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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부터 감기에 걸려 오락가락하던 오한증이 출발 하루 전 까지 가시지 아니하여 4박5일의 장정을 제대로 이겨낼까 하는 걱정이 깊어져갔다. 내가 이 지역에 살고 있어 여행을 안내해야하는 책임도 있어 단순히 불참을 통보하고 빠진다면 너무도 무책임한 처신이 될 것이고, 더구나 일본에 유학중인 아들 녀석과 같이하자고 약속까지 한 상태이고, 약간은 무리이겠지만 하루 전부터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어 조금은 안도를 하였다. 걷는데 까지 걷고 힘들면 돌아오자, 아니면 순천만이라도 안내를 하고 돌아오자는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오전 여덟시에 집결지 순천역에 도착하여 인원파악을 해보니 총 인원이 8명에 불과하였다. 서울서 혜리님, 별님. 나선님과 그리고 나선님의 친구 심연님, 영주댁 소단님, 도곡 유재훈 선생님, 나와 아들 정빈이 총8명이었다. 내가 참석했던 우리땅 기행 중 가장 적은 인원이었다. 좀 아쉬웠다. 사전 답사도 했고, 몇 군데 식당도 예약을 했는데 기왕에 벌려진 잔치에 손님이 많이 와줬으면 하는 바람은 안내를 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순천역에서 순천에 대한 간단한 지명, 지형, 풍물들을 소개하고 4박5일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순천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멀리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백제의 영토이었던 이곳은 그 당시 이지역의 토호이었던 박영규, 김총 등이 지배를 하고 있었는 데, 고려로 통일이 되자 그들이 고려로 귀화를 하면서 하늘의 뜻에 따른다 하며 順天하였고 그후로 순천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신라시절에는 승평이라하였다. 순천을 대표하는 산수는 三山 二水 다. 비봉산, 인제산, 봉화산 자락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어 삼산이고 , 그 사이를 가로질러서 바다에 이르는 냇물이 東川, 그리고 비봉산, 인제산 사이를 흘러서 동천에 합류하는 玉川이 있어 이수다. 물론 구도심을 말한다. 순천은 풍수의 형국으로는 비봉귀소형이다. 나르는 봉황이 둥지를 찾는 아름다운 형국이라하여 예로부터 미인이 많이 낳다한다. 순천에는 八馬의 미담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고려중기 충숙왕 때 순천부사로 재임하였던 최석이라는 수령이 있었다.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청백하여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가는데 고을에서 일곱 마리의 말을 준비해서 보내주었다. 물론 폐습이었다. 말을 준비하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말을 준비했으면 말 등에 가득 귀한 물품을 실어야할 것 아닌가? 물론 최석은 빈말로 갔을 뿐만아니라, 나중에 말을 되돌려 보냈는데 그 사이 말이 새끼를 낳아서 여덟 마리가 되어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 후로 그 폐습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목민관 최석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저기 팔마그림이 그려졌고, 팔마의 석상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미담으로 내려오고 있다. 순천에서는 삼산, 이수, 그리고 팔마라는 이름을 쓰는 공공기관 건물과 상호가 많다. 동천을 따라 내려간다. 늦겨울 아침 바람이 차다. 방한 차림을 단단히 하고 천변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내려간다. 이 길로 가면 순천만 갈대밭에 이른다. 두어 시간 남짓 걸으니 갈대밭입구에 이른다. 이곳 순천출신 문학가들의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아동문학가 정채봉님과 김승옥님의 문학관이다. 한분은 타계하셨고, 한분은 뇌졸중으로 거의 문학 활동을 접으신 분이다. 정채봉님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세암을 중심으로 작가세계를 펼쳐보였고, 김승옥님은 무진기행을 중심으로 작가의 문학정신을 꾸며놓았다. 김승옥님이 영화감독을 했다는 것은 이 기념관에서 다시 알게 되었다. 무진기행에서 무진이라는 곳은 몽환적이고 이상적으로 그려지는 고장이다. 작가가 무진이라는 고장을 그리면서 전개되는 풍경, 바닷가에 피어나는 안개와 갈대는 그의 고향인 순천만을 그렸다는 것은 글의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어 시간 걸어와서 약간 피곤했는데 고운선율이 흐르는 아름다운 문학관을 돌아보면서 여독을 풀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갈대밭 생태공원에 입장을 하여 갈대밭 산책로를 지나 용산전망대에 올라서 순천만을 둘러보았다.
