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cene Stealers 한국영화의 장면 훔치는 사람들
01_<넘버 3>(97)의 송강호
<넘버 3>의 ‘불사파’ 보스 조필(송강호). 한석규와 최민식이 맞짱을 뜬 영화에서, 박상면 안석환 박광정 같은 연극 무대의 달인들이 총출동한 그 영화에서, 이미연과 방은희라는 ‘쎈’ 언니들이 등장하는 바로 그 영화에서, 결국 최고봉은 송강호였다. 우린 이 영화에서, 한국영화에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화법과 어조를 접하게 되며, 헝그리 정신과 ‘무대뽀’ 정신으로 무장한 한 명의 괴인이 펼치는 놀라운 장면들을 알현한다. 매우 교훈적인 이야기를 진지하게 설교하던 그는, 일단 한 번 뚜껑이 열리거나 당황하면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하는데…. 이후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TV에선 ‘<넘버 3> 송강호 성대모사’가 이어지고 있고, 송강호는 명실공이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자가 되었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그의 대갈일성, “잠자는 개한테는 결코 햇빛은 비추지 않아!” 청룡영화제와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
02_<만남의 광장>(07)의 류승범
배우를 운동선수에 비유한다면, 류승범은 날카로운 공격수다. 그의 포지션이 확실히 증명된 영화 <만남의 광장>. 몇몇 관객들은 그가 주인공인 줄 알고 기꺼이 돈을 지불했으며, 또 어떤 관객들은 단지 그가 나오는 장면을 위해 기꺼이 표를 샀다(고 한다). 인적 드문 강원도 어느 마을. 산골학교에 부임한 선생님 장근(류승범)은 새 직장으로 가던 중 풀밭에서 거사(!)를 치른다. 그런데 그만 지뢰를 밟고 말았으니! 이때부터 류승범의 처절한 원맨쇼가 시작된다. 허기를 달래랴, 저려오는 다리 주무르랴, 풀밭에 질펀하게 싸놓은 X 피하랴, 하늘에 계신 신과 대화하랴…. 주연배우들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류승범의 단순하고도 강렬한 장면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카메오를 주연의 경지로 끌어올린 생활 연기가 놀랍다.
03_<웰컴 투 동막골>(05)의 강혜정
주연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웰컴 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은 조연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강혜정의 ‘광녀’ 이미지로 기억하니까. 이 영화로 대한민국영화대상,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을 석권한 강혜정. 능수능란한 강원도 사투리로 관객을 사로잡은 그녀는 ‘이념의 청정 지역’ 동막골에서도 가장 순수한 천사 같은 존재다. 하지만 마냥 즐겁기만 한 캐릭터였다면 우리에게 그토록 강렬하게 기억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준 웃음만큼 큰 슬픔도 안겨주었고, 그녀의 죽음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04_<달콤한 인생>(05)의 황정민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달콤한 인생>에서 황정민은 ‘백 사장’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간이 세상에서 닳고 닳았을 때 과연 얼마나 천박하고 비열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입가의 긴 상처는 그의 과거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증거물. ‘달콤한 인생’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영화 속에서 ‘인생은 고통 ’이라고 영화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설파하며 재수 없게 웃는 그의 모습은, 김뢰하 오달수 김영철 김해곤 이기영 등 막강 조연진 중에서도 눈에 띄었고, 주연 이병헌의 자리까지 넘보는 그 무엇이었다. 이병헌이 춘사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가져간 사이, 황정민 또한 대한민국영화대상과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접수했다.
