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인생을 살아 갔다(후략․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앞부분)
아마도 그들은 먹구름 잔뜩 긴 하늘만을 하 늘로 알고 인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아웃사이더라 부르려 한다.
「아웃사이더」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인가. 오 늘날의 많은 진실과 상궤(常軌)도 과거에는 이단(異端)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모차 르트와 카프카와 모딜리아니도 당대에는 결 코 일반적 존재의 반열에 끼지 못했다.
1948년 정부수립후 한반도의 남쪽에도 그런 의미의 아웃사이더들이 명멸했다. 세속적 명 리(名利)를 탐하지 않고, 시류에 초연한 채 오로지 자신만의 「외길」을 걸은 사람들.
그들중 오늘날 아웃사이더의 범주를 훌쩍 뛰어 넘어 현대사의 거목, 그리고 시대정신의 상 징으로 자리매김된 이들도 적지 않다.
「NEWS+」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으되, 당대에는 아웃사 이더에 머물던 50인을 찾아보았다.
아웃사이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허 약함 뿐이다.
이 허약함으로서 나는 이 시대 의 부정성을 감당하고 있다』는 카프카의 말 을 상기한다면, 주류에 편승하느라 급급하지 않고 자신의 작은 힘만으로 「시대의 무게」를 감당해냈거나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 아닐까.
그래서 지난 50년의 궤적에서 그들은 「결코 끝나지 않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 해방과 정부 수립은 「복사씨와 살구씨 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라는 김수영 시(사랑의 변주곡)처럼 왔다. 압제에서 풀려난 해방의 환희가 온 국 토를 뒤덮었지만, 이 땅의 아웃사이더들에게 그것은 기나긴 비극과 시련의 또다른 태동이 었다.
허리 위쪽은 포기한 채 실시된 총선거와 정 부 수립부터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했고 시절은 여전히 수상했다. 정부가 수립되자마 자 일제와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다시 아웃사 이더가 되어 이승만을 질타하고 나서는 악순 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런 까닭이었다.
성균관대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의 면전에서 『남들이 피흘리고 싸울 때 외국여 자하고 놀다 온 게 무슨 대통령이냐』고 면박 줄 정도로 「대쪽」으로 일관한 유학자였다.
일제의 고문으로 다리를 못쓰게 돼 평생 앉 은 채 생활한 「마지막 선비」 김창숙은 51년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발표, 또다시 옥고 를 치렀다.
그는 유림의 대표였지만 재산을 모으거나 벼슬을 맡지 않았으며, 실리를 좇 아 당파에 드는 것을 피했다. 말년에는 집도 절도 없이 여관이나 친지 집에서 전전하다 가랑잎처럼 사그라졌다.
정치적 박해의 표상으로는 해방전 공산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꼽힌 다. 그는 56년 3대 대통령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투표 결과 는 이승만 504만여표, 조봉암 216만여표.
절반도 안되는 득표였지만 조봉암의 부상은 장 기독재를 획책하던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결국 58년 1월12일, 이승만정권에 의 해 간첩의 배후조종 등의 혐의로 체포된 그 는 1년6개월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진보당 사건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이름은 당 시 담당판사였던 유병진. 그는 58년 7월2일 1심 선고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조봉암에게 국가보안법위반만을 인 정,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관 계자 전원에게 무죄를 내렸다. 이승만정권은 깡패들을 동원, 「타도 유병진」을 외치게 했 고, 결국 그는 58년말 판사직을 떠나야 했 다.
3․1운동 이후 중국에서 의열단의 각종 테러 에 가담하다 해방 때까지 19년간 옥고를 치 렀던 김시현.
그는 52년 6월25일 유시태(당 시 62세)를 배후조종,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 격하려다 실패했다. 김구 암살에 대한 최초 의 응징이었다. 당시 70세였던 노투사는 이 사건으로 다시 길고 긴 옥살이에 들어갔다.
권중희 역시 김구 암살범(안두희)을 집요하 게 추적, 응징한 인물. 12년 동안 안두희를 추적한 권중희는 역사의 처벌이 법의 형벌보 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보화각」(간송미술관 전신)을 세운 간송 전 형필은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 재력을 민족문 화의 정화를 보존하는 일에 고군분투한 50년 대 인물.
역시 50년대의 인물인 우장춘은 일 반 대중에게 「씨없는 수박을 만들었다」는 오 보로 기억되지만, 한국 토양과 기후에 맞는 우량채소 종자를 개발한 세계적 농학자였다.
