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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 추천 0 조회 265 17.02.10 11: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활의 소망을 갖자/마28:1-10
2006-01-03 09:45:05   read : 183



오늘 부활절 아침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 앞에 나와 경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전형적인 봄날입니다. 대지 위 이곳저곳에서 힘차게 생명들이 약동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겨우내 동토에 묻혀, 죽은 듯 했던 생명들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축복된 부활절에 모든 질병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 벗어나는 부활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신앙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 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의 전한 그 말”이란 그 다음절을 말합니다. 거기 무엇이라고 말하셨습니까?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2000년 전 첫 부활이 일어난 현장의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 째 되는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왔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물론 여인들은 놀라서 몸을 숨기는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굴려냅니다. 그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수직하던 군사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그 여인들에게 말하기를(5-7)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무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예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데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8-10을 보면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여인들을 만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이 말씀은 캄캄한 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자들에게 새벽의 여명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자”란 제목 하에 본문을 상고하는 중에 같이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건 현장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이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경대로 된 사건입니다(고전 15:3-4). 부활에 대한 예언은 일찍이 신구약에 수차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겔37:1-10).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지리멸렬했던 초대교회가 불같이 성장하여 전 세계에 복음을 확산시킨 것이 그 증거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싸인(sign)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의 종류
부활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 부활의 때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여기 보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살리시겠다고 누누이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은 주님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4. 부활의 차례
부활은 세 차례 있게 됩니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계 20:4-6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5. 부활체의 성질
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2절의 “이와 같이” 란 말씀은 앞의 37-41절에 언급한 대로 육체도, 영광도 각기 다른 것같이 부활체도 현재의 육체와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밀알을 밭에 뿌리지만 거기서 돋아나는 줄기는 밀알과 다른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 땅에 묻히지만 부활체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 육체와 장래의 부활체를 고전 15:42-44에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에 묻히는 육체는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이지만, 부활체는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

6. 누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가?

1) 먼저 십자가를 지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가심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고 영광도 같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하기를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 8:17).
누구든지 면류관은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는 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문제는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영광을 버리고 먼저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부활승리의 주역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나의 계획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순종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명령하시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3) 먼저 죽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죽음을 받아드린 예수님에게 부활의 영광이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먼저 죽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고전15:31을 보면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육체와 원수가 됩니다(롬8:7-8).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도 육체가 죽어야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땀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먼저, 죽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은 승리입니다. 죽음과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부활은 풍성한 복입니다. 영적으로 천국을 얻고, 육적으로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얻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임을 믿고 부활신앙을 갖고 삽시다.



예수의 부활/마28:1-15
2005-01-28 14:41:57   read : 380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생의 죄와 그 죄로 인한 저주에서 풀어주시고 영생과 축복을 내리시기 위해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자신의 죄와 그 저주에서 풀려나며 용서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예수님께 대한 중상모략은 끊어지지 않았다.
유대인의 최고회의인 산헤드린 공의회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지 못하게 주님의 무덤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파수꾼을 보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조작되지 못하도록 병정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주님의 부활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방해가 축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바꾸어 주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아리마대 요셉이 봉헌해준 그의 새 무덤에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셨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증거 하였으며 살아나신 예수님이 친히 막달라 마리아와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 나셔서 위로 하셨다.
反面에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매수되어 거짓을 퍼뜨리고 다녔다.
어쨌든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이 믿음이 세상 임금의 권세를 이기게 하며 이 믿음이 사망권세를 이기게 한다.
이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님 만나셔서 최후의 지상 명령을 주신다.

1. 예수님 부활에 대한 천사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本文 5-6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증거 했다.
하나님은 한 가지 동일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신다.
천사를 시켜 그 손으로 돌문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음으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게는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찾는 막달라 마리아와 女人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며 위로를 주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과 산 소망을 주지만 대적하거나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를 주신다.
아무튼 찾아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주님을 찾아 나온 女人들에게 천사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 주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女人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변했다.
그들은 슬픔에서 일어나 달음질 칠 수가 있었다.
이 시간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진리에 귀를 기우리어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는 같은 변화가 있고 기쁨과 소망이 있다.
천사가 나타나서 무덤을 찾아간 女人들에게 전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무서워 말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위로의 말씀이요, 사랑의 말씀이요, 소망의 말씀이다.
이 축복의 말씀을 그들이 들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최대의 충격적인 소식이며 극적인 부활의 소식을 천사들은 전해주었다.
부활의 소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증되고 현장을 통해 증거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천사들처럼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죽음의 권세 하에 짓눌러 살며 죽음의 어두움의 권세로 인간을 압살 하려는 사탄에게 목이 조여 있는 불쌍하게 살아가는 심령들에게 확실하게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

2. 부활의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증거 하셨다.
本文 9-10절 “예수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 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바로 “빈 무덤”이다.
공자는 아직도 무덤에 묻혀 있고, 석가모니는 죽어서 “다비”라고 하는 화장식을 행하고 사리 몇 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 예수님은 빈 무덤을 남겨 놓으시고 승천 하신 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아니한 예수님의 시신과 텅 빈 그의 무덤은 세계인의 관광 명소와 성지순례 장소며 기독교인의 교육장소가 되어 있으니 부활에 대한 더 이상의 논쟁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출생하시기 700년 전에 쓰여진 구약성경에 예언 되었던 사실이다.
시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다.
주님 자신도 부활에 대한 선언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셨다.
마20:17-19절 “예수께서 …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 우매 …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다.
당신의 예언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女人들을 만나셔서 “평안 하뇨”라고 인사 하셨다.
이 말씀은 네 마음속에 있는 여하한 근심과 걱정을 다 버리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이 女人들은 마음속에는 자기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또 사랑을 입었던 이를 잃어버린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이렇게 살아났으니 그런 근심 걱정을 버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 女人들을 바라보고 “평안 하뇨”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여자들은 떨림과 기쁨으로 예수님의 발아래 꿇어 엎드려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 하였다.
주님과 떨어져 있던 삼일,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지니고 살았던 삼일은 불안하고, 슬프고, 허무하고, 절망적이었고, 허탈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살아나신 주님과 함께 서 있는 그들은 벅찬 감격에 기쁨이 너무 커서 땅에 엎드려 경배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사상 속에서, 생각에서, 생활에서 중대한 결정 속에서 기쁨과 감격과 능력을 맛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오도된 진실 이었다.
本文 11-13절 “여자들이 갈제 파수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조작된 오보를 전하게 하고 있으나 주님은 그들이 아는 것처럼 살아나셨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예수 부활에 대한 부인설과 오해들이 있다.
本文에서는 완전히 조작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작된 학설들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착각설이다.
이것은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찾아간 무덤이 예수님의 무덤이 아닌 다른 빈 무덤이었다”는 견해다.
예수님의 무덤이 아닌 다른 무덤이었다면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을 리 없으며 또한 시체가 있는 다른 무덤이었다면 시체를 두른 세마포가 풀어져 정갈하게 개어 있을 리가 없다.

2) 기절설이다
예수가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기절 했다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공적인 확인 사살된 죽음이었다.
막15:44-45절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고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니라”했다.
창에 찔렸을 때 흘린 “물과 피”가 그의 죽음을 확인해 준다.
요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의사들의 증거에 의하면 생리학적으로 산 자에게 칼을 대면 피만 나오지만 죽은 자를 해부하면 물과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

3) 도적설이다.
본문에도 조작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돈을 주고 매수하여 이 말을 퍼뜨리게도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면 예수님의 시체를 알몸으로 훔쳐갔다는 것인데 일부러 수의를 벗기고 시체를 훔쳐갈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 죽으신 후 그들은 신변 안전을 위해 안절 부절하며 숨어 있던 그들이 과연 많은 로마 군병이 지키고 서 있는 무덤으로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낼 리도 없고 훔쳐갈 수도 없다.

4) 환상설이 있다.
이것은 제자들이 스승을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여 간절히 열망한 나머지 자기들이 직접 그를 눈으로 보고 음성을 들었다는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하고 기다리지도 간절히 바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슨 스승을 열망하여 환상으로 보였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뿐이다.
그들은 파수꾼들의 보고에 의해 예수는 분명히 부활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임이 입증되었는데도 예수님을 대적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사단이 된다는 유대교의 율법을 너무나 잘 아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로 자신을 던진 것이다.
그 당시 공의회에 참석했던 그들은 매우 괴로웠을 것이다.
자기들이 온 생애를 바쳐 섬겨오던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기의 양심까지 속이면서 거짓말을 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받아야할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과 공의회 의원들과 파수꾼들은 진실을 돈으로 계산하였다.
물질에 대한 정욕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채우고자 더 깊은 죄악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죄를 심판하신다.
우리가 죄를 짓고 그것을 합리화 해서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시은소 앞에 나가 예수님의 피로 힘입고 담대히 나가 회개하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 부활의 진실을 돈으로 매수하여 가리 우려 했으나 부활의 증거는 더욱더 힘 있게 증거 됨으로 초대교회가 탄생되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 그의 부으심이 넘쳐나게 되었다.

부활을 목격하고 주님을 만난 자들은 어떤 변화가 일어 났습니까?
①. 기쁨이 충만했다.
두려움과 놀람과 절망이 기쁨으로서의 전율이 동반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②. 빈 무덤을 보았던 그들은 더 이상 무덤에 머물지 않았으며 또
다른 무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과거의 삶을 탈피하고 새 삶을 추구하는 갈릴리로 가는 변화가 일어났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함과 같이 우리는 과거의 무덤에서
서성이지 말아야 한다.
③.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시체에 기름을 바르거나 세마포로 싸거나 새
무덤을 준비하거나 거기에 보관하고 슬픔에 잠길 수 없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 그를 신앙대상으로 만난 자의 삶이 되었다.
이제는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서 바빠지는 삶,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데 시간이 모자라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 이것이 주님의 부활을 지닌 성도들의 변화다.
④.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마지막 증거는 사도들의 담대함이다.
그들은 예수가 처형되기 전에 이미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갔던 자들이었다.
베드로 같은 이는 얼마나 비겁하고 치졸했던 인간입니까?
예수님을 3번 씩이나 부인했으며 나중에는 그를 저주까지 하며 배신하는 자리까지 떨어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복음에 담대했다.
생명을 주께 드렸다.
G. W. M'cree “꽃이 봄을 기다리듯, 별이 아침을 기다리듯, 노란 옥수수가 여름을 기다리듯, 나사로가 감미롭고 깊은 꿈에서 그를 깨울 예수님의 목소리를 기다리듯, 성스러운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라는 시를 남겼다.
사도들은 복음 증거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주를 위해 기꺼이 순교했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의 의리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조작이고 거짓이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부활 사건이 거짓이요 조작이라면 성령의 기름부음과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 초대교회를 어떻게 탄생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나의 생명의 부활을 믿으면서 죽음을 넘어선 증인의 삶, 변화된 신앙 인격의 사람, 기쁨과 능력을 소유하는 변화가 일어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부활의 노래/마28:7-15
2005-01-17 12:26:37   read : 190

본문을 보면 7절에서 10절과 11절에서 15절은 마치 연극의 1막과 2막처럼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28장 7-10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시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한마디로 주제를 정한다면 ‘환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전해주는 이 말씀을 들은 그 여인, 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그 모습,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전해줄 말, 갈릴리로 가라 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들이 그냥 달려간 것이 아닙니다. 환호를 하면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환희의 모습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1절부터 15절까지는 전혀 다른 장면이 벌어집니다. “여자들이 갈 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들은 대제사장들, 군병들의 반응인데 이들의 반응을 한마디로 주제를 정하면 ‘두려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을 들은 여인들과 제자들은 환희의 소식으로 받아들이는데 군병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그 소식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묘한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부활의 반응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있고, 오늘날 이 지구촌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이 두 반응은 그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부활의 순간에 아마도 천사들은 찬양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날에도 하늘의 찬양이 있었다고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순간에는 천사의 찬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이 우주적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찬양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늘의 찬양이 있었겠지만 그 찬양의 내용은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어났던 이 두 가지 반응은 찬양의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환희의 사건이고 우리가 부활의 노래를 부른다면 환희를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대제사장들과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두려움과 근심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활의 이설들

본문에 나타난 데로 장로들과 함께 모여서 대제사장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매수를 했습니다. “너희는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이렇게 돈으로 입단속을 해서 막으려고 하는 제사장들과 군병들의 이 어리석은 행동들이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도적설이 여기서 기인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도적설이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또 어떤 학설이 나왔느냐 하면 타묘설, 즉 이 여자들이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다른 빈 무덤을 찾아갔다, 그래서 다른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했다 이렇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러나 이런 도적설, 기절설, 타묘설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하는데 부인하는 논리로 절대로 먹혀들어가지가 않습니다. 그러다가 훗날에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들고 나왔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신화설로 돌려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것은 제자들의 사기이지 실제가 아니다 라고 까지 뒤집어 씌웠던 것입니다. 왜 그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못마땅해 하고, 예수님이 살아난 사실이 왜 두렵고, 왜 그것을 돈으로 매수하여 입단속을 할 만큼 중대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살아나신다고 예언을 했고, 그가 살아남으로서 그는 하나님으로서 완전히 확정이 될 뿐 아니라, 입지를 가지게 되고, 로마의 권위도 무너지고,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의 권위도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 예수님의 부활은 막아야 된다, 그래서 돈으로 매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 죄 많은 인간들의 끝없는 불신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어코 라도 심판하고야 마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그 부활을 기뻐하고 영접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이 양면의 인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다 같은 사람인데 왜 그 부활을 그렇게 양쪽으로 반응을 하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연합성

물고기는 신비로운 동물입니다. 수압은 물이 깊을수록 그 압력이 높아갑니다. 수압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하면 한 때 ‘스피어스’라는 잠수함이 수압에 못 견뎌서 파열을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물밑의 수압은 수심 100m, 200m, 300m 이렇게 내려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압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깊은 바다 밑에 사는 그 물고기들은 어떻게 수압을 견디느냐는 것입니다. 신비롭습니다. 쇠도 견디지 못하는 수압인데 어떻게 물고기들은 거기서 그렇게 유유히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고기 몸 안에 있는 압력과 수압이 동일하게 때문에 아무런 저항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지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물고기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도 똑같은 원리로 하나님이 적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그 부활을 기뻐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의 상태가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코드와 하나님의 영계의 코드가 같기 때문에 그것은 부담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지 않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욥의 신앙생활을 보면 첫 번째로 그가 물질을 잃어버립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7남3녀를 잃어버립니다. 부인은 죽지 않았지만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여자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잃어버리면 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잃고, 가정을 잃고, 건강을 잃고, 친구를 잃어버리면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욥은 그런 고난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보면 욥의 고통은 그와 같은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힘든 고통을 우리 앞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질을 잃고 고통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가족이 겪는 불행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 하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고통 하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도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욥이 더 힘들어하는 고통이 무엇이냐 하면 의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고통을 당할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왔느냐, 의에 대한 고난입니다. 그 영적인 고난에 대해서 욥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사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어찌하여’ 라는 말 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 죄 없는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합니까? 죄 없는 나를 왜 버리십니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죄 없이 고난을 당한 모든 의인들의 그 고난을 다 포함하는 주님의 부르짖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이 고난당하는 사람이 다 부르짖었던 그 고통의 절규가 ‘여호와여 어찌하여 내가 주님을 향하여 의를 행하며 말씀으로 살았건만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라는 것인데 욥이 그 지경에서 아주 힘들어 합니다. 그가 물질을 잃고 자식을 잃은 그 때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라고 그는 육신의 것을 잃어버린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고 친구들이 와서 자꾸만 자기 자신에게 정죄를 하고 나오니까 내가 이렇게 고통 받을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줍니까? 하는 주님의 부르짖음을 욥이 이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이 끝까지 견디는 것은 하나님과 욥의 영적 코드가 맞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욥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적 관계가 바로 이런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그 생각과 뜻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때도 우리를 성령으로 품으시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15절 이하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믿게 되고 순종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부활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의 신비성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는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오도다케 히로타 라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성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다리길이가 10㎝밖에 안 되는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의사가 이 아이를 받아들고 차마 산모에게 보여줄 수가 없어서 한 달 동안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라고 난 게 무슨 나무를 잘라놓은 것 같으니까 의사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산모한테 보여주느냐는 것입니다. 산모가 충격 받을 것을 생각해서 한 달 동안 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안 보줄 수 없습니다. 한 달 만에 이 아기를 산모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이 모자가 상봉을 하기 전 놀라지 말라고 당부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기를 보자 이런 말로 첫 말을 했습니다. “어머나, 내 귀여운 아기!” 하고 그 아기를 안고 귀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그 사람 같지 않는 아기를 얼마나 잘 키웠는지 이 오도다케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 장애인인 줄을 느끼지 못했다. 집에서 조금도 나를 별나게 취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어머니가 그 아이를 정신적으로 하나도 격의가 없이 그대로 대해주어 길렀습니다. 이 오도다케는 달리기도 합니다. 야구도 합니다. 농구도 합니다. 수영도 합니다. 컴퓨터, 붓글씨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도다케에게는 최고의 장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울해본 적이 없답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자란 적도 없고,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고민을 해본 적도 없답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정신건강이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지가 멀쩡한 사람 중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이 오도다케를 만나서 상담을 하고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치유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사람은 정신건강미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글에서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장애는 특별한 개성일 뿐이다. 마음을 열고 보면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친구가 더 많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한다. 내가 할 일을 하는 그것이 내 보람이다.”
이 오체불만족에서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와 이 오도다케와의 관계입니다. 그 어머니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지선이의 어머니도 위대한 엄마입니다. 또 이희야, 손가락 세 개를 가지고 피아니스트가 된 그 아이의 어머니도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와 오도다케는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오도다케는 그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고 이제는 몸이 성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치료해줄 만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명랑함에 전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운동경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시종일관 웃으면서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준 그 용기와 가능성은 대단히 큽니다. 지금도 온 세계 희망의 메신저로 그는 세계를 순방하고 있습니다. 인격과 환경이 맞아갈 때 이런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으로만 이 부활을 믿을 수 있고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을 수 있고 부활의 환희를 나의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이 여인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이 여인들이 모습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노래를 부를 때 환희의 주제로 이 부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돈으로 상대방을 매수해서 부활의 소식을 막으려 하는 이런 인간들의 반응은 역사 속에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좋은 학문을 했던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진리를 부정하면서 이 부활도 신화로 돌리는 망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사실이기 때문에, 부활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아지지도 않고 부정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자산이고 우리의 신앙이고 근본이고 완성입니다. 새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빈 무덤을 보라/마28:1-6
2005-01-17 12:26:04   read : 231

기독교의 구속사에는 무덤이 없습니다. 아담의 무덤도 없고, 노아, 아브라함, 다윗의 무덤도 없습니다. 유대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히스기야 왕의 무덤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무덤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매장은 있지만 무덤은 강조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매장을 중요시 합니다. 그리고 무덤을 관리하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그렇지만 무덤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매장 되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그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빈 무덤이라는 것은 무덤이 없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무덤의 요소는 시체입니다. 시체가 있어야만 무덤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시체가 없는 빈 무덤은 무덤으로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증언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하면서 빈 무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천사는 빈 무덤이 부활의 증명이라고 물증으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실로 빈 무덤은 부활의 물증입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물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증명에 대하여 신학과 기독교 역사 속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이설들이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헛된 논리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나섰습니다. 그 대표적인 학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도적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고 빈 무덤을 만들어서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 중에 깨어나셔서 밤중에 나오셨다는 설입니다. 또 하나는 환상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환상을 본 것이라는 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강령설이 있습니다. 무당이나 강술자들이 죽은 사람의 형상을 신으로 내려서 오게 하는 강령설에 의해서 예수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사실을 뛰어넘는 생명의 역사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 달라는 것은 부질없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한 첫날 아침에 확실한 증거로 남았던 빈 무덤은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명인 것입니다. 증명이라는 것은 아주 힘이 있습니다. 증명이 되면 힘이 있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도 증거물을 가지고 증명하면 그것이 더 힘이 있습니다. 그만큼 증명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 보라고 할 때 실제적으로 부활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고,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사실, 과거사실을 오늘의 현실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부활의 증명이 얼마든지 나타나 있습니다.

증명은 힘이 있다

조지 부시대통령이 한번은 시골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 학교에 아주 맹랑한 개구장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꼬마가 대통령에게 당돌하게 질문했습니다. “아저씨가 대통령이세요?” “그럼, 내가 대통령이야” “대통령 신분증 있어요?” 대통령 신분증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저주저 하다가 운전면허증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내 신분증이야”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신분증으로 다 통합니다. 그런데 빤히 운전면허증을 보면서 하는 말이 “여기 대통령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잖아요?” 아주 난처합니다. 아이를 설득시킬 말이 없습니다. “얘야, 그래도 내가 대통령이야” 그리고 교실을 나갔습니다. 운동장에 나가니까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이 대통령을 경호하고, 맞이하고, 수 십대 차가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창밖으로 보면서 “아! 진짜 맞네.” 그렇게 말했답니다.
대통령을 증명하는 것도 따지고 나오면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향하여 “엄마가 정말 내 엄마가 맞아요? 증명해 주세요.” 라고 할 때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증명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낳았어.” “낳았다는 증명이 어디 있어요?” “산부인과에 가면 기록이 남아 있어.” “나는 그것도 못 믿겠어요. 사람이 손으로 쓰는 거잖아요.” “얘, 내가 분명이 너를 낳았어.” “병원에는 아이가 바뀐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내가 바뀌었는지 누가 알아요?” “야, 동사무소 가봐. 너는 내 아들로 등본이 되어 있어” “그것도 조작할 수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따지고 나오면 증명이 아주 어렵습니다. 심리적인 것은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증명이 되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증명이 되지 않아도 믿어야 합니다. 보지 못해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경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덤을 통하여 믿음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종교, 세상철학은 무덤을 자랑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밋은 왕의 무덤입니다. 왕이 즉위하면 그때부터 피라밋을 쌓습니다. 그 왕이 죽으면 거기에 장사를 지냅니다. 온 국력을 다하여 왕의 무덤을 만드는 것이 피라밋 문화입니다. 중국 서안에 가면 진시황제의 거대한 무덤이 있습니다. 중국의 유일한 여 황제 무척천의 무덤도 서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 무덤을 자랑합니다. 제가 수년전에 서안의 무척천 무덤을 관광했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모습을 해 놓고는 우리들에게 현혹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 황제가 묻혔다고 하는 그 무덤은 산입니다. 남산만한 산입니다. 거기에 여 황제가 묻혀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산을 기점으로 해서 무척천 무덤의 경내를 수키로 조성했습니다. 가까이 가면 무척천 무덤의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5km 전방에서 보아야 합니다. 5km 전방에서 무척천의 무덤을 보면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형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 무척천이 묻혀있다고 하는 그 산은 여인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중간지점에 조그만 동산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돌멩이를 가지고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이 여인의 두 가슴입니다. 그리고 여인의 누워있는 다리 모양을 지경으로 해서 5km 전방으로 쭉 보면 여인이 누워있는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여 황제의 무덤이라 해서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주교도 무덤을 중시합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은 교황들의 무덤입니다. 그리고 명동성당도 김대근 신부를 비롯한 신부들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덤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빈 무덤으로 부활을 증명한 것처럼 우리도 죽어서 무덤을 이루겠지만, 매장은 되겠지만, 우리도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서 이 땅위에는 우리의 무덤이 성립되지 않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빈 무덤으로 증명되었지만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닙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채워져 있는 새로운 공간입니다. 예수님은 빈 무덤에도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역사 속에 계시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의 어디든 계시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리켜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너희에게 충만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충만함으로 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 충만으로 거하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의 영역을 벗어날 어떤 공간도 피조물도 없습니다.

생명으로 채워진 충만

조지 모건 목사님이 목회 중에 제일 감동적인 간증을 이렇게 합니다. 한번은 그 교회에서 주일학생들에게 프라스틱 달걀껍질을 만들어서 나눠주면서 이 껍질 안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생명을 담아오라고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학생들이 달걀 껍질 속에 생명을 의미하는 숙제를 해 왔는데 80% 학생들이 곤충을 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곤충이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살아 있는 곤충을 담아 와서는 이것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20% 학생들은 꽃을 그 안에 가져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톰이라는 학생이 유일하게 혼자 빈 껍질 그대로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톰! 너는 왜 숙제를 안 해 왔니?” 톰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숙제를 해 왔어요.” “빈 껍질이잖아.” “그래요, 이대로가 숙제예요.” “저는 이 껍질 속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을 담아 왔어요.” 그 설명 앞에 박수를 치고 격려를 하고 톰의 숙제를 일등상으로 뽑아서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어디든 충만합니다. 전쟁과 테러와 살인이 있는 바그다드에도, 아랍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찬양이 되고, 경배의 주제가 땅은 복이 있습니다. 아랍세계는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하나님도 거부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들의 테러는 지하드입니다. 성전입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통하여 영생의 길로 가고, 자살 테러는 유일한 영생을 얻는 최고의 길입니다. 그 죽음이후 알라신과 더불어 땅위에서 누리지 못한 모든 부귀영광을 누린다는 허망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랍인들은 그 의식과 그들의 삶의 모든 방식이 오직 보복입니다. 미국을 보복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보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향한 보복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으면 전쟁에 보냅니다. 큰 아들이 나가 전사하고 둘째 아들이 나가 전사해도 셋째아이를 보고 부모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얘야, 너 빨리 자라라. 그리고 전장에 나가야 한다. 나가서 두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 자녀교육의 정신입니다. 아랍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낳아서 키워서 전장에 보냅니다. 테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미국을 향한 보복, 이스라엘을 향한 보복입니다. 진리를 향한 보복뿐입니다. 그 땅에서 부활의 주님이 경배를 받는 날이 와야만 그 땅의 갈등과 비극은 종식될 것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

한반도가 복이 있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민족 가운데 충만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 한반도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으로 네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죄, 사탄을 이긴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를 이긴 것입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완성입니다. 생명의 완성입니다. 믿음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처럼 언젠가 완성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다 미완성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교회봉사도, 우리의 생의 모든 것은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주님의 부활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그날에는 모든 것이 완성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든 것의 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국을 통치하는 통치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그는 역사의 주가 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었습니다. 이 땅위의 모든 악령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무릎 앞에 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부활입니다. 네 번째는 영광입니다. 승리와 완성과 통치와 영광이 부활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에게도 이 은혜를 그대로 부여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약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죄를 이깁니다. 악, 사탄을 이깁니다. 우리도 완성을 바라보고 갑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은총 안에서 승리하시고, 완성하시고, 통치하시고, 영광을 입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자/마28:1-10
2004-12-11 08:59:12   read : 268

오늘 부활절 아침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 앞에 나와 경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전형적인 봄날입니다. 대지 위 이곳저곳에서 힘차게 생명들이 약동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겨우내 동토에 묻혀, 죽은 듯 했던 생명들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축복된 부활절에 모든 질병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 벗어나는 부활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신앙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 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의 전한 그 말”이란 그 다음절을 말합니다. 거기 무엇이라고 말하셨습니까?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2000년 전 첫 부활이 일어난 현장의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 째 되는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왔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물론 여인들은 놀라서 몸을 숨기는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을 굴려냅니다. 그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수직하던 군사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그 여인들에게 말하기를(5-7)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무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예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데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8-10을 보면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여인들을 만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이 말씀은 캄캄한 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자들에게 새벽의 여명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갖자”란 제목 하에 본문을 상고하는 중에 같이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건 현장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이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경대로 된 사건입니다(고전 15:3-4).
부활에 대한 예언은 일찍이 신구약에 수차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겔37:1-10).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는 지리멸렬했던 초대교회가 불같이 성장하여 전 세계에 복음을 확산시킨 것이 그 증거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싸인(sign)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의 종류
부활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 부활의 때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여기 보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살리시겠다고 누누이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은 주님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4. 부활의 차례
부활은 세 차례 있게 됩니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계 20:4-6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5. 부활체의 성질
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2절의 “이와 같이” 란 말씀은 앞의 37-41절에 언급한 대로 육체도, 영광도 각기 다른 것같이 부활체도 현재의 육체와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밀알을 밭에 뿌리지만 거기서 돋아나는 줄기는 밀알과 다른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 땅에 묻히지만 부활체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우리 육체와 장래의 부활체를 고전 15:42-44에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에 묻히는 육체는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이지만, 부활체는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

6. 누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가?

