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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4 말씀
참 하나님 참 인간
본문 마태복음 5: 43~48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으로부터 시작해 예수의 말씀들이 길게 이어진다. 이 말씀들은 5:17의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을 예증하고 있다. 율법의 완성은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은 그 초자아성에 있지 않다. 법은 가혹한 처벌의 공포와 그 이면에 위반의 쾌락을 부추기는 이중성을 가진다. 이 이중성이 예수께서 비난했던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이 법을 형식적인 차원에서 지키는 한편 형식적 틀의 성긴 공간에서 은밀한 위반을 즐길 수 있었던 뒷문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며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라며 규탄한다. 율법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데 율법의 정수가 있다.
사랑이라고 하면 달달한 상상을 하지만,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3에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라고 권면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믿음은 행하는 것이며 사랑은 수고하는 것이고 소망은 인내하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 즉 사랑은 고된 노동이라는 말이다. 요즘 사랑을 노래하는 유행가는 대개 달달하게 들리지만 우리가 젊을 때 사랑 노래는 대개 눈물 바람이었다. 아마도 시대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랑의 정념에 휩쓸리지 않고 그 주변만 빙빙 돌다 보면 사랑은 달콤하기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다면 주체는 대상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바치게 된다. 있는 것을 줄 때는 안타깝고 없는 것을 줄 때는 고통스럽다. 그렇게 사랑은 주체를 비우는 행위다. 그렇게 사랑은 주체를 쾌락을 넘어 주이상스에 이르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는 말씀으로 운을 떼신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18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그러나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말씀은 율법에 없다. 그러나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율법에 없는 말씀을 덧붙이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웃 사랑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그보다는 “너희가 그렇다고 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반 백성들이 이웃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 즉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 이웃 사랑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반적인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웃 사랑은 원수 증오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원수를 증오한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라고 알려졌던 것이다. 이웃은 사랑해야 하고 원수는 증오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통념이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이웃 사랑 율법에 관해 논하면서 이런 통념이야말로 정상적인 정신성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이웃은 그가 존경하거나 사랑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아니 그를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가치로 나를 매혹하지 못하거나 내 감정생활에 아무런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내 사랑이 내가 그들을 더 좋아한다는 표시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며,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정도로 낯선 사람에게도 사랑을 준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역시 벌레나 지렁이나 뱀처럼 이 지구상에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 사람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면, 내 사랑 중에서 그에게 돌아가는 몫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이와 같은 생면부지의 사람은 단지 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만이 아니다”라고 쓸 때,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나는 그런 낯선 사람은 나의 적개심과 증오까지 불러일으킨다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는 나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를 해치는 것이 이로우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나를 해칠 것이다. 자기가 얻는 이익이 나에게 끼치는 손해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어떤지도 생각해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를 해침으로써 이익을 얻을 필요도 없다. 자기 욕망을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그는 나를 비웃고 모욕하고 중상하고 자신의 우월한 힘을 과시하는 것을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나를 해쳐도 자신은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태도를 취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 즉 나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사람, 따라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나를 이용해 먹고 비웃고 모욕하고 중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거리낌 없이 나를 해칠 수도 있는 사람에게 적개심과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을 원수라고 생각한다고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는 프로이트의 주장이 지각없거나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물며 프로이트는 반셈주의가 팽배한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다.
