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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 조장 정남석. 김남용. 김미애. 이수진
사진이 발명되어 열광들의 시민지개척의 수단인 풍물사진과 부유층과
화가들의 해외 여행시 오락으로 촬영된 여행사진등은 기록적인 면에서 시작되었다.
발명당시 부터 이집트피라미드를 복사하는데 사진기를 가진 사진가 1명으로 정밀하게 보여 줄 수 있다고
아라고 말했듯이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보다 빠른 감광필름인 습판사진의 발명으로
사건 현장의 증인으로서의 사진, 전쟁과 같은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목격자로서의 사진으로 발전되었다.
(풍물, 풍경기록-->사건기록-->전쟁기록)
Carl F. Stelzer(1805~1894)는
1842년 함브르크 대화재(독일에서 3일간 일어났다)를 기록한 40개의 다게르타입을 만들었고,
이사진은 I.L.News지에 목판인쇄 되어 그는 세계 최초의 뉴스사진가가 되었다.
그는 북부아프리카, 아시아의 생활상, 민속물,풍경과 건축등을 촬영해 기록성이 강한 진실을 전해 주었다.
1.최초의 전쟁사진은 무엇인가? (최초의 기록사진)
1840년에 미국과 멕시코 전쟁이 있었고, 자국민의 욕구충족을 위해 또다른 신민지를 개척할려는 열강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진 신민지 쟁탈전이 크리미아 전쟁이 1855~1865에 있었다. 러시아와 대항해서 식민지 다툼을 벌였던 터어키, 영국, 독일, 프랑스와의 전쟁이었다 습판사진술로 크리미아전쟁을 기록한 로저팬톤의 사진이 최초의 전쟁 사진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의 기록사진시대에 습판이 이용되었다.
♠ 작가의 관점;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로저 펜튼(Roger Fenton) 은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크리미아 전쟁에 파견되어 전쟁을 제일 먼저 광범위하게 사진으로 보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법률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진가로 전업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사진가로 명성을 얻고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받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초기에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할 당시 기본 바탕은 콜로디온 습판법을 고안했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의 방법을 지켰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수정을 가하여 감광처리 함으로써 유명해져 대영 박물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 작가적 관점; 1855년에 발발한 크리미아 전쟁의 현장 사진을 제작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영국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전쟁터에 가족이나 친지들을 내보내고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펜튼 사진에는 흔히 전쟁사진에서 보아왔던 참혹한 시체들이나 무서운 공격장면 보다는 광활한 평원과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 제복 입은 사관이나 민간이의 초상사진 등이 대부분이어서 비극적인 전쟁을 표현하기보다는 대개 낭만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 홍보사진의 관점; 펜튼이 대영 박물관 사진가로 제직시 그의 탁월한 사진 솜씨가 인정받아 1855년에 발발한 크리미아 전쟁의 현장 사진을 제작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영국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전쟁터에 가족이나 친지들을 내보내고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펜튼 사진에는 흔히 전쟁사진에서 보아왔던 참혹한 시체들이나 공포스런 공격장면 보다는 광할한 평원과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 제복입은 사관이나 민간이의 초상사진 등이 대부분이어서 비극적인 전쟁을 표현하기 보다는 대개 낭만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펜튼의 크리미아 전쟁 당시의 사진들은 결코 목숨을 걸고 촬영한 사진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해 보이는 전쟁터를 보여주고 있다.
