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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밀양>을 보고나서, 때를 맞추어 이창동 영화 dvd컬렉션도 나온 차, 이창동에 대해서 새삼스레 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소지》와 《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나는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아직은 드러나지 않는 영화감독 이창동의 떡잎을 찾고 있었다. 읽어가면서, 그래 많은 말을 하진 않지만,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이창동은 정직하다, 솔직하다는 걸 느끼면서 읽게 되었다. 이번 글은 그 중 왜 그토록 그는 광주를 자리에 두는가에 대한 생각과 버무림/뭉개짐 없는 차이로 가능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아닌, 결코 나일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읽게 되었다. 몇몇 작품을 통해 짧게 얘기해본다.
그에게 광주는 어떤 곳인가? 한자어인 광주를 한글로 풀면 빛고을이다. 한자어인 밀양을 한글로 풀면 비밀의 볕이다. 광주이건 밀양이건 빛과 연관된 지명을 통해서 그는 그 다음을 얘기한다. 그에게 광주는 사실상 이러한 빛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빛이 나오기 전 어둠이기도 하다. 그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세상은 기억이 있고, 죄가 있고, 균열이 있고, 사랑이 있고, 더러운 똥이 있고, 낮은 희망이 있다.
1985년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읽으며, 이창동은 이건 광주에 대한 속죄로서의 글, 비겁한 시대를 사는 자들이 읽어야 할 소설로 읽었다. 그와 유사한 작품, 아마도 <벌레이야기>로부터 나온 이창동의 작품은 <불과 먼지>일 듯하다. 1987년 작이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어 가정의 달이기도 한 5월, 아이는 시장에서 엄마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날, 아이가 트럭에 치여 죽게 된다. 그후 1년이 지난날, 그러니까 아이의 기일이다. 그날이 <불과 먼지>의 내용을 통해 보여진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의 기일, 옆에는 아내가 있지만 아내를 보기에는 붉은 꽃을 고사리같은 어린 손에 들고 가버린 아이를 차마 잊을 수가 없어, 작중 화자인 눈이 붉다. 울지도 못한 붉은 눈이다. 눈병 걸린 것처럼. 친구는 그에 대해서 말한다.
"그대의 두 눈은 그대가 안은 카네이션 꽃처럼 붉었어라."
그 뒤 아이를 뿌린 한강을 찾지만, 1년 후의 한강은 아파트 개발공사로 먼지 속이다. 괴로워 찾을 수 없었던 그곳, 그곳은 잊혀지는게 아니라, 새로움이란 이름을 위해 먼지가 이는 곳이 되었다. 아예 찾아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찾은 이름모르는 낯선 아이를 통해 옆에 있는 아내를 보게 된다. 그게 <불과 먼지>의 내용이다. 붉은 눈은 붉은 가슴을 안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아내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소설에서 영화 <밀양>은 나왔을 것이다. 붉은 눈을 하얗게 해줄, 사람이 있더라, 빛이 있더라는.
그리고 한 작품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도 광주로 가는 길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손녀를 찾아 온 노파의 귀향길인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의 행태/추태를 통해, 스캔들을 캐러가는 기자인 경철 자신의 속물스러움을 보게 하는데, 노파의 아들은 광주항쟁으로 죽었다는 게 노파의 잎을 통해 나온다. 뜬끔없이.
