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화성행궁의 좌향을 庚坐甲向으로 놓으면, 향상으로 木局의 冠帶水가 病方을 충파함으로 신동이 태어나도 단명하고 과숙하는데,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를 보면, 행궁은 정문인 신풍루에서 정당인 봉수당까지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신풍루·좌선문·중앙문·봉수당으로 연결되고, 몇 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거치는데, 동향인 庚坐甲向을 놓은 것을 판단된다. 하지만 이곳은 水局의 墓向은 戌坐辰向을 놓아야 대부대귀하고 발복한 땅이 된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조때 최대의 역사였던 화성 성역은 1차적으로 화산의 현륭원 호위와 함께 팔달산 정상 바로 아래 성내 중심부에 건립된 행궁을 둘러싸면서 이를 수호하는 것을 중요 목적으로 설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화성 행궁이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서 정치적·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移置)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三門) 5칸, 좌변익랑(左邊翼廊) 9칸, 우변익랑(右邊翼廊) 6칸, 서변행각(西邊行閣) 5칸, 서상고(棲上庫) 10칸, 중문 5칸, 내아(內衙)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公須) 7칸, 관청 5칸, 창사(倉舍)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
한편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행궁과 관아 건물은 신축과 증축을 거듭하여 정조 14년 5월 초에는 득중정(得中亭) 9칸, 대문 1칸, 진남루(鎭南樓) 6칸, 좌익문 3칸, 좌우익랑 6칸, 남익랑 6칸, 북익랑 5칸, 강무당(講武堂) 16칸, 와호헌(臥護軒) 15.5칸, 대문 1칸, 익랑 8칸, 장용영전목고(壯勇營錢木庫) 1칸, 잡물고(雜物庫) 2칸, 미고(米庫) 5칸, 비장청(裨將廳) 15칸, 향청 19칸, 군향고대청(軍餉庫大廳) 5.5칸, 고사(庫舍) 42칸, 고마고대청(雇馬庫大廳) 4.5칸, 고사(庫舍) 6칸, 관청대청 .5칸, 고사 18칸, 어승마마구(御乘馬馬廐) 10칸, 군기대청(軍器大廳) 6칸, 군수고·미고 6칸, 군기총검고(軍器銃劍庫) 5칸, 명륜당(明倫堂) 10칸, 집사청(執事廳) 24.5칸, 관창 17칸, 방영군 관청(防營軍官廳) 12칸, 토포군관청(討捕軍官廳) 19.5칸, 별효사청(別驍士廳) 6칸, 작청(作廳) 28칸, 영선(營繕) 10칸, 교방(敎房) 6칸, 객사익랑(客舍翼廊) 4칸, 외삼문 3칸, 외담장 199칸 등 공해와 군영 건물이 새로 세워졌다.
정조 14년간 『수원신읍영건공해간수성책』에 의하면 수원 신읍치에 건립된 건물은 크게 공해와 객사, 향교 및 군영으로 구분하였다. 먼저 공해에는 장남헌(壯南軒)을 비롯하여 득중정(得中亭)·은약헌(隱若軒)·내아(內衙)·비장청(裨將廳)과 정문인 진남루(鎭南樓)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객사는 원래 그 안에 전패(殿牌)를 봉안하고 한달에 두차례씩 왕께 배례하며, 때로는 손님을 모시는 곳으로 수원 신읍치의 객사에는 벽대청과 동서헌(東西軒) 등이 있었다.
다음의 향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전사청(典祀廳)과 동·서무, 동·서재(東西齋)가 마련되어 있었다. 끝으로 편의상 군영과 기타 건물로 구분하된 건물로는 강무당을 비롯하여 군기대청·군향고대청·초관청(哨官廳)과 그밖에 영선·별고·미고·집사청 등의 건물이 들어 있다.
