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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 승전의 반대 급부.
레반트는 모두 승리하지 못할거라 생각된 삼국 동맹 전쟁에서, 완승했습니다. 이들이 삼국 동맹에게서 뜯어낸 전리품만 해도, 수레를 가득 채웠으며, 개선장군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듯 했습니다. 이란 사태가 일어난 이후, 후세인 1세는 샤한샤로 즉위하는 즉위식까지 치뤘습니다. "아랍 세계의 술탄이자 샤한샤이시며, 바디아,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요르단, 쿠르디스탄의 보호자이시며, 연방 제민족의 권리의 수호자이자 참된 신앙의 가장 고귀한 보호자이시며, 유대교 및 동방기독교를 비롯한 뭇 소수교파의 자비로운 옹호자" 라는, 전성기 압스부르고의 위세에 비견될 칭호를 달았죠.
그러나, 그 국가의 전성기가, 몰락의 시작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 무굴 제국처럼 말이죠. 문제는 돈, 돈, 돈, 돈이었습니다. 자금원 자체는 늘지 않았는데, 국가 통합한다고 인프라도 깔고, 그런 상황에서, 이기긴 했으나, 전비를 크게 쓰고, 개선식도 하고, 즉위식도 치르고... 돈이 모자를 수밖에 없죠. 그리고... 이란 사태에서의 쿠르드족 분리 공작은, 이 불타는 중동에 터키가 손을 뻗칠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바트당의 무지성 외교가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K1. 제대로 책임 못 질 거면 나가세요!
1971년 2월 8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민의원 총선거가 개최되었습니다. 구 여당이던 민주공화당, 야당 신민당, 그리고 다크호스로 재야세력과 혁신세력의 연합정당인 사회당이 주요 정당으로 거론되었죠. 몇가지 미비한 점이 있었으나 선거는 대체적으로 공정하고 깨끗하게 치러졌습니다.
개표 결과, 총 299석 중 무려 179석을 차지한 신민당이 공룡 여당으로 등극했습니다. 총리로는 주류계파의 양일동이 선출되었죠. 당 원로들의 선택을 받은, 적당히 중도적이고 무난한 후보였습니다. 평생 적당히 군사정권의 눈치나 보면서 금뱃지 간수할 걱정만 할 줄 알았던 양일동은 의욕적으로 국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취임한 지 2달도 채 되지 않은 3월 31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과의 마무리 협상 단계에서 대북 인적정보체계(휴민트)가 싸그리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을 의도한 이는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포로 교환 과정에서 벌어진 실책이었죠. 국민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한 양일동 내각은 고작 두 달만에 총사퇴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K1-1.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위의 사건을 제대로 설명 하려면, 총 선거때부터, 차근 차근 설명 해야만 합니다. 신민당은 전체 의석의 6할 가량을 차지하는 거대 정당이 되었으나, 마치 4.19 직후의 민주당처럼 수많은 계파가 난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 계파의 정치성향은 매우 선명한 강성 우익이었죠.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입장이다 보니 겉으로는 자유주의 정당같았지만, 애초에 한국 야당의 뿌리는 백의사 등의 극우 조직이었습니다.
공화당은 고작 46석만을 건지면서 크게 몰락했습니다. 사실 공화당이라는 이름도 아니었고, 김종필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군사독재에 빌붙어먹던 정당 이미지를 피하고자 무소속 또는 별도 정당을 만들어 출마한 이들이었죠. 즉 편의상 공화당이라고 부를 뿐이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결과는 중도좌파 사회당이 무려 43석을 확보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회당 지도부가 지난 전쟁 때 자진입대해 인민군과 용맹하게 싸운 결과물이었습니다. 특히 김철 총재와 백기완 부총재는 명망있는 지식인이라는 지위를 걷어치우고 이등병으로 입대했으니, 안전한 후방에서 정치싸움이나 하던 대부분의 양당 의원들에 비해 압도적인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죠.
비록 신민당이 압승하기는 했지만, 이는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그놈들 말고는 찍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당은 지역기반이 미약했고, 공화당 출신자를 찍으려니 뭔가 양심이 쿡쿡 쑤셨죠. 만약 사회당이 전체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면 신민당을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이 줄을 이었습니다. 즉, 다수의 국민들은 딱히 신민당과 공화당 어느 쪽도 크게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정보유출 사고가 터지고 내각이 총사퇴했으니, 기성 정치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겠죠.
기성 정치인들의 선택은, 따라서 야합이었습니다. 일본식 정치에 익숙했던 원로 및 중진들의 일반적 판단이었죠. 좋게 말하면 합의와 숙의의 정치, 나쁘게 말하면 “지들끼리 다 해먹는 구린내나는 똥통 정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갑은 유진산 등 신민당 지도부, 구 공화당 출신자들은 철저한 을이었습니다. “구 공화당 출신자들에 대한 자격 전수검증”이라는 가혹한 조건도 받아들여야 했죠.
이렇게 207석의 초거대정당, “한국 국민당”이 탄생했습니다. 뭔가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은 백범 김구의 이름을 팔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정치와 일본 정치를 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혼종은 기어이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신임 총리로 나서야 할까요? 국민들의 참을성이 바닥나고 있던 시점에, 원로들에 눌려 기를 못 펴고 있던 젊은 정치인들이 유쾌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의 등장이었죠.