그 동안 수 없이 용산전망대에 올랐지만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순천만이다. 오늘은 이곳 동쪽의 전망대에서 저 만의 건너편에 보이는 서쪽의 전망대까지 걸어서 가볼 것이다. 용산전망대에서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공원에 입장을 하여 서쪽들판을 향하여 갈대밭제방을 따라갔다. 끝없이 펼쳐지는 갈대가 장관이다. 점입가경인데 갑자기 뒤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자전거를 탄 영감님이 쫓아오고 있다. 이것이 무슨 변괴인가 하였더니 철새 보호구역이라 출입불가니 돌아가라 한다. 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유치한 발상인가? 우리 걸어오는 길에 철새 한 마리보지 못 하고 멀리서 움직임만 느낄 정도인데, 우리가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작가라면 모르겠다, 아니면 근방에서 낚시를 하는 낚시꾼이라면 혹시 모르겠다. 그냥경치를 감상하면서 지나가는 도보 여행객 들일진데 이 무슨 해괴한 행패인가? 그 영감님과 한바탕 옥식 각신하였다. 나도 맞고함을 지르고 하였지만 계속하여 억지를 부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분도 순천시의 방침에 따라 감시근무를 하는 것이니, 나중에 순천시에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겠다. 어떤 작위적인 통제가 업무의 달성도를 높인다는 유신시대에나 볼 수 있던 전체주의 발상이다. 그 동안 사사건건 공무원 노조와 의회와 충돌을 일으키던 순천시장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지금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위하여 순천시장을 사퇴하였다. 본인의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위하여 시민과의 약속은 초개같이 버리는 인물이다.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보궐선거 비용을 추징하고자 소송을 제기한 상황이다. 요즈음 추세가 지방자치단체마다 좋은 길을 만들어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홍보에 바쁜데, 전에 없는 경험이라서 충격이 컸던지 , 그 후로 나흘 내내 호젓한 산길을 걸을 때, 인적이 드믄 해안길을 걸을 때 누가 쫓아와서 몰아낼까하는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반 시간 정도 걸어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아들 놈 앞에서 우격다짐을 한 내 모습이 부끄럽고 무렴하기도 했다. 그들의 통제선 밖을 돌아서 외곽 논두렁길을 걸어서 당초에 예정했던 길로 향하였는데 오히려 이 길가에 철새가 훨씬 많았다. 거대한 몸집의 재두루미와 청동오리가 무리를 이뤄서 군무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면 예비동작으로 서서히 날갯짓을 하며 나르기 시작하였다. 일행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환호하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다시 해안의 제방에 도착하니 갈대 늪지대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데크에 앉아서 한참을 쉬고 순천만 갈대밭이 끝나는 장산마을 지나 서쪽 전망대인 화포마을로 향하였다.
