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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복지나눔터 원문보기 글쓴이: 똠방/義亭신종헌
기침
마흔 다섯에 데뷔한 늦깎이 소리꾼 장사익 『슬픔을 풀어내는게 노래구먼유』
「친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의 장사익씨는 세속의 영달로부터 초연한 가객의 혼을 담고 있다. 그런 그의 노래를 듣고나면 머리끝 한쪽이 시려오거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정 현 상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남태평양의 섬, 그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황홀하고 평화롭게 살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주식 중개인으로 안정된 지위를 누리던 화가 폴 고갱은 마흔넷의 나이로 새로운 세계 타히티로 떠났다. 실제 그의 삶은 권태와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스물여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직장을 갖고서는 뭔가 늘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서른여섯 살 때 「이제부터 매일 그림만 그리겠다」며 직장을 내던진 인물.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마침내 발견한 지상의 천국 타히티로 떠난 고갱과 같은 이가 우리 곁에도 있다.
소리꾼 張思翼(장사익·48). 그토록 원하던 노래를 부르기 위해 20여 년을 에둘러온 이다. 지난 7월3일 오전 9시30분 서울역 구내. 장씨는 이미 서울역에 나와서 기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공연을 위해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동행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뭐하러 저 같은 걸 취재헌다고 그래유』 키163cm의 작지만 단단해보이는 체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그가 느린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호기롭게 웃어젖혔다. 그의 부인 고완선씨와 이번 공연에 함께 나서게 될 국립국악관현악단 타악수석인 金奎亨(김규형·41)씨가 그쪽 일행이었다. 또 다른 공연자인 피아니스트 林東昌(임동창·42)씨는 안성에 있는 집에서 대구로 출발, 현장에서 만나기로 돼 있었다.
멋쩍게 수인사를 나눈 일행은 대구행 새마을호에 올라탔다. 먼저 좌석을 마주보게 해서 네 명이 앉았다. 일행 중 한 명은 옆 좌석에 떨어져 앉아야 했다. 부인을 빼고는 네 명의 남자가 옆에 앉을 누군가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갖고 서로 떨어져 앉겠다고 나섰다. 실상은 서로에 대해 예의를 갖추려 했던 것. 결국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따로 자리를 잡았다.
마흔 다섯에 가수 데뷔
6월초 고전적인 느낌이 나는 인사동의 한 술집.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 5평 남짓한 이곳에 너더댓 명의 30대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의 화제는 한 가수 이야기였다. 『지금 나오는 이 「찔레꽃」 노래 누가 부르는지 아나?』 『목소리가 참 좋군. 민속음악 같은 느낌이 들어. 흡인력이 있어』 『장사익이라고, 마흔다섯이란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한 사람이래』 『놀랍군. 왜 그 늦은 나이에 가수로 나섰을까?』 위 술집 같은 정경이 20, 30대가 찾는 술집이나 카페, 커피숍에서 자주 벌어지는 것이 목격된다.
그의 노래는 이처럼 입소문을 타고 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의 팬들은 별난 사람이 많다. 서울에서 지방공연까지 따라 가는 마니아의 수도 만만찮다.
그는 지난 95년 첫 음반 『하늘 가는 길』을 발표해 대중적 인기는 누리지 못했지만 가요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으로 평가받았다. 음악평론가 이소영씨는 음악 계간지 「낭만음악」(통권33호)에 발표한 글에서 장사익씨의 음악은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어 대중음악계와 국악계에 대안의 음악언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요나 창(唱)의 부류로 나누기도 어려운 그의 독특한 창법을 혹자는 듣고 나면 머리 끝 한쪽이 시려오거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의 신산한 삶의 체험이 노래에 묻어나오기 때문이라는 것.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그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세속의 영달로부터 초연한 봉건시대 가객의 혼이 깃들여 있다. 하나하나의 음과 낱말을 포착하는 기백은 어떤 탁월한 록 보컬리스트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이며 여음과 여음 사이를 절묘하게 떠다니는 표현력은 어떤 절세의 재즈 보컬도 무력하게 한다』고 표현했다.
