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시인 --------------------------------------------------------------------------------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알아도 쉽게 찾아갈 수 없다. 천은사에서 시암재 오르는 길가의 숲 속에 손바닥만한 입간판 하나가 서 있을 뿐, 차를 타고 달리는 이들에게 상선암 가는 길은 미로에 가깝다. 해발 8백m를 지날 무렵 오른쪽 차창 밖 차일봉 아래 문득 산중의 섬처럼 떠오르는 암자 하나를 볼 수 있지만 여전히 그곳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도승 우번조사뿐만 아니라 진응도사·용화스님·호음선사·경허선사 등 수많은 선승들이 수행하던 불도의 성지 상선암. 전화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 암자에서 지난 겨울 푸른 눈의 미국인 스님이 동안거(겨울 석달 수행)를 했다. 상선암에서 조금 떨어진 능선에 자리잡은 토굴에서 폭설의 겨울 한철을 난 것이다.
“반야심경” 등을 한국어와 영어로 번갈아 외는 염불선을 하며 하루 1천3백배를 빠짐없이 하는 고행을 기꺼이 해냈다. 그것도 석달간 솔잎가루와 조금의 과일만 먹으며 죽은 나무를 잘라 장작을 패고, 하루 세시간 이상은 잠을 자지 않는 혹독한 수행이었다. 체중이 12kg 줄어들었지만 그는 비로소 한국 선불교의 진면목을 보았다.
현각(玄覺). 미국의 속명 폴문젠(35)을 기꺼이 버린 그는 조계종 분규가 극에 달했던 지난해 11월14일 KBS에서 방영한 “일요스페셜” ‘만행’(卍行)으로 속인들의 눈길을 모았지만 홀연히 지리산 상선암의 토굴로 숨어든 것이다.
그는 미국의 명문 예일대에서 서양철학과 영문학(연극)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계 집안 출신인 그는 75세의 부모와 누나 세명 그리고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
어머니는 생화학박사, 아버지는 컴퓨터회사 사장이며 쌍둥이 동생 중 하나는 조각가, 또 하나는 시티뱅크의 부장으로 재직중인 전형적인 상류층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나 재학중에 이미 출가에 뜻을 두었던 그는 하버드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미 졸업장이 필요없는 선불교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는 신부의 꿈을 안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그 무엇’ 때문에 번민해야 했다. 불교와의 인연은 바로 ‘그 무엇’으로부터 촉발됐다. 그는 예일대 재학중 한 목사가 준 1백60쪽짜리 불교서적을 대수롭지 않게 읽다가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듯한 전율에 휩싸였다. 바로 ‘나의 생각’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불자가 될 결심을 했다.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도서관을 뒤지며 불교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중국불교 서적이 3천여권, 티베트불교 2천8백여권, 일본불교에 관해서는 2천5백여권이 소장돼 있었지만 한국불교 서적은 겨우 5권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인 숭산행원 대선사(화계사 조실)를 만나면서 유일하게 선불교 전통을 이어온 한국 불교에 빠져든다. 마침내 가톨릭계였던 그가 한국 선불교에 심취해 어느새 전세계에 선을 알리는 포교사로 변신한 것이다.
92년 스승인 숭산과 함께 중국으로 용맹정진 포교를 하러 갔다가 남화사의 중국 스님들 앞에서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사미계를 받으며 본격적인 불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동안 유럽과 티베트·인도 등 14개국을 돌며 수행하고, 미국에서 가장 큰 포교원인 홍법원(미국인 불자 2만여명)의 주지 소임을 1년간 맡다가 최종 수행지로 택한 곳이 한국이었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이나 사무라이 정신과 대처승(帶妻僧)제도가 자리잡은 일본에서는 선불교의 전통이 거의 사라지고 한국만이 화두를 갖고 참선수행하는 선불교의 법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국가 들을 때마다 눈물 흘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도 전생에 ‘조선의 독립군’이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 한국의 풍경이나 민속음식, 음악 등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 익숙하다는 것이다. ‘애국가’에 대한 그의 에피소드는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91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화계사 대웅전 앞의 한 스님 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쏟아졌다. 스스로도 너무 놀랐다. 몇달 후 경주 남산의 천령사에 백일기도를 하러 갔다가 노보살의 집에서 또 그 노래를 듣게 됐는데 웬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천배를 하지도 못하고 참선도 되지 않았다. 그후 서울의 거리에서 귀순자 기자회견 중계방송을 보다 그 노래를 듣고 또 눈물을 흘렸다.