선두주자는 원내총무를 맡던 이철승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극우 반공주의자로, “안보 무능” 프레임을 통해 유진산과 양일동을 공격했습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압록강물로 빨래를 하고 두만강물로 멱을 감으며 백두산 천지 물로 밥을 지어먹을 것이다!” 단순하고도 통쾌한 논리에 국민들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비주류 당 원로였던 이범석 또한 이철승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역시 우파에 속했지만, 이철승보다는 온건한 김영삼이 2번 주자를 맡았습니다. 말석 최고위원이었던 그는 특유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 실력과 수완, 그리고 무엇보다 “불완전 민주화”론을 통해 세를 불렸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은 더러운 야합을 통해 수구적 민주화의 잘못된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이라도 “진짜 민주화”로 진로를 틀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던 김대중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당내 좌파에 속했으며 사회당 인사들과도 안면이 돈독한 사이였습니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불완전민주화론을 지지하면서도 여야 합치를 주장했으며, 국가 재건 및 발전을 위한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그에게 더 많은 측근이 있었더라면 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죠.
이 세 거두가 이끄는 각 계파, 그리고 김종필의 공화계와 장준하의 독립당계 등이 내부경쟁을 벌였습니다. 기존 원로 및 수뇌부들은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죠. 총재 및 총리 선거에서는 세력이 가장 강했던 이철승이 최종적으로 승리, 대권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철승은 취임하자마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내뱉으며, 굳건한 아태동맹과 활기찬 시장경제, 강력한 반공태세를 약속했습니다. 사회당에 대한 강한 견제도 다시금 시작되었죠. 혹자는 그를 새로운 독재자의 씨앗이라 비판했고, 또 누군가는 백마 탄 초인이라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것이 새 시대의 시작이기를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NK1. 우리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남한 이야기를 신나게 했으니, 북한 이야기도 하도록 합시다. 이들은, 한국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영토 상실등 잃은게 얼마나 되는지는 이미 말했죠. 이는 당연하게도, 현재 집권파였던, 소련파의 실각과 동시에, 반 소련으로 연합했던, 소수 내각들의 내분과 이합 집산을 의미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합집산의 끝에, 봉천파와 남로당파의 연립 정권이 수립되고, 반대로 소련파가 견제 위치를 맡게 되었군요.
이제, 이들은 전후 수습에 나서야 합니다. 곡창 지대인 황해도와, 대 평원인 철원 일대를 잃었고, 원산을 잃어 동해 주요 항구와 평원선도 날려 먹었으니, 조금만 더 늦어도, 이 겨울. 아사자가 속출 하겠지요.
그리하여, 이들은 소련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지원을 제대로 못해줘서 안좋은 감정이 있다곤 하더라도, 식량을 지원 해 줄곳은 여기 말곤 없을겁니다. 북 일본의 경우는, 남 일본의 급작스럽지만 급작스럽진 않은 도발의 시작 이후로, 식량 비축등 전쟁 대비를 시작했고, 몽골은 자기 먹고 살기에 바쁘죠. 중국이요? 중국은 아군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회담의 분위기는 개판 오분전. 그 이상도, 그 이하라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소련의 경우, 패전 책임을 소련파에 모조리 떠넘기고 집권한 자들을 신뢰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고, 북한의 경우, 지원을 제대로 안 해줘서 패전했다는 감정을 숨겼습니다만, 그게 숨긴다고 숨겨질리가 없으니까요. 물론, 서로가 서로를 버릴수 없는 이유는 있었기에, 이 회담은 이어졌고, 소련은 제안서를 내놨습니다.
"공업국가로의 완전한 재편" 을 골자로 하는, 대규모 투자 계획서 였지요. "애국심" 이 그대들에게 있다면, 이 "처참한" 품질의 가위 대신, 쓸만 한 물건을 가져오라는 말과 함께, 식량 지원을 약속 했습니다. "북 일본" 에게 수매를 해서라도 말이죠... 북한 대표단은, "신뢰 무역" 이라는 미명으로, 저질 공산품을 억지로 팔아 넘기고, 품질 개선등의 자금을 아껴 이득을 어느정도 챙겨 나갔었으나, 이 제안을 받아 들인다면, 인민들을 갈아 넣어서라도 품질을 챙겨야 하는 셈이었죠.
결국, 북한은 소련의 제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패전으로 기반을 상실한 지금, 남한과의 체제 경쟁을 지속 하려거든, 공업화와, 기술 증진 말고는 없었으니까요. 거기다, "신뢰 무역" 이 언제까지 계속 지속 될지도 모르는데, 그 말이 영원하리라 믿는건 국가를 팔아 넘기는거나 다름 없었죠. 휴민트가 넘긴 정보에 의하면 북한의 공산품은 폐기품 수준이라, 우방국도 불만이 있다는게 정설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소련은 북한에 공업화를 위한 원조를 시작해, 평원선의 단절된 부분을 보완함과 동시에, 원산을 대체할 항구 부지를 찾았고, 공장들을 세워, 공장 인부들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수뇌부는, 공산품의 품질을 국가의 미래로 여기고, 매일 점검에 나서고 있습니다. 공업화의 성과는 긴 시간이 필요하겠으나... 성공은 그들의 몫일겁니다.
W1. 페르시아와 검은 황금.
중동 대전은 레반트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삼국 연합이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영토도 뜯기고, 조차항도 뜯겨 나가는 사태였죠. 거기에 민중 시위로 인해 석유 채굴량이 감소하며,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란보단 상황이 낫군요. 팔라비 정권이 전방위적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1971년 새해가 밝자마자 축출된 것입니다. 카림 산자비의 국민전선(제베예 멜리예)이 정권을 잡아 이란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신체제가 들어서기도 무섭게 정국은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극심한 갈등으로 얼룩졌습니다.
이란이 사실상의 국가마비 상태에 접어들자 레반트 연방은 조약의 조항대로 서부 유전지대에 군사를 재투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지 게릴라 조직의 국경도발사건 조사”를 명목으로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헌병대를 파견해 분리공작에 착수했죠. 이는 이란의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사태만으로도, 2월의 유가는 전월 대비, 3배를 넘게 폭등 했습니다만, OPEC의 리더 사우디아라비아는 배상금 조기납부를 위해 석유 감산 및 공시유가 상승이라는 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이는 레반트또한 반대하지 않아, 전원 찬성을 가져오는데 성공했죠.
