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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더운 때를 골라 땀으로 목욕한 산행
백두대간 18구간(작은차갓재에서 죽령까지)
1. 산행일시 : 2004년 8월 7,8일(토,일요일) 날씨 : 맑음
2. 참 가 자 : 김명자, 김찬석, 노승애, 박봉하, 안상경, 유선만, 윤희원, 이용준, 이태인, 조규연, 조재방(11명)
3. 산행일정
(1) 8월 7일 : 작은차갓재 ~ 저수령
(2) 8월 8일 : 저수령 ~ 죽령
4. 산행일기
♣ 수원출발(07:00)
0 북문팀 : 김찬석, 박봉하, 윤희원, 조재방(윤희원사장 차로 이동)
0 권선고 : 김명자, 노승애, 안상경, 유선만, 이용준, 이태인, 조규연(이용 준, 이태인 차로 이동)
♣ 수안보(아침식사)
[서청주해장국집]에서 ‘올갱이 해장국, 콩나물 국밥’으로 아침 식사 및 점심 도시락 준비
♣ 산행 종합
● 오늘 산행은 좀 늦은 시간(07:20분경)에 시작되었음.
● 대간 산행 중 참여 인원(11명)이 가장 적었음(일반산행 수준)
● 주로 1000m 이상에서의 산행과 藥주고 病 주는 령과 재를 거듭 오르내림
※ 1000m 이상의 산 : 14개 / 900m의 산 : 2 / 800m의 산 : 1
황장산(1077.3m)/감투봉/985봉/봉치마바위봉(1004m)/928봉/823m봉/1,020m봉/문복대(운봉산,1,074m)/옥녀봉(1077m)/촛대봉(1080m)/투구봉 또는 시루봉(1110m)/1,084봉/흙목정상(1033m)/솔봉/모시골정상(1103m)/묘적봉(1148m)/도솔봉(1314m)/삼형제봉/1286봉
※ 령(嶺 ) : 3 / 재 : 9 (약주고 병 주는 곳)
작은차갓재(816m)/황장재/폐맥이재/벌재/돌목재/장구재/저수령/배재/싸리재/뱀재/묘적령(990m)/죽령
● 가장 더운 시기에 산행을 함(10년 만에 찾아 온 더위, 연일 33도 이상의 불볕더위)
● 최고의 숙소에서 분에 넘치는 식사(소백산 관광 농장)를 했음
● 평소 연습을 게을리 한 탓으로 멀고 길고 지루한 산행을 함
♣ 구간별 산행 중 있었던 일
8월 7일(토요일) 맑음
◈ 산행 시작(안생달리)
문경 온천을 경유하여 안생달리로 향했다. 지난 산행 때 내려온 길이지만 다시 보니 새롭고 골을 따라 흐르는 냇물이 더 맑고 시원해 보인다. 골이 깊고 맑은 물이 있는 곳이라 피서객이 붐빌만한데 별로 눈에 뛰질 않는다. 아마 경기 불황으로 찜통더위를 참으며 집에서 피서를 하나보다.
11시를 좀 지나서 안생달리 『한백양조장』 앞에 도착했다. 지난 번 산행 때 하산하면서 술도 사고 도움을 받았던 곳이라 양조장 아저씨 우리를 알아보고 반긴다.
◈ 작은차갓재
신발 끈을 졸라매고 곧 바로 작은차갓재로 출발. 예정시간(10시 30분)보다 1 시간 반이나 늦었다. 산행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아무래도 이번 산행은 暴炎으로 고생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유선만교감, 선두에서 뚜벅뚜벅 잘도 오른다. 약 30여분을 걸어 작은 작은 차갓재 도착(12시경), 잠시 휴식. 예정 시간보다 늦었지만 오늘은 산중에서 하루 머물기 때문에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 묏등바위
작은차갓재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황장산으로 향했다. 오늘 산행의 첫 관문이다. 낙엽송 길을 좀 벗어나면 헬기장이 있고 산이 가팔라지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10여분도 걷지 않았는데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모자 창끝에는 물이 뚝뚝 떨어진다. 배낭의 무게도 점점 더해진다. 열심히 땀을 훔치며 다다른 곳이 큰 암벽, 로프를 잡고 약 5m 정도의 벽을 오르니 전망이 툭 트인다. 묏등바위다. 먼저 온 대원들이 쉬고 있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조망도 하고 잠시 휴식. 산악 대장의 오늘 산행 안내.