“너그들이여. 바로 너그들이여. 우리 아들 쥑인 것은 바로 너그들이란 말여. 우리 아들이 워띠키 죽은 줄 아냐, 이놈들아. 하기사 너그 놈들은 벌써 까맣기 잊어뿔고 있겄지만, 나는 이날 이때꺼정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어야. 하이고, 어림도 읎제, 안죽 내 아들이 땅 속에서 눈을 못 감고 있는디. 억울하고 원통해서 썩지도 안 하고 있을 것인디. 너그 놈들이 내 아들 그렇게 만든거여. 너그 놈들 아니문 내 아들이 왜 죽었겄어.”( 32-33쪽,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버스 안에 탄 속물들은 곧 잊을 건 너무나 잘 잊어버리는 지금의 우리라고 할 수 있다. 간혹은 의협심이 불타는 학생, 출장간다고 말하지만 불륜냄새가 나는 남과 여, 자신의 아이만 챙기는 어머니가 버스 안 승객이다. 아들을 잃은 노파는 겨우 4시간정도 가는 버스 운행시간마저도,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한다. 소주를 돌리고, 노래를 하고, 그러나 버스 승객이 공동체일 수가 있을까? 처음에는 재미로 노파를 가만 두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는 게 현실이지 않겠는가? 노파의 행태, 경철에게 기어이 화장실을 같아 가자고 한 후, 휴게소에서의 휴식시간을 초과할정도로 화장실에서 아주 늦게 나와 경철이 자신을 버려두고 떠날지를 시험해보는 듯한 행태 이후 차에 오른 노파는 또 소변이 마렵다고 세워달라고 한다. 소변이 마려운데 고속도로라는 이유로 못 보게 하자, 버스 안에 앉아 소변을 누워버리는 노파의 행태를 통해, 기억하지 못하는 후대에 대한 모욕을 가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겪은 그들이 그걸 알까?...차내 방뇨 후 할머니는 힘센 남자에게 결박당해-안전벨트를 매어져- 의자에 앉혀지는데, 할머니는 그후 졸도해버린다. 그렇게 버스는 곡절을 겪고 드디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광주에 도착한다. 졸도한 할머니에 대한 어떤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끝내 밖으로 내지 못한 경철은 사람들 틈이 끼어 내린다. 노파에게 나는 낯익은 냄새를 맡고, 돌아갔을 때는 이미 노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이다. 역시나 이건 광주에 관한 작품이다.
이창동에게 광주는 뭘까를 의문해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오욕과 비겁과 희망을 같이 잉태한 원형질로서의 어둠의 도시? 그러나 그럼에도 볼 수 있게 하는 빛의 도시?
이창동의 영화나 소설을 통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다른 하나는 같은 시간의 싸움/충돌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인간의 다른 면면들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그 대립되는 그것들이 한 곳에서 버무려지는 게 아니라 둘다 공히 같이 간다는 것이다. 다만 소설은 그걸 보게 할 뿐이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둘이 있어 하나이기는 어렵다는 걸 보게한다고나 할까? 하여 어떠한 좌절에도 저 하늘의 빛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알면 도망치고, 알면 떠난다, 알아 움직인다는 정도이다. 이 다름은 사상이기도 하고, 계급이기도 하고, 자타이기도 하고, 남여이기도 하다.
<친기(親忌)>는 좌익사상에 빠져 결국 자식들의 앞날까지 망친 아버지와 자식들간의 끈끈한 연대,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묻게 된다. 연좌제에 묶여 출세라는 걸 할 수 없는 말단 공무원인 큰아들과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맑스에 물들어가는 대학생인 작은아들, 거기에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 아버지와 외삼촌을 신고해 결국 그 죄과로 홀로 외로이 살아야했던 전부인과 그의 아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그 이제껏 볼 수 없는 절름발이 아들을 따라 집은 떠난다. 혈육이란 뭔가?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개인과 개인이기도 한,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는 결국 그 혈연이라는 끈으로 엮어진다. 슬프고도 무겁게 말이다.
이와 유사한 태생적 아픔을 다룬 작품으로 <소지(燒紙)>와 <끈>과 <용천뱅이>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식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버진 한번도 가족을 생각하신 적이 없어요. 아버지야말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죠. 아버지가 가졌다는 그 이념이란 것도 아버지의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허공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이었어요. "(57쪽,<용천뱅이>)
그렇다면 이념에 희생당했다고 볼 수 있는 아버지의 세대의 말은 이것일 것이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당은 패배했으며 혁명은 실패하고 그 조직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 뒤에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되었나? 빨치산이 되어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사람까지 다 죽고 말았나? 우리가 섬긴 이념대로라면 죽지 않은 이상 이곳에 남아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어야 했제. 그러나 나는 그렇게 못했다. 그렇다고 이곳 체제에서 돈을 벌로 출세하며 가정의 안락을 지키지도 못했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그저 용천뱅이의 삶을 살 수배끼 없었능기라.”( 58쪽,<용천뱅이>)