화포마을의 전망대 가든을 지나가는데 나선님의 대학 동기라던 금당고 선생님이 나와서 격려를 해주었다. 아들 정빈이의 모교선생님이기도 하였다. 마침 허기가 지는 참인데 고마운 분이다. 빵을 하나씩 나눠 먹고 전망대 도로를 내려서서 해안을 따라 걷다. 갈대밭이 끝나니 너른 갯벌이 전개된다. 말뚝과 망이 처져 있고, 구획이 나누어져 있어 마치 육지의 밭두렁을 보는 느낌이다. 양식장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졸깃졸깃하고 고소한 맛으로 소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순천만의 꼬막양식장이다. 꼬막 , 오늘 내일 사이에 실컷 맛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첫날 일정이 만만치 않다. 가차 마을을 지나 마산 염전의 갈대밭을 지난다. 해는 저물었고, 바람은 찬데 아직도 오늘의 종착점은 시야에서 가물가물하다. 허기지고 다리도 아프니 더 멀게 느껴질 것이다. 구룡리로 가던 길을 포기하고 마산분교의 찻길에 서서 우리를 식당까지 실어다줄 차를 기다리고 있다. 첫날 일정의 종착지 이다. 삼십 키로를 넘게 걸었다. 둘째날
벌교 버스터미널 근처의 조용한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첫날밤을 보냈는데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피로했던 탓일 것이다. 그래도 감기기운은 가셨고 걸을 만 했다. 행수 신정일 선생님이 순천에 도착하신다고 도곡 선생이 순천역에 마중을 나갔다. 여덟시가 좀 넘어서 여성회원 조성자님과 함께 도착하시어 식사를 같이 하였다, 벌교의 유명한 꼬막정식이다. 꼬막전, 삶은 꼬막, 꼬막회무침, 꼬막 된장찌개 맛이 좋을 뿐만아니라, 음식의 색깔도 다채롭다. 몇 해 전만 해도 벌교의 꼬막 정식은 두어 군데에 불과하였는데 지금은 벌교에 있는 식당전부가 꼬막정식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소설 태백산맥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꼬막 정식 식사 후 가까운 곳에 조정래 문학관이 있어 들렀다. 소설에서 나오는 현부자 집이 바로 옆에 복원되어 있고, 현부자네 제당에서 기거하였던 소화네 집도 복원되었다. 기념관은 입장료를 내야하는데 입장료에 동의하는 회원이 없어 외형만 보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내려왔다.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기행은 소화다리. 홍교, 김범우 집, 조정래 작가가 어릴 적 살던 집, 벌교 역 정도를 돌아보고 온다. 우리는 소화다리와 홍교를 걸어서 가고, 부용산공원에 올랐다. 부용산은 해발 196미터의 작지 않은 산이다. 빨치산들이 즐겨불러 금지곡이 되었던 부용산이라는 노래로 더 유명해진 산이다. 부용산이라는 노래는 전혀 이념적인 색깔이 없는 아주 서정적이고 애절한 아픔을 담은 노래이다. 이 노래의 작사가인 박기동씨가 부용산에 어린 여동생을 묻고 나서 그 슬픈 마음을 그린 노랫말이다. 작곡은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안성현씨가 하였다. 안성현씨는 월북한 작곡가이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에 올라 부용산가를 듣고 싶어서 신샘에게 노래를 청했지만 노래를 알지만 배우지는 안했다고 손사래를 치셔서 가사만 낭송하고 내려왔다. 차로 이동하여 고흥반도는 건너뛰고 조성면에서 내려 득량만 방조제를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방조제를 막아서 너른 곡창지대를 만들었고, 우리는 제방과 논 사이 담수호를 따라서 걸어가고 있다. 갈대숲이 좋은 길이다. 두어 시간 걸어서 서쪽 방조제 끝에 도착하였다.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 근방이 식사하기가 마땅치 않은 것을 파악하여 우리 보급관인 도곡선생이 만두와 찐빵 그리고 라면을 준비하였다. 눈치도 빠르게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큰 냄비와 버너를 준비하여 이미 라면 물이 끓기 시작하였다.
봉지 김치 성큼 성큼하게 썰어서 라면 발에 얹혀서, 오랜만에 야외에서 맛보는 라면 특식이다. 허기가 가시지 않았던지 라면을 두 번째 끓였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하루 중 가장 걷기 힘든 시간이다. 오전의 피로는 어느 정도 누적되었고, 배는 부르고 졸음은 몰려오고 해안을 따라 조성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걸어간다. 구룡산의 산세가 수려하다. 포장도로를 내려서 길 없는 해안으로 모래사장과 몽돌해변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차로보다 거리와 시간도 단축되고, 오후 세시간정도 걸어서 숙소인 은빛바다펜션에 도착했다. 아직 저녁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다.
