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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을 찾아드는 품이다. 답답한 속을 틔우며 어지럽혀진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양장이다. 저 아래에서 좌선 삼매경에 빠진 사람, 그 위의 세상 밖에 앉아 살던 땅을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그 북편에 있는 산길을 쉼없이 걷는 것으로 참선 삼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산이다. 이제 그 산에 해가 저문다.
팔공은 사방 수백 리에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정상에 서면 온 세상이 일망무제. 더 올려다 볼 것이라고는 오직 하늘뿐이다. 하늘과 만날 수 있는 통로, 하늘의 뜻을 물으려면 찾지 않을 수 없는 자리, 그것이 팔공산이다.
팔공산은 '우리'가 수 천년을 기대 살아 온 산,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산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산, 영원히 함께 할 우리의 산이다. 김유신은 거기서 핍박받던 나라 지킬 힘을 빌었다. 원효는 10년을 구도했다. 신라는 국가적인 대제(大祭)를 하늘에 올렸다. 많은 유학자들은 수행처로 삼았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 품안을 찾아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그 날개 밑을 둥지 삼아 가부좌 틀고 용맹정진 중이다. 그리고, 그렇고 그런 우리 중생들의 마음들도 끊임없이 쉼 없이 팔공산을 향하고 있다.
팔공산은 그 뭇 생명들을 그 오랜 세월 보듬어 왔다. 그들의 뜻과 고난을 지켜봐 줬다. 몽고군이 처절히 유린할 때는 민초들과 함께 아파했다. 왜군이 짓밟을 때는 의병을 감싸 안았다.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나라를 지켰다. 공비들로 인해 동네가 화염에 휩싸이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처절함, 홍수와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돼 수십 호가 같은 날 제사를 모셔야 하게 됐던 참혹함에도 팔공산은 말없이 그 아픔을 함께 했다.
어디가 팔공인가. 늘 우리 속에 있어 스스로 잘 아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막상 자세히 보려 대들 듯 하자 윤곽마저 감춰 버렸다. 제대로 파악해 설명해 주는 책 한 권 만나기 어려웠다. 답답해 산 위로 올랐으나 사방이 산첩첩, 어느 줄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서 맺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헬리콥터를 타 봐도 확연한 건 겨우 한 귀퉁이. 6km 상공에서 찍었다는 고공 사진, 심지어 지구 밖에서 찍었다는 위성사진에서조차 팔공산은 제 모습을 다 보여 주지 않았다.
어디가 팔공인가, 그리고 그 품안에 사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화두를 쫓아 산길을 걷고 골 길을 더듬었다. 그러길 15개월. 게으름 부리지는 않았다. 더러는 조바심에 빠져 밤낮을 모르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빠뜨린 게 많고 잘못한 것은 더 많다. 거조암이 있는 신원리 계곡을 지나쳤고, 동화사골도 그랬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동화사골의 산줄기 그림이라도 그려 놓는다. 잘못한 것은 단행본으로 묶을 때 힘껏 바로 잡을 것을 약속드리는 것으로 사죄 삼고자 한다. "갈 길은 먼데 해가 기우니 도리에 어긋난 짓이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의 주인공 오자서(伍子胥)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다. 그래도 이 시리즈가 여기까지 이어져 오기에는 수많은 분들의 노고가 밑거름 됐음은 밝혀두고자 한다. 취재팀은 그걸 수합만 했을 뿐이다. 실제 이 시리즈를 쓴 이는 그분들이라 말하는 것이 보다 정직한 일일 터이다.
☞ 동화사골 산경도.(※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보다 먼저 감사 드려야 할 분은 팔공산 기슭에 사는 어르신들이다. 전래 지명과 그곳에서의 생활사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은 그분들뿐이었다. 그래서 취재팀은 산 현장 답사 못잖게 열심히 어르신들을 찾아뵈었다. 팔공산 주변 거의 모든 동네들의 경로당을 찾았다. 개별로 방문한 댁도 상당수에 달했다. 그럴 때 어르신들은 "전래 지명을 기록해 둘 기회가 지금 아니면 없다"는 취재팀의 취지에 전폭적으로 동의해 줬다. 김치밥국을 끓여 주거나 따뜻한 커피를 배달시켜 주기도 했다.