♠ 홍보사진의 관점; 영국, 프랑스, 터어키 연합군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벌인 크리미아 전쟁의 종군을 위해 빅토리아 왕가의 초상사진 촬영을 수 차례 담당했고, 대영 박물관의 사진가로 일하고 있던 로저 펜톤은 1855년 2월 20일, 로저펜톤은 영국 정부에 파견을 받고 사진 종군을 위해 전쟁터인 크리미아 반도로 떠났다. 인용한 사진이 보여주듯이 사진가는 해외원정 전쟁에 대해 국민들이 품는 극도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고자 한 권력의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고통 없는 전쟁, 주검 없는 전장, 정적인 전투를 재현했다. 영국정부가 펜톤을 크리미아 전쟁으로 보낸 것은 사진을 찍어서 본국에 있는 군인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런 만큼 펜톤의 사진들에서는 전쟁의 참혹한 사진을 거의 찾아볼 수없다. 다만 펜톤이 기록한 크리미아 전쟁 사진에서는 이렇게 보다시피 평화로운 야경 장면정도가 아마 나오고 있다. ♠ 저널리즘관점; 저널리즘사진이 확고하게 자기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전쟁사진을 통해서 였다 1851년 당시 크리미아 전쟁이 저널리즘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전쟁에 장면을 직접가보지 않고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을까요? 이게 바로 크리미아 전쟁 사진입니다 크리미아 전쟁사진들은 로저 펜톤이라는 한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로저 패톤에 의해서 찍혀진 300장의 사진이 있다. 대부분의 사진은 장교들과 적은 수의 사병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이 무시한 사진은 Alfred, Lord Tennyson의 시에서 언급된 라이트 여단의 책임(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 때문에 유명한 죽음의 계곡을 보여준다. ♠ 역사적 관점; 1853년 러시아와 터키의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 계기는 종교적인 대립을 이유로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 당시의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려고 했던 영국과 프랑스도 터키를 지원하며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黑海의 툭 튀어나온 "크리미아 반도"가 주 전장으로 되었기 때문에 "크리미아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해인 1854년에 나이팅게일은 그때의 육군 장관의 의뢰를 받고 38명의 간호 사단을 조직하여 전장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34세 였으며 이후 2년간에 걸쳐 분신의 활약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미아 천사"로서 그 이름이 세계의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 역사적 관점; 크리미아전쟁은 1854년부터 1856년까지 계속되었다. 교전국은 영국, 프랑스와 터키가 러시아를 대항해서 싸웠다. 스웨덴과 불가리아와 같은 다른 나라들도 깊이 관여 되있었다. 러시아의 분명한 목적은 발칸을 지나서 터키의 구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서 였다.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러시아의 군대를 퇴각시킬 것이 확실히 되고 있는 시기에, 불가리아(Bulgaria)의 실리스트리아 지역에 있는 터키가 러시아의 소유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해안에서 내륙에서 야영하고 있는 그들의 군대를 러시아 검은 바다 항구(a Russian Black Sea port)의 Sebastopol의 방어를 파괴시킬 목적으로 불가리아에서 흑해 북쪽 해안의 크림반도로 보낼 것을 결정했다. 이 전쟁은 the River Alma, Balaclava, Inkerman and Sebastopol에서 다양한 전투가 있었다. 콜레라, 말라리아 열병 등과 근육경련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램프를 든 숙녀(The Lady with the Lamp)인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은 그녀의 병원과 획기적인 간호(nursing reforms) 때문에 유명해졌다.
2.다큐멘터리(타큐먼트)
다큐멘터리 사진, 즉 다큐먼트로서의 사진에 대한 수긍할 만한 규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1910년, 브뤼셀에서 열렸던 사진국제회의의 보고서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진 다큐먼트의 정의를 통보했다. 이에 따르면 사진 다큐먼트는 "다양한 자연의연구목적에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 여기에서 사진의 미적 아름다움은 부차적이다.이미지는 아주 선명하며, 세부의 디테일이 잘 드러나고, 시간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도록 정성스레 처리되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이 규정은 사진 다큐먼트를 '연구목적'을위한 유용한 '시각자료'로 파악하면서, 자료의 유용성을 보장하기 위한 양상을 명기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1910년의 사진국제회의가 다큐멘터리 사진의 특성을 이렇게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사진 다큐먼트가 19세기 후반 이후 대량으로 유통되고있었기 때문이다. 초상사진의 경우, 정신병 환자의 관상학을 위해, 인간 표정의 유형학 (typology)을 작성하기 위해, 인종학은 유럽의 주변인종의 관상적 특성을 연구하기위해, 경찰은 재범자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다큐먼트로서 사진초상을 사용해 왔다. 풍경의 경우, 고고학 자료로서의 유적사진, 문화재 보전을 위한 건축사진, 지형과 지질학 탐사와 관련된 사진들이 이미 상당량 생산, 소비되고 있었다.이러한 자료사진의 특징적 양상은 무엇보다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 만족적이고, 유용성을 멀리하는 예술사진과 구분된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자족성을 확보하지못하고, 타자에게 제출되는 사진인 까닭에, 미학적 고려 때문에 실증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다. 타자의 비교·검토에 영향을 끼치는 생산자의 미학적의도, 개성·감성의 표현을 제거한 사진이어야 한다. 또한 어떤 연구를 위한 자료라면이미 확정된 결론, 이미 결정된 이해관계에 봉사하기 위해 제작된 사진도 자료사진일수 없다. 다시 말해 미학적 배려를 뒤로 미뤘다 할지라도, 이미 설정된 가치체계, 혹은 이념에 맞추어, 조작되고 재단된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일 수 없다. 그것은 중립성·객관성을 가장한 선전·선동 사진일 뿐이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모든 이념·가치체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자료사진의 이념적 값과 가치체계의 결부는 생산 이전에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진자료가 소용되는 연구의 목적과 결과에 따라 추후에 결정된다. 다시 말해 자료사진을 요구한 연구가 동반하는 이데올로기에 사후 종속된다.
