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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첫 출근을 앞둔 신임 변호사야.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최연소로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2년간의 사법연수원 수료 동안에도 늘 수석을 도맡아 했어.
주위 많은 사람은 그런 내가 검사가 되길 바랐지만
처음 법을 공부하던 때부터 억울한 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변호사가 되자고 다짐했었고
다행히 우리나라 최고로 손꼽히는 로펌에서
내 다짐의 첫발을 뗄 수 있게 됐어.
첫 출근이라 긴장된 마음으로 건물 로비로 들어서.
국내 최고 로펌답게 그 위용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대단해.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 틈에 껴 엘리베이터에 올라.
변호사 개인 사무실이 모여 있는 6층에 내렸어.
내 모습을 멀리 서 있던 로펌 대표님이 보곤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다가
대표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듯해.
그때
"아, 저기 오네요."
대표가 눈짓하는 쪽을 보는데
한 여자가 걸어 와.
"으 머리야."
얼굴에 피곤을 한가득 담은 채
반쯤 감긴 눈을 간신히 뜨며 자기 자리로 가 앉아.
저 여자구나.
면접날 내게 로펌에서 가장 유능한 조사관을 배정해주겠다던
대표의 말이 떠올라.
걸어오는 짧은 순간이지만
큰 키에 예쁜 몸매 서구적인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와.
대표는 이따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자며
우선 나를 내가 쓸 방으로 안내해.
그리고
그제야 여자가 내 뒷모습을 가만히 봐.
그런 여자를 보며 동료가 물어.
"어때?"
동료의 질문에도 시선은 계속 내 뒷모습에 고정해.
"예뻐."
티를 내지 않으려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사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는 날 신경 쓰고 있었어.
오전에 정신없이 업무 인계를 받고
긴장된 마음을 달래려
점심시간을 핑계로 잠시 회사 근처 공원을 왔어.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가는데
"여기 계셨네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봐.
여자가 가볍게 눈인사를 해.
아침에는 볼 수 없던 여자의 미소가 눈에 띄어.
"인사가 늦어 죄송해요.
제가 낯을 좀 가려요, 경계심도 많구요."
솔직히 자기 생각을 전하는 여자가 밉지 않아.
나는 웃어 보이며 물어.
"괜찮아요, 생각보다 그 경계심 빨리
풀어진 것 같아서 다행인데요?"
내 말에 여자가 나를 빤히 봐.
"마음에 드는 사람한텐 금방 풀리거든요."
마음에 든다는 대답과 함께 여자가 활짝 웃어.
웃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가 확연한데
분명한 건 둘 다 매력적인 것 같아.
나는 여자가 내민 손을 잡아.
여자는 나이는 한 살 많지만
실전 경험은 한참이나 앞서기 때문에 배울 점이 정말 많아.
로펌 전반적인 상황부터 재판 준비를 위한 기본 등등
무거운 내용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 필요한 것만 내게 알려줘.
왜 그 많은 변호사들이 여자를 탐내는지 알 것 같아.
며칠 후
나는 신임 변호사치곤 꽤 큰 사건을 맡게 됐어.
아무래도 기대와 관심을 많이 받고 있으니
다른 변호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걸 느껴.
신경이 쓰여 방 안에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자가 들어와.
"신경 쓰지 마요,
기죽을 필요도 없고.
내가 여태 본 변호사 중에 제일 잘하고 있는데요?"
여자의 기분 좋은 위로에 고마워 웃음이 나.
"이제야 맘이 놓이네요.
웃는 얼굴 보니까."
나를 따라 환하게 웃는 여자가
오늘따라 더 예뻐.
오후에도 쉴 새 없이 재판 준비를 위한 자료를 검토하고
증거들을 모아 보느라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겼어.
서둘러 챙겨 사무실을 나서.
그렇게 집 앞에 도착했는데
닫혀 있어야 할 문이 반쯤 열려 있어.
