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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노래한 시
강문숙 - 마당가의 저나무
강은교 - 가을의 시
강해산 - 떨어짐으로 다시 솟구치다; 가을이 오면; 가을을 타는 사랑; 가을이 가기 전에
고재종 - 빈들에 이는 바람
고정희 - 가을편지
괴 테 - 가을느낌
기형도 - 가을에 1
김광섭 - 가을이 서럽지 않게
김기만 - 가을에 떠나는 사람
김남주 - 이 가을에 나는
김득수 - 가을은 곱게 물들어 가는데
김 록 - 낙엽 독설
김만권 - 가을의 기도
김백겸 - 가을생각
김소월 - 가을 아침에
김영남 - 가을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김용택 - 11월의 노래;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가을밤
김정란 - 가을; 가을 햇살, 아름다운 모순
김정희 - 벽화; 가을담쟁이들
김종길 - 가을
김종재 - 선물
김종해 - 가을 문안, 가을에는 떠나리라; 가을 산새
김지순 - 가을에는
김현승 - 가을; 가을의 기도; 가을은 눈(眼)의 계절; 가을의 시
나태주 - 가을 맑은 날; 가을서한
나해철 - 내 마음의 가을; 가을 끝
나희덕 - 어떤 미식가, 결정적 순간
남낙현 - 가을처럼 깊어가는 사랑; 가을이 오면
네루다 -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도종환 - 가을비; 다시 가을; 가을 사랑; 늦가을; 마음의 열매; 저 가을 바람 구름 위로; 가을 잎; 그리움의 가을 낙엽;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단풍드는 날; 가을까지 온 것들; 가을 오후; 깊은 가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도현금 - 낙엽 위해 홀 벗은 가을 나무;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서
마종기 - 가을 수력학; 가을, 아득한
문인수 - 다시 구절리역
릴 케 - 가을의 끝
박상순 - 이 가을의 한 순간
박숙인 - 가을 속의 나
박용래 -가을의 노래
박이도 - 가을이 온다
박인환 - 가을의 유혹
박재삼 - 여름 가고 가을 오듯
박종해 - 가을밤엔; 그 길을, 한번쯤은
박형진 - 가을 시장에서
배한봉 - 붉은, 가을 폭죽
법 정 -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보들레르 - 가을의 노래
복효근 - 가을 잎사귀
서영처 - 단풍
서정주 - 푸르른 날
송종규 - 가을편지
안도현 - 가을엽서; 전어속젖; 단풍나무 한그루; 가을의 소원
안성란 - 가을을 만나러 갑니다
오광수 - 가을에 꿈 하나; 가을에 비가 오는 까닭은; 가을에는; 가을이 되면; 가을에는 걷자; 가을의 러브 레터; 정자해변에선 가을이 익어간다; 가을이 가는데; 가을이 머물고 있는 길가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부르고 싶은 이름
용혜원 -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가을이 가네
오말숙 - 가을 열병
원태연 - 나는 행복합니다
유안진 -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가랑잎
유자효 - 가을의 노래
윤동주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가을 아침에
이기철 - 가을밤
이동순 - 가을 저녁
이동원 - 가을 편지
이생진 - 낙엽
이 석 - 가을걷이
이성선 - 가을편지; 소포
이수정 - 키 작은 사람들의 가을
이시은 - 강물같은 기도소리; 가을 산; 가을 들판
이 순 - 가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이순복 - 가을아, 어쩌란 말이냐
이영춘 - 슬픈 가을
이준관 - 거리에 가을비 오다; 가을 떡갈나무 숲; 가을 벌레 소리 들으며;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이 채 - 당신을 보내듯 가을을 보내지만
이해인 - 가을편지;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가을 노래; 바람 부는 가을 숲으로 가자; 가을 바람; 가을이 아름다운 건; 가을의 기도; 강늘에 밤을 받고; 익어가는 가을; 가을바람 편지; 가을 일기; 가을빛; 고향의 달;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향아 - 가을은 조용히 흔들린다
이효녕 - 가을밤, 가을편지
장석남 - 국화꽃 그늘을 빌려
장석주 - 가을의 시
정고은 - 가을이 오는 소리
정대구 - 가을날 이후
정 양 - 가을 햇살
정연복 - 당신을 좋아해
정일근 - 가을전어; 가을의 일; 가을 부근
전진규 - 마른 들깻단
정한모 - 가을에
정현종 - 빨간 담쟁이덩굴
정호승 - 가을꽃
조태일 - 가을 잠자리; 그리움
주요한 - 가을은 아름답다
지석동 - 가는 가을을 밟으며
천상병 - 들국화
천양희 - 사라진 계절
최광일 - 가을전어
최영미 - 가을에는
최영희 - 가을의 시
최 옥 -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건; 가을속으로 떠나기
최하림 - 가을편지; 모카커피를 마시며; 가을, 그리고 겨울
한상학 - 가을이 떠난 자리
황동규 - 은행잎을 노래하다; 가을편지
헤르만 헷세 - 가을냄세
홍기석 - 가을이 떠나가네
홍윤숙 - 사랑의 계절
지은이 모름 - 가을이 오는 소리
마당가의 저 나무 / 강문숙
세상 모든 흔들리는 것들로부터 가을은 오네
마당가의 저 나무 흔들리므로 아름답네
제 몸 던지는 잎들이 저렇게 붉어지니
이제 지는 노을도 슬프지 않겠네
- 그건 사랑이야. 꺼지지 않는 목숨이야
바람이 중얼중얼 경전을 외며 지나가네
흔들리자, 흔들리자
세차게 흔들릴수록 무성한 날이 오겠지
나무의 기쁨이 하늘을 덮네
오래된 저 나무 흔들리므로 더욱 아름답네
가을의 시 / 강은교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눕네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정거장에는 꽃 그림자 하나
네가 나를 지우는 소리
내가 너를 지우는 소리
구름이 따라나서네
구름의 팔에 안겨 웃는
소리 하나,
소리 둘,
소리 셋,
無限,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떨어짐으로 다시 솟구치다 / 강해산
가을 찬바람에 떨며
가지 끝에 위태롭게 달린 난
외롭고 쓸쓸한 나뭇잎.
안간힘을 다해 매달려도
중력을 이기지 못함이 아닌
허공에 던져질 운명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스스로
마지막 끈을 놓아버림으로
방랑하는 나그네처럼 먼길 떠나리라.
파릇한 신록의 순수함도
짙은 녹음의 푸름도
단풍이 고왔던 화려함도
가지에서 떨어지는 순간
모두 사라져버려 끝나겠지만
다시 태어날 새 세상을 위해
그대 발아래 수북이 쌓여
남김없이 모조리 썩어 사라지리라.
잎, 떨어짐으로 다시 태어나
가장 작은 알갱이가 되어
그대 몸속으로 다시 솟구치리라.
가을이 오면 / 강해산
가을이 오면
가지에 걸린 나뭇잎을 보자.
가슴 떨리는 마음을 헤쳐 놓고
가을 하늘을 보자.
가풀막진 언덕 너머로
가는 햇살의 반짝임이
가느다란 명주실보다 더 곱다.
가을산자락 골짜기
가시덤불 바위틈 옹달샘 터에
가여운 꽃잎이 단풍 든다.
가을은 참 아름답지만
가장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가슴앓이 많아지면 그만큼
가슴이 굳어져 돌이 되고
가장 좋은 계절에
가장 고독한 사람이 된다.
가녀린 어깨 활짝 펴고
가을이 오면 마음을 열자.
가까운 사람 많이 만들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자.
가을 타는 사랑 / 강해산
바람 부는 날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가만히 흐느끼듯
당신을 불러봅니다.
붉게 물든 잎사귀에
내 사랑의 고백들을
빼곡히 적어 넣어
바람에 실어 띄웁니다.
언제부턴가 마음속에
꺼지지 않은 불덩어리가
주체할 수 없도록
뜨겁게 활활 타오릅니다.
타서 재가 될지라도
모두 타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대 사랑으로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요.
가을이 가기 전에 / 강해산
가을이 왔나봅니다.
가을이 오면 가을을 타겠지요.
가을이 그리운 마음을 물들이고
가을이 쓸쓸함만 더해주듯이
가을이 왔을 땐 이별 또한 가깝지요.
가을이 슬퍼지는 건
가을이 홀로된 사랑의 추억을 만들고
가을이 그 추억 속에 아픔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가을이 화사한 단풍이 들어서가 아니라.
가을이 당신에게 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기에
가을이 오면 사랑하는 당신에게
가을이 가기 전에 사랑을 태우렵니다.
가을이 가면 그대 이별을 고할 테니
빈 들에 이는 바람 / 고재종
가을이 다한 들판에
바람이 인다.
이제 바람은
저기 저만큼 둔덕의
갈대꽃으로 하얗게 손 저으며
지난 여름 우리가 그리움에 목말라 흘렸던
심줄 불거진 팔뚝의 땀방울 같은 것
폭염에 비껴 떨리던 낫날 같은 것
시퍼런 하늘에 퍼지던
청청한 목청이며
혹은 저녁답에 쭈그려 앉아
저도 몰래 흘리던 눈물 같은 것 지우며
이제 바람은
저기 저만큼 스스로
갈대꽃으로 손사래치는 그리움마저
겨울로 가는 그런 풍경이게 하는,
그리고는 우리 잎사귀 떨군 나무의 쓸쓸함으로
해거름 주막에 앉아 술 한잔 하게 하는
본래의 너그러움으로 분다.
그렇게 고즈넉이,
그러나 다가선 겨울날에도
시퍼렇게 눈뜨는 것은 보리싹만이 아닌 것을
시퍼렇게 빛나는 것은 동천만이 아닌 것을
슬쩍슬쩍 알리며
잔풀잎 날리며 분다.
가을 편지 /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가을 느낌 / 괴테
그대 포도잎이여
무럭무럭 푸르게 자라
울타리를 타고 내 창문까지 오르라!
쌍둥이 포도송이여,
알알이 불어나고
어서 빨리 더 빛나게 무르익어라!
어머니 같은 태양이 내리쬐어
그대들에게 이별의 눈짓 보내고
자비로운 하늘의 산들바람으로
그대들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정다운 달님의 마술입김에
그대들은 서늘하게 식어
이슬에 젖었으니 아,
내 눈에 어리는 것은
영원히 살아 숨쉬는 연인의
한없이 솟구치는 눈물이어라
가을에 1 / 기형도
잎 진 빈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울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려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이 서럽지 않게 / 김광섭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을 거울 삼으리니
패물 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가을에 떠나는 사람 / 김기만
먼저 간 사람
지금 가는 사람
그리고 곧 가야할 사람.
누군가 남기고 간 이야기는
가을 길 위에 구르는 바람.
10월 하늘에 낯익은 구름
삶이란
그저 지나간 가을처럼
낙엽같은 조그만 흔적만 남기고
약속처럼 떠나가는 것.
나의 가을은 왜 이리도 쓸쓸한지.
먼저 간 사람
지금 가는 사람
그리고 곧 가야 할 사람.
이 가을에 나는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 옥일까 대전 옥일까 아니면 대구 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에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가을은 곱게 물드는데 비추라 / 김득수
푸른 솔밭 사이로
갈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가을의 향기는
국화 향으로 곱게 풍겨오는데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길없이 떠도는
마음은 지난 추억에 젖어
못 다한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여름날 푸른 잎은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드는데
사랑이 떠난 그 자리엔
차디찬 서릿발이
깊은 가슴을 타고 오릅니다
낙엽 독설 / 김 록
낙엽을 보고 싶어도 보지 않았다
어느 날 무턱대고 밖을 나갔는데 낙엽이 나를 보아 버렸다
그런 낙엽은 밟을 수조차 없다
낙엽은 조용하다가도 소름 돋는 소리를 곧잘 낸다
한 무더기의 낙엽은 음향 없이도 이미 으스스하다
여름나무의 체온을 내려 놓은 것은 낙엽
낙엽의 짓궂은 등장은 미화원에게만 달갑지 아니한 게 아니다
한 무더기의 낙엽은 태우지 않아도 코를 아리게 한다
어김없이 뜰에, 거리에, 몰려나온 낙엽
낙엽의 심리는
오롯하였던 푸른 마음을 잃고 쉽사리 부서지고
다른 낙엽의 움직임에 따르는
한철의 심리다
그것은 내가 어느 날 무턱대고 밖을 내다볼 때
낙엽처럼 쌓인 눈을 보아 버리게 할 심보다
푸른 사이를 흐리게 하고 소리를 곧잘 지르는 것은 곧 끝난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쌓일 눈도 만만치 않다
가을의 기도 / 김만권
둥근 보름달을 보면
누구에게나 넘치는 결실을
예감하게 하소서
온종일 흙과 풀섶을 어루만지며
갈라졌던 손바닥에
웃음이 스미게 하시고
마주앉은 식탁마다
눈물 아닌 포도주를 마시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운 이에게는
바람결에 편지처럼 닿게 하시어
쓸쓸함을 알지 못하도록 하시고
행여 빈 들판에
홀로 남은 작은 새라도
밤이슬보다 차가운
외로움은 배우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누이는 곳마다
햇살이 따스함을 아는 까닭입니다
가을 생각 / 김백겸
쥐똥나무 이파리는 수런거리는 기쁨으로 흔들린다
은행나무 향기에 취한 바람은
햇빛에 심장을 내비치며 걸어온다
구름의 피가 하늘에 가득 번지는
늦가을 오후
나는 화강암의 침묵이 반들거리는
아파트 보도 블록을 걸어간다
조용해라
무심히 지나가는 나비의 숨소리가 가슴에 닿고 있는 이 세상
어디서 술래로 숨었다가 옷자락을 잠깐 보여 주는지
시간의 비단길은 건물 모퉁이를 돌아 길다랗게 뻗어 가고
나는 무릎을 쉬어 구내 벤치 위에 앉는다
저 멀리서 어린날이 양철통을 메고 걸어온다
시골 동구 밖 시냇가 그때 그 자리로부터
너무도 멀리 걸어온 나
예기치 않은 소식을 가지고 오는 우편 배달부처럼
향수는 자전거를 타고 와서 편지를 전한다
우리는 모두 오고 가는 길손들
잠시 쉬어서 보는 이 세상의 조용한 풍경 한가운데
쥐똥나무 이파리는 돌아가는 시간의 구두 뒤축에서
향기로운 꿈으로 흔들린다.