1) 먼저 십자가를 지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까지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시고 가심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십자가는 멸시와 천대 고통과 아픔이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면류관은 좋아합니다. 문제는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추구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영광을 버리고 먼저 십자가를 지는 성도가 부활승리의 주역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나의 계획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손해가 막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 그 멸시는 누가 당하라고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라 합니까? 그것도 다 내 몫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고 명령하시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3) 먼저 죽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살고 죽는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죽음을 받아드린 예수님에게 부활의 영광이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먼저 죽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고전15:31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내가 살아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육체와 원수가 됩니다(롬8:7-8). 예수 그리스도의 고민도 육체가 죽어야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마에 땀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먼저, 죽는 자가 부활의 영광을 누립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은 승리입니다. 죽음과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부활은 풍성한 복입니다. 영적으로 천국이요. 육적으로 기쁨과 감사요 소망이요. 물질적으로 풍요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부활을 내 부활이 되게 함으로 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마28:1-10
2004-06-28 12:41:12   read : 292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줍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 자녀들이 슬퍼하고, 자녀의 뜻하지 않는 죽음으로 부모가 가슴 아파 하는 것은 죽음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오래살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로 몇 년 정도 오래 살 수는 있지만 죽음의 근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치뤄야 할 죄 값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죽음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후의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후는 제한적인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통의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는 이 땅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멸망의 인간이 구원의 인간으로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부활은 주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첫 열매로 나중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기쁨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부활예배를 드립니다. 고난이 기독교의 뿌리라면 부활은 기독교의 열매입니다. 다른 종교는 창시자들의 무덤을 자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죽음이 우리의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절망과 패배의 인간에게 승리의 구원을 안겨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1.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금요일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토요일은 안식일이기에 하루 쉬었다가 안식 후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새벽에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혹시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가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면 백성들이 현혹당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다음날이 시작되는 새벽에 주님은 부활했습니다. 큰 지진과 함께 주의 천사가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러 내렸습니다. 군병들은 놀라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마침 무덤으로 찾아왔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을 합니다. 5-6절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뛰어오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됩니다. 눅 24장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서 용기와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내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살아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갔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다하여 따랐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죽음은 청천병력과도 같습니다. 희망이 상실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부활의 소식은 복음이요, 기쁨의 뉴스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만 기쁨의 뉴스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마치 일본이 미국에 의해 항복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게 되어 우리에게 구원이 확정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축복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거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들어도 마음이 강팍하여 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가족들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이웃과 친척들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족, 친척, 이웃, 직장의 모든 동료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왕하 7장에 문둥이들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양식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여 목숨을 구한 사건이 나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 성을 포위해서 이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안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급기야 백성들이 자식을 잡아먹는 식인 행위를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고 가슴을 칩니다. 그 즈음에 성문 밖 문둥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먹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주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람 진으로 가서 음식을 구하려 갑니다. 여기서 굶어 죽으나 적지에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이 적지에 갔을 때에는 적군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음식과 장비는 그대로 있는데 군사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군대의 소리를 들리게 해서 이들이 모든 것을 두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둥이들이 성안으로 달려가 이들에게 성 밖의 상황을 전했던 것입니다. 문둥이들이 전한 소식은 이들에게는 생명을 구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도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에게는 생명을 공급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도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부활을 합니다. 신자도 부활합니다. 불신자도 부활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지만 불신자들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당할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증거 합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거기에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합니다. 나 하나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살아나신 예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신비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경배해야할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에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일을 예배의 날로 드립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말씀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약과 신약의 주인공이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열방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합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높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삶의 최고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삶도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일 때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롬12:1-2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단지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드리는 넓은 의미의 참된 예배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세대의 잘못된 문화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로서 날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의 삶이되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도덕이 타락해져 갑니다. 어디에도 우리의 삶을 만족시켜줄 대안이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고 그분을 높일 때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악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승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장차 우리도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대열에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장치 다가올 영광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의미 있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아나셨느니라/마28:1-10
2004-06-18 10:47:42   read : 209


78세난 어느 노인이 신약성경을 다 읽고 나서 그 성경에서 가장 감명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 노인은 두말하지 않고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 S 웨일'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부록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하나의 환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분명한 사실로 네 복음서와 그 밖의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을 증명하는 분명한 것은 빈 무덤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자 노력해 보았어도, 그 빈 무덤의 확실한 증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과 함께 성서증언자들의 증언이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낸 서신 가운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께 전해드린 말대로, 여러분은 복음을 굳게 잡고 있으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그 복음으로 여러분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고전15:2-6)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드림으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체험적인 역사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증하게 하는 체험입니까?

생명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장례과정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많은 향료와 깨끗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싸서 무덤에 장례 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이 는 그곳을 지켜보았습니다.(요19:39-42, 마27:61)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이번에는 자기들의 손으로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해 서둘러서 향품을 사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인고로 기다렸다가 다음날, 날도 새기 전에 서둘러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막16:1)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무덤의 문에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치울 지를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무덤문의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천사가 돌문을 굴려놓은 것입니다. 천사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다는 것은 죽은 자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의 대상으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죽음과 사망을 정복하신 분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의 그리스도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살리심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무덤과 같이 죽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생명의 사람으로 살리시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의 사람으로 살리십니다. 어둠의 삶에서 빛의 삶으로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보았던 부활의 역사를 오늘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망과 죽음인 무덤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지금 믿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 생명의 역사는,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하는 새 생명을 체험하는 역사입니다.
눈먼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은 하늘 높이 날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지금 네 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그러자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제 연이 지금 하늘 높이 날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넌 볼 수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지?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저는 지금 연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잡고 있는 이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것을 보아서 제 연이 하늘 높이 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목격하고 확인하지 못할지라도 부활의 주님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주시는 살아 계신 주님을 깨닫고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사람으로 살도록 팽팽한 능력으로 당겨주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에 부활의 주님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강과 뜨거운 마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하여 달려갈 때에 부활의 주님은 여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하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에 여자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의 '평안하뇨' 라는 말 '카이레테'( )는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가운데 문을 꼭꼭 닫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큰 평강 과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이 있음을 볼 때에 부활의 주님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친구에게 쓴 편지가운데 기도교인들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장례를 위해 묘지로 갈 때도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 노래를 부르고 행진한다"
부활의 주님과 살아가는 사람은 절망에서도 그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평강과 기쁨의 사람들임을 말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삽니다. 이 평강은 우리 가운데 임하는 평강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평강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이 평강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이 평강이 함께 하기를 기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이 평강이 넘쳐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 평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후에 제자가운데 어떤 두 제자는 큰 슬픔과 함께 자신들의 갈곳을 찾아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절망과 불신앙으로 차가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대화로 성경의 말씀을 풀어 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24:32) 고 고백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이신 요한 웨슬레 목사님도 한때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같았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에 가서 선교했지만 실패로 실망과 낙심하여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죄용서 받았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회의와 낙심가운데 올더스 게이트 거리의 어느 작은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 강해를 듣다가 마음의 뜨거움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후 웨슬레는 "예수께서 나의 죄를 지셨고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평강과 기쁨과 함께, 확신의 뜨거운 마음과 주님나라의 일을 위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과 차가운 마음은 살아 계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평강과 기쁨의 사람이 되고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함으로 평강과 기쁨의 사람,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요한복음 20:22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더럽고 악한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어떤 영으로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더럽고 악한 영은 사단에게서 나오는 영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더럽게 행동하고 악하게 살아갑니다. 비겁하고 흉악하며 파괴하고 멸망되게 합니다. 이 더러운 영은 사람의 본능을 도구로 삼아 인간을 철저히 욕망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더러운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 죄인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무엇이 잘못이고 부끄러움인지를 깨닫지 못하도록 무감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생명파괴와 음란과 사치와 방종과 타락과 정치적 경제적 혼란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만든 더러운 인간역사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은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성품이 되게 하고, 하나님말씀의 가치와 하나님 뜻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이상으로 삼고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받으라고 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성령)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요15: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진리의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 부활의 주님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열린우리당 유시민 국회의원이 교회 폄하 발언이 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유 의원은 한 인터뷰 중에서 "많은 교회의 설교들이 대중을 무지와 미몽 속에 묶어놓고 있으며 사람을 마취시키는 서비스업으로 생각한다"고 밝혔고, "밤에 교회네온사인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엄청 무섭다. 끔직하다"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교회를 다 때려부술 것, 종교는 무섭지 않지만 한국교회는 무섭다"고 했습니다.
유 의원의 발언대로 한국교회의 강단이 사람들을 무지와 미몽 속에 묶어놓고 마취시키는 서비스업을 하고 있는지, 또는 교회가 예수님이 오시면 다 때려부술 대상이 되었는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교계에 비난이 일자 유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과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언 내용중 성서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에 비춰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교만, 도시의 밤을 밝히는 교회십자가 아래서 이웃과 나라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 인간과 인간의 삶을 깊고 넓게 이해하지 않은 채 논리의 실타래만 붙들고 살아온 점, 목회자의 설교를 비난한 것처럼 오해가 생겨 누를 끼친 점을 반성하며 회개한다"고 밝혔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강단이 일개 국회의원으로부터 교회를 뿌리째 흔들어 놓는 대상이 되었는가 고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믿기에 그러한 염려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은 오늘도 교회 안에서 교회의 강단의 말씀사역을 사용하고있다고 믿고 있으며, 성령께서는 교회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태동시키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 속에서 사역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으므로 교회가 갱생과 변화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인생을 살다가 가신 위대한 분만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셔서 영생의 삶을 주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곧, 구원자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살리셔서 우리가운데 생명과 진리의 삶을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기쁘게 하셔서 능력과 평강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진리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 분은 2000년 전 무덤에 묻히셔서 그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 분과 함께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아멘.



이것이 부활 신앙/마28:5-10
2004-06-17 15:34:58   read : 166


예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주님의 선언과 함께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구원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값을 받으셨고, 영원 구원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3일만에 다시 사셨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였음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이들은 모두 부활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어떤 이는 무덤가에서 앉아 좌절하며 슬퍼하는 신앙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하신대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망권세를 밟고 죽음의 무덤을 터트리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주는 축복의 말씀을 “부활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찾아보면서 은혜 되고자 합니다.

이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부활신앙으로 삶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부활 신앙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Ⅰ.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그 나무의 아름다운 열매라면 십자가의 고난은 그 나무의 뿌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사람만이 부활의 영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1)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십자가의 고난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때의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바로 이 고난이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있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을 살면서 내가 주의 뜻대로 살려는 고난이 바로 부활 신앙이 될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님 뜻을 따라 살기 위하여 고난을 감당할 줄 아는 신앙이 부활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2) 자기 사명, 즉 직분을 담당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도성인신’ 하신 것은 즉 사람으로 오신 것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할 자였음을 태어날 때부터 사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명을 담당키 위한 고난이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고난을 담당하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의 직분, 제직의 직분, 교사의 직분이 그 직분을 담당키 위한 고난을 담당할 줄 아는 신앙이 부활신앙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음같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에게서 부활신앙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예수의 고난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주님의 이웃이었습니다.
오늘 믿는 성도들은 내 이웃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죽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6시간동안 달려서 쓰리고 아픈 고난을 받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게 됐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이들은 이웃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나의 이웃,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더 나아가서는 나의 원수까지도 나의 이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위하여 그의 영혼과 육을 구원키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하여 담당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모든 고통과 사단의 시험을 밟고 일어나는 것이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내게 찾아온 많은 고난을 밟고 일어나서 부활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무덤가에서 움추리고 슬퍼하는 신앙에서 시련과 불시험을 밟고 일어나는 부활신앙입니다.

Ⅱ. 악의 권세를 밟고 일어난 사건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여 무덤에 넣었으나 그 죽음의 무덤에서 살아서 나온 것이 부활이었습니다.
그것도 죽은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습니다. 정말 너무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신 것은 그때 당시나 오늘이나 톱 뉴스거리이며 놀랄만한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하여 급속히 유대 전역에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당시 실의에 빠지고 절망에 빠져 있던 이들이 일어나 부활을 믿는 부활의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놀랄만한 사실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마태복음 28장을 기록했고,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세밀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을 믿는 사람은 모두 부활 신앙을 소유할 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 부활신앙”이라고 했습니다.

1)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기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밟고 일어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불신의 세력과 악마의 권세와 찾아오는 시험의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코 굴할 줄 모르는 것이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믿음에 굳건히 서서 날마다 주께 나가는 신앙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날마다 이기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큰 기쁨과 미칠듯한 큰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채웠던 이것이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부활신앙은 큰 기쁨이 넘치는 복음의 소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이들이 기쁨이 없이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이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신앙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드린대로 큰 기쁨 충만하여 믿음 생활하는 것이 곧 부활 신앙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이 큰 기쁨의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소리를 듣고 큰 기쁨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달음질하여 뛰어다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복음과 참된 살아있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이웃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전하여 주려고 애를 쓰며 노력하고 살아갑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 복음을, 이 기쁜 살아 역사하는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여 주고 살아갑니다.

전하기를 꺼려지고 자신감이 없는 것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신앙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놀라운 부활신앙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갑시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줄 아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을 안고 이 기쁨과 복음을 전하면서 날마다 이기면서 사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 부활의 기쁨/마28:8-10
2004-06-07 10:23:37   read : 111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여자들이 먼저 차지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이후에 먼저 보여주셨나요? 여자들에게 보여주셔야 소문이 속히 날 것 같아서였다는 재담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면 몇 가지 달라지는 게 있답니다.
1)외모에 신경 쓰지 않던 이가 꾸미기 시작한답니다.
요즈음 말로 얼짱 몸짱이 되려고 애쓴답니다. 몸짱 열풍을 몰고 온 사람은 일산에 사는 한 가정 주부 정다연씨(39)였답니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마른 비만이라는 진단을 받고 근처의 휘트니스센터에서 몇 년간 몸을 단련했습니다. 이후 늘씬한 몸을 만든 정씨는 자신의 사진과 함께 트레이닝법을 모 인터넷사이트에 연재하고 이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국 최고의 인기인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여자가 갑자기 몸치장하면 뭐라고 표현합니다.
2)열등감이나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던 이가 쾌활하고 말이 많아진답니다. 기쁨이 생긴답니다.
3)삶에 의욕이 없던 이가 갑자기 생기가 넘치게 된다고 합니다.
4) 관심이 없던 이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그리움을 알게 된답니다. 여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위하여 무덤을 찾아갔다가 살아나신 예수를 만나고 기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20절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이 ‘기뻐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그렇게 사랑하던 여인들이 죽은 예수가 아닌 살아나신 예수의 모습을 보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문제는 기쁨을 기쁨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에게 큰 기쁨입니다.

1. 부활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이유는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바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입니다. 누구도 이 죄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선하게 살아라.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고 말은 할 수 있으나 내가 너의 죄를 사하였느니라 이 말은 아무도 못합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죄는 벌이 따릅니다.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죄는 불행의 근원입니다. 범죄하고 행복하다는 이를 보았습니까? 마음에 항상 불안합니다. 양심에 자책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죄를 범하면 일이 잘되지 않습니다. 죄는 축복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행 난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다고 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수시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죄 값을 담당하려고 돌아가셨는데 부활하지 아니하였다면 죄 값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끝납니다.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사형선고 받은 자의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형을 면하는 길입니다. 죄수번호 몇 번 당신은 감형 받아 사형선고에서 3년형이다 라고 하였다면 3년이라는 세월이 길지도 않고 옥중에서의 삶이 그렇게 고마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할 수 없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승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기쁨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승리를 선언하신 날입니다. 내가 이겼다. 이긴다는 것처럼 좋은 게 없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서 매 게임마다 집니다. 지는 선수는 선수대접을 못 받습니다. 군대가 전투를 합니다. 졌습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겨야 삽니다. 이겨야 환영받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깁시다. 영적인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부활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승리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영광입니다. 실패는 비극입니다. 서러움입니다. 억울합니다. 안쓰럽습니다. 이깁시다. 절망에서 이겨야 합니다.
왜 낙심하십니까? 예수께서는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산을 옮긴다고 하였습니다. 낙담이라는 산들을 옮길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적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이성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힘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망을 이겼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여기 기뻐하였다는 말은 전율할 만큼의 기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항의를 못합니다. 사망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치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초라하게 보입니다. 죽음을 이기거나 극복한 이는 없습니다.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다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는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더 오래 사는 것을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더 오래 사는 연구는 할 수 있어도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지는 못합니다. 연구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겁내지 아니 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믿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바울은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를 완전히 사형해도 좋다는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여 자기들의 법으로는 합법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내려 드디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다리를 꺾지 아니하여도 되었습니다. 확실하게 죽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은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죽음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합니다. 사람이 이사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 죽었다고 말합니까? 이사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육신이 죽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세가 넘으면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밝히 말하기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의 집에서 생명의 집으로 이사하였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5:24)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말대로 사망입니다. 믿는 사람은 이사하는 것입니다.(할렐루야)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같이 우리도 예수의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기에 죽음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얼마 전에 미국 뉴스위크지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 중에 94%는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77%는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불과 24%랍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도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신앙으로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진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정의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정의를 부르짖다가 비참하게 패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사형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재판 자체가 불의 한 거 였습니다. 최고의 법정에서 예수는 죄를 찾지 못했다 라고 하였습니다.(요 18:38)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권면하기를 저 옳은 사람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라고 까지 하였습니다.(마 27:19) 죄 없는 사람도 죽이는 것은 불의입니다. 불법입니다. 세상은 불의가 이기는 것 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세상은 불의가 이기는구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아니다 불의는 이기는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으시는 이가 있습니까? 불의가 이기지 못합니다. 의가 승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의롭게 살면서 힘든 분들이 계십니까? 기다리세요. 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잘살려고 하기보다는 의롭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불의한 중에 무엇을 기대할게 아니라 의롭게 살려고 하여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불의가 무엇입니까? 옳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명분을 찾으려 하지 맙시다. 자기가 옳다고 외친다고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의가 의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은 분명히 불의에 의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재판 자체가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죽였습니다. 불의는 일시적으로 이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의가 이기는 것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일시적인 승리를 추구하지 맙시다. 바르게 옳게 살려고 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의를 지키는 이들에게 확실한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힘들어도 의롭게 사는 이들에게는 기쁨입니다.

3. 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한다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고전 15:~) 나무를 심었습니다. 사과나무입니다. 첫 열매가 홍옥이라는 사과입니다. 다음해에는 국광이라는 사과가 여는 게 아닙니다. 첫 열매대로 홍옥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도 죽습니다. 언제인가는 죽습니다. 건강을 관리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더 오래 살 수는 있는지 모르나 죽지 아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다시 삽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 부활하느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었다면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공중에 휴거됩니다. 이때 부활은 1차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계속 무덤 속에 있다가 예수께서 공중 혼연 잔치와 천년왕국이후에 1차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 모든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이는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차 부활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이 믿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1-2)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도 소망이 있는 이와 없는 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더욱 비극입니다. 틀림없이 지옥 갑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힘들다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괴롭다고 호소합니다. 하기야 자살하는 이의 심정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신앙으로 희망을 가지세요.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이 삽니다. 가정이 삽니다. 우울증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게 영적 우울증입니다. 영적 우울 증세는 이러합니다. 1)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무력합니다. 유혹이 왔을 때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말 한 마디를 듣고도 시험에 듭니다.
2) 신앙생활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우왕좌왕 합니다.
3) 영적 생활에 불만이 많고 신앙생활에 흥미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불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입에서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있는 신앙은 가장 건강한 신앙상태입니다. 4) 은혜생활을 깊이 있게 하지 못합니다. 육신적인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게 된다고 하는데 영적인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큰 손해를 입습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늘 나라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 첫째,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기쁨입니다. 부활을 믿고 기쁘고 기쁘도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둘째,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기셨습니다. 승리합시다. 세상에서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기쁨입니다. 사단의 세력을 이깁시다. 지고 우는 자가 되지 맙시다. 이기고 기뻐합시다. 육신생활을 승리하여야 합니다. 가정생활도 승리하여야 합니다. 내가 처한 곳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확실하게 이기고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3:11) 실패하였습니까?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약하여지면 지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세요. 용기를 내세요. 예수가 우리들에게 승리를 보장하셨습니다. 이기고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식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해서 이 병원 저 병원에 전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낙심은 마귀가 주는 은사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불행을 치료하는 한 가지 약이 있는데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기에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무리 얼짱 몸짱 하여도 나이가 들면 별 볼일 없습니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은 소망 있는 삶입니다. 소망은 감옥이라도 평안과 기쁨입니다. 절망에도 희망의 창문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실패하였어도 실패한 것으로 끝날 뿐이고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3월 8일 그 유명한 워싱턴 대행진에서 한 연설 중에 나는 꿈이 있다 라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려움이 첩첩이 쌓여 있어도 그러나 나는 꿈이 있다.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미국내의 꽉 찬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부활신앙으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넷째, 예수의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새벽에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 여자들을 제일 먼저 만났을까? 자동차 중에서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무엇입니까? BMW라고 합니다. 여자들의 입이 바로 BMW라고 합니다. 즉, Big mouth woman의 약자입니다. 여자분들의 입이 빠릅니다. 우리는 BMW가 되어 예수 부활하셨다 라고 힘있게 신속하게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늦은 듯 한 기적/마28:1-10
2004-06-05 10:35:39   read : 88


우리 주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도 그 부활에 참여할 것을 믿습니다. 부활을 약속받고 그 부활에 참여하게 될 우리들은 이 세상의 마지막 때 심판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확신하십니까? 부활의 약속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를 또한 행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부활의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부활을 확신하며 사는 사람들은 늦은 듯하나 느긋하게 끝까지 견디며 살아가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은 가장 늦게 일어났으면서도 가장 큰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의하시지요?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손마른 자도 펴게 하셨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병자들이 치유기적을 요구하고 예수님이 고쳐주시고자 할 때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의 생애동안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적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적보다 더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 곁에 끝까지 함께 하지는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남자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부활기적의 첫 증언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 제자들만이 첫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가장 늦게 일어날 부활기적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남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어도 여자 제자들은 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늦은 기적이었지만 가장 위대한 기적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도 늦어지는 듯한 기적이지만 부활을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크고 작은 기적으로 엮여있습니다. 병에서 기적처럼 낫기도 하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자신의 길이 열리기도 하고, 둘도 없는 좋은 기회가 갑자기 자기에게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적의 연속 속에 사는 것이 우리들에게 좋지만 꼭 잊지 말아야 할 기적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도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부활의 기적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끝났다 싶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고 견디는 것이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환경은 우리로 기다리는데 매우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다리고 견디는 일을 잘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보사회로 들어서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삶의 태도는 더욱 속도전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기다리는 것이 약해집니다.
모든 것을 빠르게 이루려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느리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제시한 책이 있습니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갑자기 달려드는 시간에게 허를 찔리지 않고 허둥지둥 사간에게 ?겨다니지도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로 알수 있는 지혜라고 합니다. 그러한 능력은 바로 ‘느림’인데, 이는 우리에게 시간에다 모든 기회를 부여하라고 속삭인다는 것입니다.
빠르게 진행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자연발효를 통해 숙성시키는 음식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는 시간이 걸리는 문제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늦더라도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점에서 부활의 신앙을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환경과 지혜를 주신 것 같습니다.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늦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이루도록 말씀한 명령과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며 기다립시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늦더라도 느긋하게 기다리며 살 줄 아는 사람은 필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필연이라 함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을 따라 살며 이루어지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필연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연관된 기적을 생각해 볼 때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사람들에게 행하여 주신 기적들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기적들이었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한 것도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도 다 그때 그때 필요한 대로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기적은 달랐습니다. 이는 이미 세 번에 걸쳐 예언된 것이요 때가 되매 하나님이 성취시키신 기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필연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남자 제자들은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필요를 우선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필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필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필요에 따라 사는 사람과 필연에 따라 사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장 당장 필요한 것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면 종국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살아갑니다. 필요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양과 같습니다. 양은 눈 앞에 있는 풀과 나뭇잎을 좇아 따라갑니다.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따라 갑니다. 그러다보니 낭떨어지에도 떨어지게 되고 가시덤불에 걸리기도 합니다.
반면에 부활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필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이루신다는 필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목표를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앞뒤를 잘 살펴보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어디까지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면서 앞으로 어떠한 내용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피며 살아갈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좀 늦더라도 꼭 이루어야 할 당위성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더 좋은 풀밭과 맑은 물가를 찾아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와도 같습니다. 목자는 잠시 돌짝밭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잠시 내려갔다 올라가야 하는 도랑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며 양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부활을 확신하며 사는 사람은 목자와도 같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고난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필요에 따라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필연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늦더라도 필연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을 때 우리는 좀더 믿을 수 있는 개인의 삶을 만들어 가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서로 예측할 수 있는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꾸준하게 이겨나가는 삶을 살고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필연에 따라 살아간 한 사람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라톤의 영웅 아베베를 잘 압니다. 그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맨발로 뛰어 우승하였고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운동화를 신고 뛰어 우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차를 타고 다니다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4년 후 바퀴의자를 타고 런던 장애인올림픽에 나와 또 다시 우승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재능을 따라 그 길을 끝까지 달렸던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삶이 그러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공부를 해도 필요에 따라 공부하는 사람과 필연에 따라 공부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공부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당장 써먹을 것만을 공부합니다. 당장 대학에 들어가는 문제만 생각하고 공부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필연에 따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생 전체를 걸쳐 공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재능인줄 알기에 계속 공부하고 그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자세로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가 오늘 어려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필요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필연보다는 당장 눈앞에 필요한 필요에 따라 살아가다 보니 깊이가 없습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려면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동안 남의 기술을 빌어다 사용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빌려올 때가 없습니다. 기초과학과 기초학문이 발달하지 않아 새로운 필요에 따른 기술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제 후퇴하고 있습니다. 필연에 따라 나라가 움직이면 바로 꼭 필요한 기술과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남의 것을 빌어다 베껴 먹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이 나라에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부활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부활이 전하는 필연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음성을 들으며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여인들은 천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남성 제자들은 이를 직접 듣지 못하였습니다. 여성 제자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늦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필연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하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적을 믿고 늦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제가 하나님 입장을 헤아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항상 그 길을 확신 가운데 가니 잘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자세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는 바로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점점 더 끝이 좋아집니다. 처음에는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됨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러한 삶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렇게 일어날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끝까지 견디는 삶을 의미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 약속되어 있는데, 바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매우 어렵다고 합니까?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세요. 부활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이해하시고 살아가세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과 오늘 현실 속에서 필연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세요. 부활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과 정신이 우리의 삶을 유익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부활절 이후/마28:5-6
2004-06-02 12:38:04   read : 62