어느새 배럴당 50달러 선을 돌파한 유가는 전 세계 경제에 치명타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저유가의 득을 보던, 미국과 서유럽은 직격타를 맞았고, 중공업 위주로 고속 산업화를 하던 중화민국도 타격을 입었죠. 뉴욕, 런던, 오사카, 상하이, 파리 등 주요 국가들의 증시는 연일 하한가를 기록했고, 주유소의 가격표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상점들도 가판대의 가격표를 연일 수정하느라 바빴고, 거리엔 실직자들이 넘처났습니다. 이로서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중산층의 확대라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서구권의 번영기는 막을 내렸습니다.
공산권의 경우, 소련이 '신뢰 가격' 을 내걸고, 저가로 석유를 공급하였기에, 유가 문제는 적었습니다만, 개혁주의 노선을 걷던 국가들은, 외채를 차입해 국가 개선을 시작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제일 문제였습니다. "따서 갚으면 돼" 의 발현은 아니었지만, 부족한 재정을 외채로 보충하던 이들은, 무역 상대국의 긴축 재정 전환과 함께, 외채의 만기 연장 거부에 직면하면서, 큰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소련은, 유가 상승으로 자금을 확보하긴 했으나, 눈 앞에 보이는건 거대한 산맥입니다. 지원을 바라는 동구권, 경영난에 직면한 기업들, 북한 공업화 지원 자금, 인프라 개선 비용 상승... 입이 많다는거로는 모자랄 정도로군요.
중동에서 시작된 모래바람은 이제, 전 세계에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모두를 바꾼 대 사건으로 역사에 남겠지요. 이 혼란의 틈에서, 세계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U1.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한국에서의 승전보는 일시적으로 존슨 행정부의 지지율을 견인했으나, 곧바로 중동 정세가 급변하며 원유 가격이 급등, 공급 측면의 충격으로 인해 경제는 끔찍한 침체 국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그의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해 반대파를 설득하고 야당을 끌어들여가며 겨우 확약받은 “정권을 이어 진행될 장기 프로젝트”, 위대한 사회 계획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실적부진에 빠진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주가는 연일 바닥을 갱신했습니다. 경제학의 기존 통념을 적용한다면 적어도 물가는 잡혀야 정상인데, 물가마저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았죠. 경제침체와 인플레이션이 겹치는 소위 “스태그플레이션”의 악몽이 전세계 경제를 덮쳤습니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정계 또한 극심한 양극화의 늪에 빠졌습니다. 좌우익 모두 극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죠. 좌익 진영에서는 어느새 상원의원 뱃지를 단 지미 호파와 페럴 돕스, 루이스 피셔, 빌 엡튼 등의 극좌 인사들이 연일 정부를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계속되는 난국에 지친 대중들은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견에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익 진영에서는 조지 월리스, 레스터 매덕스 등의 구 딕시크랫계 정치인들이 연일 인종분리론과 급진적 보호무역주의, 미국우선주의를 주장하며 각종 극우적 술사들을 내뱉었습니다. 원외에서도 자생적 극우주의자들이 유색인종 공동체를 습격하거나 “나약한” 정치인들을 폭행하고 치안을 어지럽히는 등 정부의 골머리를 썩였죠. 적어도 좌익은 대체로 예고하고 총파업이나 대규모 시위를 진행했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럭비공과 같았습니다.
결국 공화민주당과 국가자유당 내 온건파 의원들은 다음 대선에서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협력을 주도한 것은 웨스트버지니아 주 상원의원 로버트 버드(Robert C. Byrd)였는데, 그는 극단주의에 맞서 위기를 극복하고 미국적 가치를 수호하자는 주장으로 양당 내에서 큰 공감대를 얻어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건전한 보수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면서요.
참으로 불분명하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질서를 수호해야 할 법집행기관들은 여전히 탈법적 수단을 사용하며 오명을 쌓았고,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졌으며, 이제는 중산층마저 붕괴의 조짐을 보였습니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S1.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소련의 크렘린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긴급 장관 회의가 소집 되었고, 낯빛은 모두 어두운 기색이었습니다. 제 1 부주석 야코블레프가 현안으로, 동맹국, 국내 기업과, 거대 프로젝트중 비중을 정해야 함과 더불어, 유가 문제를 거론했지요. 그의 말처럼, 유가가 50달러를 넘어간 지금, 소련의 이득 수준은 어마무시했지만, 피해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위에 말했듯, 외채로 신음하는 동맹국들이 크렘린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고, 비 공산권 국가에서 수급하는 물자의 폭등으로 인한 기업 도산도 문제였죠. 거기에, 소련식 아우토반, 유라시아 횡단철도와, 미래를 위한 신 산업 투자까지.
유가 상승이 불러온 부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이들은, 비율을 잘 정해 분배 해야 하지만... 지금, 누군가 찾아온것 같군요.
S1-1. 다시 만나다.
코시긴 독트린의 시작인, 둡체크는 소련에 불만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50억 달러의 외채와, 3억 9천만 달러의 이자는, 소련 이외에는 처리할 수 없으니까요. 공산권 국가들이 크렘린으로 몰려 오는건, 그와 다르지 않을겁니다. 안드로포프도 알고 있겠죠. 그들이 지원을 요구 할것이라는걸. 소련은 이들의 믿음을 충족 시켜 줄 수 있는지를 생각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릴겁니다. 아니... 내렸군요.
S1-2. 그때와는 다르다.