가을 아침에 / 김소월
어득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이 번쩍어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 말락하는 묏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이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쌔여오는 모든 기억은
피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 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靈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비엽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뇨!"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래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래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 김영남
이제 그만 툭툭 자리를 털고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가을이 문턱에서 가볍게 노크해 올 때
대지는 한 여름의 열을 뿜고
초록은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간에 우리는 벌떡 일어나
풀어논 생각들을 서둘러 거두어야 한다.
한결 부드럽게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불어와 窓들을 끝없이 열어놓고
대문 바깥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출발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들녘도 새로운 손님들을 마중나가는 시간,
이런 시간, 이런 지점에 갇혀 우리는
언제까지 취하여 있을 수는 없다.
다음 계절에 지각하기 전에
아쉬운 기억들이 옷깃을 잡아도 우리는
곤충처럼 눈을 부릅뜨고
등불을 하나씩 붙들고
깨어 있어야만 한다.
문턱 앞에는 벌써
한 송이 국화가
우리에게
가을을 온몸으로 던져오고 있다.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롬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와 닿습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름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춥지 않아도 되니
이 가을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지금 이대로 이 길을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 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 / 김정란
가을이 밀려들어왔다. 내, 아주, 어두움을 향하여 잘 기우는 영혼 속의, 작디 작은 여러 명의, 조그만 아이들이 내 핏줄의 문간 앞으로 조르르 달려나왔다. 누구니? 응? 빨리 말해. 보이니? 누구? 응, 기차놓친 여행자거나, 간밤에 충분히 자지 못한 사람처럼 보여. 그러니? 문열어줘라 얘, 얼른. 그애들이 법석이며 술렁거렸다. 그애들은 아주, 잘, 그 피곤한 여행자의, 여름의 헤매임을 아는 것이다.
알겠다, 알겠어. 아이들은 여행자에게 의자를 권하고 구석장이들로 가서 않았다. 창문, 내 핏줄의 껍데기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번에, 단 한번의 눈길로, 이 여름의 충만함의 뒷끝에 논두렁의 진흙을 묻히고, 내 핏줄의 창문 앞에서 서성이는, 이 여행자의 정체를 납득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천천히 내 핏줄의 방안을 돌아다니며 바시락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즈넉히 말했다. 갈증이 우리들을 묶어놓는 거야. 그리고, 그 갈증을 쉽게 가라앉히려 하지 않는 우리의 오만도. 그러나 보아, 우리가 얼마나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가를. 아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바람. 내 핏줄의 아주 깊은 근원에서, 내 존재를 아주 조금만, 위로 띄우는 바람이, 가늘게 가늘게 일어섰다.
가을 햇살, 아름다운 모순 / 김정란
가을 햇살 한 줄기, 참을 수 없이 아름다운,
기어이 내 존재를 베어내어
허공에 매다네 내가 대롱대롱
흔
들
리
네
무게와 가벼움 사이
내가 아주 잘 흔들리네
마치 그것이 내가 할 줄 아는
일의 전부인 듯이
마치 그것을 소명으로 가지고
태어난 영혼처럼,
내 흔들림 사이로 얼핏 보이네
가늘게 떠는 안개부터
흔들리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하느님 어깨, 내가 가슴이 메어
울지도 못하며 막막히
그걸 바라보네 가을햇살,
기어이 내 존재에 비수처럼
박힌―아름다움, 모순,
벽화 - 가을담쟁이들/ 김정희
철로 변 긴 옹벽에 전 생애를 걸고
두어 철 내내 벽을 타
팔부 능선에 이른 빨치산들이 불타고 있다
활 활
차가운 불의 감옥 안에서
몸서리도 바명도 없이
고요하다
지상의 어떤 물로도
어떤 힘으로도
끌 수 없는 불이 따라온다
정전되어 있던 나를
밝히며
거대한 낙관으로 마음바닥에
찍히며 .
가을 /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선물(膳物) / 김종제
오늘도 그대로부터 선물을 받았어요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
내 가슴 속의 시골 먼 곳까지
우표도 붙이지 않고 배달되어 온
귀한 선물
겨울의 우체부가 전해준
눈송이가 예쁘게도 내리네요
그대의 고운 마음으로 포장된
선물은 땅 위의 모든 것에
축복을 내리는 것과 다름 아니겠지요
그런데 지난 날에 그대에게 받은
저 봄날 초록빛 생명의 물길 같은
뜨거운 심장을 서늘하게 식혀주었던
한 줄기 여름의 소나기 같은
눈부시게 단풍 들다 낙엽되어 사라지던
헌신과 희생의 가을 나뭇잎 같은
선물도 아직 다 풀어보지 못했는데
오늘도 나는 두 손을 공손히 들어
그대의 소중한 마음을 받는 것이에요
그대가 나에게 준 그 어떤 것도
귀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오늘도 나는 그대의 선물에
눈이 멀고 귀가 먹는 것이랍니다
철따라 그대가 나에게 준 선물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큰 것이라서
한 아름 품고도
눈속에 다 담아 둘 수가 없어서
나는 그대에게 보물 같은 선물만 받고
무엇을 하나 준 적이 없어서
오늘 나도 겨울 눈송이가 되어
그대의 마음 속에 내 마음을 가득
뿌려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지요
먼 길 마다 않고 내게 달려온
그대의 선물은 은하계보다 더 아름다워서
나 혼자서만 간직하기가 싫은 것인데
그 기쁜 사람의 손길 닿은 것들을
풀어보지도 않고 바깥 마당에 동네 어귀에
하나 가득 쌓아 놓은 것이지요
오늘 아침에도 일찍 일어난
하해와도 같은 둥근 저 달과
외롭지 않게 옆에 앉아 달콤한 말 속삭여주던
저 별도 알고 보니
그대가 나에게 준 선물(膳物) 아니겠어요
가을 문안 / 김종해
나는 당신의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오,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슬픔이
어둠 속에서 굳어져 별이 됩니다.
한밤에 떠 있는 우리의 별빛을 거두어
당신의 등잔으로 쓰셔요.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만 가혹하게 빛나는 우리의 별빛
당신은 그 별빛을 거느리는 목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종루에 내린 별빛은 종을 이루고
종을 스친 별빛은 푸른 종소리가 됩니다.
풀숲에 가만히 내린 별빛은 풀잎이 되고
풀잎의 비애를 다 깨친 별빛은 풀꽃이 됩니다.
핍박받은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맺힌 별빛이 될 때까지
종소리여 풀꽃이여...
나는 당신이 어디가 아픈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가을에는 떠나리라 / 김종해
바람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이 가을에는 떠나리라
가을산새 / 김종해
새끼 네 마리 데리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온 가을 산새
가을이 되니까
저녁 햇살이 밥으로 보이니까
우리집 찔레나무 덤불 속에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서오릉 길 너머
봉산에서 내려온 가을산새가
뭐라고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어린 날 귓속에 쟁쟁 울리는
엄마새 소리
종해야, 죽 먹고 자!
죽 먹고 자!
굶고 자는 아기새 위로
엄마새가 맨 앞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가을에는/ 김지순
가을에는
마음으로부터 떠나는 자유를 느끼며
보듬어 줄 수 있는 이와
따뜻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테두리 벗어나
아름다운 가을을 느끼며
생각만으로 행복한 그대와
가을 단풍잎 같은 진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가을에는
당신도 나도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 함께여도 홀로인 듯 찬바람 불어도
곱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과
사각거리는 소리에
눈물 하나 가득 고여와도
외로움 더해주는 가을을
빛고운 가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가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은 눈(眼)의 계절 /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로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가을의 시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 맑은 날 / 나태주
햇빛 맑고 바람 고와서
마음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벼 벤 그루터기 새로 돋아나는
움벼를 보며
들머리밭 김장배추 청무 이파리
길을 따라서
가다가 가다가
단풍의 골짜기
겨우겨우 찾아낸
감나무골
사람들 버리고 떠난 집
담장 너머 꽃을 피운 달리아
더러는 맨드라미
마음아, 너무 오래 떠돌지 말고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려문
가을 서한 2 / 나태주
1
당신도 쉽사리 건져주지 못할 슬픔이라면
해질녘 바닷가에 나와 서 있겠습니다
금방 등돌리며 이별하는 햇볕들을 만나기 위하여
그 햇볕들과 두 번째의 이별을 갖기 위하여
2
눈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한 겹씩 옷을 벗고 나서는 구름
멀리 웃고만 계신 당신 옆모습이랄까?
손 안 닿을 만큼 멀리 빛나는 슬픔의 높이
3
아무의 뜨락에도 들어서보지 못하고
아무의 들판에서 쉬지도 못하고
기웃기웃 여기 다다랐습니다
고개 들어 우러르면 하늘, 당신의 이마
4
호오, 유리창 위에 입김 모으고
그 사람 이름 썼다 이내 지우는
황홀하고도 슬픈 어리석음이여
혹시 누구 알 이 있을까 몰라 ...
내 마음의 가을 / 나해철
붉은 단풍잎처럼 얇아서
디뎌 밟으면
바스러질 무엇이 거기 있다
그때쯤이면
꼭 무엇이던가 디뎌 밟으며
떠나는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일까
견디어낼수록
그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요즈음 몇 일에
십 년이 늙었다
고개를 숙이면
단풍 든 이파리가 아주 말라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 끝 / 나해철
자정 넘어 든 잠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서렸다
가을은 너무 깊어 이미 겨울인데
저 나무를 비추고 서 있는 등불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갑자기 어려져서 철없이 하는 말을 듣고
옆에 누운 사람이 하는 말
그럼 나가서 그 등불이나 껴안아주구려
핀잔을 준다
그래 정말 막막한 이 밤 등불의 친구나 될까보다
괜스레 마음은 길 위에 있다
어떤 미식가 / 나희덕
봄에는
홍어 내장으로 보릿국을 끓이고
여름에는
개불이나 하모 같은 갯것에 입을 대고
가을에는
석쇠 위에 전어를 굽고
겨울에는
매생이국을 후후 불며 떠넣는다
낯선 음식에 길들여지는 동안에도
사람에 대한 입맛은 까다로워져
마음의 끼니를 거르는 날이 늘어간다
온기 없는 방에서
간장에 절인 김 장아찌 몇 조각에
혼자 마른 밥알을 곱씹는 저녁
검은 김에 우연히 뿌려진 깨소금 몇 알이
혀끝에 돌올하게 느껴지는 저녁
낯선 음식에 길들여지는 동안에도
마음은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아
낯선 곳에 흩뿌려진 자신을 곱씹고 있는
어떤 미식가
결정적 순간 / 나희덕
일찍이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법이나 빗줄기에 소리를 내는 법, 그리고 가을햇빛에 아름답게 물드는 법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이파리의 일생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는 낙법에 달려있다 어디에 떨어지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잎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람에 불려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우연에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수십 마일 이상 날아가 고요히 내려앉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러려면 우선 바람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바람이 몸을 들어올리는 수간 바람의 용적과 회전속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팔랑팔랑 허공을 떠돌다 강물 위에 내려앉는 낙엽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마지막 한마디를 위해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한방울의 비가 물위에 희미한 파문을 일으키거나 별똥별이 하늘에 성호를 긋고 사라지는 것도 다르지 않다 죽음이 입을 열어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 벌써 절반이 넘는 이파리들이 나무를 떠났다 그들은 떨어진 게 아니라 날아간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풍경처럼 보여도 이파리에게는 오직 한 순간이 주어질뿐이다 허공에 묘비명을 쓰며 날아오르는 한순간이
가을처럼 깊어가는 사랑 / 남낙현
강물이 저 혼자 흐르다가
또 다른 강물을 만나 하나가 되듯
우리도 서로 손잡고 물이 되어
한 세상 흐르다가
먼바다에 이르러 갈대꽃처럼
피어나면 좋겠어.