불안감에 잔뜩 긴장한 채 집으로 들어가는데
어질러진 집 안을 보고 놀라 몸이 굳어.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는데
차마 1번을 누르지 못하겠어.
그리고 여자가 떠올라.
"도, 도둑이... 든 거 같아요.
혹시 지금 좀-"
무서움에 목소리가 덜덜 떨려오는데
여자가 나보다 더 놀라 다급하게 말을 끊어.
"지금 갈게요, 그대로 있어요!"
여자는 망설임 없이 벗던 옷을 다시 입고 뛰쳐나가.
차에 올라타 전속력으로 엑셀을 밟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마음이 다급해.
한 10분쯤 지났을까.
거실에서 조금씩 걸음을 옮겨 방 안을 확인해.
역시 서랍이며 책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어.
펼쳐진 책들을 정리하려 드는데
갑자기 누군가 거실을 빠르게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려.
내가 쫓아 나가.
계단을 따라 뒤를 쫓는데 내 속도가 너무 느려.
놓치나 싶은 생각이 스치며 1층에 다다르는데.
"움직이지 마!"
여자의 목소리야.
당황한 내가 멍하니 보고만 있는데.
"괜찮아요? 다친데는?"
바로 내 상태부터 묻는 여자야.
도둑은 경쟁 로펌에서 보낸 거였어.
엊그제 여자가 중요한 증거 자료라며 내게 준 서류가 있었는데
그걸 노린 거야.
증언 녹음을 확보하고 도둑은 놔줬어.
그리고 나와 여자는 다시 집으로 올라와.
난리 통에 벌써 시간이 열두 시가 훌쩍 넘은 거야.
"너무 고마워요 오늘.
나 때문에 이 늦은 시간까지...
이제 그만 가봐야죠?"
내가 망설이다 말해.
사실 아직 진정되지 않은 마음에
좀 더 있어 줬으면 싶지만 내 생각만 할 순 없어.
그때
"그냥 오늘... 같이 잘까요?"
여자의 갑작스런 제안에 순간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어색해지는데.
그런 나를 보고 여자가 귀엽다는 듯 웃어.
"안 잡아먹으니까, 표정 풀어요."
내 긴장을 풀어주려 일부러 장난스레 말하는 여자야.
그 마음이 느껴져 고마워.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여자와 나란히 누웠어.
이사를 하고선 여자친구와도 누워본 적이 없는데
옆에 누운 여자를 보며 기분이 묘해져.
그리고 여자 역시 자꾸만 가슴이 뛰어.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손을 잡아.
순간 당황한 내가 여자를 보는데.
"떨지 말라구요,
아직도 무서워하는 거 같아서."
아프지 않을 만큼만 힘주어 손을 잡아주는 여자야.
"그리고 앞으로도 무슨 일 생기면
오늘처럼 나 불러요.
언제든 올게요."
그런 여자의 말에 울컥해지고
차마 부를 수 없는 애인의 얼굴도 떠올라
눈물이 고여.
다음날
출근을 해서 바쁘게 일을 하는데도
어젯밤 일들 때문인지 좀처럼 집중이 안 되고 피곤해.
오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게 오후가 됐고
관련 재판 사례들을 살펴보는데 점점 눈이 감겨.
30분쯤 더 지났을까.
자료를 주러 여자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여는데
엎드려 잠이 든 나를 발견해.
여자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잠시 가만 보던 여자는
들어와서 옆에 있던 담요를 덮어 주고 블라인드를 내려.
지나다니는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배려야.
여자는 관련 조사를 위해 바로 외근을 나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났어.
-똑똑
누군가의 인기척에 그제야 눈을 뜨는데.
"일어나시지 말입니다."
내가 너무 놀라서 멍하니 보고만 있는데
여자친구가 그런 날 보며 미안해서 웃어.
"빨리 온다고 왔는데
그래도 늦었다.
변호사 된 거... 축하해 애인."