부활절 이후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절을 지나고 그 다음 주일, 부활 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만나기도 하고, 또 뵙기도 했습니다.
그 때 상황이,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묵상해 보니 네 가지 단어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격, 혼란, 흥분, 두려움” 이라는 네 단어입니다.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어느 분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다 관을 묻고, 집으로 돌아 와서, 3일째 되는 날 남편의 묘소를 찾아 가려고,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돌아 와서 “여보” 라고 말을 한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기절하거나 충격을 받아 쓰러질 것입니다. 3일전에 분명히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가시관을 쓰시고, 대못에 박히시고, 창에 허리를 찔러 완전히 피를 다 쏟고,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내고, 돌로 단단히 묻어서, 막아서, 봉해진 사람이 살아 났다는 소문과 함께 여기 저기 나타났다고 하고, 그리고 제자들 앞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들에게 나타났을 때 제자들의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이것은 충격중의 충격일 것입니다. 또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못 보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부활 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내 손으로 만져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엄연한 사실이 있는데 죽은자가 어떻게 살아 날 수 있느냐는, 이성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느냐, 그래서 이성과 신앙의 갈등, 지성과 믿음의 혼란, 또 신앙과 현실의 혼란과 갈등이 온다는 것은 대단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마태 복음 28장 16절에도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라고 했고, 또 마가 복음 16장 14절에 보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하고 믿지 않음을 책망 하셨습니다.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보지 못하였다 하고, 어떤 이는 믿는다 라고 하고, 어떤 이는 믿지 못한다 하는 그런 혼란 속에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들 중에 어떤 이는 너무 기뻐서 흥분 했을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는 위대한 기적을 베푸셨던 분인데, 죽음으로 끝날 수 없다, 살아 나셨다 라고 외치는 흥분된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염려에 가득 찼을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망갔던 사람들은 주님을 무슨 면목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저들의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힘든 사람이 베드로 였을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 네가 닭이 두 번 울기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시니까, 죽을 일이 생겨도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큰 소리를 치지 않고, 그렀습니까?.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했으면 나중에 면목이라도 있을 텐데, 장담하고, 맹세했는데, 3번씩이나 어이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비겁하게 모른다고 부끄럽게도 실수한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주님을 어떻게 만나고, 그 분을 어떻게 다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여러가지 갈등과 두려움과 흥분과 혼란과 충격이 저들에게 있었을 겁니다. 이 때에 주님이 40일을 같이 계시다가, 저들에게 확실하고 분명한 메시지와 명령과 약속을 주시고 떠나십니다. 두려움과 흥분과 혼란과 충격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세가지 주셨습니다.

첫째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같이 가주마 하는 약속인 것입니다. 두 가지는 명령이고, 하나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는 Stay, 머물러라, 하나는 Go, 가라는 말씀을 주시고,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는 I will go with you 함께 가겠다는 약속을 주신 겁니다.

첫 번째 이 기다리라는 말은 누가복음24장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거하라, 머물러라, 떠나지 말고 여기 있어서 그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켜서 오순절을 거친, 성령 충만한 경험을 거친 다음에야 그 다음 명령을 준행할 수 있는 단계적 명령이었습니다. 성령은 중생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구원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내주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내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먼저 우리를 중생하게 하십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아니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본 사람도 만난 사람도 없습니다. 시기적으로 2,000년 전의 분입니다. 장소는 저 중동지역의 팔레스타인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신 분이었습니다. 인종적으로도 우리는 한국인이고, 그 분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 분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결혼하지 않고, 로마의 사형수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운명한 한 청년의 이름입니다.

도대체2,000년 후에 관계없는 한국 사람이 미국에 살면서 그 가난한 청년 한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 수 많은 사람이 따를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 때의 사건과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친히 인쳐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믿게 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와 주셨으므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므로 믿게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결정은 내가 하지만,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고, 믿게 해 주셔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해 주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구원 받을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예수 믿을수 없기 때문에 예수 믿는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구원의 영이십니다. 그 후에 성령은 우리는 믿게 하신 후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내주라는 말은 거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딘가 우리의 거주지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곳에 있던지 살 수 있는 주소가 있듯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 안에 거주지를 정하고, 성령의 전을 삼으시고,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이시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어떤 분은 집 주소만 정하고, 집은 정해 놓고 늘 돌아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시고, 한 번도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거기에 계시고, 내실, 재실 하시는 분으로 성령이 같이 계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중생의 영이시고, 구원의 영이시고, 함께하시는 내주와 내재의 영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너희는 이 성에 거하라. 여기 머무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중생하지 않고, 뛰어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능력과 성령 충만함을 받기 전까지는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나가려면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오순절까지 제자들의 성령 충만을 기다리면서 기도했으며, 성령이 강림하시는 오순절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가라, Go and Preach! 가서 전파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네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명령인 것입니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저들은 뜨거워져서, 반드시 꿈을 꾸고, 성령 하나님의 신이 임재 하시면 비전과 꿈을 갖게 되며, 성령의 거룩한 힘이 오면 선교할 열정과 꿈을 주시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갈등과 혼란과 충격과 기쁨 속에서도 혼란 속에 있어서 이 두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끝까지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가기 위해서 성령 충만 받아야 하며, 성령 충만 받아서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의 비전을 말하는 것이고, 선교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 후에는 선교 신앙이 되어야 말씀인 것입니다. 부활절 이후에는 오순절이 있고, 오순절 후에는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이 따라 온 것처럼, 부활절이 지나면, 성령 강림절, 성령 강림을 통하면 반드시 세계 선교하는 비전과 꿈이 우리에게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현대 야구의 영웅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하나는 Chicago Cubs의 Sammy Sosa, Boston Red Sox의 Pedro Martinez 선수인데 이 두 선수는 야구의 영웅입니다.
두 사람은 일년에 합치면25million 달러를 받습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이 오늘 여러분이 보신 비디오의 도미니카 출신입니다. 이 선수들의 스토리를 보면, 아주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Sammy Sosa 는 1969년 11월12일 7 형제 중의 5번째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구두 닦는 일과 오렌지로 주스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세차를 하며 돈을 몇 푼씩 받아 집의 생계를 도와 주는 아주 가난한 소년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했습니다.

Pedro Martinez 선수도 Manoguayabo 에서 태어났는데, Sammy Sosa 의 출생지와 멀지 않은곳이었습니다. 이 선수도 7형제 중에 5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했는데, 가난하게 태어나 그 역시 생존을 위해서 막일을 했습니다. 놀이라고는 아무런 장난감도 없어, 나무 가지를 잘라 야구 배트를 만들고, 양말을 둥글게 말아 야구공 대신으로 만들어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13세 때 Sammy Sosa 에게 어떤 미국인이 그 곳에 회사가 있어 방문 했던 차에 그 에게 구두를 닦게 했습니다. 정성스럽게 일을 하는 그에게 가끔 선물을 주면 감사 해하는 Sammy Sosa 의 단골 손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미국인이 야구 글러브 하나를 그에게 선물합니다. 이 선물 하나가 이 소년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 소년은 글러브를 받고 열심히 운동을 했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2년 후에 이 소년은 필라델피아 팀과 계약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선수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한 감독이 그의 재질을 알아 보고 데려 다가 15세 소년을 선수로 계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구 협회에서 미성년자라고 해 계약이 결국 파기 되었지만, 이렇게 시작이 돼서 그는 여러 구단을 거쳐 마침내 Chicago Cubs의 선수로 세계적인 영웅이 됩니다. 98년의 한 해의 한 시즌에서는 홈런을 62을 쳤습니다. 한 달에 20개의 홈런을 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여러 종류의 야구의 상을 받고 계속해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Pedro Martinez 선수는 투수입니다. 뉴욕 Yankees 는 Pedro Martinez 선수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게임 자체가 이루어 지지 않을 뻔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잘 던지는 투수를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98년에는 MVP상을 받고, 99년에는 Hank Aaron 상을 받고, 역사에 없이 2년을 계속해서 최고의 상이라 하는 CY Young 상을 99년, 2,000년 연속으로 받은 선수는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 선수는 미국의 영웅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야구 선수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두 선수뿐만 아니라 미국의 메이저 리그에 25%가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라는 겁니다. 또 놀랍게도 이 선수들은 Saint Pedro de Macoris 라는 동네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한 동네에서 모든 야구 선수들이 배출 되었다는 겁니다. 조사해 보니, 이 미국 신사가 구두를 닦으면서 글러브 하나를 전해 주고, 그 소년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모습을 보고, 미국에 돌아 와서 야구 선수들이 쓰다 버린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그 동네 아이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겁니다. 25년 전의 이야기 입니다. 그 동네 아이들이 야구 훈련을 했다는 겁니다. 이번에 저는 도미니카를 방문하면서 축구로 선교를 하려고 했는데, 축구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오래 전에, 25년전에 미국 신사, Bill Chase라는 사람인데, 그가 아이들에게 야구 도구를 갖다 주고, 그 때를 시작으로 20년 만에 미국 전체 리그를 휩쓴 야구의 위대한 영웅이 나왔고, 미국 역사에 남는 위대한 홈런 기록을 갱신하는 선수가 나왔고, 세계적인 투수가 배출 되어 미국 야구를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 이끌어 놓고, 선수의 25%가 다 그 마을 출신이라고 하는 믿을 수 없는 통계를 오늘 보면서, 저는 오늘 야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구 글러브를 갖다 주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말씀 드린다면, 오늘 우리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 우리가 전해주는 사랑의 이 복음이 25년 후에 과연 이 위대한 영웅을, 신앙의 위대한 거인을 만들어 간다는 비전을, 꿈을, 가치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비전과 꿈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대가 경제 자본주의 체재에 있기 때문에 시간을 내는데, 가치를 잽니다. 돈을 투자할 때 돌려 받을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시간이나 물질을 투자 할 때는 그만한 이윤과 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고 하지, 그렇지 않으면 안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사역이 이 가치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을 볼 수 있을 때만 시간도 물질도 투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야구 배트와 다 낡은 몇 개의 글러브를 갖다 준 결과가 오늘 미국을 휩쓰는 야구의 위대한 영웅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을 전해주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저들에게 무엇인가를 복음과 함께 줄 수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을 만들어 낼 줄 믿습니다. 오늘 보신 도미니카와 여러분의 교구가 맡은 남미의 여러 선교지를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꿈을 심고,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물질을 쏟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에 혼두라스에 우리가 세운 학교의 개교에 앞서 다녀 왔습니다. 그 곳의 어린이들은 길거리에서 맨 발로 먼지를 뒤집어 쓰며 짐승같이 뛰어 다니며 형편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갈 때마다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학용품을 전달했습니다. 지금 그 마을 전체가 우리가 전해준 티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어른,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우리가 전해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만장의 티셔츠를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킨다고 하니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비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 현대식의 훌륭한 설비로 뉴욕의 어느 학교보다 잘 지어진 학교에서 몇 백 명의 어린이들이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을 잘 교육시키면, 위대한 일꾼들이 나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부모를 모아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하고 수업료를 얼마나 내야 하나 하니, 한 달에 수업료 백 불은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 그 동네가 가난하여 10불 낼 수 있는 가정도 반 밖에 되지 않아 우리가 95불을 지원하고, 5불만 받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5불 내기도 어려운 가정은 무상으로 공부를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이들을 입학 시켰습니다.

이제 그 곳에서 길거리에서 짐승처럼 다니던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을 받아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이 될 줄 믿습니다.

뉴욕에 있는 우리들도 여름 방학에는 자녀들을 모두 데려 다 하나님 말씀으로 키워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 투자해야 되고, 교회는 긴 안목을 내다 보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투자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과 사랑하는 어린 아이들이 여름 동안 내내 텔레비전 앞에서 우두커니 앉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2세들을 좋은 교사들이 여름 동안 잘 가르쳐서 훌륭한 신앙을 한 차원 발전시키게 될 줄 믿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께서 이 위대한 꿈을 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가치를 부여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이런 우선 순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하십시오. 가치 있는 곳에 시간을 투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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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고마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주님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주님 가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혼란 중에도 배우게 됩니다. 충격 속에서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고,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다리라, 머무르라, 그러나, 이제는 가라, 그리고 전파하라, 외치라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같이 가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가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주님의 이 명령의 뜻을 이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주님! 가치 있는 것과 영원한 것에 눈이 열려서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 할 수 있게 하시고 쓸데 없는데 낭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가 작은 일과 보잘것없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를, 시간과 물질의 투자를 쏟게 해 주시고,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이 나올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 살아나셨느니라/마28:5-6
2004-06-02 12:37:39   read : 58


사순절, 부활 주일을 지내며 우리는 바쁜 시간을 지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매일하고, 금식 기도를 하고, 오늘 새벽에 부활절 연합 새벽 예배, 또 낮 예배까지 바쁘게 지냈습니다. 교회 생활 하는 것이 바쁩니다. 성탄절이 지나면 수난절, 수난절이 지나면 부활절, 부활절이 지나면 오순절, 오순절 지나면 감사절, 감사절이 지나면 다시 성탄절, 계속해서 모이고, 이렇게 지내다 보면 바쁘게 지냅니다. 이렇게 주님 중심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절기를 중심으로 계속 돌아 가다 보면 결국 주님 품으로 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Circle인데, 교회 캘린더대로 늘 바쁘게 지내는 것은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 Circle을 벗어나면 복잡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바쁜 것이 낫지, 세상에서 복잡해져 좋은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저도 바쁘게 지냅니다. 제가 교회 일로 바쁘지 않고, 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노름하러 다니고, 나이트 클럽에 가는 걸로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낸다면 그것이 복잡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Circle이 늘 주님 안에서 돌아가는 것이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교회 일이 힘들다, 교회 일이 많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 절기이기 때문에 교회를 신앙적으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두 발 달린 자전거를 부지런히 패달을 돌려야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안 돌리면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원래 그렇게 열심히 해야 잘 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가다 세상으로 쓰러지게 되고, 넘어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즐거움으로 하는 사람은 축복이 되고, 날마다 신나는 일이 생기게 될 줄 믿습니다. 억지로 하는 사람에겐 힘이 들지만, 감격과 신나는 일을 하면 그것이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올 줄 믿습니다. 신나게 주님을 섬기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섬기면, 그것이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교회에 절기가 많고, 모임이 많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열심히 주님 중심으로 살아 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궤도에서 벗어나, 감사절, 성탄절, 부활절 무슨 상관 있느냐며, 관계없이 먹고 노는 날이라고 딴 궤도에서 돌기 시작하면 이 사람은 복잡해 지는 것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별들이 돌듯이, 늘 주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돌아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 해 주시고, 그 자체가 은혜요, 은혜를 사모하는 자체가 축복인 줄 믿습니다.

교회 생활의 창조 신앙과 부활 신앙은 가장 중요한 두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창조의 신앙이 모든 신앙의 기초라면, 부활 신앙은 모든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창조 신앙이 모든 신앙의 기본이라면, 부활 신앙은 모든 신앙의 중심인 것입니다. 창조 신앙 없이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듯이 부활 신앙 없이 기독교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부활절은 기독교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이고, 자체요, 중심이라고 말해야 될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부록이 아니라, 본론이고, 부활 신앙 이전에는 기독교도, 기독교인도, 교회도 없었기 때문에 부활에서 교회가 시작되고, 부활에서 교인이 시작되고, 부활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예수님께서 돌아 가셨다가 살아 나신 것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인 것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도 산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죽었습니다.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셨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아 나셨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천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구주 이신 줄 믿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맨하탄의 1836년에 세워진 오래되고 유명한 어느 신학교에서의 일입니다. 그 신학교에는 한국에서 온 교수 한 분이 계시는데, 종교간의 폭 넓은 교류를 위해서 한국의 스님을 한 분 초청했습니다.
참선의 깊은 관심을 가진 신학생들이 찬불가를 부르고, 살풀이를 하고, 불공을 드리고, 아멘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아니 성경에 맞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불교와 세미나를 하라는 이야기는 교리에도 성경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 나셨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가 다른 종교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교주의 무덤이 없습니다. 다른 교주들은 무덤이 있어, 무덤을 금으로 치장을 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있지만, 기독교의 예수님의 무덤은 여기다, 저기다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곳 저곳이라고 해 혼란이 옵니다. 도대체 어디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덤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라는 묘비가 없습니다. 시체 또한 없습니다. 부활 하셨으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가 없는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데, 그것은 부활 이라는 것입니다. Resurrection 이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죽었다가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흉내를 내고, 모방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죽었다가 사는 부활은 누구도 Copy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 났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부활 신앙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부활 신앙, 그를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진정한 문제를 해결 받고,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아침에 묵상하는데, 성령께서 예수 이외에 다른 소망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묵상을 해 보니까 사실 예수 안에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그렇게 무겁게 지고 가는 양심, 깊은 영혼 속에 있는 죄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도의 Ganges강가에 는 수 많은 오물들이 흘러갑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오물들이 그대로 강가로 흘러 갑니다. 그 강 근처에서 사람을 화장시켜서 그 재를 강가에 뿌리면, 극락에 간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 강물을 성수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장작이 모자라 타다만 시체를 그대로 강가로 던져 버린 그런 강물 속에 목욕을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그 물을 마시면 죄를 씻고, 거룩해 진다고 그 지저분한 물을 마시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죄 사함은 커녕 병균만 마실 것 같습니다. 물로 씻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찬 물로 빨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받는 이 진리를 부활 신앙과 연결 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셨으며, 살아 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행동에 옮긴 것이지만, 악은 속에 있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악한 생각들과 죄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 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우리가 이것을 해결하고, 치료 받고, 변화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속에 있는 악한 생각과 이 악의 생각을 치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사적인 이야기는 말을 안 하려고 애쓰지만, 해당 되시는 분은 용서하고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혹시 잘 못 전하면 듣고 제가 나중에 고치겠습니다.

누가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악과 죄의 근성을 바꾸고 변화 시킬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만 하실 줄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 하시는 그 분의 부활 신앙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Thomas Arnold 박사는 나는 여러 해 동안 역사를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문헌, 유물, 고증을 조사하던 중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 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사회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이해 할 수 있는 사건이며, 유물과 고증과 문헌을 참고하고, 역사를 조사한 결과 역사학 교수로서 확실하다고 고백 했다는 것입니다.

칼 버튼은 성탄절과 부활절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 Historical Fact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는 다고 하는데 자꾸 설명을 부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가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가 부활 하신 것을 믿습니까? 확실하게 믿습니까?
주님은 부활하셔서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하셨으니 잘 믿고, 주님 섬기며 주님 중심으로 살게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일생 동안 살다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 분의 능력에 붙잡혀 영원한 부활 생명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부활 신앙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부활의 능력이 삶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마28:1-10
2004-05-18 14:12:54   read : 68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줍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 자녀들이 슬퍼하고, 자녀의 뜻하지 않는 죽음으로 부모가 가슴 아파 하는 것은 죽음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오래살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로 몇 년 정도 오래 살 수는 있지만 죽음의 근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범죄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치뤄야 할 죄 값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죽음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후의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후는 제한적인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통의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인가?는 이 땅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멸망의 인간이 구원의 인간으로 확정되는 순간입니다. 부활은 주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첫 열매로 나중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기쁨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부활예배를 드립니다. 고난이 기독교의 뿌리라면 부활은 기독교의 열매입니다. 다른 종교는 창시자들의 무덤을 자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죽음이 우리의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절망과 패배의 인간에게 승리의 구원을 안겨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1.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금요일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토요일은 안식일이기에 하루 쉬었다가 안식 후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새벽에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혹시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가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면 백성들이 현혹당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다음날이 시작되는 새벽에 주님은 부활했습니다. 큰 지진과 함께 주의 천사가 내려와 무덤의 돌을 굴러 내렸습니다. 군병들은 놀라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마침 무덤으로 찾아왔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을 합니다. 5-6절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뛰어오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야 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됩니다. 눅 24장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서 용기와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내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살아나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갔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다하여 따랐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죽음은 청천병력과도 같습니다. 희망이 상실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부활의 소식은 복음이요, 기쁨의 뉴스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만 기쁨의 뉴스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마치 일본이 미국에 의해 항복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게 되어 우리에게 구원이 확정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축복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거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들어도 마음이 강팍하여 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가족들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이웃과 친척들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족, 친척, 이웃, 직장의 모든 동료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왕하 7장에 문둥이들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양식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여 목숨을 구한 사건이 나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사마리아 성을 포위해서 이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안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급기야 백성들이 자식을 잡아먹는 식인 행위를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고 가슴을 칩니다. 그 즈음에 성문 밖 문둥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먹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주지 않으면 이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람 진으로 가서 음식을 구하려 갑니다. 여기서 굶어 죽으나 적지에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이 적지에 갔을 때에는 적군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음식과 장비는 그대로 있는데 군사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군대의 소리를 들리게 해서 이들이 모든 것을 두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문둥이들이 성안으로 달려가 이들에게 성 밖의 상황을 전했던 것입니다. 문둥이들이 전한 소식은 이들에게는 생명을 구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도 하나님을 모르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에게는 생명을 공급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도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부활을 합니다. 신자도 부활합니다. 불신자도 부활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지만 불신자들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당할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증거 합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거기에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합니다. 나 하나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살아나신 예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신비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경배해야할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에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일을 예배의 날로 드립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말씀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약과 신약의 주인공이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열방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합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높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삶의 최고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삶도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일 때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롬12:1-2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단지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드리는 넓은 의미의 참된 예배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세대의 잘못된 문화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로서 날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의 삶이되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도덕이 타락해져 갑니다. 어디에도 우리의 삶을 만족시켜줄 대안이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하고 그분을 높일 때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악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승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장차 우리도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대열에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장치 다가올 영광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의미 있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마28:1-10
2004-05-14 10:40:55   read : 88


우리 서로에게 인사합시다. “아나스타시스.” 헬라어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대학 강의실에서 무신론자인 교수가 학생들을 앞에 높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논리로 부활에 대해서 기록한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증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교수는 의기양양하게 제자들에게 “이제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알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강의실 한 구석에서 한 학생이 조용히 읍조렸습니다. “아나스타시스, 아나스타시스.” 아무리 교수님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에서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금새 다른 학생들도 “아나스타시스”를 따라서 외쳤습니다. 강의실은 금새 ‘아나스타시스’라는 외침으로 가득차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열변을 토했던 교수는 얼굴이 빨개지며 강의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인간의 논리로 설명되는 세상적인 이치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오늘도 살아계신 그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던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걱정하며 무덤을 찾았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은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무덤을 막고 있는 그 큰 돌문을 어떻게 열 수 있겠나’ 하는 것 때문에 걱정하며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덤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시체로 누워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이런 말을 전해 줍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여인들은 이 놀라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달려가던 중, 이번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뵈옵게 됩니다. 반가움에 겨워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드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주님을 뵙기 원하여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새벽같이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을 만난 부활의 주님은 왜 다른 말씀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해다오’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까? 여인들에게도 무어라 다른 하실 말씀도 많을 텐데, ‘평안하뇨’ 인사 한마디 하시고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해라’ 하는 부탁의 말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의 장소를 갈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갈릴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가장 큰 도시였던 로마나,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만나자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알려진 아테네로 가자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과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이 거룩한 날 아침에 주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만날 첫 번째 장소로 하필이면 갈릴리를 선택하셨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에게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자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한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키셨고, 갈릴리의 온 회당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 가운데, 절기를 지키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사역의 출발지였고, 또 3년 동안 공생애 내내 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 갈릴리는 출발의 장소이고 신앙의 원점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곳이 갈릴리였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곳도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이적을 목격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곳도 또한 갈릴리였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푸른 꿈을 안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했고, 새 시대를 건설해야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서 제자의 삶을 시작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리라 다짐도 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가 버린 지금 그들은 어떻게 변해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을 전후해서 그들의 꿈은 산산이 부셔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열정도 식어버렸고,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공포만이 가득한 나약한 패배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주님을 버린 배신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은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실패한 사람들이요, 스승을 배신한 사람들이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나간 날들의 실패와 좌절은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실수와 과오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수차례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단 한번도 그들의 실수와 과오를 책망하시거나 꾸중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나약하고 비겁한 행동을 비판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출발하자고 깨우쳐 주셨을 뿐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하는 제자들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는 말씀이 “갈릴리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의 형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감히 나설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제 도저히 주의 제자로 감당할 수 없으니 고기나 잡으러 간다,’ 그러고서는 갈릴리 바다로 가서 그물 던지는 어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다시금 주님의 제자로 쓰임 받기에 적절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비겁하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라고 믿고 일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너희들을 믿고 있으니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원점에 서서 새롭게 출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도 실패했습니다. 배신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등을 돌리고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지난날들의 과오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신뢰하시고,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앙의 출발점인 갈릴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도록 우리를 불러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여러분,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여 우리 신앙의 원점에 서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 더 힘찬 모습으로 신앙의 행진을 계속해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려운 이웃에게로 가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가장 남쪽 지방은 유대 땅입니다. 그리고 중부 지역은 ‘사마리아’라 불리는 지역입니다. 그 다음 북쪽 지역을 갈릴리 호수가 있는 지역이라 하여 그곳을 통칭해서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중부지역인 사마리아는 과거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인들이 된 사람들이 많아서 유대인들로부터 완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이방인들보다 더 좋지 않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반면 북쪽 갈릴리 지방은 법적으로나 혈통상에 있어서 하자가 없는 유대인 지역입니다. 그러나 혈통상으로 정당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갈릴리 지역은 권력이 없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요즘으로 말하면 달동네와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은 가난했습니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억압과 수탈을 끊임없이 당해왔고, 모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정치와 문화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로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가 결집된 곳이라고 한다면, 갈릴리는 변두리 인생들이 모여 사는 한(恨) 많은 사람들의 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기만 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갈릴리 어디를 가나 예수님은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면 갈릴리 사람들의 시대가 이 땅에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 동안 소외되고 억압당하고,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서러움을 받아 온 갈릴리 사람들은 이 갈릴리 출신의 예수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속국이 되어 당하는 서러움과,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한이 가슴속에 가득 맺혀 있는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소망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갈릴리 사람들의 희망이며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 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다 포기하시고,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갈릴리 사람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철저히 절망했고 좌절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진리가 거짓에 의해 패배당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 가슴 깊이 상처가 남아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권력도 없습니다.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자고 하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먼저 실망한 자들 곁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눈물 흘리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진 것 없어서 멸시받고 굶주림에 지쳐 있는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껴안고 함께 울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가진 자, 그래서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배 두드리고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멸시받고 서러움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함께 갈릴리로 가자’고 요청하십니다.