「매스컴 타는 게 부담스럽다」
대구공연에서 장씨의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된 부인이 일행에게 하루 일정을 알렸다. 『대구에 도착해서 점심 먹고, 3시부터 리허설, 저녁 7시30분에 공연을 시작합니다. 돌아오는 기차편은 밤 11시40분입니다. 그런데 대구에서 기획하신 분들이 오늘 밤 뒤풀이 때 단단히 각오하라면서, 오늘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해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개량한복으로 멋을 낸 김씨가 은근히 딴전을 핀다. 『아니 저녁은 안 먹고 공연해요? 일정에 왜 저녁 먹는 것은 뺐나요?』 인터뷰 시간을 따로 잡기 위해 장씨에게 리허설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지 물었다. 그는 『리허설은 아아, 마이크 테스팅만 하면 돼유』라고 말하며 우스갯소리를 끄집어냈다. 『어느 절에 처사가 불공드리러 와서 불공은 안 드리고 빈둥빈둥하고 있자 스님이 물었대. 처사님은 왜 불공드릴 시간에 빈둥거리기만 합니까?」 그러자 이 처사가 「마음으로 드리고 있지유」 하더래. 그러다 밥공양할 때가 됐는데 스님이 자신만 밥을 먹고 이 처사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 거여. 그래서 처사가 「스님 왜 저에겐 밥을 안줘유?」 하고 묻자, 스님이 「저두 마음으로 드리구 있구먼유」 그랬다는 거여』 일행이 박장대소를 했다. 김씨가 다시 농담처럼 한 마디 던졌다. 『요즘 아침들 먹고 다니나요?』 부인은 장씨가 한 번도 아침을 거르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농경 사회에서야 일찍부터 일어나서 일하다 보니 허기가 져서 아침을 꼭 챙겨 먹었더라도, 밤에 더 활동을 많이 하는 현대인들은 아침보다 밤참을 더 챙겨먹게 되는 것 아니냐고 기자가 말하자 부인이 동의했다. 다른 이들은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어쨌든 10시가 넘은 그 시각에라도 아침을 먹어야겠다는 김씨의 주장에 따라 일행은 모두 식당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원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객실 아나운서의 음성이 들렸다. 창밖에 눈길을 주고 있던 장씨가 『저 놈의 백로들 좀 보소』 하자 모두 그쪽을 바라본다. 창밖 야트막한 산의 솔숲에 수십 마리 백로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장씨는 계속 딴소리만 하고 있다. 『서산대사가 왜놈들을 위협하기 위해 달걀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쌓았대요. 도술을 부린 거죠. 저도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어요』 떨어져 앉아 아침을 먹고 있던 김씨가 『뭐, 서산대사가 수원성을 쌓았다고요?』 하며 엉뚱하게 말을 거들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장씨의 말은 자신이 TV를 비롯한 각종 매스컴에 거의 나서지 않는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가수들이 마치 상품처럼 자신을 광고하고, 매스컴을 통해 그럴 듯하게 포장되면 어느 단계까지 인기가 상승하고 수익도 늘어나겠지만 그 이상 무엇이 있겠어요? TV에 한번 나선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저는 그런 것에 관심 없어요. 지금 상식을 뒤집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장씨의 이같은 태도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기성 신인 가리지 않고 가수들은 누구나 홍보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이가 없다. 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마리아 칼라스, 비틀스, 마이클 잭슨 등 음악사를 빛낸 인물들은 모두 배경에 훌륭한 매니저의 기획 홍보의 힘이 있었다. 『어머니가 저더러 나훈아처럼 옷 입고 무대에 서라고 합디다. 그러나 저는 한복이 편해요. 무대에 섰을 때도 너무 호들갑을 떨면 사람들이 도망가요.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잘 놀면 되는 거죠. 유명한 가수가 낸 음반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1백만장 팔렸다고 가정해 봐요. 엄청나게 히트한 거죠. 그러다 다음에 낸 음반이 99만장 팔렸다면 그 기획사나 가수는 실망할 겁니다. 왜 1만장이 덜 팔린 것일까 하고 원인을 분석하다 보면 대중의 기호에 더 맞는 것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그 가수의 고유한 맛은 없어지게 됩니다. 욕심이 과해선 안돼요』 장씨는 『지금은 밥 먹고 살 만한가』 하는 우문에 『밥은 먹더라도 사는 건 음악으로 산다』라고 현답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김씨가 『빈 자리에 누가 왔다는데 가봐야겠어요』하며 일어섰고, 부인도 지정 좌석으로 돌아갔다. 기차 바퀴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지난 5월초 춘천공연차 경춘선을 탔던 게 기억납니다. 춘천의 도시 이미지가 그래선지 공연이 아주 깨끗한 느낌이 들었어요』 요즘 그는 이처럼 주로 라이브 공연장에서 팬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해 연말 화제를 모았던 세종문화회관 공연, 최근의 「자유」공연들…. 대구 공연은 처음이다.