당시 군영 건물은 장용영이 성립된 초기였던 만큼, 정조 17년 신읍치에 장용외영이 설치되고, 정조 19년과 정조 22년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그 건물도 늘어난 지휘자와 병력수에 따라 그 수용을 위한 신·증축을 거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그 가운데는 이미 정조 13년에 건립된 부분 중 150여 칸을 활용하고, 거기에 더하여 새로 약 420여 칸을 증축한 것이었다. 즉 화성행궁은 신읍치를 처음 옮기던 정조 13년 9월에 행궁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을 신축한 이래 정조 14년 5월 정당(正堂)·내아·득중정·진남루 등이 증축되고, 정조 18년 성역이 시작되어 정조 20년 완공되기까지 계속하여 행궁과 부속관아를 대폭 증축 또는 신축하여 총 576칸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행궁은 평상시에는 외관인 수원부사(뒤에 유수)가 집무하는 지방행정의 관아로 사용하다가 왕의 원행시에는 왕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정조 13년에서 24년까지 왕의 현륭원 차배가 정례화된 화성행궁은 특히 서울 경복궁(景福宮) 다음의 부궁이라 할 정도로 다른 지방의 행궁보다 그 규모나 건축구조·기능면에서 단연 뛰어나고 웅장하게 건축된 것이 특징이다.
이 화성행궁 이외에도 서울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路呈)에도 왕의 주필하는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果川路) 때는 과천행궁·사근참행궁을 건립·이용했고, 정조 18년 시흥로(始興路)가 새로 개척됨에 따라 이 해 시흥행궁(114칸)과 안양행궁, 이듬해 안산행궁 등을 건립·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시흥·안양·안산·사근참 등 속읍(屬邑)에 건축된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고, 또 그 규모와 활용면에서도 화성행궁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성행궁 설치목적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화성행궁 배치
화성행궁의 건물 배치와 주변 경관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자료로는, 순조 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도설"과 작자미상의 규장각 소장본 "화성행궁도"가 있다.
이들 자료에 묘사된 화성행궁의 전체 그림을 보면, 행궁은 팔달산 정상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열리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객사는 원래 그 안에 전패(殿牌)를 봉안하고 한달에 두차례씩 왕께 배례하며, 때로는 손님을 모시는 곳으로 수원 신읍치의 객사에는 벽대청(大廳)과 동서헌(東西軒) 등이 있었다. 다음의 향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전사청(典祀廳)과 동·서무(東西), 동·서재(東西齋)가 마련되어 있었다.
성내 중심부를 이루는 곳에 자리잡은 행궁은 그 우측 뒷편에서 시냇물이 앞쪽으로 흘러내려, 전면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형국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그 후편의 산기슭은 물론 좌·우의 담장 내외에는 소나무·버드나무 등을 비롯한 여러 수종을 식수하여 아름답고 운치있는 조경을 이루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화성행궁은 앞쪽으로 긴 장방형이며 홍살문을 지나 정면 중앙에 안으로 약간 들어간 곳에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있고, 신풍루의 후면으로 정서(正西) 방향에 좌익문(左翊門), 그 뒤로 중양문(中陽門)과 봉수당(奉壽堂)이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풍루에서 좌익문·중양문·봉수당은 화성행궁 배치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건물들은 이 중심축의 좌우에 약간 비대칭적인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선 행궁 입구 전면에서 보면 좌측으로 신풍루보다 훨씬 앞쪽으로 네모진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 남군영(南軍營), 그리고 우측으로는 같은 형태의 북군영(北軍營)이 대칭을 이룬 가운데 마주 보게 구성되어 있다. 좌측의 남군영 뒤에는 서리청(書吏廳)·비장청(裨將廳)이 내담장을 사이로 직결되어 있고, 이보다 행랑이 옆으로 조금 길어지면서 외정리소(外整理所)가 있고, 그 뒤에 4면으로 긴 행랑으로 둘러싸이면서 정사각형에 가까운 넓은 마당을 갖춘 유여택(維與宅), 그 뒤로 복내당(福內堂)이 이어져 있다. 복내당의 우측으로는 긴 행랑을 통하여 장락당(長樂堂)이라는 건물이 있고, 이 장락당은 행궁의 정당인 봉수당과 지붕이 거의 맞닿아 있을 만큼 앞뒤로 겹쳐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다시 행궁 입구의 우측으로는 정문인 신풍루보다 앞쪽으로 불쑥 나와 네모진 담장이 쳐진 남군영과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ㄱ자집인 북군영이 자리잡았고, 그 뒤로는 마당을 사이에 둔 좌·우 두 채의 집사청(執事廳)이 있다. 그 뒤로는 10여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직사각형의 빈마당이 행각 등으로 4면이 둘러싸인 곳이 나온다. 이 마당 북쪽(우측)에는 우화관(于華館)어라는 건물이 담장쪽으로 붙어 서있고, 이 마당의 뒷편으로는 네모난 작은 연못이 파져 있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때 마당을 지나면 ㄱ자형의 낙남헌(洛南軒) 건물이 북쪽을 향하여 건립되어 있다.