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찾아오십니다. 생활에 찌들리고, 어려운 생활고에 눈물을 뿌리며, 하루 하루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오늘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해 주십니다. 꿈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꿈을 주시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내일을 보장해 주시면서,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려운 생활 때문에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비천한 나의 자리에 오실 것입니다. 아직도 풀지 못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 한(恨)을 안고 사시고 계십니까? 갈릴리에 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상처에 찾아오셔서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아픔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아직도 네 안에 감추고 있는 한(恨)을 꺼내 내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사랑스레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이 아침에 만나 뵙고 힘든 생활 속에 용기를 주시는 그 사랑을 체험하시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득 안고 기쁨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실패와 아픔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신 부활의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네 이웃의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는, 부활의 감격과 주님이 주시는 용기를 가지고 아직도 갈릴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려운 이웃이 있는 갈릴리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도 힘이 없고 가진 것 없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아직도 갈릴리에는 많이 있기에 우리를 그곳으로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서 우리와 함께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 가득한 얼굴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많은 것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실패하고 좌절 속에서 주님을 만난 그 감격과 기쁨을 안고 그들에게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그들을 위로해 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잔뜩 안고 가서 풀어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면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부활의 주님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길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나누어야 합니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든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멀리 가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가장 내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가서 마음껏 그들을 축복해 주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을 안고 가서 주님의 사랑과 평강과 기쁨을 전해주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 또 다른 갈릴리가 되어 그곳에서 우리 보다 먼저 가 계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기쁨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외형상으로 보면 갈릴리는 초라한 고장이요, 없는 사람이 사는 버려진 땅입니다.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갈릴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그들에게 신앙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주님의 한량없는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좌절 속에서 신음하고 있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 갈릴리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는 말씀을 남겨두고 갈릴리에 가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 갈릴리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 초청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갈릴리를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잃어버렸던 신앙의 용기를 다시 얻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우리까지도 사랑하셔서 사용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믿어 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갈릴리 사람들과 같이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확실하게 만나는 길입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갈릴리에서 만나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이제 갈릴리에서 새롭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사명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그 능력을 덧입어서 날마다 승리의 걸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우리의 갈릴리에서 만나시는 기쁨이 넘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에 대한 세 가지 질문/마28:1-10
2004-03-18 21:50:53   read : 240


세계 만민이 가장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날이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도 부활이 없었다면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나 버렸다면 십자가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속 사업이 완성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인 동시에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승리하는 것이 기독교이며 죽은 것 같지마는 결국에는 새로운 생명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과학이 극도로 발달되어 우리 인간의 기술로 그야말로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돈으로, 권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숙명적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인생아! 너는 죽음의 길로 달리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죄악이 많은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위에 오셔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 고발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사흘 되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무덤 입구에 막혀 있던 돌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 속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던 여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깜짝 놀라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서 마태복음 28장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둘째,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어떤 형체를 가졌는가?
셋째,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이렇게 부활에 대한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하면서 부활절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2천년 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늘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초대 교회 당시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12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한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1. 가사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잠깐 잃고 죽기 직전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그 당시 법으로는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고 매장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2. 시체 도난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다시 살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을 조작했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창을 들고 밤낮으로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환상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여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잠깐 동안 보았다면 모르겠는데 40일 동안이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조작설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사실도 아닌 부활 사건을 조작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불신하는 사탄 마귀의 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제자들이 시체를 도저히 훔쳐 갈수 없었습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 있었고 더군다나 황제의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봉인을 찢게 되면 사형을 당합니다. 또한 무장한 군인들이 겹겹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보여주시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500여 성도들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보여주셨고, 그렇게 의심 많던 도마에게 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회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 회교는 아라비아 메카에 가면 우리 교주 마호메트의 분묘가 있으며 지금도 분묘 안의 관 속에는 시체가 있어서 마호메트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신에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 볼 수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기독교인은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무덤을 자랑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호메트가 창시한 회교는 죽음으로 끝이 난 죽은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부활이 있는 산 종교,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땅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세계 각곳에 교회를 세우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헌신 봉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선교 활동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너무도 분명합니다. 거짓이 없는 성경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살아나신 후에 열한 번씩이나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이 사실만으로도 어느 누가 이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도 “그는 거룩한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과연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고대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확고한 부활 신앙을 체험하여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떤 형체를 가졌는가?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5에 사도 바울은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의 생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땅에 뿌려진 씨는 썩어서 없어지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성도의 죽음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부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 22:23절 이하에 보면 한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유대 나라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을 해서 자식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결혼을 했지만 이번에도 자식을 얻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 집안에 후손을 이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동생과 다시금 결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7형제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자식도 낳지 못하고 결국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이 다음 부활 때에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두개인의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 만약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시집가고 장가간다면 그곳에서도 아들 낳고 딸 낳고 또 자식 키우느라 얼마나 고통이 심하겠습니까? 성도의 부활의 몸은 그 형체가 ‘신령한 몸’으로 된 것입니다.
고전 15:44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오늘 우리들의 육체와 똑같은 몸입니다. 때리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열심히 일하면 피곤한 몸이지만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몸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육신의 제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령한 몸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령한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나 음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간이나 시간의 지배도 받지 않고 질병이나 침해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요, 영생하는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몸이었지만 신령한 몸으로서 육신의 몸이 가지는 제한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과 같이 동행하다가 영안이 뜨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을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꼭 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방안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몸은 시간과 공간, 어떤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 육신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사무실에 올라가면 없습니다. 우리 집에 가서 보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육신의 몸이 가지는 공간적인 제한을 초월하신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육신의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모두가 수명이 있습니다. 60년, 70년 살다보면 육신의 장막집은 점점 주름살이 늘어납니다. 자꾸만 육신의 장막집은 낡아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서 시간의 제한을 초월했습니다. 영생하는 몸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죽음을 초월한 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6:9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사망이 신령한 몸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의 형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저는 장례식 때마다 죽음이라는 신령한 몸으로 옷을 갈아 입는 하나의 관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죽음이라는 과정,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반드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이란 관문을 통과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의 몸은 결국 무덤에 묻힐 것이고 부활 때에는 옛 몸의 실체는 완전히 변형되고 새로운 영광을 입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적합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으나 부활 후에는 하늘나라에 적합한 영원히 살수 있는 신령한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신령한 몸을 갈아입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때 신령한 몸으로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날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이 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과거 2천년 전 유대 땅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하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는 통쾌하고 신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심문을 받고, 잔인한 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시면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으면서 운명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완전한 패배로 보였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이긴 것 같고 거짓이 진리를 이긴 것 같고 공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철통같이 큰 바위로 막아 놓은 무덤 문을 박차 버리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승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했다고 해도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고 소용도 없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위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요, 미움과 저주와 분노에 대한 사랑의 승리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 안에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드러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 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요즘 환경문제로 심각합니다. 보통 한 줌의 흙 속에 미생물이 수천만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미생물이 있어야 땅이 기름집니다. 물 한 컵에는 수 천만 개의 미생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물로써 식수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연이 오염되고 썩고 있는 것을 방지하고, 생명 있는 물, 생명 있는 땅, 생명 있는 공기를 가꾸어 가는 것도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라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생활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모든 생활 속에서 부활의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의미는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고전 15:20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예고하는 첫번째 열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의 삶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인류의 최대의 원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괴물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으나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은 비록 죽어도 영혼은 주님과 함께 있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강력한 자서기에 쇠붙이가 딸려가듯이 주님 오실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나뭇조각, 유리 조각, 돌맹이 같은 온갖 것들이 섞여 있어도 강한 자석을 갖다 대면 오직 쇠붙이만 끌려 올라가는 것 같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우리는 성도들만 들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들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자석을 갖다 대기 전에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어떤 것이 가짜인지 분별이 안되는 것 같이, 세상에 섞여 사는 동안에는 영생을 얻을 사람들과 멸망을 받을 사람들의 구분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재림 하실 그때에는 믿는 성도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수술을 받아야 할 중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의사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나는 돈과 명예와 지위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나의 건강만 회복시켜 주신다면 얼마든지 돈을 드리겠습니다.” 라며 잘 고쳐 달라고 거듭거듭 간곡히 애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의사 선생님은 그 환자에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지위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당신이 건강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은 우리 인생의 삶에서 그 모든 것들의 기본이 됩니다. 재물의 부유함도 권력도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 모든 것의 존재의 의미를 말소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하고 죽음자체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요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50년 안에 자기가 기독교를 다 파괴시키겠다고 하고 100년 안에는 성경이 없어지고 만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죽음이 임박할 때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성의 시대」란 책을 쓴 무신론자 토마스 페인은 죽어가면서 “내가 쓴 이성의 시대란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모두 거두어 들일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나 혼자 있으면 지옥같이 무섭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신론자요 죽음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들도 이렇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죽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1815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해상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국민은 웰링턴 장군으로부터 보내 오는 전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호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신호는 “웰링턴이 패했다”는 비보였습니다. 그때 영국 국민들은 이 비보를 듣고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금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그신호의 내용은 “웰링턴 장군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국민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던 그 시간은 “예수님이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전 지역에 퍼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 새벽,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새 역사의 아침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가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승리의 축제의 날입니다. 인류의 최대 승리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죽음을 패배시킴으로 최대의 승리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증거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마28:6
2004-03-09 08:53:43   read : 129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인류가 생긴 이래 제일 놀라운 일이예요.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사흘만에 다시 태어난 사건이예요.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 일은 왜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될까요?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예요.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던 분이시기 때문이예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니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이예요?

(성경이야기 )
처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은 깊은 시름에 사로잡혔어요,.
예수님이 덜아가신 후 제 삼일 째 되는 날이였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말했어요.
󰡒�오늘 새벽에 예수님 무덤에 가고 싶어요.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발라 드리겠어요.󰡓�
베드로가 말했어요.
󰡒�로마 군인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을 거야. 그리고 무덤은 무거운 돌로 막혀 있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께 가 보고 싶어요.“
막달라 마리아는 두 여인을 데리고 어둠을 뚫고 무덤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 갔어요.
무덤에 가까이 왔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어머, 저것좀 보세요. 누가 무덤의 돌문을 열어 놓았어요.󰡓�
󰡒�어쩐 일이지? 누가 예수님의 시체마저 도둑질 해 갔나?󰡓�
󰡒�어서 들어가 봐요!󰡓�
세 여인은 굴속으로 조심조심 들어가 보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예수님의 시체가 뉘여 있던 곳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헝겊만이 놓여 있는 것이였어요.
󰡒�분명히 이 자리에 뉘여 계셨는데……󰡓�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나 봐요!󰡓�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덤 안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그리고 무덤 안에 한 낯모르는 사람이 서서 여인들에게 말했어요.
󰡒�누구를 찾고 있소?󰡓�
󰡒�어머, 누구세요?󰡓�
󰡒�저희는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 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아요.󰡓�
󰡒�여자들이여,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는 거요?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소.󰡓�
󰡒�네? 다시 살아나셨다고요?󰡓�
그 순간 그 낯모르는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어요.
두 여자는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어요. 막달라 마리아는 믿어지지 않아 무덤 밖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어요.
바로 이때 또 한 사람이 마리아 앞에 나타나 물었어요.
󰡒�왜 울고 있소?󰡓�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을 지키는 사람인줄 알고, 󰡒�예수님을 찾고 있어요. 혹시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아시면 가르쳐 주세요. 아저씨.󰡓�
이때 그 사람이 말했어요.
󰡒�마리아야!󰡓�
마리아는 고개를 들고 그분을 보았어요. 예수님이셨어요.
󰡒�예수님!󰡓�
마리아가 달려가려고 하자 예수님이 손으로 막으셨어요.
󰡒�내 몸에 손을 대지 마라. 아직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 내가 곧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라지셨어요.
마리아는 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어요. 그러나 사도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어요.
󰡒�뭐라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구?󰡓�
󰡒�혹시 꿈 꾼거 아니야?󰡓�
󰡒�뭘 잘못 본 거겠지.󰡓�
그러나 마리아는, 󰡒�아니예요. 정말이에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어요.󰡓� 하고 말했어요. 그러나 아무도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바로 이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제자들은 깜짝놀랐어요. 문도 잠겨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신거예요.
󰡒�예수님!󰡓�
제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절을 했어요.
󰡒�으와!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어!󰡓�
제자들은 너무 기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눈으로 본 후에 담대히 거리에 나가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제자들과 함께 계셨어요.

(예화)
아주 오래 전 영국의 아미라는 여 선교사가 인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의 일이예요. 그 당시에 인도에서는 절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그 우상에게 어린 아이들을 많이 바쳤어요.
아미 선교사는, 그 아이들이 불쌍해서 돈을 주고 사다가 보호해 주며 하나님 말씀을 전했어요. 그 동네엔 프리마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절에 바쳐졌지만 절에서 도망을 쳤어요. 그리고 집으로 달려 갔어요.
󰡒�엄마! 엄마, 나야, 프리마! 문 좀 열어 주세요!󰡓�
󰡒�뭐? 네가 웬일이냐?󰡓�
󰡒�도망쳐 나왔어! 절은 너무 무서워!󰡓�
󰡒�안돼! 널 도로 받으면 우리집은 신령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단 말야! 빨리 돌아가지 못해?󰡓�
󰡒�흑흑! 엄마! 난 절에 가기 싫어요.󰡓�
프리마는 땅에 엎드려서 울었어요. 바로 그때, 절에서 프리마를 잡으려고 사람들이 달려왔어요.
󰡒�못된 계집애! 감히 도망을 치다니!󰡓�
프리마는 다시 절에 끌려가 무서운 벌을 받았어요. 도망친 벌로 프리마의 손바닥을 뜨거운 쇠로 지져서 손이 익어버리고 만거예요. 프리마는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죽고만 싶었어요.
그날 밤, 프리마는 다시 담을 넘어 도망쳤어요. 프리마는 어떤 아줌마에게,
󰡒�아줌마! 나 좀 살려주세요.󰡓�하고 애걸 했어요.
그 아줌마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어요. 그 아줌마는 프리마를 데리고 아미 선교사님께 갔어요. 아미 선교사는 프리마를 꼭 껴안아 주고 예쁜 인형을 주었어요. 그리고 불에 데인 손에 약을 말라주며,
󰡒�프리마! 이제, 염려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프리마를 사랑하고 계시단다.󰡓�
아미 선교사는, 프리마의 손바닥을 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프리마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은 나보다 더 아팠을 거예요. 그 큰 못이 예수님 손바닥을 뚫었으니까. 아미 아줌마! 예수님이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하고 말했어요. 아미 선교사는,
󰡒�프리마야! 예수님은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단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단다.󰡓�하고 말해 주었어요.
󰡒�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요?󰡓�
프리마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렇단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프리마를 위해 기도해 주신단다.󰡓� 그래서 프리마는 아미 선교사와 함께 기도 드리며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셨어요.
󰡒�이제, 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까요!󰡓� 프리마가 아미에게 말했어요.
그렇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에도 가고 축복을 누릴 수 있어요.



굴려진 돌문의 메시지/마28:1-10
2004-03-08 10:24:30   read : 105


불란서에서 2000년 묵은 무덤을 파헤쳤더니 그 안에 꽃씨가 그릇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이나 된 꽃씨를 땅에 심었더니 얼마 후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여러분 봄에 콩이나 옥수수의 알갱이를 땅에 심으면 썩어 없어지고 맙니까? 아닙니다. 그 알갱이가 다시 올라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근거로 해서 다른 생명이 다시 살아 열매를 맺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사실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누누이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다시 살아난다고 일러주었지만 어느 제자 한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17장 23절, 20장 19절, 26장 32절)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날 새벽 일찍이 예수님의 시체가 누어 있는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도 전혀 부활을 기대하지 않고, 시체에 기름이나 발라 드려야겠다고 달려갔던 것입니다. 달려가면서도 예수님의 돌무덤을 가로막은 그 큰 돌문을 누가 옮겨 줄까하고 달려갔는데 뜻밖에 그 돌문이 굴려 옮겨졌습니다. 무서운 마음으로 그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까 예수님은 안 계시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와 얼굴을 쌌던 수건만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마치 누에는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그 껍데기 고치만 남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뒤에 천사 둘이 환하게 빛을 내며 앉아 있다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다는 것을 알려 주라”(마태복음 28장 5-7절) 고 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이 거대한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철학이나 어떤 종교나 사상이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썼지만 모두 비참하게 실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무섭고 큰 괴물의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줄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 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 문을 박차고 살아 나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다시 살고 영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의 무덤은 더 이상 슬픔의 장소가 아니라 다만 영원으로 통하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오늘 이 옮겨진 돌문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들어봅시다.

1. 이 돌문은 기독교의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전체의 구조는 바로 이 부활의 기초가 됩니다. 이 굴려 옮겨진 돌문 위에 기독교의 신앙의 건물이 세워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전도도 헛되고, 설교도 헛되고, 우리의 죄도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불쌍할 것입니다.
초석이 무너질 때 그 위에 아치와 건물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이 만일 기독교의 신앙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전파한 말씀은 바로 부활입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교리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즉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 받는 다는 것과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에게 부활과 구원을 보증해 주기 때문에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만 안 믿어도 절대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으니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부활의 신앙과 고백이 없으면 부활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탄의 간교한 사상으로 십자가의 구속도 안 믿고 부활도 못 믿게 하는 자유주의 신신학으로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일수록 부활 신앙을 확고히 해야 되겠습니다. 이 굴려진 돌문은 기독교의 기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2. 이 옮겨진 돌문은 인생의 무덤 문이 옮겨진 것입니다.

죽음의 큰 돌문은 단단히 봉해져있었으나 천사가 그것을 옮겨 놓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나오셨습니다. 무덤 문이 조금 열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을 떼어서 옆으로 던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부터 죽음의 감옥은 문이 없어져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을 가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그 열린 동굴에 잠시 머물다가 영생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마치 삼손이 가사에서 잠잘 때 원수들이 포위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문짝을 떼어서 어깨에 메고 나가 팽개치고 만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능력으로 죽음의 문빗장을 꺾어 버리고 무덤 문을 던져 버렸습니다. 주님은 얼마동안 무덤의 볼모로 잡혀있었지만, 우리의 죗값을 다 치른 다음에는 무덤 문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에서 우리의 죄가 영원히 옮겨 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죽음은 흑암과 절망이 아니며 지옥의 회의실이 아니라 향내나는 성도들의 침실이요 잠시 쉬는 안식처요, 천국의 현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과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가두고 지키던 돌문을 굴려다 버렸습니다. 우리를 가로막던 모든 barricade가 멀리 옮겨졌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사망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얻고 천국의 후사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옮겨진 돌문은 승리의 기념비입니다.

이 굴려진 돌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지옥의 권세와 용감히 싸워서 이긴 승리의 기념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약속한 시간이 이르자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의 돌문은 멀리 옮겨져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의 발꿈치는 옛 뱀에 의하여 상하였으나 부활의 아침에 주님은 용의 머리를 박살내버린 것입니다. 돌문도 파수병도 도장도 모두 헛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옥문을 부수고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영광의 주가 다시 사셨습니다. 죽음의 쏘는 살이 어디 있으며 자랑하는 무덤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두 우리의 적입니다. 그의 열매로 우리는 모두 영생을 얻고 위안을 얻게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이며 우리도 그 뒤를 따라 부활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와 싸워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을 패배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속히 재림하지 않으면 우리도 언젠가 이 몸을 벗을 때가 오지만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을 마나 뵙게 되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라고 했는데 머리가 이겼으니 거기 붙은 지체가 패배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는 머리에 붙은 지체인데 머리가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슬픔이 당신의 눈을 가리우지 못하게 하십시오 공포가 당신의 심령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십시오. 반드시 우리는 이깁니다. 아니 이겼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삽시다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승리의 돌문을 눈앞에 세워 놓고 승리의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사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4. 이 돌문은 영혼의 안식처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돌문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서 로마군인들의 칼과 창도 막아내고 그 인봉한 것도 다 깨뜨려 버렸습니다. 감히 그 돌문을 다시 막을 자가 없습니다. 아마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와서 이 돌문을 다시 옮겨 봐라 부활하신 자의 원수들이여!” 그러나 아무도 이 돌문을 다시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주의 구원 사업이 영원히 완성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고 더 견고한 영혼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가 죽어 오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이 우리 앞에다가 온다고 할지라도 굴려진 돌문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육체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잠간있다가 없어지는 것인데, 조금 먼저 죽고 조금 나중에 죽을 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5. 이 돌문은 경계의 표시가 됩니다.

이 돌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표시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의 경계표시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사이의 경계표시가 됩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죽은 자같이 되어 공포에 떨며 있었고, 한 편에서는 여인들이 반가운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 나셨느니라”(마태복음 28장 6절)고 하는 이 말을 들은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지만 이 말을 듣지 못하고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흑암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믿는 자에게 승리와 구원과 큰 기쁨의 근원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멸망과 시판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돌문에서 악한자의 편에 선 자들은 실망과 슬픔과 고통을 다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큰 기쁨과 구원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경계선에서 어느 편에 서있습니까?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부활을 믿는 자의 편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부활을 믿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믿음으로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6. 이 돌문은 사탄의 파멸을 예시해 줍니다.

