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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0차, 작은 자들의 순례 & 걸음 여행 | |
신앙 선조들의 삶에서 순교는 시작이 아니고 결과다. 그 결과에 대한 힘의 원천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진리를 탐구하다 하느님을 만났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었다. | |
일 시 |
2016년 6월 18일(토) |
오늘 기억할 형제들 |
김정자 아네스, 정경숙 실비아ㅡ 이향임 그라시아(종신) 성지순례중인: 장은기 데레사 |
시작 성가 |
우리모두 함께 모인 이곳에 사랑이 피어나고/ 사랑이 넘치는 순간 순 간 우리는 한 형제 / 해와 달 땅과 바다 별과 하늘공기 바람, 프란치스코/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찬미해/ 주님을 주 님을 찬미해/ 사랑해 주님을 주 님을 사랑해 |
시작 기도 |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 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 가. 친구들 이여, 이생에서는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요“ 오, 조선이여! 오, 나의 기쁨이여! 오, 나의 새로운 조국이여, 나는 너를 보고야 말며, 너를 위해 내 삶을 바치리라. 큰 배가 흔들거리며 항구에서 나를 기다리도다. 안녕, 프랑스여, 나는 너를 떠나 노니, 순풍이여 네 나래를 펴라. 나는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해변을 찾게 되리라. 그렇다. 나는 죽어도 살아도 조선인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들어 보지도 못한 조그만 나라, 그것도 배 타고 3년이나 걸리는 조선에 서로 선교사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신 선교사들은 순교 로서 지금 교회에 초석을 세웠습니다. 오늘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 하겠 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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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 |
서로 인사 나누기, 덕담과 자비와 평화의 인사 나눔의 시간 |
일정 소개 |
서울- -삼막골- 베티성지(11시 미사) - 석남사 - 산막 |
성지 안내 |
삼박골. 카렌 강신부님 은거지, 이진사 가족 및 교우촌 이었다. 현재는 이진사의 처와 딸인 두 모녀의 무덤만 존재 한다. |
걸음 여행지 |
석남 사 – 서운산 – 정상 – 석남 사 - 산막 |
마침 기도 |
기도합시다.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은 바로 진리를 찾은 올곧은 마음입니다. 그들이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과 애 덕은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연대입니다. 그 풍요로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 가는 순례자에게 순교의 밝은 빛이 찾아 들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 드리 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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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자비를 입습니다. |
충북 진천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싹튼 것은 1801년 신유 박해
전후다. 달레의 「한국 천주 교회사」 을 보면 『1801년
신유 박해 때에 순교한 충청도 경성현 덕머리 출신인 원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 로 피신 했다』 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이 일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30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이 은신처를 찾아 산 속 깊이 숨어들면서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났다.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절골, 그 이웃인 삼박골(양백리), 용진골(용덕리), 정삼이골(용덕리), 발래기(백곡면 明岩里), 명심이 (明岩里), 지구머리(백곡면 沙松里). 새울(梨月面 新溪里). 지장골(진천읍
芝岩里), 굴티(문백면 九谷里), 통점, 동골,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등 10여 곳이 넘게 신앙 공동체가 형성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대부분 옹기나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교우들의 생활상은 배티 일대 교우촌을 무대로
쓰여진 윤의병 신부의 군난소설 「은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는 배티 인근의 모든 교우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기록상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로서 1866-1868련 사이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은 오반지(바오로), 이 생원 등 모두 27명에 이르는데, 이들의 거주지가 배티 ·발래기 ·지장골 ·동골 ·용진골 ·정삼이골 ·굴티 ·절골 교우 촌들이었다. 또 이밖에도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씨의 무덤이 현재 백곡 공소 안에 있으며, 삼박골에 순교자 이 생원 가족의 무덤이, 배티 사적지 안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교우츤을 재건하였다. 이후 1884년 이래 선교사들에 의해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 등 다섯 공소가 설정됐으나 1930년부터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가 현재에는 새울과 백곡에만 공소가 남아있다. 1858~1861년까지 배티에서 거주하면서 최양업 신부 임종 때 종부를 준 프티니콜라 신부의 증언이나 칼래 신부의 기록에 보면 문경새재-괴산-진천 덕문이뜰-백곡-진천 냇물-용진골, 삼박골
- 배티 일대 교우촌-엽돈재-천안 목천 성거산 서둔골로 다녔다
성지순례와 걸음여행을 시작한지도 벌써 60회가 되었다. 작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작은 자축기념이라도 하려고 마음 먹어었다. 그런데 작은자들의 모임인 우리들의 살림을 맡고 계신 데레사 자매님께서 본당 형제들과 유럽 성지순례 계획과 겹쳐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가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인 만물과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까지도 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라는 양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 삶도 마찬가지다. 분명 변한다. 그래서 일상에서 우린 회개라는 수순을 통해 새로움을 모색하게 된다. 초심이니 처음처럼이니 하는 단어들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잊지 않으려 노력해도 초심은 이미 시간과 함께 저 멀리 사라진 것을 종종 느끼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치열한 구도 없이 초심을 간직할 수 없다.