남해안에서 가장 시설이 잘되어 있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펜션이다. 어제 모텔에 비하면 5성급 호텔이다. 난방이 잘되어 실내는 뜻뜻하고 밖은 차다, 창밖으로는 남해의 잔잔한 바닷물이 다가와 있다. 저녁은 삼겹살 바비큐 파티, 불콰하게 소주 한잔씩을 걸치고 나니 기분이 그만이다. 신선생님이 내일 TV출연 때문에 전주로 가셔야되는데 시간이 두어 시간 남았다. 여가 선용차원에서 국민 두뇌스포츠이자 삼천만의 오락인 고돌이가 자연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마침 우리 방에 화투가 한 몫 있었다. 신샘과 도곡선생, 송명의 선수, 영주 댁, 그리고 불초 다섯 명이 대결을 하였는데 신샘은 그림도 제대로 못 맞추는 수준이고, 도곡과 송명의 총무는 소리만 요란하였고, 운칠기삼으로 나와 영주 댁이 땄다. 나는 특히 바빴다. 고돌이 국제심판으로 룰에 분쟁이 붙으면 해결해야했고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으니, 아들놈이 옆에서 돈 계산을 해주어 부자도박단으로 소문나고 찍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허 허 허...... 그나 저나 그 요란하고 시끌덤벙하고 요지경속 같은 재미있는 고돌이 분위기는 내 부족한 글재주로는 도저히 그릴수가 없다. 그 자리에 같이 한 사람만이 알수 있다. 셋째 날 아침을 단단히 먹고서 길을 나섰다. 참 좋은 펜션이다. 형제가 의좋게 운영을 한다. 아우는 홈페이지와 예약을 관리하고, 형은 쪽파 농사를 짓고 정원을 가꾸고 아주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정원에 기화요초가 심어져 있고, 어디서 옮겨왔는지 괴목, 거목들이 즐비하다. 이미 소문이 나서 주말에는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평일에도 투숙객이 넘친다. 오늘 오전에 걸어 가야할 곳은 율포 해수욕장이다. 여기서 장흥 안양면 수문리 까지는 아름다운 해안길이다. 여러 번 지나다녔어도 지루하지 않은 아름다운 해안길이다. 평일 낮이라서 운행하는 차량도 많지 않고 내륙의 만이라서 파도가 마치 호수같이 잔잔하다. 해안의 굴곡이 심하지 않아서 찻길이 불편하면 언제라도 내려서 해안 길을 걸으면 된다. 10여 킬로를 걸어서 율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송림 사이를 나서니 호떡집이 눈에 띄여서 앞에 가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 시간대에 호떡은 최고 히트상품이었다. 호떡집에 순식간에 불이 났다. 다른 여행객들도 모여들고, 호떡 2개, 오뎅 2개씩을 해치우고 보성의 녹차 밭 대한다원으로 향했다. 율포에서 대한다원까지는 차량으로 이동을 하였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회원들 여러 번 다녀갔겠지만 항상 새로움을 느끼는 정경이다. 오늘은 색다른 코스로 대밭 길을 안내하였다.
정빈이와 함께
대숲 가는 길
다원 안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택시를 불러서 정빈이를 보성 터미널로 보냈다. 2박 3일 동안 좋은 시간이었다. 어릴 적에는 군말 없이 따라다녔지만, 중고등학교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한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엄마 같은 아줌마회원 들에게 청량감을 주었을 것이다. 특유의 살인미소(?)로 다시 율포 까지 차를 타고 와서 해안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차로를 내려서 방조제를 따라서 작은 개울을 넘어 보성군 회천면을 지나서 장흥군 안양면으로 간다. 해안따라 오래된 초소의 흔적이 보이는데 지금은 부대가 한곳에만 있었다. TOD라는데 열상감시장비 부대를 말한다. 그 많은 해안의 경비대원이 다 철수하고 지금은 전자 장비로 대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낡은 해안 방카를 보며 오래전 군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군 생활 3년을 연평도에서 ,진해 경비대에서 해안초소소대장으로 보냈다.