우리 주님은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탄의 역사는 모두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십자가의 피로 치르시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사탄을 패배 시켰습니다. 지금도 사탄이 여려 가지로 역사하지만 패배한 원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증거/마28:11-15
2004-02-14 15:09:52   read : 203


오늘은 로마황제 티베리오의 밀명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파견되었다가 주님의 부활에 감화되어 주님의 뒤를 따랐던 에비우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의미를 깨달아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에비우스가 한통의 이상한 편지를 받은 것은 막 저녁식사를 끝내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때 였습니다. 에비우스는 그 편지를 읽고나서 그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 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나사렛이라고 하는 시골출신의 한 청년이 신성모독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가 죽기전부터 말해온 대로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활을 증거하며 다니기에 몹시 소란하고 민심이 흉흉함으로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로마황제 티베리오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비우스가 예루살렘에 머무르게 된 것은 6년전에 임명된 유다와 사마리아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의 공무수행에 어려움이 있다는 민원이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비우스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빌라도에 관하여 여러가지 자료들을 몰래 수집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날밤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에비우스는 베게를 배고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분명히 음모이다. 그렇다면 이 음모를 꾸며 낸 사람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혹시 이 사건의 주모자는 누구인가? 이런 의문이 계속해서 그의 머리속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비우스는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가정을 하였습니다. 첫째로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의 시신을 몰래 훔쳐갔거나 옮겨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둘째로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한 상태로 있다고 무덤에 옮겨진 후 무덤속의 서늘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고 무덤에서 스스로 도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세째로 새벽에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달려간 여인들은 새벽녘의 어두움 속에서 동굴을 잘못 찾았거나 그들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퍼뜨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예수의 시신은 다른 무덤에 있을 것인데 그곳은 어디인가? 이런 의문점들과 가정들을 그는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하다보니 어느듯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가 기도하던 감람원이란 곳위로 새벽의 빛이 밝아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비우스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참여했던 포코투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에비우스가 포크투스를 만난 곳은 그가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아성채 2층의 조그만 방에서 였습니다. 포크투스는 벌써 예수의 부활소식을 들었는지 에비우스를 만났을 때는 두려움에 몹시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비우스의 질문에 도무지 죽은자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그날 골고다 산상에서 뜻을 알 수 없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친후 얼마있다 숨을 거둘때 빛을 잃으며 어두워져가던 하늘의 모습을 설명할 때 그의 두려움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십부장인 포크투스는 이미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란 청년의 옆구리를 찌를 때 그의 옆구리에서 이미 거의 굳은 듯한 검은 피가 물과 같은 체액과 함께 엉겨나오는 것을 볼 때 이미 십자가상에서 죽어 있었고 도무지 살아날 수 없다고 주장하엿습니다. 에비우스는 안토니성채의 안뜰을 지나면서 그곳에서 홍포를 입고 가시관을 쓴체 무릅을 꿇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그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막 문을 나서려다 그는 문득 한가지 사실을 더 확인해야 겠다고 다시 성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예수가 부활 했다던 그 전날밤부터 부활의 새벽까지 예수의 무덤에 경비를 섰던 병사들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당직실에서 그날의 근무병사 명단을 확인하고 나서 그들이 근무하고 있는 빌라도 관저를 찾아 갔습니다. 마침 그들은 빌라도 관저에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날의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로 부터 그날밤 무덤근무를 명령받았을 때 그들은 굉장히 기분이 나빳습니다. 대 로마제국의 병사로서 일개 시골청년의 무덤을 지키라는 명령은 아무리 명령에 살고 죽는 군인의 입장에서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기분이 상해 있었던 것은 본래 무덤을 지킬 계획이 전혀 없었고 로마병사의 일이 아닌데 예수가 죽은 그 다음날 식민지의 지도자들인 유대 제사장과 장로들이 빌라도를 찾아와 사흘후에 곧 살아날지 모르기 때문에 꼭 로마병사들 중에서도 빌라도의 관저를 지키는 정예군인들이 무덤을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을 하였던 것을 빌라도가 받아들여 그들을 무덤으로 파견하였기에 아주 불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들의 증언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 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고 한 그 날 새벽까지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 무덤이 열려지는 것도 또 그속에 있던 예수가 부활한 것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침이 다 되어갈때 찾아온 여인들을 통하여 그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밤새도록 근무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기에 개미하나 빠져 나갈 수 없는 그곳을 어떻게 죽은자가 무거운 무덤의 돌을 치우고 빠져 나갈 수 있는 지 그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들은 곧 빌라도에게 그 일을 보고했는데 보고를 들은 빌라도 보다 빌라도의 부인인 클라우디아가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클라우디아는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려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빌라도에게 예수는 의로운 사람이며 그를 해치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꿈을 통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집불통인 빌라도는 아내 클라우디아의 조언을 무시하고 십자가형을 내렸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경비병들이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을 때 그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나서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이렇게 거짓말하기를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경비병들이 잠들은 사이에 와서 그를 도적질 해 갔다고 거짓 증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그 일이 현장에 있던 자신들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신비로운 일이어서 돈은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았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비우스는 깊은 혼동에 빠졌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의 증언은 적어도 그들이 무엇인가 신비로운 일을 체험하였고 그결과 그들은 경이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비우스는 여기서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사장과 그 일당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대제사장 일행이 주장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것인데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에비우스가 예루살렘을 다니며 알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잡히던 날부터 도망하기 시작하여 결국십자가에 달려죽었을때는 모든 제자들은 다 숨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의 대부분이 갈리리와 같은 시골 사람들이기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설령 몇사람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들은 큰 충격가운데 유대인들이 그들을 그의 스승 예수처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고 더군다나 몇명 안되는 제자들이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으로 온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에비우스는 지금 며칠째 그의 정보원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어느 정보원도 지난 주일에 찾아 달라고 부탁한 예수부활의 첫번째 증인인 마리아라는 여인에 관하여 알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예수의 빈 무덤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무덤은 그의 숙소로 부터 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중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침 그곳에 유대의 장례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비우스는 발을 멈추고 유대인들이 시신을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에비우스는 유대인들이 시신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 로마에서는 하지 않는 세마포라는 천으로 시신을 꽁꽁 묵으며 그 사이사이에 향료를 집어 넣어 마치 미이라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와 같이 단단하게 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무덤에는 그 수의가 비어있었고 머리를 싼 수건은 개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비우스가 예수의 빈 무덤을 안에 들어가서 그 동굴모양의 무덤을 살피고 있을때 그의 정보원인 인포무스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부활의 첫번째 증인이었던 마리아와 4명의 여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에비우스는 더 이상 빈 무덤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급히 무덤을 내려와 예루살렘의 시장 거리를 가로질러 구 예루살렘 성벽이 남아 있는 곳으로 난 아벨거리를 지나 예수가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였다는 다락방으로 갔습니다. 약 50대 중반의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은 어느 누구보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간 살로메와 다른 여인들은 다 예수제자의 어머니들 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을 만난 에비우스는 자신이 놀랐습니다. 그 여인들에게는 뭔가 아주 온화하면서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이야기는 분명히 진실임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은 그 사실을 기꺼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사실 에비우스는 그 여인들이 자신을 피하고 두려움가운데 피할줄 알았는데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그날 아침에 그들은 예수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그것을 기대하거나 믿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준비한 향품을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새벽미명을 택하여 갔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막은 큰 돌을 이 새벽에 누가 옮겨주겠는가라고 걱정을 하면서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무덤은 열려 있었고 그 무덤안에서 있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아니라 시체를 싼 빈 수의와 수건이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바로 천사가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소식을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너무나 놀라서 뛰어나왔고 그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활한 예수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셨고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직접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도록 하셨다는 전혀 뜻밖의 정보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정보는 에비우스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여인들의 증언은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한 것이었기에 그들이 함께 꾸며낸 이야기라고 전혀 생각할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에비우스는 여인들로부터 지금 예루살렘을 떠났던 제자들이 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성전에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설교를 매일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었습니다. 에비우스는 반나절이 넘게 그 다락방에서 예수부활에 대한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점심때가 다 되어 그는 성전입구에 있는 로마인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 그 다락방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전 입구를 막 지날려고 할때 마침 그곳에서 대중을 향하여 설교를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의 설교내용은 전부 예수 부활에 관한 것이 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을 죽였는데 그가 바로 생명의 주이신 예수이시다 그는 너희들이 죽였지만 그가 말씀하신데로 3일만에 부활하셨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에비우스는 더 이상 식사를 하러 갈 수 없었습니다. 설교자의 외모는 어수룩하고 촌스럽게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설교의 내용은 너무나 분명하고 논리적이었고 확신에 찬 것어었습니다. 어느새 그는 그들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분명히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힘과 확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에비우스는 알 수 있었습니다. 에비우스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명이 예수의 육신의 형제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는 예수를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완전히 예수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한 것은 그가 부활의 예수를 두눈으로 분명히 보고나서 였습니다.

예수를 만난 많은 사람들,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제자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5명의 여인들,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만난 베드로와 요한, 그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능력이 그들의 말과 행동과 생활속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찔림을 받고 회개하며 부활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에비우스는 벌써 6개월 가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분명 인간의 힘이 아닌 놀라운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느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비우스는 황제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황제 티베리오여, 나는 당신을 황제로 섬기며 살아왔는데 여기 분명한 하늘과 땅의 황제를 만났기에 나는 그를 따르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의심을 하였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합니까?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거를 보십시오 황제여! 당신도 참 신(神)이신 예수를 속히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황제가 이 편지를 받은 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같이 공부한 명철한 에비우스가 예루살렘에서 행방불명이되다니 그것도 나사렛이란 시골의 청년 죽었다가 살아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따른다는 것이 도무지 황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부활을 의심하는가? 누가 부활을 의심하는가? 이것은 황제에게 남긴 에비우스의 마지막 진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우리의 능력이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부활의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이곳에서 만나, 여러분의 성격과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부활주일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부활 하셨네/마28:11-15
2004-02-04 21:28:18   read : 208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이 빠져버리면 우리의 믿음은 제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어지는 고전15:13~14절에서 부활의 중요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아무리 큰 집이라도 대들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집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잘 믿는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바로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까?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이 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신 능력이 없는 예수를 믿는 셈이 되니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부활도 믿지 못하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세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니까 영원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수인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스러운 생각을 자꾸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그 주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인지 검토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부활 신앙을 다시 한 번 굳게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기절설이 있습니다.
이 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무덤 안의 찬 기운과 또 세마포와 함께 둘러싼 향품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신을 차리시고, 둘렀던 세마포를 손수 벗기셨습니다. 때마침 큰 지진이 일어나서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던 동굴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틈으로 빠져 나오실 수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처럼 잘못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절설입니다. 터무니없는 이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군병들이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사형 집행의 전문가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내보내면 자기들이 처벌을 받거나 죽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예수님을 살려 내보냈겠습니까? 그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돌아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안전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 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만일 그 때에 예수님의 숨이 끊어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기색이 있었더라면, 왜 그 두 사람이 몰랐겠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니까, 향품과 더불어서 세마포로 온 몸을 감쌌겠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무슨 수로 숨도 안 쉬시고 사흘 동안이나 기절한 채로 살아 계셨겠습니까?
또 이미 우리 예수님은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셔서 피 흘리시고, 가시 면류관에 찢기셔서 피 흘리시고,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혀서 피 흘리시고, 또 날카로운 창에 찔리셔서 피와 물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사흘동안 기절한 상태로 견뎌내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다 할지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세마포로 꽁꽁 싸여 있는데,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 세마포를 풀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로마 군병들의 엄중한 경계를 어떻게 뚫고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또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함께 오랫동안 같이 걸어 가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셨다고 해도, 어떻게 그토록 오래 걸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도무지 얼토당토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고서는 도무지 가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둘째로, 매장부인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실제로는 무덤에 안치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생각되었던 곳이 빈 무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수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관습에 의하면 죄수의 몸은 무덤에 안치를 시키지 않고, 공동묘지에 그냥 되는대로 가져다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린 두 강도와 함께 공동묘지에 던지움을 당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당초부터 무덤에 시신이 없었으니까 제자들이 가 본 무덤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도 논리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지도 않은데, 큰 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고 인봉까지 합니까? 거기다가 파수꾼들이 밤새도록 그 앞을 지킵니까? 또 예수님의 시신이 공동묘지에 던지움을 당했다면, 가서 그 시체를 찾아오면 모든 의혹이 해결되지 않습니까? "보아라! 예수의 시체가 여기 있는데 누가 그의 부활을 주장하느냐?"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논박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장부인설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론입니다.
셋째로, 환각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나도 갈망한 나머지 헛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 두 사람에게 나타났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15:6의 말씀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착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외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론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컨대 텔레파시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닌데, 그저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텔레파시를 보내서 제자들을 그토록 믿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을 거짓된 하나님으로 만드는 처사입니다.
또 무덤오인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들이 다른 무덤을 예수님의 무덤으로 오인하고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잘못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기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부활한 예수라고 하면서 사기를 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반박할 가치조차도 없는 주장들입니다. 모두 마귀의 지껄임입니다.
우선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시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붙잡혔을 때, "예수님이야 돌아가시든지 마시든지 상관없이 그저 내 한 목숨 살아남아야겠다!"라고 예수님을 버려 두고서 도망쳤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순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핍박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입을 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컨대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바울이 본시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살아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예수님을 위해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해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그릇된 주장들이 한 가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해서 잃어버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시체도난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다른 곳에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거짓 증거를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주장이 가지고 있는 허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천사는 무덤 입구에 있던 큰 돌을 굴려 내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덤 안을 보여주었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6~7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 가운데 몇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다 고했습니다. 예컨대 큰 지진이 일어난 것, 하늘에서 흰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온 것, 또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굴려낸 것, 무덤 안에 있던 시신이 없고 빈 무덤이 된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자세히 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드는 줄 압니다. 왜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먼저 가서 그 말을 고하지 않고, 하필이면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고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서 받을 처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의논하면 무엇인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고해 바쳤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대제사장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무슨 소리야?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살아나?"
이렇게 반문하면서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인하려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들은 감히 파수꾼들이 자기들에게 거짓 보고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수꾼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습니까?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그들은 곧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이 일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는지, 안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그에게 가버리면 그 동안 자기들이 누리던 영향력과 권세, 영화 등이 줄어들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를 모으고 의논한 결과 세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로, 12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그들은 돈을 가지고 파수꾼을 매수했습니다. 파수꾼들이 여러 명이니까 돈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필요하면 앞으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까지 돈으로 매수해야 되니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그들은 파수꾼들에게 거짓말을 유포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몰래 와서 시체를 훔쳐서 어디엔가 감추었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14절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돈으로 매수할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당신에 대한 좋지 않은 보고를 올리겠소!"
여러분, 빌라도가 어떤 위인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 줄 뻔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내어주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유대인들과 괜히 나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조치를 파수꾼들이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들은 기꺼이 돈을 받았습니다. 그들로서는 주머니에 돈이 생겨서 좋고, 또 처벌받지 않아서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르친대로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거짓된 소문이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당시까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삼십 년 뒤가 되는 시점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상이 시체도난설의 진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설도 모순투성이입니다.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서 어디엔가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손을 써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껏해야 열 두명 뿐입니다. 그들을 잡아서 고문하면 왜 입을 열지 않겠습니까? 또 설사 입을 열지 않는다 할지라도 로마의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의 종들을 풀어서 예수님의 시체를 색출하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보아라! 여기 예수의 시체가 있는데 누가 감히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느냐?"라고 한다면, 어찌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군병들은 아무도 그런 시도조차도 하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도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었습니까? 예수님이 수 차례 걸쳐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라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는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은연중에 그런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니까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눅24: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입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아니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책망을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슨 책망을 받았습니까? 눅24:25의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두 제자는 마음에 더디 믿는다고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공교롭게도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중에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 때 도마가 그 말을 듣고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요20:25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는 도무지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에서 붙잡혔을 때 자기들만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쳤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용기가 과연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활하시지도 않은 예수님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받쳐 순교까지 합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셋째로, 로마의 군병들이 파수를 서지 않고 모두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여러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은 파수를 서고, 그 나머지는 잠을 잤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소홀히 하고 모두 잠을 잡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설사 자기들의 말대로 잠을 잤다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몰래 훔쳐갔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아울러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이 굴러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을텐데, 한 사람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서, 군병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말도 맞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서둘러 범인을 잡아 잃어버린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것이 급선무지요? 성안에 가서 대제사장들에게 되어진 일을 고하는 것이 급선무였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님은 부활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다. 그래야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도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가 오늘 본문 속에서 로마 군병들의 입에서 나온 거짓된 소문을 기록했겠습니까? 여기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본문에 나타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부활이 증거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까지 했지만 타락한 종교인들에게 매수를 당해서 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거짓말을 유포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18~20절까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들,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거운 우리들, 예수님이 너무 좋고,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우리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마감하면서 결론적으로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더욱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를 위해서 흘린 눈물과 땀, 부활의 증인으로서 애쓴 노력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께서 아름답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부활하신 예수님, 사망의 권세를 깨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굴려진 돌의 의미/마28:1-10
2004-01-28 20:58:08   read : 60


오늘 생명과 희망의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 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부활의 사실을 빼놓는다고 하면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이 중요합니다. 그의 고난이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가 집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신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입니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무덤을 찾아 올라가면서 이 여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무덤에 가 면 무덤에는 큰 돌로 무덤 문을 막아 놓았을 것이고 거기에는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터이 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거 기에는 로마 군인들 밖에 없을 터인데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기나 할까? 우리의 간절한 사정을 말해서 아무런 다른 의도는 없다고 설명하고 그들을 납득시켜서 거기 에 성공하면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덤 가까이 갔습니 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까? 이 질문은 온 세상에 대한 슬픔을 자아내 는 물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온 인류의 한숨 소리를 표현한 말같이 들려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행복의 길에는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어서 그 큰 돌이 인간의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 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가 이 큰 장애물을 옮겨 놓겠습니까? 누가 이 굉장한 돌을 들어올리고 생명과 영혼 불멸의 빛을 보게 할 수 있었습니까? 모든 사 람을 삼켜버리는 무덤은 수많은 사람을 삼켜버렸습니다. 어제가 바로 한식(寒食) 이어서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도 무덤을 찾아 성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덤 앞에서 침통하게들 지냈습니다. 절망적인 사람도 있었습니 다. 누가 무덤 저 너머로 소망을 갖다 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속삭임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아니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 앞에서 허 무와 절망을 씹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두움에서나 빛에서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하여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누 가 우리를 위하여 이 돌을 굴려 줄까? 고 걱정하며 묻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과 우리가 세상에 서 살다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구약 욥은 욥기 14장 14절에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하였습니다. 죽으나 다시 살아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요, 염원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운명의 강을 건너서 어떠한 소망이 있다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 말 사람이 한번 죽고 무덤에 묻히고 그래서 얼마 후에는 뼈와 살이 흙으로 되어 버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하면 인간처럼 허무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겉으로 내놓고 묻는 것은 아니지마는 마음 속에서부터 오실 분이 어디 계 십니까? 예정되신 구원자가 어디 계시고 그이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하여 이 무덤의 돌을 굴려 줄 분이십니까? 고 계속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들에게는 무덤의 돌을 옮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예 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 자체가 여인들이 옮기기엔 불가능할 만큼 컸습니다. 죽음이란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 어떤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 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리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질 쳐봐도 이 돌을 굴려낼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권세도, 과학도, 금력도, 이 돌을 굴려낼 수 없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 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이라 고 사도 바울은 갈파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분명히 인간이 율법 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벌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옮겨질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무덤의 돌에 인봉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죄의 대한 벌로 죽음을 주었고 붉은 도장으로 무덤 입구 돌에 인봉을 하였는데 누가 이 인봉을 뜯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돌을 굴려낼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무덤에는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마의 세력 과 지옥의 권세가 도난을 막기 위하여 무덤을 지키고 있으니 누가 감히 마귀와 맞서서 사자의 입에서 먹이를 빼앗듯이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이 돌을 굴려줄까? 이처럼 마른 뼈들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서 떠나버린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겠 습니까? 세상의 왕들과 현인들에게 물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옛날 공자 선생이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이 사람아 사람이 살아 생전에 될 일도 다 알지 못하고 사는데 죽은 후의 일까지야 어떻게 알겠는 가? 고 오히려 반문한 것은 너무 유명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현인 군자라고 하더라도 죽은 후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이 여인들은 해답을 얻었습니 다. 저희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갔었으나 무덤은 벌써 비어 있었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아니하시고 그가 말씀했던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세상의 질문에 대한 완전하고 시원한 답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예수님께서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나는 부활 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그리 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다음 열매 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통곡하는 라헬이 위로받기를 거절할 때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이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하였습니다. 슬퍼하시는 여러분이여, 무덤 주변에 더 이상 슬픔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마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또한 부활할 것이기 때 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으십시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의 무덤이 더 이상 슬픔의 장 소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영혼 불멸의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덤은 영혼이 잠시 동안 지상의 여정에 필요한 옷을 벗어 놓고 밝은 내일에 다시 입 을 장소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가오는 밝은 내일은 이 세상에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 로 아름답고 희게 빛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 주일에 다시 사신 주님에 대하여 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축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무덤에서 굴러난 돌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돌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다. 성경을 읽어보면 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습니 다. 1 . 굴려진 돌은 무덤의 문이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장막은 거대한 돌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그 큰 돌을 옮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삼일 삼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무덤 속에 서 주무시다가 그의 강한 능력으로 일어 나셔서 무덤의 철문을 옮겨 버리고 모든 빗장을 부셔 버렸습니다. 감금시키는 돌을 옮기셨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무덤의 눈을 옮겨 버리셨다는 것의 모형입 니다. 이렇게 죽음의 요새가 드러나고 지옥의 바닥이 드러났으며 이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곳 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하자면 하나의 저당물로 무덤에 갇혀 있는 셈이 됩니다. 그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사. 하나의 부채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지워진 것입니다. 그리 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대신 빚을 갚으셨습니다.그는 우리가 받을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대신 그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전히 열납되어질 때까지 저당물로 서 무덤 속에 남아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의 입으로부터 나 온 이 말씀은 하나님의 판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예수님은 자유를 얻게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덤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남겨 두지는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의 구원의 사역은 영원히 완전 무결합니다. 이 큰 돌이 무덤 문에서 굴려진 것은 마치 주님께서 아주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무덤 속에 다시는 감금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사람에겐 죽음이 더 이상 죄에 대한 형벌이 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하나의 관문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는 말하자면 무덤의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죽음과 절망 의 포로로 감금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이제 영원히 굴려졌고 이제부터 죽음이란 더 이 상 어둡고 두려운 지옥의 대기실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무덤 속에 우리를 가두던 돌은 굴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가둘 수 있습니까? 모든 장애물은 제거되었습니다. 2 . 굴러진 돌은 기념비와도 같습니다. 무덤의 돌이 굴러진 것은 우리 신앙의 안목으로 볼 때 죽음의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원 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이 돌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기념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무덤에 장사지내게 되었을 때 그의 원수들은 그리스도를 이 긴 것으로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정복했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짓이 진리를 이긴 것이요, 미움이 사랑을 무색케 하였고 불의가 정의를 짓밟았으며 어두움이 빛을 삼킨 것이요,죽음이 생명에게 개가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현상이 오래 갈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동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발꿈치가 옛 뱀에 게 물리었으나 부활의 아침에 그는 용(龍)의 머리를 깨부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을 이기며,사랑이 미움에게 승리하고, 정의가 불의를 누르고,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생명이 죽음에게 개가를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굴려진 돌 위에 앉아 있는 천사를 바라볼 때 이 돌은 사망과 지옥을 이기신 그리스도 의 승리가 우리를 위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하지만 그 죄를 정복하시 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에 의해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사탄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릴 것입니다. 주께서 속히 오시지 않으시면 우 리도 우리 조상들과 같이 발을 모으고 하나님을 만나 뵈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용기 를 내십시다. 그리스도의 군사된 여러분이시여! 여러분은 정복된 적을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겨놓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우 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장이 되셔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장되 신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정복하시고 죽음을 이기실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눈 앞에 그 돌로 승리의 기념비를 세우십시다. 3 . 굴려진 돌은 믿음의 초석을 의미합니다. 이 돌은 무덤에서 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대한 대표적인 확증으로서 기독교 신 앙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 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전혀 없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 활이 없다면 너희의 믿음이 헛것이고 너희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도 역시 멸망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하는 모든 것이 속임수와 미혹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건보다도 더욱 명백한 사건입니다. 여기 성도들의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예배 시간에 신앙을 고백하신 것처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믿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 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그의 속죄도 만족할 만한 증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진리를 세우게 되고 우리의 모든 확신이 부활의 진리에 기초하여 우리는 그 진리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의 피 공로로 죄사함 받으신 것을 믿 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사실과 진리에 믿음의 기초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그리스 도의 산 돌 위에 여러분의 믿음의 집을 지읍시다. 4 . 굴려진 돌은 경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가두었던 무덤의 돌이 굴려날 때 수직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마치 죽은 사람같이 공 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반면에 돌 위에 앉아 있는 천사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희는 무서워 말라 너희가 예수를 찾는 줄 내가 아노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여인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굴려진 그 돌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그리스도를 찾는 자와 미워하는 자 사이에 그 리고 그리스도의 친구와 원수들 사이에 정해진 경계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승리요, 기쁨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 구원 얻는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 세워놓은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에게는 흑암이 있었으나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광명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큰 고통을 줍니다. 그러 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확신과 능력과 위안과 축복이 됩니다. 오늘 이 뜻깊은 부활 주일에 우리 자신을 자문해보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곁에는 부활의 경계석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 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도 부활하실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두려워 마세요. 천사가 여러 분을 위로할 것이고 주님이 여러분을 기쁘시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의미깊은 부활 주일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신령한 눈으로 굴러진 돌을 바라보시며 천사 의 음성을 들으시고 확신을 가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뵐 때 놀라운 우리 생애에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증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빈 무덤의 증거/마28:1-10
2004-01-07 23:23:35   read : 101