전쟁의 기록과 서부개척시대
전쟁의 기록사진이 여러가지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미국의 남북전쟁의 기록사진일 것이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매튜 B. 브레디(1823∼1896)는 카메라야말로 역사를 남기는 눈임을 깨닫고 그는 19명으로 구성된 스탭진을 이끌고 전쟁터로 종군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뒤 동부의 극심한 경제불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적인 서부개척이라는 명제로 전환되었다. 서부개척의 철도부설에 사진가들을 동원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서부의 새로운 철도 건설과정을 선전할 목적으로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척자들이 투자가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설득하는 목적이 있었다.
포토 켐페인으로서의 사진운동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서부개척이 일단락 매듭을 지어진 미국의 사진계는 그것의 경험을 토대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카메라로 다큐멘타리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이민가족들은 미국사회에 상당한 문제거리로 등장되고 있어 정책적으로 이를 개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개혁운동에 사진을 이용하였던 것이 포토 캠페인 운동이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이 자곱 리스와 루이스 하인이다.
리스는 비참한 빈민가의 저급한 주택과 비참한 환경을 그대로 방치한 부패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진을 촬영하여 그들의 생활개선을 부르짖는 일종의 복지 향상주의자인데 처음에는 문필로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나중에는 사진으로서 사회개혁을 전개하였다. 리스는 그의 카메라로 자기의 주장을 열거하고 사실적 증거로서 자기의 사진을 예술작품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그러한 논쟁에 참여하지도 않고 보다 선명한 사진을 찍는 기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사진은 인간적인 짙은 이해와 감동으로 만들었으므로 매우 위력있고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사진이 사실의 여론을 일으켜서 정책의 변화를 얻어 성공한 예는 리스의 사진이 처음이었다. 리스는 저술과 사진으로 미국인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뉴욕 빈민 생활상태를 개선시키는 행동을 일으키도록 설득하여 이 당시에 리스는 슬럼가의 해방자라 불리었다.
루이스 하인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진이 사회학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1904년경 사진을 시작하였다. 미국내의 소년노동의 실태를 조사하였는데 소년들은 서부의 석탄광산에서 노동하였으며 노동시간은 오전 7시붙어 오후 5시 30분까지 였고 석탄의 유독한 가스로 호흡기 질병과 철로레일에 위험이 계속되었다. 또한 남부의 목화공장에서 그들은 오전 6시경부터 오후 6시까지 힘든 일을 하였고 그들은 안전표시판에 있는 경고문도 해독하지 못하고 위험한 기계에 의해 손이 절단되기도 하는 악조건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기껏해야 몇 푼의 돈으로 많은 식구들의 생활에는 여간 힘이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인은 광산이나 방직공장과 볼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연민의 정을 가지고 촬영하였다.
