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05.03 오전 09:55
일반 이은경 전(前) 일간스포츠 스포츠팀장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44&aid=0000000024&rc=N
남자탁구 세계랭킹 1위 중국의 판젠동. 사진=게티이미지
최근 아시아의 탁구 판도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탁구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온 일본이 세계 최강 중국의 신경을 긁고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중국 탁구를 곧잘 ‘만리장성’에 빗대곤 하는데, 중국이 그저 코웃음을 치고 웃어넘기기에는 일본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2018년 4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탁구 아시안컵 남자 단식 1회전에서 일본의 14세 ‘신동’ 하리모토 도모카즈(2003년 6월생으로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14세)가 세계랭킹 1위이자 중국의 21세 신성 판젠동을 3-1로 이겼다. 하리모토는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개인전) 남자 단식에서 최연소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리모토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중국 탁구 선수 출신이며 중국 쓰촨성 태생이다.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 때문에 중국팬들은 탁구 신동 하리모토에 대해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또 지난해 탁구 세계선수권대회(개인전) 혼합복식에서는 요시무라 마하루-이시카와 카즈미(일본) 조가 우승했다. 세계선수권 혼합복식에서 일본이 우승한 건 1969년 이후 48년 만이다. 혼합복식은 2020년 도쿄올림픽 탁구부터 정식종목으로 들어간다. 일본은 요시무라와 이시카와 등을 앞세워 전략종목으로 밀고 있다.
중국에 도전하는 일본
중국의 동방스포츠뉴스는 지난달 보도에서 ‘일본의 엄청난 교만! 일본 탁구는 2년 후에 중국을 완전히 물리칠 것으로 전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중국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최근 일본 탁구의 선전이 일본 입장에서는 과감한 투자의 결실이고, 중국이 볼 때는 중국 탁구의 단물만 빼 먹은 결과처럼 보일 수 있다.
국제탁구연맹(ITTF)은 중국 탁구의 독주가 30여 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2014년 공식적으로 중국에 ‘공생’을 강조했다. 당시 세계선수권(단체전)에서 또 한 번 중국이 우승을 휩쓸자 애덤 샤라라 ITTF 회장이 “중국의 자선이 필요하다”며 중국의 수준급 탁구 코치들을 다른 나라로 보내 중국 외 나라들의 경쟁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탁구협회장 차이젠화는 이를 받아들여 중국 코치들을 보내줬다. 차이젠화가 내세운 이른바 ‘늑대 기르기 작전’이다.
일본의 하리모토 도모카즈. 사진=게티이미지
이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가 일본이다. 일본은 중국의 유명 코치들을 대거 받아들였고, 협회가 연간 20억원에 달하는 돈을 유망주 키우기에 적극 투자했다. 하리모토(남자 랭킹 13위)를 비롯해 니와 고키(남자 9위), 이시카와 카즈미(여자 3위), 히라노 미유(여자 6위), 이토 미마(여자 7위) 등이 남녀 세계랭킹 10위권 안에 대거 진입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은 중국 출신 코치진을 해고해 버렸다. 또한 대부분의 중국 귀화 선수들을 대표팀 선발에서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훈련 파트너로만 활용하는 분위기다.
다음은 중국 동방스포츠뉴스 기사의 일부다. “일본 탁구는 경쟁력이 궤도에 올라오자 별다른 이유 없이 한꺼번에 중국 코치를 해고했다.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일본 탁구가 당나귀를 몰아내고 강을 건너려고 한다(중국 코치들을 토사구팽했다는 의미)”. 또 ITTF의 중국 견제 정책에 대해서는 “농구는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절대적인 전력으로 독주하는데도 전혀 견제하지 않으면서 왜 중국 탁구가 독주하는 것은 자꾸 걸고 넘어지나”라고 반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탁구팬들이 차이젠화에 대해 느끼는 반감도 커지는 분위기다. 차이젠화는 중국의 국가체육총국 국장을 지냈고, 중국탁구협회와 배드민턴협회, 축구협회까지 수장을 맡고 있다. 팬들은 차이젠화가 중국 내의 체육 권력과 정치에 신경을 쓰느라 ITTF에서 중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는 소홀하다며 성토하고 있다.
중국탁구협회는 지난해 6월 10여 년 간 중국 남자탁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동의 세계 정상을 이끌어 온 스타 플레이어 출신 감독 류궈량을 감독직에서 행정직으로 보냈다. 발표상으로는 류궈량이 탁구협회 부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지만, 선수들과 팬들은 류궈량이 정치싸움에서 밀렸다고 받아들였다. 중국의 남자 톱랭커들인 마롱, 슈신, 판젠동은 인사 발표 직후 열린 중국오픈에서 항의의 의미로 경기를 보이콧했다. 또한 개인 SNS에 ‘류궈량 당신이 그립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은 보이콧 이후 중국협회로부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고 공식 사과했다. 중국팀의 새 감독은 류궈정이 맡았다. 이러한 해프닝이 한차례 지나갔지만, 중국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차이젠화 중국탁구협회장(위 사진). 중국의 마롱(아래 왼쪽)과 류궈량. 사진=게티이미지
그러나 중국 팬심은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보인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탁구대표팀’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대체 중국탁구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중국 탁구는 끝났다’ ‘류궈량 사태의 진실은 무엇인가’ ‘차이젠화 때문에 중국 탁구는 축구 꼴이 날 것’ 등의 관련 문장이 나온다.