갑자기 등장한 놀라움도 잠시
3개월이 넘게 혼자였던 시간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어제 일까지 떠올라 금세 눈물이 핑 돌아.
자리를 박차고 여자친구에게 안겨 울고 말아.
감정을 추스르고 우린 근처 카페로 갔어.
커피를 마시며 그제서야 다시 여자친구를 가까이 마주해.
헬쑥해진 여자친구의 얼굴이 맘이 아파.
여자친구가 멋쩍게 웃어.
여자친구는 군인이야.
군 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늘 작전상 말할 수 없어.
짧으면 한 달 길면 두세 달씩 연락도 닿지 않을 정도의
중요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이번엔 여자친구를 만난 후 가장 길었던 헤어짐이었고.
여자친구는 그런 내 걱정을 덜어주고 싶어.
"못 자고 못 먹은 얼굴이
이 정도로 예쁠까 싶지?"
여자친구의 애교에 결국 웃음이 터져.
덩달아 환히 웃는 여자친구를 보며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라.
대학 입학 후 첫 동기 모임이 있었어.
몇 개월 함께 수업 듣고 마주한 사이들이라
어색함 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어울리는데
멀리 다른 테이블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어.
"아 너 처음 보나? 우리 과 ROTC잖아."
옆에 앉은 동기의 말에 생각이 났어.
들어본 적은 있었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머물러.
상상 속 군인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게 곱고 예뻐서.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가 무르익고
계속 게임을 하고 벌주를 마시기를 반복해.
나는 원래 술을 못 하기 때문에
지켜만 보다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참해.
그런데 내가 걸리고 만 거야.
"흑기사 한 번만! 응?
소원 들어줄게 진짜!"
거의 애원하는 내가 재밌는 동기들은
절대 대신 마셔줄 생각이 없어.
체념한 채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드는데.
"흑기사."
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낚아채
보란 듯이 술을 들이켜.
옆에서 친구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놀란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바라보고만 있는데
동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아.
"우리 처음 보지?"
대신 마신 술 때문인지 금세 볼이 붉어진 동기가
조금 풀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어.
그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려와
차마 입은 못 떼고 고개만 끄덕여.
동기는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의자를 내 앞으로 바짝 당겨 와.
"앞으로 더 자주 보고 싶은데..."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야.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뛰는데.
"사귈래? 이게 내 소원."
난생처음으로 받아본 고백에 얼어붙은 것도 잠시
이 말을 하려고 흑기사를 자처했구나 싶은 생각에
그 마음이 고맙고 예뻐.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던 나를
한순간에 납득시켜버린 이 동기가
지금의 여자친구가 된 거야.
학교 수업 외에 훈련이 많은 여자친구라
데이트할 여유가 넉넉하진 않았지만
여자친구는 훈련이 없는 모든 시간을 나를 위해 썼어.
하루는 여느 때처럼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에 들어섰어.
자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여기!"
누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여자친구가 환히 웃으며 앉아 있어.
"어떻게 된 거야? 훈련 벌써 끝났어?"
내가 놀라서 옆에 앉으며 물어.
그런 내 모습에 뿌듯해져 여자친구가 대답해.
"엄청 달렸지.
같이 수업 듣고 싶다며."
사귀고 나서 한 번도 같이 수업을 들을 수가 없어
여자친구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섭섭했어.
지나가는 말로 투정을 부렸었는데
그게 여자친구의 마음에 남아 미안했던 거야.
늘 털털하고 담담한 여자친구라
작은 거까지 신경 쓰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마음 씀씀이에 뭉클해져.
또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이었는지
군인을 꿈꾸는 여자친구라 왠지 표현이 서툴고
감정도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아니었어.
내가 장난치려 친구의 손이라도 잡으면
"아 진짜, 손은 놓고 하지?"
하며 발끈해서 질투를 해.
그 모습이 내 눈엔 귀엽고 또 설레.