98년 다시 한국에 왔을 때 동국대 식당에서 라면을 나눠 먹으며 자연스럽게 영어 강의를 하던 중 광복절 중계방송에서 다시 그 노래를 듣게 된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고 젓가락이 떨어졌다. 화장실에 가서 또 울고 말았다.
학생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했다. 대체 무슨 노래인가. 멜로디만 귀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그 노래는 민속음악인가, 농요인가. 혼자만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화계사의 스승 숭산에게 여쭈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더니 허허 웃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현각은 ‘애국가’라는 한국말도 몰랐던 것이다.
그날 숭산으로부터 “현각, 너는 전생에 조선의 독립군이었다. 강한 나라를 꿈꾸며 죽어 미국에 태어났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지금도 그것을 믿으며 또한 자랑스러워한다. 가야금 산조, 전통음식, 차, 경치 등 한국적 정서가 전혀 낯설지 않은 그는 보지도 않은 영화 “서편제”의 CD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 되었다.
지난해부터 한국에 정착한 현각은 시골버스를 타고 ‘만행’을 돌 때 바라보는 한국의 산야는 슬플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실토한다. 특히 해질 무렵 들녘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남북통일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농촌의 일하는 노인들 사이에 젊은이들이 함께 있는 것”이라며 서정적이면서도 날카롭게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한국의 신세대들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서양사람들, 특히 미국의 지성인들이 동양철학이나 한국의 불교 혹은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돈과 섹스와 여행 등 외면적 자유에서 한계를 느끼는 이들이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불교나 요가, 도교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데 반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또 미국으로만 달려가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우상이 된 마이클 조던·톰 행크스·해리슨 포드·브레드 피트·리처드 기어·샤론 스톤 등도 불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의 말처럼 화계사 국제선원에 머무르는 외국인 스님들도 다양하다. 그 자신도 독일과 프랑스에서 2년간 머물렀으며 네덜란드 1개월, 이탈리아 2개월 등 여행을 많이 했고,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열애도 해봤으며, 뉴욕과 파리의 나이트클럽을 드나드는 등 외적인 자유를 만끽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버드대 다닐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뒷자리의 여성이 자주 바뀌기도 했었다며 웃는 그는 “여자는 이미 출가하기 전에 졸업했다”는 말로 속연의 종지부를 찍었다.
어느새 유창해진 한국말로 농담도 곧잘 하는 현각. 그는 “죽을 때까지 한국에 머무르며 수행과 포교를 하고, 전생의 나라인 한국에서 죽으면 나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라는 말로 한국에 대한 사랑을 대신했다. 그는 또 한국의 조계종 분규사태나 종교간 갈등을 보면서 한탄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여전히 종교다원주의자로서 열려 있었다. 몇년 전 화계사에 있을 때 초파일 직전에 세번의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광신도의 짓이었겠지만 바로 아래의 한신대 대학원 교수인 김경재 목사와 대학원생들이 찾아와 대신 정중한 사과를 했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뻤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신대 대학원에서 한번의 비교종교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학생들의 일부는 도중에 나가기도 했지만 그날 강의는 너무나 진지했고,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그로서도 할 얘기가 참 많았다.
강의 마지막에 한 학생이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지난해 성탄절에 지리산 실상사 앞에 내걸린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실상사 스님 일동’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감격한 것도 바로 ‘타종교와의 차이는 없고 단지 수행방법상의 문제만 있을 뿐’이라는 그의 열려있는 종교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97년 미국에서 “선의 나침반”(The Compass of Zen) 등 세권의 한국 선불교 관련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았던 그는 지금도 경허스님 어록집 등의 번역작업과 강의를 하며 포교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리산 상선암의 새벽안개가 부모 형제나 옛 애인보다 더 생각난다는 현각. 그는 어느새 지리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숭산스님과 현각 숭산스님은 우리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세계 불교계에서 큰스님으로 꼽히고 있는 소위 4대 스님 달라이라마, 릭낫한, 마하거사난다 등 중 한 분이고, 현각은 미주의 명문대학 예일과 하버드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다가 숭산스님의 큰 영향으로 그의 꿈이던 신부가 될 것을 단념하고 지금은 한국 화계사에서 머리를 깎고 수도에 몰두하고 있는 숭산스님의 제자이다. 아울러 덧붙일 것은 그가 숭산스님에게 귀의한 이래, 그의 전생이 ‘한국의 독립군’이라고 할 만큼 한국의 음식과 풍속 내지는 예술에 심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숭산스님과 현각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현각의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가 만나는 것을 통해 종교 사상적으로 기독교에서 불교로 전이되는 근본 이유는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나는 이 물음을 풀기 위해 최근에 출간된 현각의 『만행』과 숭산스님의 『부처님께 재를 털면』을 읽고,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숭산스님과 현각의 상관성을 풀고자 한다.