가구상 전파상 노점상 노릇도
그의 고향은 충남 홍성군 광천. 그가 전자음악을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음악을 중시하게 된 이유에는 고향이 있다. 유명한 장구잽이였던 아버지의 장구가락을 듣고 자랐다. 그 가락이 몸에 밴 것이다. 시원스레 내지르는 탁성(濁聲)은 초등학교 때 웅변을 한 경험과 연결된다. 목소리에 힘을 기르기 위해 5학년 때부터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하기 전까지 틈만 나면 뒷산에 가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그의 해석이 재미있다. 『그 뒤부터 술담배를 안하니까 목소리가 그대로 유지되더군요.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생각, 좋은 마음을 먹는 것도 좋은 목소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듯합니다』 한 명의 훌륭한 가수가 탄생될 배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의아해할 만큼 긴 시간을 에두르게 된다. 68년 고교를 졸업한 그는 직장에 취직하는 동시에 가수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음악가 한동훈씨와 정경천씨로부터 발성연습부터 시작해 대중음악의 기술적인 부분을 수련받았다. 그 뒤 군입대한 뒤 문화선전대에서 가수생활을 하게 돼 모두 6년간 예비가수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저는 이 대중음악판에서 노래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도 기술이니까요. 그런데 그 세계가 돈도 많아야 하고 눈치도 빨라야 하는 게 제 적성과는 영 맞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밤에는 야간대학에 나가 공부하며 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러나 74년 1차 오일파동 때 그는 회사에서 해직당했다. 뼈저린 아픔을 겪게 됐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결국 그는 독서실 가구점 전파상 노점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게 된다. 『어릴 적 들었던 동네 할아버지의 쇄납(태평소) 소리가 자꾸만 생각나데요. 그것이 머리 속을 어지럽히니 되는 일이 있어야지유』 그는 80년 아마추어 국악단체 한소리회에 가입했다. 거기서 그는 먼저 단소와 피리를 배웠다. 86년초에는 대금 명인 원장현씨에게 대금산조와 쇄납을, 강영근씨에게 정악피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지방이든 서울이든 놀이판이 벌어지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현실이지만 제 의식은 늘 음악하는 것에 몰두해 있었죠. 현실과 이상이 맞지 않으니 앞이 안 보일 수밖에요. 그래서 생활이 힘들었어요. 90년부터 93년까지 카센터를 운영했는데 그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제가 무엇을 하려고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르겠더군요』 결국 그는 「3년동안만 내 뜻대로 살아보고 그 길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오자」고 마음 먹었다. 태평소를 챙겨든 그는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며 전주대사습 공주농악(93년)과 금산농악(94년)에서 장원, KBS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95년)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94년 1월부터는 사물놀이팀 「이광수와 노름마치」에서 태평소를 불며 태평소연주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태평소라는 악기는 사실 사물놀이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다만 즉흥성이 뛰어난 악기여서 태평소가 들어가면 풍성한 느낌이 납니다. 제가 그 악기를 통해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명예를 얻으려한 것도 아니었어요. 오직 불고 싶은 악기였고 욕심이 없었기에 잘 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응어리진 한을 두고 갈 거요」