54년 경기도 광주에 가나안 농장을, 62년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는 평생을 「몸바쳐 일하자」는 신념으로 살았던 인물이 었다.
육군 특무상사 출신 홍순칠은 53년 4 월 독도의용수비대를 사비로 결성, 56년 12 월 경찰수비대와 교체할 때까지 일본경비정 을 네차례 격퇴하는 전적을 쌓았다.
이 땅의 아웃사이더들은 5․16과 박정희의 등장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육군 소장출신 김웅수는 군사 쿠데타가 낳은 아웃 사이더. 그는 쿠데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혁명죄로 체포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종찬도 「참 군인」의 길을 고집한 사람. 51 년 육참총장으로 부산 정치파동 때 이승만의 파병명령을 거부해 1년여만에 총장직에서 해 임됐던 그는 3선개헌에도 반대했다.
김재준 역시 5․16이 없었으면 한신대를 설 립한 교육자이자, 이 땅에 진보신학의 뿌리 내린 신학자로서만 살았을지 모른다. 그는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 제자를 거두어 70 년대 저항운동의 싹을 틔웠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투쟁으로 처음 행동에 나선 그 는 삼선개헌 때 노구를 이끌고 엠네스티 한 국위원장 등을 맡아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 다. 함석헌 역시 민족사상가로서의 철학을 일구는 데 바쳐질 일생이 독재로 인해 뒤바 뀌었다.
독재는 그로 하여금 교육자와 종교 인, 사상가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자유인권투 쟁에 앞장서도록 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 야 산다」 등 20여권의 저서에 담긴 그의 「씨 알 사상」은 생명론적 인간론의 정수였다.
계훈제 역시 「철저한」 아웃사이더. 47년 국 대안 반대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삼선개헌반 대투쟁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통일국 민회의, 국민운동본부, 전국민주화운동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 90년대에 명멸 한 수많은 재야단체에 이르기까지 항상 선봉 에 서있었다.
70년대는 광복군 대위 출신 장준하와 일본군 중위 출신 박정희가 숨막히는 결전을 벌인 시기였다. 장준하는 유신의 어둠이 짙게 깔 렸던 73년 12월24일 유신헌법개정백만인청원 운동을 주도, 유신체제에 정면 도전장을 냈 다.
박정희가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호 라는 비상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운동의 폭발성 때문이었다. 75년 8월17일 등산길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기까지 장준하 는 박정희시대에만 아홉번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장준하에게서 67년 「사상계」를 넘겨 받아 맥을 이었던 부완혁은 60년대를 풍미한 논객. 끝을 알 수 없는 지식욕과 예리한 비 판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는 오만한 군사독재 정권을 향해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퍼부어 한시대의 정신을 대변했다는 평을 듣는다.
장준하의 비극적 죽음은 목회활동에만 전념 하던 문익환을 민주통일운동에 뛰어들게 했 다. 그는 76년 명동사건으로 22개월 동안 첫 옥고를 치른 이후, 다섯차례 10여년의 옥살 이를 했다.
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를 창 립해 의장을 맡는 등 명실상부한 재야운동의 대부가 됐다. 89년 3월 『통일을 앞당기겠다』 는 열망을 품고 평양을 전격 방문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52년 사제서품을 받고 65년 원주교구에 나간 주교 지학순은 평생 원주를 지킨 인권운동의 대표적 사제. 70년대 초반부터 사회정의와 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한 그는 74년 『유신헌 법은 민주헌정을 배신한 것으로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해 옥고를 치렀다.
원주 토박이인 장일순은 평생 이렇다 할 직함 한번 가지지 않았던 현대 문인화의 대가. 그러나 그는 지학순과 함께 김지하 김민기 등이 정 신적 메카로 삼은 「원주 그룹」의 핵심으로 70년대 말부터 생활운동을 통한 민주화 활동 을 막후에서 주도했다.
신동엽은 67년에 발표한 장편 서사시 「금강」 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민 족시인. 「껍데기는 가라」며 외세와 압제에 저항했던 신동엽은 60년대에 민족혼을 서정 적 시혼에 접목시켜, 짧은 세월 절창으로 노 래하다 병마에 잡혀갔다.
