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화석정 (花石亭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은 임진왜란 때 불타 80년간 터만 남아있던 것을 현종 14년에 儒林(유림)들이 복원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타버리고, 1966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정자 안에는 李珥(이이)가 여덟 살에 지었다는 시가 걸려 있다. 8세에 율곡이 쓴 시를 그후 당시 92세 된 성목(成穆)이 현판을 써서 백세현판(百歲懸板)이라 이름 붙였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임정추이만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새홍하처거 성단모운중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늦으니 시인의 생각 끝이 없어라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맞닿아 더욱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나무 해를 향하여 붉어라 산은 외로운 둥근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나 되는 긴 강바람을 머금었구나. 변방의 기러기 그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지 기러기 소리 구름 속으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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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가의 화석정은 이이가 제자들과 함께 학문과 진리를 논했던 곳으로 유명히다.
이이 (李珥 1536∼1584(중종 31∼선조 17)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본관은 덕수(德水).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어머니가 죽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한 뒤 1554년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뒤 1555년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하였다
율곡(栗谷)과 기생 유지(柳枝)
황해도 해주 기생, 유지(柳枝)에게 써 준 친필시(詩) 율곡(栗谷)에게는 부인이 정실 노씨, 소실 이씨와 김씨를 아울러 세 분이 있었다.(소실은 자식을 얻기 위해 맞음) 율곡(栗谷)이 여성을 대하는 자세는 우계(牛溪) 성혼(成渾)과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어느 날 친구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생일잔치에 같이 가보니 기생이 끼어 있으므로 우계(牛溪)가 "기생은 오늘 모임에 마땅치 않다"고 하자 율곡(栗谷)은 웃으면서,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나니 이 또한 하나의 도리라오"하며 설득하자 마침내 우계(牛溪)가 함께 자리에 참석했다고 한다.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3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서울 순화방(順和坊 :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과거를 단념,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음. 임진왜란 중에는 우참찬에 올라 좌참찬(정 2 품)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났음.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6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음
말없는 청산이요 /성혼(成渾)
말업슨 청상(靑山)이요,태(態) 업슨 유수(流水) l 로다. 갑 업슨 청풍(淸風)이요, 님 업슨 명월(明月)이라. 이 중(中)에 병(病) 업슨 이 몸이 분별(分別) 업시 늙으리라.
말이 없는 것은 청산이요, 모양이 없는 것은 유수로다. 값없는 것은 바람이요, 주인 없는 것은 밝은 달이로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병 없는 이 몸은 걱정 없이 늙으리라.
또 황해도 황주에 유지(柳枝)란 기생이 있어서 무척이나 율곡(栗谷) 선생을 흠모했는데, 그 용모가 예쁘고 행동이 민첩하였기 때문에 율곡(栗谷)도 매우 그를 귀엽게 여겨 같이 놀기도 했지만, 그러한 유지(柳枝)에게도 남녀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을 보면, 율곡(栗谷)의 여성에 대한 태도가 담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율곡(栗谷)이 유지(柳枝)에게 써 준 친필 초고가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 현재 이화 여자 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한다.
유지(柳枝)에게 준 시(詩) 그가 세상을 등지기 약 3개월 전, 밤늦게 문득 자신을 찾아온 기생 유지(柳枝)를 주저주저하며 방에 들여놓고는 긴 밤을 함께 지새우며 그는 이 장문의 시를 지었다. 약 10년 전 황해도 감사로 갔을 때부터 아꼈던 유지가 찾아온 것이었지만 병약해진 말년의 이이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끝내 예를 갖췄다. 그 뒤 이이의 별세 소식을 들은 그녀는 곧장 달려와 3년상을 치뤘다.
율곡(栗谷)이 황해도관찰사 재임 중이던 39세 때 알고 지낸 동기(童妓) 유지(柳枝)를, 48세 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율곡리와 해주를 다녀다 다시 만났을 때 써준 시와 글로서, "젊은 날 좋은 기약 다 놓치고서 이제 황혼의 나이에 와서야 다시 만났으니…, 내생이 있단 말 빈 말이 아니라면, 가서 저 부용성(芙蓉城;연꽃 핀 저승의 신선나라)에서 너를 다시 만나리"로 끝맺고 있다.