작심한 3년의 절반쯤 지났을 때 그는 운명적으로 임동창씨를 만났다. 공연이 끝난 뒤 갖는 「뒤풀이」 자리에서 이미 그는 대단한 가수로 소문이 났던 터였고, 어느 날 술자리에서 장씨의 노래를 들은 임씨는 『공식으로 판을 벌이자』며 본격적으로 노래할 것을 권유했다. 『응어리진 한을 두고 갈 거요. 형님 한도 풀고 듣는 이들에게 행복도 주소』(임동창) 『똥창아(애칭) 나는 싫다. 내가 지금까지 정조를 지켰는데 이제 와서 무얼 어쩌겠다고』(장사익) 그러나 임씨는 장씨의 집에까지 쫓아가서 『제가 책임질 테니 우리 한번 해봅시다』라고 졸라 결국 장씨는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임씨가 없었더라면 소리꾼 장사익은 아직도 몇몇 사람들에게만 인상적인 「카수」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임씨와 장씨, 그리고 타악주자 김규형씨가 의기투합한 것이 94년 8월. 그러나 공식적인 활동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1월 이들은 신촌 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현장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중시했기 때문에 두어시간의 짧은 연습을 거치고 무대에 섰다. 뜻밖에 객석은 차고 넘쳐나 1백명 정원에 4백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때의 느낌은 뭐라고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어요. 그때부터 계속 신나는 인생의 연속이었죠. 아, 이게 정말 사는 거구나, 내가 세상에 나와서 할 일을 제대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극장 공연에서 그는 틈틈이 만들었던 『국밥집에서』 『찔레꽃』 등 5곡의 창작곡과 신중현의 『봄비』 등 리바이벌곡 5곡을 불렀다.
기차는 어느새 대전을 지났다. 창작과정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장씨의 말도 조금 빨라졌다. 그의 깊은 체험은 어눌한 말투를 가리고도 남았다. 93년 겨울 어느 날 서울 인사동의 한 국밥집. 40대 중반의 머리 희끗한 남자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다. 그가 밥을 먹다 말고 물끄러미 벽을 바라본다. 벽에는 연필로 쓴 글귀가 보인다. 「노래를 부른다/ 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 치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희망가를 부른다/ 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 눈길 머무는 나를 본다…」 (『국밥집에서』 중) 이 중년의 남자는 장사익이다. 그는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었다. 앞부분에는 대금산조풍으로, 『희망가』 부분은 원래곡을 살리고, 뒷소절에선 진도아리랑 곡조를 붙였다. 한 편의 연극 같은 노래다. 그래선지 연극하는 이들의 뒤풀이 자리에 가면 영락없이 이 노래가 등장하곤 한다. 94년 5월 어느 날 강남 잠실의 한 아파트. 화단에 장미꽃이 한창 피었다. 중년의 사내가 아파트를 나서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다 장미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걸 본다. 그때 아주 강한 향이 그를 이끈다. 그 향은 장미꽃에서 나는 듯하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맡아보니 장미향이 아니다. 한 켠에 조그맣고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다. 장미에 가려있는 찔레꽃이 강한 향을 내뿜고 있다. 이 사내는 무릎을 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도 잘 안되는 세상, 겉만 중시하는 세상, 아름다운 일을 하고 의롭게 살아도 대우받지 못하는 세상에 찔레꽃처럼 묻혀 있는 이들을 떠올린다. 그 느낌을 노래에 담는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달처럼 슬픈…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아 춤추며 울었지…」(『찔레꽃』 중)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겠다
94년 금산농악으로 전주대사습에 참가했을 때 금산좌도시인동호회원들의 모임에 갔다가 장씨는 노래 세 곡을 만들게 된다. 일을 마치고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집에 돌아가는 사내의 마음을 노래한 『귀가』(정성균 시), 「순대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하는」 이들을 그린 『섬』(신배승 시), 꽃을 가꾸는 마음을 읊은 『꽃』(양해남) 등이 그것이다. 『시들을 보니 노래가 툭툭 튀어나왔어유』