어느 때는 훈련이 며칠씩 이어져
얼굴을 보기는커녕 전화통화조차 어려운데
어쩌다 어렵게 전화라도 하게 되면
"보고 싶어 죽겠네,
넌 훈련 받느라 내 생각할 겨를도 없지."
내가 풀이 죽어 퉁명스럽게 물어.
그런 내가 사랑스러워 여자친구는 웃음이 새어 나와.
"참나, 너야말로 모를걸.
내가 누구 생각하면서 버티는데."
여자친구의 대답에 울컥해져.
우리는 남들보다 힘들고 어렵게 만날 수 밖에 없지만
그래서 더 애틋했어.
그렇게 대학 졸업 후
서로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 약속했고
그 덕분에 난 수석으로 사법연수원 졸업을 했고
여자친구는 동기들을 제치고 먼저 중위로 승급 할 수 있었어.
나는 진심으로 기뻤고 벅찼어.
여자친구가 얼마나 힘들게 버텼고
간절히 원했던 꿈이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었던 거야.
촉망받는 군인은 늘 여러 작전에 투입되기 마련인데
그 작전이란 건 나처럼 민간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고 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는 걸.
그 때문에 우린 두 달에 한 번
길면 석 달에 한번 밖에 볼 수가 없어.
오늘처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가,
그니까 일찍 와."
여자친구의 말에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어.
퇴근을 서둘러 기다리고 있을 여자친구 생각에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해 먹고
내가 뒷정리를 하는데.
"설거지 내가 내일 한다니까."
여자친구가 옆에 서서 왠지 안절부절못하며 말려.
"어차피 손댔는데 해버려야-"
대꾸하며 거품을 짜는 내 손을 여자친구가 낚아채.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닐 건데."
여자친구의 말에 그제야 아차 싶어.
민망하면서도 그런 여자친구가 귀여워.
못 이긴 척 여자친구와 함께해.
그렇게 다음날
출근을 위해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려 눈을 떠.
그런데 옆자리가 휑하니 비워져 있어.
'미안 나 긴급이라 먼저 가.
전화할게.'
여자친구가 남긴 쪽지를 확인해.
이번에도 역시구나...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
애써 출근 준비를 서둘러.
그렇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예약에 없던 의뢰인 한 명이 기다리고 있어.
여자와는 눈으로만 인사를 나누고 바로 회의를 시작해.
그런데
회의가 진행될수록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아.
의뢰인이 함께 집으로 가서 더 얘기를 나누길 부탁했고
그에 동의한 내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거야.
얘기를 마치고 의뢰인이 먼저 나가고
나도 뒤따라 나서는데 여자가 내 팔을 붙잡아.
"흔한 경우 아니에요.
자기 사적인 공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건 의도가 있을 확률이-"
다급히 말하던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곤 말을 멈춰.
본 적 없이 표정이 굳어진 나를 본 거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겠지만
더 묻지 않고 조용히 잡던 팔을 놔줘.
나는 의뢰인과 함께 의뢰인의 집으로 향해.
낡고 오래되 보이는 한 아파트로 들어가 현관문을 여는데
안에서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 내 상체를 잡고
의뢰인이었던 여자는 순식간에 한패가 되어 내 가방을 뺏어.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껴 소리를 질렀어.
그런 나를 제지하려 여자가 내 뺨을 때려.
그래도 내가 발버둥 치자 찬물을 뿌리며 알 수 없는 욕을 퍼부어.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며
눈물이 흐르고 눈을 질끈 감는데
갑자기 빠르게 현관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와
여자와 남자를 차례로 쓰러뜨리곤
내 손을 잡아끄는 익숙한 느낌에 고갤 들어 보는데.
여자야.
여자의 손에 이끌려 함께 밖으로 나와 달려.
여자의 차가 보이고 그제서야 여자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놔.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내가 그대로 주저앉아.
그런 날 보며 여자는 화가 나고 속상하지만 꾹꾹 눌러 참아.
"벗어요, 감기 걸려."
여자가 망설임 없이 겉옷을 벗어 나에게 걸쳐.
