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010
제I부 별의 시차: 존재론적 차이의 덫
1장 _주체, 이 “내적으로 할례 받은 유대인” 038
간질이는 대상 | 칸트의 시차 | (칸트의) 이율배반의 정신으로부터 탄생하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 | 주인기표와 그 부침 | 부디 바람이 잠잠하길 | 정치경제학 비판에 나타난 시차 | “무(無)가 자랑하는 이 유일한 대상…”
2장 _유물론적 신학을 위한 기본 구성요소 142
소년, 여인을 만나다 | 헤겔주의자로서의 키르케고르 | 거절 | 순수한 희생의 덫 | 칸트주의자 되기의 어려움 | 성육신이라는 희극 | 정치적인 범주로서의 오드라덱 | 지나치게 많은 생명!
간주1: 케이트의 선택, 또는 헨리 제임스의 유물론 252
제2부 태양 시차: 아무도 아닌 사람 되기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3장 _신성한 똥되기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 296
태양에 덴 화상 | 당신의 동굴을 되찾아라! |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 … 그 외 다수 | 가상의 새로운 과학을 향하여 | 각성에 대한 저항 | 신이 방문할 때 | 탈이데올로기의 탈승화된 대상 | 위험하다고? 어떤 위험을 말하는가?
4장 _자유의 고리 402
“전제의 정립” | 인지주의자 헤겔? | 그릇된 불투명성 | 감정은 거짓말을 한다, 또는 다마지오의 오류 | 헤겔, 마르크스, 데넷 | 물리학에서 디자인으로? | 무의식적인 자유 행위 | 유혹의 언어, 언어의 유혹
간주2: 사회적 연관들 속의 대상 a, 또는 반-반유대주의의 교착 상태 500
제3부 달의 시차: 감산의 정치학을 위...
왜 지젝인가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지젝은 매년 2권 이상의 책을 쏟아내며 단숨에 서구 지성계의 그야말로 ‘스타’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웠고 영화이론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으며 정신분석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론적이었고 정통 철학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임상적”인 그의 글들은 프랑스철학 이후의 공백을 틈타 유행하는 지적 유희일 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지젝은 이런 비판 어린 시선을 일축하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진영의 중심에 서 있다. 지난 3월 13일에서 15일에 걸쳐 런던 버크벡 대학교에서 열린 “공산주의의 이념에 관하여”라는 심포지움은 지젝이 서구 지성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젝이 소장으로 있는 버크벡 인문학연구소에서 개최한 이 심포지움에는 알랭 바디우, 마이클 하트, 토니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지안니 바티모, 테리 이글턴, 피터 홀워드 등 세계적인 진보 지식인이 대거 참여했다. 캘리니코스가 비판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입장이 분명한 하나의 진영을 구축하기 어려운 지금 이런 대가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사람은 지젝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출간된 지젝에 관한 연구서만도 십여 권에 이르며, 지젝 연구를 위한 국제 저널과 연구센터가 생길 정도로 지젝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사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왜 「시차적 관점」인가?「시차적 관점」은 수많은 지젝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지젝의 저술은 라캉의 이론을 대중문화를 통해 소개하는 책, 9/11이나 이라크 전쟁 등의 국제적 문제에 시의적절하게 개입하려는 책,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구축해나가는 책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물론 이들은 서로 얽혀 있다). 「시차적 관점」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의 뒤를 잇는 주저이며 스스로 대작(Magnum Opus)라고 칭한 대표적인 저술이다(지젝의 글 쓰는 속도를 감안하면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나온 주저이다. 그리고 가장 두껍다!).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는 유행 철학자라고 여기다가 「시차적 관점」을 읽고 이 시대의 가장 실천적인 철학자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시차적 관점」은 기존의 지젝 사유를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위해 분명한 한걸음을 내딛는다.
시차적 관점이란책의 제목이자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시차(視差, parallax)이다. 시차의 사전적 의미는 “관찰자가 어떤 천체를 두 지점에서 보았을 때 대상의 위치가 달라보이는 것”을 말한다. 지구와 가까이 있는 별을 지구와 멀리 있는 천체를 배경으로 놓고 볼 때, 관측하는 위치에 따라 가까이 있는 별이 전혀 다른 천체를 배경으로 해서 보이는 현상(지구의 공전 때문에 일어난다)을 일컫는 용어이다.