―늦깎이로 데뷔한 것에 대한 감회는 어떠합니까. 『어떤 이들은 나이 먹어서 노래하는 게 좋은 말로 하면 안타깝다고 해요. 나이 먹고 웬 주책이냐는 질책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대환이 형님은 「이제 노래할 때가 됐다」고 합니다. 예컨대 젊어서 제가 인기가수가 됐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이 나이쯤에 「가요무대」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서 노래하는 것 이상은 못해요. 제가 서태지보다 이십년을 더 살았으니 그만큼 깊은 얘기를 노래로 풀어낼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자위합니다. 늙어서 뭔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도 힘이 되고 싶고요』 ―이제 그렇게 원하던 노래를 맘껏 부르게 됐으니 여한이 없겠습니다. 노래는 언제까지 하실 작정입니까? 『밀양 백중놀이 예능보유자 하보경옹은 늙어서 거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도 무대에 서면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을 줬다고 합니다. 그렇게 늙어서 까지 최선을 다해 노래하고 싶습니다.』 95년 7월초 그는 한 산악 등반대의 출정식에 초대를 받았다. 등반대는 히말라야 브로드산(8,047m)에 오르는 게 목적이었다. 산악인들 사이에 죽음의 산으로 알려질 만큼 험한 곳이다. 등반대의 안녕을 빌며 그는 노래 했다. 그러나 며칠뒤 그는 등반대원 1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등반대장은 동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산악인은 산에서 죽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긴다』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 장씨는 그때 자신의 산은 무대이며,그래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겠다고 결심했다.
―추구하는 음악적 이념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 노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어요.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진솔한 느낌일 뿐이지 무슨 철학이나 사상과 관련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요즘은 사회운동하는 이들의 행사에 종종 불려나가요. 지난 6·10항쟁 전야제, 5·18 전야제 등에도 갔다왔지요. 80년대에 저는 별로 한 일도 없고 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그런 자리에 가서 노래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느낌이라면…. 『슬픔을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다 힘들게 살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힘든 게 인간인 거죠. 저도 요즘에야 즐겁게 살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나 힘든 세월이었는지…. 즐거움을 노래하는 이들은 많아요. 그러나 저는 힘겹게 사는 이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요. 우리가 슬픔을 느꼈을 때 개운하게 울어버리면 더 시원하잖아요. 예부터 우리네 초상집에서 며느리들이 신나게 울면 그것이 동네 화제가 됩니다. 「그집 며느리 참 잘 울대」 하고 소문이 퍼지는 거죠. 그 며느리가 왜 혼절하도록 울겠어요. 시부모와는 정도 들었겠지만 그동안 받은 설움을 신나게 울어버리는 것으로 푸는 거죠. 그것이 국악에서 얘기하는 「고리를 푼다는 의미의 살풀이 신풀이 한풀이」입니다. 생산적인 슬픔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슬픔을 풀어낸다는 얘기와 대표로 있는 기획사 「행복을 뿌리는 판」이라는 타이틀과 어쩐지 모순되는 듯합니다. 『국악공연 기획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물놀이의 전설적인 인물들로 김덕수 이광수 김용배 최종식 등이 있는데 그 중 김용배가 일찍 죽었어요. 그래서 93년 그 친구 추모공연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했는데, 그걸 제가 기획했습니다. 그때 기획사 이름을 「행복을 뿌리는 판」이라고 붙였죠. 판은 무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는 것도 무대 위에서 사는 연극 같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팔고 행복을 뿌리는 무대가 되기를 바랐던 거죠. 슬픔을 씻어내는 것 자체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극과 극은 어쩌면 아주 가까워요. 하늘과 바다와 땅이 서로 극이면서 연결돼 있잖아요?』
―그러면 늘 공연을 함께 하는 장사익·임동창·김규형씨가 모두 서로 강한 개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잘 어울리는 것도 극과 극이 통한다는 논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박자를 깨부순다
