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 천재, 열혈 애국청년
♣ 도동골의 어린 신동
난세(亂世)는 영웅을 낳는다. 휘몰아치는 풍운에 꺾이지 않는 인물들이 영웅으로 자라난다.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났다. 미당(未堂) 서정주는 시인다운 필치로 그 시대를 묘사한다.
"역시, 이 무럽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벌써 조선의 황혼이 시작된 때다. 거센 외세와 신문명의 물결은 이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처사(處士)의 나라 조선 반도를 에워싸고 출렁거리기 시작했건만, 조선은 여전히 태고의 꿈에서 깨지를 못한 채, 세계와 합류할 철저한 자각도 없었고 또 이를 끝까지 거부할 통일된 힘도 없이, 황혼의 장터와 같은 외세의 트집판 속에 어쩔 수 없는 낙일(落日)을 비롯한 때였다."
해는 저물고 사람들은 흩어지는 쓸쓸한 황혼의 장터 같은 시대에,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세종 대왕의 형이었던 양녕 대군의 16대 후손이었다. 그러나 5대조 이후로는 벼슬길이 끊겨서 왕족이면서도 가난 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이경선은 풍류객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과거에 낙방한 후, 아름다운 경치와 풍수(風水)를 쫓아 몇 달씩 전국을 방랑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서 재산을 탕진했던 인물이었다.
어머니 김해 김씨는 서당 훈장의 따님이었다. 당시의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글자를 익혔고 학식도 있었다. 자식을 여럿 잃고 나서 마흔이 넘어서 낳은 6대 독자 이승만을 끔찍하게 아꼈다. 그녀는 삯바느질로 살림을 꾸려가며 아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이승만이 태어난 곳은 황해도 평산이었지만, 두 살 때 한양으로 이사했다. 이곳저곳 옮겨다니다가 자리잡은 곳이 남문 밖 도동 골짜기, 그곳의 작은 초막에서 스무 살이 될때까지 살았다. 그의 집은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인 우수현 남쪽에 있었다. 이승만의 호 우남(雩南)은 자신이 나고 자란 우수현 남쪽을 가리킨다.
어린 이승만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그의 주변에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양반에 왕족이었으면서도 가난한 이들과 벗하며 살았기에 생각과 느낌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원순은 소년 이승만이 살았던 한양을 묘사한다. "길은 토벽으로 된 초가집 사이를 제멋대로 굽이쳐 돌아가는 좁은 골목뿐이었고 위생시설에 대한 관념도 희박하여 요강 속의 배설물을 길가에다 쏟아버리기가 일쑤였다. 세습적 전제 군주는 백성에 대해서 참혹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강 다리에 달린 사형대에는 참형에 처해진 신하의 머리 없는 시체가 때때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승만의 유년 시절에 대한 특별한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영특함이다. 모친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나이 여섯 살에 천자문을 모두 외워서 부모를 놀라게 했다. 그의 부모는 이웃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동네 사람들은 신동이 났다며 함께 축하했다.
천자문을 암송한 뒤, 이승만은 시인으로 첫 작품을 남겼다. 그에게 한시(漢詩) 짓기를 가르친 분 역시 어머니였다. 한시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해서 지은 시는 비범한 재능을 보여준다.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
이제 막 천자문을 암송한 여섯, 일곱 살의 꼬마가 자연을 삼아 시를 지은 것도 놀랍고, 그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오영섭은 다음고 같이 평가한다.
"조선 초기에 김시습이 5세의 어린 나이에 대궐에 들어가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번득이는 듯하네' 라는 댓구를 지어 유명해진 것처럼, 이승만은 이 시구를 통하여 자신의 비범성과 문학적 재능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하나는 시력을 잃을 뻔한 위기이다. 여섯 살 때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는데, 그 후 "빨갛게 달군 쇳덩어리가 양쪽 눈을 찌르는 듯한" 심한 통증을 느꼈다. 빛이 눈동자에 들어올 때마다 아픔을 느꼈기에, 두터운 보자기로 눈을 덮어야했다. 재래식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이승만의 부모는 수소문 끝에 서양 의술을 배운 일본 의사를 찾아갔다. 아마도 당시 한양에 와 있던 일본 임시 공사관의 군의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사는 안약을 주며 하루에 몇 방울씩 넣으라고 당부했다. 그 지시를 그대로 따르자 불과 사흘만에 씻은 듯이 나았다. 하마터면 6대 독자의 눈을 잃을 뻔한 부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너무나 감사해서 의사에게 들고 간 것이 달걀 두 꾸러미, 가난한 부모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다. 의사는 웃으면서 아이에게 더 필요할 테니 아들에게 먹이라고 돌려보냈다.
이것이 이승만과 서양 문명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이한우는 이 사건을 특별하게 표현한다. "이승만의 무의식에 서구의 과학 기술에 대한 신뢰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재래 의술로 깨끗하게 낳았으니, 당연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서양 의학은 이승만의 눈을 뜨게 했고 훗날 그는 그 의학을 낳은 문명을 향하여 한국인들의 눈을 뜨게 했다.