고민 끝에, 소련은 동맹을 최 우선시하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순망치한. 동맹이 망하면, 소련도 버틸수 없습니다. 또한,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용 자원 200... 중에서, 동맹국 지원에 100, 국내 기업 지원에 70, 신 산업 투자에 30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동맹국의 지원은 만기일을 막고, 빛을 갚기 위한 긴축 정책의 방어 수준으로 끝나야 정상이었지만, 유가의 폭등세는 그 계획을 넘어서는 자금을 부여했기에, 공산권에 활력을 조금은 불어 넣을수 있겠죠. 또한, 준 필수품인 설탕과 차를 수입하는 기업을 우선 지원하며, 불을 끄려고 하고 있습니다.
외채 위기에 빠진 국가는, 소련의 지원으로 일시적인 위기를 모면 했고, 국내의 기업 또한 살아 남는데 성공 했습니다. 신 산업 또한, 미국에 뒤쳐지지 않을 기반을 모색할수 있겠죠. 그러나... 이 고민은 오일 쇼크가 끝나기 전까진 영원할겁니다.
I-P1. 비내리는 뱅골의...
파키스탄은 인도-아프간의 연합군에 무참히 패해, 서 파키스탄의 영토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파키스탄이 파키스탄의 중심이라는건 변하지 않았었죠. 동 파키스탄이 인구수가 2배건, 세금 수입이 많건, 그건 그들에게 중요한게 아니었을겁니다... 따라서, 이번 사태도,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을겁니다. 뱅골 대홍수로, 동 파키스탄의 주민들이 집을 잃고, 농경지를 잃고, 광산이 폐쇄되건 어쩌건, 세금을 뜯어내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겠죠. 그런데, 이들이 계속 참고 있을거라고 믿었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만... 뭐, 관행이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시작 되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때처럼 "오늘은 아무일도 없던 날이다" 처럼, 소식이 늦는 시대는 아니었습니다만, 소식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대응에 한계가 분명히 존재 했습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지원했고, 파키스탄은 발이 묶여버렸습니다. 출항에 나서면 침몰당할테고, 통행권은 넘겨줄리가 없죠. 결국, 파키스탄군은, 인도 영내를 월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동 파키스탄에 도달하는 일은 없었지요... 동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선언한지, 2개월만에 파키스탄의 용인을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는, 홍수 피해를 수복하고, 다시금 앞으로 나갈겁니다. 누구와 손을 잡을지는 일단 명확하지 않으나, 최소한 인도와는 손을 잡고 시작 하겠군요.
C1. 토룡 토혈.
1971년 7월 1일은 중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어두운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장갑차를 탄 국부군 군인들은 계엄령 해제와 다당제 민주주의, 민생 개선을 부르짖던 시위대를 총칼로 짓밟았습니다.
훗날 7171 항쟁으로 불리게 될 이 시위는 약 한 달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시위의 원인은 다양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중공업 위주 고속 산업화의 부작용인 사회 양극화 문제였습니다. 장제스는 제1차 국공내전기를 전후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각지의 실력자, 즉 구 군벌 및 명문가들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권력개편이 진행되며 지역 실력자들이 군권을 좌우하는 상황은 개선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교묘하게 경영방식을 바꾸어 국가의 산업과 경제를 틀어쥐는 형태를 택했죠. 즉, 군벌시대는 재벌시대로 바뀌었을 뿐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재벌들은 공권력의 비호 하에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고, 그들의 생존권 투쟁을 사설 경비대로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물론 국가 단위로 광기를 선보이던 구 중공에 비해서는 이마저도 호사에 가까웠지만, 이제 중공은 없었죠. 당연히 누적된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개선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4인방, 즉 자오쯔양, 후야오방, 천윈, 차오스 등 구 공산당 소장파 출신 정치인들은 북중국 수복지역의 급진적 자유화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싼 값에 북부지역 공업설비 및 토지를 불하받고자 했던 기존 재벌들과 이를 기회로 재벌층에 어떻게든 끼어보려 했던 소재벌들의 욕망으로 인해 이들의 의견은 “적색분자의 구태의연한 헛소리”로 치부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북중국 역시 재벌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계엄령과 공안통치, 그리고 이를 방패삼아 무제한적 금권을 휘둘러대며 노동자 서민을 착취하는 강도재벌. 이 가혹한 환경을 시정해 달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였을까요? 1971년 6월을 뒤덮었던 함성은 총성과 포성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고난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부 장제스는 이미 거동조차 불편할 정도로 늙고 쇠약합니다. 만약 그가 죽거나 은퇴한다면, 상황은 급변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말입니다.
P1. 디아도코이 (계승자들)
이란 2월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질 때만 해도, 모든 이들은 제각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의 축출은 이란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회적 통합력을 일거에 말소시켜 버렸습니다. 그간 숨죽이고 있던 모든 정치세력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 것입니다.
5월에는 호메이니가 복귀해 신정주의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쿠르드 자치정부가 독립을 선언했으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이 총사퇴했습니다. 북부의 아제리족 또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해나간다고 합니다. 소련 등의 지원을 받는 좌익세력들은 이미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7월 11일, 카림 산자비 대통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비행기 추락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사건을 조사할 경찰이나 정보기관도 각자 편을 정해 갈라졌기 때문에 누구의 소행인지를 밝힐 수조차 없었죠. 하지만 누가 한 짓인지는 애초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전의 불길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입니다.
내전의 축은 크게 3개로 나눠졌습니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지도자로 하는 이슬람주의자들, 정보부(SAVAK)의 수장이었던 네마톨라 나시리가 이끄는 세속주의 극우주의자들, 그리고 투데당 당수 이라지 에스칸다리 및 기타 좌익연합정당과 노동조합을 총규합한 공산주의자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쿠르드 독립주의자, 아제리 독립주의자 등등 지역 세력들이 있었죠.
레반트 연방은 즉각 유전지대 점거 무기한 연장을 선언함과 동시에 쿠르드인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란이 영구히 박살나길 원했죠. 소련은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반대쪽 손으로는 만약에 대비해 아제리족 역시 도왔습니다. 최소한의 이익은 챙겨야 하니 말입니다.