『동창이형은 남성적이어서 기가 대단히 세요. 저는 소심한 편이고. 규형이형은 그 사이에서 또 절묘하게 연결해줍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이 그렇듯이』 김규형씨는 명창 김연수 선생의 아들로 판소리를 배우다가 북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전공을 바꾼 인물. 87년부터 타악주자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전북대 한국음악과 강의를 맡으면서 장씨의 공연이라면 지방도 마다않고 함께 한다. 임동창씨는 특히 기인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양악과 국악을 넘나들며 열정적인 연주를 해 팬들이 많다. 그는 연극 『오이디푸스와의 여행』 음악감독을 했다. 연극과 무용에서 연주했던 곡들을 모아 『오이디푸스…』란 이름으로 곧 음반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피아노와 쳄발로의 장점을 살린 개량 피아노로 실험적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기도 하다. 또 경기도 안성에 「쟁이골」을 만들어 여름 음악 캠프(8월2∼6일)를 열고 있다
―장사익씨의 노래를 따라 불러봤는데 아마 저보다 한 옥타브는 높은 소리로 부르는 듯하더군요. 『제 목소리는 보통 사람의 음정보다 4도 가량 높아요. 그래서 열창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힘도 들고요. 저는 어떤 공연이든 이틀씩 공연하지 못해요. 한번 공연할 때마다 정해진 제 수명에서 1년씩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진을 쏙 빼버리거든요. 어쨌든 한번 노래하면 그렇게 개운한 맛이 느껴지도록 해야죠』
―노래할 때 박자를 무시하고 부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타악주자 김대환씨로부터 배운 겁니다. 그분은 박자를 깨부수는 분입니다. 어느 날 저에게 동요 「산토끼」를 박자 없이 한번 해보라더군요. 그래서 박자를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불렀는데 대뜸 「거봐 박자를 세고 있잖아」 하지 않겠어요. 그만큼 우리 대부분은 어떤 틀 속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박자를 무시하는 건 그런 틀을 깨부수자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음악이란 원래 박자 같은 게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쁘면 소리지르고 웃고, 슬프면 우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러다가 거기에 가사를 붙이니까 노래가 된 것이고 기술적으로 편하게 하기 위해 박자와 화성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제 노래는 d 마이너라든가 하는 일정한 키는 있지만 악보가 없습니다』
―박자가 일정하지 않다면 협연하는 데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동창이형과 규형이형 그리고 저는 마음 속에 일정한 음악적 높이가 있어 어떤 상황에서건 조화가 이뤄집니다. 리허설할 때 「형, 틀렸어. 이 부분에서 박자가 들어가야지」 하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음반 「하늘 가는 길」 녹음도 하루만에 라이브로 뚝딱 해치웠어요』
아들 다니는 대학 교양강좌서 노래
일반적으로 가수가 음반 녹음작업하는 데 짧아야 1개월, 길게는 6, 7개월까지 걸리는 게 다반사다. 녹음할 때 장·임·김 외에 기타 주자인 김광석씨, 합창단 6명이 추가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기만 하다. 『저는 때로 무반주로 노래하는 걸 좋아합니다. 지난 애틀랜타올림픽 폐막공연 때 가장 돋보였던 가수는 무반주로 노래한 어느 가수였습니다. 최근 홀리필드와 마이크 타이슨 경기에서도 여가수가 미국 국가를 무반주로 부르더군요. 아주 듣기 좋았습니다. 고정 관념을 깨부수는 것으로 유명한 백남준씨도 처음에는 미친 짓한다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광고·예술계가 그를 모방하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동대구역에서 내린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대구에서는 대구탕을 먹어야 한다』고 김씨가 주장했지만 일행은 회덮밥으로 통일해 주문했다. 그 시각 TV에서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맹활약하고 있는 박찬호 선수의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LA다저스 팀이 만루찬스에서도 점수를 못내 박선수가 패전투수가 된 장면을 보고 장씨가 『인생이란 저런 거여』 했다. 부인은 줄곧 장사익씨를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들 부부는 금실이 좋아보였다. 두 아들 광수(21)·영수(19)군은 대전 목원대 한국음악과에서 대금을 전공하고 있다. 93년 그가 「3년 작심」을 했을 때는 가족과의 갈등도 심했다. 지금은 그도 즐겁고 가족도 즐거운 생활이 아닌가. 지난 해 봄에는 아들의 스승인 노동은 교수가 그를 초청, 교양과목시간에 6백명의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에서 노래한 적이 있었다. 그도 아들도 신명났던 하루였다고 그는 말했다.