이와 같이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성내 중심부를 이루는 평지에 동향(東向)을 하고 앉아서 신풍루·좌익문·중앙문·봉수당 등의 건물이 중앙의 동서방향의 중심축을 이루고, 그 좌우로 여러건물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장청 좌측의 별주와 행궁 후면 팔달산 기슭에 위치한 미로한정·내포사 등까지 포함하여, 화성행궁을 구성하는 독립된 건물들은 행랑을 제외해도 22채나 이를 만큼 매우 웅장하면서도,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운치있는 전체도를 나타내고 있다. 행궁의 주요 건물들은 몇 개의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경유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와 같이 일직선상에 문과 행랑, 다양한 기능을 가진 중요건물을 나란히 배치하는 방식은 궁궐의 정전(正殿)을 구성하는 부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화성성역의궤} 소수의 [도설 화성행궁도]에서 마치 도성의 궁궐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왕권의 위용과 품격높은 안목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화성행궁의 창건경위와 주요행사
화성성역의궤에는 행궁을 구성하는 각 중요건물에 대한 창건경위와 용도 규모를 밝혀 놓고 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또한 『정조대왕능행도(正祖大王陵幸圖)』에는 「융릉행반차도(隆陵幸班次圖)」·「성역낙성연(城役落成宴)」·「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에서부터 화성행궁을 배경으로 한 「알성도(謁聖圖)」·「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등의 그림이 사실적인 채색화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장남헌은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周甲年)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내외의 행각은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정조 13년에 건축한 정당 21칸, 행각 43칸이던 것을 정조 18년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새로이 추가하여 모두 11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다음 장락당(長樂堂)은 정조 18년 2월에 새로 지은 것으로, 봉수당과는 서쪽으로 연접해 있는 7량 13칸의 건물이며, 장락당 앞에는 10.5칸의 경룡관(景龍館)이 있어 아래는 3문이고, 위는 다락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봉수당과 장락당은 행궁 내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데, 정조의 전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이 건물의 건립과 편액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장락당은 대개 한(漢)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 것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내당인 복내당(福內堂)은 정조 13년에 새로 건립된 5량 18칸, 내외행각 29칸의 건물로서 서쪽에서 동향으로 위치해 있는데, 정조 18년에 서별당(西別堂) 외 205칸을 중건하여 67.5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별당인 유여택(維與宅)은 왕의 거둥 때 소차(小次)하는 곳으로, 정조 14년 봄에 은약헌(隱若軒)을 복내당 동행각(東行閣) 밖에다 지었는데, 정조 19년에 편액을 바꾸어 유여택이라 하였다. 이 건물 처음에 정당 5량 8칸, 부사문(附舍門) 등 20칸, 도합 28칸을 새로 지은 후 정조 20년 여름에 각도(閣道)의 50칸을 추가하여 그 규모는 78칸을 헤아렸다. 이 건물은 평상시에 수원부사의 침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낙남헌은 처음에 득중정이라 편액했던 것을 고친 건물이고, 후에 행궁을 만들면서 옛 건물인 득중정은 아예 뒷편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신건했다는 것이다. 이 낙남헌은 정조 13년 옛건물 장춘각(藏春閣) 5칸에, 정조 18년 정당 7량 14.5칸, 노래당(老來堂)의 29.5칸을 추가하여 49칸의 건물로 증축되었다.