작품 속에서 말하는 용천뱅이의 정의는 “미친 사람이란 뜻도 되고 천형의 문둥병자들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여하튼 성한 사람이나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들이라 할까......”로 말하고 있다. 젊은 날 뭔가 꿈꾸며 이상 세상을 꿈꿨지만, 그 꿈이 사라진 이후에도, 꿈과 헌실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사람으로 용천뱅이를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상과 현실이란 필연적으로 벌어진 그 틈에는 언제나 용천뱅이가 있고, 그 용천뱅이의 후예가 있다. 그런 차이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상과 현실이 서로 이해하며 서로 거리를 좁히는 것이지, 이상이 일방적인 승리를 하는 게 아니고, 현실이 압도적인 승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간격, 차이를 보게 하는 작품으로 <녹천에는 똥이 있다>와 <하늘燈>이 있다. 어머니가 달라서, 일단은 사는 게 우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준식과 학교 선생이었던 여선생에게서 태어난 민우는 어릴적부터 달랐다. 일하는 집 빵을 훔쳐 시장에서 행상으로 팔기도 한 어머니, 그걸 알고서 혹은 거기에 동조하여 망을 보기도 한 준식과 달라, 훔치는 건 나쁜거라는 논리를 따르는 민우, 그들은 달랐다. 태생적인 계급차이로까지 벌어진 형과 동생을 통해, 순수한 이상을 꿈꾸는 게, 한편으로는 그 이상아래 현실을 굳건하게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인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조금은 적대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녹천에는 똥이 있다>이다. 사는 게 먼저인 형은 급사를 거쳐 선생자리에 겨우 올랐고, 이제 겨우 조그마한 서민아파트를 장만했다. 이슬처럼 맑은 영혼의 동생은 이상적 이념을 좇아 사는데, 다른 사람의 고통은 모른 채 그 똥냄새나는 형 집에 숨어들어왔다. 똑똑한 민우는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수배중이다. 삶에는 똥이 있는데, 더구나 자신의 몸에서 만들어진 똥도 못 보는 이념의 허상, 나약함을 생각해보게 한다.
<하늘燈>을 읽으면서, 차이를 잊을 수 없는, 아니 차이란 없어질 수 없는, 차이를 아는 자의 성찰을 들은 기분이었다.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신문에 오르내리던 때, 정신혜는 시인이기도 한 교수의 허락을 받아, 합법적인 교내 집회를 주도했지만 “학내의 비민주적 문제, 학장의 독단적 운영, 졸업 후 발령 문제 등”에 관한 토의가 문제가 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당한 상태다. 사상이 투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신혜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생각에서, 탄광촌 다방종업원을 선택한다. 정학중이지만, 등록금을 내야만 휴학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돈을 벌자는 목적으로 다방 레지가 되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걸 세상이 단순히 그렇게 볼까? 뭔가 불순한 목적이 있어 위장 취업 했다는 죄목으로 정신혜는 잡혀들어가고, 급기야 성추행까지 당하는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나서 풀려난다. 그후, 그녀는 생각한다.
“ 내게 아무 죄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지금에 와서야 난 겨우 내 죄를 깨달았어요. 이제 내가 저지른 죄를 자백해야겠어요.
우선 내게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부터 잘못이었어요.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무감각함, 그 어리석음이 잘못이었어요.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었어요.
난 지금까지 한번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했어요. 노동자를 위해서 야학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이땅의 민중들이, 버림받고 핍박받는 이들, 내 이웃과 형제에 대한 진정한 아픔과 사랑이 없었어요.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그들의 분노를 나의 분노로 느낄 줄 몰랐죠. 이 사회의 모순과 악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항하여 몸을 던져 싸우지도 못했어요. 난 어떤 것에도 나 자신을 내던질 만한 정열을 느끼지 못했어요.
어머니에게조차 난 진정으로 사랑을 가지지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나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어머니에게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열심히 공부해서 어머니의 고통과 희생을 보상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끊임없이 어머니한테서 달아나려고만 했죠. 나는 아주 작은 것, 길가에 핀 꽃 하나에도 내 마음을 여는 데 인식했어요.