나는 물에 젖어 느끼는 추위보다도
방금 전 그 공포감에 아직도 온 이 떨려.
오늘따라 감정 조절을 할 수가 없었어.
늘 반복되는 애인의 빈자리가 유난히 외롭고 서러워서.
그 감정이 지나쳐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게 만든 거야.
"미안해요 정말, 나 때문에-"
내가 속상해 고개를 푹 숙이며 얘기하는데.
순간 여자가 몸을 숙여 나를 끌어당겨 안아.
그리고는 달래듯 내 등을 천천히 토닥여.
"잘못은 방금 그 사람들이 한 거죠.
변호사님 탓 아니에요.
근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힘들어하지 마요.
보는 사람 속상하니까."
오는 내내 여자는 계속 바랬어.
제발 내가 무사하길.
나한테 더 안 좋은 어떤 일이 생겼다면
끝까지 나를 말리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했을 거야.
그런 여자의 따뜻한 위로에 눈물이 왈칵 터져.
그런 내가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워
여자의 눈시울도 함께 붉어져.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어.
자리에 앉아 서류를 살피는데도
어제 일이 잔상처럼 남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그때
"일찍 출근하셨네요?"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평소처럼 똑같이 맑게 웃어 보이며
커피와 자료를 내려놔.
"오늘부터 속도 내셔야 할 거예요
재판이 다음 주니까."
여자의 말을 들으며 눈을 마주치는데
자꾸 어제 울고불고 하던 모습이 떠올라
민망하고 부끄러워져.
"그.. 어제 일은-"
"어제 일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전혀 모르겠단 표정을 짓는 여자야.
내가 어리둥절해서 가만 보는데
그런 내가 여자는 귀여워.
"기억이 안 나서, 이만."
끝까지 모른다며 나가는 여자를 보며
나는 고마움에 미소가 번져.
내가 민망해할 걸 알고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는 걸.
여태껏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가장 먼저 달려와 지켜준 건 여자였어.
어느덧 그런 여자가 익숙해
나도 모르게 기대고 싶고 더 옆에 있었으면 싶어져.
그날 오후
퇴근한 여자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바(bar)로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시키고
막 잔을 비우는데 낯선 남자가 옆자리에 앉아.
"메일 잘 받았습니다."
남자의 수상한 첫마디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여.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야.
"최종 타겟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남자는 넓적한 봉투 하나를 여자의 앞에 놓고 가.
여자는 왠지 봉투를 열기가 두려워.
망설이다 봉투를 뜯는 여자의 손이 떨려.
봉투 안의 자료들을 꺼내는데 내 사진이 바로 눈에 들어와.
사진을 보는 여자의 눈빛이 슬퍼.
결국 자료를 다시 봉투에 넣어버리는 여자야.
"올 게 왔을 뿐이잖아."
애써 담담해 하는 여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일을 하며 한 번도 공과 사를 혼동해 본 적이 없었어.
나라는 타겟을 만나기 전까진.
그리고 지금은 후회가 돼.
시작하지 말걸 마음을 주지 않을걸.
날이 밝고
잠을 설친 여자가 회사 앞 정류장에 일찌감치 와있어.
마침 반대편 정류장에서 내린 내가 여자를 봤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나를 보지 못해.
그때
여자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물어.
그런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얼른 횡단보도를 건너.
그리고 여자의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담배를 낚아채며 옆에 앉아.
"웬만하면 끊죠? 몸에 해로운 걸 뭐하러"
여자가 놀라서 보는 데 나야.
여자는 애써 울컥하는 마음을 숨겨.
"못 끊겠네, 그래야 계속 내 걱정할 거 잖아요."
여자의 말에 순간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느라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어.
그런 내가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 여자야.
"모르는 게 약이라구요."
여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그리곤 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다시 빼내 가.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며
방금 여자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 봐.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고
드디어 재판 당일이 됐어.
준비한대로 차분히 변론을 했고
순간순간 위기가 올 때는 뒤에서 지켜봐 주는
여자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어.