조지 몰간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를 목회 하시는 목사님인데, 목회 중에 경험한 사실을 잡지사에 기고해서 나왔던 사실 이야기입니다. 아주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그런 처지여서 휠체어에 태워 가지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총명했고 그는 신앙이 특별히 좋았습니다. 이름은 톰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부활절을 앞두고 교회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계란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 계란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일주일 동안 잘 생각해서 이 계란 속에 생명을 넣어 가지고 오라."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그 속에다가 꽃을 꺾어서 넣어 오기도 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곤충을 잡아서, 꿈틀거리는 곤충을 잡아서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톰은 빈 플라스틱 계란을 가지고 왔습니다. 애가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선생님은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괜찮다. 숙제를 못 했어도 괜찮다."그랬습니다. 이 아이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 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어린이의 부활 신앙, 빈 무덤을 통하여 증거된 그 신앙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일 후에 얼마 안 되어서 이 톰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기독교 신학에는 '험증학'이라고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요새는 이런 것을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만은 오래 전에 제가 이것을 가리켜 본 일이 있는데 이 험증학에는 특별히 이 부활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것을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나, 예수님의 이적이나 혹은 이 부활의 사건들을 전부 증명합니다. 그런 과목인데 거기에 이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무덤이 비었다! 우리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도대체 시체가 어디에 간 겁니까? 예수 부활이라는 이 사건으로 해서 이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했다고 증거합니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 온 성은 난리요, 유대 나라가 난리요, 온 세계가, 당시 온 세대가 난리예요. 예수 부활! 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자 또 한편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저지할 수가 없어요. 아주 기쁨으로 순교를 하는 거예요. 부활의 증인은 순교하는 거예요. 생명을 믿으니까. 자 이렇게 되니 역사적으로 말야 2000년 동안 이렇게 크고 놀라운 사건이 여기서 시작이 되는데 상상해 보세요. 이 빈 무덤에 대한 사건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먼저는 시체에 대해서 우리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시체를 어떻게어떻게 해서 감추었다고 생각합시다. 아마 거기에 있는 군사들을 좀
뇌물을 줘 가지고 잠들게 하고 시체를 도적질 해갔다. 그래 어디다 감추어 놓고 예수 부활했다고 소리 질렀다면은 상상해 보세요.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하면서 목숨 바치는 사람 봤습니까?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손에 있는 건 아니고 또, 이렇게 복잡한 문제가 돼서 자 보세요. 빌라도가 예수를 죽였는데 그 예수가 부활을 했거든, 이제 빌라도는 또 로마는 완전히 정죄되는 거예요.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시체를 찾아내가지고 빌라도가 "여기 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시체만 찾아 놓으면 그만이예요. 그런데 이걸 못 했어요. 더구나 가야바, 제사장,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아주 원흉인데 그야말로 큰 고민입니다. 메시아를 죽여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가 되는데 이걸 어떻게 벗어날 길이 있습니까? 시체만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못 했어요. 그리고 정죄당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보면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무덤이 비어 있다" 하는 것, 이건 굉장한 신학적 의미가 있고 상징적 의미가 있고 엄청난 메시지가 그 속에 있어요. 무덤이 비었습니다. 시체는 없습니다. 여기서 부활 증거의 첫째가 빈 무덤이라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다 갈 것이니까 말이에요. 대단히 실례지만 이제 앞으로 여기서 모름지기 한 백년 후에는 여기 앉았던 분이 한 분도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인생이에요. 죽으면 끝입니다. 뭐 지식이라고 해봐도 죽음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에요. 명예요 혹은 부귀영화요,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죽음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 모든 권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으면 그만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흔히 죽음을 끝이라고 말합니다. 간혹 장례식에 가보면은 아주 위로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할텐데 죽었다고, 답답하다고" 더 위로하느라고 애쓰고, 위로 받지 못해서 몸부림치고,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먼저 내리는 사람도 있고 좀 뒤에 내리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에요. 조금 먼저 간 거지 뭐 이상 할 것도 없어요. 누가 누구를 위로한단 말입니까, 다 같은 처지에……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농담을 잘해요. 아내가 몸부림치면서 당신 없으면 난 어떻게 사느냐고 뭐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남편이 죽으면서 그랬답니다. "걱정 마라, 너도 곧 죽을텐데 뭘." 사실이 그래요. 우리 웃으면서 죽고, 웃으면서 보냅시다. 그렇게 몸부림 칠 건이 아니에요. 나도 갈 거니까요.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말고 해요. 슬퍼할 얘기도 아닙니다 이거는요. 죽음은 엄연한 실제요 우리 앞에 있는 사건이에요.
자 여기까지는 좋은데 또 하나 문제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죽여서 해결하겠다는 것이죠. 최후의 해결책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사람을 숙청해 버렸어요, 죽였어요. 그러면 다 해결된다. 조용해진다는 거죠, 정말 그렇습니까? 구 소련이 일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했습니다. 중국의 천안문 사건이 있을 때, 사건 바로 뒤에 제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그 천안문 광장에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핏자국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많은 사람 죽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이야기, 신문에도 났었지요. 많은 청년들이 죽고 있을 때, 중국의 지도자, 실례가 되기 때문에 이름을 대지 않겠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국에서 11억 인구요. 11억 인구 앞에 백만 명은 적은 것입니다." 그 말에 광장이 조용해졌습니다. 백만명을 죽여서라도 조용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할 말 있습니까?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이 조용해졌어요. 자 우리 북한 땅에도 말이지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며칠 전에 신문에 났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웁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깐 도둑질도 많고, 부정부패가 많아져요. 그래서 700명을 총살했다는 거 아닙
니까. 앞에다 세워놓고 쏴버려요. 아주 조용합니다. 죽여서, 죽여서 해결하겠다는 거요. 자 그래서 해결이 되는 겁니까? 역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뭐 이런 얘기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심지어는 예수님을 중심해서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9절로 50절에 보면, 제사장 가야바가 이런 엉뚱한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조용할 수 있다면, 죽어야지. 그가 메시아든 말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알바아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조용할 수 있다면, 죽여버려." 이것이 가야바의 생각이요. 죽여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이 엄청난 죄악. 이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소란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그렇게 해결된 일은 없습니다. 보세요. 빌라도 법정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야바, 바리새인, 빌라도, 헤롯당, 사두개인, 서기관. 이 사람들이 원래 사이가 좋은 게 아닙니다. 서로 철천지 원수
처럼 미워하는 사람들이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은 하나가 됩니다. 합작을 합니다 협력을 합니다. 연합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교묘하게 씌어서 빌라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상상해 보세요. 이것은 악의 성공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모아놓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성공 작품입니다. 이렇게 빌라도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딱 못박아 놓고, 아마 손을 씻으면서 '성공했다. 어이구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랬겠지요. 다 끝났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도 한번 봅시다. 그들의 기대감, 그들의 청운의 꿈, 정치적 욕망, 메시아의 대망사상. 이런 것들도 이제 다 끝나버렸습니다. 하늘로서부터 온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끈질기게 물어온 사람들도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절망과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1절에 보면은 여기서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가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줄로 알았노라.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라고 믿었노라. 그렇게 바랬는데 비참하게 죽어가고 말았다. 우리의 기대와 간절한 소원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군사까지 세워서 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제 밤은 고요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인생들은 여기까지 생각합니다. 이러면은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무덤에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됩니다. 창조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초월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 빈 무덤에서부터 이것이 기독교요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대로 부활 하셨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일찍이 바로 깨달았더라면 절망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씀대로 부활하셨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합니다.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성경에 곳곳에 계속적으로 부활신앙이 있습니다.
이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똑바로 이해했더라면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실망할 필요가 없었는데.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대로 부활하셨느니라'
또 하나는 엄청난 복음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저는 이 말씀이 너무 가슴이 뜨겁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예수님 너무 좋은 분입니다. 이 제자가 누굽니까, 이 멍청한 제자들. 예수님의 그 많은 능력을 보고 그 많은 말씀을 배우고 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한 부탁까지 받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갔어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했어요. 모른다고 하고 마지막엔 맹세하고 마지막엔 저주까지 했어요. 이 형편없는 제자를 왜 찾아갑니까? 예수님, 저들이 실망하고 갈릴리에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갈 줄 알고 "거기서 만나자." 얼마나 고마우신 분입니까? "거기서 만나자." 여기 아무 책망도 없어요.
"내가 죽을 때 이 도망간 놈들아!" 그 얘기 안해요. "이 형편없는 놈들아!" 그런 말씀이 없어요. 부활하신 예수,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일러라." 말씀하십니다. 이 부활의 큰 은혜 앞에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바로 절대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제가 이렇게 늘 생각해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 저 같으면은요 빌라
도 법정을 아예 벼락 내리고 말겠어요. 이 가야바 벼락맞아 죽도록 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뭐 그렇게는 안 하더라도 최소한도 빌라도를 찾아가서 "이 사람아 정치 똑똑히 해라. 재판 좀 정신차려해 이놈아!" 이런 한 마디 안하겠습니까? 한 마디쯤 할 만 하잖아요? 또 가야바 이 대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이 꼴이니까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긴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야 정신 좀 차려라." 한 마디쯤 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은 이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원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 여유와 그 넉넉한 능력, 그 권세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거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미련해서 이런 것은 모르고 지금도 무덤만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요새 우리 나라도 어지간히 무덤 때문에 신경들 쓰드만요. 여러분 역사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요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 모든 사람들이요 그 모든 문화가 무덤 때문에 망했어요. 그 사원이니, 뭐 비석이니 흔적 전부 무덤입니다 그게. 무덤을 장식한 거예요. 애굽의 피라미드, 그 무덤하나 만들기 위해서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수백년 동안 만들었어요. 무덤하나 만들려고 이 짓을 한 거예요. 또 중국에 씨안에 가서 보면은 진시황의 무덤 굉장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 있었나 한심하죠. 무덤입니다. 종교적으로 보아도 소위 유명한 사원이라는 거 전부 무덤입니다. 말이 베드로 성당이지 베드로의 시체가 그 안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입니다. 무덤장식 하느라고 온통 정력을 다 쏟았어요 그리고 끝난거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그런데 에수의 제자들의 무덤은 왜 이렇게 큽니까?
여기에 넌센스가 있는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87년 미국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돈을 번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쑴멈보눔" 나도 잘 모르는 단어요. 라틴어라고 하는데 최고선이라
는 말입니다. 이런 이름의 회사를 차렸는데 뭘하는 곳인고 하니 미이라를 만드는 곳이에요. "당신들 죽거든 돈을 미리 내시요. 그러면은 아주 영원히 썩지 않는 기가 막힌 미이라를 만들어 주겠소. 그리고 호화로운 관을 만들겠소. 관 하나에 100만불. 보석으로 장식한 무덤." 이런 것을 내 놓았는데 정신 빠진 사람들이 수없이 거기에서 돈을 내서 이 회사가 짭짤하게 돈을 벌었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요. 우리 나라에도 이거 사업될걸요? 왜 이런 것입니까?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기에서 심지어는 자식들이 굉장한 무덤을 만들 때 "왜 그렇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번 돈 아버지가 쓰는데요." 이렇게 밖에 생각이 안됩니까? 한심한 얘기죠. 여러분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또한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보십시다. 무서움과 큰 기쁨, 두려움과 큰 기쁨이요. 아 두려울 수밖에. 빌라도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할 때 죄인이 됩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부활했으니 자기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두렵지요. 심판이 두렵지요. 또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부끄럽고 죄송하고 두렵지요. 그러나 이 모든 부끄러움은 잠깐이요 두려움도 잠깐이요 예수 부활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오로지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신앙입니다. 사도행전에 그 교회의 시작은 부활신앙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 부활!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부활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순교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폭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됐고 선교하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그 충만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충만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 대망 신앙으로 충만하고 특별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현재, Living Christ, 현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그리스도의 현재적 생명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고 생명력을 느끼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큰 기쁨이 있고 이 큰 기쁨 앞에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고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요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첫 부활절의 감격/마28:1-10
2004-01-05 21:54:46   read : 143


지난 주간 우리는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지냈습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와 고난일 집회를 가지면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로 승리하신 날입니다. 이 부활주일에는 감격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에는 무거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지만 부활주일은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도 우리는 부활절 새벽예배로 드렸습니다. 또 오늘 저녁에는 부활주일 특별찬양을 드립니다. 그것은 다 이 부활절이 가져오는 감격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첫 부활절의 감격을 누린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3년이나 늘 예수님 곁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또 뒤늦게 나마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아니었습니다. 첫 부활절의 감격을 누린 자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몇몇 여인들이었습니다.
여기 1절을 보십시오.
(1)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본문 앞에 27:59-61을 보십시오.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이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장사될 때에도 무덤을 향하여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그 앞에 55-56절을 보십시오.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마음 아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예수님이 갈릴리에 사역하실 때부터 늘 쫓아다니시면서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기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8:1-3에 보면 "(1)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는데,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 예수님을 좇으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의 일행을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따라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이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또 장사할 때, 장사하고 난 다음에도 계속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여자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서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가 안식일이 다 한 첫 시간, 아직도 날이 밝지 않은 미명에 무덤을 찾아 온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주님을 떠나지 않도록 하였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감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께 대한 헌신하고픈 그들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평소에도 주님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또 붙잡히실 때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무덤에 묻히실 때에도 주님을 떠나지 못하게 했으며, 그러다가 첫 부활절의 감격을 누리게까지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활절의 감격을 누립니까?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부활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절이라고 해도 그냥 덤덤하게 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활절이 기다려지고 부활절 하면 마음이 설레고 감격이 있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활절을 기다리고 감사하게 됩니까? 이 여인들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진정한 감사를 느끼는 자들입니다. 또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며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난 한 주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해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또 그의 말씀을 따르려고 애를 쓰며 고난을 겪어 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부활절이 감격스럽습니다. 고난주간도 한 주간을 경건히 보내다가 부활주일 아침 일찍 나옵니다. 꼭 이런 부활절이 아니라 해도, 매주일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모이는 날이기 때문에, 매주일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 감격스럽습니다. 원래 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감사해서 찬양하기 위해 모이는 날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 이런 감격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왕에 예수님을 믿는데, 이 여인들처럼 감격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러면 이 여인들이 누린 첫 부활절의 감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첫째로,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은 것입니다.

(5)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이 여자들에게는 무서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영적 존재인 천사를 보았으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더군다나 여기 3절에 보니, 그의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이 눈같이 희었으니 누추한 옷을 입고 죄많은 인간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수직하던 자들은 저를 무서워해서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하면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고는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무서움과 함께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무서움은 육신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서움 뿐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사랑하고 사모하던 예수님, 또 그들을 사랑하여 주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줄만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평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뻤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기쁠 수 없습니다. 무서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을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그냥 덤덤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이 여인들이 바로 그런 기쁨을 맛 본 것입니다. 그런 기쁨으로 그들은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달음질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감격적인 일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평안하뇨?"라고 하십니다. 원문의 뜻은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만나서 하는 인사였는데, 샬롬과 같은 평안하기를 원한다는 것과 함께 기뻐하라는 말도 전했습니다. 평소의 주님의 목소리며 평소의 주님이 자주 쓰시던 인사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으로 예수님의 인사를 받게 되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너무 감격해서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진정한 경배는 이렇게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아무리 격식이 잘 갖추어져 있고 순서가 잘 되어 있다 해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으면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것 조금 부족해도 감사와 감격이 있는 예배, 그런 예배가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할 때 더욱 그렇게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예배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믿고 체험하고 모이니 그들의 모임에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예배가 그랬고 그들의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임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들이 예배드릴 때 감격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성경공부 모일 때 흥분과 감격이 있습니까? 기도하러 모일 때 그런 감격이 있습니까? 교회 일을 하거나 밖에서 봉사할 때에 감격이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진정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에게는 그런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격적으로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감격적인 예배와 아울러 감격적인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말씀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를 무섭게 하고 두렵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가 믿고 사랑한 주님이다. 무서워말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전에도 천사들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감격하여 달음질을 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는 얼마나 더 감격하여 달렸겠습니까? 이 당시 여인들이 달음질하는 것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간편한 조깅복을 입고 달리는 여인을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중동지역의 헝겊으로 칭칭감은 옷을 입고 뛰는 것입니다. 여성에게 품위와 순종을 요구하는 사회인 유대지역에서 여자들이 옷이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고 막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숨이 차는 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신발이 벗겨짐에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힌 채 그들은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음질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갔고 그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전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그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저의 말이 허탄한 듯이 보여 믿지 아니하나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였다고 했습니다.(눅 24:11,12) 주님의 부활을 믿고 체험한 여인들과 그것을 믿지 않고 무서워서 문을 꼭 닫고 소심하게 위축되어 있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큰 차이를 엿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들도 부활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지만 이 여인들 이 누리고 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가진 사람들은 표정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생활이 다릅니다. 그들은 어디서 나오는지, 용솟음치는 힘, 기쁨과 활력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에 오래 나왔고 점잖게 앉아 예배를 드리고, 교회 풍습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은 근심, 걱정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확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활의 감격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그들은 진정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그들은 먼길을 단숨에 뛰어서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그들은 그 뒤에도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그들은 교회를 함께 섬겼습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그들에게 닥쳤던 핍박과 환난도 이겨냈습니다. 결국 이 여인들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 부활의 감격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이 부활의 감격입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구역도 모여야 합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이 감격이 없으면 우리들의 모임은 헛것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들기만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못 할 것이 없습니다. 근심, 걱정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이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과 우리들의 차이는 이런 부활에 대한 감격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일 때마다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기도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안에서는 기쁨으로 교제하고 밖에 나가서는 전도했습니다. 이들이 증거했던 말씀을 사도행전에서 보면 이들에게 좋은 문구나 미사여구, 예화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설교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요점이었습니다. 이것만 들으면 사람들이 다 열광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눈물을 흘리고 다시 살리심에 기쁨과 감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감격이 있었고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약합니까? 물론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에 살았고, 우리는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느냐 보다 그것이 사실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진정한 사실입니다.

1. 성경대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것은 우연히 어쩌다 되어진 일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성경의 예언에 나타난 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살아 계실 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2. 주님의 빈 무덤도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 나셨다 하는 것 외에는 주님의 빈 무덤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3. 또 실제로 살아나신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것도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강력한 증거입니다. 한번도 아니고 성경에 무려 열 한 번이나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개인적으로 또 어떤 때는 그룹의 사람들에게 심지어 어떤 때는 500명에게 일시에 나타나신 일도 있었으며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에 그들의 태반은 아직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4. 또한 제자들의 변화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좋은 증거입니다. 살아 계셨을 때나 죽임을 당했을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비겁한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변화되어 담대히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고 핍박을 받으며 죽임을 당해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도 요한만 빼놓고 모든 제자가 다 순교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그들이 정말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입니다.
5. 마지막으로 교회의 역사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큰 증거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극심한 핍박을 받아 왔습니까? 그들이 왜 그런 핍박을 받았습니까? 이는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핍박 가운데서도 교회는 없어지지 않고 살아나서 결국은 온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수백년 동안 부활의 사실을 지켜오면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주님이 부활하지 않았으면 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합니다. 단지 너무 큰 일이어서 믿기지 않는 것이지 사실은 사실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야 믿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가 계십니다. 장차 다시 오실 때까지 육체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그 주님의 부활을 믿고 믿음대로 사는 자에게는 놀라운 감격이 생깁니다.
저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제일 감격이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았지만 점차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이라는 확신이 드니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의문되던 것들이 풀리고 다른 성경의 사건들이 다 믿어졌습니다. 출애굽기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홍해가 갈리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 다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나니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인 것을 생각하니 아무 것도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또 그렇게 사니 정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체험되었습니다. 기도하니 응답 되고, 또 늘 내 곁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어려울 때는 힘 주시고 또 잘못할 때는 책망도 하는 예수님은 정말 살아 계신 주님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는 주님은 정말 살아계신 주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삶은 정말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걱정 근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삶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계신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항상 기쁨과 감격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도 이런 부활을 믿고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보지 못했지만 믿는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이미 이 부활의 감격을 누린 적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 부활절 아침에 다시 한번 이 감격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첫 부활의 기쁨을 맛본 여인들처럼 이 감격을 가지고 이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모임을 가질 때도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주일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유대인들은 주일날 모이지 않고 토요일날 모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주일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이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모인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신앙을 가지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모여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부활의 감격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감격이 있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선입관을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비우고 성경 앞에 서보십시오. 2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그것을 믿는 자에게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죽음에서도 부활로 승리 하셨는데 우리를 이길 세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매 주일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좁은 길을 가면서도 매일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극심하다 해도 그것을 참고 견디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감격을 가지고 근심, 걱정을 벗어버리며, 우리의 연약한 것을 벗어버리고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주님을 사랑하고 전함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마28:1-10
2003-12-19 11:03:46   read : 65