오늘 산행의 목적지는 저수령, 숙식은 저수령 휴게소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소백산 광광 목장』, 중간 탈출로, 차량 이동 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자기 체력을 안배하며 산행 당부.
출발. 늘 그렇듯 先․後尾 팀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산악대장 이용준, 유선만, 노승애선생님, 그리고 늘 후미로 산행을 하던 조사장 차량 이동관계로 앞서 가고 나머지( 김명자, 김찬석,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태인, 조규연) 가다 수시로 쉬는 팀이다.
묏등 바위에서 황장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칼능선 암릉 지대로 다소 위험이 따랐다. 묏등바위를 지나면 수직 바위가 나타나고 바위 우측을 돌아 난간을 지나야 황장산 정상을 오를 수 있다. 큰 바위를 돌려 로프를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줄을 잡고 바위를 조심스럽게 타고 지나면 별 위험은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야할 구간이다. 난간 구간을 지나면 평탄한 소나무 능선 길로 이어지는데 좌우 폭이 너무 좁아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로프를 설치해 두었다.
灼熱하는 태양, 찜통 같은 더위지만 숲이 하늘을 가리고 1000m의 높이라 바람은 없어도 한결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 황장산(鵲城山)
땀을 쏟으며 1077.3m의 황정산 정상에 오른 것이 13시 30분. 이제부터는 4~500m를 계속 오르내리면 된다. 체력이 버텨 줄지 모르지만.
황장산 정상에 올라보니 참나무 숲 그늘이 있는 쉼터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로 황장산 표지석이 서 있으며 앞쪽에는 넓은 헬기장도 있다. 표지석 앞쪽에는 『황장산 1077m』라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는 『새재 산악회』, 우측에는 『원명 鵲城山 』으로 되어 있다.
우선 얼음물로 목을 축이고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한 후 황정산 표지석을 중심으로 단체 사진 촬영.
황장산은 황정산(黃庭山)으로 국립지리원 발행 1:25,000 지형도에표기되어있고,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예천군읍지'에는 작성산(鵲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경군지'(1994년 10월판)에는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황장산(1077.3m)은 춘양목(春陽木)과 쌍벽을 이루며 좋은 목재의 상징처럼 여겼던 황장목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황장목은 나무속이 노래 그런 이름이 붙었고, 목재의 균열이 적고 단단해 대궐을 지을 때나 임금의 관(棺), 선박 등을 만드는데 쓰였다고 한다.
이런 목재의 중요성으로 인해 조선 숙종때(1680년) 이 산에서 일체의 벌목과 개간을 금지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감시했고 하며, 당시 세워진 봉산표지석이 명전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대간 산행 길이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통해 안 것이라 참고삼아 소개를 한다. (지금은 질 좋은 소나무는 거의 없고 참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는 듯 하다.)
【참고자료】 황장산 봉산 표석
◑ 소재 :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수평리
◑ 문화재 자료
◑ 상세설명
봉산(封山)이라함은 왕실 및 정부(政府)의 필요에 따라 궁전, 자궁(임금, 왕대비, 왕세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관), 선박 등의 용재(用材)를 제공하기 위하여 수목의 식재에 가장 적당한 지역을 선정하여 정부가 그 구역을 직저관리 보호하여 온 것을 말하며 왕실 및 국가의 건축용 목재를 얻기 위하여 각도에 설치한 봉산(封山)이 있었는데 이 황장봉산에는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경상도 전라도는 10년에 1개, 강원도는 5년에 1개를 취한 것 중에서 자궁을 선택 결정하였지만 그 수효는 수시 결정하되 경상도 7읍(邑), 강원도 22읍은 내자궁판을 취하고 전라도 3읍은 외자궁판을 취하였다고 한다.
동로면 적성 생달 명전리 경게에는 높이 1077.3m의 황장산이 소재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나무는 재질이 우수하여 봉산(문경현지에 강희경신(1680년)에 시봉되었다고 기록)되었고 이 봉산표석은 동로면 간송리 하정학씨가 발견하여 1990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명전리 마을입구 하천변 제방 위에 세워져 있다.
