 일, 그것은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업전략이기도 하면서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멋진 서비스가 아닐까. 필룩스가 조명박물관을 운영하는 이유만은 확실해 보인다. 노 회장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문화상품으로 포장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의 조명을 개발해내는 일, 그것이 필룩스가 앞으로 존재해야할 이유”라고 힘있게 강조한다.
양주향교
향교는 조선 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良民)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시(詩)나 문장(文章)을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經學)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또한 향교에서는 교육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의 선현(禪賢)에게 제사하였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서 향교의 정원을 조정하였는데 대체로 시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토지를 지급하고 그에 따른 세금 수입으로 향교 운영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일반적인 향교의 건물 배치는 앞의 외삼문쪽에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東齋)·서재(西齋)를 두고, 뒤의 높은 곳인 내삼문(內三門) 안에는 공자 와 4성현(안자, 자사, 증자, 맹자)을 제사지내는 대성전(大成殿)과 공자의 제자 및 송나라와 우리 나라 현인을 제사하는 동무(東 )·서무(西)를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이 향교는 조선 인조 때 창건된 후 많은 유학자를 양성·배출하던 지방의 교육기관이었다. 대성전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58년에 유림들이 재건한 것이다. 이 향교는 제향 인물 중 송나라 4현이 빠지고 기호지방의 이름난 유학자를 제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송나라 4현 : 정자(程子) , 주선(朱善), 고순(固順), 정순(程順)
어사대 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조선 정조 16년(1792)
어사대 비는 조선 정조가 활을 쏘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둔 비이다.
정조 16년(1792) 9월에 왕이 경기도 양주의 광릉에 갔다가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당시 양주 목사가 있던 관아 소재지인 양주읍 유양리에서 3일간 머물면서 신하와 함께 활을 쏘았던 곳으로, 후에 양주목사 이민채(李敏采)가 그때의 상황을 비석에 기록하였다. 임금이 활을 쏘았던 곳이라 하여 어사대(御射臺)라 하고 이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비신은 간략한 조각의 귀부 위에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어사대'라는 큰 글자의 제목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정조가 활을 쏜 내용에 이어 활을 쏜 뒤 지은 시와 환궁 후 내린 말씀을 관아 우측 벽에 게시하여 성덕을 찬양하며, 아울러 그 사실을 석비에 새기고 읍지에 기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어사대비는 높이 140cm, 너비 55cm, 두께 23cm이다.
양주 대모산성
경기도 기념물 제143호. 삼국시대
이 성은 일명 양주산성(楊州山城)이라고도 하는데, 해발 213m 대모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다. 이곳은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의정부 쪽으로 내려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4km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북문 터 좌,우측과 동쪽 등 3개소에 약 70~80m 정도 잘 남아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고 아랫부분의 폭은 주변의 지세에 따라 가파른 남쪽은 6m, 완만한 북서쪽은 8m쯤 된다. 성벽은 표면이 잘 다듬어진 할석으로 경사지게 들여쌓기 하였으며, 성벽 하단부 바깥쪽에는 보축 성벽을 쌓아 성벽의 안정성을 높였다.
성문은 3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다락문인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신라성에서 주로 발견되는 양식이다. 성 내부에는 군창(軍倉) 터를 비롯하여 건물 터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이 있으며 우물이 5곳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건물 터 내부와 추정 저장공, 문 터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농기류, 마구류, 건물부재, 일반 생활용구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驪州)고 있다. 삼국 시대의 유물로는 백제,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출토유물 중에는 덕부사(德部舍), 국(國), 부(富), 대부운사(大浮雲寺) 등의 명문 기와가 발굴되어 주목된다. 삼국 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현재의 석축 성벽은 삼국 시대 때 신라에 의하여 쌓아져 고려, 조선 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문 터 북쪽에서는 백제계 토기가 많이 출토되어 석축(石築) 성벽이 축조되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는 토루나 목책 등의 방어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양주별산대놀이
1. 역사적 유래
양주별산대 놀이는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의 한 분파로서, 본산대라고 한다. 녹번, 아현 등지의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 후에 산대도감에서 관장한 궁중행사에서도 동원되었었다.
그리하여 연희자들은 쌀, 포 등을 지급받았으며, 평상시에는 경기 일대에 머물러 살면서 계방의 도인으로 생계에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보통 편놈들로사, 인조 이후 공의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각기 분산되어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이 단체를 모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결과 녹번리산대, 애오개산대, 노량진산대, 퇴계산산대,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 등이 생긴 것이다.