결국 재판에서이긴 거야.
긴 재판이 끝나고 나오는데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
"최고였어요, 진심으로."
여자가 날 보자마자 확 품에 안아.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재판으로 긴장됐던 몸과 마음이 풀어져.
"이제 안기는게 자연스럽네"
여자의 말에 민망해져 얼굴이 붉어져.
여자의 품에서 벗어나며 장난스레 여자를 흘겨봐.
여자는 그런 내 모습이 또 재밌고 예뻐 웃어.
그런 여자를 보며 나도 어느새 따라서 웃고 말아.
그런데
첫 재판이라 꼭 와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서
보고가 끝나고 미친 듯이 달려온 여자친구야.
서둘렀지만 이미 재판은 끝나가는 시간이라
대신 나를 놀래켜 주려고 잔뜩 설레 기다렸는데
차마 다가가질 못하겠어.
"자꾸 놓친다 널..."
여자친구가 돌아서.
이날 저녁
재판 승소 기념으로 로펌 전체 회식을 하고
여자와 둘만 조용히 자리를 옮겼어.
여자와 사적으로 술자리를 갖는 건 처음인 거 같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연거푸 와인을 마시니
재판이 끝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옆에 있는 사람이 좋은 탓인지 모르게
술기운이 올라.
하지만 여자는 아무리 마셔도 취해지지 않아.
마음은 무겁고 감정은 복잡해.
"우리 지금부터 말 편하게 할까요?
사적인 질문도 막 하구."
취해서 말이 어눌해진 내가 여자는 귀여워.
여자가 고개를 끄덕여.
"연애... 안 해요?
인기 진짜 많을 거 같은데."
예상하지 못한 내 질문에 여자가 잠시 당황해.
그러다 결심 한 듯 나를 보며 대답해.
"하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이번엔 여자의 답에 내가 당황해.
당당하게 나를 빤히 보는 여자의 눈빛이 왠지 자꾸
그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거 같아서.
심장이 빠르게 뛰어와.
"근데... 이미 다른 사람이 있어.
내 마음이 부담이 될 거야."
"그래도 포기가 안 되면, 어떡할까."
여자의 질문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거 같은 여자를 보며
감정이 요동쳐.
하지만 마음을 애써 다잡아.
"그러지 마요,
잊고 더 좋은 사람... 만나야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힘들게 밀어내.
그런 내 대답에 여자는 끝내 고개를 돌려.
그리고는 알았다는 듯 끄덕여.
다음날
출근을 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직원들이 한 책상 앞에 모여 있어.
누군가는 급히 전화를 하고
누군가는 충격을 받은 듯 머리를 감싸기만 해.
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그 책상은 여자의 자리야.
"무슨 일이에요? 왜 다들 여기에..."
여자의 사직서야.
내가 그대로 몸이 굳어 멍해져.
그때 여자의 자리에서 한참 컴퓨터 자료를 뒤지던 직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해.
"희한하네요, 더 중요한 자료도 많았는데
내부 보안 문서는 건드리지 않았어요.
자잘한 판례들이랑 계약조건, 1급 고객명단 정도가 다예요."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특히 변호사님 관련 자료는 아예 없네요.
다행이에요."
순간 여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어제까지
필름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얼마나 여자를 믿고 의지했는데.
그런 여자가 스파이였다니.
그런데 왜 밉지가 않을까.
나와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손대지 않은
여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여자가 사라지고 난 이틀째 병가를 냈어.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이 마음이 공허해.
이틀 내내 여기저기 여자의 소식을 물었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해.
여자가 없는 지금 이렇게 힘든 걸 보니
나한테 여자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아.
그런데 갑자기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지만
곧 또 작전에 들어간다는 여자친구의 말에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싶어 나가.
많이 수척해 보이는 내 얼굴을 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친구가 물어.
"너무 갑자기 그만둬서...