취재팀 가까이에서 이번 일을 자신의 것인 양 챙겨주신 분들 또한 적잖았다. 그 분들은 온갖 자료를 구해다 주고 적절한 취재원과 연결시키는 등의 일로 취재팀 못잖게 부산히 움직여 줬다. 등산에 초보이던 취재팀에게 옷가지부터 골라주며 준비를 도와준 분도 있었다.
팔공산 경북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15년간 근무했다는 강재순씨는 팔공산 여러 구역을 손바닥 살피듯 토끼길까지 챙겨가며 취재팀을 이끌고 다녔다. 대구 관리사무소의 이정우씨는 지묘천골 상류 구간을 안내하며 잘못 알려진 지식들을 경계토록 일깨워 줬다. '산이 좋아'라는 등산모임의 허현 대장과 그 일행은 팔공기맥 답사를 선도하고 팔공산의 숨겨진 등산로를 인도해줬다.
'대구 산사람들'은 전래 지명 보전이라는 취재팀의 취지를 이해하고 함께 움직여 줬다. 안면부지의 어떤 등산모임도 잘못된 지명표기 수정 작업을 수행해 무언의 동행자가 돼 줬다.
식생과 향토사 연구가인 '달구벌 얼 찾는 모임'의 이정웅 회장은 식물 군락지나 공산성 유적 등등을 안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취재팀을 정상부 곳곳까지 데리고 다녀줬다. 기사가 잘못 되는 경우가 없도록 지켜봐 주는 것도 이 회장의 몫이었다.
정상부에서만 수십년을 근무하고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그곳 지형과 유적을 모르는 곳 없는 김택주씨는, 많은 회수에 걸쳐 일대를 안내하고 길 없는 험한 지형을 답사할 수 있도록 늘 함께 해 줬다.
팔공산 동화사 지구의 김태락씨는 이번 취재의 '지원대장' 역할을 자임해 큰 지출 부담까지 져 줬다. 산자락의 많은 어르신들을 모셔 취재팀이 정보를 얻고 친분을 쌓을 수 있게 했으며, 여러 전문가들을 연결해 줬다. 위험하기 짝 없는 구간에서 무릎 넘는 깊이의 눈 속을 종일 헤매느라 몸이 꽁꽁 얼어 나왔을 때는, 취재팀을 녹여 주느라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챙겨줬다. 취재팀의 건강을 염려해 별식을 준비해 주는 경우까지 드물잖았다.
김종욱 박사는 대구 산악운동사와 팔공산의 옛 모습 공부를 지도해 줬다. 대구가톨릭대 전영권 교수는 팔공산의 지질학적 공부에 도움 줬고, 조현제 박사는 산림과 식생에 관해 지도해 줬다.
도움보다는 아예 스탭같이 제작에 동참해 준 분들도 적잖았다. 경북대 박사과정 임용호씨는 산줄기 지도의 밑그림 그리기로 시종 일관 제작팀과 함께 했다. 고민석씨는 그 밑그림을 받아 최종 지형도로 완성시키느라 일년 동안 그야말로 '죽을 고생' 했다.
경일대 조명희 교수와 그의 공간정보 기술 전문 벤처 'Geo C&I' 송완영 과장 등 많은 전문가들은 항공지도 제작을 맡아 줬다. 그리고 일부 모호한 지형에 대해서는 고가의 장비와 많은 인력을 투입해 현장 측량까지 수행해 줬다. 재정적 부담이 엄청났을 터. 그 희생에 감사 표할 방법 없음이 답답할 뿐이다.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 역시 늘 힘이 되고 의지 됐음을 취재팀은 잘 알고 있다. 어떤 분들은 전화나 메일로 격려해 주기까지 했다. 모두가 지역에 대한 사랑 때문에 팔 걷고 나섰을 터였다. 그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 드리고, 그 헌신들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음을 사죄 드린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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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보편화되고 웰빙 바람이 분 뒤 팔공산을 찾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 봉우리와 재, 골의 이름이 지금 같이 방황하도록 더 이상 내버려둬서는 후유증이 심각할 것입니다. 함께 지식과 지혜를 모으면 어떻겠습니까. 각자가 들은 이름과 사연들을 한데 모아 봉우리와 재들이 제 이름을 찾도록 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매일신문 '팔공산하' 제작팀이 지혜 모을 멍석을 일단 펴겠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그것입니다. www.imaeil.com으로 들어오시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팔공산으로 들어갈 배너를 달아 놓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혼과 팔공산을 자부심으로 가꿀 뜻을 가진 모든 분들이 함께 지혜 모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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