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작업과 개봉』
사이코의 어머니 목소리는 앤서니 퍼킨스의 친구 이자 신인배우였던 물 세 살의 폴 재스민이 하였는데 후반 작업에서 히치콕은 두 명의 여배우를 고용하여 편집 작업을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이어 붙이고 뒤섞어서 목소리가 단어와 문장마다 바뀌게 만들었음.
1차 편집본 시사회 후 버나드 허먼은 히치콕에게 음악을 완전히 현악으로 하면 어떨지 제안했고 히치콕은 허먼의 '절규하는 바이올린' 트랙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함.
히치콕은 기괴한 숏들을 일부러 집어넣어 놓고 검열관들한테 그건 뺄 테니까, 대신에 이건 허락해 주시오라고 흥정을 했는데, 샤워 시퀸스를 그대로 두면, 배드신인 첫 장면을 재촬영 하겠다고 했고 재촬영 날을 잡았으나 검열관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재촬영을 하지 않고 그대로 합의를 봤다고 함.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북돋기 위해 히치콕은 기존 영화계의 전통과 특혜로 여겨 지던 것과 위배되는 조치인 비평가들이나 언론인들에게 영화를 미리 보여 주지 않기로 결정함.
또한 특이한 광고 캠페인으로 모든 신문과 잡지 광고에 사이코의 상영이 시작되고 나면 극장에 한 명도, 단 한 명도 입장할 수 없다는 문구를 실었음.
사이코는 미국의 경기가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던 1960년 여름에 개봉되었는데 당시 미국 인구는 1억 8천 명을 넘어섰고, 중간 소득은 5,700만 달러에 달했음.
1960년 6월 16일 개봉 당시 사이코는 뉴욕 비평가들로부터 뜨뜻미지근하거나 적대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깼음.
첫날부터 오전 8시가 지나자마자 사람들이 브로드웨이에 줄을 서기 시작했고 그 줄은 늦은 밤까지도 줄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 첫 13,000회 상영으로 950만 달러를 벌여 들였으며 외국에서도 총 600만 달러 정도의 수익을 올렸는데 미국에서는 벤허 만이 사이코의 수익을 앞질렀음. (단, 벤허는 사이코의 거의 16배에 달하는 1,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다)
개봉 첫해 말까지는 국내에서 1,500만 달러라는 수익을 올림.
1980년대 후반, 사이코는 영화 이론가인 로빈우드에서부터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에 이르기까지 여러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평론가 피터 코위는 사이코는 히치콕의 가장 위대한 영화일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지적이고 충격적인 호려 영화라고 평했음. 사이코는 미국인들의 잠재의식을 그토록 강력하게 건드릴 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는데 기절하는 사람들, 상영 중간에 나가 버리는 사람들, 여러 번 극장을 찾는 사람들, 보이콧들, 항의성 전화 와 편지들, 목사들과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는 영화 상영을 금지시키자는 예기가 오가기 시작함.
히치콕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든 간에, 사이코 이후 영화계와 언론계는 그의 훌륭함만을 이야기하기 시작함.
1961년 히치콕이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고 4월 17일 제3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히치콕 부부는 드물게 동반 참석하지만 촬영상, 미술상, 여우조연상, 감독상에서 모두 수상 실패함. (히치콕은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1940년 작품인 레베카가 유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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