가장 심경이 복잡한 건 미국이었습니다. 지금의 구도에서는 나시리의 구 제국 잔당을 지원해야 했으나… 이미 그들이 자행했던 잔혹한 국가 단위의 범죄행위들이 세상에 알려진 뒤였습니다. 공개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기에는 국내 여론은 물론 국제 여론 역시 위험했죠.
그렇다고 이란이 공산주의자나 신정주의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묵인할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을 호출해 “대외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란 구 제국측을 최대한 원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과 동시에 말이죠.
몇 달 뒤, 나시리의 군대는 많은 원조물자와 군자금을 수령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 적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있을 수는 없겠군요.
과연 물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U2. Johnson Shock
중동발 오일쇼크의 여파가 전세계를 타격하던 1971년 가을의 어느 날, 존슨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미합중국은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한다”는 말이 튀어나왔죠. 브레튼우드 체제의 종말, ‘존슨 쇼크’였습니다.
스페인, 중국, 남미, 말레이, 한국까지… 미국 정부는 대외개입에 정말로 많은 돈을 쓰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잦은 파업과 각종 극단주의 단체들의 폭거를 막기 위한 사회간접자본 투자, 그리고 뉴딜 시대의 유산인 복지제도 역시 재정적자에 기여했죠.
무역적자 역시 심각했습니다. 미국은 자유세계 전체에 달러를 공급하는 입장이었는데, 금본위제 체제 하에서 이 달러 공급이 안정을 찾으려면 미국이 대외적자를 감수해야 했고, 미국이 무역에서 이득을 본다면 달러자산이 빨려들어가 자유세계 경제 전체가 침체되는 딜레마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고립주의를 택할 수 없었기에 대외 무역적자 역시 심해져만 갔습니다.
이같은 쌍둥이 적자 상황은 오일쇼크 이후 극대화되었습니다. 석유대금-달러 결제 시스템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졌고, 많은 국가들이 금 태환을 요구했죠.
미국은 이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많은 경제전문가들과 관료들도 해법을 전혀 찾을 수 없었죠. 결국 대통령은 “금태환 일시정지”를 선언하고 해결책을 찾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브레튼우드 체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해결책 같은 건 없으니, 일시정지는 곧 영구정지임이 명백했습니다.
쇼크의 여파는 역시 전세계에 미쳤습니다. 안 그래도 높아져 있던 원유가격은 달러화의 가치가 하향조정되면서 더욱 급등, 달러화 약세로 인해 주요 서방 국가들의 무역수지가 악화되면서 물가 등 각종 경제지표들도 더 악화되었죠. 한마디로 비상사태였습니다. 아늑하게 쇼파에 앉아 상황을 관조하던 편리한 나날들은 이제 없습니다.
닭을 잡고 싶으면, 직접 손아귀로 닭의 모가지를 붙잡고 비틀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F1. 프랑스는 위대한...가?
드골의 몰락과 쓸쓸한 죽음 이후에도 프랑스 공화국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알제리 문제, 경제 문제, 일자리 문제, 교육과 복지제도 문제 등 미테랑 행정부에게는 처리해야 할 과업이 산더미처럼 많았죠. 한바탕 드골주의 광풍이 지나간 뒤 몇년간은 순조롭게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중동발 유가폭등과 알제리 사태의 재점화가 프랑스를 덮치기 전까지는 말이죠.
레반트의 대승은 알제리 반식민주의자들의 가슴에 그야말로 불을 붙이고야 말았습니다. 알제와 오랑, 콩스탕에서는 연일 대규모 독립시위가 벌어졌고, 당국의 탄압에도 시위 인원은 점점 늘어가기만 했습니다. 1971년 초 유가폭등으로 경제상황마저 최악으로 치닫자 파리의 중앙정부는 통제역량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마치 드골이 그랬듯, “프랑스 본토를 지키기 위해 알제리 국민투표 실시가 필요하다”고 호소한 뒤 의회해산 및 재총선 실시를 선언했습니다.
총선 국면에서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은 것은 사회당과 신임공급관계를 이루고 있던 피에르 푸자드(Pierre Poujade)의 “중소상공인옹호연합(UDCA)”였습니다. 그는 맨 먼저 차기 의회에서 사회당 출신 총리를 인준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미테랑의 국가운영역량을 크게 비판했습니다. 좌익과 우익을 넘나드는 전형적인 대중주의자였던 푸자드는 소위 “국가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증세가 서민들이 아닌 부자들의 주머니 채우기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고발하며, 자신을 “서민과 중산층의 대변자”로 칭했습니다. 가장 논쟁적인 주제였던 알제리 문제에 대해서는 “식민지는 부자들의 골동품일 뿐”이라며 “국민투표 따위 기만적인 절차 없이 즉각 독립시킬 것”을 주장했죠.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푸자드의 당이 여당 사회당(PS)과 우파 야당 공화국민주연합(UDR)을 제치고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드골주의 광풍에 가려 제대로 된 위치를 점하지 못했던 공화국연합은 즉시 푸자드를 지지했고, 그는 1971년 8월 3일 총리직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미테랑의 도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동거정부를 구성한 푸자드는 알제리를 즉시-무조건적으로 독립시키는 시행령을 작성한 뒤 미테랑에게 서명을 종용했습니다. 이로써, “오직 프랑스인만을 위한 프랑스”의 첫 막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피에누아르는, 뭐, 알아서 하라지요.
UK1. 푸른 기 휘날리며 허리띠 졸라매리!
오일쇼크와 금태환 정지 선언의 여파가 가장 적나라하게 미친 곳은 영국이었습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 설치된 전광판에서는 빨간색 불빛을 찾아볼 수 없었죠. 출범한 지 갓 1년이 넘어가는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내각은 폭발적인 물가인상과 기업들의 연이은 파산 릴레이를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1971년 10월 5일, 히스는 총리직을 사임했죠.