그저 어느 한 계절의 모퉁이에서
금방 불붙은 사랑처럼
금세 피었다가 시들고 마는
진한 향기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풍겨나는 구절초같은
은은한 향기였음 좋겠어.
억새풀처럼 머리가 하애지고
잔주름이 늘어난다고 해도
두 손 꼭 잡고 서서
저녁 숲에 내리는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았으면 좋겠어.
가을이 오면 / 남낙현
아직 뜨거운 여름날의
정념이 남아있는 들판에
이름모를 가을 꽃들이 피어나고
갈대숲에 숨어살던 소슬바람 소리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흐르는 강물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은은한 달빛을 즈려 밟고
가을이 온다.
가을이 내려온다.
먼산 단풍이 울긋불긋 들고
가을 바람의 하얀 종아리
속살 내비치는 둑길 위를
무작정 걷노라면
가슴 가득 뜻모를
그리움이 일렁이고
어데론가 정처없이
떠나가고 싶다.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 네루타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흔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책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다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를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페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나한 자가 먹다 남긴 빵 조각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유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가을비 / 도종환
어제 우리가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사랑하고
오늘 낙엽지는 거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다시 가을 / 도종환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옷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너도 잘 견디고 있는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늦가을 / 도종환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푸른 나무들은 겨울 지나 봄 여름 사철 푸르고
가장 짙은 빛깔로 자기 자리 지키고 선 나무들도
모두들 당당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며 있습니다
목숨을 풀어 빛을 밝히는 억새풀 있어
들판도 비로소 가을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또다시 태어나 살아야 할 이 땅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 차마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갈라진 이대로 둔 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사라져 갈 순 없어
몸이 타는 늦가을입니다
마음의 열매 / 도종환
가을햇살에 익는 것은 열매뿐만이 아닙니다.
가을햇살은 우리의 마음까지 성숙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뜨락에 내리는 가을햇살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가을의 열매는
나뭇가지 아무데서나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봄, 여름의 그 화사한 꽃들이
다 떨어지고 난 다음, 바로 거기 꽃이 진 자리에서
윤기있고 알찬 열매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라는 꽃, 행복이라는 꽃,
기대와 자랑이라는 꽃이 진 다음,
너무 마음 아프게 사라진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어느새 조그만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자라는 것입니다
저 가을 구름 바람 위로 / 도종환
저 가을 구름 바람 위로 별 하나 뜨고
저 가을 구름 바람 위로 별 하나 잠드네
아픈 금 몇 개를 가슴에 긋고는
꿈처럼 흔적없이 잠기는 세월
오늘밤 몸과 맘은 바람보다 가벼워서
저 가을 구름 바람 너머
홀로 떠난 당신을 만날 듯도 싶네
오늘밤 몸과 맘은 바람보다 가벼워서.
가을 잎 / 도종환
가을 가고 찬바람 불어 하늘도 얼고
온 숲의 나무란 나무들 다 추위에 결박당해
하얗게 눈을 쓰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도
자세히 그 숲을 들여다보면
차마 떨구지 못한 몇개의 가을잎 달고 선
나무가 있다 그 나무가 못 버린 나뭇잎처럼
사람들도 살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눈물겨운 기다림 같은 것 있다
겨울에도 겨우내 붙들고 선 그리움 같은 것 있다
아무도 푸른 잎으로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 주지 않고
세상 계절도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나간 일들을 당연히 잊었으리라 믿는 동안에도
푸르른 날들은 생의 마지막이 가기 전 꼭 다시 온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 잎이 돋고 꽃 피고
설령 그 꽃 다시 진다 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생도 짙어져 간다는 것을
믿는 나무들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버리지 못하는 아픈 희망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푸르른 그리움과 발끝 저리게 하는 기다림을
그리움의 가을낙엽 / 도종환
당신이 보고픈 마음에
높은 하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가슴에서 그리움이 복받치는데
하늘을 올려다 봐야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움의 흔적이
목을 타고 넘어갑니다
당신 보고픈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채릴까봐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리움이
가슴에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파란 가을하늘 처럼
맑은 눈속에서 당신 보고파
자아내는 그리움의 흔적이
가슴을 적시어 옵니다
차곡차곡 쌓이는 그리움으로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처럼
내 마음에도 고운
가을의 낙엽을 쌓아보렵니다
책장 속에 넣어서 훗날 추억의
가을을 꺼내보듯이 훗날
아름다운 사랑의 가을이 되렵니다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 도종환
나뭇잎 몇개가 떠서 지켜보는 그 날의 하늘도
오늘처럼 이렇게 푸르렀을 겁니다
푸르른 가슴으로 그들도 젊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과일처럼 자라오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보장된 미래와 영예롭게 빛나는
자신의 이름 하나를 가꾸기 위해
제복 속에서 꿈꾸고 행복하였을 겁니다
적어도 식민지에 대하여
눈뜨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내 이웃의 삶과 빼앗긴 땅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나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사랑하면서부터
이 땅에는 피 흘리며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알면서부터
그들은 사랑보다는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남보다 먼저 깨어 피 흘리며 살았습니다
자신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문을 닫은 채 창 안에서 흘리는
소리없는 비웃음도 받았습니다
물살이 거세면 물살만을 탓하고
불길이 세차면 불길만을 두려워하며
사랑에 대하여 평등에 대하여 정의에 대하여
한 발짝도 걸어 나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등 돌리고 서서 질타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모두를 짓밟아온 이민족의 총대 밑에서
아직도 다만 기다려야 한다고만 하는
사람들과도 섞여 살았습니다
용기에 대하여 민족에 대하여
지나치다고만 탓하는 근엄한 꾸지람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아니다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온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민족의 총칼 앞 그 가장 가파른 선봉에 서서
쓰러지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이민족과 야합하여 동족의 등을 밟고 선 사람들의 주먹을 향하여
가장 먼저 팔 걷고 나서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렇게 살아 오랏줄에 꽁꽁 묶여 차디찬 감옥으로
가장 많이 끌리어가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분단된 이 나라 눈물의 이 나라
철조망을 걷어내는 일까지 두려워하지 않으며
함께 걸음을 딛던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태극기의 그 절반의 붉은 피를 목에 걸고
목메어 목메어 통일의 그 날을 향해 가는 이는
지금 또 누구입니까
식민지의 이 푸르른 하늘 밑에 또다시 가을이 오면
그들도 이 땅의 많은 이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기대어
투정할 줄 아는 젊은 가슴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장례행렬이 끊이지 않는 죽음의 이 시대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버리고 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땅은 진정 누가 피 흘리며 지켜오는 나라입니까
이토록 푸르른 가을하늘 밑에
끊임없이 붉은 피 흐르는 이 나라는
단풍드는 날 /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가을까지 온 것들 / 도종환
구절초 꽃의 보랏빛 향기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잠자리가
대추나무 가지로 옮겨 앉습니다.
가느다란 다리로 나뭇가지를 잡으며 대추나무에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잎맥 위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네 개의 날개 끝에 있는 단아한 고동색 무늬가 곱습니다.
잠자리 몸의 아름다운 색깔들은 누가 칠해놓았는지
참 잘도 그리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작은 한 마리의 잠자리도 기나긴 장맛비의 회초리를 다 견뎌냈습니다.
뜨거운 햇살의 시간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귀뚜라미 몇 마리가 언제 숨어들어 왔는지 욕실 구석에 살림을 차린 뒤
몰래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가늘고 긴 더듬이를 뻗어 소리를 내 보낼 방향을 가늠하더니
저녁이면 숲으로 긴 편지를 찍어 보내느라 골똘합니다.
귀뚜라미 가족도 천둥과 번개의 시절을 다 지나왔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새끼들을 보듬어 안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당가의 물봉선, 원추리, 배롱나무, 청죽, 질경이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다 이겨냈습니다.
번개가 날카로운 칼날로 팽나무 가지 끝에서 뿌리까지 훑고 지나갈 때,
흰색 보라색 도라지꽃들도 꽃부터 뿌리까지 찢어질 듯
뜨거운 불칼을 맞으며 견뎌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뿌리로 땅을 움켜잡고 질렀던 소리 없는 비명을
가을바람은 알고 있습니다.
뿌리가 견딜 때 열매들도 똑같이 견뎠습니다.
대추나무의 작은 대추알들도 폭풍을 이겨냈습니다.
대추나무 가지와 대추알을 연결하는 꼭지는 가늘고 짧고 작습니다.
폭풍이 온몸을 흔들어 댈 때마다 대추알을 지키느라
꼭지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대추보다 몸이 큰 푸른 감과 둥근 사과와 배는 제가 키워온
제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시간을 지나 지금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꽃과 나무와 곤충들이 대견합니다.
한 알의 과일은 그냥 저절로 자란 과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디고 이겨내 지금 완성을 향해
과육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송이 가을 꽃은 그냥 꽃이 아닙니다.
청초한 빛깔은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폭풍과 장맛비와 폭염 속에서 올린 절절한 기도가
우리가 마시는 맑은 공기 속에 신선하고 뜨거운 기운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가을 오후 /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깊은 가을/ 도종환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비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앗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 도종환
음악에 압도되어 버리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음악이 너무 가슴에 사무쳐 볼륨을 최대한 높여 놓고
그 음악에 무릎 꿇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내 영혼의 깃대 위에 백기를 달아
노래 앞에 투항하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음악에 항복하고 처분만 기다리고 싶은 저녁이 있습니다.
지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지지 않으려고 너무 발버둥치며 살아왔습니다.
너무 긴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 하지만 지지 않으려고만 하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제 피붙이한테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면 좀 어떻습니까.
사람 사는 일이 이겼다 졌다 하면서 사는 건데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를 붙들고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 강박에서 나를 풀어 주고 싶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지고 싶습니다.
권력이 아니라 음악에 지고 싶습니다.
돈이 아니라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 무릎꿇고 싶습니다.
선연하게 빛나는 초사흘 달에게 항복하고 싶습니다.
침엽수 사이로 뜨는 초사흘 달,
그 옆을 따르는 별의 무리에 섞여
나도 달의 부하,
별의 졸병이 되어 따라다니고 싶습니다.
낫 날같이 푸른 달이 시키는 대로 낙엽송 뒤에 가 줄 서고 싶습니다.
거기서 별들을 따라 밤하늘에 달배, 별배를 띄우고 별에 매달려
아주 천천히 떠나는 여행길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사랑에 압도당하고 싶습니다.
눈이 부시는 사랑,
가슴이 벅차 거기서 정지해 버리는 사랑,
그런 사랑에 무릎 꿇고 싶습니다.
진눈깨비 같은 눈물을 뿌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눈발에 포위당하고 싶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하는 눈 속에 갇히고 싶습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에 고립되고 싶습니다.
구조신호를 기다리며 눈 속에 파묻혀 있고 싶습니다.
나는 그동안 알맞게 익기만을 기다리는 빵이었습니다.
적당한 온도에서 구워지기만을 기다리는
가마 속의 그릇이었습니다.
알맞고 적당한 온도에 길들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븐 같은 공간,
가마 같은 답답한 세상에 갇힌 지 오래되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산산조각 깨지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버림받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수없이 깨지지 않고,
망치에 얻어맞아 버려지지 않고
어떻게 품격있는 도자기가 된단 말입니까.
접시 하나도 한계온도까지 갔다 오고 나서야 온전한 그릇이 됩니다.
나는 거기까지 갔을까요.
도전하는 마음을 슬그머니 버리고 살아온 건 아닌지요.
적당히 얻은 뒤부터는 나를 방어하는 일에만 길들여진 건 아닌지요.
처음 가졌던 마음을 숨겨 놓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배고프고 막막하던 때 내가 했던 약속을 버린 건 아닌지요.
자꾸 자기를 합리화하려고만 하고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기술만 늘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가난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정직하고 순수했던 눈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적당한 행복의 품에 갇혀 길들여지면서
그것들을 잃어 가고 있다면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이 그 의자,
그 안방이 아니었다면
털고 일어서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습니까.
