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7일
제목: 대속물이 되신 예수님
본문: 디모데전서 2:6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작은 희생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시간과 물질을 내어놓는 일도 어렵고,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그 중보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대속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은혜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기를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말씀하신 후, 그 중보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대속물'이란 구약의 제사 용어입니다. 구약 시대에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대신할 짐승을 제사장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 짐승은 아무 죄가 없지만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이것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또한 속전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값을 치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떤 주인의 권세 아래 묶여 있던 자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주인이 값을 치르는 값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셔서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 모든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죄인처럼 죽음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길은 없었을까요? 창조 때처럼 말씀만으로 "내가 인류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선언하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혹은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같은 천사를 보내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의 시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은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이성적인 짐승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천사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해 대속물이 되어 주신 주님께 우리는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님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미련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 1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말구유에 오신 것도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신 것도 세상의 눈에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며 피를 흘리고 몸이 찢겨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실패처럼 여겼고, 어리석은 일로 보였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구원하려 하신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죄인들이고, 악인들이며,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대학 시절 과외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의 어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습니다. 늘 집안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만 만났습니다. 과외를 그만두는 날 처음으로 아이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얼굴은 심한 화상으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목조주택에 불이 났고,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이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얼굴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누가 그 어머니를 향해 어리석고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희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시지 않고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3~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를 위한 가장 완전한 구원의 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이 미련해 보였지만 그 일이 바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구원 손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었기에 주님은 친히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죄악 가운데 살아가던 우리를 위하여,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참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대속물이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대속을 미련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은혜입니다.
결론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가장 귀한 값을 치르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대속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사하고, 죄를 미워하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