05_<비트>(97)의 임창정
<비트> 하면 떠오르는 것은? 길게 늘어뜨린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채 카메라를 응시하던 정우성의 고독한 표정,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한 고소영의 섹시한 자태, 진정한 마초의 등장을 알린 유오성의 선 굵은 연기 ….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것 같다면,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이다. 정우성 옆에서 쉴 새 없이 깐죽대며 ‘은어 사전’을 편찬하다시피 하는 임창정은 <비트>의 소금 같은 존재. 임창정은 이제는 전설이 된 ‘17대 1 싸움’ 등 각종 명대사를 제조하며 최고의 감초 배우로 떠올랐다. 정도 많고 의리도 있지만 약간은 비겁하고 소심한,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환규는 임창정의 인간적인 매력을 최대치로 살린 캐릭터. ‘폼생폼사’의 만화적 캐릭터들 사이에서 날것의 정서를 녹여낸 캐릭터로 사랑받은 임창정은 1998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신인상을, 대종상영화제에서는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06_<짝패>(06)의 이범수
전라도와 경상도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조폭 영화계’에 반기를 들고 나선 류승완 감독은, 은근한 말투 속에 배어나오는 충청도 조폭의 지독함과 살벌함을 보여준다. 감독은 물론 정두홍 무술감독(겸 주연)과 악역을 맡은 이범수까지 모두 충청도 출신이라는 사실은 영화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는데 특히 필호 역의 이범수는 ‘한국영화 조폭 캐릭터’의 새로운 장을 열며 영화를 장악한다. 고난도 액션을 펼치진 않지만,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모습은 피와 살이 튀는 ‘다찌마리’보다 더 위력 있었다. 이 영화로 춘사영화제와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07_<괴물>(06)의 괴물
송강호 변희봉 박해일 배두나가 비장한 얼굴로 고군분투했지만, 정작 관객의 시선을 훔쳐간 주인공은 컴퓨터그래픽으로 창조한 캐릭터 ‘괴물’이었다. 한강 둔치의 평화로운 적막을 찢고,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괴물은 소싯적 뉴잉글랜드의 작은 피서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죠스’의 아성을 위협한다. 아비규환 속에서 현서(고아성)를 낚아채가는 장면은 우아하기까지 한 명장면. 박해일이 화염병으로 불 지르고, ‘노숙자’ 윤제문이 기름 뿌린 후, 배두나가 활을 쏴 확실한 데미지를 입히고, 송강호가 결정타를 날린 끝에 죽어가는 괴물. 속편에선 어떻게 부활할까.
08_<타짜>(06)의 ‘아귀’ 김윤석
사실 그를 주목한 사람은 많았다. <범죄의 재구성>(04) <야수>(05) <천하장사 마돈나>(06) 등의 영화에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울림을 지닌 채 진동하고 있었다. 이때 ‘아귀’라는 캐릭터가 다가왔고, 그는 조승우의 카리스마와 김혜수의 뇌쇄적 매력과 백윤식의 내공과 유해진의 구성진 연기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영토를 지켰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임팩트를 주는 법을 잘 알고 있는데, 고광렬(유해진)의 손 하나를 ‘아작’ 낼 때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광기는 가장 좋은 예. 단순한 비열함과 잔인함이 아닌, 치 떨리게 비열하고 오싹하게 잔인한 캐릭터가 바로 아귀다. 이 영화로 김윤석은 대한민국영화대상과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즐거운 인생>(07)으로 주연급으로 발돋움했으며 <추격자>(08)로 입지를 굳혔다.
09_<영원한 제국>(95)의 최종원
왕은 안성기였다. 사건에 휘말리는 이인몽은 조재현이 맡았고, 정약용은 김명곤이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노령으로 거동도 쉽지 않고 말할 땐 ‘저러다 숨 넘어가지’ 싶은 심환지 역의 최종원이었다. 정조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노론의 총수 심환지. 여기서 최종원의 노회한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저 노인의 뱃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는 족히 돌아다닐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영화 전까지는 항상 ‘코믹 조연’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던 최종원은 그해 대종상영화제에서 손쉽게(?) 혹은 당연히(!)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0_코미디 영화에 조연 및 카메오로 등장한 김수미
김수미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돈까지 지불해가면서 푸짐하게 욕을 얻어먹고도 계속 그 집을 찾는, ‘욕쟁이 할머니’의 단골손님이 지닌 심리와 비슷할 것이다. <오! 해피데이>(02, 사진 )에서 모름지기 남자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며 인심 좋게 고기를 굽던 그녀가 돌연 거침없는 욕 퍼레이드를 선사할 때, 우리는 그녀의 리얼한 욕 구사력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이 주는 참을 수 없는 즐거움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온갖 ‘삐리리’로 점철된 질펀한 욕설의 향연. <위대한 유산>(03) <마파도>(05) <가문의 위기>(05) <썬데이 서울>(06) <다세포소녀>(06) <못말리는 결혼>(07)도 모두 김수미의 영향권 아래 있는 영화들이다. 어떠한 영화적 장치도 없이 스크린을 장악하는, 창자 저편까지 확실하게 긁어 주는 진정한 ‘리얼 토크 ’의 달인. 특히 < 구세주 >(06)의 가정부 역은 압권이다.