정문인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鎭南樓)'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북군영을 누대 좌우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좌우각간(左右閣間) 21칸을 추가하여 2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화성성역의궤}는 "행궁 밖 3문의 윗층을 신풍루라 한다. 그 제도는 6칸으로 서쪽에서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유년(정조 13)에 지은 것으로 처음 이름은 지남주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漢高祖)의 발상지인 풍패(豊沛: 흔히 '豊沛之鄕'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행궁과 별도로 공해에 속한 건물로 남·북군영 행각 62칸, 외정리소 27.5칸, 비장청14.5칸, 서리청·집사청 외 83칸의 건물을 신축하니, 행궁과 부속 관아 건물은 총 576칸의 장대한 규모를 이루었던 것이다. 공해건물은 이밖에도 행궁에서 좀 떨어진 팔달산 왼쪽 기슭에 위치한 강무당행각 66칸, 무고행각(武庫行閣) 56칸, 수성고(修城庫) 22.5칸, 그리고 광교동 입구에 위치한 지소(紙所) 25칸 등이 신건 또는 중건되었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12차에 걸친 원행 때마다 단순히 왕이 잠깐 유수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정조는 왕 19년 행궁이 완공된 후 이곳 봉수당에서 자친(慈親)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성대한 진찬례를 베푼 것을 비롯하여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養老宴)과 몇 차례의 문·무과 별시, 득중에서의 어사(御射)와 배사(陪射)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신풍루에서 베푼 빈민에 대한 친임사미(親臨賜米), 그 밖에 수원부와 인접 민인들에 대한 급복(給復)·진휼(賑恤) 등 각종의 특별조치를 자주 내린 바 있었다.
행궁에서 치러진 행사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을묘년(정조 19, 1795)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현륭원을 참배하고 행궁에서 전찬례를 올린 행사일 것이다. 당시 이 행사의 내용을 글로써 상세히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 이를 책자로 편찬·간행한 것이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무엇보다 이 을묘년 회갑 행사를 위하여 정조는 10만 3천여 냥의 재원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그 자금 모두를 어머니의 회갑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의 일부를 떼어내어 제주도의 진휼곡(賑恤穀)으로 보내는 한편, 당시 새로 조성한 화성둔전을 매입하는데 충당하기도 하고, 행사 후 남은 자금을 3도(都)와 8도에 분급하여 진휼곡으로 쓰도록 하였다. 특히 정조는 원행을 위해 조성한 자금을 화성둔전에 투자하고, 이때 마련된 을묘정리곡(乙卯整理穀)을 수원에 집중시키는 등, 원행자금의 운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거점인 수원을 성장시키는데 노력하였다.
한편 화성행궁에는 재용(財用)과 고사(庫舍)를 관장하는 외정리소와 외탕고·내탕고 등을 두어 행궁의 유지·수리 등을 맡아 보았다. 화성행궁에서의 을묘년 회갑 행사는 ① 봉수당에서 거행된 성대한 진찬례, ②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회, ③ 득중정에서의 활쏘기, ④ 신풍루에서 베푼 수원 부민들에게 내린 사미(賜米)의식, ⑤ 우화관(于華館)에서의 문과 별시와 낙남헌에서 시행한 무과 별시 등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제6차 현륭원 원행 때인 정조 19년 윤2월 11일 화성에 도착한 정조는 화성 성묘(聖廟, 공자 사당)를 배알하고 새로 인출(印出)한 사서삼경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어 우화관과 낙남헌에서 문·무과 별시를 각각 시행, 유생 최지성(崔之聖) 등 5인과 무사 김관(金寬) 등 5인을 선발하였다. 이때의 모습은 그림 [낙남헌 방방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12일 혜경궁을 배행(陪行)하여 현륭원을 전배한 뒤 화성의 장대에 올라 성상 조련과 야간조련을 참관한 뒤 낙남헌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윤2월 13일 혜경궁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혜경궁의 내외빈 82명, 양로연시 수가(隧駕)노인이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78세)·우의정 채제공(蔡濟恭, 76세) 등 15명과 이들의 아들·손자 등 23명, 그리고 화성부 노인 전 오위장 최상후(崔尙厚, 84세)·전 참의 이석조(李奭祚) 등 384명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 봉수당진찬도의 그림을 보면, 건물에는 거북무늬의 발이 쳐져 있고 그 앞으로 장막이 드리워졌으며, 건물 앞으로 여러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기생들의 춤이 벌어지는 주변에 여러 대신과 무관들이 바른 자세로 둘러앉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편 [낙남헌 양노연도]에 나타난 당시 행사 모습을 보면, 건물 한 가운데 임금의 옥좌가 있고 그 좌우에 각 두 줄로 5인씩 앉아 있으며,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건물 밖 기단 위에도 두 줄로 11명이 서 있고, 기단 아래 마당에는 한 가운데에 5명씩 7줄을 이루어 사람들이 앉아 있으며, 그 좌우로 각 3열의 군사들이 도열하고 있다. 가장 뒷쪽에도 큰 북을 앞에 놓고 53명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날 양노연에 참여한 노인 중 70세 이상과 61세된 노인에게는 각각 비단 1필씩을 하사하고, 현륭원 아래에 사는 주민에게는 복호 2년을, 그리고 부성(府城) 내외민에게는 복호 1년을 각각 가급하였다. 그리고 화성성역을 담당한 우의정 채제공에게는 호피(虎皮)를, 화성유수 조심태에게는 가자(加資)를, 이유경(李儒敬)에게는 갑옷을 하사하였다.