대구시민회관대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구 공연을 기획한 「살판 21」의 박재욱씨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박씨는 이번 공연에서 판굿으로 막을 열 온누리국악예술단(대표 具尙本)을 소개했다. 이 예술단은 경북 청도군 칠곡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돼 있는데 전국사물놀이대회 대상을 받은 수준높은 팀이다. 장사익씨는 마이크 테스트 한다면서 몇 번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예술단원들과 호흡을 맞춰보자고 했다. 아이들이 극장 밖에서부터 사물을 치며 들어오고 장씨는 무대에 서서 태평소 소리를 본뜬 구음으로 보조를 맞췄다. 아이들의 실력도 수준급이었지만 장씨의 구음은 영락없는 태평소 소리였다.
임동창씨가 가족들과 함께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인사를 나눈 임씨는 대뜸 피아노 앞에 앉아 『형님 「대구블루스」 한 번 해볼까나』 한다. 『대구블루스』는 『대전블루스』에서 지역 이름만 바꾼 것이다. 김규형씨의 모듬북(각기 다른 음높이의 북 네 개) 소리, 피아노와 장씨의 노래소리가 쩌렁쩌렁 장내를 울렸다. 그렇게 단 한 곡만 맞춰본 뒤 그들은 리허설이 끝났다며 무대에서 내려섰다. 쉬고 있는 임씨에게 장씨의 장단점을 묻자 휘휘 손을 내저으며 『장점만 얘기합시다』 한다. 단점 없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장점이 크게 부풀면 단점까짓거야 덮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단점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거죠. 우리 형님의 가장 큰 장점은 세월에 농익은 발성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도교육을 받고는 체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연 1부는 맺고 2부는 풀고
공연 30분 전. 대극장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 시작했다. 수녀와 스님들도 보였고 상투를 튼 이들도 보였다. 애초 경북대 강당에서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여일 전 안전진단에서 문제가 발생해 급히 시민회관 대극장으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관람객이 얼마나 들 것인가 걱정하는 쪽은 기획사 직원들이고 연주자들은 전혀 동요의 빛이 없다. 장씨의 공연은 대개 1, 2부로 나뉜다. 제 1부에서는 자신의 창작곡과 고향 광천의 상여소리인 『하늘가는 길』을 선보인다. 모두 슬픈 곡들이다. 청중들의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게 한다. 제2부에서는 이 맺힌 한을 풀어내는 자리다. 신중현의 곡 『봄비』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같은 대중적인 곡들로 위로한다. 장씨의 표현을 빌리면 『워커힐 쇼처럼 즐겁다』. 올해는 어느 지방이나 서늘한 여름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대구는 여전히 무더웠다. 7시30분 아이들의 사물놀이가 밖에서 들리자 1천6백석을 꽉 채운 청중들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 청중들은 웬 난데없는 사물놀이 소리인가 의아한 듯했다. 아이들이 객석 통로를 지나 무대로 올라가고 장사익씨가 태평소를 불며 그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지고 큰 박수가 나왔다. 장씨가 무대에 서서 고수레를 외쳤다. 『그저 가뭄에 물 마르지 말고 장마에 둑 터지지 마소/ 고수레! /국수 두어 가닥에 김치 한 조각 얹어 논바닥에 던져 부르는 고수레!』 「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 개 섬이다」라는 내용의 『섬』과 『국밥집에서』가 이어졌다. 그의 열창으로 청중들의 숨소리가 한없이 가라 앉는다. 임동창씨는 이 분위기를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피아노 옆에 준비했던 물(죽염을 약간 섞은)을 들고 무대 중앙의 장씨에게로 가 한 컵 권했다. 열창하느라 애썼다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 물을 마신 장씨는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청중들에게 인사했다. 『제가 대구공연은 처음이어유. 그런데 대구는 너무 따뜻해서 좋아유(웃음). 요즘 남자들 힘 없으시쥬? 힘 내세유』 『귀가』가 흘러나온다.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부시시 잠깨어 강아지들처럼 기어나오는/ 아이들을 보고야/ 텅 빈 가슴이 출렁 채워집니다」 피아노의 잔잔한 반주가 장씨의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 『꽃』과 『찔레꽃』을 부르는 장씨, 김규형씨의 모듬북소리가 둥둥 청중들의 가슴을 울린다.