보수당 내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일국보수주의자 히스 총리가 내려온 상황에서, 누가 그 뒤를 이을 것인가? 재무상 이언 매클로드(Iain Macleod)? 부총리 랍 버틀러(Rab Butler)?
답은 전혀 엉뚱한 곳을 가리켰습니다. 히스 내각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고 있던 키스 조셉(Keith S. Joseph)이 국가의료보험(NHS) 개혁을 어젠다로 들이밀며 “영국병 치료”를 내세운 것이었죠. 그의 지지자이자 동료였던 교육부 장관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역시 적극적으로 찬동했습니다.
키스 조셉 장관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너무나도 큰 정부”와 “황당할 정도로 방만한 재정운영”을 지목했습니다. 의료보험제도를 위시한 복지시스템 역시 매우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이를 최대한 효율화하여 재정을 아낀다면 세금을 줄이더라도 결과적으로 적자를 늘리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오히려 기업에게 부과되는 법인세를 감면해 경기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기요, 꿩먹고 알먹고 아니겠습니까?
보수당원들은 결국 조셉을 새 총리이자 당수로 선출했습니다. 신임 조셉 총리는 대처 전 교육부장관을 재무상(Chancellor of the Exchequer)에, 조프리 하우(Geoffrey Howe)를 보건사회부 장관에, 마이클 헤젤타인(Michael Heseltine)을 산업부 장관에 임명했습니다. 모두 그의 대의를 지지하던 의원들이었죠.
세간은 이 기류를 “키시즘(Keithism)”이라 불렀습니다. 이 과감한 실험이 성공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C2. 영웅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1971년 11월 29일, 중화민국의 총통이자 ‘국부’ 장제스가 과로와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서구 열강의 침탈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중국 대륙을 다시 통일시켜 강대국으로 성장시켰으며, 마오쩌둥의 폭정으로부터 중화 인민 절반을 구원한 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4대가족과 구 군벌집안을 위시한 구세력과 야합하여 수많은 인민들을 최저생활선 이하의 임금에 매인 준노예상태로 전락시켰으며, 수십년 동안 계엄령을 동원한 철권통치를 펼친 독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원의 패자였으되 폭군이었고, 난세의 간웅이었으되 인의 장벽에 둘러싸인 ‘인간’이었습니다.
국장기간 간 새로 권력을 잡은 장징궈는 당 원로(물론 이들 중 대부분은 민중을 착취하는 재벌집단 또는 그 주구였습니다)들을 소집, 조언과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북부 수복 이후 베이징에서 조용히 실무만을 담당하며 크게 야망을 보이지 않던 장징궈였기에, 이들은 큰 의심을 품지 않았죠.
그러나 장징궈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해야만 했던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원로들이 난징에 모이는 일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터였습니다. 천리푸, 장웨이궈, 쑹즈원, 쑹즈량, 쿵링이 등 소위 4대가족 출신 대재벌, 그리고 두위밍, 허잉친, 류원후이, 푸쭤이, 마부팡, 위한머우, 양썬, 장파쿠이 등 구 군벌 또는 공신 출신의 부패한 대재벌들을 일거에 제압할 기회는 지금 뿐이었습니다.
장징궈와 은밀하게 합을 맞추던 이들은 국무원 총리 옌자간, 후야오방 등 구 공산당 출신의 몇몇 전향자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군부 내 실력자 하오보춘 장군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던 12월 9일 새벽 3시, 하오보춘 장군은 휘하 부대를 움직여 난징의 중앙통신소와 군 총참모부, 방송국, 정부청사를 장악해 재벌들과 그 본거지 간의 연결을 끊어놓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장징궈는 급변사태가 발생했다며 원로들에게 비상소집령을 내렸죠.
자리에 모인 재벌들을 기다리는 것은 두꺼운 종이뭉치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뭉치에는 큼지막한 서명란이 달려 있었죠. 그들의 개인 경호원들은 어느새 군인들에게 제압당해 구속된 상태였습니다.
“당신, 이거 감당할 수 있어?!” 이탈리아제 최고급 양장과 각종 보석 장신구를 걸친 초로의 노인, 송씨 재벌 일가의 수장 쑹즈원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장징궈를 삿대질하며 소리쳤습니다. 장징궈는 직접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그의 옆에 앉은 심복의 어깨를 쏘았습니다. 총성에 놀라 수 명의 원로들이 혼절하려 할 때, 장징궈가 입을 열었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바퀴벌레 같은 자들을 100명 쯤 제거할 각오 정도는 되어 있습니다. 서명하거나, 이 자리에서 죽으시오!”
다음 날 아침, 장제스의 관은 중산릉에 안장되었습니다. 관을 운구하는 인원은 대부분이 교체된 채였습니다. 중화의 운명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고 있었습니다.
K2. 사회와, 천주와, 검문.
이철승 총리는, 집권 직후 오일 쇼크를 맞으며 첫번째 위기에 직면 했습니다. 아무리 자유를 원한다 해도, 먹고사니즘이 충족 되지 않는다면, 그 자유를 쥐고 굶어 죽을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로의 회귀를 바라는 시민을 막기 위해, 총리는 최대한 사회와 경제 안정에 힘썼고, 신 해방지구는 그에 도움을 주기 충분했죠.
그리고, 존슨 쇼크를 맞았습니다. 신 해방지구의 개척으로 경제의 여파를 막을수 있다 하더라도, 주요 국가에서 돈줄이 묶인다는건, 미군의 움직임 억제와 함께, 안보 위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것을 의미 했습니다. 따라서, 이 교착을 타개 하기 위해, "사정 정국"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 핵심으로, 사회당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회당 혁신 세력은, 이철승 총리의 반공 이념과 달리, 교류와 협상, 대화를 주류로 하여 통일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전쟁 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개소리라고 일축 될 여지가 충분했고, 이철승 총리는 그 이상으로 활용했습니다.