해질 녁에 안양면의 수문리에 도착했다. 총무와 도곡선생은 차량으로 이미 도착하여 갯마을 민박에 숙소를 정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수문리의 부둣가에서 오늘 밤 황홀한 밤이 전개될 것이다. 참말로 기대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곳 안양면 수문리는 키조개와 새조개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저녁상에 키조개회와 새조개 샤브샤브가 나왔는데 그 맛이 기막혔다. 키조개는 둥글납작하게 썰어서 기름장에 찍던지 초장에 찍어먹는데 씹히는 맛이 연하고 사근사근하며, 새조개는 큰 꼬막이나 피조개 비슷한데 물에 살짝 데쳐서 조개껍질을 제거하면 그 속살이 새와 비슷 하다해서 새조개라 한다. 년 중에 봄철에만 맛을 볼 수 있고,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어서 조개 중 제일로 친다. 갖은 야채 넣고 무를 송송 썰어 넣은 육수에 새조개를 익혀서 먹는 맛이라니.
키 조개회
새 조개 샤브샤브
좋은 안주에 들뜬 분위기에 몇 잔술에 취해버렸다. 저녁을 마치고 술기운을 다스리려 혼자 부두로 걸어 나갔다. 방파제 끝까지는 제법 걸어가는 거리였다. 방파제를 한 바퀴 돌아오는데 저녁자리가 끝나고 방파제 쪽으로 전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술 좋아하는 도곡선생은 쟁반에 가득 안주와 술병을 쓸어 담어서 가져오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앉기는 날씨가 차가웠고, 마침 수리정비 차 부두에 올려놓은 작은 목선이 한척 있었다. 레일위에 놓여있었고, 좌우로 잘 고정이 되어 있었다. 내가 성큼 올라서 앉아 보니 뱃전에 둘러앉을 만 했다. 다 배위로 올라와서 기관실위에 넓고 평평한 곳이 있어 술 쟁반을 올려놓으니 술상으로 제격이었다. 뱃머리 쪽으로 가서 좌우로 배를 흔들어보니 적당히 리듬을 따라 배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흔들리는 리듬에 맞춰 4분의 4박자를 정박자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시작하였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아래 편지를 띄우고 흘러가는 물결 그늘 아래 춤을 춥시다. 처녀 열아홉살 아름다운 꿈속의 아이 러브 유“ 하며 분위기를 띄우니 도곡선생이 이에 뒤질새라 “막걸 리가 부른다, 동동주가 부른다. 술 상위에 안주들이 춤춘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권주가를 부르고 송명의 주모는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하고 영주댁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하니 이미 니나노 뽕짝으로 대세는 기울었다. 다 나무젓가락을 나눠 들고 두들겨가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노래가 한 순배 돌아가고 술 한 잔 씩을 돌리고 나니 그 날의 절창이었던 도곡선생의 권주가를 열화 같은 앙콜로 다시 듣게 되고 점심때 합류하였던 진주 강 선생의 매력적인 남 저음, 추억의 7080가요와 혜리님의 ‘두 개의 작은 별’과 나선님과 그녀의 친구 심연님이 부른 ‘사랑하는 이에게’ 때로는 폭발적인 고음으로, 때로는 잔잔하게 서정적으로, 수문리 부둣가 음악회는 무르익어갔다. 장르를 뛰어 넘어서, 팝송과 발라드와 가곡과 트로트를 섞어서 니 노래 내 노래 없이 아는 노래면 다 같이 불렀다. 한 시간 반이나 흘렀나? 열창에 목이 다 잠겨간다. 술도 다해가고 이쯤 해서 끝내면 아주 좋을 것이다. 배에서 다 내렸다. 고마웠다 고물 배야! 배 주인이 알았다면 난리를 쳤을 것이다. 즐겁고, 통쾌하고, 황홀한 밤이었다. 우리 모두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수문리 부둣가여! 고물 배여! 아름다운 여인들이여! 영원하라!!!! 넷째 날 열정의 밤이 뒤끝이 있었나? 잠을 편이 이루지 못했다. 내 방의 동료들도 술에 취했나 코를 심하게 골았고, 가수면 상태에서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였다. 식당에 내려가니 술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바지락을 가득 넣어서 국을 끓였는데 맛이 개운하고 속이 확 풀어 진다.