1부의 마지막 곡은 장씨의 고향 광천 상여소리를 편곡한 『하늘 가는 길』.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잎 진다 설워마라/ 명년 봄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한번 간 우리 인생/ 낙엽처럼 가이없네/ 어-허아 어-허…」. 이 곡은 총 길이가 10분이 넘는다. 「하늘 가는 길 정말 신나네요」하며 긴 노래가 끝났다.
2부는 곧바로 이어졌다. 1부가 끝났다고 인사하고 들어가던 세 사람 가운데 김규형씨가 모듬북 앞에 돌아와 다시 앉는다. 웃음소리가 터졌다. 북독주만으로 그는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할 만큼 신들린 듯한 연주를 해냈다. 임동창씨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그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소리로 시작해서 피아노를 부술 듯 격렬하게 연주하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폭소를 자아냈다. 어눌한 춤을 추며 장씨가 나타났다. 가수 현철의 『청춘을 돌려다오』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임씨가 장씨를 데려다 피아노에 앉히고 임씨가 노래를 부른다. 『오느을도오 걷는다아 마하는 정처없는 이 바아알길…』. 원래 판소리꾼이었으며 제 6대 품바였던 김규형씨가 자신도 한 곡 하겠다며 『품바타령』을 부르고 임씨가 모듬북 앞에 앉아 북을 친다. 이렇게 서로의 영역을 오가며 흥겹게 놀았다. 장씨의 목소리로 듣는 트롯은 그 맛이 진하다. 『대전(구) 블루스』 『빛과 그림자』 『님은 먼 곳에』가 이어졌다. 예정된 1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관중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앙코르를 청했다. 『봄비』가 이어지고, 들어갔던 장씨는 다시 박수소리에 불려나와 『그리운 강남』을 불렀다. 청중들은 다 함께 후렴구를 따라한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극장을 나서는 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고 간다. 『마당놀이판이 따로 없데이』『야 증말 뜨겁다이』. 10대에서 40대까지 1백여 명의 남녀가 무대 뒤 분장실로 몰려들어 사인을 요구했다. 일정대로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과 임동창씨 그리고 합천 해인사 스님들, 대구 영남지방의 재야(?)문화계 인사들 50여 명이 뒤풀이 자리에 초대됐다. 주최측에서 막걸리를 한 잔씩 돌렸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많은 듯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웠다.
「더 열심히 노래허께유」
임동창씨가 『제가 원체 좋아서 이럽니다』라면서 『국밥집에서』를 불렀다. 따라 부르는 이도 있고 『잘헌다』 하는 추임새도 곁들여졌다. 김규형씨도 이에 질세라 젓가락으로 가락을 맞추며 단가『사철가』를 시작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구나/ 너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일행은 서울행 11시40분 기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붙드는 이들의 손을 뿌리치기가 민망했다. 장사익씨는 『여러분 정말 고마워유. 더 열심히 노래허께유』 라며 뒤풀이 자리를 나섰다. 「대구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여름 하루」가 이렇게 갔다. 장씨는 올여름 공연과 녹음작업을 병행한 뒤 9월께 2집음반 「기침」을 낼 계획이다. 이번 작업은 임씨와 김씨의 도움없이 혼자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욕심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담백하게 드러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고갱의 타히티 못지 않게 황홀한 「노래의 세계」로 떠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