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거듭남과 전환기(공백기) 3 / 전환기의 깨달음에서 주님의 안식으로
- 싸움의 끝에서 비로소 알게 되는 안식
AC 8494, 8505, 8506
창 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출 16:22-30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지 않아야 했던 영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곱째 날에는 만나를 거두지 않았는데,
이는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떤 투쟁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AC 8494, 8510 연산
여기서 만나를 거두는 행위는
인간이 자기 힘, 곧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얻고
악과 싸우려 하는 능동적인 노력을 생각하게 한다.
광야에서는 매일 만나를 거두어야 했다.
그날 필요한 양식을 얻기 위해 사람이 직접 나가서 거두어야 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거부하며,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만나를 거두지 않는다.
더 이상 인간 쪽에서의 투쟁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의 상태가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그렇지는 않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 자체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어내려 하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문제는 인간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것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데 있었다.
따라서 진짜 안식의 상태로 넘어가기 직전에는
이 ‘거두는 행위’를 멈추는 전환이 필요하다.
즉, ‘내가 무언가를 해서 변화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을 행하려는 의지나 인간의 협력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내가 그 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내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과 능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상태를 말한다.
반대로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거부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다만 그것을 행하면서도 그 생명과 능력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악과 싸우는 것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싸움에서 자신을 어떤 위치에 두느냐에 있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힘과 생명의 근원이
나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진리로부터 선으로,
그리고 선으로부터 다시 진리로 나아가는 상태의 변화는
영적 성장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AC 8505
거듭남 이전에는 사람이 진리로부터 행동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선으로부터 행동한다.
진리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은
‘이것이 맞으니까 이렇게 해야지’라고 진리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며 사는 것이다.
아직 내면의 선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의지가 그 진리를 따라가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선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은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규칙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형성된 선으로부터 삶이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진리가 더 이상 외부에서 나를 억지로 끌고 가는
명령처럼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선과 결합하여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전환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남의 전환기에서 겪는 혼란은
바로 이 작동 방식이 바뀌기 때문에 일어난다.
지금까지는 진리를 붙들고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면서 애써 행동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해도
잘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치 신앙이 멈춘 것 같고,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전의 방식이 더 이상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기시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공백처럼 느껴지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새로운 상태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생각하게 하는 이유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엄연한 간격이 존재한다.
이미 안식의 땅에 들어서서
선(Good)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에 이르면 좋겠지만,
그 전까지는 진리를 등불 삼아 험난한 길을 걷는
‘광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시기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지를 다해 악과 싸우려 애쓰게 된다.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거부하며,
진리에 따라 살기 위해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하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절망의 끝에 서야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전력투구하며 싸워온 인간이
전환기에 이르러 이제 싸움 자체를 멈추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싸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내가 싸워야 하지만 그 싸움의 생명과 능력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내가 선을 행해야 하지만 그 선의 근원 역시
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이 필요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힘으로 싸우려고 한다.
그리고 싸울수록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무너지는 자리까지 가야만,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 단순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인 진리가 되기 시작한다.
노동에서 안식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피로는
바로 이 점을 생각하게 한다.
내 힘으로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려고 할수록
우리는 지치게 된다. 그러나 그 피로 자체가
단순히 ‘싸움으로는 목표를 이룰 수 없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신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영적인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는 과정일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명령하신 것은
단지 쉬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처절하고도 무거운 노력을 이제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법을 배우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거두며
‘내일은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듯 영적 불안에 시달릴 때에도
주님은 이미 다음 날의 양식을 알고 계신다.
그 증거로 여섯째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소보다 두 배의 만나가 주어졌고,
일곱째 날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않았다. 출 16:22-30
이것이 사람의 눈에는 일곱째 날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행위가 있었다.
우리의 영적 삶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이제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빈손을 내밀 때,
그 빈손은 반드시 실패의 표시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던 마음이 조금씩 물러나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거두어 쌓아 올린 영적인 만나보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시는 생명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윗은 평생 전쟁을 치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수많은 싸움을 감당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물리치게 하셨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상 28:3,6
“너는 피를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을 하였느니라..
네 아들 솔로몬이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
다윗의 시대와 솔로몬의 시대는 서로 단절된 두 시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싸움의 시대를 맡기셨고,
그 다음에는 솔로몬에게 평화의 시대를 맡기셨다.
그러므로 다윗이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이어서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된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윗에게는 싸워야 할 일이 있었고,
솔로몬에게는 그 싸움 이후의 평화 가운데 성전을 세울 일이 있었다.
두 역할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서로 이어져 있었다.
이 점은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있다. 그때에는 싸워야 한다.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거부해야 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 우리의 의지와 결단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교회의 전사로 투쟁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필요한 이유는
결국 우리가 강한 전사가 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싸움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는
지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결국 지옥을 정복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싸움의 과정에서 우리는 점차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다.