바지락 국 차비를 하고 수문리를 나서니 여다지 해수욕장이 나온다. 정남진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모래사장을 따라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고, 이 지역 출신 소설가이고 현재는 낙향하여 이 곳 안양면에 서실을 가지고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소설가 한승원씨의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그의 글이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시도 있고, 그의 작품에서 일부 발취된 글도 있다. 작가가 태어난 고향이 이런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이 공원이 후세에 대대로 전해져 기림을 받는 문학가가 된다면 대단한 자랑이겠다.
어느 꼭두새벽에 바다에서 그물을 당기다가 쓰러진 머시기네 어메 하늘나라로 떠났는데 그래 그렇다, 산다는 것은 저렇게 깜깜한 밤을 반딧불로 비치면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이다. <어둠>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구덩이 이므로 그 안에서는 헤어짐이 없고, 만남만 있다. 우리 헤어진다고 말하며 슬퍼하지 말자. <이별> 여다지 해수욕장을 따라서 해안을 돌아가니 사촌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간척지 제방을 따라가니 해창 마을이 나온다. 다시 해창 간척지를 따라간다. 간척지 제방에는 수로가 있고, 수로 주변에는 어김없이 갈대밭이 전개된다. 이 곳 갈대는 키가 크고 술이 크고 무성하다. 제방과 수로 사이로 무성한 갈대숲 사이로 난 흙길을 걷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불과 이백 미터도 되지 않는 물길을 바로 건너지 못해 십 키로 이상을 돌아간다. 드디어 원등이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건너편 제방 길을 걸을 것이다. 원등이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넉살 좋은 우리땅의 여인네 들이 동네 경로당에 들어갔다. 잠시 몸이라도 녹혀 볼 심산으로 경로당을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으니 경로당에 들어가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다. 커피를 끓여 마시고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몸을 녹히고, 그날 오후엔 그보다도 더 옹골진 일이 있었다. 남포 들어가기 전 하발리 진료소 옆에 주민건강관리실이라고 명패가 붙어있는 원적외선 찜질방이 있었다, 생쥐 뒤줏간 그냥 지나칠수 없는 격으로 거기도 빼꼼히 열어보니 동네 주민이 아무도 없었던 가보다. 우리 일행을 전부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원적외선 찜질방에 전원이 삼십분 동안 누워서 호화로운 휴식을 취하였다. 오랜 여행경험에 뻔뻔함이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오후엔 원등에서 다시 길을 나섰다. 오전에 걸어왔던 해창마을과 사촌 마을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남포를 중간목표로 정하고 해안 길을 걷는데 어제 경험으로 물빠진 해안을 따라가면 빠르고 쉽게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해안길을 선택했는데 낭패를 당했다. 뻘에 빠지고 훨씬 시간도 많이 걸려 하는 수 없이 포장도로를 찾아올랐다. 남포까지 4키로 되는 길을 두시간 넘게 걸렸다. 해안 길에서 헤매고, 찜질방에서 쉬고, 남포에서 굴 구이를 먹고 한 시간이상 노닥거린 것이다. 일정대로면 넉넉하게 마칠 것을 최종 목적지인 고마리에 오후 여섯시도 넘어서 도착했다. 마지막 날 관산읍의 모텔에 투숙을 하였는데, 4박 동안 가장 깊은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볍다. 아침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 여기저기 찾아 헤매다가 식사가 늦어 아홉시에 식사를 마쳤다.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는 늦은 것이다.