또다른 음률로 60 년대를 풍미했던 「거대한 뿌리」의 시인 김수 영. 그는 난해시에서 참여시까지, 서정시에 서 혁명시까지 끝간 데 모를 활동으로 지난 30여년간 모더니즘 그룹에서 꿈과 자유를 노 래한 절세의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스스로 「낙동강 파수꾼」을 자처, 평생 낙동 강변을 지켜온 부산 토박이 김정한은 좌우를 동시에 아우르는 독자적 저항문학을 일구어 냈다. 「조선교원연맹조직사건」 「양산농민봉 기사건」 등에 관련돼 두차례 옥고를 치르기 도 했던 그는,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삶을 생 생하게 그려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백낙청이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것은 28세 때. 당시 그의 권두평론 「새로운 창작과 비 평의 자세」는 이후 「창비」의 흔들리지 않는 이념이 됐다. 강제폐간, 등록취소, 숱한 연 행과 구속, 판매금지 등의 70,80년대 수난사 속에서도 백낙청은 「창비」를 지켜냈다.
이영희는 첫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74년)에 서부터 일곱번째 평론집 「새는 좌우의 날개 로 난다」(94년)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은폐 왜곡 날조하려는 흉계에 대항해 진실을 찾아 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 내 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온 언론인 출신 대학교 수.
60, 70년대 경제이론서 「민족경제론」 등 의 저자인 전조선대교수 박현채는 민족경제 론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김지하는 63년 한-일회담 반대로, 70년 「오 적」에 의한 반공법 위반으로,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의 길을 걸은 행동파 시인.
통혁당 사건으로 20년 복 역, 박정희체제의 희생양이었던 성공회대교 수 신영복은 옥중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 색」과 「나무야 나무야」 등을 통해 「맑고 곧 은 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70년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 나이에 분신한 봉제공장 「시다」 전태일. 그는 지켜 지지 않는 허울좋은 법을 자신의 몸과 함께 화형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노동자의 불 꽃이 되었고, 그 불꽃이 폭압적 70, 80년대 민주노조운동으로 이어져 87년의 노동자 대 투쟁과 89년의 전노협 결성으로 계승됐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전태 일 평전의 저자인 조영래. 전태일이 죽었을 때 그에게 달려갔던 학생운동가 조영래는 43 세의 나이에 90년 12월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 시국사건, 노동 공해사건의 변론을 맡아 승소판결을 이끌어 낸,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다.
「아침 이슬」 「상록수」 등의 노래로 70, 80년 대 젊은이들의 정신적 피폐함을 달래주던 김 민기는 고은의 연작시집 「만인보」에서도 『김 민기와 양희은의 비겁할 줄 모르는 통기타/ 신중현의 치사할 줄 모르는 노래/ 이 셋이 시대의 자유를 꿈꾸었다 모두와 함께』라고 기억되었다.
74년 당시 기록적인 100만장 이 상 판매고를 올리다 이듬해 금지곡이 된 「미 인」의 신중현. 그는 62년 한국 최초의 록밴 드 「애드 포」를 결성해 이 땅에 록음악의 씨 를 뿌렸다.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타계한 윤이상은 한국 인 최초의 세계적인 작곡가였다. 『나는 전체 서구문화와 음악에 대해 생사를 걸고 싸워야 했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서양 현대음악기 법을 통해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표현했다.
윤이상은, 그러나 60년대 동베를린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후 「친북 인사」라는 따가운 눈총 속에서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예술가는 가고 신화만 남는다』는 말은 이중 섭과 오윤의 경우에도 딱 들어맞는 말. 이중 섭은 세상을 떠난 뒤 폭발적 인기를 얻었지 만 생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과 실어 증, 정신착란 속에 40년 생을 마감했다.
오윤 역시 이중섭과 시대는 달리했지만, 서민 의 애환, 희망과 절망의 순간을 목판에 새겨 두고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동편제 소리의 하나인 「강산제」는 박유전, 정응민, 정권진으로 그 흐름이 이어진다. 우 람하고 직선적인 동편제 소리 계보의 적자인 정권진은 강산제판소리연구보존회를 이끌면 서 고수 김명환과 더불어 동편제 심청가를 무형문화재로 남겼다.
영화감독 김기영은 리 얼리즘과 문예영화 일색이던 영화계에 모더 니즘 영역의 자리를 메웠다. 55년 「주검의 상자」를 시작으로 40여년간 31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97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해외 에서도 주목받는 「컬트 거장」이 됐다.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안과전 문의 공병우는 38년 눈병치료를 받으러온 한 글학자 이극로를 만나면서 한글사랑과 한글 기계화 운동에 나서 세벌식 공병우타자기, 한글텔레타이프, 점자타자기 등을 개발하는 등 평생을 한글 글자꼴을 연구하는 정열과 옹고집의 외길을 걸었다.