지젝이 이 용어를 천문학적 용례를 그대로 따라 사용하지는 않는다. 천문학적 시차는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고정된 대상이 달라보이는 것을 지칭하지만 지젝의 의도는 이와 정확히 반대이다. 지젝이 가장 피하고자 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 가장 논박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입장에 따른 관점이 차이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개념을 두 가지 점에서 바꾸어 사용한다. 우선 그는 관점의 변화가 단순한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대상 자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또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관점은 우리 지식의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의 비일관성’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시차’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antinomy)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결코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14쪽)
둘이 아니라 하나그 어떤 중립적 기반도 없이 서로 모순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해결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 둘을 초월하는 새로운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관념론인 형이상학적 초월이든 유물론인 변증법적 종합이든 두 대립을 뛰어넘는 무엇을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천 개의 고원’이 펼쳐져 있다고 하는 요즈음 이런 시도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고 방기되어 있는 대극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칸트 철학과 헤겔 철학, 인간적 존재와 사물인 존재자(하이데거)라는 양 극, 필연과 당위(1부); 나와 자아란 신경 신호일 뿐이라는 자연과학적 입장과 ‘나’란 결코 과학적으로 해명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2부);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규제하는 법과 어느 시대보다도 더 ‘즐기라’고 강요하는 외설적 초자아라는 양 극, 정치와 경제, 넘쳐나는 인권과 인간 아닌 인간이라는 양 극, 인권과 시민권이라는 이율배반 등(3부). 지젝은 이 모두를 서로 다른 두 개의 대립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와 그 자체의 간극으로 보아야 한다고, 시차적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럴 때에만 출구 없는 교착 상태를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과 저항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젝이 온갖 분야를 넘나들면서 개입하는 이유는 결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특히 현대과학 중에서도 최첨단을 자랑하는 뇌과학과 대결하는 것도 단순히 관심분야가 폭넓어서가 아니다. 자기 의식과 정서를 물리와 화학, 신경학으로 설명하려는 뇌과학과 대결하지 않고서는, 즉 모든 것이 자연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는 환원론과 대결하지 않고서는, 인간 행위의 지평, 참여와 실천을 위한 지평을 결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4장).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시차적 관점을 가지라고 요구하며 거의 매쪽마다 우리의 고정관념, 굳어진 관점을 전복시킨다: 정의나 인권, 민주주의의 문제에 무관심한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적인 하버마스조차 윤리적 참여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고 말하며(179쪽); 하트와 네그리의 담론은 지구적 자본주의의 발달된 잠재력을 풀어놓을 뿐이며(525쪽); 인권은 결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정치 이전의 권리가 아니다(666쪽) 등등.
이 과정에서 지젝은 국부적인 문제에 관심을 제한하는 최근의 이론적 경향과는 달리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그림을 그려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이 책이 지젝의, 그리고 현대철학의 하나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깊이와 넓이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우리의 시대는 ‘차이’의 시대이다. 개인적, 민족적, 성적, 정치적 차이를 드러내고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지젝은 이 정체성의 정치학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데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게이, 레즈비언, sm 등의 성적 정체성과 유대인, 히스패닉 등의 인종적 정체성이 강조될수록 정확히 여기에 맞추어 이들 각각을 위한 시장이 만들어지며 자본주의를 다시 매끄럽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여전히 국가주의와 획일화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다소 다를 수 있지만). 그렇기에 지금 다시 요청되는 것은 ‘보편성’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하나의 구체성 아래 나머지의 차이를 무시하는 보편성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움과 없음을 기반으로 하는 보편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73쪽 이하).
지젝은 초기 저술부터 줄곧 규정과 능동성보다는 수동성, 물러남과 같은 부정성에 주목해왔다. 한편 많은 비판자들이 부정성과 수동성에서 어떻게 저항의 전략이 가능한지를 추궁해왔다. 지젝은 이 책에서 여기에 정면으로 답한다(3부 특히 6장). 지젝이 취하는 전략은 허먼 멜빌의 소설 「바틀비」(Bartleby)의 주인공인 바틀비의 태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743쪽 이하). 지젝은 국지적인 문제와 각종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부정하고자 하는 것에 기생하는 정치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하지 않기를 선호한다(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것이 부정하는 것에 기생하는 “저항” 또는 “항의”의 정치학으로부터 헤게모니적 위치 그리고 그 부정 밖의 새로운 공간을 여는 정치학으로 이행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공공장소에서 그러한 다양한 행위들을 상상할 수 있다: 명백한 “여기 새로운 직업의 멋진 기회가 있습니다! 참여하세요!” ,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자기의 깊이를 발견하세요, 내적 평화를 찾으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역시 마찬가지이다. 또는 “당신은 우리 환경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 인식하고 있습니까? 생태학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또는 “우리 주위에서 목격하는 모든 인종적이고 성적인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산의 행위로서 모든 정성적(定性的)인 차이들을 순수하게 형식적인 극소차이로 환원하는 것이다.”(746~747쪽)
이는 단순히 모든 참여를 거부하겠다는, 행동과 참여의 내용에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 완전히 새로운 대안이 바틀비의 몸짓에서 곧바로 도출된다고 주장하는 것, 지금의 체계를 넘어서는 질서를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활동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은 ‘바틀비 정치학’을 비롯해서 여러 층위에서 수많은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낯선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새롭게 사유하라고 추동하는 힘, 바로 이것이 지젝의 글, 「시차적 관점」이 가진 가장 큰 힘일 것이다.