제 목청의 가장 높은 소리를 넘어서지 않고
어떻게 득음할 수 있습니까.
소리의 끝을 넘어가고자 피 터지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생에 몇 번, 아니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목소리가 폭포를 넘어가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안전선 안에만 서 있었습니다.
그 안온함에 길들여진 채 안심하던 내 발걸음,
그 안도하는 표정과 웃음을 버리는 날이 하루쯤은 있어야 합니다.
그날 그 자리에 사무치는 음악,
꽁꽁 언 별들이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 도종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서 / 도현금
다정한 산비둘기 부부
잣나무 청솔가지에 않아
구구구~~~노래하며
산들바람에 날개 펴고
쉬어 가는 언덕배기에
그대 이름 가을이 오고 있다.
그대 오는 소리에
초록향기 푸르른 잎새
고까옷을 준비하고
나비부인은
치맛자락 너풀거리며
춤추던 모습도 뒤로 미루고
쓰르라미는
떠나갈 차비에 아쉬워서
그 목소리도 애처롭구나.
그대 반기는 연인들은
고운 자태에 빠져들어
가슴이 뭉클해지고 울렁여서
잔잔한 마음의 진동을
어찌할 줄 몰라하고
타는 가슴만 쓰다듬으며
까치발만 구르는구나.
그대는 오색 창연한
아름다운 빛깔로 단장하여
푸르른 치마폭에 동양화 그리듯
곱고 고운 색체를 뿌리면서
온 산야를 알록달록 물들이겠지.
낙엽 위해 홀 벗은 가을 나무 / 도현금
낙엽 밟는 소리가
난 그렇게도 좋단다.
너는 아파서 울상일 텐데
아파하는 바스락 소리에
낭만과 추억과 그리움을 느낀단다.
낙엽이 바람에 날려
병아리 꽁지깃 새우고
춤을 추며 노닐듯
군무를 이루었다 흩어져
다시 나뒹구는 모습에
싸늘한 찬바람도
가던 길 멈추어 놀다가더구나.
그렇게도 푸르르던 나무는
깃털을 하나 둘씩 다 때어내고
앙상한 가지로 홀로서서
외롭고 쓸쓸하여
너무도 추울 텐데 안됐구나.
저녁노을이 불게 물들고
불덩이 같은 석양이
나무에 걸친 모습도
난 몹시 아름답고 좋은데
너는 춥고 떨릴 텐데 어떡하니?
가을 水力學 / 마종기
그냥 흐르기로 했어.
편해지기로 했어.
눈총도 엽총도 없이
나이나 죽이고 반쯤은 썩기도 하면서
꿈꾸는 자의 발걸음처럼 가볍게.
목에서도 힘을 빼고
심장에서도 힘을 빼고
먹이 찾아 헤매는 들짐승이 되거나 말거나
방향 없는 새들의 하늘이 되거나 말거나.
암, 그렇고 말고,
천년짜리 莊子의 물이 내 옆을 흘러가네,
언제부터 발자국도 없이
타계한 꿈처럼 흘러가네
가을, 아득한 / 마종기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 오르는
화가 마띠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꽁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에 부쳐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냄새 가볍게 껴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흐리다
산 너머 저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
다시 구절리역 / 문인수
기차는 이제 오지 않는다.
지금부터 막 녹슬기 시작한 철길 위에
귀 붙여 들어보니 저 커다란 골짜기,
커다랗게 식은 묵묵부답 속으로
계속 사라지는 꼬리가 있다
기나 긴 추억일지라도 결국
망각 속으로 다 들어가고 마는 것이냐
단풍 산악이 울컥, 울컥,
적막, 적막, 에워싸고 있다. 누구나
키가 길쭉해져서 쓸쓸한 곳
발 밑엔 토끼풀꽃 몇 자주색 뺨이 싸늘하다
가을이 깊으냐, 짐짓 한 번 묻고
떠나야 하리 무쇠 같은 사랑
구절리, 구절리역에다 방치해야 하리
풍장 놓인 노천에서 오래 삭으리라
침목을 베고 누운 검은 침묵,
뜨겁고 숨가쁜 날들은 뼈만 남아서
기차는 이제 오지 않는다
가을의 끝 릴케
언제부턴가 나는 모든 것이
변하여 가는 것을 보아 온다
일어서서 행동하고,
죽이고, 서럽게 하는 것들을
흐르는 시간의 사이사이에
정원들은 어드덧 모습이 달라진다
노랗게 물든던 정원의
누렇게 되어 비린 서서한 황페
길은 정말 멀기도 하였다
지금 텅 빈 정원에서
가로수길 너머로 바라다보면
엄숙히 드리운 닫힌 하늘을
아득히 먼 바다 끝까지
거의 볼 수가 있다
가을이래요/ 박목월
여름도 지나가고 가을이래요
하늘 높고 물 맑은 가을이래요
울타리 수숫대를 살랑 흔드는
바람조차 쓸쓸한 가을이래요
단풍잎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바람은 가을을 싣고 온대요
밤이 되면 고운 달빛 머리에 이고
기러기도 춤추며 찾아온대요
이 가을의 한 순간/ 박상순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가 내렸다
고양이가 내렸다
오토바이를 탄 피자배달원이 내렸고
15톤 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텅 빈 버스가 내 손바닥 안으로 굴러왔다
나도 내렸다
울고 있던 내 돌들도 모두 내렸다
새와 고양이가 들어 있는
서랍이 열렸다
울고 있던 내 돌이 말했다
초침이 돌고 있는 네 눈 속에
단풍잎 하나
떨어지고 있어
새와 고양이가 들어 있는
서랍이 닫혔다
텅 빈 버스가 굴러갔다
가을 속의 나 / 박숙인
가을은 깊어
잎마다 붉게 물들어 놓아
그 어디든 갈 수 있듯이
저렇듯
태양빛보다 붉은 가을을
흔들어 깨우는
그 저녁이 지나가듯이
어둠 위로 퍼지는
가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더운 생각들을 펴 놓은
그 가을 속에
추억이 한없이 파고드니
또한 그러한 것들로
부르지 않아도
그 그리움 같은 것이
저무는 가을 바다에 나를 데리고 가
벅찬 가슴 뛰게 하고 있다.
가을의 노래 / 박용래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후원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 위
뉘가 밤을 절망이라 하였나
말긋 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동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밭엔 찬 이슬에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침실에 누워
호젓한 꿈 태양처럼 지닌다
허술한
허술한
풀벌레와 그림자와 가을밤
가을이 온다 / 박이도
9월이 오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심사.
중심을 잃고 떨어져갈
적, 황의 낙엽을 찾아
먼 사원의 뒤뜰을 거닐고 싶다.
잊어버린 고전 속의 이름들,
내 다정한 숨소리를 나누며
오랜 해후를, 9월이여.
양감으로 흔들리네
이 수확의 메아리
잎들이 술렁이며 입을 여는가.
어젯밤 호숫가에 숨었던 달님
혼사날 기다리는 누님의 얼굴
수면의 파문으로
저 달나라에까지 소문나겠지.
부푼 앞가슴은 아무래도
신비에 가려진 이 가을의 숙제
성묘 가는 날
누나야 누나야 세모시 입어라
석류알 터지는 향기 속에
이제 가을이 온다.
북악을 넘어
멀고 먼 길 떠나온 행낭 위에
가을꽃 한 송이 하늘 속에 잠기다.
가을의 유혹 /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르친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이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 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 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람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 다시 오는 것이다
여름 가고 가을 오듯 / 박재삼
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햇볕 시달림을 당하고
별빛 보석을 줍더니,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음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가을밤엔, 그 길을, 한번쯤은 / 박종해
귀뚜라미 그 조그마한 것들도
잠 못 들고 울어대는데
내가 어찌 잠들 수 있겠습니까
귀뚜라미 편에 이메일을 띄웁니다.
밤을 지새우며 귀뚜라미가 문자판을 두드립니다.
“그립습니다. 그립습니다”라고
달이 구름의 속살을 비집고 나와
빙긋이 웃는군요
당신도 저 달을 보고 있나요.
가을이 깊어질수록
병도 자꾸만 깊어지는군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달빛이 내 그림자를 끌고 갑니다.
당신도 그 길을 한 번쯤 가 보시나요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월이 그 길을 지우고 있군요.
가을 시장에서 / 박형진
어제부터였을까, 아니
더 오래전부터였다
어느
가난한 농부의 손에서 가꾸어졌을
배추 몇포기
시든 무꼬랑지 몇단이
시든 무꼬랑지처럼 추레한
여인의 발 아래 기다림으로 놓여서
가을
바람에 떨고
어둠이 내리는 건물 모퉁이
기다림은 바삐 바삐
오가는 사람의 발걸음 속 거기
그렇게 혼자서만
하얗게 빛이 날 것 같다
내일까지
아니 더 오래도록.
붉은, 가을 폭죽 / 배한봉
1
감나무 끝 허공에 매달린 폭죽
아슬아슬 터질 때를 기다리는 가을 폭죽
너를 온전히 얻기 위해
달빛 꺾어 장대 하나 만들었다
길게 휘어진 능선으로 소쿠리도 하나 엮었다
바람도 없이 고요한 밤
장대 끝으로 툭! 나뭇가지 꺾으면
어이쿠, 언덕에 핀 산국山菊
노란 얼굴에 붉은 폭죽 하나 퍽!
올려다보던 내 얼굴에도 하나 퍽!
2
폭죽은 터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생도 만만하게 자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달빛 장대까지 불타오르게 하던
맹렬한 추락의힘
홍시의 자존이 흘리는 밤도 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라, 탱글탱글 감나무 끝 폭죽
제 신열身熱의 문장이 스스로 파멸의 궤적을 그릴 때까지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 법정 스님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가을의 노래 / 보들레르
1
이윽고 우리는 가라앉을 것이다. 차디찬 어두움 속으로
너무나도 짧은 우리의 여름날, 그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히!
불길스러운 충격을 전하며 안마당 돌 블록 위에
던져지고 있는 모닥불 타는 소리를 나는 벌써 듣는다
이윽고 겨울 그것이 내 존재에 돌아오리니, 분노와 증오와
전율과 공포와 강제된 쓰라린 노고
그리고 북극의 지축에 걸린 태양과 같이
나의 심장은 이제 언 붉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던져지며 떨어지는 장작더미 하나하나를 나는 떨면서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울음조차 이렇듯 둔탁하지 않다
나의 정신은 성문을 파괴하는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아라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리어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를 위하여? ㅡ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어디엔가 문밖에 나서기를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2
나는 사랑한다, 네 길다란 눈, 그 초록빛 띤 빛을
상냥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여, 이제 내게는 모든 것이 흥미없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사랑도 침실도 또 난로도
해변에 빛나는 태양보다 낫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상냥스러운 사람이여! 역시 나를 사랑해 주오
비록 내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심술쟁이라도 내 어머니가 되어다오
연인이면서 누이동생이기도 한 사람이여, 비록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하더라도
석양의 상냥스러움, 빛나는 가을의 상냥스러움이 되어다오
얼마 남지 않은 노력! 무덤이 기다리고 있나니, 탐욕스러운 무덤이다!
아아! 당신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 나로 하여금
한껏 잠기게 해다오 백열의 여름을 그리워하며
만추의 날 그 상냥스러운 황색 광선 속에서!
Pierre Charles Baudelaire(1821-1867)
가을 잎사귀 / 복효근
귀, 잎사귀라 했거니
봄 새벽부터 가을 늦은 저녁까지를
선 채로 귀를 열고 들어왔나니
비바람에 귀싸대기 얻어터져가며 세상의 소리 소문
다 들어왔나니 그리하여 저귀는
바야흐로 제 몸을 심지 삼아 불 밝힌 관음(觀音)의 귀는 아닐까
이 가을날 물 드는 나무 아래 서면
발자국소리 하나 관절꺾는 소리 하나도 조신하여라
하나도 둘도 몇 십도 몇 백도 아닌
저 수천수만의 귀들이 경청하는 이 지상의 한때
그러니 가을 나무 아래서는
아직도 상기 핏빛으로 남은 그리움이랑
발설하지도 만한 채 깊이 묻은 억울한 옛사랑이랑
죄다 일러 바쳐도 좋겠다
이윽고 다 듣고는 한잎한잎 제 귀를 내려놓는 나무 아래서
끝끝내 말하지 못한 심중의 한 마디까지 다 들켜놓고는
이제 나도
말로써 하는 지상의 언어를 다 여의고
묵묵하게 또 한 세상 기다리는 나무로 돌아가도 좋겠다
단풍 / 서영처
나무는 몰락이 두려워
온 몸에 부적을 붙였다
푸르른 날 /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눈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가을 편지 / 송종규 (시인)
은행잎이 앙증맞은 두 손으로 창을 두드립니다. 그 노란 잎사귀 하나를 따서 찻잔 위에 띄웁니다. 찻잔 속이 문득 깊고 그윽해지네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가을 한 모금이 지금, 목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헝클어진 일상들과 숱한 사연들이 찻잔 속으로 고요히 가라앉습니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보잘 것 없는 몇 줄의 시, 지극히 세속적인 사랑, 연민과 분노 따위…. 그러나 지금 은행잎의 노란 물감이 찻잔 속에 고즈넉하게 녹아있다는 느낌만으로도 내 작은 방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끊임없이 계절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이 무형의 시간, 신생의 샘물을 끝없이 퍼 올리는 살아 퍼덕이는 시간을 나는 지금 한 잔의 찻잔 속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정말 너무 많은 修辭(수사)들이, 이 아름답고 황량한 가을을 노래합니다. 수많은 시인과 음악 예술가들이 그러합니다. 나 또한 이 그립고 쓸쓸한 계절 앞에 수많은 수사를 붙여야 비로소 이 가을이 완성되는 것처럼 안도합니다.