사회당 해방지구당의 활동을 이적 행위로 규정하고, 군사 법정에 세워버린것입니다. 그 결과, 지구당 위원장인 김용겸, 송세동이 잡혀왔고,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성직자들의 활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교회는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것만 아닌,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한다" 는 추기경의 말을 시작으로, 사정 정국과 불심 검문의 중단과 함께, 인권 증진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물론, 이철승 총리는 민주적으로 세워졌기에, 이 목소리를 무시하진 못 할것입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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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사건.
- 아사마 산장 사건 : 남 일본의 적군파가 인질극을 벌이고, 경찰이 구출 작전을 벌이는데...
- 검은 9월단 사건 (선택 사건) : 쿠르드족이 독립에 결국 실패하고, 이란에게 극심한 탄압을 받자, 올림픽에서 이란/레반트/터키의 선수단이 테러를 당하는데...
- 피의 일요일 (선택 사건) : 봉쇄된 아일랜드에서, IRA의 테러가 빗발치고, 혼란이 극심한 와중 아일랜드의 시민이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처참한 진압이 시작되는데...
- 피에타 파괴 사건 : 헝가리 시민 라슬로 토트가, 베드로 대성당에 방문해, 망치로 피에타를 파손 시키는 사건에, 바티칸은 경악, 공산권과 바티칸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가?
- 미 대선.
- 한국 사회당 사건 후속 : 이철승 총리는 딜레마를 겪고 있습니다. 성직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하자니, 전 정권과 같다는 평판과 불신임을 받을수 있고, 그 반대로 풀자니, 지지율에 문제가 생길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이, 한국에 옳을까요?
- 대 소련 곡물 수출 : 소련은 농업 개혁에 성공하여, 식량 자급에 성공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오일 쇼크-존슨 쇼크로 촉발된 비료 수급 위기와 함께, 극심한 가뭄은 소련을 식량 부족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결국, 미국에 곡물 수출을 요구하게 되는데...
- 터스키기 사건 : ... 아무리 민권법이 가결 되지 않았다 한들, 이건 좀 심하군요. 매독의 실험체로 흑인을 쓰다니. 그것도 밝히지 않고... 이 사건의 파장은 어떻게 될까요?
- 대구 전쟁 : 아이슬란드와 영국의 2차 어업권 투쟁이 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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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고에 항상 감사 드립니다.
+ 글 접기 기능... 쓸만은 한데, 보기 편하진 않네요. 지원을 안 해줘서 태그로 억지로 해서 그런가...
+ 신나게도, 2시간 후 출근 일정이 잡혀 있어서 지금 씁니다 ㅋㅋ... 안 잡혀 있어도 했으려나요?
@E.E.샤츠슈나이더 어우... 그렇게 대입하면 진짜... 호러블하네요...
@dear0904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의 보헤미아-모라바가 되겠군...
@dear0904 정신없이 싸우던 아르헨티나는 고개를 들어보니 자유세계가 파쇼세계로 전환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931117 배우 조너선 프라이스는 들어봤는데.
@돈이 곧 진리 네 저도 들어본.그사람 때문인가?
@931117 프라이스면 콜옵의 그... 물론 다른 프라이스도 많긴 한데 (마비노기도) 느낌상 그쪽 아닐까요?
@dear0904 그러려나요?
인터넷에서 뒤적거리다 본걸수도
@E.E.샤츠슈나이더 원조 파쇼가 여기 있거늘 다들 파쇼를 참칭하러 달려오는... "7년동안 고개를 못 들고 살았소. 대체 무슨일이 있던거요?"
@E.E.샤츠슈나이더 이제 소련에서 지리놉스키가 집권하기만 기다리면 완벽하겠군요!(?)
@dear0904 ???: I’m your father…
+ 콜옵의 프라이스 대위 맞습니다. SAS가 등장했으니 한번쯤 찬조출연을… ㅋㅋㅋ
1954년.판도 변경은 크지 않지만 일부 국가 상황이 다른곳이 몇곳 있습니다.
근데 현대는 슬슬 한계인가...19세기도 레드오션 같고...전근대는 십자군 원정이 성공했다든가.몽골이 금나라에게 패해 제국 건설에 실패했다든가.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했다든가.등등 소재는 나오는데...
그런데 다음 화는 언제쯤 올리실 예정인가요?
지금 쿠르드랑 스웨덴 때문에 대기중인거 아닌가요?
@931117 아뇨 작성 대기는 투고 안 나올 느낌이니, 내가 써야겠다 확정? 느낌입니다. 그 둘은 제가 쓰는건데, 오늘 빡세서 거의 퇴근 하자마자 셋팅만 쳐놓고 뻗어서...
최대한 내일 써보도록 할겁니다. 못해도 토요일이 목표. 일요일이 최악이긴 한데...
+ 기다리는것도 하나 더 있는지라. 오늘 컨디션과는 별개로.
@dear0904 진척도를 알수 있을까요? 한두개는 투고로 전환하면 좀더 일이 쉬워질 수도 있으니..?
+ 다음화나 다다음화쯤 영국 쪽에 상징적 이벤트를 하나 준비 중입니다. 물론 아일랜드 사건과 연관이 있고… 전쟁이나 선거 쪽은 아니지만 쇼킹한 사건이 되겠군요. ㅎㅎ
@E.E.샤츠슈나이더 작성과 편집을 동시에 칠때가 많다보니, 쿠르드, 스웨덴, 사회당 셋 다 플롯은 있으되, 작성은 아직 못했습니다. 나머지 투고분의 경우는 초도 편집만 해둔 상태네요 (오타 확인, 들어갈 개월수 결정).