양주별산대 놀이는 4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 외에 가뭄 때의 기우제 같은 때 에도 연희되었다. 격식대로 하자면 놀이 전의 고사에는 조라와 떡과 삼색 과일외에 쇠머리며 돼지다리 등 푸짐한 제 물이 올라야 하고, 그 제물과 조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아야 놀이가 시작되었다. 제석에는 가면을 쓰고 동헌을 비롯하여 육방을 돌아 축사하고 초청에 응하여 다른 지방에도 순연하여 응분의 전곡이나 주식의 대접을 받았었다. 놀이 비용은 마을 유지들과 부가나 상인들이 추렴하고 연희자는 원칙적으로 무보수였다고 한다.
2. 특 징
양주별산대 놀이는 다른 한국 탈춤의 연출 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거기에 묵극적인 몸짓과 덕담, 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상연된다. 상좌, 연잎과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소무, 노장, 원숭이, 해산모, 포도부장, 미얄 할미역은 대사가 없고, 춤과 몸짓과 동작으로만 연기하지만, 그 밖의 역들은 대사와 함께 춤과 몸짓 및 동작으로 연기한다. 산대놀이의 춤의 반주 악기로는 삼현육각 즉 피리 2, 젓대 1, 해금 1, 장구 1, 북 1로 구성되지만, 이 밖에 꽹과리를 추가하는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리와 장구만으로도 춤을 춘다. 반주악은 완중한 염불, 리듬이 명확한 타령, 유장한 굿거리곡 등을 사용한다.
산대춤은 봉산탈춤이나 오광대놀이의 덧배기춤에 비하여 비교적 전아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양주별산대 놀이는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유경성, 신순봉, 고명달, 박교응, 김상용, 이병권, 석거억 등 8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수에 힘쓰고 있다.
3. 놀이의 순서
탈놀음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판주가 관장의 양해 아래 인접한 고을에 놀이판을 알린 다음, 들병장사들에게 놀이터의 자릿세를 받는 다. 이 놀이터는 양주의 사직골로서 불곡산의 계곡입구에 사방이 경사 지어 있는 천연의 노천극장 구실을 했다. 이곳 가운데에는 사직단이 있어 개복청으로 사용되었고, 그 앞에는 잽이자리였다.
조명은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밝혔는데 밑에서 위로 비추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탈놀음은 먼저 앞놀이(길놀이)로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올리며 마을을 한바퀴 돈다.
낮에는 유지가에 들려 춤과 덕담을 베풀어 주식을 대접받고 흥취를 돋구다가 밤에 이르러 탈놀음이 시작되는데, 놀이 직전에 탈고 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다.
4. 구성방식
양주 별산대놀이는 8마당 9거리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 1 : 상좌마당
제 2 : 옴중마당
제 3 : 먹중마당
제 4 : 연잎 눈끔적이 마당
제 5 : 팔먹중 마당
제 6 : 노장마당
제 7 : 샌님마당
제 8 : 신할아비 미
놀이터는 전에는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谷山) 아래의 사직골이었고, 나중에는 마을 뒷산 송림 속의 잔디밭에서 놀았으나 최근에는 향교 바깥마당에서 놀거나 마을 뒤에 새로 지은 전수교육관 앞마당에서 먼저 길놀이에 이어 고사를 지내고, 제1과장은 개장 의식무인 상좌춤이, 제2과장은 옴중과 상좌놀이, 제3과장은 먹중과 옴중놀이, 제4과장은 천령(天靈)과 지령(地靈)을 나타낸다는 연잎과 눈끔쩍이가 나와 거드름춤을 추고, 제5과장과 제6과장은 파계승놀이이다.