연락도 안 되고 걱정도 되고-"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나를 보며
여자친구의 마음이 무너져 내려.
"그래서... 다시 보고 싶어?"
여자친구의 말에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어.
"재판 날 봤어, 너랑 그 여자."
끝내 말을 하고 마는 여자친구야.
그 날 그렇게 가고 나서 단 한 번도 서로 연락하지 않았어.
함께한 세월이 긴 만큼
그 마음의 동요도 금세 느낄 수 있었던 거야.
그간 힘들어했을 여자친구가 눈에 선해 마음이 아파.
"내가 널 혼자 너무 외롭게 했어.
그래서 잠깐 흔들릴 수 있어, 그래.
그래도... 아예 가지는 마."
여자친구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
미안해할 사람은 어쩌면 나인데
오히려 나를 이해한다는 여자친구에게
더는 상처 줄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게 3주라는 시간이 흘렀어.
나는 전과 같이 회사를 다니고
여자친구는 작전을 끝내고 돌아왔어.
작전에서 돌아온 여자친구는 복귀하자마자
본인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해.
그리고 사령관에게로 향해.
"군복... 벗겠습니다."
담담하게 자기 뜻을 전하고 나오는데
끝내 주저앉고 말아.
내 옆에 더 많이 있어 주고 싶어
자신의 오랜 꿈인 군인을
여자친구가 그렇게 그만뒀어.
며칠 후
나는 다른 로펌에서 준비하던 재판을 넘겨받게 됐어.
이전 담당 변호사를 만나러 그 로펌 근처 카페로 향해.
자리를 잡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아.
그렇게 애타게 찾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어.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그런 날 보지 못하고 여자는 앞에 앉은 동료와 얘기를 이어가.
"부탁이야, 그 애는 놔둬.
유능한 변호사야.
공들여도 무너질 사람 아니라구."
"난 걔가 어떻게 되는지는 관심 없어.
니가 살아야 될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자료 넘기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자 응?"
여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동료의 마지막 제안이야.
나를 지키고 여자는 모든 걸 다 잃었어.
받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다니던 회사에서도 쫓겨났고
스파이로 낙인 찍혀 다신 재기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아.
지켜보던 동료가 결국 언성을 높여.
"왜 이러는데?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도대체!"
잠시 정적이 흘러.
"좋아해.
내가 많이 좋아해 그 애를.
그래서 그랬고
그래서... 괜찮아."
담담한 여자의 고백에 동료는 할 말을 잃고
듣던 내가 눈을 질끈 감아.
더는 못 참겠어.
내가 여자에게로 달려가려는데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려.
여자친구의 번호야.
잠깐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아.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충성."
1.김지원
2.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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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헐... 졸라기다렸는데....
222 이게 얼마만이야ㅜㅜ
나 말고 그냥 저 둘이 사귀면 안돼???
아..... 아... 제발... 거통스러워... 나는 왜 하나지... 내가 둘이었다면...
와...완전 몰입해서 읽었다.
아 진짜 장난아니다... 둘다 너무 애틋해ㅠㅠㅠ
아이건 아니야ㅠㅠ 못고르겠어욥ㅠㅜ
와:...... 나는 김지원...... 초반엔 나나한테 거하게 치임 ㅠㅠㅠ
대박...하.......엄청 몰입했다.....못골라ㅠ....
ㅅㅂ.....ㅅㅂ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살최연소변호사인데..대표가 뛰어오고 동료도 21살ㅋㅋㅋㅋㅋ....
와.. 개오랜만이다 왜안오지 맨날궁금했었는데 이번에도 못골라...ㅜㅜㅜㅜㅜ
아 어려워.. 그래도 난 김지원
진짜 오랜만에 글 써줬네ㅠㅠㅠ왜 이제야 왔어 기다렸는데ㅠㅠ
너무 어렵다 이거... 선택못하겠어ㅠㅠ둘 다 너무좋은데 어케ㅠㅠ
미친............ 못고르겠다......................
김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