리스와 하인은 19세기말 부터 20세기초에 살면서 당신의 미국 사회적 현실에 눈을 돌려 그 현실에 감추어져 있는 모순의 근원, 특히 피지배자 계급으로서 국민들의 괴로운 생활 실태를 사진에 의한 캠페인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FSA운동
1935∼1942(농업안정국, Farm Security Administrat미국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신경제정책이었던 뉴딜정책(New Deal)의 실시를 위해 대공황기 속에 처해있는 농민의 구제와 정착화를 목적으로 한 부서의 명칭으로서 농업안정국 또는 FSA라 불렸다. 1930년대에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불어닥치자 당시 농림부 차관이자 콜롬비아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렉스포드 테그웰(Rexford G. Tugwell)은 곤경해 처한 농부들의 재정적 지원을 해주기 위한 임무를 띤 기구의 우두머리로 세워졌고 터그웰은 그의 제자였던 로이 스트라이커(Roy E. Stryker)를 이 기구에 가담시켜 시각매체를 활용하여 지원하고자 농업안정국 산하에 사진단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스트라이커에게는 미국 농민의 힘겨운 생활상을 심도있게 보도할 사진촬영 계획을 지휘할 임무와 역사분과의장의 임무가 주어져다.
그의 지휘아래 운영된 FSA의 사진단은 도로시어 랭(Dorothea Lange),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러셀 리(Russell Lee),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stei), 벤샨(Ben Shahn) 등과 같은 뛰어난 사진가들을 채용하여 사진부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동작업을 펼쳤다. 이 사진단들이 주로 촬영한 농민들의 모습은 대개 소작인이나 소작농, 모래폭풍과 가뭄으로 인해 황폐된 대평원 지역의 여러 주로부터 피해 나온 이주민들의 문제들과 또 영세 농민의 경제적 문제들로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42년에 전쟁으로 인하여 FSA의 프로젝트가 종결되었을 당시 의회 도서관에는 무려 272,000점의 사진이 수집되어 방대한 다큐멘터리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러한 FSA 컬렉션은 당시의 사회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문예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결국 그것은 발흥하고 있는 포토 저널리즘과 시각적 의사소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FSA의 주된 목표는 스트라이커가 하나의 길을 제시하였지만 본래 사진가가 아니었던 스트라이커는 장비나 기법을 비롯한 문제와 시각적 스타일 등은 각자 사진가들이 정하도록 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그는 사진에 있어서 초점, 필터, 분위기 등은 사진이 영상언어로 쓰이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있다. 이때의 사진은 그 주제가 특이하였고 묘사된 사건들을 담은 뉴스 사진이 거의 없었으며 질적으로나 기술적, 미학적으로나 모두 높은 수준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여러 서적과 잡지, 영화, 텔레비전 등에서 제한없이 널리 이용되어 우리에게 감흥을 불어넣는데 현재에도 프린트를 원할 경우에는 워싱턴 미국 의회도서관 등 공적기관에 콜렉션되어 있어 소정의 비용만 내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FSA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진작업에 임했던 사진가들의 활동모습을 보er Evans)
워커네반스
이 기구에 고용된 최초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약 1년6개월에 걸쳐 FSA를 위해 활동하였다. FSA에서 커다란 활약을 했던 남부를 여행하면서 토지의 조건을 기록했고 소작인의 곤궁한 처지와 그들의 가옥과 소유물, 그들이 일하는 방법, 수확한 농작물과 그들이 다니는 학교, 교회 그리고 가계들을 위주로 기록하였다. 워커 에반스가 찍은 대부분의 대상은 누추한 빈민들 이었으나 그의 해석은 항상 위엄에 넘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직접적인 정면시각으로 사진을 찍어 솔직하고 리얼리티한 방식으로 보여지도록 하였는데 에반스는 곤궁한 농민들의 생활상을 파악하고자 인물위주보다 그들이 생활상이 반영된 공간을 위주로 촬영에 들어갔다.
도로시어랭
다큐멘터리 사진에 한 획을 그은 랭의 사진세계는 주로 FSA에서 보여준 방식으로 끝까지 고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맡은 FSA에서의 주제는 이주 농민들로서 이를 가장 대표하는 사진이 바로 1936년작인 이다. 이주 농민들의 생활과 그 상태를 기록한 사진으로 이주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주하며 생활하는 불쌍한 어머니가 텐트 속에서 어린애에 둘러싸인 모습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노동자의 삶과 얼굴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사진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의 기록과 정서적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책적인 이유로 시작된 다큐멘터리 기록적 사진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의 진실을 느낄 수 있도록 감동적인 해설서였기 때문이다.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준 랭의 사진세계는 한 시대의 사건들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사진을 보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게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