유지(柳枝)는 선비의 딸이다. 황주 기생으로 떨어져 있더니 내가 황해도 감사로 갔을 적에 동기로 수종들었는데, 날씬한 몸매에 곱게 단장하여 얼굴은 맑고 머리는 영리하므로,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기긴 했으나, 처음부터 정욕의 뜻을 품지는 아니했었다. 그 뒤에 내가 원접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 유지(柳枝)는 매양 안방에 있었지마는, 일찍이 하루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아니했었다. 계미년(1583년, 율곡 48세)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이님께 문안 갔을 때에도 유지(柳枝)를 데리고 여러 날 동안 술잔을 같이 들었고, 해주로 돌아올 적에는 조용한 절에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었다. 그리곤 서로 떠나 내가 밤고지 강 마을에서 자는데, 밤이 들어 어떤 이가 문을 두들기기로 보니 유지(柳枝)였다. 방긋 웃고 방으로 들어오므로 나는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대감의 명성이야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다 사모하는 바이옵거늘, 하물며 명색이 기생된 계집이겠습니까? 그 위에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더 감탄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기로 이렇게 굳이 멀리까지 온 것이옵니다." 하므로, 마침내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다만 뜬 사내들의 다정한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어늘, 누가 도의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 줄이야 알 것이랴! 게다가 받자하지 않는걸 보고도 부끄러이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감복한다는 건, 더욱 더 보기 어려운 일인데, 아까워라!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더구나 지나는 이들이 내가 혹시 잠자리를 같이 하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저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國中一色(국중일색)이 더욱 더 아깝겠구나! 그래서 노래를 지어, 사실을 적어,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그리 짐작하시라.
若有人兮海之西 鍾淑氣兮禀仙姿 약유인혜해지서 종숙기혜품선자
綽約兮意態 瑩婉兮色辭 작약혜의태 형완혜색사
아아! 황해도에 사람 하나 맑은 기운 모아, 선녀 자질 타고났네 생각이며 자태 곱기도 해라 맑기도 해라! 그 얼굴이랑 말소리여
金莖兮沆瀣 胡爲委乎路傍 금경혜항해 호위위호로방
春半兮花錠 不薦金屋兮哀此國香 춘반혜화정 불천금옥혜애차국향
새벽하늘 이슬같은 해맑음이어늘 어쩌다 길섶에 버려졌는지 봄도 한창 청춘의 꽃 피어날 제 황금 집에 옮겨가지 못하련가 슬픈 그대 아름다움이여
昔相見兮未開 情脈脈兮相通 석상견혜미개 정맥맥혜상통
靑鳥去兮蹇脩 遠計參差兮墜空 청조거혜건수 원계참차혜추공
처음 만났을 땐 아직 안 피어 정만 맥맥히 서로 통했고 중매 설 이가 가고 없어 먼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展轉兮愆期 解佩兮何時 전전혜건기 해패혜하시
曰黃昏兮邂逅 宛平昔之容儀 왈황혼혜해후 완평석지용의
이렁 저렁 좋은 기약 다 놓치고서 허리띠 풀 날은 언제런가 아아! 황혼에 와서야 이리 만나다니 그래도 모습은 옛날 그대로구나
曾日月兮幾何 悵綠葉兮成陰 증일월혜기하 창록엽혜성음
矧余衰兮開閤 對六塵兮灰心 신여쇠혜개합 대육진혜회심
그래도 지난 세월 그 얼마였던가 슬프다 그늘을 이룬 인생의 푸르름이여 나는 더욱 몸이 늙어 여색을 버려야겠고 티끌 세상을 마주해서는 마음조차 쉬었으되
彼姝姿兮妧姩 秋波回兮眷眷 피주자혜완연 추파회혜권권
適駕言兮黃岡 路逶遲兮遐遠 적가언혜황강 로위지혜하원
저 아름다운 여인이여 사랑의 눈초리를 돌리는가 내 마음 황주 땅에 수레 달릴 때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
駐余車兮蕭寺 秣余馬兮江湄 주여차혜소사 말여마혜강미
豈料粲者兮遠追 忽入夜兮扣扉 기료찬자혜원추 홀입야혜구비