「한국의 에디슨」 신석균은 발명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을 고집 했다. 다섯살 때 「자전거 우산」을 발명하면 서 시작된 발명 이력은 발명품 4000여점, 특 허 실용권 700여건, 국제발명상 89번 수상 등의 기네스북 기록자로 남았다.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만든 자동차였지만 50, 60년대의 하동환자동차는 당시 전차와 더불어 새로이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잡았 다.
자동차정비공장의 공원이던 하동환이 자 동차제작소를 만든 것은 24세 때인 54년. 하 동환자동차는 86년 경영권이 쌍용으로 넘어 갔지만 하동환의 이름을 「자동차왕」으로 남 겨놓았다.
한국에서 서구 철학의 본질을 서구인들 못지 않게 해명한 박홍규는 한평생을 「사유의 세 계」에서 살다간 철학자.
이미 일제시대에 영 -프-독-그리스-라틴어를 정통으로 공부한 그 는 뛰어난 철학적 성취를 달성, 제자들에게 절대적 숭상의 대상이 되었지만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사(隱士).
은사로서의 삶은 나환자와 더불어 산 「소록도의 슈바이 처」 신정식도 마찬가지. 85년 정년으로 떠날 때까지 12년간 소록도를 지켰던 그는 환자의 손발을 씻어주는 헌신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장기려 역시 평생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6․25직후 부산에서 복음의원을 열고 피란민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시작한 그의 봉사활동은 전세계 에 알려져 79년에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신한승은 「태껸」 재현을 위해 20여년 이상 고독한 싸움을 벌였다. 직장도 팽개치고 가 산을 탕진하며 「우리의 무술」을 고집한 집념 으로 마침내 83년 태껸은 중요무형문화재 76 호로 지정됐고, 그도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5월 광주민주항쟁을 이끌다 전남도청에서 숨 진 윤상원. 은행원으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노동운동가와 노동야학 교사로, 급기 야 5월항쟁의 리더로 나섰던 그는, 목숨을 던져 5월 광주를 역사의 비석에 깊게 새겼 다.
윤보선전대통령의 부인 공덕귀는 70, 80년대 에 걸쳐 구속자가족협의회장, 한국교회여성 연합회 인권위원장 등을 맡으며 「소외된 여 성들의 보살핌」에 진력했다. 대통령 부인으 로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당시 민주 화 운동가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힘이 됐다.
이효재는 96년 7월 정부의 국민훈장 석류장 수여를 거부한데서 보듯 「기개」의 여성운동 가. 그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를 맡으면서 위안부 문제를 국제 쟁점으로 발전 시켰고, 여성인권 신장에 평생을 바쳤다.
박종철 장례식과 이한열 노제에서 진혼굿을 벌 인 이애주는 극장에 갇혀 있던 전통춤을 「해 방의 공간」에 이끌어내는 등 무용가로서 독 특한 면모를 보였다.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갔던 김학순은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만행의 역사 기록을 공개 증언했던 「정신대 할머니」.
위안부 노릇을 하다 탈출, 46년 서 울로 돌아와 결혼했으나 6․25로 남편을 여 의고 그뒤 딸과 아들도 차례로 잃은 그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92년 일본 법정에 손해배상청구소 송을 냈고 수요집회도 주도한 그는 97년 12 월 기구한 삶을 마칠 때 전재산 1700만원을 교회에 기증했다.
통도사 큰스님 경봉은 당대의 선승답게 평생 중앙 종단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거처인 통 도사 극락암 삼소굴에 머물면서 선승들을 가 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경봉은 19세 때부터 열반에 들 때까지 무려 60여년을 꾸준히 일 지를 써 「삼소굴 일지」라는 한국 근대불교사 의 산 자료를 남겼다. 효봉은 판사의 지위를 박차고 나와 승려가 된 인물.
36세 때인 23 년, 그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한 독립운동 가는 벽력같은 고성으로 그를 질타했고, 마 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양심이 그를 번뇌 의 나락으로 빠뜨린 탓이었다.
그 길로 집을 떠나 스스로 아웃사이더의 길을 택한 효봉은 엿판을 메고 방랑하다가 25년 금강산 신계사 에서 법명을 얻었다. 송광사에서 대종사 법 계를 받은 그는 「무」(無)를 평생 화두로 삼 았고, 후학에게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관계에 대해 영원한 물음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