아멘, 너무 찬양이 좋지요? 녜,
아~유명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개혁의 도상에서 여러가지 그 장애에 부딪혀 아주 좌절해 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침식을 전폐하고 병상에 누워있던 어느날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루터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깜짝 놀라서
여보, 누가 죽었오?
예,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 무슨 말이요?
이때 루터의 아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당신이 그 분이 살아계시다면 그렇게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리가 있겠어요?
이 말이 루터를 깨우쳤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벌떡 일어나 그는 종교개혁의 과제를 다시 추진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다면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이 부활주일에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가고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그들의 옛날 직업인 어부의 생업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러는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발견되면 그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두려워 그들이 묵고 있었던 집의 문을 꽁꽁 닫고 그들은 숨어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커다란 사랑을 입었고 그 사랑 앞에 갚을 수 없었다고 느꼈던 소수의 여인, 제자들,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마리아, 여성 제자들만이 제대로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안쓰러워 그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새벽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접합니다. 주 부활의 소식을 접하고 살아계신 주님을 친히 만나는 놀라운 경험,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본문의 5절입니다. 마태복음 2장5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절 다같이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래서 여인들은 그가 누우셨던 장소를 확인합니다.
빈 무덤이였습니다. 과연 그는 다시 사셨습니다. 평소에 살아계실 때 그가 예언하신 그대로, 내가 죽음에서 살아날 것이라는 예언 그대로 살아난 현장을 확인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였을까요? 이때 바로 그들 자신도 믿을 수 없었던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믿음의 여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 첫 부활의 아침에 이 여인들이 보여진 반응이야말로 오늘 살아계신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의 한 모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분이 참으로 다시 사셨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정말 기뻐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기뻐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 여인들이 보여준 반응을 오늘 본문의 8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8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본문의 8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여기 두개의 매우 대조적인 단어를 보십시요. "무서움과" 뭐에요? "큰 기쁨으로" 무서움, 다른 말로하면 두려움인데요 두려움과 크다란 기쁨, 이 두 가지는 공존하기 어려운 감정이지만 때로 역설적으로 우리가 너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경험했을 때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성서 학자들은 이 기쁨을 전율할만한 기쁨이 였다고 말합니다. 전율할만한 기쁨.
이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 그런 기쁨이였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의 근본적이고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죽음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죽음에서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지배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죽음이 인류의 왕 노릇하고 있다라고 말 합니다 인류의 왕 노릇 한다, 로마서에 나오는 표현이지요? 다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의 지배에 종속되지 아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망률이 증가되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망률이 어떻게 증가합니까? 안 죽을 사람이 죽었단 말입니까? 죽을 사람이 미리 당겨서 죽었을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모든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죽습니다. 아무도 이 죽음에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해답이 있을까요?
세상은 이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철학은 이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발전되는 인류의 생명과학도 단지 우리가 살고있는 그 수명의 길이를 조금 연장시키는 것을 연구할 따름입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시간을 연장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이것은 해답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회답을 갖고 있습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감격적인 사실일까요?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찌 흥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신의 부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너희도 살리라!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보증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가 선포했던 이 말씀은 인류역사를 뒤집을만한 놀라운 선언입니다. 아무도 이런 선언을 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이제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당장 말이죠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 암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약을 발명했다고 하십시다. 흥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통 흥분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소리칠 것입니다. 여기 암을 정복한 약이 발명되었다고,
그러나 암은 죽음을 치료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까지 시간을 조금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으로서의 부활을 지금 선포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그리고 여러분과 저의 부활이 분명히 보장된 사실이라면 우리는 얼만큼 기뻐해야 할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얼만큼 흥분해야 할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또한 단지 우리가 죽음이후에 부활이 약속되었다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시든 부활의 능력으로 날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오늘 하루 하루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이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말씀 드린 것처럼 죽음의 힘일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의 세력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여러분 죽음의 힘보다 더 무서운 힘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패배 시킨 부활의 힘인 것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던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한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 부딪히는 삶의 시련이 어렵고 힘겨운 것이라 해도 왜 절망하십니까 왜 좌절하십니까?
우리는 참으로 이 죽음 건너편에 부활의 놀라운 소망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안에 역사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삶의 시련을 넉넉히 넘어설 수 있는 흥분과 기쁨을 가지고 우리는 삶의 장 앞에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제가 예수처음 믿고 함께 사역하던, 제가 모시고있던 선교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어느날 들려주었던 그 얘기가 부활절이 되면 늘 생각이 납니다.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자기가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고 그래요. 뭐냐고 그러니까 우리 한국 교인들이, 그 거리에서, 집에서 만날 때는 다소간 웃으면서 흥겹게 즐겁게 얘기를 하다가도 왜 갑자기 교회당 안에만 들어오면 그렇게 심각하고 무서운 표정이 되느냐구요? 다 울상이고,
지금 보십시요, 제가 보면은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에요. 녜,
그래서 제가 대답이 궁해서 얼결에 대답한다는 것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수난을,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이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씩 웃으면서 선교사님이 하는 말이 그러면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잊어셨나요? 그러더라구요. 그분이 부활하신 것은 잊어버렸나요? 그분이 다시 사신 것은 잊었나요?
그렇습니다.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함게 하신다면 우리는 넉넉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이 기쁨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마땅한 반응이여야 할 것입니다. 그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몫이 되기를 그 기쁨이 회복되는 부활의 주일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옆에 사람 쳐다보시면서 좀 기뻐하십시다 인사하십시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이 없는 사람은 부활한 것 믿으십니까? 한번 물어보세요. 따져보세요. 부활한 것 믿으십니까? 녜, 우리는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두번째로 우리는 경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경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여인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이 였어요.
자, 9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본문의 9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자 천사가 부활의 메세지를 선포했을 뿐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 거기에 오셨어요. 평안하냐? 얼마나 놀랬겠어요?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는 그순간 여인들은 엎드립니다. 주님의 발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경배를 시작합니다. 경배를 시작합니다. 왜 일까요?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경배의 대상일 수가 없어요.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 입니다. 성경이 철저하게 우상숭배를 금하고있는 이유, 하나님 홀로 살아계시고 그분 홀로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여인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뭘 나타내어주고 있어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 예수님은 그 경배를 만류하지 않으셨고 그 경배를 수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은 사도행전에 아주 흥미 있는 두개의 에피소드가 기록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시면 고넬료라는 이방인이, 군인이 였는데 장교였는데 그가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받습니다.
자, 유태인들은 보통 이방인을 상대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베드로를 보내시사 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그가 복음을 통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고넬료는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앞에 엎드려서 베드로를 경배할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깜작 놀래면서, 물론 베드로가 한국에 문선생 비슷한 분이였다면 그 경배를 받았을지 몰라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깜짝 놀라 만류하면서 나도 사람이라고, 나도 사람이요 나도 사람이요.
사도행전을 계속 읽어보시면 비슷한 또 사건이 일어나지요 사도행전14장인가요? 녜,
거기에 보시면 바울이 루스드라 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납니다. 이 광경을 보자 루스드라의 시민들이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함께 있든 바울과 바나바 두사람 을 보면서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 앞에서 제사를 할려고 그랬어요.
이때 바울이 보여준 반응이 뭐에요? 그래 나는 신이야!그랬습니까? 옷을 찢습니다 바울이 막 옷을 찢으면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우리는 그대들과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라고, 사람이라고, 사람은 경배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인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뭘까요? 둘 중에 하나에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 사기꾼이든가 하나님이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금세기의 최대의 크리스챤 평신도 였든 옥스포드의 C S루이스가 물었던 질문이에요. 그분은 사기꾼이든가 하나님이든가 둘 중에 하나라고,
그분이 사기꾼일 수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입니다. He's God !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하신 데로 정녕 살아나셨고 다시 사신 부활하신 살아계신 주님, 그래서 지금 여인들은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이 부활 사건을 가르쳐서 이것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의 증명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로마서, 이 위대한 로마서가 펼쳐지는 1장4절에 보시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 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성령에 의해서 그 역사에서 부활하신 그 사건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신 신성의 증명의 사건이라고 바울사도는 선포하고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진실로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이 시간도 예배를,그리고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경배하는 사람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를 경배 속에서 체험하는 사람마다 세상을 넉넉히 이길 줄로 믿습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어라고 생각해요? 예배는 단순히 예배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순서에만 참여하는 것,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자리에 한시간 동안을 머물러있고도 전혀 예배하지 않는 자로 이 자리를 나갈 수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이 없다면 말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가족이 함께 어린아이를, 꼬마랑 다같이 와서 주일날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녁시간에 주일저녁에 아버지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회에서 뭘 배웠는가를 물어봅니다.
너희들 주일학교에서 뭘 배웠니? 예배시간 어땠니? 아이 재미있었어요. 즐거웠어요. 그러면 오늘 하루를 이렇게 보낸 우리 주님 앞에 각자 돌아가면서 감사하십시다.
꼬마가, 아들이 인제 감사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오늘 예배당 가서 너무너무 예배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었어요. 하나님도 거기 계셨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하하~~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시는군요.
예배의 프로그램은 참여했어요.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단 말이지요. 그건 예배가 아니에요.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으로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순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래 주님은 살아계셔!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예배의 장을 떠나가는 순간 그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세상의 모든 프레시와 스트레스를 이기고 당당하게 진지하게 아름답게 확실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들의 모습을 저에게 한번 보여주십시요.
저는 그 사람이 진지한 예배자라는 사실을 동시에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진지한 예배자를 저에게 보여주십시요. 저는 그들이 비록 이 자리뿐만 아니라 그들이 삶의 장에서 직업의 장에서 산업의 장에서 모든 스트레스와 프레시를 이기며 또한 넉넉히 삶의 장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보여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배는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내 아이들에게 어떤 부활절 멧세지를 내가 보낼까, 그래서 어제 그저께 저녁에 기도하면서 우리아이들에게 이메일 카드를 보냈습니다. 보내면서 거기다 이런 멧세지를 보냈습니다. 예배를 너희들의 인생에 우선순위로 삼어다오, 그분이 정녕 살아나셨다면, make worship priority in your life if Jesus is truly risen, 그 분이 정말 다시 살아나셨다면 예배를 너희들의 인생에 우선 순위로 삼아다오, 예배하는 자들, 그들은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참으로 살아나셨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는 증거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을 체험한 여인들이 보여주었든 반응이 였습니다.
10절 마지막 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10절 다같이 읽습니다. 10절 시작,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나는 정녕 살아났다고, 그러면서 이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는 갈릴리로 가라고,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살아난 소식을 전하라고,
그 다음 11절에 보시면 "여자들이 갈제" 순종입니다. 주께서 가라고 말씀하셨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니 가라고 말씀하시기전에 벌써 가지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과 열정을 가지고 가고있는,이미 말하기 시작한 여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요.
8절에 보시면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뭐에요? "알게 하려고" 알게 하려고 달음질 했어요. 어떻게 침묵할 수가 있겠어요.
여러분 정말 암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놀라운 약을 옆에 있는 사람이, 이웃집 사람이 발견했습니다. 잠잠할 수가 있습니까? 잠잠할 수가 있습니까? 동네를 돌아다닐 것입니다. 아픈 모든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여기 우리 이웃집 가운데 이 암을 정복한 놀라운 약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고 흥분하며 소리칠 것입니다. 말할 것입니다. 그게 전도가 아니에요? 그것이 전도에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본문을 묵상할 때 항상 제 마음속에 한가지 질문이 있었어요. 부활하신 주님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여인들에게 나타났거든요. 저는 남성으로서 항상 궁금한 것이 베드로는 야고보는 요한은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었는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성들에게 먼저 나타났을까? 오랫동안 제가 가지고 있었든 신학적인 질문이 였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번에 제가 남미에 가서 발견을 했어요.
남미에 갔더니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물어 보더라구요. 남미에 있는 목사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여성에게 나타난 줄 아느냐고? 제가 지금 하는 얘기 듣고 저에게 여성 여러분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한 얘기입니다. 저는 여성들을 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성들에게 나타났는가? 그분 대답이 뭐냐하면 여자들이 입이 싸기 때문이다 하하~~ 그래서 이 소식이 빨리 퍼지는데 효과적이다.하하~~ 네, 그분이 한 얘기에요 내가 한 얘기가 아니에요.
녜, 미국에도 비슷한 조크가 있어요.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자동차가 뭐냐? BMW 랍니다. BMW란 것은 Big mouth woman의 약자입니다. 입이 큰 여자들이다 이 말입니다.
어쨌든 이 여인들을 통해서 첫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에 대한 책임은 여성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도는 책임이요 특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면 저와 여러분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보증된 사실을 우리가 알고있다면 어찌 잠잠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 열왕기 하 7장에 보면은 이런 사건이 있습니다. 옛날 사마리아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시리아에서 쳐들어온 아람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심지어 자식들을 먹는 처참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성문 곁에 있던 나환자 몇 사람이 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밤중에 적진으로 가보았어요. 뭐 붙들리면 죽지 뭐 하고서, 앉아있어도 죽어도 마찬가지니까, 적진에 들어갔더니 적진들은 다 퇴각을 해버렸어요. 그리고 식량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이 굶었던 그들은 정신없이 먹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먹다가 그들에게 다가왔든 그들에게 일어났든 놀라운 자각하나가 있어요. 이 자각을 그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오늘날은 기쁜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는 잠잠하고 있도다,
이 아름다운소식이, 식량이 여기 있다는 좋은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는 잠잠하고 있다, 우리가 내일아침까지 침묵하고 기다리고 그래서 우리의 이웃들이 죽어간다면 이것은 우리가 벌을 받을 일이다, 가자! 가서 이 소식을 전하자!
디티나이프 라는 유명한 세계적인 선교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전도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전도란 뭐냐? 전도란 것은 배고팠든 거지가 양식을 발견한 후에 그리고 그 양식을 취하면서 다른 배고픈 거지들에게 가서 여기에 빵이 있다고 전하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 전도에 대한 증언입니까? 목이 말라 죽어가든 사람들이 생수를 발견하고 목근을 적신 후에 목말라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외치는 거에요.여기에 생수가 있다고, 여기에 샘물이 있다고, 그것이 전도가 아닙니까?
죽어가든 사람이 의사를 만나서 자기의 병을 치료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치유가 있다고, 여기에 당신의 살길이 있다고, 그것이 전도가 아닙니까?
용서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그 마음이 어둡고 마음이 감옥이고 인생의 길이 처참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용서, 하나님의 완벽한 용서,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그 흘린 피로 나를 죄 사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 그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이 아직 용서 받지 못한 다른 죄인들에게 찾아가서 여기에 용서가 있다고, 그리스도 안에 죄 사함이 있다고,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다고 전하는 것, 여러분 이것이 전도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히틀러 나치가 지배하던 시절에 유명한 본헤퍼 목사가 나치에 저항했던 유명한 목사님이죠? 그분과 함께 나치에 저항했든 분 가운데 마르틴 니멜러 라는 목사님이 독일 목사님이 계셨어요. 말틴니멜러, 그는 유명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온 후에 그는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히틀러의 작난들, 이들만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침묵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잠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히틀러가 주님 앞에 마지막 심판을 받고있는 광경을 꿈꾸게 되었어요.예수님이 이렇게 물어 보더래요 법정에서,
히틀러에게, 너는 왜 나를 믿지않았느냐? 너는 왜 나를 믿지않았느냐?
히틀러가 대답하기를 저에게 아무도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히틀러보고 하는 말이, 야! 너 마르틴 니멜러 목사님하고 몇 시간씩 너 같이 잡아다 놓고 너가 얘기하지않았느냐?
그때 마르틴 니멜러가 너에게 나를, 나를 전하지 않더냐? 이 광경을 보고있든 니멜러는 꿈속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납니다. 갑자기 깨어납니다. 아!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었구나, 저가 나를 핍박하지만 저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저도 용서 받고 구원 받아야 할 한 영혼으로 바라보지 못했구나,
그날부터 그는 전도를 결심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붙들고있는 자기를 감시하고있든 나치의 가드들에게 그리고 간수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정신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이라고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그래서 이 마르틴 니멜러를 통해서 적지않는 숫자의 사람들이 나치의 간부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리는 놀라운 기적 같은 사실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그것을 여러분과 제가 참으로 믿는다면 오늘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정말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고 진실로 이 기쁨 안에서 이 세상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삶의 현실은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 마다 살아계신 주님, 그리고 거룩하신 역사를 지배하신 그분 앞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구원이라고 소망이라고 우리는 전도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였든 여인들, 그들은 평범한 여자들이 였어요. 평범한 여자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후에 첫번째 평신도 선교사들이 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평신도 선교사들,
그들을 통해 세상은 빛을, 세상은 여명을, 세상은 새로운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면 오늘21세기를 위해서 누가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겠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하지않는다면 누가 이 책임을 감당할까요
우리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우리의 직장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장에서부터 우리의 동네에서부터 우리가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여기서부터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할까요? 지금 하지 않는다면 언제 하시겠습니까?
여기 부활하신 주님 앞에 우리가 엄숙하게 고백해야 할 또 하나의 책임, 제가 전하겠습니다. 생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라면 더욱이 순종하겠습니다. 여기 빠른 걸음으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든 여인들을 통해서 일세기의 세상이 새로운 새벽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면 오늘 21세기는 여러분과 저의 증언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누가 이 주님의 부르심 앞에, 보내심 앞에 응답할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통성을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는 세상이 어렵다고 불평만 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주님이 내 증인이 되었다면 저는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경배하며 예배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증거하며 살겠습니다. 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의 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를 향한 우리들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기뻐하겠습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인 것을 확인합니다. 오 하나님 경배하겠습니다. 경배하며 살겠습니다.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증거하며 살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 발걸음이 미치는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있습니다. 하나님 이 복음의 빚 앞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바울사도는 나는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이,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기위해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동원했습니다. 복음이 한국 땅에 오기까지 나에게 미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순교하고 피 뿌린 줄 아십니까
우리는 온 세상에 복음의 빚을 지고있습니다. 침묵할 수 없는 우리들, 열방을 향해서 온 세상을 향해서 이 복음을 전하며 내 삶이 다할 때 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힘차게 가사의 뜻을 기억하며 찬양하십시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 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할렐루야! 우리 살아계신 주님 앞에 영광의 박수를,
녜 자기주변의 한 열 사람씩, 열 사람씩,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승리하십시다 이렇게 인사하세요 열 사람씩 인사하세요. 막 돌아다니면서,
다섯 사람밖에 안한 사람들 흩어져서, 마져 다섯 사람 인사하세요. 열사람 인사 안한 분, 가지 마세요 하하~~
녜,오늘 몇시에 와야 합니까? 1시 반부터, 녜, 그리고 내일 몇 시부터요? 7시 반부터, 월 화 수, 월 화 수 녜, 이런 특별모임에 참석한 사람을 뭐라고 그랬어요? 진짜 교인, 우리 진짜가족 이에요.
옆에 사람 한번만 더 인사하시면서 진짜교인 되십시다. 이렇게 인사하세요. 진짜교인 되십시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건지신,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구속의 은혜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부활하심을 그의 살아계심을 우리 마음속에 확정시켜 주시며 우리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성령의 놀라우신 교통케 하심이 오늘 이 부활의 아름다운 주일아침 주님을 경배하고 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의 삶의 현장마다 가정 직장 그리고 우리사업의 장마다 부활의 승리가 그 평안이 그 능력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시 사신 주님/마28:1-10
2003-11-18 15:21:08   read : 221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날 때, 슬픔과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화된다. 부활, 영적회복, 소생
가. 슬 픔(1)
1. 새벽녁, 아직 동이 트기 전에 어두운 길을 여인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서 길을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오래 전에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막16:9) 이 여인은 일곱 귀신이 들려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아내시고 치유하셔서 그 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마리아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도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는 벌써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섬기고 돕는 일을 했습니다.(눅8:2)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아 예루살렘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을 때에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으나 이 여인들은 도망가지 아니하고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지켜 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지켜 봤으며(마27:56),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 까지도 지켜 봤습니다.(마27;61)
2. 그리고 이제 안식일이 지난 후에 동이 트기 전에 그 무덤에 갔습니다. 향품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 당시 중동지방에는 시신에 향품을 발라서 부패하는 것을 늦추고 냄새나는 것을 없애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렇게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무덤가에 갔습니다. 무덤가로 가는 그 여인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죄없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고난을 당한 것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잔인무도한 로마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 너무나 분했습니다.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던 예수님을, 그토록 겸손하고 온유하던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이별의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내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믿고 따랐는데 예수님께서 맥없이 죽게 되니까 너무나 낙심이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 슬픔 가운데 무덤으로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서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여인 둘이서 무덤에 가는 것도 무섭고, 시체를 만질 것도 무섭고, 무덤 앞의 돌로 만들어진 문을 치울 생각하니까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또한 로마 군인들을 만나서 실갱이 할 생각을 하니까 그것도 걱정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이 여인들은 슬픔, 두려움, 걱정 등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 무덤에 갔습니다.
여러분, 시체에 향품을 바르므로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조금 부패가 더디다고 해서 생명이 다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냄새가 당장은 없겠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도 마찬가지고..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향품을 바른다고 해서 슬픔과 낙심과 걱정들이 모두 없어지고 기쁨과 희망이 생길까요? 생명이 없는 속에는 기쁨과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향품을 바른다는 것은 생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상태에서 궁여지책으로 손을 본다는 정도이지 역시 슬픔과 낙심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슬픈 마음으로 낙심되고 좌절된 마음으로 무덤에 도착했는데 그들은 무덤에 도착해서 상상 밖의 일을 보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기쁨 (2-8)
1. 천사의 역사(2-4)
이미 천사가 그 무덤에 내려왔습니다. 지진이 나고 돌이 굴러져 가고 천사와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때에 그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그 하늘영광을 보고 두려워서 기절해버렸습니다. 죽은 사람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요. 무덤을 인봉하고 창과 칼을 들고 군인들이 지켰으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천사를 통해서 일을 시키시면 사람이 지켜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든든하게 지키는 것 같던 그 사람들이 모두 죽은 자 같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천사의 전한 소식(5-7)
무덤에 와서 여인들이 그러한 장면을 봤을 때에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천사들이 ‘무서워말라’(5a)고 아주 부드러운 말로 여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1) 그리고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줬습니다. 그것이6절 말씀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전해 줬습니다. 그래서 의아해하며 쳐다보니까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증거들을 몇몇가지를 쭉 이야기 해줍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계셨을 때에 이미 여러 번 예고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번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번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여기에 온 여인들도 그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말씀하시고 많이 말씀하셨는지 그 얘기를 제자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은 후 십자가에서 죽은 뒤 사흘만에 부활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더욱 더 군인들로 하여금 무덤가를 지키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그전에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며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잘 몰랐는데, 반대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잘 기억했습니다. 그 얘기를 상기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여러 번 예고하신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2)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빈 무덤을 와서 보고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라고 얘기했습니다(6b) 시체가 있던 무덤은 텅 비어있고 시체를 쌓던 세마포는 천만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시체를 덮었던 수건도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무덤 안을 들여다 보니까 잘 정리가 되어있는데 시체가 없었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3) 천사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전에 하시던 말씀을 증명해 보이며 이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이야기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얘기를 전하라고 하였습니다.(7) 참으로 우리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예수님께서 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제자들이 모두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제 저 제자들은 쓸모없다고 생각도 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불러모아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다시 사용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이 귀한 은혜의 소식, 이 귀한 우리 주님의 은혜의 계획을 전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3. 기쁨으로 떠남(8)
1) 여인들이 천사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달려나갔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을 만난 두려움도 있었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것, 본 것, 경험한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2)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기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전에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났고, 무덤이 비어있는 것도 확인했고 예수님께서 다시 사시긴 사셨나보다는 기쁜 마음을 가졌습니다.
3) 그리고 이 놀라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빨리 뛰어갔습니다. 무덤에 올 때에는 조심스럽게 조용히 왔으나 무덤을 떠날 때에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빨리 달려갔습니다. 제자들과 이 기쁜 소식을 나누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달려갔습니다.

다. 회복 (9-10)
1. 예수님 만남 (9a,10)
1) 이들이 열심히 달려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긴 했으나 이번에 진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평안하뇨?”(9a)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이 말은 평상시에 늘 사용되는 인사말입니다. 그 평상시의 인사말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분. 지금 머릿속에는 고통을 겪은 예수님과 십자가에 죽은, 그래서 무덤에 묻힌 예수님만을 생각했었는데, 예수님께서 “평안하뇨” 라고 이야기 할 때에 그것은 전혀 생소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말은 바로 평상시에 늘 하던 인사말이고 평상시에 늘 친숙하게 듣던 인사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랫동안 계속 교제한 사람은 직접 만나지 않아도 전화음성만으로도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 우리 예수님으로부터 친숙하게 듣던 인사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친숙한 그 말투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10a)고 이들을 또 위로해 주셨습니다. 평상시에 다정히 인사하시고 말을 건네시던 바로 그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2. 여인들의 인사(9b)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절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예수님을 그전 그대로의 친숙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까 갑자기 예전의 친숙하던 인간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덥썩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과 의심과 낙망과 이 모든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슬픔은 깨끗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서 이전의 친밀한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이전의 관계가 회복되고 소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기운과 맥이 빠져있던 것이 다시 소생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것이 다시 소생되었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우리 주님의 생명을 직접 접촉하게 되었을 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에 이 여인들은 영육간이 회복이 되고 소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명 없는 시체에 향품을 바르고 있으면 슬픔과 낙심이 사라지고 기쁨과 소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다시 보고 다시 만나게 될 때는 기쁨과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생명을 느끼게 되었고 생명을 만지게 되었고 접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 여인들의 마음 가운데에 기쁨과 희망이 샘솟게 되었고 그들 속에 생명력이 다시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 사순절 고난주간을 정말로 의미 있는 주간으로 보냈습니다. 3주전에 우리는 회개와 영적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회를 하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무엇을 하나 하려면 벌써 작년부터 연간계획을 세워서 시행하지 무계획적으로 갑자기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기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에게 기도회를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대로 놔두면 안되겠다고 싶어서 우리에게 기도회를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3주간 동안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 한심하고 슬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묵상할 때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7교회를 가지고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것을 마태복음을 가지고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수같이 우리의 심령을 찔러서 쪼갰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찔렸고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찢으며 기도하게 되었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죄를 다 드러냈습니다. 쉽게 생각하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했던 것들이 모두 다 죄고 잘못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에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이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신실치 못한 것과 믿음이 없는 것과 사랑이 없는 것이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심을 버리고 순수하지도 못하고 거룩하지도 못했던 것이 여지 없이 다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동안에 우리가 시체와 같이 생명 없는 것에 매달렸던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조직이나 예산, 직분과 같이 생명 없는 것들에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던 것을 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수치와 고통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신앙양심을 예민하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순수한 신앙과 깨끗한 신앙과 거룩한 신앙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향해서 회복해 나갈 열심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동안에 생명의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고 생명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생명의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부활절 아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가 생명 없는 것을 붙들어야 겠습니까? 생명 없는 것을 붙들고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사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다시 사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분의 생명을 만지고 느끼고 그 분과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고 기쁨과 희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신앙과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불쾌한 부활/마28:1-10
2003-10-21 21:35:28   read : 170


지난 시간에는 주님이 죽으신 후의 일을 통해서 신자의 능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정말 열렬히 주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자기 착각 속에 빠져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신자들은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자기가 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참된 신앙은 우리 힘으로 소유할 수 없고, 신앙의 삶 또한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일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력과 열심으로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함으로써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이만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괜찮은 신자가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착각 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분량을 가지고 신앙의 척도를 삼기 때문에 뭔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신앙은 자라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이러한 착각이 커갈수록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보다 일을 적게 한 사람보다는 덜 죄인이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원하게 됩니다. 좀더 많은 일을, 좀더 성과 있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주셔서 많은 일을 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내세울만한 자랑스런 일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능력을 구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립니다. 부활은 천국은 우리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누구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단지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모든 소망과 힘을 다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면서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부활에 대한 얘기를 기억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당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셨겠습니까? 장사를 멋있게 지내주는 것을 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입니다. 3일 후에 부활하실 예수님을 장사지낸다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활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도망을 친 상태이고,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의 새무덤으로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었습니다. 부활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불신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신앙의 능력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까? 그것은 나도 남들같이 많은 일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이는 인물이 되어보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을 구해서 그 능력으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능력을 구해서 내가 희생하고,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에는 희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능력은 희생할 줄 모르는 나를 희생하는 자 되게 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나를 사랑하는 자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들의 종교적인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종교적인 열심에 빠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에 빠진 자들은 자기에게 능력이 있기를 구합니다. 능력있는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는 신앙인인체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열심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이것과 다르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지금 교회는 종교 열심에 빠져있고, 교인들에게도 종교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부활이 아주 불쾌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자신이 예수님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세상에 의해서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기를 싫어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도 싫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요구하는 부활이 불쾌할 수밖에 없고, 단지 몸이 죽어서 다시 산다는 그 부활만이 마음에 들뿐입니다.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힘이요 소망입니까? 이것을 오늘 이시간에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인간의 종교성을 가지고 이해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이 이해하는 부활이란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우리도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으면 죽었다가 나중에 다시 사는 부활입니다. 전혀 부담감이 없는 부활입니다. 전혀 거부감이 없는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나중에 진짜 부활이 있든 없든 일단 죽었다가 산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봐야 손해될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을 말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부활을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의 한 일부분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교회도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이 주님의 부활인지는 전혀 관심도 없이 단지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년에 한 차례, 교회가 정해놓은 부활절에만 전해질뿐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활이라는 요행을 생각할 뿐입니다.

부활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부활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개입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신앙, 모든 힘, 모든 열심들을 다 부정해 버린 일입니다. 세상 인간의 종교성이나, 열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즉 자기에게 뭔가 불리해질 때 자기의 이익을 따라 가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그저 실망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우리들의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선다면 그 역시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을 모르고 자기들의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버립니다. 또는 자기들이 어려울 때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주님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낙심해 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뭔가 믿음의 열심이 있는 것 같고 뜨거움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아직까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를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신앙의 갈등도 없이 자기 열심을 가지고 뭐가 해보려고 이리저리 설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 믿음과, 자기 열심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말한다면 과연 그들이 그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자기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번 멋있게 해보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나선 사람들에게 부활은 자기 신앙, 자기 열심을 버리는 자기 포기가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들에게 부활은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과연 내가 주님의 부활을 믿어온 신자였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이들이 무덤을 찾아온 것은 부활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한때 자신들이 의지했던 예수님에 대한 정성으로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부활을 알려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세계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소망하고 살기 싫습니다'는 고백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사는 그 세계를 사모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일컬어서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여러분들의 희망이 되어야 하고 힘이 되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된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세계를 믿지 않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면, 그리고 그 믿음으로 모인 자들이 바로 우리 교회라면 우리가 교회에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기 전에 하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지금 당장 이 모임에서 떠나셔야 합니다. '세상이 힘이다'는 사고방식은 십자가의 원수된 것이고, 곧 우리의 원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힘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 동의하신다면 일단은 십자가를 아는 우리의 형제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고 해도 과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삶은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고 갈등하는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힘으로 삼지 않고 주님만을 힘으로 삼고 산다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고 뭔가 불안한 그런 마음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힘으로 삼는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고, 부활의 세계는 세상이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힘으로 삼는 세계인데 나는 여전히 세상을 힘으로 삼는 옛사람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을 우선으로 삼겠습니까? 뭔가 주님을 위해서 일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죄속에 파묻혀 있는 죄인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세상이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 내 힘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나는 여전히 세상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그 보혈을 의지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힘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은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죄인임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이 다른 지체를 사랑하도록 합니다. 그 사랑이 때로는 봉사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어려운 자와 나누는 구제로도 나타나고,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에 말씀이 있는 자리를 사모하고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심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때문에 이미 지금 부활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돈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힘이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주님을 아는 자가 모인다면 단 두명의 모임이라 할지라도 기쁨이 있는 모임이 됩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힘이 나고, 적다고 힘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에 불과하지 결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을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솔직한 심정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을 사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장 교회가 운영되는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있는 것만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큼만 쓰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의 계획을 줄줄이 세워놓고는 이 계획은 선한 계획이니까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계획을 위한 기도이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자들의 생각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지 부활하신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식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이 찾은 곳은 무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상식 속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코 예수님을 우리의 상식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상식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발견한다면 부활의 주가 아니라 다른 예수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들이 이해가 안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종교 상식 안에 갇혀서 주님을 찾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 상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서 찾아간 여인들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열심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차역에서 나무 막대기를 두드리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때로는 아이를 업고서 우산을 쓰고 나무막대기를 두드리는 여인을 본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천리교입니다. 천리교만이 아니라 여호와증인은 어떻습니까? 대합실에서 누구에게나 접근해서 자기들의 교리를 전합니다. 여러분, 그들의 열정을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또 바리새인들의 열정은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하지만 그 열정이 주님을 죽였다는 것만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종교상식은 자신의 정성이고 자신의 열정입니다. 여인들이 죽어서 무덤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도 주님의 부활을 돕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열정으로 찾아간 무덤에는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종교열정으로 일하는 그것에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7절에 보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갈릴리는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으로 취급되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중심이 되는 것은 부활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웅장한 예배당이 아니고, 인간들의 열정도 아니고, 자신을 낮고 천한 자로 인식하는 그 정신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죽음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나라안에 영원한 부활의 세계가 스며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에 매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된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일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을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 믿음은 세상 것에 매이지 않고, 세상 것이 힘이 아니고, 오직 주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활이 혹 불쾌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밀려옵니까?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사명/마28:1-10
2003-05-15 13:21:38   read : 247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한국의 봄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봄이 더욱 아름답고 찬란한 것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약속해 주셨다. 책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새싹에 그리하셨다." 겨우내 죽은 듯한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면 새삼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세 가지 특색이 있는데 1)예수님은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이고 2)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며 3)예수님은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이 세 가지 특색은 오직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입니다. 프랑스의 불가지론자 ‘탈래랑’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왕에게 조언을 청했을 때, 왕은 “그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라. 그러면 그대의 종교를 믿게 될 것이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고, 로마 군인들은 철통같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공적으로 죽였다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마귀와 지옥의 세력들은 이젠 하늘나라는 이 땅에 임할 수 없다고 고함을 치고 춤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문은 이제 사라진 듯 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되던 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바르러 갔을 때, 하늘에 빛난 광채가 비취고 산이 진동했습니다. 그들이 가보니 무덤 문은 열렸고 파수하던 군인들은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인들이 본즉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만 그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10여 차례 이상 다시 사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의심많은 도마에게는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까지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혹은 떡과 생선을 잡수시면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슬퍼하던 제자들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벅찬 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몰라했던 제자들이, 승리감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제자들이, 확신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비겁하기 짝이 없던 제자들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박해도, 채찍도, 고문도, 위협도, 죽음까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처럼 담대한 사람들이 되어,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쳤고, 그래서 기독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불교의 비진리성을 극명하게 밝힌 ‘극락의 불나비’라는 책의 저자 김성화 목사는 본래 불교의 승려였습니다. 그는 경북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 불계종 정토종 포교국장과 교육 국장을 역임한 불교계의 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마치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성경책에는 평소 자신이 그렇게도 염원하고 알려고 노력했던 인간의 생사 문제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옛날 인도의 구시라 성의 시다림에서 한 젊은 과부가 심하게 애통해 함을 본 석가모니는 그 사유를 물은즉 병중의 외아들을 살려달라는 애원을 받는다. 이에 석가모니는 한번도 사람이 죽는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 줌 얻어다가 끓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후에 돌아온 그 과부는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그런 집은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고 고백한다. 그때 석가모니는 이렇게 가르친다. “자매여 생자필멸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따라 일어나 인연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어떤 해결이나 변화보다는 순리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처방은 이와 전혀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 외아들의 애통스런 장례 행렬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에 은혜를 베푸신다. 그 외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신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있다. 같은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을 새롭게 얻게 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여기에 부활이고 생명이신 참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근본적인 생사문제에 있어서 문제만 제시하였을 뿐 그 해답의 열쇠는 주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뿐만 아니라 해답의 열쇠까지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도 죽음을 호령하고, 생명을 호출하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입증해 보이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죽었던 그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었고 말을 했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관속에 시체로 누워 공동묘지로 장례 지내러 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 생을 명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관속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어버린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에게 생을 명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나사로는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생(生)을 명(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주인이 되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을 명령받고 일어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사망을 호령하는 예수님! 아니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이렇듯 그 자신이 생명이신 예수님이신지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1. 우리의 신앙이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손발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 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죽을까 봐 떨고 망할까 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만 확실하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롬 8:35-39에“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일 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어떤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도 자기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고백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 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도 부활 신앙이 있다면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같이 실의에 빠져 공허한 삶을 살지 말고, 부활의 소망 속에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1)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후렴-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걱정 근심 다 맡겼네/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2)주안에서 거듭난 생명/도우시는 주의 사랑/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살리.
3)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주를 위해 싸우리라/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수고는 하나도 헛되지 않고 다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 부활 신앙의 전파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부활신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만난 예수, 나를 변화시킨 예수, 내 삶을 바꿔준 예수, 인생을 바꿔준 예수, 이 예수님을 전하는 삶이 진실로 부활신앙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 뭡니까? 그것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천사들 역시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 은혜받은 우리들,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빨리 가서 아직도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친구들에게, 이웃들에게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내가 은혜 받았다고, ‘나만 좋다’ ‘우리만 좋다’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류 최고의 가장 큰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그 말씀입니다. 죄와 죽음, 가난과 저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이 기쁨을 누린 자들입니다. 총동원 전도 주일을 앞두고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영생을 얻으며 반드시 부활할 것이라고 이웃에게 힘써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 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성도들에게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부모님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내 아내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을 찢어 놓고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부활 생명을 다 얻게 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아나신 예수님/마28:1-10
2003-05-09 21:38:26   read : 189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친히 예고하셨던 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역시 여러 차례 예고하셨던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부터 제3일 되는 날 동트기 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처음 만나 뵌 이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다가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의 무덤을 단단히 막고 있던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1-2). 천사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5-6) 했습니다. 이렇게 여인들은 처음에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뵙지 못하고 천사로부터 그의 살아나심에 대한 소식만 들었었으나 곧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직접 만나 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평안하냐" 물으셨고, 그 여인들은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9). "발을 붙잡는" 것은 왕이나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게다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행위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 여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야로 보내신 이로 온전히 깨달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야로 확증시키신 것입니다.