창 너머 즐비한 노점상 텐트 너머, 헝클어진 전깃줄과 그 위의 어린 새들과 고저장단 삶의 질곡을 정갈하게 담아내는 그릇이 곧 시이고 예술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화려한 말로도 인간은 결국, 자연의 어디에도 가 닿지 못하고 사물의 어느 한 모서리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의 언어는 다만, 그들을 굴절시키거나 왜곡시킬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시인을 꿈꾼다면,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 앞서 간 시인의 노래처럼 문학이, 인생이, 사랑이, 휴지조각처럼 나부끼는 이 시대 골목어귀에서 쓸쓸하게 외투 깃을 세워보십시오.
먼 불빛조차 보이지 않을 때까지 외로움의 끝까지 걸어가 보십시오. 인간의 언어란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만약 당신이 시인을 꿈꾼다면, 아니 불가해한 삶의 미로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면, 모든 것이 증발되고 난 뒤 정신과 육체가 정교한 물방울처럼 가벼워질 때까지 끝없이 걸어보십시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주머니 깊숙이 시린 손을 넣고 바람처럼 찾아오십시오. 노란 은행잎 첨벙 발을 담근 따뜻한 차 한 잔 꼭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새 구두에 달라붙는 흙을 피해가면서 그 얼뜨기 가을은 길을 몰라 한동안 과수원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 사과의 이마가 발갛게 물드는 것을…(송찬호의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과수원' 중에서).
가을 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전어속젓 / 안도현
날름날름 까불던 바다가 오목거울로 찬찬히 자신을 들
여다보는 곰소만(灣)으로 가을이 왔다 전어떼가 왔다 전
어는 누가 잘라 먹든 구워 먹든 상관하지 않고 몸을 다
내준 뒤에 쓰디쓴 눈송이만한 어둔 내장(內臟) 한 송이를
남겨놓으니 이것으로 담근 젓을 전어속젓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이여, 사랑에 오랜 근신이 필요하듯이 젓갈 담근
지 석 달 후쯤 뜨거운 흰밥과 함께 먹으면 좋다
단풍나무 한 그루 /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을 만나러 갑니다 / 안성란
길 숲에 앉아 있는
작고 예쁜 하얀 꽃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보고
키가 큰 해바라기는 금빛 동그란 얼굴로
태양을 향해 그리움을 부르면
빨간 고추잠자리 날개를 저어
가을로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면
추억을 찾아 떠나는 고독이 살고 있지만
나는 가을이 오면 사랑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인생이란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가 버리는
아쉬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당신을 사랑하며
내 소중한 삶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가을이 오면
나의 반쪽인 당신과
사랑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바람은 들풀의 향내를 풍기고
연둣빛 입술에 맺힌 이슬을 밟으며
사랑을 위해서
나는 가을을 만나러 갑니다.
가을에 꿈하나! ... / 오광수
가을에는
햇살이
곱게 웃으며 찾아오는
환하게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서
마음 가는 사람과 마주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하고싶다.
많은 말은 하지않아도
파란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 같이
마음은 함께 두근거리고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지않아도
하얀 파도에
눈을 감는 모습에서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마주봄이 쑥스러워
둘 다
바다만 보고있어도
유리창에 비치는
그 사람의 모습에서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묘한 연민을 느끼면
더 좋겠다.
가을에는
바다가 보이는
그 찻집이,
노란 머플러의 팔랑거림이,
혼자만의 생각이 되어
다 마셔버린 빈 찻잔
나도 모르게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가을에 비가 오는 까닭은 / 오광수
가을에 비가 오는 까닭은
님의 얼굴 잊지말라는 뜻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나를 향해 있을 님의 눈에는
보고픔이 하나가득 눈물이 되어
이렇게 하늘 구름 따라
내 앞에서 내리기 때문입니다.
가을에 비가 오는 까닭은
님의 목소리 잊지말라는 뜻입니다.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나를 위해 부르시는 님의 노래는
그리운 맘 하나가득 빗소리 되어
이렇게 하늘 바람 따라
내 앞에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가을에 비가 오는 까닭은
님의 마음을 잊지말라는 뜻입니다.
손을 잡고 있진 않아도
나를 항상 찾는 님의 손길이
기다리는 마음 가득 사랑이 되어
이렇게 하늘 빗물 따라
내 맘에서 흐르기 때문입니다.
가을에는 / 오광수
가을에는 나이 듬이 곱고도 서러워
초저녁 햇살을 등 뒤에 숨기고
갈대 사이로 돌아보는
지나온 먼 길
놓아야 하는 아쉬운 가슴
그 빈자리마다
추하지 않게 점을 찍으며
나만 아는 단풍으로 꽃을 피운다
가을이 되면 / 오광수
가을이 되면 훨 훨 그냥 떠나고 싶습니다
누가 기다리지 않더라도
파란 하늘에 저절로 마음이 열리고
울긋 불긋 산 모양이 전혀 낯설지 않는 그런 곳이면 좋습니다
가다가 가다가 목이 마르면
노루 한마리 목 추기고 지나갔을 옹달샘 한 모금 마시고
망개열매 빨갛게 익어가는 숲길에 앉아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 들으며 반쯤은 졸아도 좋을 것을,
억새 꺾어 입에 물고 하늘을 보면
짓궂은 하얀 구름이 그냥 가질 않고
지난날 그리움들을 그리면서
숨어있던 바람불러 향기 만들면
코스모스는 그녀의 미소가 될겁니다
가을이 되면
텅 비어있던 가슴 한쪽이 문을 열고
나 혼자의 오랜 그리움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 어디론가 훨 훨 떠나고 싶습니다
가을에는 걷자 / 오광수
가을에는 걷자
그냥 걷자
가을 색 유혹에 한번쯤은 못이기는 척
걷다 보면
잊고 있었던 먼먼 음성이 발밑으로 찾아와
한 걸음씩 디딜 때마다
그토록 설레게 했던 그리운 이의 목소리가 되어
세월로 닫아놓았던 가슴이 문을 연다
허전함이 기다리는 공원벤치는 보지 말자
걷다 보면
바람 뒤에 살금 따라와 팔짱을 끼는 정겨움으로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듯 그렇게 황홀했던 순간이 되어
파란 하늘에 그려진 가슴은 행복하다
가을에는 걷자
그냥 걷자
가끔씩 눈을 감고 걸으면
억새들이 부르는 손짓과
가을 색에 자지러지는 새들의 날갯짓에
더 가까이 그리운 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가을의 러브레터 / 오광수
연분홍 편지지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고운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여름의 꽃밭에서
까만 분꽃씨를 받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타는 가슴이지만
연분홍 꽃을피운
분꽃이랍니다.
이젠 오세요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되면
당신의 아름다움이
산에도 피어나고
들판에도 피어나서
멀리있던 마음은
가까와 져서
꿈에만 보았던 얼굴을
서로 마주하고
당신의 손을잡고
하얀 코스모스 앞에서
사랑을 고백 하렵니다.
지금
연분홍 편지지에
보고픔 담아
고운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정자해변에선 가을이 익어간다 / 오광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을이 익어가는 정자해변으로 가자
아름답고 고운 것만 생각하며
무룡산을 넘어온 가을이
너와 나 얼굴 가득히 미소가 되고
가슴을 두드리는 설렘으로
손잡고 해변을 걸으면
발밑에서 속삭이는 너의 마음, 나의 마음
아직도 말하지 못한 고백
하얗게 찾아온 파도가
작은 돌들을 보듬고 가면서 다 말해주고
물빛이 남겨놓고 간 순수 앞에서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마주보며 다짐하는 영원의 약속
가을이 웃고 있는 정자해변에 가면
하늘빛이 내려와 바다가 되고
바다가 사랑이 되어 그렇게 익어간다
가을이 가는데 / 오광수
아침에 창을 여니
코끝을 싸아하게 스치면서
가을이 가고 있다.
갈대와 어깨동무하던 노래가,
이름 모를 밤벌레의 고백이,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
아직 다함 못한 아쉬움인가?
자꾸만 뒤돌아보는 은행잎 하나
소리없는 행진 속에서 눈에 띈다.
저 구름도 같이 가려니,
빨갛게 영글은 가슴을 펼쳐
주소 없는 그리움을 싸서 보내면
언제 왔는지 작은 차가움들이
아직 문풍지도 바르지 않은 뒷방에
몇 안 되는 짐들을 풀고 있다
가을이 머물고 있는 길가에서/오광수
가을이 머물고 있는 길가에는
이름 모를 하얀 들꽃 속에서
먼길 장사하러 가시며
어린 자식들 떼놓고
가는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질 않아
몇 번이고 뒤돌아 보시던
어머니의 눈물을 봅니다.
흰 수건 머리에 쓰시고
장사 보따리 그 위에 얹고
싸리 대문 나서다가는
발걸음 돌려서 부엌으로 가시며
"늦더라도 밥 챙겨 묵거라"
찬장에 반찬 몇 가지
솥 안에 감자밥, 열어보이시던 어머니
이맘때쯤 산골마을은 서리도 일찍 오고
먼길 바쁜 걸음으로 가셨을 길은
찬서리가 발등을 시리게 했을 텐데......
가을이 머물고 있는 아침 길가에
하얗게 수건같이 핀 들국화에도
그때 그 서리 녹아 방울 방울
어머니 눈물같이 맺혔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 오광수
내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늘 함께 있어 더 좋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많은 표현은 하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엄청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웃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까지 밝아지는 사람입니다
힘겨운 모습을 보면
내 마음까지 까맣게 타는 사람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걸 아는 사람입니다
눈빛만 봐도 내 마음을 읽는 사람입니다
나의 투정과 경솔을
미소로서 받아주고 다독이는 사람입니다
유난히 눈물이 많아 꼭지라고 부른답니다
가을에 낙엽을 보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그 사람이 좋습니다
유난히 정이 많아 정구름이랍니다
자기 몸 고단한 것보다
남의 일에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입니다
정많은 그 사람이 좋습니다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늘이 그 사람을 좋아하게 했습니다
이젠 눈가에 잔주름도
머리에 희끗한 흰 머리칼도 좋아지는 사람입니다
부르고 싶은 이름 / 오광수
가을 바람이 억새 위를 지나가며
숨어있던 그리움을 부르면
노란 은행잎에 이름을 적어가며
꼭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습니다.
보고픔이 가을 산에 내려앉아
아름다운 그 사람 얼굴이 되고
꿈인 듯 다가오는 이 맑고 신선함은
정말 부르고 싶은 사람의 향기인데,
어디쯤에 계신가요?
얼마나 크게 하면 들리는가요?
입에다 두 손모으고 부르면
후두둑 사랑 못다한 나뭇잎만 떨어집니다.
부르다가 그 이름이 허공이 되고
부르다가 내 가슴이 멍이 들어도
노란 은행잎에 적힌 이름을 보며
그렇게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습니다.