절간에서 수레 머물고 강뚝에서 말을 먹일 때 어찌 알았으랴 어여쁜 이 멀리 따라와 밤되고 내 방문 두들길 줄을
逈野兮月黑 虎嘯兮空林 형야혜월흑 호소혜공림
履我卽兮何意 懷舊日之德音 리아즉혜하의 회구일지덕음
아득한 들 가에 달은 어둡고 빈 숲에 범 우는 소리 들리는데 나를 뒤밟아 온 것 무슨 뜻인가 옛날의 명성을 그이워서라네
閉門兮傷仁 同寢兮 害義 폐문혜상인 同寢兮 해의
撤去兮屛障 異狀兮異被 철거혜병장 이상혜이피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가로막힌 병풍이야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
思未畢兮事乖 夜達曙兮明燭 사미필혜사괴 야달서혜명촉
天君兮不欺 赫臨兮幽室 천군혜불기 혁림혜유실
失氷泮之佳期 忍相從兮鑽穴 실빙반지가기 인상종혜찬혈
정분을 못 나누니 일은 틀어져 촛불을 밝히고 밤새우는 것 하늘님이야 어이 속이리 깊숙한 방에도 내려와 보시나니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리고 몰래 하는 짓이야 차마 하리오
明發兮不寐 恨盈盈兮臨歧 명발혜불매 한영영혜임기
天風兮海濤 歌一曲兮悽悲 천풍혜해도 가일곡혜처비
동창이 밝도록 잠 자지 않고 갈라서자니 가슴엔 한만 가득 하늘엔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고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繄本心兮皎潔 湛秋江之寒月 예본심혜교결 담추강지한월
心兵起兮如雲 最受穢於見色 심병기혜여운 최수예어견색
士之耽兮固非 女之耽兮尤感 사지탐혜고비 여지탐혜우감
비단 위에 그 본심은 밝고도 깨끗해 가을 강물위에 찬 달이로구나 마음에 선악 싸움 구름같이 일 적에 그 중에도 더러운 것 색욕이거니 선비의 탐욕이야 진실로 그릇될 터 계집의 탐욕이야 말해 무엇하나
宜收視兮澄源 復厥初兮淸明 의수시혜징원 복궐초혜청명
倘三生兮不虛 逝將遇爾於芙蓉之城 당삼생혜불허 서장우이어부용지성 . 마음을 거두어 근원을 맑히고 밝은 근본으로 돌아갈지라 내생이 있단 말 빈말이 아니라면 가서 저 부용성에서 너를 만나리.
다시 짧은 시 3수를 써 보인다 天姿綽約一仙娥 十載相知意態多 천자작약일선아 십재상지의태다
不是吳兒腸木石 只綠衰病謝芬華 불시오아장목석 지록쇠병사분화
이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 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 이 몸인들 하통 같은 목석이기야 하겠나마는 병들고 늙었기로 사절함일세
含悽遠送似情人 只爲相看面目親 함처원송사정인 지위상간면목친
更作尹那從爾念 病夫心事已灰塵 갱작윤나종이념 병부심사이회진
헤어지며 정든 이 같이 설워하지만 서로 만나 얼굴이나 친했을 따름 다시 나면 네 뜻대로 따라가련만 병든 이라 세상 정욕 찬 재 같은걸
每惜天香葉路傍 雲英何日遇裵航 매석천향엽로방 운영하일우배항
瓊漿玉杵非吾事 臨別還慙贈短章 경장옥저비오사 임별환참증단장
길가에 버린 꽃 아깝고 말고 '운영이'처럼 '배항이'를 언제 만날꼬 둘이 같이 신선될 수 없는 일이라 나뉘며 시나 써주니 미안하구나
癸未 九秋 念八日(계미 구추 염팔일 1583년 9월 28일 ) 栗谷病夫 書于 栗串江村(율곡병부 서우 율곶강촌) 율곡 병든 늙은이가 밤고지 강마을에서 쓰다.
최 립(崔립)의 詩 이 일이 있은 뒤, 서울과 시골에 있는 여러 문인 학자들 사이에 이것이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간이재 최립(簡易齋 崔岦 )이란 이는 율곡(栗谷) 보다 3살 아래인 벗으로, 시로써 일세에 이름을 날린 이인데, 율곡(栗谷)이 유지(柳枝)에게 지어 준 시 중의 첫 수의 운자(韻字)를 따라 시 한 수를 지은 것이 있어 소개해 둔다.
어찌하다 글을 지어 미인을 추기던고 더러 앞날에도 웃을 일 있을 건데 하지만 선생의 명망 생각하고서 다시는 거울 당겨 단장 않으리.
박세채(朴世采)의 남계견문록에 이하면, 율곡(栗谷)이 떠난 뒤에 유지(柳枝)는 서울로 달려 올라와 곡하고 또 그대로 삼년상을 입었다고 한다. 비록 육체적 관계야 맺지 않았을망정 이미 마음을 바쳐 사모하던 사람이라, 그를 위하여 喪服을 입은 유지(柳枝)야말로 진정 깨끗하고 예의 바른 女性이라 할 것이다. (노산 이은상님의 '申師任堂(신사임당)과 율곡(栗谷)'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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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역사 미디어 게시판은 동영상 등을 올리는 곳이어서, 한국사 사료 마당으로 옮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