◈ 감투봉과 황장재
휴식과 사진촬영으로 잠시 땀을 식히고 다시 출발했다. 황장산에서는 투구봉 쪽으로 가는 길과 대간 길로 나누어지는데 대간 길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야 한다. 정상에서 내리막을 내려오면 칼날 같은 능선을 지나게 되는데 톱날같이 생겼다하여 『감투봉 톱날바위(30여m)』라고 하며 바위 윗면을 잡고 우측 바위틈새를 딛고 지나가야 한다. 조심해서 걸어야할 구간으로 눈비가 오면 사고를 당하기가 나기 쉬겠다. 선두 팀은 어디쯤 가는지 보이지도 않고 야호! 소리를 쳐 봐도 대답이 없다.
감투봉을 넘으니 급경사로 이어진다. 황장재(985m,) 도착(14 : 25분). 표지판(문안골 가는 길)을 확인하고 계속 걷기를 30여분, 아침 식사를 늦게 했지만 산행을 시작하여 4시간을 걸었고 14시 30분이 되어 배도 고파오고 발걸음도 무거워 진다. 어디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늘진 후미진 곳을 찾아 자리를 정하고 도시락을 꺼냈다. 흰 밥에 서너 가지반찬, 덤으로 고추장에 풋고추를 곁들이니 밥맛이 그만이다. 윤희원사장님, 김명자선생님 후식으로 참외와 천도복숭아를 꺼내 놓는다.
◈ 치마바위
점심시간이라 30여분을 넉넉히 휴식으로 보내고 다시 출발. 작은 봉을 넘으니 岩陵 길로 이어진다. 조사해 온 산행 지점 표를 보면 치마바위가 나타나야 하는데 치마 형상을 한 바위는 보이지 않고 큰 소나무 한 그루와 우측에 큰 바위가 단을 이루고 있다. 산모롱이를 돌아 온 곳을 되돌아보니 암 벽이 넓게 펼쳐 있다. 치마바위란다. 그러고 보니 아래 부분은 넓고 윗부분은 좁으며 지나올 때 본 암릉은 허리부분의 줄음 잡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본 암벽의 높이는 족히 100여m는 훨씬 넘을 것 같다.
능선 갈림 길. 나무에 작은 표지판을 달아 놓았다. 『현위치 928m, ← 황정산, ↑방곡리, → 벌재』라 표시되어 있다(16 : 40분).
◈ 벌재(623m)
급경사 내리막길. 폐맥이재, 헬기장을 지나 급한 내리막을 내려오니 넓은 아스팔트길이 나타난다. 벌재(623m, 17 : 10분) 표지판이 크게 세워져 있다.
오랜만에 대간 산행에 참석한 김찬석사장 점심 전에는 힘들어하더니 우리보다 빨리 내려와 벌재 계곡에 흐르는 물로 땀을 닦고 느긋하게 쉬고 있다. 얼마나 반가운 물인가. 준비해 온 물 두병을 비운 터라 우선 빈병에 물부터 채우고 자갈 틈 사이로 흘러나온 물로 세수를 하고 새까맣게 땀으로 절은 수건도 맑은 물로 헹구니 산행의 고단함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 같다.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벌재까지 함께했던 다른 산행 팀 2명은 이곳에서 미리 준비된 차로 떠나고 안상경교감선생님도 오늘의 나머지 구간을 포기를 했다. 1박 2일의 산행이기 때문에 중간 탈출 대원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좀 아쉽다.
나머지 5명(김명자, 김찬석, 박봉하, 윤희원, 이태인, 조규연)은 오늘 기착지 저수령으로 출발(17 : 30분)했다
◈ 門福臺, 玉女峰, 소백산 관광 목장
아스팔트길을 가로질러 산을 조금 오르면 페타이어로 배수로를 만난다. 그리고 5분 정도를 더 내려오면 월악농장으로 가는 시멘트 길을 만나게 된다.
능선을 타고 산을 오르니 산불 감시탑(18 : 00분)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휘어 오른 곳이 828봉이다. 828봉에서 다시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내리막을 내려온 곳이 돌목재(18 : 10분). 잠시 휴식.