메생이 국과 메생이 전 이청준 생가는 꼭 들려보고 싶었고, 멀리 서울까지, 영주까지 가야하는 회원도 있어 적당하게 걷고 둘러보고 싶은 곳 둘러보고 오후 이른 시간에 파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여러 가지 시간계획이 차질이 생겼다. 어제 종점이었던 고마리 보다 4키로 정도 차로 이동하여 신동리 삼산 방조제부터 걷기 시작을 하였다, 방파제가 끝나는 지점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그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 나무계단 데크가 되어 있어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장흥군에서 관리하는 관광시설 전망대 였다. 정남진 전망대라 하였는데. 어제부터 정남진이라는 표지판과 기념탑을 보면서 걸어왔는데, 드디어 여기서 정남진이 끝나나 보다.
장흥군의 관광홍보관이 있고, 전망대는 9층 높이인데 전망대에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입장료를 내고 전망대에 올랐다. 다도해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흥지역의 거금도, 소록도 완도군의 금당도 조약도 고금도, 사방으로 시원하게 보인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착각이 있었다. 5년전에 걸었던 경험으로 이 길이 회진항으로 향하는 길로 알았는데, 실은 노력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덕도를 한바퀴 돌았던 길이었다. 신상리. 대리를 지나서 장산리에 이르니 그제서야 회진항이 보였다. 덕도는 지금은 섬이 아니고 육지화 되어있다. 간척지 제방으로 관산과 이어졌고, 회진과는 다리로 연결되어 행정구역은 회진면이다.
회진항에 도착하니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간다. 시간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예정대로 라면 지금쯤 이청준 생가 진목마을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진목리 까지는 3키로 정도 된다는데, 잠시 걸을 거리인데, 지금은 오후 시간을 생각하여 과감하게 생략하고 차로 이동하였다. 지서에서 친절하게 그림을 그려주어 지름길을 택하여 가니 잠시 만에 진목마을에 도착하였다. 바다와는 조금 떨어져 있고, 산자락에 형성된 촌락이었다. 절반은 농사로 절반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지금은 간척지 방조제가 만들어져 바다는 저 멀리로 멀어졌다. 이제는 마을주민들도 대부분 농사를 지어 살아갈 것이고, 그의 글에 그려졌던 바닷물이 가까이에서 출렁대고 고깃배가 오가는 정경은 지금 그의 고향에서는 볼수 없다. 느티나무가 있고, 마을회관이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생가를 찾았다. 그의 단편 눈길에서 그의 고향집이 아주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서 돌담을 따라 내려가서 측면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갔던 그 마당 그대로 였고, 5칸의 겹집에 너른 대청이 있고, 안방과 정지와 건넌방 작은방이 있고, 뒤쪽에도 작은 마루가 있는 짜임새 있는 기와집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그렸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아니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노인이 차려준 저녁식사를 하고 이미 집 주인이 바뀐 남의 집에 만감이 교차하는 어두운 마음으로 안방의 천정과 들보를 보며 쉬이 오지 않는 마지막 밤의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 그는 그의 어머니를 늘 노인이라 하여 객관화 시켜 그리곤 했다. 그가 약간 늦둥이였을 거라고 유추해본다. 생가를 나서면서 오래전부터 꼭 걸어보고자 했던 눈길을 찾아보고자 마을의 할머니에게 “차부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마을의 느티나무를 아래를 말씀하시는 데 대화의 초점이 맞질 않는다. 여러분들에게 확실한 답을 얻고자 마을회관을 찾았다. 남자 어르신들이 계신 방문을 여니 한 열분 정도 계셨다. 고스톱 판이 한창 이었는데, 이청준 선생 기행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를 소개하고 이거저것 여쭈니 방안에서는 설명이 아니 되겠던지 한분이 밖으로 나오신다. 안전만 님, 이청준 선생보다 초등학교로 한해 위이시고, 올해 75세 되신다는데 혈색이 좋으시고 연세보다 젊어 보이신다. 이청준 선생은 인근 십리에서는 알아주는 수재였고, 이곳 진목리가 한학을 하여 학교 입학 전부터 면학분위기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때 광주로 갈려면 어디로 갔었나요?”하니 “대덕으로 나갔는데 십리가 짱짱한 길이고 지금은 묵어서 가기가 쉽지 않을거요.”하신다. 내가 회진에서 들어오면서 회진 가는 길은 눈길하고는 정황이 너무 안 맞는 다는 생각을 했는데 대덕 가는 길이 맞을 것 이라는 확신이 섰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저 계곡 쪽으로 마을 뒤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임도로 가지말고 좌측길로 가라고.