가을 열병 / 오말숙
한 줄기 내리던 소나기에
잠시
내 마음 내려놓았을 뿐인데
왜 이리도
가슴은 저미고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초록이 흘리던
마지막 눈물 한 방울
지나던 바람
훔치고 갔을뿐인데
왜 이리도
가슴 한 켠이
허전한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라 한 들
내게 올리없는 그대향해
거리를 비질하며
붉은 자욱만 남길터인데
내 가슴은
왜 벌써부터
까맣게 타들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 용혜원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모든 잎사귀들이 물드는 이 계절에
우리도 사랑이라는 물감에
물들어 보자
곧 겨울이 올 텐데
우리 따뜻한 사랑을 하자
모두들 떠나고 싶다고
외치는 것은
고독하다는 증거이다
이 가을에
고독을 깨뜨리기보다
고독을 누리고 고독을 즐기고 싶다
가을이 왔다
우리 사랑을 하자
모든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들과
열매들도 거둘 때가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나타내 보자
모든 것들이 떠나가고
모든 것들이 잊혀지는데
우리 가을이 머무는 동안에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해도 좋을
멋진 사랑을 하자 이 가을에
가을이 가네 / 용혜원
빛 고운 낙엽들이 늘어놓은
세상 푸념을 다 듣지 못했는데
발뒤꿈치를 들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내 가슴에 찾아온 고독을
잔주름 가득한 벗을 만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함께 나누려는데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세파에 찌든 가슴을 펴려고
여행을 막 떠나려는데
야속하게 기다려주지 않고
가을이 가네
가을이 가네
내 인생도 떠나야만 하기에
사랑에 흠뻑 빠져들고픈데
잘 다듬은 사랑이 익어가는데
가을이 가네
나는 행복합니다 / 원태연
당신을 사랑하므로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왜 내가 사랑하게 되었는지 무엇에
끌려 이토록 하나만 보이는지
아무런 의심 없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그래서
행복하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떠올라 주시는 그 얼굴에,
상상에만 그칠 입맛춤을 건넬 때도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눈물 흘리곤 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두 귀와
당신의 향기를 맡게 해줄 수 있는 코,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두 눈,
그리고 당신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가슴은 주인인 나보다
더욱 더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미소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당신의 마음이 나를 보고 있지 않다 해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로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비오는 어느 가을 저녁,
언뜻 젖은 당신의 머리결을,
우산을 받쳐주던 내 손이 만져보고
싶다 할 때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스런 목소리를 들려주던 입술을
내 입술이 입맞추고 싶다 할 때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그러니까
당신과 나 둘만의 시간에는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살다보면 어느날인가
서로에게 지칠 때가 올 것이고
그렇게 지쳐 사랑에 의심이 생길 때,
우리 사랑을 지켜 줄 그 무엇은
서로를 만지던 손길이 아닌 입술이
아닌 우리, 그러니까 당신과 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의 마음을
훔쳐보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이 어떠할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 마음 알아보려 당신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그저 보여드릴 뿐입니다.
베풀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이렇게
행복하다고,
내 마음과 그 마음의 주인인
나는 이만큼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숨길 것도 보탤 것도 없이
이 만큼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래도 그래도 당신의 마음이 궁금해지면
언제나 우리가 함께 차를
나누던 찻집으로 향합니다.
그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다면 기다렸다
끝까지 내 앞에
앉아 있던 당신의 그 자리에 앉아봅니다.
당신의 왼손이 올려져 있던 테이블에
내 왼손을 올려놓고
당신이 눈길을 보내던 내 자리를
쳐다볼 때면 저절로 알아집니다.
'이랬겠구나. 그때 당신은
내 모습에서 이런 것을 느꼈겠구나!'
알아집니다.
당신을 사랑하므로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당신의 마음 가득 내가 들어 있는지
알 수 는 없으나, 내 마음가득
당신이 차 있기에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밤을
수많은 별들로 밝혀드릴 수는 없지만
내 별 하나에 사랑을 담아 당신의
미소만은 환하게
밝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의 댓가로 무척이나 버거운
생활이 계속될지라도
그렇게 밝혀드린 그 미소 보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므로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모든 이유를 떠나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등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있을 것도 같고
추풍령은 항상 서릿바람과 낙엽의 늦가을 일 것만 같아
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 할거라
녹다만 눈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꽤 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에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 본적은 없지
염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춘천은 살얼음 시냇물 몸 풀며 흘러
사철 봄이려니.
가랑잎 / 유안진
모르겠다
내사 모르겠다
눈 딱 감고 송두리째
내던지고 싶은 맘일까
가을나무는
제 몸 제맘대로 어찌 못하는
멍이 드는 가을잎
잎지는 가을나무를 보면
낭떠러지 저 아래
나 모르는 세상으로
뛰어 내리고만 싶어질 뿐
손 털고 일어서
바람에 내어맡기고
어디로든 멀리 사라지고만 싶어질 뿐.
가을의 노래 / 유자효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녘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가을 아침에 / 윤동주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섭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한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오는 모든 기억은
피흘린 상처 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볍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 저녁 / 이동순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녔습니다
그대에게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갑니다
이런 날 저녁에 그대는 무얼 하고 계신지요
혹시 자신을 잃고 바람 찬 거리를 터벅터벅
지향 없이 걸어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이 며칠 사이 유난히 수척해진 그대가 걱정스럽습니다
스산한 가을 저녁이 아무리 쓸쓸해도
이런 스산함쁨이야 아랑곳조차 하지 않는
그대를 믿습니다 그대의 꿋꿋함을 나는 믿습니다
가을 편지 / 이동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보내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가을밤 / 이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 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어둠 속에서 툭툭 땅을 차고 일어서서 센 혓바닥으로
송아지를 핥을 때마다 혀의 힘에 못 이겨 비틀거리던
송아지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일하는 소를, 일하다가 발톱이 찢겨진 소를 사랑한다
이미 단풍나무 끝에 가볍고 파아란 집을 매달고 겨울잠에 들어간
가을 벌레를 나는 사랑한다
그 집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따뜻한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햇빛을 즐기며 풀숲을 누비던
여치와 버마제비들
섬돌의 이른 잠을 깨우며 서릿밤을 울던
귀뚜라미를 나는 사랑한다
생각하면 나는 화려한 것의 반대켠에서 고요하고 적막한 것에 길들여져 왔다
쑥갓꽃 패랭이꽃 손톱꽃 앉은뱅이꽃,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밤의 나뭇잎 지는 소리
밤나무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세상이 가장 조그마해지고 따뜻해지는 가을밤을
불켜지 않아도 마음이 화안한 가을밤을 나는 사랑한다
낙엽 /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 때가 좋은 때다
그 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가을걷이 / 이 석
파란하늘에 철새 떼 몰려오며
알 수 없는 문자를 끼륵끼륵 쓸 때.
저 눈부신 햇볕을 뒤집어쓰고
뿌리고 심지 않아도
겨울 상머리 웃음을 굽는
가을 거지 즐기는 맛을 아시는가.
어머니의 가을 거지 손맛 생각에
고추 가지 호박 봉지봉지 사다
한 조각의 골목 햇볕까지 잡아끌어
다그락 소리가 나도록 말리고,
특이나 풋고추 배 갈라 밀가루 무치고 찜통에 쪄
이틀이나 눈 빠지는 정 주어 명품을 만드는
재미의 맛을.
이제 철새 마지막 편대 올쯤이면
물 얼고 손 시린
긴긴 겨울.
무진장 어루는 이 축복을 퍼내
서너 아침 부지런 떨면
겨우내 나누고 풀며
10월 빛 씹으며 웃어.
가을 편지 /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식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소포 / 이성선
가을 날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아래
노란 들국화 몇송이
한지에 정성들여 싸서
비밀히 당신에게 보내 드립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그 향기며 꽃을 하늘이 피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띄우고
차가운 새벽 입술 위에
여린 이슬의 자취없이 마른 시간들이 쌓이어
산 빛이 그의 가슴을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는 정작의 이유는
당신만이 이 향기를 간직하기
가장 알맞은 까닭입니다
한지같이 맑은 당신 영혼만이
꽃을 감싸고 눈물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추워지고 세상의 꽃이 다 지면
당신 찾아 가겠습니다
키 작은 사람들의 가을 / 이수정
굴참나무야,
이 산의 꼭대기
키 작은 나무들은
벌써 춥다. 손이 시리다
반쯤은 핏빛 단풍이다
산동네, 좁은 길로
연탄재가 뿌려진다
난민촌이라 말하지 말라
굴참나무야,
종점에서 내린 사람들이
비탈길 가로등을 따라
오른다. 금 간 유리창 밖으로
빨강빛 커튼이 조금 나와 있다
일찍 온 바람이
커튼을 흔든다.
어두운 섬이 새를 날리듯
창문 밖으로 흔들린다
서리의 때가 오고,
얼음의 때가 오리라,
굴참나무야,
종점에서 내린 키 작은 사람들이
잠긴 자물쇠를 풀고,
스위치를 올린다
키 작은 사람들의 가을,
창문에 걸린 빨강 커튼이 일제히 빛난다.
가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 이 순
가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봄꽃의 짙음 보다
가을꽃의 옅음을 그리워하는
들국화 연보라빛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의 눈 안에 내려앉은
소멸과 시듬까지 말없이 껴안는
그런 넉넉한 사람일 것이다.
활짝 웃는 얼굴이 다 보이지 않고
돌아서 가는 뒷모습은 더 보이지 않을
옆모습이 고운 사람일 것이다.
은은한 강안개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 앉은 고운 배경 너머로
가을 산 비치는 강물 길게 보이고
아직 돌아가지 못한 철새들
억새풀 아래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는 주인이기 보다 나그네이길 원하는
그런 마음 가벼운 사람일 것이다.
가을 만나러 가는 사람은
시처럼 수채화처럼 화안히 드려다보이는
투명한 사랑을 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바람처럼 짧은 이별 보다
긴 기다림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즐거운 사람일 것이다.
가을아, 어쩌란 말이냐 / 李順福
바람이 분다
갈대가 운다
숲이 타고 이내 가슴이 탄다.
하늘이 울고
산천초목도 울고
나도 우는데
가을아 어쩌란 말이냐
밤알이 토실토실 영글어
한껏 부풀어 오른 계절의 길목에
석양을 넘는 인생
바람 시고
찬 서리 내려
무성한 가지 꺾이고 잎 떨어진
이내 청춘은 어쩌란 말이냐
저물어가는 황혼..
그늘진 가을 국화..
까닭도 없이 시리고 서글프구나....
강물 같은 기도소리 / 이시은
옷깃 바람결에 일렁이면
단풍잎 하나 꽃사지 되어
가슴에 꽂힐 것 같은 거리
리어카 위에 올라앉은 과일들
삐죽이 얼굴 내밀고 있다
비바람에 상한 얼굴
아직도 흉터가 남아
찌든 농부 가슴이 그려져 있다
바구니마다 가격표 달고
한생애 거래하는 시간
농부 가슴에 달아주는
기말고사 성적표 같은 숫자
지친 손 마주 잡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 같은 기도소리
가을밤은 기도 속에 깊어가고
리어카에 쪼그리고 앉아
손님 기다리는 과일의
댕그란 눈빛만 불빛에 일렁인다.
가을 산 / 이시은
창 틀에 찬바람 스미고
높은 산에는 단풍이 지는데
가을 옷 차려입은 산을 찾았다
햇살에 빛나는 빠알간 단풍잎은
그대 눈빛에 댄 내 볼 빛 되고
하느작이며 손짓하는 노오란 단풍잎은
그리움 고인 그대 눈빛으로 다가선다
활활 타오르며 얼싸안는
가을 산처럼
그렇게 만나
아름답게 노래 부르다
겨울이 오면
우린 기다림을 안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찬바람을 데워
다시 새싹 돋아나는 봄을 만들자
빠알간 볼에 입맞춤하는 가을 산
가을 들판 / 이시은
가을 들판에
얼룩진
가슴이 있다
황금색 전율은
거부할 수 없는 몸짓
바람은
몸 헐리는 소리를 내며
들판을 달려가고
긴 여로의 기착지처럼
아아아 울어대는 가을 들판에
허수아비 되어 선다
슬픈 가을 / 이영춘
쨍그렁 깨질 듯한 이 가을 하늘
눈물겹다
무거움의 존재로 땅 끝에 발붙인 짐승
부끄럽다
멀리 유유히 구름은 흘러가고
가을 잠자리들 원 그리면 무리 짓는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이 가을 햇살 아래
아, 아프구나!가볍지 못한 존재의 무게가
바스락대는 잎새의 온갖 새들
깃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 날
밤새 무명의 화각로 벽화 그리던 거미들도
하루살이도, 쓰르라미도, 풀벌레도, 오소리도
제 무게 이기지 못하여 모두 털고 일어서는 이 가을날에
나는
무엇이 이토록 무겁게 허리를 잡아 당기고 있는가
거리에 가을비 오다 / 이준관
노란 우산 아래로 장화의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거리로 나선다
비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 나는 들으마, 너는 말하라.
나는 외로운가 보다.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풋내기 시인처럼 앞뒤 韻운이 맞지 않은 네 말소리에
나는 열중한다.
얼간이처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외로운가 보다.
길가에는 젖은 발들이 흐른다.
젖은 발들이 내 쓸쓸한 발등을 밟는다.
나뭇잎들이 비의 말을 따라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먹으며, 나뭇잎은 나보다 더 외로운가 보다.
항상 나에겐 낯설기만 한 비의 알파벳.
異國이국 처녀의 눈처럼 파란 비 오는 가을 풍경.