+ ㅋㅋㅋ... 다음화 사건 목록에 아일랜드 써놓긴 했는데, 빼놔도 되겠군요. 마약과의 전쟁 밑에 살짝 써놨는데.
@E.E.샤츠슈나이더 혹시 여왕 폐하 암살 또는 암살미수...?
@dear0904 쿠르드와 스웨덴의 경우 좀 생각중인 플롯이 있긴 한데. 써서 올려볼까요?
@돈이 곧 진리 그정도 막장은 아닙니다. ㅋㅋㅋㅋ
@돈이 곧 진리 플롯은 저도 있는데, 올려주시면야 좋죠.
[진정한 독립?]
쿠르드족은 이란 내전의 혼란을 틈타 레반트 연방의 도움을 받아서 민족사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란의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한정되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앞길이 밝다곤 하지 못하겠군요.
내전에서 승리한 이란 제정은 호시탐탐 쿠르디스탄을 재병합할 기회만 노리고 있고. 터키의 경우 자국 내의 쿠르드족들에게까지 불똥이 틜까봐 좋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입니다. 자신들의 뒤를 바주던 레반트 연방 역시 로자바, 모술 등 쿠르드족 다수 지역에서 쿠르디스탄 편입 운동이 일어나며 자신들에게 보내던 지원 등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중동의 정세가 다시 한번 폭풍 속으로 빠져들 기미가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이들은 독립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시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게 될까요? 해답은 오직 알라만이 아실 뿐입니다.
쿠르드족 플롯을 이정도로 약간 짜봤습니다.
이거에... 음. 조금 잔혹할지 모르겠지만, 제목을 <수용소 열풍> 같이 짓고, 중공 위구르에서 일어나는 일이 터키 쿠르드족에게 일어났다고 하면...
@dear0904 쿠르드족 인구가 대충 터키 인구의 15% 정도는 된다는데, 위구르처럼 하면… ㄷㄷㄷ
@E.E.샤츠슈나이더 미친자들의 세계... 긴 한데, 15퍼면 높긴 하네요. 아르헨도 8~10퍼대 였을거라 보고 있는데 ㅋㅋㅋ...
@dear0904 이스라엘이 자국 인구의 60%에 가까운 팔레스타인을 억압하고 있긴 한데....
[수난과 고난의 시대]
레반트 연방과 아랍 삼국동맹 간의 제2차 중동전쟁 및 이란 내전의 결과, 쿠르드족은 독립에 성공했습니다. 비록 이란 북서부의 작은 영토만을 실효지배하고 있지만, 이들은 쿠르드 인민공화국을 선포해 정부를 꾸려나가고 있었죠. 다만 이들의 미래가 그다지 밝다고 하긴 어려웠습니다. 쿠르드 인민공화국의 UN 회원국 자격을 인정하는 국가는 대부분 동구권으로 한정되었으며, 그마저도 레반트 연방 내 쿠르드족 다수 거주지역에서 인민공화국 편입 바람이 거세지자 여러 국가들이 승인을 철회했기 때문입니다. 실지 수복을 노리는 이란 제국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요.
레반트에서 지원을 줄이며 쿠르드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동안, 또 하나의 이해관계국인 터키는 더욱 심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뇌뉘 사망 이후 수립된 군사정권은 “민족문제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동, 남동부 지역에 거주 중이던 쿠르드족을 서부로 대거 강제이주시키거나 게토에 가두는 정책을 실행 중입니다. 이들은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황무지에 인프라도 없이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져 턱없이 작은 게토에 살아야 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어어... 아르메니아 대학살 Again인가...
이 정책은 터키 내 쿠르드족을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습니다. 이에 저항하던 쿠르드인 수만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죠. 쿠르드 인민공화국 측은 당연히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련이나 레반트로부터 외교적 지지을 얻을 수 있었을 뿐 실효적 조치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레반트 연방 내에서 일부 바트당 과격파를 중심으로 터키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의견이 있긴 했습니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도부 대부분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터키가 쿠르드인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버리고 학대하면 할수록 쿠르드 민족의 결집력은 낮아질 것이고, 그렇다면 쿠르드 인민공화국의 대 레반트 의존도를 높여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자국령 쿠르드인 거주지역과 합친 “쿠르드 자치령” 계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죠.
중동의 정세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패권국인 레반트는 칼날 위를 걷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합니다. 쿠르드인들은 조국을 얻었지만 자유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dear0904 르완다 내전 당시 투치족이 대략 15퍼 정도긴 했습니다.. 100일만에 110만명을 죽여댔던…
@E.E.샤츠슈나이더 ... 피가 흐르는군요... 영국이 민족 갈등 터트린곳이 한 두곳이 아닌데, 여기도 그랬나? 싶을 정도.
@dear0904 당장 아프리카에서 민족 갈등 안터트린 열강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931117 너무 빨리 쫒겨나서 뭘 할수 없었던 네덜란드나 디바이트 앤 룰이 아닌 루소-트로피칼리즘을 내세워 식민지를 자국에 편입하려 한 포르투갈 정도...?
@돈이 곧 진리 네덜란드는 보어인 문제가...?
포르투갈은 대신 식민지 전쟁에 앙골라 내전난...민족 갈등은 모르겠는데.
@돈이 곧 진리 독일도 포함? 전쟁영웅만 보면 그런거 안했을거 같은데요.
+ 물론 전 세계로 늘리면 뭐...
@dear0904 독일은 나미비아 헤레로족 학살 및 탄압이 있는지라.
@dear0904 르완다는 벨기에 작품입니다. 손목국 위명 어디 안가죠.. 허허
+ 심지어 프랑스는 학살을 부추기기까지 했던..
@E.E.샤츠슈나이더 아 맞다 호텔 르완다... 그때 듣고도 까먹었군요.
+ ... 햐... 역시 열강놈들은 양심이라곤...
9화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