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가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사람의 심리라는건 이상해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거나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때는
크게 느낌이 없는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때
즉 반바지에서 긴바지로 갈아입을때
그야말로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한시간동안 앉아있어야 하는
귀가길의 버스마저도
왠지 따뜻하게 느껴져
자리에 앉자마자 눈이 솔솔 감겨오고
개짖는 소리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는 않는
동네의 밤거리에
핸드폰 벨이라도 울려퍼질라치면
아프가니스탄의 밤하늘을 가르며
진군을 알리는 한줄기 섬광탄처럼
차가운 밤공기는 일순 긴장하곤 한다.
자연히 듣는 음악도 바뀌기 마련이다.
몇개월전 여름의 길목에서
쇼넨나이프의 바나나 칩스나 쿠키데이즈를 들으며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행복함을 꿈꾸고
혼자 즐거워했다면
이 맘때쯤 듣는것은
힘빠진 목소리와 일그러지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연주
4비트를 넘어가지 않는 미들템포 이하의 리듬
이런것들에 땡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예컨데 비틀즈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같은 음악이 딱 그렇다.
얼마전 피오나 애플도 리메이크한바 있는
존 레논의 담담한 목소리는
비틀즈의 최후를 알려주는 백조의 노래중의 하나임과 동시에
나는 우울해 !
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진정한 우울함을 던져줄수 있는 몇 안되는 곡인듯 하다.
피오나 애플의 리메이크 곡이 좀 더 애절하다.
벨 앤 세바스찬의 아이 파웃 더 워와 모델의
연작또한
날이 추워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플레이어에 걸려있는 곡이다.
사실 아침에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엎드려
평소엔 읽지도 않는 시집 나부랭이들을 보기에
이만한 음악도 별로 없는것 같다.
100프로 감성충만.
키스 크로스 앤 피트 로스의
피스 인 디 엔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
가을을 영접하기 위한 노래로는 최고가 아닐까.
이 노래는 원래 샌디 대니의 노래를 리메이크한거라고 하는데
원곡보다 훨 났다.
그러니까 원곡이 갖고있는 감성의 코드를
70년대 포크 록의 황금기에 맞추어
증폭시켰다고나 할까.
루치오 바띠스띠의 엘피들을 꺼내어 듣고 있으면
그 쓸쓸함에 거의 몸부림친다.
무미건조함으로 읇조리는 이태리어의 독특한 뉘앙스.
가끔 나오는 멜로트론 음향의 풍만함은
마른장작위에 끼얹는 휘발유처럼
그 무미건조함을 배가시킬뿐이다.
물론 루치오 바디스띠도
마우로 펠로시에 비하면 오히려 봄의 음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마우로 펠로시의
'너와 함께 늙어 갈수 있다면'을 들은 이래
늘 언젠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벽난로가 있는 카페에 마주앉아
부드러운 카푸치노 라떼를 같이 마시며
그냥 음악만 듣고 있고 싶다
는 생각을 늘 해오고 있다.
특별히 좋은 멜로디가 있는것도
풍부한 감성이 있는것도 아닌데
그 바싹바싹 말라가는
위안을 갈구하는듯한 목소리와
뒷편에서 포근히 깔리는 바이올린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곤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여름에는 최근의 음악들을
가을에는 스테디 셀러들을
듣게되고
음악에 배어있는 추억들을
떠올리는것도
어쩌면
센티멘탈의 극치에 시달리는
요즈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계절의 변화는 거기에 걸맞는 음악을 부르고
그 음악들을 들으며
누렇게 퇴색하는 은행나무잎을 바라본다.
매년 겪는 일이지만
매년 새로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