돌목재에서 가파른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오른 곳이 1020봉(18 : 50분)인가보다. 시간이 18시 50분을 넘고 있다. 서산을 아직 넘지 못한 해가 빨갛게 달구어져 있다. 뒤 따라 오는 대원(김명자, 이태인)도 기다릴 겸 지는 해를 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붉은 색깔이 점점 짙어지더니 누가 급히 당기기라도 하는 듯 이내 球(해)는 산 너머로 굴러 떨어지고 (19 : 10분) 붉은 잔해만 넓게 퍼져 있다. 지는 해를 찍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봉에 오른 이태인 총무. 간발의 차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산속이라 쉬 어둠이 찾아드는 것을 걱정한 윤희원사장과 조규연선생님(후렛쉬를 준비하지 않음) 급히 배낭을 챙겨 떠나고 우리도 뒤를 따랐다. 아직도 문복대(1074m), 옥녀봉(1077m)을 올라야 저수령 내리막길로 들어설 수 있다.
산을 오르며 날파리와 한바탕 전쟁. 해질 무렵의 마지막 시위인가? 아니면 잠자리를 방해한 앙갚음인가? 눈, 귀 코, 입으로 사정없이 달려든다.
門福臺 標識石(19 : 47분). 어둠이 짙어 겨우 문복대 글씨만 확인("백두대간 門福臺 1,074m")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아직도 1077봉 옥녀봉을 넘어야 한다. 점점 조급해 진다. 그래도 길이 조금이라도 보일 때 더 많이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뒤따르는 사람들을 생각지도 않고 걸었다. 앞에 높은 봉이 있는데 아래로 지나간다. 아마 옥녀봉을 비켜가나보다. 완전히 어두워져 더 풀로 덮인 길을 찾아 나갈 수가 없다. 후렛쉬를 켜니 길이 구분이 된다. 안심이 되었다. 앞서 간 대원들을 불러보지만 얼마나 갔는지 대답이 없다. 뒷사람들이 걱정이 된다. 잠시 담배 한대 붙여 물고 휴식 겸 대기.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 좀 더 가 본다. 또 대기. 10여분이 지나서야 후미 팀과 상봉. 잠시 휴식. 계속 내리막길이라 걸음도 빨라진다. 아뿔사. 쉴 때 지팡이를 두고 왔다. 積善이라 생각하자.
시멘트 길. 황색 작은 표지판. 『장구재』라 표시되어 있고 저수령은 20분이 소요된다고 표시되어 있다. 작은 봉을 넘어야 되나보다. 기력이 소진하고 저녁 9시를 넘긴 터라 봉을 넘고 싶은 念이 없다. 불빛이 번쩍이는 곳이 『소백산 관광 목장』인가보다. 산악대장에게 전화로 확인 후 큰길을 따라 내려갔다. 마지막 작은 봉을 넘어 저수령 까지 가지 못한 총무님의 아쉬움. “돌아가는 길도 백두대간 길이다”라며 김명자선생님의 볼멘소리. 너무 지쳤나보다.
소백산 관광 목장에 도착한 것이 21시 20분. 먼저 도착한 산악대장, 조재방사장, 유선만교감은 차를 鳥嶺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떠났고 노승에선생님이 우리를 반긴다. 숙소로 안내. 급한 것이 땀을 닦는 일이다.
방도 넓고 샤워실 겸비되어 있어 대간 산행 중 또 한 번 호강을 누리는 숙소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불판에 소고기가 익어가고 소주잔이 순회를 하고 있다. 내일 얼마나 고된 산행을 시키려고 이런 융숭한 상차림을 해 두었는가? 윤사장님 술기운이 오르나보다. 서빙하는 연변 아주머니와 弄이 오고간다.
8월 8일(일요일) 맑음
◈ 산행 준비
어제 약간의 과음 때문 이였는지 고단한 중에도 목이 말라 잠자리에서 두 번이나 물을 찾아 마셨다. 5시 기상. 간단한 세수. 배낭을 꾸려 1층 홀로 내려와 김찬석사장과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셨다. 김사장. 오늘 산행 포기. 산행을 하다 중간 탈출로를 이용 할 것을 몇 번 권유를 해도 끝내 응하지 않는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밤새 불을 찾아 날아든 매미의 주검이 너부러져 있다.
저수령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06시 경) 후 경상북도 標識石을 중심으로 기념 촬영.