나는 누구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주정뱅이처럼 꽃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나는
형편없이 외로운가 보다.
가을 떡갈나무 숲 / 이준관
떡갈나무 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婚禮),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 한데,
텃새만 남아
산(山) 아래 콩밭에 뿌려 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 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 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山)짐승이 혀로 핥아 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山)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거야, 잎을 떨군다.
가을 벌레 소리 들으며 / 이준관
벌레들이 자신의 사랑의 반쪽을 찾아
저렇게 말갛게 우는 소리를 듣노라면
나는 잠이 안 온다
대추나무 그림자 흔들리며
문득 대추는 붉어지고
골목 안 옷 수선소의 재봉틀 소리
밤늦게 끊어지 않는다
벌레 소리 들으며
포도는 푸른 달빛이 배이고
떫은 감엔 단맛이 고인다
달빛 아래서
벌레들이 날개를 비비듯
내 손을 비벼본다
그러나 내 손은
저 벌레처럼 맑고 푸른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작은 손가락뼈도 되어주지 못한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이손으로 무엇을 했으며
누구를 사랑했던가
우물물 도른도른 고이듯
맑은 벌레 소리 앞에서
나는 내 빈손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잠투정을 하며 이불을 걷어차는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나는 이 가을
벌레 소리처럼 맑은 사랑을 생각해본다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이준관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시골 버스를 탄다
시골 버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황토흙 얼굴의 농부들이
아픈 소는 다 나았냐고
소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낯모르는 내 손에
고향 불빛 같은 감을
쥐어주기도 한다
콩과 팥과 고구마를 담은 보따리를
제 자식처럼 품에 꼭 껴안고 가는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귀에 정겹다
창문 밖에는
꿈 많은 소년처럼 물구나무선
은행나무가 보이고
지붕 위 호박덩이 같은 가을 해가 보인다
어머니가 싸주는
따스한 도시락 같은 시골버스
사람이 못내 그리울 때면
문득 낯선 길가에 서서
버스를 탄다
하늘과 바람과 낮달을 머리에 이고
당신을 보내듯 가을을 보내지만 / 이채
당신을 보내듯
가을을 보내지만
멈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그 많은 그리움을 남겼듯이
계절은 무수한 열매를 남기고
이제 긴긴 잠이 든 당신안에서
밤마다 꽃씨를 닮은
고요한 가슴앓이를 할 것입니다
떠나도 결코 버려진 시간은 아니고
또한 잊혀질 어울림도 아니어서
바람이 돌아오고
햇살이 계곡의 물을 녹이면
꽃은 다시 피고 잎은 따라 싱그럽고
그 안에 새 한마리
휘파람 불며 불며
그리운 당신품으로 돌아 올 것입니다
내 꽃이 아름답고
당신의 잎이 싱그러운
더없이 찬란한 사랑을 위해
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갈 뿐입니다
동면의 시간에도
죽지 않고 살아 숨쉬는 것은
죽은 듯 나무에도
시절이 오면 꽃이 피기 때문이라
못내 깊고도 은밀한 그리움을 앓겠습니다
가을편지 / 이해인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생에 그러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線).
그리고 내 생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점(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 본 하늘 위에
착한 새 한 마리 날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무언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시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빛 새 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나의 사랑이 티없이 단순하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오.>
26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헤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쑥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 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사랑의 비법을
들려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이해인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잎 두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익어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가을 노래 / 이해인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을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웅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가자 / 이해인
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 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어서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가을바람 / 이해인
숲과 바다를 흔들다가
이제는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깨우는 바람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놓고
햇빛과 손잡는
눈부신 바람이 있어
가을을 사네
바람이 싣고 오는
쓸쓸함으로
나를 길들이면
가까운 이들과의
눈물겨운 이별도
견뎌낼 수 있으리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아름다운 말
향기로운 모든 말
깊이 접어두고
침묵으로 침묵으로
나를 내려가게 하는
가을바람이여
하늘 길에 떠가는
한 조각구름처럼
아무 매인 곳 없이
내가 님을 뵈옵도록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
바람이 있어
나는
홀로 가도
외롭지 않네
가을의 기도 / 이해인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가을 가을 하고 부르는 동안
나는 금방 흰 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말을 마음속에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 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발길이 산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해지길 원합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찾아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언어가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맑고 담백하고 겸손하길 원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맑고 고운 말씨로 기쁨 전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에 밤(栗)을 받고 / 이해인
'내년 가을이 제게 다시 올지 몰라
가을이 들어 있는 작은 열매
밤 한 상자 보내니 맛있게 드세요'
암으로 투병 중인
그대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아픕니다.
밤을 깍으며
하얗게 들어나는
가을의 속살
얼마나 더 깍아야
고통은 마침내
기도가 되는걸까요?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그대의 겸손을
모든 사람을 마지막인 듯
정성껏 만나는 그 간절한 사랑을
눈물겨워하며 밤 한 톨 깍아
가을을 먹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그 웃음
아끼지 마시고
이 가을 언덕에
하얀 들국화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십시오.
익어가는 가을 / 이해인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가을이 깊을 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 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가을바람 편지 / 이해인
꽃밭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코스모스 빛깔입니다.
코스모스 코스모스를
노래의 후렴처럼 읊조리며
바람은 내게 와서 말합니다.
'나는 모든 꽃을 흔드는 바람이에요.
당신도 꽃처럼
아름답게 흔들려 보세요.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과 사랑의 길에서
나는 흔들리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면서 살아온 것 같네요.
종종 흔들리기는 하되
쉽게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요.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할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들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알고
아픈 사람 슬픈 사람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많이 울 줄도 알고
그렇게 순하게 아름답게 흔들리면서
이 가을을 보내고 싶습니다.
가을 일기 / 이해인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을의 시작부터
시로 물든 내 마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에
조용히 흔들리는 마음이
너를 향한 그리움인 것을
가을을 보내며 비로서 아는구나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너에게
가을 내내 단풍 위에 썼던
고운 편지들이
한잎 한잎 떨어지고 있구나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붉게 물들었던 아픔들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려
새로운 별로 솟아오르는 기쁨을
나는 어느새 기다리고 있구나
가을빛 / 이해인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 이해인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가을, 가을,하고 부르는 동안
나는 금방 흰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말을 마음 속에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눈길이 저 푸른 하늘을 향해
파랗게 물들어서
더욱 깨어 있길 원합니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눈길로 하루를 시작하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마음이
불타는 단풍 숲으로 들어 가 붉게 물들어서
더욱 사랑 할 수 있길 원합니다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하루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 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발길이 산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해지길 원합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찾아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언어가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맑고 담백하고 겸손하길 원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맑고 고운 말씨로 기쁨 전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둥근 달빛을 받아
고요하고 은은하길 원합니다
깊은 생각 어진 마음 키우며 매사에 사려 깊고 지혜로운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을 사랑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어 길을 가는
가을의 기쁨, 감사드립니다
가을이 주는 서늘한 평화 가슴에 안고 벗들을 불러보는
가을의 은총, 감사 드립니다
우리 함께 가을의 사람이 되어 가을을 노래하기로 해요
깊고 맑고 높고 착한 가을을 함께 살기로 해요
그러면 가을도 우리를 축복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가을의 열매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익어갈 것입니다
고향의 달 / 이해인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서
내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그 아름다운 달
고향 하늘의
밝고 둥근 달이
오랜 세월 지난 지금도
정다운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네
'너는 나의 아이였지
나의 빛을 많이 마시며 컸지'
은은한 미소로 속삭이는 달
달빛처럼 고요하고
부드럽게 살고 싶어
눈물 흘리며 괴로워했던
달 아이의 지난 세월도
높이 떠오르네
삶이 고단하고 사랑이 어려울 때
차갑고도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며 달래던 달
나를 낳아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또 어머니
수많은 어머니를 달 속에 보네
피를 나누지 않고도
이미 가족이 된 내 사랑하는 이들
가을 길 코스모스처럼 줄지어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네
달이 뜰 때마다 그립던 고향
고향에 와서 달을 보니
그립지 않은 것 하나도 없어라
설레임에 잠 못 이루는 한가위 날
물소리 찰랑이는 나의 가슴에도
또 하나의 달이 뜨네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 이 해 인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 잎 두 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
향기롭게 피워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오랜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가을은 조용히 흔들린다 / 이향아
미닫이를 내리는 손마디에서
가을은
조용히 흔들린다
우리가 눈으로 함빡 웃을 때
가을은 금세
꽈리처럼 영글어 버린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취해서 돌아오는 오후
햇살은
그리운 머릿단을 만지는
머언 나팔 소리
한밤내 기침하여 키를 늘여도
향기로운 새벽
아무것도 못 된
하찮은 우리들
돌다릿목에 엎드려 물을 움킬 때
가을은 핏속으로 스며와
나를 흔든다
가을 밤 / 이효녕
빗방울 떨어지면
마음 하나 채우고
울면서 돌아가는 나무를 본다
단풍잎에 떨어지는 빗물이
아라베스크의 오수(午睡)에 스미면
눈물은 슬픔의 몫이라지만
한 철을 안고 있던 정들이 흩어져
바람소리도 갈증의 그림자 드리우며
지난 시간의 기억을 잃고 살을 섞는가
모두가 붉어지는 가을의 언덕에 서서
억새가 손 흔들어 작별 하면
상장(喪章)처럼 흐느끼는 밤마다
그리움 하나 품어가지 못하랴
가을 편지 / 이효녕
가을이 코스모스 꽃빛 물들여 옵니다
뜨거운 가슴에 여름내 새겨 빨개진
고추잠자리는 날갯짓으로 나를 불러
같이 하늘에서 춤을 추자고 하는데
동구 밖 과수원 열매는 익어가고
아직 마르지 않은 추억 하나
바람에 들국화 향기 날립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는 마을에
어두운 저녁 하늘에 노을 빛 잠긴
빈 마음에 들어앉는 단풍
아름다운 편지가 되면
가을은 사연을 들려주려고
소슬한 바람 불러들입니다
물밀 듯 잠겨오는 바람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오는 사람
이제 내 가슴의 언어로 편지를 써서
코스모스 꽃잎의 편지를 부칩니다.
국화꽃 그늘을 빌려 / 장석남
국화꽃 그늘을 빌려
살다 갔구나 가을은
젖은 눈으로 며칠을 살다가
갔구나
국화꽃 무늬로 언
첫 살얼음
또한 그러한 삶들
있거늘
눈썹달이거나 혹은
그 뒤에 숨긴 내
어여쁜 애인들이거나
모든
너나 나나의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
있거늘
가을의 시 /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가을이 오는 소리 / 정고은
앙증스런
아기 손 같았던 잎새는
푸름을 더했고
땀방울 식히는 한여름
불어주는 바람결
우리의 쉼터로
그늘이 되어 주었지
바람결에
한잎 두잎 떨어내는 모습
애처롭기도 하고
떨어지는 수만큼
쓸쓸함이 더하겠지
나이 들어가는
쓸쓸함처럼 초연한
고요만 남아 있으니
서럽지도
슬프지도 않음이리라
풍성한 수확의 계절
들녘 고개 숙인 벼
바람결 반기며
황금 물결 풍요를 채우지
내 마음에 그대라면..
낙엽진 숲길을 걸어도
좋겠습니다...
가을날 이후 / 정대구
가을날 이 하루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인의 눈을 맑고 밝게 빛낼 때는 지금입니다.
뜨겁게 불타던
짐승의 눈은 꺼지고
가을은 미완성을 남기지 않습니다.
주여, 이후도 혼자인 저에게
무슨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친한 벗은 오늘 오랫동안 사귀던
처녀와 결혼을 하고
이렇게 나 혼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조그만 목소리에도
나는 놀랍니다.
여러 날을 연습했습니다.
오늘 이 하루의 완성을 위하여
아이들은 소리치며 달려가고
여름내 비와 바람이 불었습니다.
하루만 더 머룰러 가게 하십시오.
내일은 침묵입니다
가을햇살 / 정 양
산 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 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 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 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개 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감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당신을 좋아해 / 정연복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봄날의 목련처럼
은은히 눈부시지만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여름날의 장미처럼
더욱 눈부시지만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은
가을 들녘의 들꽃처럼
소박하기만 하고
당신을 많이 좋아한다는 말은
겨울 산의 소나무처럼
말없이 편안하여라
낙엽 진 오솔길을 걸으며
무슨 까닭일까
살며시 당신이 그리워지며
나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새어 나온
한마디
"나는 당신을 좋아해."