난 언제나 일인칭 단수로만 존재하고 생각하고 느꼈을 뿐이에요. 그것은 나의 친구, 이웃, 사회. 심지어 단 하나뿐인 어머니로부터도 너무나 멀리 떨어진 섬이었고, 감옥이었던 거예요. 난 바깥을 향해 끝없이 나를 구해달라고 소리치면서도 단 한번도 나 스스로 바깥을 향해 헤엄쳐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난 이제 겨우 내 잘못을, 구제받을 수 없는 죄를 깨닫습니다.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죄, 한번도 스스로 희망을 찾아보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죄.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274-275쪽)
그러고나서 그녀가 하는 일은, 탄광촌 광부폭동 주동자라고 하는 김광배를 찾아가서, 김광배의 고백을 듣는 일이었다. 김광배 역시 용천뱅이인 자신의 삶에 자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자신은 폭동주동자가 아니라, 밀고자였다는. 이제는 사상적 무장이 되기 어려움 삶의 비루함을 이제는 안 정신혜이기에 그녀는 그를 위로하고, 떠난다. 떠나면서, 신혜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새벽이었다. 마침내 어둠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저 멀리 하늘 한켠이 물고기의 등처럼 푸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머리 위의 하늘 한가운데서 반짝이고 있는 별 하나를 보았다. 그 별은 이제 곧 날이 밝으면 스러질 운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말긋말긋 빛나고 있었다.
누가 저 높은 곳에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를 켜두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녀는 오랫동안 그 별을 올려다보았다. 별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것은 그녀의 생애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경찰서에서 그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던 때에도, 김광배와 함께 있던 시간에도,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변함없이 자기 궤도를 돌고 있고, 우주 속의 저 별은 외롭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신혜는 얼음을 뒤집어쓴 것 같은 오한과 함께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가 혼돈을 뚫고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늘에는 저 별이 있고 나는 여기 이렇게 서 있다.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저 별의 자리를 빼앗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내 가슴속에도 어떤 세상의 힘으로도 빼앗지 못할 별 하나 있으니라. 그래, 난 이렇게 살아 잇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감정이 벅차도록 가슴에 파고들었다. 문득 그 별이 그녀의 눈앞에까지 날아와 부서졌다. 어느샌가 까닭을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289쪽)
<하늘燈>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창동의 현실의 끈질긴 힘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자, 모든 것을 버리고 날아오르자”는 결국 현실에서 가능한 게 아니라, 죽음 이후에 가능하다는 걸 인정한 성찰이라고나 할까? <전리(戰利)>에서 "존재는 곧 고통이요, 고통이 곧 존재란 말씀이다."( 326쪽)라고 간경변을 앓고 죽음에 이르게 될 김장수는 말한다. 아프면 몸의 실체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통이 있을 때, 머리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것, 언제나 존재하는 신체의 일부지만, 정작 인지하게 되는 때는 고통의 그때라는 것이다. 삶 역시나 혹 그런 것은 아닐까를 묻는다, 고통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는 삶이라고. 하여 정신혜는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가는 일개인의 삶처럼,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똑같이 비닐 가방 하나만을 손에 들고 역을 향해 뛰어갔다.”( 290쪽), 뛰어간다. 사람은 나는 존재가 아니라, 걷고 뛰는 존재다.
다음에 나오게 될, 아니 언젠가 시간나면 또 보게 될 이창동의 여러 영화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본 이창동의 소설집은 내가 사는 곳이 똥이 많은 녹천이라는 것과 더불어 그 가운데 빛(볕)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하여 눈물 흘리며 하늘등을 바라보는 내가 있음을 공히 생각하게 했다. 나와 그들은 수없이 다양한 여러 갈래로 이미 갈라서있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도 더불어.
물론 다르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걷고 뛰어가는 조건에 있어 다르지 않는 존재라고 것과 함께 결코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때론 뒤돌아봐야하는 인간에 대해서 이미 갈라져 고독한 개인이 다르면서도 같이 눈물 흘리는 존재라는 것, 하여 이창동은 소설과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역시나.
2003년 가을, 《소지》신판을 내면서, 이창동은 쓰고있다. 요즘은 확성기나 신문을 통해 자신이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을 누군가가 듣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소설을 쓰던 그때는, 지금으로서는 낯설고 쓸쓸하게 와닿지만, 그때는, 얼굴 모르는 그 누군가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 소통이란 게, 최소한으로는 과거의 글을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이 십여년이 지나서 읽는 소통일 수도 있지만, 그 소통을 향한 믿음 그것이야 말로, 이미 갈라져있는/갈라서있는 개인과 개인의 삶에서 문화가 되는 것들의 소박한 꿈이 아닐까?...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이창동, 《소지》, 문학과 지성사, 1987년
이창동, 《녹천에는 똥이 많다 》, 문학과 지성사,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