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비의 존재가 황실복위의 정당성을 논할 때 흠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저도, 그런 존재를 인정해준다는 것은 일본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 같아서 꺼림칙한 심정이 조금은 있구여.
하지만, 어떻게 맺어졌건 영왕에게 일생내내 충실한 아내역을 했으니 그냥 인정해주는게 어떨런지...한국 왕실 중에서 일본인과 결혼한 세 쌍중 두 쌍은 모두 이혼으로 끝났지만 방자비만은 영왕을 떠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해방 후 가난해진 영왕 곁을 떠나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그래도 끝까지 같이 하려고 노력했던 걸 봐서 그냥 인정해주는게 나을 것 같네요.
물론 이구 공은 안되겠져. 의왕계 중 한 분이라면 모를까.(이 우공이 살아있었다면 적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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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비 역시 시대의 희생양이고, 말로에 국내에서 했던 사회봉사는 인정하나...... 황실복원 운동을 하는 이의 차원에서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자비를 인정하자는것은 황실복원 후에 "황위 게승권"과도 직결되고 이는 곧 이구황세손의 정통성을 인정하는건데 이글은 삭제해 주십시오.
장애인의 대모로서의 삶 1901년 11월 4 일 일본 동경에서 나시모또궁가(梨本宮家)의 제1왕녀로 태어난 이여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속과 절연된 구중궁궐속과 같은 황족생활을 통해 곱디고운 모습을 가꾸었다. 1919년 일본왕족들과 귀족들만 다녔던 `학습원'을 졸업한 그는 1920년 4월 28일 일제에 의해 황태자 이은 전하와 숙명의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조선이 제 2의 조국이 된다.
그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은 그 전 해부터 내가 일본 황태자비로 물망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훨씬 후에 안 일이지만, 일본 군벌들의 추악한 세력 다툼이 황태자비 간택에도 끼어들어 나와 이은 전하의 운명에까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아이를 못나을 체질이라 하여 한.일 융화의 미명아래 은 전하의 배필로 정했다 한다. 내가 아이를 못나으니까 조선에 보내 왕가를 절손시키자는 속셈이렀던 모양이다. 내가 나중에 아들을 낳자 나의 불이설을 주장했던 전의(典醫) 3명이 모두 처형당했다고 한다.
`비운'이라는 수식어로 알려질만큼 `눈물의 여왕'이었던 이여사. 그의 불행 시작은 새 조국에 첫발을 딛던 1921년 부터다. 첫왕자 진왕자가 탄생했으나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독살당했고 이어, 1923년 관동대지진의 한국인 대학살로 인해 2개의 조국을 가진 한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친정, 조선은 시댁. 어느곳도 공개적으로 편들거나, 비난하거나 할 수 없는 처지였던 이여사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자신의 운명만을 슬퍼하며 혼자서 숨이 막히도록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된 그는 1963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함과 동시에 의식불명 상태로 중태에 빠진 영친왕과 함께 그리던 남편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여사는 이후 영친왕과의 굳은 약속인 장애인을 위한 복지 사업을 추진 25년동안의 생활을 오로지 장애인 복지를 위해 바치게 된다. 1966년 장애인 복지 사업을 위해 사단법인 `자행회'를 창설했으며 이듬해에는 칠궁사당의 창고를 개수하여 15명의 농아와 소아마비 아동지도를 시작했다.
또 다음해 병상에 누워있던 이은 전하의 생신을 기념하여 그의 아호를 따서 사회복지 법인 `명휘원'을 설립했다. 1970년 5월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이 서거하자 여사는 그 비통한 가슴을 사업으로 달래며 더욱 복지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72년 본격적인 장애아동 교육을 위해 수원에 특수학교인 `자혜학교'를 설립하여 정신박약아 및 신체장애아들의 교육에 헌신했다.
이방자여사는 부모 및 사회인들의 바른 이해와 관심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함을 절감하면서 관계요인들을 만나 건의하는 한편, 전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계몽 강연에 나서서 많은 공감과 호응으로 복지의식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장애인 국제기능 경진대회나 장애인 올림픽등에 출전, 금메달을 획득하여 장애인들을 고무시키는데 앞장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신체의 장애는 능력의 장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활동이 범사회적으로 인식되거나 지원받지 못한 때였다. 70년대 이방자여사는 스위스, 이태리, 독일, 불란서 등 국내.외 순회 `궁중의상 발표회'를 하는 한편 다방면의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그림. 붓글씨. 칠보공예등을 제작, 작품을 팔아 기금확충을 하는 등 장애사업을 위해 헌신했다.
이방자여사의 생활규범 및 정신세계는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몰락한 조선왕조의 왕비로서의 자존을 지탱케 하면서 소외된 농아. 소아마비 등의 아동들을 위해 전환한데 대해 크게 주목할만 하다.
그의 공로가 널리 인정되어 정부는 서울시 문화상. 대한적십자상. 국민훈장모란장. 5.16 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서거후 그 유지에 따라 장애인 재활시설인 수봉재활원이 설립되었다.
이방자여사는 지난 83년 독일에서 궁중의상 발표회 당시 과로로 인한 신병악화로 투병하다가 89세를 일기로 1989년 5월 8일 서거했다. 그녀의 시신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영릉에 영친왕과 함께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