현각은 미국의 가정에서도 동양인의 전통적 가정에 못지않은 훌륭한 부모와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곱게 자라난 엘리트이며, 게다가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신부가 되겠다는 일념 아래 좋은 환경에 어울려 오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도정신 밑에 정진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다. 즉, 그가 신부가 되겠다는 평생 원을 건 기독교에서 풀리지 않아 제시된 문제는 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소유자로서 이 세상에 사탄과 영벌을 받아야만 하는 지옥을 만들어 놓았느냐는 것과 또 순진무구한 어린 나이의 사촌동생이 왜 그의 뜻에 거슬려 교통사고로 죽어야만 하느냐의 두 가지 물음이다. 그렇지만 그 해답이 기독교에서는 찾아지지 않다가 숭산스님의 말씀으로 그 물음이 풀려 드디어 스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된 사탄과 지옥의 문제는 나도 일찍부터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왔던 물음으로서 이성을 지닌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풀어야 할 의문이다. 즉 무한한 사랑과 지옥과는 신앙의 논리로서도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숭산스님의 존재는 불교계에 밝지 않은 나로서도 현각의 『만행』을 통해 비로소 알았고, 『만행』을 통하여 보면 무상(미국인, 문학·철학·언어학 전공), 대봉(미국인, 유태교), 청안(헝가리인, 연극학), 무심(미국인, 유태교), 현문(폴란드인, 가톨릭), 명공(러시아인, 생물학 박사) 등 근 10명의 서양 엘리트들이 숭산스님의 선도에 심취, 한국에 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것으로 보아 숭산스님의 존재는 국제적으로 큰스님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현각의 심취된 논리가 밝혀져 있지 않아 숭산스님의 어떤 선심의 문화가 전연 다른 서양의 젊은 엘리트들로 하여금 그들의 본래 기독교 또는 유태교에서 불교로 개종되게 하였는지 매우 궁금하다는 것이다.
현각의 『만행』과 숭산스님의 『부처님께 재를 털면』에 드러난 숭산스님의 선심은 거의가 선 문답으로 돼 있어 나는 그 자료만으로는 현각 등 외국인이 받은 숭산스님의 선심을 읽어낼 수가 없고, 다만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라’가 우리 속인의 망상을 깨는 방편으로서 그들을 개종케 한 것 같다. 그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라’는 동양적인 또는 한국의 고승 효봉스님의 평생 화두인 무(無)와 일치시키면 어떨까 생각되는데, 하지만 완전한 무는 결국 생불이 아닌 이상, 죽음 이후의 세계가 바로 그것에 해당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혹시 이것이 전언한 바와 같이 이성과 과학에 얽매인 서양의 젊은 엘리트들로 하여금 숭산스님에게 지옥과 천당, 사탄과 신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과는 달리, 동양의 이들을 하나로 포용하는 일원론이 아닌지 또한 궁금하다.
나는 현각의 『만행』을 통해 현각의 종교적 신앙과 나아가서는 신앙과 윤리에 대하여 내가 경험한 신앙과 지식을 뭉뚱그려 여러 모로 생각해 본다.
첫째, 종교는 결국 인간이 부족(不足)이 전제된 상대적인 지식의 동물로서 그 옛날 원시시대부터 계속 신앙(종교)을 지니고 살아왔던 필수물이지만, 그 예속된 각자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자꾸 변하고 적응돼 나아가는 문화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가 될 때 한국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문자주의적 신앙은 선진국의 신앙에 비하면 1세기 가량 뒤떨어져 있는 것 같다.
둘째, 절대자에 대한 신앙은 문화가 극에 달한 현재의 우주과학시대에도 과학에 떠밀려 치올라가기 때문에 신앙의 규모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므로 문제는 처한 환경에 따라 인간에게 어떻게 봉사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윤리는 동전의 표리와 같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꼭 붙어다녀야 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셋째, 현각은 외형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된 것 같지만, 그가 밝힌 바대로 현각은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도정신에 따라 불교로 전이됐기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개종이 아니라 기독교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시대의 종교는 현각의 기독교가 불교로 연장된 것같이 종교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채워주는 상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종교관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성(영성)과 도덕을 아울러 지닌, 같은 종교의 하나로서 서로 문화적 바탕이 다를 뿐, 모두가 각자 처한 인간적 도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하나의 종교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가 속해 있는 학문 문화를 영위하는 가운데 내가 또한 속한 바 종교에 입각하여 사랑과 공의, 겸손과 봉사와 희생을 그리며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주적 질서를 주관하는 하나님[天道]께 충성을 다하는 생활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