다음날인 윤2월 14일에 정조는 신풍루에 임어하여 사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기민(饑民)에게는 죽을 나누어 주었다. 수원부 사민 539명에게는 쌀 198석 10두, 기민 4,813명에게는 쌀 169석 9두 7승, 소금 12석 12두 9승 9홉, 죽미(粥米) 9석 9두 2승, 미역 925립, 간장 1석 12두 7승 4홉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낙남헌에 임어하여 양로연을 베풀었다. 양로연에는 수가노인 홍낙성 등 15인과 화성부의 사서(士庶) 노인 전 참의 이석조 등 384인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날 저녁때에는 득중정에 임어하여 활쏘기를 하고 매화포(埋火砲)를 관람하였다.
화령전
화령전(華寧殿)은 사적 제115호로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影殿)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득중정
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낙남헌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관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집사청
집사는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서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죄익문 밖 동북 담 안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저 있다.
북군영
북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복내당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였다.
상량문은 1796년(정조 20) 11월 민종현이 지었다.
복내당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원래 복내당은 1790년(정조 14)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하였고, 1794년(정조 13)에 세웠다.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장락당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의 침전으로서 1794년(정조 18)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으며, 봉수당 남쪽에 있는데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동향으로 세워졌다.
장락당은 전한의 도읍인 장안성의 궁전이었던 장락궁에서 이름을 따 왔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
실제로 1795(정조 19) 을묘원행시에 혜경궁은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정민시가 지은 상량문에서는 '빛나는 궁궐이 처음 이루어지는 때를 당하여 다행히 태후께서 먼저 납시는 것을 보았네'. 라고 하였다.
경룡관
경룡관은 장락당의 바깥문으로도 사용한 부속 건물이다. '경룡'이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94년(정조 18)에 세워진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유여택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외정리소
정리소는 장차 1795년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내영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화성 행궁이 완성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 하였다.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도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정조 13)에 세웠는데 1796년(정조 20)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남군영
남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신풍루 좌우에 있는데 1789년(정조 13)에 처음 지었고, 1794년(정조 18)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정조 22)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 하였다.
미로한정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에 만든 정자이다. 후원 서쪽 담안에 있었는데 미로한정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1790년(정조 14)에 세워 졌는데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수원 추팔경의 하나인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황상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1789년(정조 13)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봉수당은 1997년 복원 되었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다.
중양문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좌익문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1790년 완성되었고 편액은 정동준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되어 있다.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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