작은 자들의 모임을 시작할 때부터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단지 왜 그토록 신앙 선조들은 죽음을 택하면서 하느님의 만남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걸까? 그리고 순교하면서 무순 생각들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가고, 또한 창조적 질서가 아름다운 그 안을 걸으며 형제적 친교와 함께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그 바탕으로 보다 더 적극적인 진리적 삶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보편타당한 진리 안에서 모든 삶에 있어 복음적 삶을 스스로 이뤄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 가 하며 시작한 일이지만 그러나 돌이켜 보면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본다. 단순하고 간결하고 겸손한 자세로 진정한 작은 자처럼 형제적 모임을 더 아름답게 해야겠다며 스스로 자성의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개인적인 피정이라 할까~~避世靜念 이지...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절골, 그 이웃인 삼박골(양백리), 용진골(용덕리), 정삼이골(용덕리), 발래기(백곡면 明岩里), 명심이 (明岩里), 지구머리(백곡면 沙松里). 새울(梨月面 新溪里). 지장골(진천읍
芝岩里), 굴티(문백면 九谷里), 통점, 동골,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등 10여 곳이 넘게 신앙 공동체가 형성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대부분 옹기나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교우들의 생활상은 배티 일대 교우촌을 무대로
쓰여진 윤의병 신부의 군난소설 「은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는 배티 인근의 모든 교우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기록상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로서 1866-1868련 사이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은 오반지(바오로), 이 생원 등 모두 27명에 이르는데, 이들의 거주지가 배티 ·발래기 ·지장골 ·동골 ·용진골 ·정삼이골 ·굴티 ·절골 교우 촌들이었다. 또 이밖에도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씨의 무덤이 현재 백곡 공소 안에 있으며, 삼박골에 순교자 이 생원 가족의 무덤이, 배티 사적지 안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교우츤을 재건하였다. 이후 1884년 이래 선교사들에 의해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 등 다섯 공소가 설정됐으나 1930년부터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가 현재에는 새울과 백곡에만 공소가 남아있다.
1858~1861년까지 배티에서 거주하면서 최양업 신부 임종 때 종부를 준 프티니콜라 신부의 증언이나 칼래 신부의 기록에 보면 문경새재-괴산-진천 덕문이뜰-백곡-진천 냇물-용진골, 삼박골
- 배티 일대 교우촌-엽돈재-천안 목천 성거산 서둔골로 다녔다
당일, 늘 그렇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전날 짐을 꾸려 놓아 물만 back-pack 넣고 등산화만 주머니에 담아 들고나가면 된다. 하루 전 이영관 씨에게 5시 30분까지 도착하라 메일 보냈다. 세면 후 의복을 갖춘 후 시간에 맞춰 아파트 앞 큰 도로 가로수 밑에 섰다. 새벽 여름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데레사 총무께서 순례를 떠나시면서 자신이 하던 일 대부분을 아네스 자매님께 부탁해 놓으셔서 오늘 차를 몰고 아네스 자매님 댁으로 가야 한다. 늦어도 6시 10분까지 가겠습니다. 하고 카톡으로 통지해 드렸었다.