“해방적 가능성을 찾는 독자에게 이 책은 결코 실망스럽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제목에 나타나듯이 이것은 형식에 대한 조언이다. 확실한 내용이 이따금 그 형식을 채우고 있으나 우리가 토대로 삼아야 하는 방법론, 우리를 무장시킬 도구는 시차적 관점이라는 형식이다. 삐딱하게 보라. 감옥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샹그리라의 윤곽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샹그리라는 감옥만큼이나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성은 천국, 에덴, 샹그리라가 아니라 선과 악 사이의 시차적 공간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둘 사이의 간극, 그 긴장과 가능성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그 불가능한 공간 속에 머물며 거절하는 것, 그것이 시차적 관점에 의해 드러나는 실천적 해방의 가능성이다.” (829~830쪽,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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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에요. 철학은 단지 ‘네가 이것이 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게 뭐냐?’라는 식으로 질문할 따름이지요. 그런 겸손함이 역설적이지만 철학의 위대성입니다.”라고 답한다. 지젝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은 <시차적 관점>(마티 펴냄)은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에 충실한 책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해온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로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서 재정의하며 재구성한다.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신경생물학에서 의식현상과 회백질 더미,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정신분석학에서 욕망과 충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성적 삽입의 대상이면서 출산의 기관이기도 한 질(바기나)의 시차 등등.
지젝은 이 책에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는 시차적 간극들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의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된다. 그가 보기에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를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001)에서 얻어오지만, 칸트주의를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 달리 헤겔적 사유에 접목시킨다. 그가 보기에 헤겔의 근본적인 교훈은 존재론의 핵심 문제가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라고 본 데 있다. 흥미롭게도 지젝이 들고 있는 다양한 사례 가운데는 분단 한국의 상징적 장소도 포함돼 있다. 바로 비무장지대 남쪽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다. 이 ‘극장’ 같은 건물에는 ‘스크린’ 같은 창이 설치돼 있고, 북한의 ‘현실’을 전시 가옥들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저녁에는 동시에 불이 켜지는 집들이다. 여기서 현실은 틀에 맞춰진 외양(현상) 그 자체다. 아르헨티나의 사례도 흥미롭다. 2001년 12월 반정부 시위 때, 특히 시위 군중의 표적이 됐던 경제부장관 카발로는 그를 조롱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던 자신의 가면을 쓰고 집무실에서 탈출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최상의 가면이라는 정신분석적 교훈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순수한 차이는 한 요소와 다른 요소 간의 차이가 아니라 한 요소와 그 자체와의 차이다. 여기서 시차는 서로 대칭적인 두 관점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이 있을 때 그것을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그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채우게 된다. 예컨대, 지젝은 마르크스의 시차를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라고 본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에서 지적한 대로,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다. ‘레닌을 반복하라!’는 그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은 두 겹의 싸움을 요구한다.
09. 04. 13. | |
첫댓글 지젝이 취하는 전략은 허먼 멜빌의 소설 <바틀비>(Bartleby)의 주인공인 바틀비의 태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활동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지젝이 내세우는 근본적 수동성과 절대적 부정성의 정칙학의 핵심이군요.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에요. 철학은 단지 ‘네가 이것이 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게 뭐냐?’라는 식으로 질문할 따름이지요. 그런 겸손함이 역설적이지만 철학의 위대성입니다.” :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통하는 말이군요.
요즘 저는 세상을 해석하는 두 관점-배제적 관점, 상보통합적 관점에 대해 실험 중입니다. 지젝은 변증법을 통해 상보통합적 최소차이를 이용한 혁명을 꿈꾸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샘도 혁명을 선호하시나봅니다. ^^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끼는 요즘 사실 저는 솔직히 시차 적응이 피곤하군요. 플라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복잡한 인생, 복잡한 철학, 단순한 나의 삶, 무지에의 사랑 ^^
하여간 그런 철학자들이 불편하네요. 겸손의 오만. 무지의 지. 도착의 도착. 언제 도착의 끝에 도착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