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고아처럼 느끼고 내가 나 아닌 느낌을 갖는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가 드는 때도 있다. 늦은 밤 퇴근길에 술 한 잔을 걸치고 불콰한 얼굴로 버스에 앉아, "오늘도~ 걷는다마는~" 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비몽사몽간에 차창에 비친 낯선 얼굴을 보고 누군가 싶어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라캉에 의하면 생후 6개월~18개월 사이의 유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저 수상한 존재가 무엇인지 의아해 한다. 나이와 신체적 능력에서 노년의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 내가 설마 정신적으로는 '거울 단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아해(亞孩)란 말인가.
내가 나 아닌 듯한 낯섦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분식된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세속적이고 경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일에 함몰되어 내면에서 소리치는 '참다운 나'로서의 삶이 아닌, 남에게 보이는 '페르소나(Persona)'로서의 허깨비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씁쓸한 방증이 아닐는지. 차창에 비친 얼굴이 생경하게 느껴진 것은 그것이 '참다운 나'였고 내가 그로부터 떠나있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참나(眞我)'의 추구를 중요시한다. 지면을 통해 접하는 높은 스님들의 말씀 요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참나'는 여여(如如)하며, 일상에 진리의 도가 있으니 목전에 진리 아닌 것이 없구나. 이를 깨우치면 용심(用心‧ 마음 씀)이 없어진다. 이것이 불성에 다름 아니며 이에 닿기 위해서 일생을 통해 수행, 또 수행할 뿐이로다." 참나가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스님은 그저 빙그레 웃음으로 답한다. 이심전심. 깨닫고 느끼는 것이지 말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헤아릴 수밖에.
기독교에서는 '나'와 '세상의 지혜'를 버리라고 권한다. 그리스도에게 나 자신을 맡기지 않은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 긍휼히 여긴다. 하느님에게 귀속함으로써 안식과 평안을 찾는 것이지 유한자인 인간이 무엇을 도모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헛수고에 그칠 뿐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복음서에 이르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좇으리라.' 불교에서는 '참나'를 구하다 보면 '망아(忘我)'에 이른다 하고 기독교에서는 처음부터 어리석은 나를 버리라고 가르친다. 순서의 문제이지 범인에게는 두 종교의 입장이 비슷하게도 느껴진다.
소설가로서 이 문제를 천착한 대표적인 작가는 헤르만 헷세다.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그의 모든 구도소설의 주인공은 '참다운 나에 도달하는 길 위에 서 있는 인간'이다. 불교적 관점의 헤세 역시 자기 자신에 이르는 도정의 험난함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모호하게 묘사할 뿐 자신과 합일된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딱 부러진 언급을 하지 않는다. '데미안'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야전 병원인 농가에서 해후한 후 데미안의 죽음을 통해 서로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참다운 나'에 도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참나'는 종교적 가르침이나 문학적 주제로 자주 변주되지만 어떻게 해야 그에 이르는지 구체적 방법론으로서의 설명은 찾기 힘들다. 결국 본인 스스로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참나'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나의 현존재에 대한 근본적 탐색이 선행되어야 함을 느낀다. 그것은 하이데거나 야스퍼스 같은 20세기의 지성들이 갈파한 실존에의 인식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식의 각성이 필요할 터이니 결국 '철학적 사유(Philosophieren)'와 맥이 닿아 있으리라. 타인에 속하지 않은, 내가 주인인 나의 삶을 찾아야 한다. 사물과 대상이나 타인의 삶에 나를 방기해 버린 것이 아닌 삶. 매순간마다 내 의지로 결단하고 내 자신을 세계를 향해 투기(投企)하는 삶.
'참다운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물질이 지배하는 눈가림의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이기도 하다. 저잣거리 우리네 삶은 늘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욕망의 본질은 그것이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을 중시하는 삶은 허구의 삶에 다름 아니다. 물질과 소유는 충일된 안정감을 주지 않고 겉모습만을 가꾸게 할 뿐이니 마음은 오히려 산란하다. 자신이 주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러한 삶에는 필연적으로 공허와 권태가 따르기 마련이고 물질이 제공하는 새로운 쾌락을 좇으며 그럴수록 더욱 삶이 황폐해지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일회성의 중시도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다. 일회적인 것에 비중을 둔다 함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을 포착하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예술의 효능과 감동도 일회적이어서 접할 때마다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삶과 죽음도 일회적인 것이다. 당연히 오늘과 순간도 일회적인 것이어서 중요하다. 어제와 내일보다 지금의 순간에 충실하고 보람 있게 보내야할 소이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상적인 루틴을 재점검하고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일도 필요하다. 반복되고 되풀이 나타나는 현상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되풀이 되고 있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삶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할는지도 모른다.
그밖에 단편적이나마 다음과 같은 실마리는 '참다운 나'와 대면하기 위한 의식의 각성에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를테면, 나누고 덜어내는 삶의 추구. 은혜 갚기. 봉사와 헌신. 좋은 인연 쌓기.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연습. 마음 속 심연과의 근접 조우.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행위.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방식으로부터 떠나오기. 그러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나아가는 일. 때로 철저히 좌절하기. 그런 연후 헤엄쳐 나올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는 일. 참고 견디는 과정이 희망 그 자체일 수 있으니까.
'참다운 나'의 모습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일까. 나의 본질은 무엇이며 나의 좌표와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여야 할까. 그런 연 후 나와 다른 것(他者)과의 진정성 있는 관계 맺음이 가능할 텐데. 나를 향한 순례 길 입구에서 여행 채비를 하다 말고 그런 질문을 언제 했느냐는 듯 다시금 천연덕스럽게 일상의 분주함에 복귀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언제쯤 정신적 유아기를 벗어나 내 존재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성숙한 경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일까.
(김창식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