올림픽대로 제법 차량 통행이 많은 새벽이다. 질주하던 차가 탄천을 넘어서면서 길이 막혔다. 노심초사, 이곳에서 10여 분을 허비, 그래도 6시 10분경 도착한 후 경비실로 가 먼저 점심 찰밥을 인수했다. 그리고 아네스 자매님께 전화~~ 오후 회식 때 먹을 쌈장과 묵은지를 갖고 내려오셨다. 항상 음식을 장만하시고 사람들과 나누시기를 좋아하시는 성미시다. 솜씨도 수준급이시고, 부탁을 드렸더니 호쾌히 승낙해 주셨다. 감사드린다.
오늘은 벨린다 자매님의 불참으로 기흥 휴게소에 정차 없이 바로 남안성 IC - 석남사로 직행할 수 있었다. 석남사 도착 후 모두 모여 기도를 한 후 걸음 여행을 시작하였다. 일정을 변경한 이유는 정오 지나 폭염 환경에서 걸음 걷는 것보다 오전이 좋다는 판단에서 변경하게 된 것이다. 걸음 여행 후 - 바로 배티성지 미사 참여- 삼박골 성지 참례 - 산막 방문으로 변경하였다. 기도의 달인 이국희 모니카 전임 회장께서 기도를 주관해 주셨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기도 역시 명쾌하게 진행하셨다. 산새들의 소리와 숲 속을 흐르는 공기의 여울이 기도 소리와 어울려 우리 모두를 맑은 영혼으로 이끌어 준다.
가을 단풍잎이 고운 이 길, 참 아름다운 길이다. 뒤에 올라오는 작은 자들을 위해 한고비 넘는 넓은 빈터에서 잠시 쉬다 오르곤 하였다. 오를수록 산바람이 청량감을 몰고 왔다. 다들 길이 좋다 한다. 한 시간이면 충분한 길, 우린 20분 정도 더 지체하며 드디어 정상에 올라섰다. 기대했던 시야 거리는 얕은 운무 영향 탓에 시야 확보 거리가 반으로 줄어 들었다.
정상에 서서 각자 지니고 온 행동식 나눔 시간이 있었다. 특히 마틸다 자매님께서 농장에 따오신 블루베리가 인상적이었다.
이웃 등반객에게 다가 가 나의 몫 일부를 나눠주었다. 금방 고맙다는 인사가 다가왔다.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바로 주고받는 소통 속에 있는 것 같다. 항상 나와 무엇인가와 서로 서로 소통하는 일이 바로 삶 그 자체다.
해의 방향을 고려하여 순광의 위치를 잡다 보니 서향 즉 안성시내를 배경으로 작은 자들을 세운 후 촬영 시간을 가졌다.
정상에서 시간을 고려하여 처음 계획했던 하산길 서운산 정상 - 배티성지, 산상 성전 성모님에서 순교자 묘역으로 바꿨다. 미사 참례 시간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오늘 작은 자 순례단 걸음 컨디션으로 본다면 12시 되어야 배티 성당에 도착할 것 같아 산상 성전으로 가는 하산길을 포기한 것이다.
서둘러 걷는 능선 길, 길이 곱고 바람이 자주 드니 걷기 너무 편하다. 더군다나 어제 작은 양의 비기 내려 피톤치드가 가슴을 적셔서 그런지 상쾌함이 가득하고 길에 만나 산나리 너무 아름답다. 카메라를 들어 초점을 잡은 후 셔터를 눌러 꽃 사진을 만들었다. 두 송이 크기가 서로 차이가 났다면 더 좋았을 덴 데 ... 사진에 항상 주제와 부제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
오랜만에 나오신 모니카 자매님, 걸음이 가볍다. 만날 적마다. 번개를 쳐, 설악을 함께 가고 싶다 하시는데 소원을 풀어
드려야 할 덴 데 ....