11_<살인의 추억>(03)의 박노식
“향숙이~? 향숙이 이쁘지이이~.” <살인의 추억>을 관람하고 나온 관객들은 극장 앞에서 저마다 극중 백광호의 대사를 흉내 내기에 바빴다. 완벽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의 모든 배우들은 각자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지만,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며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게 각인된 캐릭터는 멋도 모른 채 살인자로 몰린 백광호였다. 그가 송강호의 막무가내 심문에 못 이겨 ‘이쁜’ 향숙이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는 장면은 여러 개그 프로에서 사골 우려내듯 패러디한 명장면. 무명 배우 박노식은 이후 ‘향숙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며 여러 영화에서 개성 있는 조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12_<목포는 항구다>(03)의 ‘가오리’ 박철민
“쉭쉭!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여!” 이 대사 한 마디로 박철민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사실 남자 스타 두 명)조재현 차인표)이 타이틀 롤을 맡은 투 톱 영화에서 조연급 남자 배우가 그 틈새를 비집고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10년 넘게 숙성된 박철민의 ‘대사빨’은, 마치 입에 모터를 단 듯 줄줄 이어졌고,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끝난다. 그때 관객들은 깨닫는다. 이 영화를 이끈 동력은 주연 배우들의 갈등 구조가 아니라 박철민의 입담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뚜껑이 닫힌 변기 위에 설사를 하는 장면은, 21세기 한국영화 최고의 화장실 유머. 아~ 그 황토색 화면이여….
13_<은행나무 침대>(96)의 ‘황 장군’ 신현준
지금은 아랍계니, 코가 계속 자라느니 하며 코믹 이미지에 기울었지만 한때 신현준은 순애보의 화신인 ‘황 장군’ 그 자체였다(당시 어떤 설문조사에선 ‘남편감 1위 캐릭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석규와 심혜진이라는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도 열연했지만, 황 장군의 포스와 미단 공주(진희경)의 아련함은 관객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칼 차고 무릎 꿇고 앉아 펑펑 내리는 눈을 맞는 황 장군의 ‘순애보’는 이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이 되어 버렸다.
14_<기담>(07)의 ‘중얼귀신’ 지아
2007년 한국 공포영화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은 ‘정가 형제’(정식 정범식)의 데뷔작 <기담>이었다. 관객의 어깨를 짓누르는 공포를 선보인 이 영화에서, 지아가 등장하는 장면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만큼 섬뜩했는데…. 어린 딸만 겨우 살아남은 처참한 교통사고 후, 딸 앞에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반쯤 뭉개진 얼굴로 나타난 엄마 귀신. “꾸에엑&*%$(#@!!$꾸어억~.” 성대를 움켜쥐고 말하는 듯한 지아의 귀신 연기는 그간 한국영화를 점령했던 ‘사다코 후예’들의 ‘관절 꺾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들을 비롯한 스태프들도 겨우 비명을 참았다는 후문. <기담>을 ‘공포’영화로 만든 건, 사실 지아의 힘이다.
15_<왕의 남자>(05)의 ‘육칠팔’ 유해진 정석용 이승훈
‘공길’ 이준기도 아름다웠고, 감우성의 열연도 좋았으며, 광기 어린 연산군 정진영도 훌륭했고 장녹수 강성연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 비장하고도 스피디한 사극에서 어설픈 광대 ‘육칠팔’이 없었다면, <왕의 남자>는 구수한 뒷맛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름도 정감 어린 육갑이(유해진), 칠득이(정석용), 팔복이(이승훈). 그들은 빠져야 할 때를 확실히 알았지만, 자신들이 등장하는 화면엔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유해진의 궁시렁거림, 정석용의 뚱한 얼굴, 이승훈의 모를 듯 말 듯 동의하는 끄덕거림까지. 완벽한 트라이앵글을 이룬 ‘육칠팔’이야말로 <왕의 남자>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내들이며 진짜 광대들이다. 비극을 희비극으로 만든 그들.