중국 탁구는 연구를 먹고 성장했다
현재 스웨덴 할름스타드에서는 세계선수권(단체전, 4월29일~5월6일)이 열리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이번 대회에서 고전하며 ‘만리장성’에 균열을 드러낼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중국 탁구는 1950년대부터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탁구가 유럽 위주로 돌아갔고, 아시아 최강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50년대 남자, 1960년대 여자가 세계 정상을 휩쓸었다. 이미 유럽과 아시아의 강호들이 있는 상태에서 후발 주자처럼 출발한 중국 탁구는 매우 치밀한 준비와 연구로 ‘만리장성’이 되었다. 그 연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스핀이다.
미국의 남성잡지 GQ는 2012년 9월호에서 중국 현지에서 쓴 중국의 생활탁구 체험 르포를 소개하면서 탁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스포츠 종목을 곧잘 체스에 비유하곤 한다. 펜싱을 검으로 하는 체스라고 하거나, 복싱을 링에서 두는 체스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 체스와 가장 유사한 종목은 바로 탁구다. 공의 스핀(회전) 때문이다. 탁구를 칠 때는 그때그때 치는 방식에 따라 공에 다양한 스핀이 생긴다. 탁구에서는 상대의 스핀이 어떻게 올 지 미리 예측해야 이길 수 있다. 마치 체스 선수들이 3~4수 앞을 미리 예측하고 수를 준비하듯 상대가 치는 순간 스핀을 예측하고, 효과적으로 그에 대응하면서 그 다음 스핀은 어떻게 이어질지 예측해야 한다. 순간순간 대처가 달라지기 때문에 탁구 플레이에서 나오는 경우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치 체스(혹은 바둑)가 그렇듯 말이다.”
세계 수준의 탁구 선수들에게 게임이란 결국 스핀 싸움이다. 중국은 세계선수권이 처음 열린 1926년부터 1951년까지는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지 않았다. 중국의 첫 탁구 세계챔피언은 1959년 도르트문트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롱궈투안이었다. 이후 중국은 점차 세계 탁구의 강자가 되어갔고, 1980년대 이후부터는 대적하기 어려운 탁구 공룡으로 진화했다.
중국 탁구가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하게 경쟁팀을 견제하고 연구했는지 대표적인 예가 1975년 세계선수권 여자 단체전이다. 1973년 대회에서 정현숙, 이에리사가 주축이 된 한국 여자팀이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우승을 했다. 1975년 대회에서도 한국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오산이었다. 중국이 이를 갈고 설욕을 준비했던 것이다. 중국의 거신아이가 당시로선 생소한 이질러버(롱핌플러버)를 들고 나왔다. 거신아이는 한국과의 경기에서만 이질러버를 썼다. 처음 보는 스핀이 사방에서 들어오자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후 이질러버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키워드가 됐다.
1980년대 중국은 스카이서브를 선보이기도 했다. 상대 선수의 타이밍을 뺏기 위한 전략이었다.
2000년대 들어 탁구에서는 수비와 백핸드에 취약한 펜홀더 그립이 서서히 밀리고 유럽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셰이크핸드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류궈량-마린-왕하오까지 이어지는 이면타법을 내놓았다. 이면타법은 펜홀더 전형이면서 셰이크핸드처럼 라켓 양쪽에 러버를 붙이고 특별한 손목 스냅 기술로 백핸드를 자유자재로 하는 전법이다. 펜홀더의 강력한 공격은 유지하면서 약점을 보완하는 기술이었다.
이런 기술들은 강팀을 견제하기 위한 변칙이었다. 이질러버나 스카이서브는 요즘 탁구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이면타법도 찾기 어렵다. 펜홀더 전형은 현재 톱랭커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중국의 판젠동, 마롱 등은 빠르고 힘 있는 정석 기술로 ‘닥공’ 스타일의 탁구를 한다. 티모 볼(독일)은 유럽 선수지만 중국이나 아시아의 기술을 많이 흡수하고 받아들인 선수다. 중국 탁구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탁구는 그 안에서 더 뛰어난 기술, 더 기발한 신기술을 만들어내며 진화해왔다.
변칙이 정석을 결국 이길 수 없는 것이 맞지만, 중국이 그때그때 상식을 넘어서는 발상까지 하면서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를 했는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중국은 스스로 “우리는 탁구 기술에 관한 모든 분야를 다 연구했다”고 큰소리를 친다.