칼레 강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의 이동 동선인 서운산 능선 길을 걸어 마지막 휴식터인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5분 정도 물과 행동식 나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하산까지 15분 정도 소요. 그럼 미사 시간까지 15분 정도 여유가 생긴다. 이영관 씨에게 전화를 걸어 배티 고개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가는 빈터로 차를 대기 시켜달라 부탁하였다.
웃고 떠들며 물을 마시고 행동식을 챙기며 늘어질 것 같아 길을 재촉한 후 다시 선두에 섰다
하산 길에 마주친 무명 순교자 묘역, 화초는 사람들이 키우지만 야생화는 하느님께서 키워 주시는 것처럼 무영 순교자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시지만, 예수, 마리아만 부르며 순교를 당하신 신앙 선조들, 작은 자들은 순례를 하면서 항상 작은 제물을 준비한다. 그리고 특히 무명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예를 갖추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이름 알려진 순교자들은 후손들이 있어 조상 관리하고 있지만 무명 순교자는 후손이 없어 찾지 않는다. 작은 자들이 후손을 자처하는 것이다.
무명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간까지 포함하여 하산 후 남은 시간이 15분으로 잡은 것이다.
시급하게 묘역이 정비되어야 할 것 같다. 너무 버려진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실망스럽다. 성지 내는 각종 시설물로 번듯한데, 이 지역 공동체와 순교의 주역인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은 이렇게 방치된 듯하니 가슴 아프다. 신자가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기도를 드리며 예를 갖췄다. 나는 맨 아래단에 서서 기도 끝에 최문순 신부님의 두메 꽃 가사를 외웠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별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깊은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살고 싶어라
하산 길이 너무 가파른데 시설물이 없어 열악하다.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길인데 방치되고 있어 안타깝다. 순례자가 사고라도 난다면 어쩌려는지... 성지 안은 여러 가지 새 건물과 시설로 가득 채우면서 너무 안일하다. 전시적인 외형만 치우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지는 누구 때문에 존재하는가. 순교자들이다. 성직자들의 순교만큼 평신도의 특히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또한 소중한 일이다. 깊이 성찰해 볼 일이 아닌가 한다. 일행에 대한 안전사고가 염려되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간신히 내려왔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성전 안에는 순례자들로 가득 찼다. 앉을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모니카 전임 회장님을 아네스 자매님 옆으로 앉을 수 있도록 조치하니 작은 자들은 전부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모니터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보조의자를 요청했지만 관리자가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창고로 갖고 가버렸다. 요청하자 앞으로 가면 앉을 자리가 있단다. 앉을 자리가 어디에 있다는 이야기인지... 규모가 커지더니 옛적 인성들을 사라지는 걸까? 물질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드는 걸까? 마음에 작은 동요가 파문을 일으키고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파견 성가 부르기 직 전 이영관 씨와 함께 점심을 옮겨와 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성전 입구로 가 작은 자 순례단들을 모아 차로 이동하여 식기를 챙겨 감나무 밑으로 다시 가 배식한 후 점심시간을 가졌다.. 점심을 먹은 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박물관을 참관하기 위하여 박물관으로 가 박해와 관련된 역사만 설명 한 후 자유롭게 참관하도록 하였더니 전부 어디런가 흩어져 버렸다. 박물관 부근에 남아 있던 자매님들만 모시고 사진을 만들었다.
흩어진 작은 자 순례단을 모은 후 오후 일정인 삼막골 공동체 장소로 이동하였다. 삼박골은 천주교 신앙 공동체 마을과 서양 선교사들이 운둔하며 사목하던 곳이다.
