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천(達川)은 보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군을 거쳐 충주에서 남한강 본류와 합류하는 하천이다.
달천은 통상적으로 통달할 달(達)자와 내천(川)자를 쓴다. 달천은 필요에 따라 달강 달래강 또는 감천(甘川) 등으로
표기가 달랐다. 대부분 달천이란 이름은 물맛과 연관되어 있다.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 하였던 것이 달냇물로,
다시 달천으로 변했다는 지명 유래도 전한다. 감천(甘川)이란 표현도 달감(甘)자를 써 물이 달다는 의미를 더한 것이다.
달천은 속리산의 삼파수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이는 속리산 천왕봉의 물이 3면으로 흘러 각각 남한강 금강 낙동강의 발원지가 된다.달천의 유래로는 첫째 물 맛이 좋아 ‘단냇물’이 ‘달냇물’로 즉 물맛이 달아서 ‘달천’이 되었다고 전한다.
“충주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의 우통수가 둘째이며, 속리산 삼타수가 셋째이다.”
제일의 물맛 감별로 유명한 고려말 조선초기의 학자 이행(李行)은 우리나라의 물맛의 품급을 매겼다.
달천의 물맛이 단연 으뜸이라는 것이다. 이는 고려사 「기우자집」과 권근의 「양촌집」기우설 등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이 물은 중국 여산(루산 산)의 발물과 같다"라고 했다.
「동국여지슴람」「택리지」등에 기록되고 있다. 중국 여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중국 제일의 물맛을 자랑한다.
충주시 달천동은 달신, 단신, 이부, 송림리가 합병된 이름이다. 달고달다 뜻의 단월동과 단호사가 있다.
상류에는 단물을 뜻하는 감물면, 감물 리가 있다.
‘달천’은 우리말의 ‘달내’를 적기 위한 것이다. 달천강, 달내강, 달강, 달천천 등은 모두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다.
청주, 증평지방에서는 박대천, 괴산지방에서는 청천강, 괴강, 괴탄, 살수라고도하였다.

둘째는 혼자 사는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 벌어진 가슴 아픈 사연에서 비롯된다.
형내외와 동생이 달천을 건너 농사를 짓고 살았다. 형이 갑자기 죽게 되자 형수와 시동생이 농사를 짓게 되었다.
비가 와서 강물이 불면 형이 하던 것처럼 시동생이 형수를 업고 강을 건넜다.
어느 날 그 시동생은 형수를 업어 건널 때 남근이 몹시 발동했다. 그는 남자로서 몹시 괴로웠다.
특히 돌아가신 형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형수가 ‘달내나 보지’하며 슬피 울었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달래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달천 중간에 바위 2개가 있으며 송림 서쪽강가에 형제처럼 나란히 서있는 형제 바위가 있다.
셋째는 남매의 슬픈 사연에서 유래한다.
옛날 충주에 혼기에 찬 남매가 있었다. 누나가 이웃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어 남동생이 누나를 데리고 이웃 마을로 시종해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강을 따라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마땅히 비를 피할 곳이 없었던 남매는 많은 비를 맞았다.
비에 젖은 누나의 얇은 옷은 몸에 달라붙었다. 그런 누나의 모습을 본 동생은 그만 강한 성적 충동에 휩싸였다.
그것도 한순간, 정신을 차린 동생은 참담한 죄의식을 느끼고는 자신의 남성을 돌로 짓이기고 자살하고 말았다.
동생이 뒤따라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누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죽은 동생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오열하며 외쳤다. “이런 바보야. 정 그렇다면 한 번쯤 말이나 하지, 차라리 달래나 보지.”
이후로 강 이름을 달래강(達川)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이 강에 수달이 많이 살고 있어서 달천이라고 했다.
정조임금이 내린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에 달할 달자로 달천(達川)일가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명칭이라 생각된다. 달강이란 표현은 <조선왕조실록>의 수달 달(獺)자를 쓰는 달천(獺川)이란
표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달천이 수달이 많은 하천이었음을 알려준다.이때 달천에 대한 표기를 한자식 표현을 써
달강(獺江)이라 했던 것 같다. 인근에 수달피 고개가 있으며 달천리 서족 물가를 ‘물개달래’라고 부른다.
수달을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달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곳의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때 가야국의 악사 우륵(于勒)이 신라에 귀화하여 제자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쳤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순변사 신립(申砬) 장군이 8천여 병사와 함께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북상하는 왜적을 맞아 싸웠으나 순절한 곳이다. 세조가 목욕 했다는 복천암 수안보온천 문장대 정이품송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