16_<너에게 나를 보낸다>(94)의 여균동
그의 직업은 은행원. 주 업무는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주기. 부양 가족 8명의 가장. 바나나를 바짝 말리면 환각제가 된다고 믿는 사람. 취미는 카페에서 노닥거리기. 자신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남자. ‘바지 입은 여자’(정선경)가 아무리 애를 써도 치료될 수 없는 그의 임포텐스 증세. 이 영화로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수상한 여균동은, ‘무기력 지식인’ 연기의 달인 문성근과 ‘쇼킹 신인’ 정선경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며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가 된다. 다정한 듯하면서도 사이코틱한 대사 톤은 여균동의 트레이드마크.
17_<간첩 리철진>(99)의 이문식 임원희 정규수 정재영
간첩을 농락한 어설픈 택시 강도들. 장진 감독의 집단 캐릭터들은, 애드리브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맛깔 나는 대사를 살살 잔호흡 먹여가며 주고받을 때 가장 빛났다. 주인공은 당연히 리철진(유오성)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실질적 주인공들은 택시 강도 네 명이다. 어쩌면 그들의 좌충우돌과 해프닝이 이 영화의 전부일 수도 있으며, 이문식 임원희 정규수 정재영의 ‘드림팀’이 보여주는 팀워크는 정말 대단하다. 강도 대장 정규수, 총잡이 임원희, 어설픈 이문식, 잔머리 굴리는 정재영. 만약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그들이 나름 설정하고 있는 디테일에 주목하시길. 영화가 두 배는 재미있어진다.
18_<비오는 날 수채화>(90)의 이경영
이 영화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운드가 있다. 이경영이 성대모사로 내는 까마귀 소리. 의붓남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의 친구’라는 전형적인 ‘조연급’이었으나, 관객들은 풋풋한 신인 주인공 남녀(강석현 옥소리 )만큼이나 이경영을 기억했다. 사려 깊은 듯 코믹하고 , 이성적인 듯 감성적인 복합적 이미지는 당시 충무로에서 이경영의 독보적인 영역이었다.(사진에서 뒤쪽)
19_<세븐데이즈>(06)의 박희순
딸을 유괴당한 엄마의 침통함에 관객이 짓눌릴 것 같은 순간, 박희순이 등장한다. 지연(김윤진)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비리 사건에 연루돼 감사반과 숨바꼭질을 하는 ‘날라리’ 경찰 김성열. 박희순은 하와이안 셔츠에 선글래스, 건들대는 몸짓과 장난꾸러기 같은 말투로 자칫 스테레오 타입의 조연에 그쳤을 캐릭터에 생기와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용의자를 취조하며 “너는 변호사를 선임해도 소용없고, 묵비권을 행사하면 계속 쳐 맞는 거야”라고 내던지는 말이나, 문을 못 여는 열쇠 수리공에게 “이 XX 직업의식이 없어. 니 아버지 불러와”라는 통통 튀는 대사는 모두 박희순의 애드리브다. 그는 <세븐데이즈>를 예정에도 없던 ‘투 톱’ 영화로 만들어버린 셈.
20_<가문의 위기>(05)의 탁재훈
김수미 신현준 공형진 김원희 신이 등, 웃기려고 단단히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코믹 대가들의 빅 타이틀 매치. 그러나 잔치집의 승자는 놀랍게도 이렇다 할 연기 경력이 없는 탁재훈이었다. “너는 왜 이렇게 극단적이여” “루이비똥? 아따 그것은 누구 똥인디 돈을 주고 산다냐” 등 구성진 명대사들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저렴해 보이는 말투와 의상으로 관객들을 ‘극단적으로’ 사로잡았다. 여기에 잊을 수 없는 ‘오렌지=델몬트’로 굳히기 한판.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들여 일궈낸,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그는 스크린에 정착했다.