제5과장 팔목중은 제1경(景)이 팔목중들의 염불놀이이고, 제2경은 침놀이, 제3경은 애사당북놀이이다. 제6과장 노장은 제1경이 파계승놀이로 대사 한 마디 없이 노장이 소무와 더불어 파계하는 과정을 춤과 몸짓으로만 보여주는 장면이다. 제2경은 신장수놀이로 신장수가 노장에게 신을 팔고, 돈 받으러 원숭이를 보낸다. 제3경은 취발이놀이로 취발이는 노장의 파계를 꾸짖고, 소무를 빼앗아 사랑놀이 끝에 아이를 갖게 된다. 제7과장 샌님은 양반놀이로 제1경은 의막사령놀이(依幕使令놀이), 제2경은 포도부장놀이로 평민인 젊은 포도부장이 늙은 양반의 소첩을 빼앗는다. 끝으로 서민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로 이어지고, 신할아비의 박대로 미얄할미가 죽어 지노귀굿을 한다. 상좌춤으로 시작하여 지노귀굿으로 끝나는 과정은 주술종교(呪術宗敎)적인 의례에서 출발하여 연극으로 옮겨온 가면극의 내력을 말하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봉산탈춤의 대사가 비교적 운문억양을 고집하고 있는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일상회화조의 대사이다. 옴중과 취발이와 말뚝이 대사가 백미로서, 특히 취발이나 말뚝이 대사는 민중을 대변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어 관중의 흥미를 끌었다. 양주별산대놀이에 등장하는 배역은 모두 32명이지만 겸용하는 가면이 있기 때문에 실제 사용되는 가면수는 보통 22개(상좌 2개, 옴, 목중 4개, 연잎, 눈끔쩍이, 완보, 신주부, 왜장녀, 노장, 소무 2개, 말뚝이, 원숭이, 취발이, 샌님, 포도부장, 신할아비, 미얄할미 등)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 탈춤인 봉산탈춤과 더불어 한국가면극의 쌍벽을 이루는 놀이이다.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
양주지방에는 많은 민요가 입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이다. 이것은 백석면 방성리 고능말에 전승되어 온 만가(輓歌)로서 장례를 치를 때 부르는 민요이다.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는 발인에서 무덤을 완성할 때까지 장례 절차마다 부르는 수많은 상여소리와 회다지소리를 순서대로 구성하여 연출한 것이다. 상여소리는 긴소리와 자진소리로 나눠지며 회다지소리는 긴달구(고)소리, 자진달구(고)소리, 회심곡, 초한가, 꽃방아타령, 상사소리, 몸돌려소리 등 여러 종류의 곡조가 있다. 장단은 주로 타령이며 일의 순서에 따라 긴소리에는 늦타령 장단이 쓰이고, 자진소리에는 자진타령 장단이 쓰인다. 타령장단은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선율은 대부분 경조로 되어 있고 메나리조도 섞여 있다.
그 주요내용은 제1과정이 ‘상여의 행진’이고, 제2과정은 ‘회다지소리와 율동’이다. 선소리꾼이 구슬픈 상여소리를 상두꾼과 함께 주고받으면서 외나무다리 등 장애물을 지나 장지에 가까이 오면 자진소리로 넘어간다. 상여가 장지에 도달하면 하관하고, 달구질하며 회다지소리를 부른다. 그리고 달구질이 모두 끝나면 봉분(封墳)을 완성하고 퇴장한다.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는 인심 좋고 협동심이 강했던 고능말 사람들이 전승해온 장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양주 소놀이굿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양주군 일대에서 전승되는 소놀이굿으로, 농경의례적인 요소와 집안일이 잘되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축원하는 의미에서 행해졌다. 소놀음굿, 소굿, 쇠굿, 마부타령굿 등으로도 불리는데 농경의례인 소맥이놀이에 마마배송굿과 같은 무당굿 형식을 더하여 보다 발전된 형태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체로 경기도, 황해도,평안남도 지역에서 행해졌다.
놀이 내용을 보면 무당과 마부의 대화, 반주 장단에 맞춰 부르는 마부의 타령과 덕담, 마부의 동작과 춤, 소의 동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등장인물은 무당과 마부, 악사, 조무(助巫), 곁마부, 만든 소가 있는데, 소는 고무래를 짚으로 싸서 머리를 만들고 멍석을 만들고 멍석을 반으로 접어 그 안에 5∼6명이 들어가 소 노릇을 한다. 송아지는 한 사람이 집 멍석을 뒤집어쓰고 논다. 놀이는 마부가 부르는 타령이 주를 이루며, 그 사이사이에 무당과 마부의 사설이 낀다. 서사적인 줄거리는 없으며, 무당이 소 장수를 찾고 마부가 '누가 나를 찾나'부터 시작하여 소의 각 부위를 다른 종류의 그 부위와 함께 들어 동음자(同音字)놀이와 같은 타령을 늘어놓고 소 흥정을 한 후 끝으로 축원과 살풀이를 한다. 이러한 타령들은 잡가의 일종으로 내용이 재미있고 세련된 평민가사체로 되어 있어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소맥이놀이 : 중부지방에서 풍농의 기원이나 감사의 의미로 농악대와 청년들이 사람이 가장한 소를 몰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며 노는 놀이.
* 마마배송굿 : 마마(천연두)를 물리치기 위한 굿.
* 평민 가사 :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생겨난 시가 문학인 가사의 한 종류로 평민이 지은 가사.
첫댓글 에~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 읽지 못했지만 군데군데 추려서 읽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만든 사람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틈틈히 다 읽어볼께요.... 고맙습니다... 답사 때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