선생의 묘소에 들리고 난 후 다시 마을에 돌아와서 회원들의 의사를 물으니, 혜리님과 소단님이 가겠다고 따라나선다. 마을 뒷 길을 한참 올라서니 갈림길이 나와서 임도가 아닌듯한 길을 따라갔다.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서, 어찌 수월타했는데 묘지에서 길이 끝이 났다. 다시 맨 처음으로 와서 왼쪽 길을 따라서 가니 그 길도 나무가 쓰러져 길을 덮쳐 더 이상 갈수 가 없다. 이제는 오면서 보았던 아주 작은 오솔길만이 남아 있다. 두 번이나 산길을 헤매고 나니 나를 따르던 두 여인의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더 이상 강행하면 반란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대안을 제시했다. 두 분은 여기 계시고 나만 잠시 다녀오겠다고 잠시라고 하고 십분 가까이 걸어갔다. 산등성이를 따라가는데 길은 계속하여 이어졌다. 그리고 겨울이라 풀이 무성하지 않아서 걸을 만 했다. 이 길이 맞은데, 조금만 더 가면 가학리에 내려설 것이고, 아쉽지만 돌아섰다 . 다음에 다시 걸어보리라 다짐하고 “눈길”, 지금부터 50여 년 전, 정확히 따지면 55년 전 쯤 될 것이다. 광주에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던 고등학생과 그 어머니의 애달픈 가정사에 얽힌 이야기다. 여기에서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그의 또 다른 자전소설 "축제"와 앞뒤로 이야기를 종합해서 구성해보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장남인 그의 형이 노름쟁이에다 술주정뱅이 파락호였다.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니 좋던 살림은 점점 졸아들어 전답 다 팔아먹고, 급기야는 선대에 정성들여 지었던 집까지 넘어가게 된다. 그때 까지 광주에 유학했던 막내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어머니가 하루 집에 다녀가라 하여 이미 집안 세간, 살림살이 다치워진 집에 마지막 밤을 보내고 , 새벽밥 지어 먹이고 광주로 가는 첫차로 아들을 보내고 넘어 오던 눈길이었다.
내가 아무리 여기저기를 돌아 다녀 봐도 우리는 지금 그 시절의 아우라를 전혀 같이할 수는 없다. 그때는 지구온난화가 시작되기 전이라서 이곳 남녁의 바닷가 마을에도 겨울에 눈이 자주 내렸고, 논바닥과 개울에 얼음도 자주 얼었다. 차로는 거의 없었고, 일제 때 만들어진 신작로가 있어 우마차가 다녔고, 장날에 보통 이삼십 리는 걸어 다녔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오솔길과 산과 내를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전후라서 대부분 민둥산이었고, 검붉은 맨땅에 드문드문 관목같이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나던 시절이었다. 아들을 대덕면 소재지에서 첫차로 보내고 돌아오는 이 산등성이의 눈길에 찍인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그 발자국마다 눈물이 괴었다는 그 시절의 한 많고 죄 많았던 어머니의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