21_<원스 어폰 어 타임>(08)의 성동일 조희봉
도저히 편집할 수 없는 연기력 덕에 출연 분량이 점점 늘어나, 결국 주인공과 거의 맞먹게 된 희귀한 케이스의 주인공인 성동일과 조희봉. 1945 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주인공은 희대의 사기꾼 오봉구(박용우)와 경성 제일의 가수이자 도둑 춘자(이보영)이지만,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건 어리숙한 독립운동가 듀오 성동일과 조희봉이다. 늘 ‘엘리트’ 행세를 하려 애쓰지만 2프로 부족한 사장과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요리사 콤비의 포복절도 만담 퍼레이드가 없었다면, 영화는 맥없이 주저앉았을 듯. 비장한 ‘<영웅본색> 패러디’마저 피식 웃음 짓게 만든 성동일과 조희봉의 코믹 내공이 영화를 ‘후루룩’ 잡쉈다.
22_<음란서생>(06)의 오달수
<음란서생>에서 오달수는 ‘엇박자’ 연기를 보여준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얼굴은 슬쩍 보기만 해도 즐겁고, 사투리인지 고어인지 유행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는 그야말로 ‘신묘막측’한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요즘으로 치자면 에로 소설의 편집자쯤 되려나. 오달수는 19금 서책의 공급책 역할을 맡아, 극중 양반들과 관객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주인공 윤서(한석규)와 광헌(이범수)의 체면을 한없이 깎아내린 것도 오달수의 몫. 그는 개그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 같았던 존재였다.
23_<색즉시공>(02)의 신이, <색즉시공 시즌 2>(07)의 유채영
이 ‘쎈’ 언니들을 누가 당할 수 있을까. 거침없는 입담은 기본이고, 무차별적으로 작렬하는 ‘몸 개그’까지! <색즉시공> 시리즈의 표면적인 히로인 하지원과 송지효가 제 아무리 작심하고 망가져도, 신이와 유채영(사진)이라는 ‘여걸’이 등장하는 순간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1편의 신이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경상도 사투리의 진가를 발휘한 ‘대사빨’의 여왕. 온몸에 침만 발라대던 남자친구가 “지금 해요?”라고 묻자, “그럼 내일 할래?”라고 받아치는 신이의 포스에 견줄 수 있을 자 누구일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등장한 여인은? 쏟아질 것 같은 큰 눈을 부릅뜨고, 남자친구를 꼬시려는 여자를 찾으며 “어디 계세요? 같이 고기 좀 썰어요. XXX아~!”라고 말하는 유채영뿐이다.
24_<작업의 정석>(05)의 현영
“에라~ 이 게장만도 못한 X아!” 단 한 마디로 관객들의 묵은 체증을 단번에 내려하게 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잊지 못할 ‘게장 발언’ 의 주인공 현영이다. 요가 도중 가스를 분출하고도 애교스럽게 “쏘~리!”라며 웃는 그녀.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음색과 뉘앙스엔 ‘인상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쓸 말이 없다. ‘손예진의 변신’이 관건이었던 영화는, 조금씩 ‘감초 조연’ 현영의 파장 속으로 들어갔고, 이후 그녀는 당당히 주연급으로 뛰어올랐다.
25_<생활의 발견>(02)의 예지원
<생활의 발견>이 홍상수 감독의 최고 흥행작이 된 건, 진지한 순간 방귀 새듯 흘러나오는 엇박자 코미디의 힘이 크며 그 중심에 예지원이 있다. 지금은 ‘4 차원’의 매력을 만방에 공인받은 그녀지만, 당시엔 참한 ‘동양 미인’ 이미지에 갇혀 있었던 예지원. <생활의 발견>은 그녀가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온 영화다. 남자들 앞에서 난데없이 광란의 댄스를(그것도 무반주로!) 선보이는 예지원의 진지한 얼굴.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김상경과, ‘내숭 유부녀’ 추상미의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홍상수 식’의 생경한 코미디를 완벽하게 사람은 어쩌면 예지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