진천군 백곡면에서 입장 방면으로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배티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2, 8km 달리다 우측으로 흰색 간판이 나온다. 삼박골, 비밀 통로라 적힌 간판이다. 삼박골로 가는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옛 교우촌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평지가 나온다. 우물 터와 돌담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길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지형 안에 숨어 있고 유사시 왼쪽 골짜기로 도망치면 바로 현재 배티성지 건너 배티 마을 뒤로 나갈 수 있다. 옛적에는 공소가 있었으나 지금 백곡 공소만 존재하고 다른 공소는 없어졌다. 삼박골에는 현재 이 진사라 부르던 이호준 요한의 부인과 딸 두 순교자 무덤만 남아 있다.
삼박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참깨 밭이다. 농사를 포기한 땅엔 개망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조 말엽 열차를 놓기 위하여 열차 자재가 미국으로부터 들어올 때 침목에 묻어 들어온 외래종 야생꽃이다. 얼마나 번식력이 강한지 잠시 농사 손을 놓기만 하여도 이렇게 퍼져 농부들을 귀찮게 만들었다. 그래서 농부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꽃 이름 되어 버렸다.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들어온 꽃이라 개망초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군락을 이루니 나름 꽃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오늘 총무 대리로 수고하시는 체칠리아 자매님 모시고, 역광이라 어려운 사진인데 역시나...
도착한 삼박골 성지, 역시 버려진 묘역이나 다름없었다. 순례단은 간소한 제물을 차린 후 모두 절을 드렸다. 그리고 다시 절차에 따라 기도를 드렸다.
묘역이 협소하여 위, 아래로 나누어 자리를 잡은 후 참례를 이어 갔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오늘 일정 모두 끝냈다. 참 수고들 많으셨다.
아침에 나눔 했던 작은 자들의 월보,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만 기억하며 순례와 걸음 여행을 하는 것과 신앙 선조들의 순교 결과를 깨닫는 것이었다. 신앙 선조들의 삶에서 순교는 시작이 아니고 결과다. 그 결과에 대한 힘의 원천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진리를 탐구하다 하느님을 만났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었다. 그렇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하느님을 발견하고 매달리며 기도를 드린 결과가 바로 한국 천주교회다. 평신도들의 요청에 의하여 바티칸에선 파리 외방 전교 소속 12명의 선교사들을 파견하지만 9명은 순교를 하시고 나머지 세 분은 조선을 탈출한다. 칼렌 강, 페롱, 레텔 신부님이 바로 그분들이시다
칼렌 강신부님은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셔서 조선사 목과 연관된 글을 남기시고 평생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다 선종하신다. 페롱 신부님은 중국으로 돌아 간 후 자국 공사를 만나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도굴을 상의하지만 질책만 받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미국 상인 젠키스의 자금으로 유태계 오페르트, 조선 천주교인, 중국인 등과 함께 내포지방 가야산에 있는 대원군 아버지 묘지를 도굴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서찰을 대원군에 보내 통상을 강요한다. 이에 격분한 대원군은 철저하게 박해를 시작한다.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 신자에 대해서는 씨를 말리라 하였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배교자들도 많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박해가 이어져 피해가 극심했다. 페롱 신부님은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 다시 인도로 파견된다.
리델 신부님은 1861 년 3 월 31 일 조선에 잠입하여 병인박해를 겪고, 조선의 참상을 프랑스의 로즈 제독에게 알려 병인양요의 단초를 제공했다. 리델 신부님은 최초의 한불사전인 『한불 자전』(1880)과 최초의 문법서 『한국 문전』(1881)을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판했으며, 1878 년 5 개월 동안 포도청에서 투옥된 자신의 체험담을 수기로 남겼다. 리델 신부님은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6 대 교구장이 되셨다. 공식 일정을 끝낸 순례단은 개망초 군락지에서 여가의 시간을 즐겼다.
먼저 삼총녀 마틸다, 카타리나, 프란치스카 자매님을 모시고
이어서 단체 사진을 풀 향기 너무 좋았다. 초목에서 우러나오는 숲의 향취~~ 녹향답다.