이승만의 유년이 보여주는 특징은 집중력이다. 노래 공부, 연날리기, 나비 그리기 등 재미있는 놀이와 함께 즐겁게 자라났던 소년에게는 한 가지에 몰두하는 습관이 있었다. 서당 선배 신긍우의 권유로 동양의 고전 「삼국지」를 손에 잡자, 완전히 그 속에 빠져버렸다. 그 뒤에도 「수호전」, 「전등 신화」 등에 계속해서 매료되었다.
부모와 스승들은 이승만이 과거 준비를 위한 학과에 전념하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학과 이외의 다른 책들을 읽으려면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이승만은 청지기의 집에 숨어가면서 책들을 독파했다. 그 외에도 어린 시절 '꽃귀신에 반한 녀석', 나비 그림에 미친 '이나비' 등으로 불렸던 것을 보면 꽃이나 나비 같은 자연에도 푹 빠질 만큼 감성이 풍부했던 것 같다.
서정주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모든 열중은 한번 시작되면 마치 흠뻑 무엇에 반한 것과 같았고, 또 사실로 그는 모든 것에 반할 수 있는 성격을 갖춘 소년이기도 했다."
집중력은 모든 성취의 기초가 된다. 훗날 다방면에 걸쳐서 탁월하게 발휘된 이승만의 능력은 오랜 집중력으로 쌓아올린 다양한 학습의 결과였다.
♣ 한학(漢學) 공부와 과거 시험
이승만은 퇴직한 관료였던 이근수가 세운 서당에 다녔다. 이근수는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등 고위직을 지냈다. 을사조약 후에는 조약을 무효로 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항일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이승만과 같은 전주 이씨에 양녕 대군의 후손이었으며, 항렬을 따지면 이승만의 조카뻘 되는 인물이었다.
양반집 아이들 30여 명이 함께 배운 도동 서당에서는 뛰어난 선비들이 가르쳤다. 신동(神童)은 자라서 천재(天才)가 되었다. 이승만은 학생들 중에서 항상 학업 성취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열일곱 살 무렵에는 동양의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떼었다.
당시의 양반 자제들의 공부는 오로지 과거 시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낙방이었다. 신동에서 천재로 자라났지만, 시험에는 운이 없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뛰어난 천재가 조선 팔도에 많았을까? 꼭 그렇지만은 아닌 듯하다.
이승만이 과거에 도전했던 어느 해, 15만 8578명의 응시자 가운데 급제자는 겨우 5명이었다. 지금도 한국에는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지옥의 역사는 깊고 오랜 것이었다. 높은 경쟁률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부정부패였다. 조선왕조 말엽, 과거 제도 자체가 썩을 대로 썩었다.
권문 세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과거 급제는 꿈같은 일이었다. 이승만과 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청년들에게는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 시험 답안지는 보지도 않고 덮어버리는 것이 예사였고 급제는 모두 시험관에게 바치는 금품으로 팔렸다.
어려서는 신동이요 제법 자란 후에는 천재로 불러왔던 이승만이, 부모와 스승, 동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과거장에 갔다가, 돌어서는 발길은 언제나 처량했다. 당시에는 해가 저물면 한양으로 향하는 사대문의 문을 잠갔다. 문이 잠기면 사대문 밖에 사는 응시생들은 오갈 데가 없게 된다. 그들을 위해서 과거 응시자에 한하여 밤중에 성벽을 넘는 것이 허락되었다.
경복궁 앞에서 시험을 치르고 남대문까지 걸어와서 다시 성벽을 타고 넘어 도동골까지 돌아가는 길은 지치고 피곤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날, 이승만은 남문의 성벽을 넘다말고 무심코 걸터앉았다. 꽤 오랜 시간, 갈피 없는 생각에 잠겼다. 점점 노쇄해가는 아버지, 관직을 사고팔며 협잡(挾雜)에만 기울어지는 조정, 기약이 없는 장래 ...
유능하지만 길이 열리지 않은 젊은이에게, 깊은 밤과 타넘어야 하는 성벽은 그대로 걸터앉아 생각에 잠기기에 어울리는 시간과 장소였으리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깨뜨린 것은 인기척과 놀란 소리였다.
이승만이 살펴보니 앞 못 보는 사람 둘이서 손으로 더듬어가며 성을 올라오다가 무엇인가에 놀랐는지 "어? 어?"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 순간의 심정을 훗날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자세히 들은 서정주가 전한다.
"이승만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얼결에 큰 웃음을 쳤으나 그 다음 순간 그는 까닭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똑똑히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이 밤과 이 성벽과 이 장님과 그 소리는 마치 자기 자신과 같고, 자기 입안 일과 조정의 일과 같고 또 조선의 일과 같은 일종의 절망감에 붙잡혔던 것이다."
이승만을 절망하게 했던 과거 제도는 189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갑오경장으로 추진된 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된 것이다. 무려 천년 세월을 유지했던 과거제의 폐지는 수많은 "예비 관료군"을 동요하게 했다. 실제로 과거 급제를 염원해마지 않았던 이승만은 과거 폐지가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마음도 들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세월을 겪으며 이승만은 조선의 전통적인 방식에 한계를 느꼈다.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무언가 새로운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한학(漢學) 공부는 그의 평생에 지울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사서삼경에 능통하고 동양 역사와 한시(漢詩)에도 뛰어난 일류 수준의 동양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학 공부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당시는 동양과 서양이 운명처럼 교차하던 시대였다. 시대와 운명은 동양에 정통해진 이승만의 발길을 서양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