◈ 저수령
[저수령(低首嶺)유래비]
이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로한 도계(道界)지점으로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이 고개이름을 저수령(850m)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여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리워 졌다고도하며 한편으로 는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 개를 넘는 외적(外敵)들은 모두 목이 잘려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927호로1994년도에 개설완료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있으며 남쪽(예천방향) 1.6Km 아래 지점에는 멀리 학가산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경상북도와 예천 군에서 쾌적한 휴게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1997년 10월29일. 건립:경상북도지사,예천군수. 글씨:초정 권 창륜
◈ 촛대봉
신발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오늘 산행 시작.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어제 산행의 피로가 남아 있고 다리도 뻐근하다. 오늘은 산행 거리가 더 멀다는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거대한 경상북도 표지석을 중심으로 단체 기념 촬영을 한 후 버려 둔 나무 지팡이를 주워 들고 산행 시작. 뒤에서 부르는 소리. 아침 식사를 제공한 저수령 휴게소 아저씨가 뛰어 나와 왼쪽 방향을 가리킨다. 방향을 잘 못 잡은 것이다.
『용두 휴게 공원』 펫말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올라 정상에 도착한 곳이 『촛대봉, 07 : 40분』. 이름값을 할만 하다. 30여 분간의 산행인데도 온 몸이 땀이다. 『촛대봉 1081m ←수리봉, ↓대강면, →배재』표지판. 먼저 올라 온 유교감, 앞에 있는 바위를 가리킨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살모사(까치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요즘 뱀 보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 일진이 좋을라나. 지팡이로 건드리니 풀 속으로 사라진다. 옥녀봉, 문복대 산허리로 구름이 걸쳐 있고 산 아래로 저수령 휴게소와 소백산 관광 목장이 그림같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쁜 숨을 고른 후 곧 출발. 공터를 지나 조금 가니 "촛대봉 500m/고비밭,싸리밭"라고 새겨진 안내 펫말을 지난다. 고사리와 고비가 어떻게 다른지 늘 궁금했는데 오늘 보니 고비는 잎이 고사리보다 딱딱하고 윤기가 더 있어 보였다. 내년 봄에는 고비로 나물 반찬을 해 먹어야겠다. 그때 모양을 구분하고 뜯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
◈ 투구봉에서 묘적령까지
봉 모양이 투구같이 생겨 투구봉이라 했는가? 능선을 따라 산행을 하다보니 모양은 확인할 길 없고 예천군에서 세운 『소백산 투구봉(1080m)』 안내 표지판(만 확인하고 전진.
헬기장, 시루봉(1110m, 08 : 50분) 또 헬기장을 지나 1,084봉을 내려서니 『배재』펫말(09 : 10분, 싸리재 950m, 야목마을 2.5km, 투구봉 2.0km). 잠시 휴식. 또 다시 높은 봉(1053봉?)을 내러 서니 싸리재 이정표("원용두마을 2.66km/배재 950m/흙목정상 1.2km")가 있다. 어제의 피로의 누적으로 점점 지루하고 앉아 쉬고 싶은 생각만 든다. 윤희원사장은 예정 시간을 한 시간 앞당길 요량인지 일찌감치 선두 그룹에 끼고 나와 안상경, 조규연, 조재방사장은 중간 총무와 김명자선생님이 후미에서 따라오고 있다.
산행이 힘든 탓인지 쉴 때마다 산행 진행표와 지도를 펴고 현 지점을 확인하게 된다. 잠시 쉰 곳을 흙목정산이라 생각 했는데 좀더 가서야 흙목정상(10 : 10분경, 1033.5m) 이정표("흙목정상/싸리재1.2km/헬기장2.0km/임도550m")를 만날 수 있었다. 급경사를 내려오니 완만한 갈대밭 길로 이어진다. 걷기 20여분. 거대한 송전탑이 나타나고 흙목정상 아래쪽으로 송전탑이 연이어 있다.
헬기장(뱀재로 추측, 이정표 "모시골 정상1.95km/흙목정상2.0km")을 지나 잠시 휴식(11 : 20분). 앞에 보이는 산의 정상에 올라 점심을 먹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힘을 끌어 모아 산 정상으로 오른다. 12시가 가까워 오고 있다. 모시골 정상 이정표(묘적령1.7km/헬기장1.95km/모시골1.7km). 잠시 휴식. 점심을 먹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좀더 가잔다. 아직도 힘이 남았다보다. 묘적령까지 1.7km니 앞으로 4,50분을 더 가야 점심을 먹을 수 있겠다.