정말이지 간혹 숲에서 이런 야생화 군락을 만나는 일도 흔치않은 일이다. 순교자들이 살던 공동체 마을 삼박골, 길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천혜의 은둔지 삼박골, 밤이 되면 은하수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박해에 쫓겨 살던 곳은 깊은 산속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옹기를 만들고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 내다 팔며 연명해 나갔다. 창조적인 질서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지만 국정과 연관된 집권자들의 명분 따라 일어나는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삼태기를 닮은 지형인 삼박골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산세는 아늑했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삼박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인 산막으로 올라 갔다.
오늘이 저물어 가는 것처럼 오늘 제60 차, 성지 순례와 걸음 여행의 시간도 어두움으로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두고 다시 귀경하여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갈 시간이다. 하루의 살림을 작은 nap- sack에 질머 지고 새벽에 모두 나섰었다. 믿는 자로서 신앙 선조들의 삶에 대하여 알고 공경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같은 교우끼리 공동체를 만들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 또한 당연한 일이다. 무엇이든 늘 그러하듯 실천이 문제인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죽어 있는 일이다.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만들고자 하시는 세상 일과 그 역사를 만드는 일에 작은 조력을 하려는 의미를 지닌 공동체가 바로 작은자의 행색과 마음으로 매월 떠나는 우리들이다. 이런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한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걸어서 하늘까지 갈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제 60-회차를 끝내는 severino의 素懷다. 샬롬,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ps: 동유럽 성지 순례를 떠나시며 모든 일들을 물흐르듯 계획해 놓고 가신 데레사 총무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고맙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절골, 그 이웃인 삼박골(양백리), 용진골(용덕리), 정삼이골(용덕리), 발래기(백곡면 明岩里), 명심이 (明岩里), 지구머리(백곡면 沙松里). 새울(梨月面 新溪里). 지장골(진천읍
芝岩里), 굴티(문백면 九谷里), 통점, 동골,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등 10여 곳이 넘게 신앙 공동체가 형성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신자들은 대부분 옹기나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교우들의 생활상은 배티 일대 교우촌을 무대로
쓰여진 윤의병 신부의 군난소설 「은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는 배티 인근의 모든 교우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기록상 이 지역 출신이거나 거주자로서 1866-1868련 사이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은 오반지(바오로), 이 생원 등 모두 27명에 이르는데, 이들의 거주지가 배티 ·발래기 ·지장골 ·동골 ·용진골 ·정삼이골 ·굴티 ·절골 교우 촌들이었다. 또 이밖에도 순교자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씨의 무덤이 현재 백곡 공소 안에 있으며, 삼박골에 순교자 이 생원 가족의 무덤이, 배티 사적지 안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신자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교우츤을 재건하였다. 이후 1884년 이래 선교사들에 의해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 등 다섯 공소가 설정됐으나 1930년부터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가 현재에는 새울과 백곡에만 공소가 남아있다.
1858~1861년까지 배티에서 거주하면서 최양업 신부 임종 때 종부를 준 프티니콜라 신부의 증언이나 칼래 신부의 기록에 보면 문경새재-괴산-진천 덕문이뜰-백곡-진천 냇물-용진골, 삼박골
- 배티 일대 교우촌-엽돈재-천안 목천 성거산 서둔골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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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60 회 걸음성지합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고 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
함께걸어주는 걸음팀과 철저한 계획으로 늘 보람된 하루를
보낼수있도록 기획하시는 리더님.........
이끌어주는 리더님 덕분에 60회 까지올수있씀을 감사드립니다....
늘 함께동참해 주는 걸음팀들....
오늘따라 야생화밭에 푹파묻쳐 행복해 하는모습은 천사들 같습니다..
함께하지못해 아쉬움은 있지만 .....
기뻐하고 행복한모습 보니 마음에 평화가 가득.........
다시 만날때까지 더위에 건강 하시길............
알게 모르게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지고 구름에 달 가듯이 준비해 놓고 가셔서 착오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잘 다녀 오셨다니 작은자의 몫을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