가을전어 / 정일근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맛이 되고 약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사람의 몸에서도 가을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법이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을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즐겁게 피워 올리자
가을의 일 / 정일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은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黃道)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지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 속으로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채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놓아야겠고
가을별들 제자리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보는 것이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詩)를 읽으며 조금씩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니
시(詩)를 읽는 소리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는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른 들깻단 / 정진규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
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
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늦은 아버지답구
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
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단,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海底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빨간 담쟁이덩굴 / 정현종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석류, 사과, 그리고 모든 불꽃들의
빨간 정령들이 몰려와
저렇게 물을 들이고,
세상의 모든 심장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놓았으니
살 만하지 않은가, 빨간 담쟁이덩굴이여,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
가을꽃 /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 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가을 잠자리 / 조태일
몇날 몇 달
몇백 리 몇천 리의 허공을 날고 날았을까.
텅 빈 폐가의 늘어진 빨랫줄에
잠자리 한 쌍
앉아서 쉬고 있다.
투명한 그물맥의 날개를
이따금 이따금 떨면서
작은 더듬이로
이 세월을 더듬거린다.
그 큰 곁눈으로 할깃할깃,
익어가는 삼라만상을 담는다.
몇날 몇 달
몇백 리 몇천 리의 허공을 뚫고 날아서
저승으로 가려는가
세 쌍의 다리로 힘껏
이승을 박차고
자물자물 하늘로 날아간다
황금빛을 반짝이며.
그리움 / 조태일
친구야
달을 쳐다보렴, 저 달을 쳐다보렴.
긴긴 날을 두고 쏟았던 열정들이
끝내는 그리움이 되어
밤하늘을 가득히 차오르누나.
떠돌이 영혼도 붙들어주고
잃었던 사랑도 하늘 끝까지 세우려는가.
흔들흔들 차오르누나.
마음결 서로 곱게 쓰다듬으면
잡초처럼 누웠다가
잔잔한 바람결에도
무슨 기별이나 안 묻어오나
애틋한 마음 흔들며 일어나
우리는 속으로 조용히 울다가
끝내는 폭포처럼,
폭포처럼 울지 않았던가.
친구야.
달을 쳐다보렴, 저 달을 쳐다보렴.
이제 그리움은 한데 엉켜
가을밤 크고 작은 산 위에
둥둥둥 떠 오르누나.
그 기별이 쏟아지누나.
찬란한 그리움으로.
가을은 아름답다 / 주요한
빗소리 그쳤다 잇는
가을은 아름답다
빛 맑은 국화송이에
맺힌 이슬 빛나고
꿩 우는 소리에 해 저무는
가을은 아름답다
곡식 익어 거두기에 바쁘고
은하수에 흰 돛대 한가할 때
절 아래 높은 나무에
까마귀 소리치고
피묻은 단풍잎 바람에 날리는
가을은 아름답다
물없는 물레방아 돌지 않고
무너진 섬돌 틈에서
달 그리운 귀뚜라미 우지짖는
멀리 있는 님생각 간절한
한 많은 철이여!
아름다운 가을이여!
가는 가을 밟으며 / 지석동
곱게 물든 떡갈나무 숲길에
분분히 낙엽이 집니다
머리에도 어깨에도 떨어집니다
그 무게에 무릎이 아픕니다
일 년의 무게입니다,
머리 위에서 갈가마귀가 웁니다
빨갛게 물든 산 벚나무 우듬지에서 산 까치가 웁니다
하나같이 벗겨지는 게 아쉬워서,
떨어지는 잎마다 온전함이 없습니다
벌레에 뜯겨 구멍이 나고 잎가 한쪽이 없어지고
균에 휘달려 여기저기 아팠던 상처
폭염에 데여 검어진 흔적
지는 잎 하나에도
삶은 아픈 기억입니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없는 계절
우리도 연기 없이 타
먼 그리움에
단풍지는 마음을 답니다.
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사라진 계절 / 천양희
사자별자리 자취를 감추자 봄이 갔다
꽃이 피었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날이었다
쾅 문을 닫는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 쾅, 하고 닫혔다
고통이란 자기를 둘러싼 이해의 껍질이 깨지는 것이었다
전갈자리별 자취를 감추자 여름이 갔다
초록 나무에도 그늘이 짙은 그런 날이었다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필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노랑발도요새가 자취를 감추자 가을이 갔다
고독이 지쳐 뼈아프게 단풍드는 그런 날이었다
잃다가 잊다가 같은 말이란 걸 아는 순간 내 속에 피가 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흰꼬리딱새가 자취를 감추자 겨울이 갔다
몸이 있어서 추운 그런 날이었다
안다고 끝나는 게 세상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 내 안의 어둠이 쏟아졌다
이 세상에 와서 내가 없는 계절은 없을 것이었다
가을 전어 / 최광일
머리에 깨가 서 말이라
집 나간 며느리 구운 향기에
집 들어온다는 가을 전어
화롯불에 노르스름하게 구워
맑건 탁주와 함께 먹는 맛이란
셋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르겠더라
벌겋게 단 불에 꼬들꼬들하게 구우면
기름이 자르르 흐르며 보기만 해고 입맛 돋우고
구수한 향기에 십리 안팎 벗들
아니 불러도 절로 오더라
결코 귀하다고 할 수 없는
우리네 서민들 즐길 수 있는 먹을거리에 하나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벗과의 우정을 위해서
이웃 간 친목을 위해서
화롯불에 가을 전어 노르스름하게 익혀 놓고
함께 나누면 없던 정도 생기더라
가을에는 / 최영미(崔泳美)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의 詩 / 최영희
저 虛虛한 공간에
한 수씩 적어 내는 가을의 무언의 詩
나는 가을만치 시를 쓸 수 없어
가을 내내 筆을 들지 못했다
가을이 써내는 묵언의 서정 (抒情)
하늘 가운데 구름 한 점이 임의 虛虛함이라면
나는 ( ,,,, )표로 대신할까
어제 지나온 하얀 갈대 숲길이
떠나는 임의 아쉬움을 말하는
무언의 손짓 같은 것이라면
나는 다시 맹목으로 기다림을 결심하겠지
그렇게 한 걸음씩 임은 가시고
이제 은행잎 노란 나비떼처럼 날아 내리면
가으내 앓았던 임의 앙상한 갈비뼈만
다시 나를 슬프게 하겠거니
아- 저 虛虛한 공간에 가을이 썼다가 지우는,
그리고 다시 쓰는 절절한 언어
그리고 말없이 떠나는,,, 계절의 詩聖, 가을
나는 가을처럼 사랑하고도
가을처럼은 詩를 쓸 수 없음이라
가을 내내 筆을 들었다 놓기를 거듭하고 있구나.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건 / 최 옥
사랑을 한다는 건 세상의 문 하나를 닫는 것
끝도 없이 가을이 길어지는 것
잊는다는 건 세상의 문 하나를 여는 것
끝없는 상실감에 비로소 내가 보이는 것
사랑은 허공이며 그 허공에
모든 것을 얹을 수도 있는 것
까닭없이 혼자 울게 되는 것
단풍보다 진한 빛깔로
낙엽보다 쓸쓸하게 떨어지던 눈물
그 눈물에 젖는 건 내가 아니라 그대였다
바람같은 목소리로 노래 불러주던 사람이여
결코 내 사람일 수 없는 그대와 나...
정녕 어떤 인연으로 세상에 왔을까
그대가 건네주던 커피한잔에
나의 가을 송두리째 가두었으니
아아, 언제까지나 무채색으로 남을 이 가을
가을속으로 떠나기 / 최옥
나무가
흔들리는 만큼
꼭 그만큼만 나도
흔들려 볼란다
낙엽이 지는 만큼
꼭 그만큼만 나도
떨구고 갈란다
바람이 닿는 곳
꼭 그만큼만 나도
떠나가 볼란다
한 줄기 바람에도
마음을 다치는 이 가을
단풍잎 하나에
나를 실어 볼란다
가을편지 / 최하림
그대가 한길에 서 있는 것은
그곳으로 가을이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빠져 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셈이겠습니다.
그대가 역두(驛頭)에 서 있다든지 빌딩 아래로 간다든지
우체국으로 가는 것도 수사가 다르긴 하되 유사한 뜻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바람과 햇빛이 반복해서 지나가고
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무량으로 흘러갑니다
그대는 시간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합니다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도무지 시간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결정의 내용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모카 커피를 마시며 / 최하림
이마 넓은 가을이 찾아오면
우리 마음은 둥글어진다 거년에
입다 둔 무명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보이지 않게 먼지들이
국화문 벽지에 쌓인다
아내가 모카 커피를
타가지고 오는 소리 들린다
모카 향내는 색다르다 아내는
향내를 조금 쓰게 타올 때도 있고
조금 달게 타올 때도 있다
내 기분에 알맞게는 하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아니므로 그렇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산다 우리의 개성인 모서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지고 모서리들이
닳아지고 모서리들이 정다워지면서
죽음 가까이 죽음처럼 둥글게
감정이 고인다 감정이 가을잎 같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맛은 쓰다
아내는 사과를 쟁반에 받쳐들고 올 때도 있다
홍옥이 가을에는 향기롭다
나는 부사가 좋을 때도 있고 배가 좋을
때도 있으련만 말을 않고
홍옥을 먹는다 홍옥 냄새가
입 안을 감돌고 붉은 빛은 혀를
감칠나게 한다 향내는 감정이 된다
가을, 그리고 겨울 / 최하림
깊은
가을길을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가을이 떠난 자리 / 한상학
가을 떠난 자리에
낙엽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서리 맞은 찬바람 불면
휑하니 빈자리 나목이 잉잉대며 운다
가을 간 자리 텅 빈 들판에
허수아비가 된 내가 서 있다
고추잠자리 놀던 하늘도
텅 빈 채 파랗게 질리고
굶어 죽은 시체같이
앙상한 가로수가 겨울을 마중한다.
은행잎을 노래하다 / 황동규
그래도 열 손가락으로 헷갈리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 세다 세상 뜬다는 것
얼마나 자지러진 휘모리인가.
갓 뜬 노랑 은행잎이 사람과 차에 밟히기 전
바람 속 어디론가 뵈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것!
갑자기 환해진 가을 하늘
철근들 비죽비죽 구부정하게 서 있는
정신의 신경과 신경 사이로 온통 들이비쳐
잠시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고
길 건너려다 말고
벗은 몸처럼 서 있어도 홀가분할 때,
땅에 닿으려다 문득 노랑나비로 날아올라
막 헤어진 가지를 되붙들까 머뭇대다
머뭇대다 손 털고 날아가는
저 환한 휘모리, 저 노래!
가을의 편지 / 황동규
우리는 정신없이 이어 살았다.
생활의 등과 가슴을 수돗물에 풀고
버스에 기어오르고, 종점에 가면
어느덧 열매 거둔 과목의 폭이 지워지고
미물들의 울음 소리 들린다.
잎지는 나무의 품에 다가가서
손을 들어 없는 잎을 어루만진다.
갈 것은 가는구나.
가만히 있는 것도 가는구나.
마음의 앙금도 가는구나.
면도를 하고 약속 시간에 대고
막차를 타고 밤늦게 돌아온다.
밤 세수를 하고 거울 속에서
부서진 얼굴을 만지다 웃는다.
한번은 문빗장을 열어놓고 자볼까?
가을 냄새 / 헤세
다시 한여름이 우리를 떠났네
어느 늦폭풍우 속에서 죽어 갔지
비는 참을성 있게 철철 내리고, 젖은
숲에서는 두렵고 쓸쓸한 향기가 나네
철 잊은 상사화가 풀밭에서 파리하게 굳고
버섯들이 솟구치듯 밀려 나와 무성해지고
어제만 해도 측량할 수 없이
넓고 환하던 우리 골짜기, 가려지고 좁아지네
빛에 등 돌린 이 세상은
좁아지고 두렵고 쓸쓸한 향기가 나네
우리는 무장을 하네
생명의 여름 꿈을 끝내는 늦은 폭풍우에 대비하여
가을이 떠나가네 / 홍기석
호수가 벤치의
가을은 몸을 일으킨다
오솔길을 향한
바람에 몸을 띄우고
낙엽은 흔들린다
가녀린 숨소리
떨리는 눈동자
떨어지는 발걸음
뒷모습을 보인다
시간은 추억이 되고
가슴을 매우는 눈물은
차갑거나 뜨겁다
밤을 흔들고
새벽에 울다 지쳐 잠드는
젊은이의 어깨를 감싸주고
가을은 따나간다
사랑의 계절 / 홍윤숙
가을이 오면 우리의 사랑도 깊어집니다
한 시절 짙푸르던 잎새들도 사랑으로 물들어
본향으로 돌아가고
아득히 헤어졌던 사람들도
그 이름 다시 떠올려 그리운 회상에 잠깁니다
만나면 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싶은
단풍처럼 예쁘게 물드는 마음
가을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계절입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 / 지은이 모름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 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 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 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