힘들어하는 안상경교감선생님을 앞세우고 나무 지팡이에 의지해서 도착한 곳이 묘적령(모시골정상1.7km/모래재1.95km"). 선두대원들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2시 45분경이니 50여분은 먼저 도착했나보다. 점심시간. 이제 좀 느긋한 휴식을 가질 수 있겠다. 열나는 발바닥도 식히고 피로도 풀기 위해 등산화를 벗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점심식사. 모두 별 말이 없다.
◈ 묘적봉
안상경교감선생님 중간 탈출 결정, 조규연선생님 갈등. 후미 팀은 어디쯤 오는지 알 수없다. 시간은 가고 갈 길은 멀어 느긋하게 쉴 여유도 없이 다시 출발. 윤사장님도 지쳤는지 선두에서 중간 팀과 합류.
가파른 오르막 길. 지팡이 하나를 더 구해 둘로 집고 가야겠다. 자꾸만 주저앉고 싶다. 힘들게 힘들게 묘적봉("묘적봉 1148m "명판) 정상에 도착(13 : 45분)했다. 기운이 소진하여 윤, 조사장 먼저 가고 가쁜 숨을 잠시 고른 뒤 다시 출발했다.
◈ 도솔봉
나무 지팡이 하나를 더 구해 산을 오르니 다소 수월하다. 뒤따르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윤사장과 조사장이 그늘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 잠시 휴식. 생나무를 잘라 다시 지팡이를 만들었다. 쉬는 횟수도 잦아진다. 멀리 도솔봉 정상이 보이고 우리가 앉아 쉬고 있는 뒤로는 큰 암벽이 있는데 마치 장수의 갑옷 같다. 이름 없는 바위에 『갑옷바위』라 이름 지어주고 다시 출발.
가다 산꾼을 만나다. 나무 지팡이에 가벼운 차림이다. 아마 약초를 채취하나보다. “도솔봉까지는 좀더 힘을 써야합니다. 조심해서 가시오” 인사를 남기고 노래를 부르며 유유히 내려간다.
조사장은 힘이 남았는지 먼저 도솔봉정상 아래 바위에 올라 더딘 우리의 걸음을 재촉한다. 가파른 바위 길. 다른 사람들의 종주기에는 로프를 타고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계단이 설치되 있어 오르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계단 끝 암봉에 오른 것이 14 : 50분. 지금까지 산에 가리고 나무에 가렸던 시야가 툭 터진다. 중부 고속도로가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고 풍기 시가지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이며 논밭의 푸른빛이 산 아래로 퍼져 있다. 한마디로 자연 그대로의 풍경화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두 팔을 벌리고 바위 끝자락에서 뛰어 내리면 그대로 풍기 시가지 내릴 것 같다.
감동과 아름다움을 눈에만 담고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도솔봉 정상으로 향했다.
도솔봉 정상에도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오르기가 수월 했다. 정상은 일반산행 때(2004. 5월) 오른 적이 있기 때문에 정상명판("도솔봉 1314.2m"란 표기와 죽령-사동리-묘적봉의 방향)과 돌탑만 확인하고 바로 하산(15 : 15분)을 했다. 오늘 산행 중 가장 큰 고비를 넘긴 것 같다.
◈ 삼형제봉
삼형제봉, 1286봉이 아직도 남았다. 도솔봉 아래 안부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며 삼형제봉과 1286봉을 攻略하기 위한 마지막 힘을 모았다. 물도 점검을 해 보니 넉넉할 것 같다.
두 봉만 넘자. 준비한 세 병 물도 둘이나 비웠고 간식도 먹어 배낭의 무게를 줄였지만 어깨가 느끼는 무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계단을 치고 오르니 삼형제봉. 쉼 없이 1286봉으로 전진했다. 숨소리도 기력을 잃었는지 작아진다. 아뿔사! 뒤따라오던 윤사장님 이끼 낀 바위를 딛고 넘다 미끄러지고 말았다. 손바닥 옆면이 1cm 쯤 찢어져 피가 흐른다. 고무밴드로 지혈만 하고 마지막 힘을 내어 16 : 45분에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1286봉의 정상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내려가면 된다.
◈ 죽령(竹嶺)
헬기장. 죽령 1.8km, 죽령 1.3km. 몇 굽이를 돌아 돌아도 죽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굽이인가. 차 지나가는 소리. 죽령 주막집.