본문 9-10절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만난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 속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평안하냐" 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서워하지 말라" 하신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신 것입니다.

"평안하냐" 하시고 "무서워하지 말라" 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안심시키시고 평안을 비시는 말씀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하나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눅24:36, 요20:19, 26). 눅24:50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실 때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위로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을 기뻐하며 반겼겠지만 주님을 다시 뵙는 그들의 심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비겁하게 예수님을 부인했거나 쉽게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일로 인한 수치심과 회한과 두려움에 싸여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지나간 허물에 대해 일체의 비난이나 질책이나 보복적 성격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미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번 예고하셨고 그 예고대로 예수님께서 실제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도록 다시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연한 현실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중하기는 하셨지만(눅24:11, 막16:14, 요20:25-27) 예수님께 대하여 제자들이 저지른 지나간 허물을 탓하시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들에게 평강을 비셨을 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이어서 하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 가운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먼저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라 하신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내 제자들에게"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형제들에게"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못난 제자들, 겁쟁이 제자들, 거짓말쟁이 제자들, 허풍쟁이 제자들, 배신자 제자들에게"라 하지 않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일텐데, 그냥 "내 제자들에게"도 아닌 "내 형제들에게"라 하신 것입니다. 전에 보다 한층 더 가까운 존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와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가 담긴 말씀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신 사실도 유의할 일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날 볼 일도 없고 날 볼 자격도 없다. 나도 그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서 갈릴리에서 내가 보잔다고 말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못나고 덜된 제자들이지만 변함없이 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여기서 만납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기를 원하셨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 합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겠습니까? 갈릴리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처음 만나신 곳,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곳,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친근하고 동고동락의 정이 배어있는 그곳입니다.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이 결국 돌아갈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보시리라 하신 것은 아마도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처음과 변함없는 마음을 표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버리실 것이었다면 갈릴리에서 그들을 다시 보자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배신과 부정과 좌절과 수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만남과 사랑과 나눔의 삶과 소망을 일으킨 땅 갈릴리에서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품었던 꿈이 깨진 제자들은 갈릴리로 귀향해 물고기나 잡는 삶으로 되돌아가려 했습니다(요21:1-3).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내다버시고 제자들의 그 자포자기의 자리에 서계실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그들을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니다 너희들이 할 일은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일이다. 너희들은 나를 잠시 버렸을지 몰라도 나는 너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너희들도 나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을 줄 안다. 나는 너희를 믿는다. 내 양을 먹여다오"라고 말씀하시려는 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돌아와 다시 맥없이 고기 잡는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처음 그들을 만나시던 모습 그대로 다시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며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신뢰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사랑과 화해와 새 소망의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인하고 버렸던 제자들을 오히려 형제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단지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가 변함없다는 뜻뿐 아니라,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동역자로 여기셨으며 이제부터 진정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일을 감당할 것을 원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무리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께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께 할 말이 있어 찾아왔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48, 50)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이제 형제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제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그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 무엇입니까?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그 말씀으로 마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은 그 자신의 부활과 함께 제자들의 부활, 믿음의 부활, 소망의 부활, 사명의 부활을 가져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었던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의 주이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시고 그들에게 복음전파를 명령하심으로써 그들의 복음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승천 사이의 일을 언급한 그의 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1-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과 그 정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11-15절에서는 매수와 허위사실조작과 위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 세상권력의 모의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묘지를 지키던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과 관련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의 시체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 당했다는 말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도 문책과 처벌을 받을까 근심하지 않아도 되도록 잘 말해주겠다고 약속하며 그 군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돈을 받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르친 대로 하였으므로 그 말이 그 이후로 계속해서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는 것입니다. 16-20절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명령을 내리신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부인함,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이 세상의 합리적 이성과 그 논리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이 세상의 구원자 되심과 그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온 천하에, 모든 민족에게, 세상 끝날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다짐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이 그의 제자들에게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사명을 다시 살려 일으켰듯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사명의식이 다시 확실히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와 자책과 좌절로부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실망과 좌절의 자리에 항상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서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앞에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지나간 죄를 냉엄하게 따져 물으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우리에 대한 평가를 끝내고 우리를 내던져버리는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며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저 지금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우리의 긍정적인 대답 듣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를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사람은 그 사실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오늘 이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맞는 성도의 자세/마28:1-10
2003-04-29 22:43:18   read : 132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성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기독교처럼 기만적인 종교도 없을 것이며, 성경의 모든 기록은 허무맹랑한 신화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명백한 사실이기에 기독교만이 참 생명의 종교요, 기독교인은 진정 복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활을 맞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맞는 성도의 자세를 바로 깨달아 부활절을 의미있게 보내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만민에게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1절) 여기에 보면 주님을 사모한 두 명의 여인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얼마나 간절히 사모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절을 맞는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때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 군병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맞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성도들이 사모해야 될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①주님을 사모해야 됩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 143:6) ②주의 말씀을 사모해야 됩니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40) ③주의 구원을 사모해야 됩니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④주의 전을 사모해야 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⑤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됩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⑥하늘의 본향을 사모해야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⑦선한 일을 사모해야 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딤전 3:1) ⑧지혜를 사모해야 됩니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⑨더욱 큰 은사를 사모해야 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이 세상의 헛된 것에 대해서 사모하거나 또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주님께 대한 모든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무덤을 떠나야 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8절상) 주의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한 이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무덤을 빨리 떠났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무덤, 두려움의 무덤, 근심의 무덤, 사탄의 무덤, 우상의 무덤을 빨리 떠나야 됩니다. 무덤은 썩은 것, 생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무덤은 부패하고 악취가 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불행과 슬픔과 통곡만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는 자리와 죄인의 길, 오만한 자리에서 속히 떠나야 됩니다. 그리고 좋은 것, 복된 것, 은혜로운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버리면 아까운 것 같지만 버릴 때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16에 보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빛을 보는 순간에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부활절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의 부활의 약속을 받은 자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어지는 아름다운 순간이요, 복된 순간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8절하)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달음질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리고, 증거하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 안됩니다. 온 천하 만민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받을 때까지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지구촌의 마지막 한사람까지도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빨리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헬라어에 보면 ‘알게 한다,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게 해주어야 되고, 만백성 앞에 이 소식을 선포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16:15의 말씀대로 우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넷째, 예배생활을 일평생 지속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9절)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생활 즉 예배생활을 일생동안 지속해야 됩니다.
성도의 삶은 곧 예배의 생활입니다. “예배”라는 이 말은 ‘자신을 굽힌다,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면서 낮추기까지 우리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낮추어 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다 드려서 주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4:23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배할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맞는 성도의 자세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와 두려움의 무덤을 떠나며, 온 천하 만민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고, 예배생활을 일평생 지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온 천하 만민에게 힘써 전하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마28:5-10
2003-03-29 10:25:31   read : 283


예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주님의 선언과 함께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구원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값을 받으셨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3일만에 다시 사셨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였음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이들은 모두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무덤 옆에 앉아 슬퍼만 하는 신앙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 소식을 전해 들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사망권세를 밟고 죽음의 무덤을 터트리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주는 축복의 말씀 "이것이 부활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찾아보면서 은혜 되고자 합니다. 이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부활신앙으로 삶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부활신앙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Ⅰ.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이 나무의 아름다운 열매라면, 십자가의 고난은 그 나무의 뿌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사람만이 부활의 영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1)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십자가의 고난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때의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바로 이 고난이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을 살면서, 내가 주의 뜻대로 살려는 고난이 바로 부활 신앙이 될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고난을 감당할 줄 아는 신앙이 부활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2) 자기 사명, 즉 직분을 담당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도성인신' 하신 것 즉, 사람으로 오신 것은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고난이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고난을 담당하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각기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의 직분, 제직의 직분, 교사의 직분, 그 직분을 담당키 위한 고난을 담당할 줄 아는 신앙이 부활신앙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음같이,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에게서 부활신앙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예수의 고난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주님의 이웃이었습니다.
오늘 믿는 성도들은 내 이웃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를 것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6시간동안 달려서 쓰리고 아픈 고난을 받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이들이 이웃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나의 이웃, 더 나아가서는 나의 원수까지도 나의 이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위하여, 그의 영혼과 육을 구원키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쁜 마음으로 담당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모든 고통과 사단의 시험을 딛고 일어나는 것이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무덤가에서 움추리고 슬퍼만하는 신앙에서, 시련과 불시험을 이기고 일어나는 부활신앙을 소유합시다.
오늘 내게 찾아온 많은 고난을 딛고 일어나는 부활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Ⅱ. 악의 권세를 밟고 일어난 부활신앙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예수님을 무덤에 넣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그 죽음의 무덤에서 살아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그것도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정말 너무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신 것은 그때 당시나 오늘이나 톱 뉴스이며 놀랄만한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하여 급속히 유대 전역에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당시 실의에 빠지고 절망에 빠져 있던 이들이 일어나 부활을 믿는 부활의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놀랄만한 사실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마태복음 28장을 기록했고,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세밀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을 믿는 사람은 모두 부활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이것이 부활신앙"이라고 했습니다.

1) 죄의 권세와 싸워 이기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권세를 밟고 일어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불신의 세력과 악마의 권세와 찾아오는 시험과 싸워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코 굴할 줄 모르는 것이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믿음에 굳건히 서서 날마다 주께 나가는 신앙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날마다 이기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미칠 듯한 큰 기쁨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웠던 것이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빨리 알게 하려고 달음질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하면서 기쁨이 없이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큰 기쁨이 넘치는 복음의 소식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이 부활신앙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

3) 이 큰 기쁨의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소리를 듣고 큰 기쁨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달음질하여 뛰어다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더 진실한 복음과 참된 살아있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이웃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전하여 주려고 애를 쓰며 노력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이 복음을, 이 기쁜 살아 역사하는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여 주고 살아갑니다. 전하기를 꺼려하고 자신감이 없는 것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신앙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줄 아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을 안고 이 기쁨과 복음을 전하면서 날마다 이기면서 사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갑시다.




예수 부활하셨네/마28:11-15
2003-03-23 22:49:34   read : 247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부활이 빠져버리면 우리의 믿음은 제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어지는 고전15:13∼14절에서 부활의 중요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아무리 큰 집이라도 대들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집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잘 믿는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바로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까?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이 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신 능력이 없는 예수를 믿는 셈이 되니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부활도 믿지 못하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세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니까 영원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수인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스러운 생각을 자꾸 집어넣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그 주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인지 검토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의 부활 신앙을 다시 한 번 굳게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기절설이 있습니다.
이 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무덤 안의 찬 기운과 또 세마포와 함께 둘러싼 향품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신을 차리시고, 둘렀던 세마포를 손수 벗기셨습니다. 때마침 큰 지진이 일어나서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던 동굴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틈으로 빠져 나오실 수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처럼 잘못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절설입니다. 터무니없는 이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군병들이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사형 집행의 전문가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내보내면 자기들이 처벌을 받거나 죽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이 예수님을 살려 내보냈겠습니까? 그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돌아가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안전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허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 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만일 그 때에 예수님의 숨이 끊어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기색이 있었더라면, 왜 그 두 사람이 몰랐겠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니까, 향품과 더불어서 세마포로 온 몸을 감쌌겠지요? 그러니 예수님이 무슨 수로 숨도 안 쉬시고 사흘 동안이나 기절한 채로 살아 계셨겠습니까?
또 이미 우리 예수님은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셔서 피 흘리시고, 가시 면류관에 찢기셔서 피 흘리시고, 손과 발에 굵은 못이 박혀서 피 흘리시고, 또 날카로운 창에 찔리셔서 피와 물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사흘동안 기절한 상태로 견뎌내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다 할지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세마포로 꽁꽁 싸여 있는데, 어떻게 자기의 힘으로 세마포를 풀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로마 군병들의 엄중한 경계를 어떻게 뚫고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또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함께 오랫동안 같이 걸어 가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신 예수님이 기절하셨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셨다고 해도, 어떻게 그토록 오래 걸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도무지 얼토당토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고서는 도무지 가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셨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둘째로, 매장부인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실제로는 무덤에 안치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생각되었던 곳이 빈 무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수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관습에 의하면 죄수의 몸은 무덤에 안치를 시키지 않고, 공동묘지에 그냥 되는대로 가져다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린 두 강도와 함께 공동묘지에 던지움을 당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당초부터 무덤에 시신이 없었으니까 제자들이 가 본 무덤이 비어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도 논리에 맞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지도 않은데, 큰 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고 인봉까지 합니까? 거기다가 파수꾼들이 밤새도록 그 앞을 지킵니까? 또 예수님의 시신이 공동묘지에 던지움을 당했다면, 가서 그 시체를 찾아오면 모든 의혹이 해결되지 않습니까? "보아라! 예수의 시체가 여기 있는데 누가 그의 부활을 주장하느냐?"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논박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장부인설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론입니다.
셋째로, 환각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나도 갈망한 나머지 헛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한 두 사람에게 나타났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15:6의 말씀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착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외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론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컨대 텔레파시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닌데, 그저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텔레파시를 보내서 제자들을 그토록 믿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을 거짓된 하나님으로 만드는 처사입니다.
또 무덤오인설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들이 다른 무덤을 예수님의 무덤으로 오인하고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잘못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기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부활한 예수라고 하면서 사기를 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반박할 가치조차도 없는 주장들입니다. 모두 마귀의 지껄임입니다.
우선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시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붙잡혔을 때, "예수님이야 돌아가시든지 마시든지 상관없이 그저 내 한 목숨 살아남아야겠다!"라고 예수님을 버려 두고서 도망쳤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순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핍박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입을 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컨대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바울이 본시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살아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예수님을 위해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해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기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부활의 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그릇된 주장들이 한 가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어떻게 해서 잃어버렸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시체도난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다른 곳에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거짓 증거를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주장이 가지고 있는 허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천사는 무덤 입구에 있던 큰 돌을 굴려 내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덤 안을 보여주었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6∼7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 가운데 몇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다 고했습니다. 예컨대 큰 지진이 일어난 것, 하늘에서 흰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온 것, 또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굴려낸 것, 무덤 안에 있던 시신이 없고 빈 무덤이 된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자세히 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드는 줄 압니다. 왜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먼저 가서 그 말을 고하지 않고, 하필이면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고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서 받을 처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의논하면 무엇인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고해 바쳤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대제사장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무슨 소리야?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살아나?"
이렇게 반문하면서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인하려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대제사장들은 감히 파수꾼들이 자기들에게 거짓 보고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수꾼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어떠한 조치를 취했습니까?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그들은 곧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이 일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는지, 안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그에게 가버리면 그 동안 자기들이 누리던 영향력과 권세, 영화 등이 줄어들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회를 모으고 의논한 결과 세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로, 12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그들은 돈을 가지고 파수꾼을 매수했습니다. 파수꾼들이 여러 명이니까 돈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다가 필요하면 앞으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까지 돈으로 매수해야 되니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그들은 파수꾼들에게 거짓말을 유포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몰래 와서 시체를 훔쳐서 어디엔가 감추었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14절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그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돈으로 매수할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당신에 대한 좋지 않은 보고를 올리겠소!"
여러분, 빌라도가 어떤 위인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는 줄 뻔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 내어주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유대인들과 괜히 나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조치를 파수꾼들이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들은 기꺼이 돈을 받았습니다. 그들로서는 주머니에 돈이 생겨서 좋고, 또 처벌받지 않아서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르친대로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거짓된 소문이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당시까지,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삼십 년 뒤가 되는 시점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상이 시체도난설의 진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설도 모순투성이입니다.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서 어디엔가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손을 써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껏해야 열 두명 뿐입니다. 그들을 잡아서 고문하면 왜 입을 열지 않겠습니까? 또 설사 입을 열지 않는다 할지라도 로마의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의 종들을 풀어서 예수님의 시체를 색출하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보아라! 여기 예수의 시체가 있는데 누가 감히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느냐?"라고 한다면, 어찌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로마의 군병들은 아무도 그런 시도조차도 하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도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부터 믿었습니까? 예수님이 수 차례 걸쳐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라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조차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는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은연중에 그런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니까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눅24:1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때입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아니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책망을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슨 책망을 받았습니까? 눅24:25의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두 제자는 마음에 더디 믿는다고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공교롭게도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중에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 때 도마가 그 말을 듣고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요20:25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는 도무지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에서 붙잡혔을 때 자기들만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쳤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몰래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올 용기가 과연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활하시지도 않은 예수님을 위해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받쳐 순교까지 합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셋째로, 로마의 군병들이 파수를 서지 않고 모두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여러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은 파수를 서고, 그 나머지는 잠을 잤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소홀히 하고 모두 잠을 잡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설사 자기들의 말대로 잠을 잤다면,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몰래 훔쳐갔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아울러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큰 돌이 굴러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을텐데, 한 사람도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세상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서, 군병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 말도 맞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서둘러 범인을 잡아 잃어버린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것이 급선무지요? 성안에 가서 대제사장들에게 되어진 일을 고하는 것이 급선무였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예수님은 부활한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다. 그래야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도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마태가 오늘 본문 속에서 로마 군병들의 입에서 나온 거짓된 소문을 기록했겠습니까? 여기에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본문에 나타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부활이 증거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까지 했지만 타락한 종교인들에게 매수를 당해서 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거짓말을 유포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18∼20절까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들,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마음이 뜨거운 우리들, 예수님이 너무 좋고,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우리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마감하면서 결론적으로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주님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더욱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를 위해서 흘린 눈물과 땀, 부활의 증인으로서 애쓴 노력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께서 아름답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부활하신 예수님, 사망의 권세를 깨치신 예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신앙/마28:1-10
2003-03-23 20:46:17   read : 320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정말로 살아나셨다. 오늘은 세계에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할렐루야 우리 구주 살아나셨네.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주님의 부활사건에 대해서 세상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그리고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삶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 그 부활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1.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다.

목사인 내가 이스라엘의 선교사로 있을 때 부활절 새벽에 나의 집이 있는 베들레헴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렸다. 세계 각 지역에서 부활절을 지키기 위하여 모여 각 나라의 말로 찬송을 부르며 감동적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생각난다. 예배를 마치고 빈 무덤에 가 그 빈 무덤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복음서의 기사를 보면, 그 당시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소식을 들었거나, 또는 부호라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들이 믿지 않더라' 하며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모습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믿음없는 자들아 왜 믿지 않느냐"하며, 제자들에게 자신을 만져 보게 함으로 확인시키는 일도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 40일동안 함께 하셨고,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막16:10-14)"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를 제자들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역시 믿지 않았다. (눅24:10-12)"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 막달라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사도들은 믿지 아니하였고 베드로는 무덤으로 가서 확인하고는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눅24:35)"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 엠마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대화에서도 혼돈함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채'를 입으셨다. (눅24:38-39)"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요20:25-26)"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부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 예수님의 12제자중 의심이 많은 도마의 믿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요20:27-29)"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마28: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많은 무리가 모였다. 그 중에도 아직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분명 살아나실 것을 여러차례 말씀하였으나, 알아듣지 못하였고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면서까지도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르던 자들중 부활을 의심하고 황당해 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데 부귀영화를 누릴 것으로 생각하고 따르다가 주님이 죽으셨다는 사실, 또 부활하셨다는 일이 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2. 예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전에 여러차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다.

(마16:21)"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피시니" - 죽을 것과 살아나실 것을 거듭 거듭 말씀하셨다. 그러나 믿지를 않았다. 인간의 고정관념은 잘 변하지 않는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을 때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들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성경을 읽을 때 내 마음에 조금 와 닿는 부분만 받아들인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열게 기도하여야 하며, 말씀을 깨닫게 기도하여야 한다.

부활은 구약시에부터 여러차례 말씀되어 왔지만 믿지 않았고 실제 사실로 왔을 때 충격으로 와 닿았다. 본문의 말씀에 '안식후 첫날이 되어' 이는 주일을 의미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주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서 사 놓았던 향품을 가지고 이른 아침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 이들은 주님의 부활을 예상하고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 몸에 향품을 넣어 주기 위해서 갔다. 그러나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큰 돌문으로 무덤이 닫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 돌문 위에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그들에게 주님이 살아나셨음을 알려 주었다. 다른 제자들이 이들이 전하는 것을 듣고 가서 빈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또 다른 일은 무덤을 지키는 로마 병정들이 있었다. 거짓 부활이 전해질 것을 두려워 병정으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그들은 혼비백산하였다. (마28:11-15)"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3. 기독교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오늘 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또는 교회에 나오는 자들중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신학자들중에 '가사설'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자들도 있다. 또 다른 학설은 '유령설'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제자들이 주님을 너무나 보고 싶어 거짓으로 퍼뜨리고 있다는 설이다.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우리들이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믿지 못하고 우리들이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우리들의 눈으로 확인하여야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것인가? 이러한 믿음은 사실은 신앙적 믿음이 아니고, 지식, 정보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하신 일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4.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1)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다시 되풀이 하여 증명할 수 없는 일, 예를 들면, 동정녀 탄생을 되풀이 할 수 있는가? 인류 역사상 우리 구주가 태어나시기 위해서 단 한번 일어 난 일을 믿는 것이다.

2)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이다.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주님은 재림을 약속하셨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여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반드시 주님은 오신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40일간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점차 확신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붙들고 살며 끝내 승리하게 되었다. 놀라운 기적을 맛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앉은뱅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였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 (행2:22-24)"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이 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붙들렸다. 이들이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을 본다. (행4:10-12)"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복음서에는 반신반의하였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주님께서 역사하심을 보고 본격적으로 믿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신앙과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 신앙이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신앙을 받아 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신앙을 믿고 우리의 전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부활의 신앙이 우리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부활신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부활신앙을 우리가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이다. (엡1:17-22)"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 그의 힘의 강력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그 능력때문에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그 능력으로 우리 삶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셨음을 믿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 신앙을 가질 때 능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다. 나타남을 믿어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능력을 나타낸다.

2) 부활신앙은 사망권세, 흑암권세, 저주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박살났음을 믿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병이 오든지, 문제가 오면 죽음 앞에서 벌벌 떤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겼으며,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셨다. (고전15: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부활사건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다. 우리들의 모든 문제는 다 끝났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살아 나갈 때 흑암, 저주, 사망권세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3) 부활신앙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함을 믿는 것이다. 언젠가 육체의 본체를 벗어버리고 영혼이 주님과 함께 있다가 자신의 영채와 결합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소망이다. (빌3: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고전15:42)"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죽은자의 부활, 부활의 첫 열매는 주님이시다. 우리 몸이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바뀜을 믿어야 한다. 나중에 입을 영광스러운 몸이 있기에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잠시 후에 벗어 버릴 몸이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주님께 헌신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것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심을 믿는 신앙이다.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심과 우리를 돕고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는 신앙을 부활신앙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부활신앙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이 살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주님이 영원히 살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이다. (고전15: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아시고 해결하신다. (마28:18-20)"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약속을 주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모든 것을 그 분 앞에 굴복시키는 만유의 주이시다. 부활신앙은 능력이요, 사망권세를 완전히 깨뜨린 것이며, 우리가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으며, 이 부활신앙은 역사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며 임마누엘 신앙으로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심을 믿기 바란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크나 큰 축복을 주실 것이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사랑하셔서 자녀 삼아주셔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마음을 주시며 우리 삶속에 오셔서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부활절날, 주님의 부활하심을 부활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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