우리는 검찰 출신 대통령에게 이런 적개심과 증오를 느낀다. 이태원 참사 후 그가 희생자 가족을 만나 위로하는 일은 한사코 거부하면서 희생자들의 이름도 없는 텅 빈 빈소에 굳이 책임지고 자숙해야 할 행안부 장관을 대동하고 며칠에 걸쳐 조의랍시고 와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볼 때, 그의 아내가 자신이 기르는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때,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며 온 국민을 귀머거리 취급할 때, 국민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며 일본과 미국에 퍼주면서도 굽신거리며 이를 외교적 성취라고 강변할 때, 자신과 대적하는 사람들은 검찰을 동원해 철저하게 털어내 없는 죄도 만들어 내면서도 자신의 가족과 일당들의 비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때,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의 처지를 돌아보기는커녕 그들을 가혹하게 짓밟으면서도 동물복지에 앞장설 때 그의 무도하고 뻔뻔한 얼굴에서 증오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도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이 검찰 출신 대통령 같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일까? 그가 저항하는 노동자의 머리에 곤봉을 휘둘러 피 칠갑을 만든다면 또 다른 노동자의 머리를 그의 곤봉 앞에 들이밀어야 한다는 말씀일까? 그가 권력을 남용하면서 지나치게 폭력을 휘두를 때 행여 그의 몸이 상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일까?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바리새인들에게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퍼부으시고 성전에서는 채찍을 휘두르면서 장사치들의 좌판을 뒤엎으셨을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은 분명 통념을 전복시키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 무엇에 관해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님께 종종 들었던 “자식이 아니라 웬수”라는 말을 통해 접근해보자. 여기에는 한편으로 그들 자신 욕망을 가진 필부필녀이면서도 가족 이데올로기에 호명되어 힘겨운 부모 노릇을 해야 하는 평범한 인간의 힘겨움과 고통이 있다. 그러나 분명 끔찍이도 사랑하는 딸 아들을 향한 과도한 수고의 주이상스 또한 없다고 할 수 없다. 자식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은 물론 가지지 않은 것까지 오롯이 내어주는 좋아서 하는 희생, 이것을 주이상스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할 것인가? 이런 ‘웬수’ 사랑에서 부모라는 존재는 삶이 ‘나’라는 좁은 경계를 넘어 가능해지는 진정한 인간적 차원을 체험하며 성숙해 가는 것이다. 쾌락이 유기체가 자기 존재의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느끼는 긍정적인 체험이라면 주이상스는 인간이 자기라는 경계를 해체하면서 느끼는 부정성과 긍정성이 혼재하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이상스는 늘 죽음충동과 쌍을 이룬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의 자식들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나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늘 아버지께서 내려주시는 비가 동일한 목적, 즉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즉 아버지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비를 내려주시지,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목적을 위해서 비를 내리시지 않는다. 악한 자는 하나님의 선의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 아버지가 내려주시는 비는 불의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의 목적은 불의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착하고 의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은 있어도 존재 자체가 선한 인간은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착하고 의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자신은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착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의 노력은 가상하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과는 한참 소원하게 된다. 예수께서 미워하시던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의로움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무심하다. 그는 자신이 의롭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가 의롭건 의롭지 않건 그를 인정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꺼이 윤석렬 대통령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그의 기만을 폭로하고 오만을 무너뜨리며 그의 몽둥이를 꺾어버리고 권좌를 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완성하시는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이 하나님을 인간이 되게 하고, 그 뜻을 받든 인간으로 하여금 기꺼이 십자가를 지게 했으며, 궁극적으로 무상한 세계에 부활과 영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웃,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의와 증오를 느끼는 존재를 사물이라고 보았다. 사물은 불가능한 실재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비존재,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달리는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사물(das Ding)이다. 라캉은 이 사물이라는 실재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외밀함 ex-timacy’이라는 단어를 고안했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것인 동시에 우리로부터 가장 소원한 어떤 것,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목에 걸린 가시,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찰나적으로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러나 우리가 그 사물과 완전히 소원할 때 우리가 결국 물리적인 세계, 즉 필연성의 세계에 갇히게 만드는 그것, 그것이 이웃이다. 우리는 이웃을 사물이라고 규정하는 정신분석학과 함께 성서의 이웃 사랑 계명을 새겨야 한다.
칼케돈 공의회(AD. 451)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으로 선언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의 삶을 항상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고 인간의 주체성을 구현했다는 선언이다. 관건은 이웃 사랑이다. 우리는 이웃과 하나될 수는 없지만 결코 둘이 될 수도 없다. 이웃은 부모에게 자식 같은 ‘웬수’다. 우리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지만, ‘웬수’는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