견제해도 소용 없었다
ITTF의 규정 역시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변해왔다. 규정 변화가 꼭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중국 특유의 기술과 스피드 보다 유럽 스타일의 파워풀한 탁구가 유리한 쪽으로 바뀐 게 사실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공의 크기가 커졌다. 기존의 직경 38밀리미터에서 40밀리미터로 바뀐 것이다. 공의 스피드가 종전보다 떨어졌다.
2008년에는 휘발성유기용매제(VOC) 성분이 포함된 스피드 글루 사용이 금지됐다. 글루는 라켓에 러버를 붙일 때 쓰는 접착제를 가리키는데, 스피드 글루를 쓰면 공의 반발력이 커지기 때문에 이 규정이 생긴 이후 반발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파워가 더 중요해졌다.
또한 2014년에는 공의 재질을 셀룰라이드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꿨다. 다소 유연성이 있는 셀룰라이드 공(공이 찌그러졌을 때 끓는 물에 넣으면 복원되는 성질이 있다. 플라스틱 공은 그렇지 않음)에 비해 플라스틱 공은 딱딱해서 반발력과 스핀에서 손해를 보게 됐다. 종전보다 공이 덜 튀기고 같은 스핀을 먹여도 실제로는 덜 먹는다. 유럽식 ‘힘의 탁구’가 유리해지는 조건이었다. ITTF는 스피드 글루와 셀룰라이드 공을 금지시킨 이유에 대해 “인체에 해로운 성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숨이 가쁠 정도로 규정이 계속 변했지만 정작 중국 탁구의 경쟁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2000년 이후 올림픽 탁구 금메달은 한국의 유승민(2004년 아테네 남자 단식 금)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에게 돌아갔다.
중국 탁구의 훈련 비법
2005년 미국의탁구전문지 USATT매거진은 중국 탁구대표팀 출신의 미국대표팀 코치 첸잉화가 분석한 ‘중국 탁구의 비밀- 그리고 나머지 나라들이 그를 따라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첸잉화는 1980년대 중국 대표로 활약했고, 이후 미국으로 귀화해 2000년 시드니올림픽 미국 대표로 출전했으며 미국대표팀 코치도 역임했다. 그는 자신이 중국 대표팀에 있을 때의 훈련 노하우를 자세하게 공개했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은 중국탁구 대표팀에는 전문 훈련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다른 나라들은 대표팀 내에서 서로 스파링 파트너를 한다. 그러나 탁구 인구가 넘치도록 풍부하고 경쟁력이 뛰어난 중국은 아예 대표팀 선수들의 훈련파트너를 따로 선발한다고 한다. 놀라운 건, 단순한 훈련파트너가 아니다. 중국 선수들이 경계해야 하는 다른 나라의 톱 랭커들을 그대로 모방한 훈련파트너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한국의 유남규를 분석해서 플레이 스타일, 버릇까지 그대로 모방한 수준급의 훈련파트너가 가상의 경쟁자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제아무리 중국이라 해도 그 안에서 톱에 속한 선수들은 눈높이가 맞는 훈련파트너를 구하기가 어렵다. 이런 최상급 선수들을 위한 훈련은 따로 있다. 포핸드가 좋은 선수, 백핸드가 좋은 전문 훈련파트너가 2인 1조를 이뤄 최상급 선수를 상대하는 1대 2 훈련이다. 마치 소림사 권법 수련 같은 훈련법이다.
2016 리우올림픽 탁구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중국의 딩닝, 리샤오샤, 류시웬. 사진=연합뉴스
중국 탁구가 대단한 점은 수 천 만 명의 탁구 인구 중에서 최고를 걸러내 대표팀에 선발하고, 그 안에 들어간 최고 레벨의 선수들이 거기서 안주하지 않고 또 한 단계 발전해 가는 모습을 늘 보여준다는 것이다.
위 기사에서 첸잉화가 공개한 중국 대표팀 훈련 비법은 먼 과거인 1980년대의 것이다. 이후 어떤 식으로 중국 대표팀 훈련이 더 진화했는지 상세한 훈련 노하우는 여전히 비밀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라면 훈련 비법을 모두 공개한다 해도 따라할 수 있는 나라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정영식.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빈틈 하나 없어 보이는 중국 탁구가 최근 미묘하게 일본 탁구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은 지켜보는 팬들로서는 재미있는 포인트다.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를 포함해 향후 메이저대회 때마다 중국과 일본의 기싸움이 아주 볼 만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관전포인트. 몇 년 사이 개성과 힘을 잃고 크게 주춤한 한국 탁구가 얼마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한국 탁구는 역대 올림픽 탁구에서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금메달(3개)을 보유한 나라다. 한국은 중요한 때마다 중국을 보기 좋게 한방 먹였던 '전통의 다크호스'였다. 이런 스토리가 그저 먼 과거의 영화로만 남지 않고 또 한 번 극적인 드라마가 나왔으면 하는 게 탁구팬들의 오랜 바람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의 유승민 금메달 이후 메이저 국제대회에서 계속 멈춰 있는 한국 탁구의 시계는 언제쯤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기사제공 이은경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