내가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모든 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내 의지가 강해진다고 해서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영혼의 주인이며 변화의 근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싸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얼마나 강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이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일 수 있다.
다윗이 모든 싸움을 마친 뒤 성전을 직접 세우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그 일이 맡겨졌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싸움의 때와 평화의 때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싸움을 충실히 감당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음 상태를 준비하신다.
그러므로 안식은 싸움을 무시한 결과가 아니다.
싸움을 통하여 인간의 힘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되는 상태이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이것이 광야와 가나안의 관계이고,
또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관계이며
광야에서는 만나를 거두어야 했지만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인 것이다.
인간이 해야 할 수고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 수고의 방식 자체가
새로운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움을 무조건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싸움을 영원히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싸워야 할 때에는 우리의 의지와 판단을 사용하여 충실히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의 능력과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바꾸어 가실 때에는
이전의 방식으로 자신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려 하기보다,
주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거두며 ‘내일은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듯
영적 불안에 시달릴 때에도,
주님은 이미 우리가 들어갈 안식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아직 그 평화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그곳을 준비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생이라는 긴 광야의 길에서
얼마나 피곤해했는지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히 전사로만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싸워야 할 때에는 싸우게 하시지만, 그 싸움의 목적은
우리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승리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깨닫고,
지옥을 정복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광야에서 배워야 할 가장 깊은 교훈은
‘나는 얼마나 강한 전사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이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이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이루어내려고 할 때에는
싸움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도
그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마침내 나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붙들던 손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방황하며 싸워온 그 길이
결코 버려진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광야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었고, 싸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었으며,
내가 더 이상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순간조차
주님께서는 나를 버려두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과정은 내가 나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도록 이끄시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주님은 길을 잃지 않으셨고,
내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주님은 이미 다음 상태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싸워야 했던 광야의 시간도 주님의 섭리였고,
내가 내 힘의 한계를 깨닫게 된 순간도 주님의 섭리였으며,
마침내 주님의 손에 나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우는 것까지도
그 섭리 안에 있었다.
그래서 안식은 내가 마침내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대가로 받는 상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이끌어 오신 주님의 손을 뒤늦게 알아보고,
그 손 안에서 평화를 배우는 상태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게 하신 분도 주님이셨고,
일곱째 날 만나를 거두지 않게 하신 분도 주님이셨다.
싸워야 할 때 싸우게 하신 것도 주님이셨고, 싸움의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상태로 옮겨 가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에 바라보아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싸움이 아니다.
그 싸움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이끌고 계셨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내가 싸움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나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이끌고 계셨던 주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여섯째 날의 노동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깊은 교훈인지도 모른다.
- 싸움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싸움의 주체라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
우리는 악과 싸워야 한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악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악을 거부하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와 판단과 결단이 실제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누구나 자신의 의지를 다해 싸우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일부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함정이 있다.
악과 싸우는 동안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한다. ‘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 내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내가 악을 이겨내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싸움의 주체가 나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내가 악과 싸우고, 내가 선을 행하고,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며 악을 거부해야 한다.
문제는 그 행위의 생명과 능력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데 있다.
내가 살아 있으므로 내가 할 수 있고,
내 의지가 강하므로 악을 이길 수 있으며,
내가 노력하면 결국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이며,
선을 행할 능력 역시 주님에게서 온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다만 그 행위를 자기 자신의 힘과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내가 싸움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싸움을 주님께 떠넘기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여전히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거부해야 하며,
진리를 따라 행동해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가 이 싸움을 이루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다.
‘내가 싸우지 않겠다.’와
‘내가 싸움의 근원이라고 여기지 않겠다.’는 전혀 다른 말이다.
앞의 것은 인간의 책임을 버리는 수동주의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뒤의 것은 인간의 책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 책임을 자기 힘에 대한 믿음으로 바꾸지 않는다.
나는 악을 거부한다. 나는 유혹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진리를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과 힘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실패를 거듭하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깨달음의 목적은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일을 이루어내는 생명의 근원을
더 이상 나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항복’이라는 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항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내가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린다는 것은
내 의지를 버리고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려는 태도를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지만,
그 모든 것 가운데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버려야 하는 것은 책임이 아니라 자기 주권에 대한 착각이며,
포기해야 하는 것은 선을 행하려는 노력 자체가 아니라
그 노력의 능력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새로운 신뢰가 시작될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계속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협력과 주님의 역사가 만나는 자리이다.
인간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만,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신다고 믿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의지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노동에서 안식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피로는,
내가 모든 것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자기 주도적 확신이
한계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신호가 될 수 있다.
그 피로가 우리를 무기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 이루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주님의 역사하심을 더욱 신뢰하도록 이끈다면,
그때 노동은 비로소 안식으로 향하는 길이 된다.
안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모든 생명과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안식은 노동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이심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삶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나’가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사라져야 주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주님의 일이 내 삶 가운데 더욱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