주막집 아주머니의 푸대접을 받으며 파전에 동동주, 비빔밥으로 1박 2일 19시간 31.4km의 멀고 긴 백두대간 18구간 산행을 마치다.
【참고자료】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 竹竹이 『죽령(竹嶺)』길을 열다.
백두대간에 나란히 자리한 여기 죽령과 문경새재·추풍령을 일러, 영남과 기호지방을 통하는 관문의 삼형제라면 죽령은 바로 그 맏형격이다. 그 연대, 그 자리, 그 높이, 그 구실이 단연 으뜸인 때문이다.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89m의 죽령. 삼국사기에『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 뒤치락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漆夫) 등 여덟 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 (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삼국사기)으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만한 하다.
서기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기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이며,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다. 장장 2천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대동맥의 한토막이었던 이 길은 근래 교통수단의 발달로 행객이 끊겨 수십년 숲덩굴에 묻혀 있었던 바, 이제 옛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는 뜻에서'99. 5월 공공근로사업으로 이 길(2.5km)을 다시 열었고 '99. 8월 죽령 옛길 안내판(희방사역 및 죽령고개 2개)과 전설안내판(옛길 요소요소에 5개)을 설치하여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가족단위의 새로운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참고자료】 『다자구야』할머니(죽령 산신당)
죽 령고개는 삼국시대부터 서울과 충청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길로, 내리막길 30리 오르막길 30리나 되는 험한 길이었다. 게다가 숲이 우거져 낮에도 어두울 정도였다.
나 라가 어수선해지자 이 고갯길은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도둑들이 들끓게 되었다. 도둑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관가에서 도둑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산의 지형을 잘 아는 도둑들을 여간 잡기가 어려웠다.
이 때 어느 할머니가 나타나 도둑 잡기를 자청했다. 할머니는 묘안을 짜내 도둑 소굴에 들어가서 도둑들이 모두 자고 있을 때 "다자구야"를 외쳐 매복해 있던 관군이 도둑 떼를 일망타진했다. 그 뒤 할머니를 찾았지만 이미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그때서야 그 할머니가 죽령산신임을 알아챈 사람들은 '다자구야'라고 부르며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곳에 있는 산신당은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 또는 죽령산신당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단양, 풍기, 제천, 영춘, 청풍군수가 모여 산신제를 올렸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국사당이라고 부른다. 산신제는 현대에 들어 차츰 규모가 작아졌다가 단양문화원에서 다시 부활시켜 면단위 행사로 하고 있다.
【참고자료】 오대산 상원사 동종 『竹嶺』을 넘다.
오 대산 상원사 동종도 죽령을 넘었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본래 안동도호부 남문루에 있었다. 이 종은 에밀레종보다 100여년 전에 주조된 것으로 높이 1.4m, 직경 1.2m, 무게는 3,300근에 달했다.
이 종은 종소리가 당시 가장 맑고 좋았다고 한다. 그것은 사방에 각각 가로 세로 3개씩 배열된 젖꼭지 36개가 튀어나와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리게 잡아주면서 끊어질 듯 은은하게 그 소리를 백리까지 전했다고 한다.
1 466년, 세조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위에 있던 상원사를 확장한 뒤 이 절을 원당사찰로 삼고자 안동에 있던 이 종을 상원사로 옮기도록 했다. 종 수송담당인 운종도감은 이 종을 수레에 싣고 100여필의 말이 끌도록 했다.
그 러나 죽령고개를 10여m 앞두고 어찌된 일인지 종이 5일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운종도감은 800살이 넘은 종이 죽령을 넘으면 다시는 고향을 못 올 거라는 아쉬움에 종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는 종의 36개 젖꼭지 가운데 한 개를 잘라서 고향인 안동 남문루 밑에 묻고 정성껏 제를 올렸다. 죽령으로 돌아온 그가 종에게 가자고 하자 그때서야 종을 실은 수레가 움직여 무사히 상원사에 안치시켰다고 전해진다.
2004. 8. 16 백두대간 18구간 산행 일기를 쓰다. 鳳
첫댓글 폭염 속에서 정말 힘들었던 1박2일[18구간]. 고생길을 자처한 계획. 그래도 젊음을 되찾았다는 의미라 면 크게 뜻을 얻은 셈이.....교장 선생님 다음 구간 활기에 찬 얼굴을 마주할 것을 기대하며....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